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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음악#s-2.1| Part 1
비상]]
서도밴드
2023. 12. 15.[[고려 거란 전쟁/음악#s-2.2| Part 2
폭풍]]
김장훈
2023. 12. 29.[[고려 거란 전쟁/음악#s-2.3| Part 3
적동
(붉은겨울)]]
안예은
2024. 01. 18.[[고려 거란 전쟁/음악#s-2.4| Part 4
그 겨울에
나는]]
IYAGI (이야기)
2024. 02. 03.그 외 오리지널 스코어는 음악 문서 참고.
1. 개요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2. 총론
사건과 인물을 제외한 시대 고증은 대체로 문종 이후 ~ 원 간섭기 이전까지 약 200여 년에 걸친 시대상을 폭넓게 재현했다. 이는 남아있는 고려 시대 문물이 한정적이라 조선 시대와 달리 시기별로 세세하게 추적하고 재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복 고증은 대체로 인종 즉위 시점의 문물을 관찰한 고려도경이나 의종 때의 공복 규정을 따르고 있으며 이는 드라마 배경보다 약 100 ~ 150년 이후의 모습이다. 이렇듯 시대 재현에 있어 현대와 가깝고 기록이 많은 조선 시대에 비해 역체감이 크지만 이전 고려 시대 배경 드라마들에 비해서는 더 많은 기록과 이미지가 반영되었다.여담으로 임용한 박사가 KBS의 장혁진 기자와 함께 본작에 관하여 일부 역사 탐구를 다룬 영상이 있다.
2.1. 외교
- 작중 강감찬이 거란 황제와 고려 군주의 조공책봉관계( 조공)를 언급하며 '고려 국왕'이라 칭하는 부분 또한 등장하는데 여기서 강감찬은 강조의 정변을 강하게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 중대사께서 자행하신 일은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은 고려 국왕을 해친 일이옵니다. 거란이 알면 분명히 이걸 구실로 삼아 전쟁을 일으킬 것이옵니다. 아마도 고려 국왕을 해친 역신을 처단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지요." 실제로 고려 전기에 '중국 왕조'와의 조공책봉관계를 보면 '외왕' 방면에서는 국왕(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은 시종일관 제후(국)였다. 정확히 당대 고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外臣제후(국)였으며 당시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의 대외 관계는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관계 속에서 고려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황제의 신하(제후)로 규정되었다.[1]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강감찬이 직접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은 고려 국왕을 강조가 해친 일로 거란이 이걸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 강감찬이 이제 막 즉위한 현종에게 당대의 조공 책봉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현종이 “나는 천자요. 헌데 왜 거란의 황제에게 책봉을 받아야 하는 것이오?”라며 “그럼 짐은 거란 황제의 신하인 것이오?”라고 묻자, 강감찬은 “그들의 체면을 살려주고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며, 그저 외교적인 관계일 뿐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이는 11세기 거란, 송나라, 고려, 서하 등이 참여하는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가 대외 방면에서 제후국[外臣]으로서 거란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 외왕내제’에 의거하여 자국 내에서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다는 통설을 반영한 것이다.[2] 이는 현종이 천자이기 때문에 원구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원정왕후, 고려가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나라'라고 직접 언급한 강감찬 등, 등장인물의 언설을 통해 꾸준히 지시되고 있다.[3]
- 작중 소배압과 거란 황제 야율융서가 고려는 거란에 충성을 맹세했으면서 송나라에 거란을 같이 치자고 요구했다고 언급한다. 11~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상 조공책봉관계에서 조공국은 중세 유럽의 최우선 충성 맹세처럼 하나의 나라만을 사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어서 많은 나라들이 복수의 국가에 조공을 바쳤다. 그래서 고려는 요나라의 1차 침공 이후에도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소배압 또한 고려와 송나라의 협력을 문제 삼을 뿐 송나라와의 관계 유지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4]
- 작품 분량상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의 이유들을 상세하게 짚고 넘어가지는 않아서 조금 아쉬운 편인데, 거란이 굳이 고려를 여러 번 찍어 누르려고 한 이유는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다만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들은 여러 인물들의 대사를 통하여 언급되므로 본작에서도 단순히 약탈을 위한 것으로만 치부한다고 볼 수 없다. 가장 먼저 야율융서가 승천태후와 소배압 등 주요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사적 업적을 세운 승천태후를 기리기 위하여 고려를 정복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을 하는데, 소배압은 고려는 믿기 어려운 나라라고 주장하였고 송나라와 야합하여 배후를 칠 수도 있으니 나라의 안정을 위한 예방전쟁을 목적으로 고려 정복을 언급한다. 강조와 양규, 강감찬 등이 서로 나눈 대화에서 목종의 폐위는 어차피 핑계나 다름없고 거란은 원래 고려를 정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강감찬이 거란군의 전쟁 목적이 약탈을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최항과 유진, 채충순은 야율융서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인 것이므로 친조를 하면 돌아갈 것이라고 현종에게 주장한다. 즉, 고려정벌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는 점은 작중 내내 여러 인물들의 대사를 통하여 언급된다고 볼 수 있다.
- 먼저, 980년부터 국제 정세가 급변하게 되고 이에 고려와 거란 양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거란은 군사력 증진과 전쟁을 통해 역량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요동 방면으로의 정복을 서둘렀고, 고려는 전통의 조공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내실을 기하는 정책을 취했다.[5]
- 거란은 986년 송 태종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여러 개로 흩어진 여진 부족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이후 993년, 요나라는 고려를 침공하여 복속시키려 했고 이것이 제1차 여요전쟁의 시작이었다. 고려의 완강한 저항에 공세가 한풀 꺾인 요와 요의 대군이 부담스러웠던 고려는 994년에 고려가 요나라에 신종하고 그 대가로 요나라가 고려의 강동 6주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강화 협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화친 조약은 양국 모두에게 잠시 동안의 휴전 협정으로 남게 되었다. 고려는 만부교 사건 때부터 적대관계였고 북부 지역에는 요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은 발해 출신의 유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요나라 왕조에 완전하게 신종(臣從)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려는 요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기회를 보아 송과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회복하여 거란을 견제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거란은 1010년 고려에서 벌어진 목종 시해사건의 문죄(問罪)를 구실로 제2차 여요전쟁을 일으켜서 고려를 완전히 종속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통주 전투에서 강조의 30만 고려 주력군을 깨고 개경까지 불살랐음에도 결국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고, 1019년에 다시 귀주를 침공했지만, 요나라는 끝내 고려의 완전한 종속을 이루어내지 못했다.[6]
- 한편 제2차 여요전쟁은 거란의 내부 사정도 작용하였는데, 요 왕조는 초창기부터 황위 계승 분쟁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졌으며 드라마 시점에서 왕위계승 투쟁 없이 권력을 승계한 유일한 요나라의 군주는 성종뿐이었다. 모후의 활약 덕분에 황권을 유지한 성종은 승천태후가 승하하고 난 뒤부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권위의 공백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성종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권위를 쌓기 위한 첫 번째 무대로 고려를 선택했으며, 무리한 원정이라는 비판을 묵살하면서까지 친정을 감행했다. 이는 원작 소설에서도 잘 설명된 부분이다. 그렇게 황제가 친정한 제2차 여요 전쟁에서 거란은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이끌던 30만 고려군을 격파하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성종은 조정과 군부로부터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거란의 2차 침공은 성종의 권위가 확립되는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요나라의 역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7]
2.2. 전쟁
- 1회에서 김숙흥이 거란 척후병을 추격할 때 쇠뇌를 마상에서 사용한 장면이 지적되기도 했다. 당대의 군용 쇠뇌는 엄청난 장력 때문에 장전하려면 발까지 사용해야 해서 마상에서 절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인물만 그렇게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그런 부대가 있는 것처럼 묘사된 것도 아니며, 당시 대부분의 군인들은 무기를 각자 맞춤형으로 제작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되는 부분은 아니다.
- 편견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쇠뇌 기병은 이미 중국 전국시대~ 한나라 시기부터 사용된 유서 깊은 병종이며, 송나라에서는 마갑을 씌운 쇠뇌 중갑 기병( 카타프락트), # 중세 유럽에도 석궁 기병이 있었다. # 따라서 마상에서 석궁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며, 장전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운용이 충분히 가능했다.
-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시대(무덤주인의 출생시기를 330년 경으로 추정)에 만들어진 덕흥리 고분 앞방 동벽에 '막대에 달린 활을 든 기병의 그림'과 함께 '계헌령이 쇠뇌를 들어 올렸다(薊縣令捉軒弩)'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고구려 시대에 이미 쇠뇌 기병을 운용한 듯하다는 의견이 있다.
- 화살통인 '전통(箭筒)'이 전통(傳統)적인 첩개, 동개가 아닌 등에 매다는 물건으로 나온다. 현대의 국궁 동호인들마저 장비를 갖추면 동개, 아니면 임시방편으로 궁대(활띠)를 허리춤에 묶어두고 전대처럼 쓰고 있는 실정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상하리만치 한국 영상물 제작자들이 편집적인 것.[8]
- 다만 5회에서 양규가 화살을 꽂을 때 전통을 등에 매달지 않고 허리춤에 매달아 허리 뒤쪽으로 돌려 담는 장면을 보여주고 깍지를 끼거나, 활시위를 놓을 때 오른손을 튕기는 장면도 나와서 기존에 신경쓰지 않던 부분을 살렸음을 알 수 있다.
- 지휘관 양규가 일반 화살과 함께 일정 비율로 효시를 챙기는 것도 세심한 묘사다. 효시는 화살에 일종의 호루라기를 붙여서 쏘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나게 만든 것으로, 지휘관이 공격 지시를 내리거나 부대의 목표물을 정하는 중요한 물건이며 한국사에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장수인 이성계가 애용한 화살로도 유명하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에게 효시는 필수지만 기존 사극에서는 태조 왕건에서만 제한적으로 등장했을 뿐,[9] 나머지 사극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았다. 효시를 몇 번째에 꽂는지 확인하는 것 역시 디테일한 묘사이다.
- 거란군들의 경우는 화살통인 전통을 등에 매달지 않고 허리춤에 매달아서 쓰는 경우를 꽤 볼 수 있다. 단, 궁기병들이 화살통은 허리춤에 매달지만 활통은 등에 매달고 있는 것을 꽤 볼 수 있다.
- 5회 공성전에 나오는 투석기는 동아시아에서 활용하던 인력식 투석기(망고넬)가 아니라 무게추와 인력 밧줄 꾸러미를 함께 사용하는 형태의 투석기로서 인력식에서 무게추식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탄생한 것이다.[10] 무게추식 투석기는 제작 기간이 긴 대신에 인력을 적게 쓸 수 있고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안정적으로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11]
- 거란군은 노문진 같은 한인 장군과 한인 기술자들로부터 공성술을 습득했기 때문에 중국의 인력식 투석기를 사용하는 게 적절하고, 실제로 원작 소설에서도 거란군이 사용하는 것은 인력식 투석기지만, 무기의 운용과 관련된 묘사를 살리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몽골군의 전투 방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12]
- 흥화진의 고려군 또한 투석기로 맹화유를 날려 맞대응하는 장면이 있으나 실제 역사 고증에 맞게 하려면 투석기가 아닌 팔우노(八牛弩)라는 노포를 운용해야 했으며, 맹화유는 흥화진의 성문을 뚫으려는 충차(衝車)를 불태울 때 사용해야 한다. 다만 원작 소설에서 고려군이 수성전에 유리한 '추의 원리'를 이용한 투석기를 사용한다고 소개되었기에 드라마도 이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 기존 KBS 대하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도검 패용은 가죽띠를 사용하는 방식 등을 재현하고 있지만, 패용 고리는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손에 쥐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본작에서는 기존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많이 개선했기에 후술할 건축 재현과 마찬가지로 아쉬운 부분이다.[13] 허리띠에 연결한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아 촬영 편의나 제작비 문제 때문에 혼용된 듯 하다.
- 각궁 소품이 실제 자연 재료로 만든 전통 각궁이 아닌 현대의 개량궁이다. 전통 각궁은 장인들이 재료를 준비하고 수제작해야 하는 만큼 비용이 개량궁보다 2 ~ 3배 높은 가격, 긴 제작 기간, 아교가 습기에 취약한 점 등 구매와 관리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시위를 걸지 않은 상태의 활도 종종 묘사하는데,[14] 전통 각궁과 개량궁은 시위를 걸지 않았을 때의 형태가 서로 다르니 궁금하다면 개량궁 항목을 참고하는 게 좋다.
- 고려군의 결전병기로 검차가 계속 강조된다. 다만 7회에선 검차를 띄워주기 위해서 마치 거란군이 검차 개념을 모르는 듯이 연출되었는데,[15] 검차는 무경칠서의 육도삼략[16]에도 나오는 교과서적인 대기병 무기이므로 거란군이 그 개념을 모를 수가 없다.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의 인터뷰에서도 "검차는 고려만의 무기는 아니고 모든 농경민들이 유목민을 상대할 때 쓰는 수레로 만든 무기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17] 고려군이 검차를 '잘' 써서 놀라는 정도로 했으면 고려도 띄워주고 고증에도 더 맞았을 것이다.[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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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 장면에서 고려군 보병이나 거란군 보병이나
로마군의
테스투도 같은
방진을 짜고 전투에 돌입하는데 사실 이건 서양식 보병 전술이고 동양의 보병 전술은 우리가 아는 이런 밀접한 보병 방진과는 많이 달랐다. 서양의 보병들이 대체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빽빽한 보병진을 짰다면, 동양의 보병들은 대열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다양한 병종들이 삼삼오오 모인 상태의 유기적인 협력을 더 강조하는 전술을 썼던 것이다. 조선의
오위진법이나 중국의
육화진법,
원앙진 같은 사례를 보면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몇명이 한 대오를 구성해 하나의 진을 결성하고 이 진 내부의 개인 간격은 상당히 밀집해 있지만 각 진 사이의 거리는 좀 많이 이격되어 떨어져 있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
이런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양 문화권의 전쟁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우선 서양의 경우엔 대부분 군대의 시초가 지중해 등 상업이 발달한 지역 도시 국가들의 시민군인 경우가 많아서 부유한 시민들이 중무장을 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고 전장에서 시민들간의 단결을 중시하며 궁시 등 투사무기를 상대적으로 동양에 비하면 경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경우엔 중무장한 시민군이 좋은 방어구를 갖추고 보병들 간에도 방패 같은 방호구를 들고 밀집하여 대열에 대해 방호를 충실히 하면 투사병기에 대한 방호 역시 충분하리라 여겼으며 실제로도 꽤 유용하게 먹혀 들어갔다. 게다가 동양에 비하면 대규모 유목민들의 침략도 많이 겪지 못한 편이라 문명의 발전 단계에서 보병 방진이 발달하는 방향으로 군대가 진화했던 것이다. 이런 보병 방진은 보병간의 싸움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지만 파르티아나 훈족 같은 유목 전통이 살아있는 적을 상대로는 궁기병, 경기병 전술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곤 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상업보단 농업을 중시한 동양의 경우엔 대부분의 보병들이 병농일치의 농민병인 경우가 많아 중보병보다 경보병이 훨씬 많았으며, 이런 상비 정예 중보병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따라서 중무장 보병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데다가, 서양과 달리 발전된 투사병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대규모 유목 민족들의 발호가 잦아 궁시류 등의 투사병기 사용전법도 매우 발전해 있었다. 이미 전국시대, 전한 무렵에 강력한 힘을 가진 쇠뇌의 형태가 완성되어 보병들에게 많이 들려주고 있는 상황이었고 존경받는 춘추시대의 성인인 공자조차 궁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동양 문화권에서는 투사병기를 막을 방어구가 빈약한 경보병 중심의 군대가 밀집했다가는 유목민들, 혹은 발전된 투사병기를 상대로 좁은 지역에서 더 큰 피해를 입을수 있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보병간의 간격을 느슨하게 했던 것이다.[20] 이런 발전 양상에 따라, 이왕 발전된 투사병기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엄폐물을 설치하고 상대적으로 넓게 진영을 잡은 투사병기 병과로 맞기 전에 먼저 기병에게 원거리에서 크게 피해를 입힌다는 전술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유목민들이나 이런 발전된 투사병기를 사용하는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보병 운용이 유연하고 기동성을 중시할 필요가 있었고 이런 기동력이 좋은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전장에서의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보병 병종의 다양성과 유연함이 강조되었다. 이 때문에 단단한 보병 방진들끼리 맞붙은 회전이 잦았던 서양과 달리 동양의 경우엔 기동성을 중시한 강습, 기습, 돌격, 매복 등의 전투가 회전보다 훨씬 많았기에 보병 방진도 이런식의 전황에 맞추어 이같이 유연성을 가지도록 진화하였던 것이다.[21]
그럼 본작에서도 보이는 식으로 보병이 대기병 밀집대열을 짜지 않았다면 서양의 파이크병 전술 같은 방식도 없었을테니 동양 보병이 기병에 어떻게 대응했느냐 질문할 수도 있을텐데, 앞서 설명했듯이 동양의 기본적인 대기병 전술은 우선 먼저 검차나 전투 마차 같은 이동식 바리케이트, 각종 차폐물을 설치하거나 기병이 접근하기 힘든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이에 기대거나 참호를 파서 거기에 엄폐한 후 강력한 투사병기로 대응하는 식의 방책을 썼으며, 무엇보다 기병은 기병으로 카운터를 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22] 조선이 임란 이후 대기병전이 약해진 이유도 당대 임금인 광해군의 말목장 재건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조선의 대규모 군마 사육 전통, 유목 기병을 카운터 칠 기병 전통이 사실상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
이런 서양식 방진의 재현은 우선 고증에 철저한 서구 사극의 영향을 동양 사극 제작진들이 받은 바도 있고, 역덕후들이 방진을 짜지 않고 싸우는 사극의 막싸움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동양식 보병 전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극 제작진을 무작정 비난하고 제작진들이 이를 피드백하면서 생긴 영향이기도 하다.
2.3. 의복
- 기존 고려시대 사극과 마찬가지로 고려 임금이 담황색 또는 주황색 단령을 착용한다. 즉위식과 원구제 개최 시 입는 흑색의 12장(또는 9장) 면복을 제외하고 알려진 고려 임금의 복식에는 담황색의 상포(緗袍),[23] 산뽕나무 열매로 물들인 적황색의 자황포(柘黃袍)·자황포(赭黃袍),[24] 치자나무 열매로 물들인 치황색의 치황의(梔黃衣)[25] 등 크게 3가지 색상의 황포[26][27]와 강사포[28]라는 홍포가 있었다. 황색 계열 중 상포는 상복(常服)으로 평상시 집무복이고, 나머지는 예복으로 건국 초의 자황포(柘黃袍)는 후대의 자황포(赭黃袍)와 사실상 같고,[29] 자황포(赭黃袍)는 조정에서 백관들과 마주할 때, 연말연시의 대조회 하례, 팔관회, 연등회 등 큰 행사에서, 치황의는 연등소회 같은 작은 행사에서, 홍색 계열인 강사포[30]도 대체로 월별 정기 조회나 그에 준하는 행사 때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31]
- 이처럼 임금이 입는 옷이 여러 개다 보니 목종은 적황색, 현종은 담황색으로 다르게 묘사할 수 있었으나, 엄밀히 따지면 자황포와 상포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의 의복은 고증과 상관 없이 단순히 색깔만 다른 것이다.[32] 각 임금의 상징색은 전작인 < 천추태후>에서 경종은 주황색, 성종은 노란색, 목종은 주황색, 현종은 노란색으로 번갈아가며 부여한 내부 설정을 계승했다.[33] 다만 노란색은 천추태후에서 샛노랗게 묘사된 것과 달리, 고려도경 원문에서 '상( 緗)'이 엷은 노란색을 가리키는 점을 감안하여 전작인 < 정도전>, < 태종 이방원>에서부터 명도와 채도가 상당히 낮아졌다.[34][35]
- 한편 고려도경에는 '고려왕은 휴식을 취할 때 검은 두건에 하얀 옷을 입어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고 되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완전한 평복처럼 묘사하지는 않고 흰 용포로 대체하였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복장 중 홍색 계열인 강사포는 명백하게 용포와 단령이 아니며, 나머지 황색 계열도 전부 용포나 단령 계통의 옷인지는 불명이다. 드라마에서는 집무복은 황포, 편복은 자유 형식의 외출복과 침전에서 쓰는 백포로 구성했다.
-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임금이 오대십국시대 복두의 일종인 절상건을 착용한다. 보통 고려도경에서 왕의 복장으로 상포에 쓴다는 오사고모(烏紗高帽)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 시각에서의 절상건이라고 본다.[36] 그러나 시대에 따라 오사고모라고 불리는 모자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데다[37] 뿔이 위로 뻗는 경우는 보통 절각향상처럼 구체적으로 방향을 지시하는 말이 있고, 고려도경에서는 왕이 관료나 백성 앞에 나설 때는 복두를 더했다고 해서 고모(高帽)와 복두를 별개의 모자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분명하지는 않다. 고려도경에는 이 외에도 금화고모(대모)처럼 높은 모자를 가리키는 말이 나오는데, 서긍은 이러한 고모들을 변형모의 풍속이 이어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고려도경 안에서의 맥락만 놓고 보자면 오사고모 역시 금화대모와 비슷한 형태일 것으로 접근하는 것이 선행될 필요가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오사고모를 명나라의 오사절상건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각진 모체의 절각향상건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38] 금실 테두리 장식 역시 기본적으로는 창작이다.[39] 한국 사극에 나오는 절상건의 디자인은 뿔이 U자로 휘어진 국각(곡각)복두 형식을 따르면서도 위로 쭉 뻗어있는 조천복두의 형식 또한 따르고 있는 후당의 이존욱 초상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송나라가 고려 광종 연간에 세워진 것과 문화 전파 속도의 시차를 고려하면 부적절한 묘사는 아니지만 송나라 황제나 고려 말 공민왕 어진의 복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로는 일반 신하들처럼 검은색 단색의 전각복두였을 가능성이 높다.
- 현종이 의례에서 천자국의 복제인 12류 면류관을 착용하는데, 각 류에 달린 12개 구슬이 모두 백색으로 나오지만, 원래는 위에서부터 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붉은색-백색 순으로 내려오도록 구슬 색을 배치해야 한다. 극 중 묘사처럼 고려 전기의 군주가 12류관 또는 9류관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사에 의하면 문종 19년에 거란 황제가 고려 국왕에게 제후국 복제인 9류관 및 9장복 등을 사여하였기에 최소한 11세기 후반부터는 분명히 9류관을 썼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종 20년에 금 황제도 9류관과 9장복 등을 보냈다고 한다.[40] 다만 면류관복 자체는 신라 때부터 있던 것이며, 고려가 특정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예복은 평상시에 내부적으로 쓰기 보다는 해당 국가와의 외교 의례에서 활용하는 일이 많았기에 이것만으로 전래 시점이나 실제 사용 여부를 가르기 어렵다.
-
관료의
복두 재현은 원작 작가 길승수의
'고려거란전쟁' 역사책의 설명을 반영했다. 문관은 원래 고려 사극에서 흔히 보던 뿔이 일자로 뻗은 전각복두를 쓰고, 중앙의 무관은 뿔이 위로 꺾인 절각복두를 쓴다고 한다.[41]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려 복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고려도경에 나타나는 고려 군인들의 모자의 종류는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고려도경에서 상절각복두 또는 상절복두라고 지칭하는 것은 근위대 중에서도 궁궐 숙위병인 공학군이 착용하던 것이며, 그보다 높거나 낮은 지위의 중앙의 군인들 중 복두를 착용하는 경우는 대개 전각복두이거나 그 변형이다.[42] 게다가 이 절각복두라는 개념 자체가 뿔이 모자 바로 뒷 부분에서 꺾이는 형태인지, 아니면 드라마의 묘사처럼 양쪽 뿔 끄트머리가 구부러진 형태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단정짓기 어렵다.[43] 후자의 경우 중국에서는 대체로 전각복두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로 인식되며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원작자의 설명이 기계적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문관인 전중감, 공부시랑 등을 역임한 이주정이 절각복두를 쓴다. 또 3~4회에 걸쳐 묘사된 현종의 즉위식에서, 원작의 설명대로라면 강조는 중추사 우상시, 이현운은 이부시랑으로서 각각 도순검사와 도순검부사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이 둘의 복두는 같은 형태여야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강조는 절각복두를, 이현운은 전각복두를 쓴다. 강조는 중앙의 문관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 돌아와서는 절각복두를 착용할 이유가 없다. 만약 문무 여부를 당시의 직임에 따라 판단하여 병용한다 치면 이땐 이현운이 절각복두를 써야 한다. 4회에서 이현운이 전각복두를 쓰고 다니며 문관 놈들 운운한다거나, 동급의 문관직인 병부시랑을 맡은 장연우가 절각복두를 착용하기도 하는 것을 볼 때, 개별 인물마다 경우에 따라 다른 복두를 쓰고 나올 때는 원작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기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한편 고려시대의 회화 자료와 달리 복두 뿔 너비가 삼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과도하게 넓어지거나, 뿔이 부착된 위치가 너무 높거나 하는 기존 소품의 한계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 관복에 어대(魚袋)를 착용한다. 어대는 출입증을 담은 주머니 겸 장식으로 6품 이상 문관의 공복에 착용한다. 허리띠에 끈으로 드리운 주머니가 어대이다. 이는 이전의 고려시대 사극에서는 재현하지 않던 것이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주요 배역들만 착용하는가 하면 주요 배역이라는 이유로 어대 착용 규정이 없는 7품 이하 녹포에도 착용하는 오류가 나오기도 했다. 또 주머니의 색깔을 구분하는 기준이나 근거는 없다.
- 행렬에 등장하는 고려 친위군 복식은 고려도경에 묘사된 신호좌우친위군의 금화대모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 고려의 왕사와 국사가 어깨에 걸친 붉은 가사는 국보 제218호 '아미타삼존도' 불화를 참고하여 재현하였다.
- 고려시대의 여인들이 외출할 때 착용했던 쓰개인 '몽수(蒙首)'가 재현되었다.
-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갑옷의 기본적인 큰 틀은 여말선초 찰갑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44] 그렇기에 여말선초 찰갑에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팔부중상 부조, 몽골의 1차 일본 침공 당시 고려군을 묘사한 회화 같이 탱화나 불탑 부조, 몽고습래회사 등에서 고려군이 착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봉시식이 달린 송나라식 투구를 조합한 것은 현재 시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45]
- 원래 거란 황제들은 한화가 진행되어 중국식 복제를 병행하였으나 본 작품에서는 유목민 복식만을 하고 있다. 고려 국왕과의 구분과 유목민이라는 개성을 살리기 위함과 동시에 거란 내에서도 거란족과 한족을 구분하는 장치이다.[46] 한기를 위시한 한족 관료들은 단령에 복두를 쓰고 나온다.
- 호족과 귀족의 비단 옷을 비롯한 복식이 매우 화려하다. 조선시대에는 검소한 것이 양반의 덕목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소위 귀족문화라고 사치를 부리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 더욱이 시대적 배경이 고려초, 아직 지방 호족이나 귀족들이 자기 세력 내에서 황제에게 으름장을 내고 화려한 의복을 과시하던 때다.
2.4. 건축
- 광화문을 배경으로 한 장면은 기존 조선시대 배경의 문경새재 세트장[47]을 활용하여 재현이 형편없지만, 그나마 이외의 장면은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물 중 하나인 봉정사 극락전의 화반과 공포를 그대로 차용하여 어느 정도 재현에 신경쓴 MBC 신돈 고려 건축 세트를 활용한 점이 다행이다.
-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오류가 왕과 신하가 '정전(政殿)'에 모여 정사를 논하는 것인데, 실제로 고려와 조선 때 궁궐의 정전은 외국 사신이 오거나 특별한 국가 행사 시에만 사용하던 공간이었다.[48] 고려시대 개경 본궐(만월대)의 경우, 기록을 보면 외국 사신 접대 및 각종 불교 행사를 진행한 공간으로 적혀있다. 일반적으로 정사를 논하고 왕이 대부분 있던 공간은 '편전(便殿)'이다.
- 정전 세트의 경우 '보'를 사용하는 대량식 구조에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이의 공간이다. 내부에 기둥이 더 있고 보로 연결되는 구조여야 하는데, 실제로 지붕부를 실내 세트장에서 구현할 필요가 없다 보니 이를 생략하며 깊이는 남북 방향으로 깊은데 비해 내부 기둥을 지나치게 많이 줄여서 구조적으로 말이 안되는 넓은 공간을 만들게 된 것 같다.[49]
고려왕궁 만월대의 초입인 신봉문. 경복궁의 광화문격에 해당한다. |
- 침전의 경우 바닥에는 카페트를 깔고, 당가를 응용한 침대를 구성했는데 재현에 완전 맞지는 않지만 당시 고려 가옥은 입식구조였기에 아주 틀리지는 않다. 극 중 정전의 바닥을 보면 나무널로 마루를 구성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고려나 조선 모두 정전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나무널로 마루를 깐 것은 반영 오류.
- 단청의 경우 송나라 영조법식의 것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1972년 서울 진관사에서 신축된 건축물인 '나가원'의 단청과 거의 같다. 나가원의 경우, 단청 머리초가 송나라 영조법식에 나오는 단청 머리초와 흡사하지만 자세한 구성은 다르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재현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재현에 맞으려면 공포부를 참조한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고려 단청을 참조하고, 송나라 및 금나라, 요나라의 단청을 참조하는 것이 맞다.
- 대량원군(현종)이 승려로 출가해서 기거하던 신혈사는 당시엔 주지인 진관스님이 혼자 생활하던 작은 암자였다고 하나, 작 중에선 이미 승려와 전각이 많은 큰 사찰로 등장한다. 사서에는 현종이 출가할 '당시'의 신혈사가 진관이 머무르는 작은 암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목종이 대량원군을 직접 출가시켰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어서 목종이 직접 진관사에 지원을 해주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는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진관사의 중창이 현종 즉위 이후에 이뤄졌다는 사서의 기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진관사의 큰 규모는 제작진의 창작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 본작을 비롯한 여러 사극에서 재현되지 않는 부분인데, 고려의 성벽 위에는 투사병기나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회랑 건축물인 '성랑'이 존재했다. 성벽에 나무 기둥이 꽂혀 있고 그 위에 지붕이 올라가는 것이다. # 고려시대 기록을 잘 살펴보면 성벽을 개축하거나 쌓을 때 수백 칸, 수천 칸을 쌓았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칸'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한다. 이렇게 성벽 위에 올라갔던 회랑은 '성랑', '행랑', '궁가', '나각', '낭옥'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후기까지도 등장한다. 이는 기둥을 성벽 안쪽으로 박아 넣어서 올리는 형태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던 성랑은 임란 이후 점점 사라졌는데 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 나무 기둥에 물을 묻히는 것 정도로는 화공을 막을 수 없게 되었고, 점점 강력해지는 화기에 대한 방호력 문제 때문에 더는 필요 없어진 게 결정적인 듯하다. 그럼에도 성랑은 좀 퇴락하긴 했어도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는데, 이후 조선은 벽돌성을 만들어보다가 익힌 기술력으로 벽돌 여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면 대규모의 성랑은 그대로 사라지고 성벽 위의 경비 초소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2.5. 문화
- 궁궐 연회에서 동화 청자인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와 동화 청자 술잔을 사용하는데, 동화 청자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출현한 것이라 드라마의 배경인 11세기 초기에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이는 연출이 단조로워지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동화 청자도 연대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고려 시대의 유물이기에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 강감찬과 소배압이 마주 앉아 문답을 주고 받을 때에 흑유 자기를 쓴다. 도자기하면 백자나 청자만을 떠올리는 일이 많지만, 철 함유량이 높은 유약을 쓴 흑유(黑釉) 자기도 꽤 제작했다. 송대에는 정복 왕조와의 교류가 많았던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오대와 송의 도자기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요 왕조에서도 흑유 자기를 제작했다. 따라서 소배압이 강감찬에게 흑유 잔을 내어주고 흑유 주전자로 술을 따라주는 것은 적절한 시대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원대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청화 백자를 장식품으로 배치한 것은 재현성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송 · 요 양국에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현성 측면에서는 순백자를 배치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 1회 흥화진에 나오는 쌍계 머리를 한 아동들 역시 당대의 생활상을 반영한 모습이다.
- 양규의 아들 양대춘이 두건 뒤로 머리를 빼서 늘어트린 모습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미혼 남성을 묘사한 모습에서 가져왔다.
- 등장인물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지 않을 때 종종 상투를 그대로 또는 가죽띠로만 두르고 드러낸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당시에는 상투를 남에게 드러내는 일을 수치스러워 했기 때문에 적절한 묘사는 아니다. 특히 양규나 최사위가 아무런 쓰개 없이 현종 앞에 서는 장면은 예절에 어긋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현운은 갑옷을 입고도 문라건을 쓰고 나온 것과 비교된다.[50]
- 거란 변발은 기존 한국 사극의 레게 머리 비슷한 애매한 상투에서 벗어나 거란 특유의 정수리가 휑한 변발을 보여준다.
- 강감찬과 소배압이 만나서 식사를 할 때, 소배압이 고기를 먹자 강감찬은 기겁을 했다. 실제로 요나라는 불교 신자가 많되 동시에 유목국가이기도 했었기에 고기를 즐겨먹는 편이었고, 고려는 채식을 더 많이 했었던 데다가 고기를 아예 안 먹은 건 아니지만 제한적으로 섭취했다.
-
사실 작중 등장하는 병력의 숫자들은 고려나 거란이나 대부분
호왈로 쳐서 보는게 좋다.[51] 예컨데 연의의 백만대군 물량으로 유명한
중국 삼국시대는 사실 정사로 따지면 중국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 병력 숫자가 운용된 시기임에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적군을 쳐부순 공식 문서에는 하나를 열로 계산하는 구습이 있었으나, 국연은 싸움터에서 베어 노획한 적군의 목을 상주할 때, 그 실제적인 숫자와 똑같게 했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국연이 말했다.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병력에 '호왈 몇십만' 운운하는 건 자릿수에 0 하나 더 붙은 거라고 생각하는게 거진 진담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52] 실제로 수십만 대군을 한번에 보급할 수 있게 된 것은 근대의 일로, 불과 200년전 나폴레옹 전쟁 때만 해도 보급선이 형편없어서 수십만 대군을 정말로 운영했다가는 러시아 원정처럼 병력만 잔뜩 낭비하는 참사가 나기 쉬웠다. 제대로 된 철도나 도로가 없었던 시절에는 수만 명의 보급만으로도 실상 벅찬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사실 사료상이나 드라마상으로 거란이 입은 손해나 고려가 입은 손해나 작중 양국의 국력으로는 숫자상으로만 보면 감당 못할 숫자인데도, 나중에 보면 몇년만에 또 다시 양국간 수만~수십만 대군을 동원하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53] 이걸 바로 동아시아 혹은 고대 군대 특유의 숫자 과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근대 시기에 동아시아 군대끼리 맞붙으면 수십만명 씩 싸우는데 외부의 관측자인 서양인들이 관측하니까 갑자기 장부상 호왈 병력의 1/10 밖에 안 되더란 얘기도 많다. 즉 본작에서 칭하는 병력의 숫자는 실제로는 원래 병력에서 최대 1/10까지는 가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동아시아 사료의 병력 기록 중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은 한자릿수까지 정확히 표기한 기록이다. 이는 당시 실제 행정 문서를 기반으로 작성된 사료일 가능성이 높다.[54] 여진 정벌 기사를 보면 동원 수나 사상자 수가 거란전쟁 기사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다.
2.6. 언어
-
거란(
요나라)을 두고 '대제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제국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부터 사용된 번역-혼성어다(심지어 1897년에 성립한
대한제국도 공식명칭은 대한국이었다). 당대에는 그냥 '대국' 혹은 '천조'를 사용했다. 대국에 사대할 경우 '상국(上國)'이라고 칭했다.[55] 고려의 경우, 대거란 문서에서 상국이나 '황조(皇朝)'라고 지칭하고
송나라 또한 상국이라고 했는데, 내부적으로는 거란과 송 모두 '북요(北遼)'나 "북조(北朝)' 및 '서송(西宋)'이나 '서국(西國)'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방위 사용은 이들 나라들이 대등한 입장이었음을 말해주는 측면이 있다.[56] 이는 고려 전기에는 대국과의 관계 성립과 존속을 전제하는 규약으로서
군신 의례를 이행한 것이기 때문에, 원 복속 이전까지 황제(천자)의 신하라는 위상이 고려 국내에서는 관철되지 못한 데서 연원한다.[57] 5회에서 고려 신료가 거란 사신에게 ‘상국’에 대한 신의를 내세우는 부분 등에서는 당대상이 재현되고 있다. 9-10화에서도 거란 성종이 자신을 “대거란 제국의 황제”라고 칭하는데, 이 또한 고증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대거란국의 황제’ 정도로 자칭했을 것이다.
-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측의 기록[58][59]을 토대로 극 중 고려의 군주는 '왕'이나 '황제'라는 말보다 공식 호칭인 '성상' 또는 '성상 폐하'로 더 자주 불린다.[60] 아울러, 선대 군주에게는 일관되게 대왕호를 붙여 '태조대왕', '성종대왕' 식으로 호칭한다. 현재 집권 중인 군주에게는 황제라고 호칭하면서 선대 군주를 대왕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고려 전기를 다룬 전작 사극들과의 차이점이다. 이전 고려 전기 사극들에서 대왕호와 황제호를 병용한 경우는 없었으며 선대왕과 현왕 모두 일관되게 황제라고만 호칭하였다.[61][62] 본 드라마에서 대왕호와 황제호를 병용한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단지 고려 왕들이 사후 받은 정식 시호가 대왕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직 왕실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고려 초기의 국체를 고증하려 했을 수도 있다.[63][64] 가장 간명한 이유는 이미
고구려의
금석문에 '대왕 폐하'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고려 전기까지의 지적 환경에서 ‘대왕’호와 ‘황제’호가 등급이 구분되는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65][66]
대왕호가 내부적으로 천자의 지위를 가졌던 것과 별개로, 외부적으로는 단순히 군주, 제후왕에 대한 미칭이었다. 이후의 일이지만, 금나라 사신의 경우에도 고려 의종에게 '대왕'이라고 호칭하였으며, 고려 내정에 지배력을 행사한 몽골의 경우에도 원종이나 충렬왕, 충선왕을 '대왕'으로 부른 기록이 『 고려사』에 남아 있다. 한편 요나라, 송나라의 사신들이 면전에서 고려 국왕에게 아뢸 때 왕호의 뒤에 어떤 경칭을 붙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다. 다만 요나라, 송나라의 황제들이 고려 국왕을 자국의 친왕급으로 대우한 것을 볼 때, 사신 또한 고려 국왕을 친왕급으로 대우하여 '대왕 전하', '고려왕 전하', '고려국왕 전하'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중화제국은 황태후[67]와 황제를 제외한 황후,[68][69][70] 황태자, 친왕 등의 황실 일원에게 모두 '전하'로, 고위 신하들에게는 '각하'로 호칭했고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저하' 경칭은 고려와 조선에서만 전하의 하위 호칭으로 쓰인 희귀한 경우이다.[71]
-
이전의 고려시대 드라마에서는 '태후 마마'라는 호칭이 줄곧 사용되었으며, 본작은
무인시대처럼 '태후 폐하' 호칭이 사용되었다. 원작자 길승수는 '태후 폐하'라는 호칭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전하'가 맞는 호칭이라고 말하였고, 대량원군을 '전하'라고 부르는 부분도 '영공'이나 '저하'가 더 적합할 것이라고 하였다.
# 11세기의 고려에서 태후에게 '전하'라는 경칭을 썼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물론 당시 중원에서 태후에게 '폐하'를 경칭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72]
이규보가 작성했던 『
동문선』 제37권의 「사태후표(謝太后表)」 및 『
동국이상국집』 전집 등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소한 13세기 초의 고려에서는 태후를 '왕태후 전하'로 불렀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울러 고려는 국초 당나라의 제도를 폭넓게 받아들였는데, 당육전에도 태황태후와 황태후, 황후에게는 '전하' 경칭을 사용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73][74]
11세기 초에는 고려의 오등봉작제가 완성되기 이전이라 종친에게는 '원군', '낭군', '궁군', '대군', '군' 등의 호칭을 붙였고 이것이 나중에 왕족에게 주어지는 공후백 3등작으로 나누어지게 되므로 당시 대량원군에게 '영공' 호칭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고증에 맞지 않다. 또한 대량원군 같은 경우에는 종친이기에 이성 제후에게 쓰는 '저하' 경칭은 맞지 않다. 대량원군은 당시 생사가 확인된 유일한 용손이자 목종과 촌수가 가까운, 유력한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태자나 친왕급의 예우를 해주어 '전하'라고 호칭하여야 하며, 결과적으로 '대량원군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한 제작진의 재현이 맞다.
- 원정왕후가 상궁과 신하,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경칭으로 불리는데[75] 실제로 고려의 왕후에게는 '전하' 경칭이 사용되었다. 아울러 이복여동생인 원화왕후에게는 '형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과거에는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손위형제 또는 자매에게는 '형'으로 칭했으며[76] 손아래형제 또는 자매에게는 '아우'로 칭했다.
- 현종은 평상시 자신을 묘사할 때 '짐'보다는 '나'라는 자칭을 많이 쓴다.[77] 본 드라마의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는 당시 고려의 외왕내제를 고려하여 작중 현종이 '짐'이라는 지칭을 더 많이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다만 원래 군주들 가운데는 신하를 허물없이 대하는 자리에서는 짐이나 과인이라는 표현보다 나라는 표현을 많이 쓴 군주들도 많다. 사실 후대로 갈수록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평소에는 짐 같은 거창한 표현보단 '나'를, 정확히는 여( 余), 아( 我), 고( 孤)를 많이 썼다. 중국 사극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제후왕들이 스스로를 낮출 때만 과인이라 칭하고 평소에는 고(孤)를 많이 쓴다. 비슷하게 청나라 황제들도 일상적으로는 짐보다는 현대 일반인의 중국어와 같이 나(我)라고 말했는데 강희제 역시 평범하게 말할 때는 나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 역시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짐 또는 과인이라고 했지만 일상적으로 기록할 때는 일반인과 같이 평범하게 '나'를 의미하는 '여(余)'를 사용했다고 한다. 신라 경명왕이 직접 작성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의 비문에서도 '내가 지었다(余製)'라고 쓰여 있고[78] 조선왕조실록 상에서도 왕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지 등에서조차 평범하게 '나'를 의미하는 '여(余)'를 많이 사용했다.[79]
-
만세 삼창은 임금만이 받을 수 있는 하례이며, 고려도 국왕에게 만세를 불렀다.
예종~
인종 대에 만세를 부른 기록이 존재하며,
원종 또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며 백관들의 만세를 받은 바 있다. 고려사 지(志)를 보면 각종 의례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만세를 부르는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만세삼호(萬歲三呼)는
충렬왕 대부터 몽골의 개입으로 한 등급 낮은 천세로 격하된다.[80] 조선에서는 천세와 만세를 혼용하다 고종 대에 완전하게 만세로 변경되었다.
흥화진 전투가 끝난 후 고려 백성들이 "양규 장군 만세"를 외치거나 서경성에 들어온 동북면 군대에게 서경 주민들이 만세를 외친다. 본래 만세는 임금 또는 국가 자체에 올리는 하례이기에 일개 신하에게는 올리지 않으며, 때문에 '성상 폐하 만세'나 '(대)고려국 만세' 정도의 표현만이 고증에 맞는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 현종이나 신하들이 고려의 수도를 있는 그대로 '개경'이라고 부르며 이전 작품들처럼 '황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실 개경은 광종 대에 잠깐 황도로 불렸다가 성종 대에 다시 개경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계속 황도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전작인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천추태후에서는 그런 점을 반영하여 개경을 일관되게 '황도'라고 표현하였는데 본작은 그런 점과 대비된다. 다만 11회를 비롯한 이후 회차에서 개경 정궁을 언급할 때 '황성'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한다.
- 드라마에서 목종의 후계자의 칭호로 태자가 사용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태자 칭호가 난립해서 6대 성종까지는 별도로 정윤(正胤)이라는 칭호를 받아 즉위했다. 그런데 성종은 7대 목종을 별도로 정윤이라 칭하지 않고 자신의 종친 시절 작위인 개령군으로 봉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했다.[81] 이처럼 정윤 칭호의 사용이 끊겼기 때문에 현종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을 때 의도된 칭호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명이다. 한편 현종은 부계로는 목종보다 한 항렬 높고 모계로는 형제뻘이며,[82] 김치양의 아들도 굳이 따지자면 목종에게 형제뻘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양쪽 다 태자라는 칭호가 적절하지 않다. 무신정권 이전의 고려 왕의 형제 상속에서도 후계자로서의 별도의 칭호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극중 목종의 후계자를 태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청자의 편의를 위해 후계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황제국 용어를 임의로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고려 조정에서 거란의 황제를 '거란주'라고 지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당시 거란과의 조공책봉관계에도 불구하고, 고려 국왕이 거란 황제의 제후라는 외적 위상은 고려 내정에 관철되지 않았다. 즉, 고려 내부적으로는 자국이 거란의 제후국이라는 인식이 희미하였으며, 거란의 침공으로 인해 양국의 관계가 파탄난 시점에서 굳이 거란 황제라고 불러줄 필요성조차 상실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83]
- 거란 배역 대사의 외국어 혼용 처리에 몽골어가 사용되었다.[84] 거란 민족이 몽골인과 한인에게 동화되어 민족 자체가 사멸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몽골어를 부분적으로 채용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거란인과 몽골인들은 같은 동호- 선비계 민족이었으며 요나라 시기에는 서로 통역 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을 정도로 언어 유사성이 높았다. 현대에 거란어를 연구하면서도 몽골어를 참고하는 실정이다.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와 역사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다우르어를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 설이 지지를 받는다는 점과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다우르어는 고대 몽골어와 가까운 고어(古語)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라 몽골어를 사용하는 게 현실적인 타협점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결과 다우르인과 윈난성의 번런(本人)들은 몽골어족의 직계 후손은 맞으나[85] 거란의 직계 후손이라고 부르는 건 완전히 불가능할 정도로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다.[86]
2.7. 거란( 요나라)
- 강감찬이 현종에게 요군의 병력 동원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강감찬 말대로 말 먹일 풀이 없어지는 겨울에 전쟁에 나서는 것은 맞지만, 유목민들이라고 해서 겨울만 되면 약탈에 나서는 것은 아니며, 요 조정에서 유목민들을 통제했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강감찬의 예시에 맞는 병력은 부족군으로서 정규군이긴 하지만, 요군의 주력 부대는 아니었다.
- 요군의 주력은 황제의 직할령인 알로타에 속한 부족에서 선별한 어장친군과 궁위기군으로서 어장친군은 상비군이며 궁위기군은 황명이 내려지면 소집하는 병력이었다. 이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며,[87] 부족민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병이었다. 또한 요군은 거란인들이 주력이긴 하지만 한인, 발해인, 해인, 돌궐인, 여진인, 위구르인 등이 소속된 다민족 혼성군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웠는지 복장을 통일하고 모두 거란인으로 구성했다.
- 고려 역시 발해유민들 외에, 지배하의 여진족들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발해유민[88]과 여진족의 경우 고려측과 요측 양쪽에서 동족상잔을 벌이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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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초기 수도인 상경회령부 궁성 모형 |
CG로 구현한 상경성의 모습도 평지성인 원래의 상경성과는 다르고, 겨울이어서 눈으로 뒤덮여야 할 곳이 신록으로 무성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경임황부는 제대로 된 복원도도 없는 형국이라 제작진의 상상력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고, 드라마 제작 시점도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까지 재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CG의 특성상, 실제 지표면과 그래픽 사이에 가장 큰 이질감이 생기는 석축부를 나무로 덮어버리는 것 역시 필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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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의 황제들은 사시날발이라 부르는 순행 제도를 운영하여 5경은 보조적인 역할이고 계절마다 이동하는 황제의 행궁이 정치의 중심이었다. 황제들은 행궁에서 정사를 돌보고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속국과 속부들을 통제했다. 6회에서는 성종이 정확하게 '날발'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그가 언급한 대로 요의 황제들은 순행 때마다 대규모 사냥을 하여 기마 군단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고 상벌을 내렸다.
요의 황제들에게 있어 사냥은 유목민의 기풍을 유지하는 중요한 문화로서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90] 특히 성종이 원정에 나선 겨울 날발 때는 중요한 군국기무를 처리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한편, 다른 계절 때보다 군사를 동원한 사냥을 더 많이 하고 무예 연마에 힘썼다.
- 소배압이 척후병을 내보내 고려 본군의 위치 파악을 지시하는데, 요군은 척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원탐난자라고 부르는 정찰병들을 보내 적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사정을 상세히 살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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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군의 물자 보충 방법인 타초곡에 대해 묘사했다. 약탈이라 할 수 있는 타초곡은 물자와 재화도 빼앗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약탈품은 사람이었다. 영토가 넓지만, 인구가 적고 송과 고려에 비해 농경 지식이 부족한 요는 농경 지식이 풍부하고 선진 문물을 전수해 줄 수 있는 정주민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전쟁을 벌일 때마다 현지 주민들을 납치해 끌고 갔으며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여요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끌려간 인민들은 발해인들처럼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새로운 터전을 제공받아 그곳을 개척하며 살아갔으며 성종대에는 노예 해방 정책을 실시해 포로 출신으로 노비나 천민이 된 이들을 해방시켰다. 요나라는 특이한 취향이 있어서 잡아온 주민들의 정착지에는 이들이 원래 살던 지역의 명칭을 붙여주었다. 만약 흥화진이 함락당해 주민들이 끌려 갔다면 아마 흥화주나 흥화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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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에서는 요사 병위지의 '병사와 군마에게 군량과 마초를 지급하지 않고, 매일 타초곡기(打草穀騎)를 사방에 보내 약탈하게 했다.'는 기록에만 집중해 요군이 약탈만으로 물자를 확보하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다민족 혼성군으로서 공성 부대와 보병을 운용한 요군이 약탈만으로 필요한 물자를 보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타초곡은 적성국뿐만 아니라 자국민을 약탈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주민의 지위가 낮고 전쟁 수행 물자가 부족하던 초창기의 요나라는 전쟁 물자 마련을 위해 자국의 정주민들로부터 물자를 강제 징발하고 각지에 은패천사를 파견해 부호들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황족과 귀족, 관료들로부터 '헌납'을 받기도 했다. 이 타초곡은 정주민과 한인 세력가의 불만을 크게 일으켜 계속 문제가 되다가 성종대에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타초곡을 금지했다.
상식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답시고 자국민의 재산까지 강탈하는 나라가 물자를 최소화한 채로 출발해 적대 국가에서 약탈을 벌이는 방식만으로 물자를 충당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 현지 징발은 보급 방법 중 하나이지, 보급을 완전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칭기즈 칸의 군대조차 약탈이 아닌 제대로 된 병참을 통해 보급을 확보했다. 게다가 요나라는 기병 1명당 타초곡기와 수영반가정(守營盤家丁)을 각각 1명씩 붙여주는 것 외에도 4명의 정주민 봉족을 할당했고 군역을 맡은 이들은 자비로 군비를 조달해야 해서 부담이 상당했으며 전쟁에서 재화를 얻지 못해 파산하는 이들도 있었다. 약탈이 보급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들이다.[91]
다만, 약탈은 주로 권한이 없는 지역에서 반대급부를 주는 일 없이 물자와 인력을 끌어 쓰는 행위를 나타내는 의미다. 오늘날에도 순수한 보급체계로 본국에서의 조달이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병참 혹은 보급은 반대급부를 주거나 주권이 확립된 지역에서 일종의 특별세 형식으로 징발하는 것으로 충당했다. 즉, 약탈을 안한다고 근처 지역이 무탈한게 아니다. 괜히 손자병법에서 최고의 장수는 출발할 때의 식량만 가지고 가서 적의 식량을 뺏는 장수로 서술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적의 식량을 털어 쓰는 것은 약탈 외에 점령지에서의 공출이 들어간다. 어쩌면 약탈과 공출을 포함한 정당한 보급은 침략자와 주권을 행사한 자의 차이[92]에 불과하다. 이를 보면 전쟁 중에 교전지역 혹은 인근지역에서 왜 반란까지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약탈이건 보급을 위한 징발이건 당하는 주민들에게서 거두어 가는 것이다. 이를 모르면 오늘날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본국에서의 비축물자를 통한 보급으로 주둔지는 피해 없는 상황을 생각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 요는 태조 야율아보기의 치세부터 약탈이 아닌 정복과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단순한 약탈을 위해서였다면,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하북과 발해, 몽골 초원으로 진출하고 고려를 침공할 이유가 없다. 요 왕조의 진정한 전쟁 목표는 고려의 완전한 복속이나 강동 6주의 병탄이었으며 약탈은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 얻는 부수적인 이득으로 여겼을 뿐이다. 요군이 굳이 약탈을 위해 벌이는 전쟁이 있다면, 주기적으로 일부 병력을 국경 밖으로 보내 외부의 농지와 목초지를 불사르고 위험이 될만한 세력을 미리 공격하는 예방 전쟁일 것이다.
- 요의 장기인 기동전을 묘사했다. 흥화진 인근의 고을에 요군이 압록을 건넜다는 전령의 소식이 전해진지 하루밖에 안된 상황에서 일부 병력을 동원해 해당 지역들을 휩쓸어 버렸다. 파상 공세를 거듭해도 흥화진이 함락되지 않자, 요 성종은 조공(助攻)으로 흥화진을 포위한 후, 자신이 직접 주력을 맡아 통주의 강조와 싸워 이기고 개경까지 진격했다. 이는 1004년에 송을 상대로 한 남정에서 보여준 모습과 유사한데, 1004년에는 이 작전이 성공했지만, 1010년에는 고려의 항복이나 강동 6주를 얻는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 6회 마지막 장면에서 요군이 사로잡은 고려인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운 것은 요군의 전술 중 하나로 요 - 후진 전쟁 때도 활용한 바가 있다. 꽤나 잔혹한 짓이지만, 이 방법을 통해 후진의 성을 공략한 적도 있을 정도로 유효한 전술이었다. 요군뿐만 아니라 후대의 몽골군도 중동 정복 전쟁 때 활용했다.
- 보주에 대한 묘사를 누락했다. 요 왕조는 압록강을 넘어와 검동도에 내원성을, 강변에는 보주(保州)성을 쌓아 전초 기지로 삼았다. 고려의 북쪽 경계는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흥화진이었고 압록강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동 6주는 처음부터 육지 방면에서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구축한 방어 체계였다. 당연히 강을 이용한 방어나 지연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하는 것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보주는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 신의주시 일대다.
- 거란군 깃발에 태양과 초승달, 불을 형상화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93] 이 문양은 고대 흉노 제국에서 사용된 문양으로 흉노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북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 폭넓게 쓰이다 몽골 제국으로 인해 유명해졌고, 이후 여러 변형을 거쳐서 현대 몽골의 상징인 소욤보 문양에도 들어가 있다.[94]
- 성종이 항하의 모래(恒河沙)를 언급하거나 행궁에 만(卍)의 깃발을 세워두어 불교 국가인 요 왕조의 모습을 묘사했다. 성종은 불자로서 불교 교리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거란식 이름도 문수보살의 종이란 뜻인 문수노(文殊奴)였다. 당대 요 왕조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보살이나 부처의 종이란 이름을 붙여주는 등 불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강했다. 또한 극중에서 성종이 서경 인근의 사찰에서 주둔하며 예불을 드리다 암살당할 뻔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굳이 제작진의 연출 방식을 무시하고 핍진성을 따져 분석하자면, 승려란 자가 독송을 제대로 마치지도 않고 갑자기 침묵해버리니, 불교 교리에 정통한 성종이 낌새를 눈치채고 재빠르게 대응한 것일 수도 있다.
- 강조가 야만인이라 일갈하자, 분노한 성종이 무자비하게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이 나왔다. 성종과 같은 정복 왕조의 군주에게 '야만' 운운하는 것은 죽여달라 애원하는 수준의 모욕으로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거란은 문화가 제법 발달한 민족이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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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에서 요군 내부에서 약탈물의 분배와 병력의 생계 문제가 발생해 요군이 철퇴를 강요받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요군의 주력은 전리품 분배 문제로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는 부족의 전사들이 아니라 군기가 확립된 상비군인 금군과 궁위기군, 어장친군이었으며 요군이 장기간 전쟁을 할 수 없었던 주요 원인은 징집된 병사들의 생계 문제가 아니라 기후 문제였다. 여름이 되면 습기로 인해 활의 아교가 녹아내리고 장맛비가 내려 기병들의 기동력이 떨어졌으며 더위로 병사들이 쓰러졌다. 946년에 석중귀를 무릎 꿇리고 개봉에 입성한 요 태종이 철퇴를 고려한 이유 중 하나도 병사들이 하남의 더위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실질적으로 생계 문제로 곤란을 겪는 이들은 요의 부족군들이지만, 대외 원정에서는 부족군들의 징집은 잘 하지 않았다. 요의 유목민들은 대외 원정이 아니라 광대한 국경과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는 군역 때문에 생계 곤란을 겪었다.
3. 회차별
3.1. 1회
- 귀주 대첩 (프롤로그)
- 역사서에서는 소배압이 10만 정예 기병을 이끌었다고 하나, 프롤로그에 나오는 거란군 대다수는 보병이다. 이는 제작 환경상 충분한 수의 말을 구하기 쉽지 않은 것도 있지만, 검차가 기병 방어 병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검차에 맞서 말에서 내려 싸웠다고 볼 수 있다.[95] 그리고 동양 역사서에서 군대 편제를 기록한 대목은 상세한 편제와 군령이 남아있지 않다면 어지간해서는 걸러듣는 것이 좋다. 전쟁을 치를 때 보병 없이 기병만 10만을 동원한다면 거점 유지도 작전도 불가능하고 오직 죽이는 것만 가능한, 전술적 가치는 높지만 전략적 가치가 전무한 허울뿐인 군대가 된다.[96]
- 거란군이 출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들이 보통 병사들이 아닌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소배압의 10만 군사 중에는 황제 직속 최정예 부대인 우피실군, 천운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공을 세울 경우 실제로 출세가 보장되는 직업군인이었다. 이후 회차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거란 군인들이 생계와 사치와 관련된 약탈품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볼 때에 꽤나 대비되는 면이 있다.
- 통주 전투(7화)의 경험을 살려, 양 군이 진화한 모습이 개연성 있게 그려졌다. 고려 측은 검차의 칼날이 더 증가했다. 거란 측은 통나무를 굴려 검차를 무력화하고, 수레 아래로 침투하며, 판자로 성벽을 넘듯 넘는다. 이에 고려 측은 물풀매, 쇠도리깨, 장창 무엇 하나 써 보지 못하고 바로 단병접전에 이르려 하자, 제1검차진은 사각방진으로 움츠려 생존만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소배압은 제2검차진까지 돌격을 명한다.
- 김종현의 중갑기병 부대가 구릉(언덕)에서 나타난다. 역사서에 이 구릉이 고려군의 뒤쪽(남쪽)인지, 거란군의 뒤쪽(동쪽)인지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이를 모호하게 묘사했다. 또한 어느쪽 구릉이든 귀주 평원을 내려보듯 포진할 수는 있으나, 타 영화들처럼 구릉에서 내려오듯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달리며 평원으로 올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아서, 말 2-3마리의 좁은 폭의 길로 기병대가 신속히 평원까지 이동하려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함께 불어닥친 소나기까진 재현되지 않았다.
- 목종의 동성애 관련 내용이 일부 장면은 로맨스에 가깝울 정도로 과감하게 연출된다. < 천추태후>에서도 목종과 유행간이 키스하기 직전까지 나왔기에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 외에 드라마에서 목종과 유행간은 왼쪽 귀에 귀고리를 하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 시대 초기까지 한반도의 남성들은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귀고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는 고증에 따른 것은 아니고, 단지 목종과 유행간이 (동성)연인 관계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이다.
- 목종이 신하들을 나무라면서 "이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대들을 뽑았다"고 한다. 목종은 재위 12년 동안 꽤나 많은 신하들을 등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종조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 역시 대부분 목종조에 등용되었다. 그렇다고 관료 조직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수상이라 할 수 있는 문하시중, 재상인 평장사가 없고 부재상인 참지정사가 수상 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사 발령이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강조는 집권 후 곧바로 재상단의 공석을 메꿔버렸다.
- 1회 초반부에 흥화진에서 양규가 포로를 교환하고 난 직후 원종석과 김훈· 최질이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원종석은 제2차 여요전쟁 때 서경을 거란에 바치려고 했던 반역자이고, 김훈과 최질은 2차 여요전쟁이 끝난 뒤 문관직을 얻지 못한 것과 더불어 무장들의 토지를 빼앗아 국가 재정을 확보하거나 문관에게 지급하는 것에 반대해서 결국 무신정변의 선구인 김훈·최질의 난을 일으키는 인물들이다.[97]
- 절간에서 뒹구는 고양이가 나온다. 동문선에 실린 김부식의 '아계부(啞鷄賦)'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양이에 대한 문자 기록이라 고양이의 한반도 전래 시점 상한은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5~6세기 경 제작된 가야 집모양토기 중에는 집 안에 있던 두 마리의 쥐가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표현된 유물이 있지만, 이 '고양이'가 현재의 집고양이(Felis 속)인지 아니면 삵(Prionailurus 속)인지는 학계의 논쟁 중이다.
- 즉위하기 전 현종을 부르던 호칭 중에는 천추태후에 의해 신혈사로 쫓겨나면서 임금의 서자이자 승려가 된 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붙은 '신혈소군'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민간에서 자연스레 붙은 호칭이라서 극 중 주요 인물들이 대량원군을 신혈소군이라 부를 이유는 없다.
- 김치양의 아들이 이름만 '현'으로 나오지만, 사서에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창작이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김치양의 아들에게 '김진'이라는 명확한 성명과 함께 '황주소군'이라는 그럴듯한 칭호도 붙였으나 역시 창작이었다. 이처럼 본명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게 가상의 이름을 임의로 붙이는 경우는 사극에서 흔하다.[98] 다른 나라 사극에서도 흔하게 쓰는 방식이다.[99]
- 목종이 김치양을 진작에 숙청하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태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 했을 뿐이었다는 것은 실제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다. 드라마에서는 목종이 천추태후에게 약한 이유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지나친 가족애 때문으로 나온다.[100]
3.2. 2회
- 천추태후의 궁인들이 신혈사에 있던 현종에게 찾아와 독이 든 음식을 먹여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은 실제 사실이다. 『 고려사』에 따르면, 현종(당시 대량원군)이 독약을 넣은 술과 음식을 의심하다 까마귀와 참새를 향해 던지는데, 그걸 먹은 새들이 독이 온몸에 퍼져서 다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01] 드라마에서는 희생물이 까마귀와 참새에서 고양이로 바뀌었다.
-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강감찬은 드라마에서 충주 판관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정사에 따르면 강감찬은 고려사에서 과거 급제 이후 예부시랑이 되기까지의 행적이 없다. 때문에 강감찬이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순전히 창작의 영역이다. 다만 기록에도 강감찬이 청렴한 관리이며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하므로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장면은 이런 면을 반영한 각색이다. 『 용재총화』, 『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 지리지에는 주로 지방 수령을 전전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로 나오므로 지방직을 지내고 있었다는 설정은 여기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 충주 판관으로 재직하는 강감찬이 1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에 끌려갔다 돌아온 백성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해당 대화에는 '당시 수만의 고려 백성이 거란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국지전에 가까웠으며 기간 또한 짧았던 1차 여요전쟁에서 그렇게 큰 포로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미지수이며 실제 기록에도 1차 여요전쟁과 관련된 포로의 수치는 명확히 나와있지 않다.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 또한 이 부분은 드라마에서 고증을 잘못한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
- 목종이 즉위 초기에 정사를 열심히 돌봤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전반적인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이 억지로 왕위에 올라 처음부터 정치에 손을 놓은 것처럼 묘사했는데 실제 목종은 많은 신하들을 등용하고 정사를 살피는 등 정치에 무관심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천추태후의 제멋대로의 섭정,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관계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며 동성애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 전작 < 천추태후>에서 목종이 아닌 천추태후가 강감찬을 통해 현종을 보호하는 것처럼 묘사했으나, 본작에서는 기록에 따라 진관사의 승려와 목종이 보호하며 강감찬은 현종 즉위 전까지는 접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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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소태후'로 잘 알려져 있는 거란 성종의 모후
승천태후가 전장에서 군을 이끌었다는 것이 언급된다.
송나라의 북벌군을 맞이해 직접 군을 이끌고
송태종과 맞서 싸웠으며, 1004년에는 전주까지 진군해 송나라를 진동시켰다. 비록 개봉을 포위하지 못하고 화친을 맺었지만, 여기서 체결한
전연의 맹을 통해 거란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대단한 인물이다.
다만 드라마에서 언급되듯 '늘 맨 앞에서 말을 달려 수많은 영토를 정복'하지는 않았다. 성종 대의 영토 확장 당시 군대를 직접 지휘한 사령관은 승천태후 본인이 아니었고, 그녀가 전장에 나선 것은 방어전에 국한됐다. 실질적인 지휘는 야율휴가, 소달람 같은 숙장들이 맡았고 황태후, 황제가 친정한 1004년 남정이 동력을 잃은 것도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소달람의 급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애초에 권력 투쟁이 극심한 나라에서 황제가 어리고 황태후가 섭정 하는 상황인데, 섭정이 수도를 비우고 원정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소태후의 업적을 상세하게 묘사할 시간이 있었다면 영토 확장보다는 구체적으로 송의 북벌군을 2번이나 깨버리고 전주까지 진격한 일을 거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드라마의 초점이 소태후의 업적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가 최전선에 서지 않더라도 정복전쟁의 주체로 여겨졌다. 일례로 정복군주로 유명한 신라의 진흥왕은 최전선에 나갔다는 기록이 없지만, 진흥왕순수비를 통해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친정을 한 것처럼 여기게 했다.
-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1009년 1월에 요 성종은 중경에 행차해 공무를 살피고 요하에 낚시를 하러 갔었다.[102] 드라마에서는 성종이 상경에서 병환 중인 모후를 보살피는 것으로 묘사했다. 요나라의 수도로서 상경이 갖는 위상을 강조하고 고려 궁궐과 대비되는 연출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목종이 백성들에게 베푼 연회는 목종이 친히 구정(毬庭)에 나아가 남녀 백성들 중 나이 팔순 이상 고령자 및 위독한 병자와 장애인 635명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직접 술과 음식, 베와 비단, 차와 약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는 『 고려사』 목종 10년 음력 7월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목종 12년에 있었던 천추전 화재와 하나로 합쳐 백성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도중에 불이 난 것으로 각색했다.
3.3. 3회
- 연회에서의 화재 이후 조정에서 논쟁이 오갈 때, 화재를 일으킨 진범인 김치양과 그 일파 이주정은 연회장에 연등을 단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 '성종대왕이 폐지한 연등회를 다시 열어 화재를 유발했으므로 목종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재상들은 연등회와 상관 없는 단순한 잔치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 대목은 성종이 팔관회, 연등회 등의 행사를 줄이고 폐지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 행사들은 현종 이후 부활했고 목종 때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던 흔적이 있으나 왕실이 나서서 행하지는 않았다. 고려 역사를 통틀어 연회 중에 불이 난 적도 없다.
- 본래 강조의 정변 당시 강조의 행보는 조금 복잡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김치양은 애초에 군사 작전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단지 강조는 목종이 그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김치양 일파로 밝혀진 측근 이주정을 외지로 보내고 그 자리를 본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사 발령에 따라 개경을 향해 홀로 출발했다가, 이것이 김치양이 명령을 위조하여 유인하려는 책략이라는 위종정과 최창의 거짓말에 속아 돌아가서 병력을 이끌고 다시 개경으로 향했다. 도중에 아버지까지 목종이 죽었다는 편지를 보내와서 이를 믿었으나 결국 목종의 생존 사실을 알고 망설였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효율적인 분량과 명확한 대립 구도를 위해 사료를 과감하게 각색했다. 우선 김치양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정에 따라 목종의 명령이 처음부터 강조에게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라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그것이 김치양에게 가로막혀 서경에서는 아예 개경 소식을 듣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체적인 판단에만 의존하여 움직인다. 또한 정변 동기를 유발한 목종 사망 유언비어가 김치양이 직접 퍼뜨린 것으로 각색되었다. 목종의 생존 사실을 알고 망설이긴 하나, 주저하는 강조를 부하들이 떠밀어 이를 따랐다는 사료의 서술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이현운이 김치양만 잡으면 끝난다는 원론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평소 목종에게 쌓여 있었던 불만과 문제 의식이 폭발하여 강조 스스로 반역을 결심하는 것으로 그려졌다.[103]
- 강조가 유행간을 참살한 뒤 재상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어전에 들어갈 때 강조를 막아서는 유충정을 이현운이 베어버리는데, 실제 유충정은 강조의 난 당시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후일 1031년 경 발해부흥운동에서 한자까지 모두 같은 동명이인이 흥료국의 행영도부서(行營都部署) 유충정(劉忠正)이라는 이름으로 영주자사(寧州刺史) 대경한(大慶翰)을 현종에게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유충정은 원래 발해 유민 출신이었기에 동일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애초에 유충정은 김치양 토벌 명분을 가져오고 대량원군 구출도 거든데다, 유행간과 쌍으로 취급되던 유명 인물임에도 당시 7명의 사형자 명단 중 존재가 알려진 유행간, 김치양, 김치양의 아들과 달리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단순히 유배 무리에 끼어 추방되는 전개도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곳에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유충정이 죽었다'고 쓰고 있기에 드라마 제작진들이 이런 레퍼런스를 참고해서 유충정이 죽었다고 묘사했을 수도 있다. 반면 분명하게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이주정은 4회에서 유배되며 퇴장했다. 드라마에서는 김치양이 손쓸 틈도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정이라 활약을 할 여지가 없었고, 유행간과 세트로 묶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캐릭터가 없다 보니 오히려 유충정만 살아남는 것이 개연성이 떨어진다.
- 목종이 죽는 시점이 압축되었다. 목종은 개경을 나오고 얼마 안 되어 파주에서 살해되었는데, 폐위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이라는 칭호를 받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에 의해 감시를 받게 되었다.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향했는데 목종이 최항을 통해 강조에게 말을 요청했으나, 한 필밖에 안 보내서 민가에서 한 필을 더 구했다. 목종 일행이 적성현[104]에 이르자 강조가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 독약을 올렸고, 목종은 마시기를 거부했다. 이에 김광보가 폐주를 호위하는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강조가 (목종이) 약을 거부하면 군사들을 시켜 죽이라고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멸족을 당하게 된다."고 협박하여 안패는 강조의 명령대로 그날 밤 목종을 시해한 후, 폐주가 자결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여기서는 이런 실랑이를 묘사할 시간이 없었는지 유배를 가는 길에 목종이 "다 소자의 잘못이다. 소자가 직접 땅을 일구면서 어머니를 모시겠다. 영원토록 어머니 곁을 지키겠다"라고 천추태후에게 약조하는 순간에 기습적으로 목종을 칼로 베어 살해한다. 시점도 밤이 아니라 대낮이다. 한편으로는 목종이 천추태후의 말 고삐를 쥐고 걷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기록을 보면 강조한테 쫓겨나서 충주로 가는 길에 천추태후가 말을 타면 목종이 직접 말 고삐를 쥐고, 식사를 하면 직접 식사 시중을 들었다 한다. 태후 때문에 쫒겨나긴 했지만, 목종은 기본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효심이 지극한 인물었다고 한다.
- 개경에 들어온 강조에게 최항이 유일하게 언성을 높인다. 실제로도 최항은 강조의 정변 당시 "이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라며 강조의 면전에서 유일하게 항변했다. 강조는 조정 내에서는 중추사로 최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직설적인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동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료에서는 강조가 내내 당당하지 못했고 최항의 비난에도 반박하지 못했으나, 드라마에서는 마음을 굳힌 강조가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한다.[105] 병사들이 강조를 새 임금으로 생각하고 만세를 부르자 당황하여 저지하는 모습 대신 직접 용상에 오르는 선택지도 있다는 이현운의 말을 대량원군이 오고 있다는 한 마디로 간단히 물리친다.
-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궁궐로 들어갈 때 광화문(廣化門)이 열리자 그 뒤로 열을 맞춰 궁궐의 내문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목종 일행은 정전에 몰린 상태였기 때문에 유방이 강조에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을 묘사하고자 했다면 건축 문단에 상술된 것처럼 광화문이 아니라 그 안의 문들 중 하나를 열어주어야 맞다.
3.4. 4회
- 김치양 일파로 2회에서 목종에게 대량원군의 위기를 은폐한 이주정이 기록에 따라 다른 김치양 일파와 함께 유배 가며 퇴장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 천추태후에서는 유행간과 함께 사형되는 것으로 나온 것과 비교된다.
- 강조가 기존의 비서 기관인 중추원과 은대(銀臺) 등을 통폐합하여 중대성(中臺省)으로 개칭하고 그 장관인 중대사(中臺使)에 올라 조정의 목줄을 틀어쥐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고려는 내사성, 문하성, 상서성 총 3성이 존재했기에 일시적으로 4성이 존재하게 된 셈이었다. 비록 의도가 순수하지 않고 구조 또한 기형적이기는 했지만 강조 사후 중대성이 폐지되고 중추원이 복구될 때에도 은대는 복구되지 않아서 결국 이름만 빼면 비서 기관의 통폐합이라는 구상 자체는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에서 강조가 폐지가 아니라 통폐합이라고 설명했음에도, 강조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반대해야 했던 상황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강감찬이 무작정 중추원과 은대의 폐지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다소 머쓱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106]
-
성종의 딸들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 자매가
현종의 배필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극중 이들 자매를 '황후'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를 반영한 듯하며,[107] 또한 사촌지간끼리 혼인을 올린 것[108]은 고려 왕실의
근친혼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09]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가 현종에게 '남은 용손은 우리가 전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극의 설정과 배치된다. 드라마 내에서 용손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임을 전제로 하는데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의 어머니는 둘 다 왕실과는 무관한 지방 호족의 딸이므로 드라마 내 용손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110] 오히려 훗날 현종의 5비로 들어오게 되는 원용왕후가 드라마 내 용손의 범주에는 더 부합한다. 차라리 용손이 아닌 왕손이라는 대사를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듯하다.[111]
- 현종과 원정왕후의 합방 장면이 등장하고 얼마 안 되어 회임하는데, 원정왕후는 현종이 몽진하던 시점에 회임 중이었기 때문에 이 시점 쯤에 임신하는 게 맞다.
- 예부시랑이 된 강감찬이 거란 황제에게 보내기 위한 2차 표문을 작성하고 현종을 알현하여 검토를 요청하는 장면에서 현종이 '나도 천자인데 왜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느냐?'고 강감찬에게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강감찬은 1차 여요전쟁 이후 고려가 거란에 사대하게 된 역사를 소개하며, 그러한 조공 책봉 관계는 단지 거란과의 대외관계에서 존재하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부분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 야율융서가 승천태후의 죽음을 전령을 통해 전달받는다. 승천태후는 실제로는 야율융서와 함께 행궁에 있다 사망했으나, 드라마에서는 야율융서가 승천태후가 있던 상경임황부가 아닌 초원의 게르에서 공무를 보고 있던 것으로 나온다.
3.5. 5회
- 현종이 거란 침공의 원인으로 지목된 강조를 궁궐로 불러들여 내관을 통해 제거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은 실제 기록은 아니고 먼 훗날 벌어진 희종의 최충헌 제거 시도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한 듯하다.[112]
- 거란의 침공을 알리러 온 사신이 현종을 시종일관 '대량원군 전하'라고만 부른다. 이는 드라마에서 거란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책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려나 거란 입장에서 쓰인 사료나 공문서가 남아있지 않고 대량원군은 거란에서 책봉한 작위가 아니라서 선전포고 당시 거란 측에서 현종을 실제로 어떻게 불렀는지는 불명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책봉과 관련된 외교 갈등은 창작이고, 외교 용어에서 객관적 사실로서의 고려 임금을 가리키는 '고려왕'과 책봉 군주로서의 '고려국왕'은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에 그저 '고려왕'이라고만 대사를 처리해도 특별한 문제는 없다.[113] 그러나 드라마의 대사로는 '고려왕'과 '고려국왕' 용어의 차이를 드러내기 어려운 데다 드라마에서 책봉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흐름의 일관성을 고려하여 거란 사신의 강경한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요 성종은 형식적으로는 외교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여전히 상국을 자처하는 태도를 내세우며 내정 개입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충분히 개연성 있는 각색이다.
- 강조가 반역자 처단을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알린 거란의 사신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의 신병을 거란에서 맡으라며 당당한 태도로 나와 침공 명분이 핑계에 불과함을 폭로하고, 이를 전해 들은 거란의 성종은 강조에게 미리 깊은 인상을 받는 각색이 나온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강조의 정변을 침공 명분으로 삼았으므로 나중에 성종이 강조를 포로로 잡았을 때 항복을 권유한 것은 명분과 실질의 괴리를 감안하더라도 사실로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따라서 이를 감안한 빌드업이다.[114]
-
현종이 출전하는 강조에게
부월을 하사한다. 부월은 동아시아사에서 총사령관의 전통적인 상징으로 군주로부터 지휘권과 생사여탈권을 위임받았다는 막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현종이 강조에게 하사한 금으로 장식된 도끼는 천자가 외적을 정벌할 때 쓴다는 황월(黃鉞)이다.[115] 이는 고려가 황제국 예법을 수용한 것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정벌에 앞서
예종으로부터 부월을 받았으며,[116]
김부식 또한
묘청의 난 토벌 전
인종에게 부월을 받았다.[117]
드라마에 나오는 황룡이 도끼날을 물고 있는 모습의 부월은 부월 문서에도 나오는 세종실록 133권에 수록된 월(鉞)이나 기타 유물들에서 보이듯 한국사에서 전형적인 형태이다.
-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딸로 나중에 원성왕후가 되는 김씨 소녀가 '지금의 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다'며 '성종대왕께서는 직접 전장에 나가셨다'고 언급한다. 고려 성종이 제1차 여요전쟁 당시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전방인 서경에서 지휘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 천추태후>에서도 묘사됐다.
- 전반적인 등장인물들의 발언을 통해 1차 여요전쟁 때 고려가 큰 위기를 겪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 1차 여요전쟁은 국경지대에서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반응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봉산에서 윤서안이 패했으나 안융진에서 대도수와 유방이 소손녕을 격퇴한 국지전의 성과로 서희의 회담이 이루어지며 전쟁이 끝났기에 성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외교 교섭 과정에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서경에 주둔한 정도였다.
-
거란군의 투석기들이 흥화진에 던진 수많은 화염구를 양규가 바라보는 장면으로 회차가 마무리된다. 이는 여요전쟁 당시의 기록이 아니지만, 드라마 장면과 비슷한 일화는 약 220년 뒤
귀주성 전투에서
김경손이 몽골군의 포탄으로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는데도 끝내 자리를 지켰다는 내용으로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남아 있다.
몽고는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수레에 초목을 싣고 굴리며 공격하자 김경손은 포차(砲車)로 끓는 쇳물을 쏟아 쌓여 있는 풀을 태우니 몽고 군사가 퇴각하였다. (몽고군이) 다시 공격하자 김경손은 호상(胡床)에 앉아 독전하였는데 포탄이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아졸(衙卒)에 적중하여 (그의) 몸과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좌우에서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김경손은 말하기를, “불가하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린다.”고 하며 신색(神色)을 태연자약하게 하자 끝내 옮기지 못하였다.
3.6. 6회
- 평화전쟁 1019에서 묘사된 흥화진의 성벽 구조가 생략되었다.[118]
-
강감찬이 현종에게 전장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거란이 보급을 적에게서 취하는 풍습(타초곡)이 있으며 특히, 포로를 가장 중요시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고대 전쟁에서는 비효율성과 시대적 한계로 인해, 현대처럼 '선'으로 유지되는 보급은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원정지의 군대는 자신들이 직접 들고 간 보급품(치중)으로 초기 보급품을 감당했고, 이동할 때마다 숙영지 인근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보급을 충당했다.[119]
손자병법의 내용 중 상당수가 보급의 곤란함과 보급품이 떨어진 상황에서의 대응 방식일 정도로 고대로부터 약탈을 통한 보급은 어느 원정군이나 다 했던 것이며, 꼭 거란만의 행동 양식은 아니기는 하지만, 정주민에 대한 약탈로 경제의 상당 부분을 돌리는 것이 유목민의 방식인 것은 사실이다. 이런 주변 지역을 약탈해서 얻는 보급은 근세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도 나폴레옹의 장기였을 정도로[120] 보급을 충당하는데 필수적인 양식이었다. 작중 거란군이 고려인 취락을 약탈하고 백성들과 물자들을 마구 갈취하는 장면도, 본작에서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수십만의 대군을 운용하려먼 사실 필수적인 작업이었던 것이기에 전근대 전쟁이 잔혹한 일이었던 것이다. 거란이 약탈에서 특이한 점은 기병 1명당 타초곡병 1명을 배정해서 전문적인 약탈부대를 운영했다는 부분일 것이다.
- 귀주성이 거란군의 신속한 기동에 부득이 청야 전술에 실패하는 각색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이것이 실책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청야는 수비 측에도 상당한 부담이라 일반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청야를 선택해야 할 정도가 되면 인력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여유롭게 무언가를 옮길 상황이 아니어서 그 지역의 건물, 저축물과 토지를 대부분 불태워야 했다. 따라서 적뿐만 아니라 수비군의 보급과 지역의 생존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전략이라 수비 입장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만 택할 수 있는 도박수였기에 드라마처럼 청야를 할 수 없는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121]
- 개경에 거주하는 출전 지휘관들의 가족이 단체로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현종과 만나는 장면에서 양규 처와 아들 양대춘이 등장한다. 양대춘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훗날 아버지의 공적으로 등용되어 고관에 올랐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지만 양대춘이 경력을 쌓을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 강감찬의 처가 강감찬이 삼한벽상공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처신만 똑바로 했어도 금방 재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타박한다. 하지만 삼한벽상공신 가문은 건국 초부터 이어진 중앙 정부와 호족 사이, 그리고 호족끼리의 갈등이 빚어낸 정국의 격랑 속에서 상당수가 살아남지 못했다. 심지어 후대에 천역에 종사하던 경우가 발견되어 삼한공신 후예로서 천역이나 잡직에 종사한 경우에 대한 규정이 따로 생길 정도였기 때문에 강감찬처럼 나중에라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이어간 것만으로도 다행인 수준이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상단도 삼한벽상공신을 조상으로 두지는 않았다. 당장 유방 역시 삼한벽상공신으로 태조 배향공신이었던 유금필의 후손이라지만 1차 여요전쟁에서는 안융진의 낭장에 불과했고, 목종 당시에도 친종장군으로 높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 강감찬 처가 고려가 병농일치, 즉 부병제 사회였음을 언급하면서 거란이 1차 전쟁 때 동원한 병력이 1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1차 침공 당시 소손녕의 ' 호왈 80만'을 오늘날의 정설에 가능한 비슷하게 조정한 것이다.
- 작중 거란군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소배압이 비교적 신중하게 공성을 진행하려는 반면, 야율융서가 처음에는 여유를 부리다가 불과 일주일 만에 대군이 작은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에 초조해하며 하루 안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선봉장 야율분노를 처형하겠다고 날뛰자 소배압이 당황한다. 이는 단독으로는 처음 친정에 나선 요 성종의 미숙함을 보여준다.[122] 물론 본인의 미숙함 외에 대군의 보급 문제 등으로 조급해 할만한 이유는 있지만, 본래 중세의 공성전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일주일 가량 지연된 정도로 초조해 할 이유는 없다.[123]
- 강조가 고려의 병기인 검차의 중요성을 거듭 언급한다. 강감찬 처의 언급처럼 고려군의 대부분은 농민병으로 숙련도가 떨어져 드라마에서는 최전방까지 와서도 개별 지역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한데 뭉쳐 훈련을 받는 실정[124]이고, 거란의 주력이 기병인만큼 평야 지대로 적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험준한 지형을 믿고 검차 같은 전투수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25] 실제로 이러한 수준의 병력조차 거란의 숙련병과 회전에서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검차는 강조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 셈이었다.
- 한반도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보병의 백병전 능력을 활 등 투사병기를 이용한 산성전으로 보완해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126] 회전을 피하고 수성전을 펼치자는 의견도 충분히 일리는 있지만 애초에 두 전략은 병행되는 것이지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통주 전투에서 주력군이 격파되어 지휘부가 붕괴되었지만 인명 피해 자체는 전체 동원 병력 기준에서는 엄청난 수준이 아니었고 주요 거점들도 대부분 지켜냈으나, 각지로 병력이 분산되어 회전을 포기하면서 결국 개경 함락을 막지 못했다.[127] 따라서 드라마에서 강조가 검차에 거는 기대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 동양에서 마륭, 서양에서 얀 지슈카 정도 빼고는 이런 전투마차로 대승을 거둔 사례[128]가 별로 없고, 강조도 검차 덕분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만 결국 허를 찔려 패배하게 되므로 결국 사망 플래그가 되는 셈이다. 드라마에서도 강동 6주의 험준한 지형을 벗어나면 평야 지대에서 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도 인정하며, 프롤로그의 귀주 대첩 시퀀스에서도 검차가 마냥 만능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보여준 바 있었다.
- 현종이 개경의 시전 상인들과 백성을 만나 민심을 청취하는 장면 이후, 원정왕후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하면서 "그런 일은 신하들이 하면 되고, 왕은 백성들 앞에선 통치자로서 위엄을 차려야 하며, 왕은 만인 위에 군림하는 자이기에 백성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그들도 군주를 우습게 여기게 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129]
- 이는 어린 시절부터 민초들과 섞여서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현종과 태어날 때부터 지배 계급의 금지옥엽이었던 원정왕후의 입장 차이를 보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민주사회를 사는 현대인 입장에서 작중 현종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 수야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원정왕후의 발언은 태생부터 푸른 피를 지닌 지배층 입장에선 당연한 마인드로 제시할만한 이야기로 전근대 지배층들은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존재일지언정,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인들처럼 최소한의 친근감을 제시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군림하는 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건 단순히 지배층의 위엄 문제가 아니다. 군주가 무계획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약속을 남발하게 되면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모든 화살이 결국 군주에게 간다. 이것이 일반적인 한국 사극에서 자주 묘사되는 민중들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군주에 대한 묘사인지, 아니면 반대로 미숙한 군주 현종을 묘사하기 위함인지는 불명이다.
- 다만 현종이 몽진할 때 수난을 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갑작스럽게 왕이 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전쟁이 터졌다는 고충과, 중앙집권제가 자리잡지 못하고 지방 호족의 입김이 강해 왕실의 통제력이 모든 곳에 미치지 못했던 문제였지, 현종 본인이 (지배층의 시점에서) 본작의 원정왕후가 지적한 것처럼 '백성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고 다녀서'는 아니다.
- 거란군과 고려군 양쪽에서 포탄을 집중 사격하면서 " 일점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당대의 표현이 아닌데다 현대 기준으로도 사격 용어로서의 뜻이 아니라 FPS, RTS 등 게임에서 유명해진 뜻으로 사용되었다.
- 화염 투석으로 인해 양측의 투석기나 가옥들이 터져나가는데, 이 시기의 투석기들은 현대의 야포와 달라서 일반적인 포탄으로는 저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없었다. 다만 서양의 사극에서도 투석기의 위력을 과장하는 일이 많아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며 제작진은 파괴되는 구조물들을 목조 구조물로만 한정하고 석조 성벽은 큰 타격을 입지 않는 것으로 묘사했다.[130][131]
- 드라마에서는 양쪽 군대가 발화용 포탄인 맹화유를 사용한다. 동아시아에서 오대십국시대부터 사용한 맹화유라면 목조 구조물에 강하고 성벽에는 약한 드라마 내의 투석기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고 재현 오류라고 하기도 어렵다. 진짜 문제는 고려에 석유 산지가 없다는 것으로, 본초강목 같은 서적에 고려에 맹화유가 난다는 내용이 있긴 한데 검증된 적은 없는 허구의 내용들이다. # 그러나 약 100년 후인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의 고려 진압군이 서경성을 공략하며 송나라에 다녀온 기술자 조언헌(趙彦獻)이 만든 화구(火毬)라는 불덩이 무기를 투석기로 던져 큰 성과를 내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석유를 수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군의 주력 무기인 각궁의 주 재료인 물소뿔 역시 수입품이었으므로 해외 교역이 더 활발했던 고려시대에 화기 원료가 충원 불가능한 물자는 아니었다.[132]
- 맹화유를 항아리에 담아서 투석기를 통해 쏘는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원작의 묘사를 가져온 것이다. 원작에서 묘사된 맹화유와 함마갱 외에 드라마에 나오지 않은 다큐멘터리의 흥화진 방어전 관련 묘사는 흥화진 전투(1010년) 문서에 반영되어 있다.
- 투석기를 날려서 조금씩 사거리를 조정하는 거란과 불화살의 위치에 정확히 포탄을 날리는 고려군 간의 정확도 차이는 수비 측의 이점에 따른 것이다. 무기의 사거리를 처음부터 측정해야 하는 공격 측과 달리, 현지에 주둔하는 수비군은 훈련이나 지형지물을 숙지해 거리를 미리 숙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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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말미에 거란이 고려 포로들을 인간 방패막이로 삼아 흥화진 북문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1차 흥화진 전투가 시작할 때, 거란군이 고려의 아이들과 노인들을 성 앞에서 참살해 고려군의 기세를 꺾으려 들었던 일화[134]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흥화진에서 함께 요군의 후방을 유린할
김숙흥에겐 요군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는 서사가 있지만 양규에겐 별도의 서사가 없었단 점을 보완한 에피소드로 보인다.[135]
이런 식으로 점령지의 민간인 포로들을 이용해서 적의 사기를 꺾으려는 심리전은 실제 역사에서 거란뿐만이 아니라 여러 세력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인데, 현대전에서도 비정규 무장집단에 의해 사용되곤 한다.[136]
- 장연우와 황보유의의 친분이 강조된다. 이 둘은 제2차 여요전쟁 이후 군인들의 영업전을 관리의 녹봉으로 돌리는 정책으로 김훈·최질의 난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는 전쟁 이후 관리들이 녹봉을 제때 받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늘어난 군비를 줄이자는 차원의 임시 방편이었다.[137] 다만 생계의 근간인 토지를 건드리자 전쟁 이후에도 출세하지 못해 경제적 대가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무신들의 불만을 자극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둘은 죽기 직전까지 폭행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숙청되고 나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 갑옷의 방어력도 표현된다. 장교로 보이는 군인이 화살에 맞아 잠시 혼절했다가 별 타격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살을 뽑고 나서 활을 다시 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한국 사극에선 갑옷을 입어도 화살을 맞고 곧바로 죽는 장면이 많은데 천으로 만든 누비 갑옷만 입어도 화살에 의한 치명상은 막을 수 있었다.
- 양규가 병사들을 재우고 혼자 경계하다가 조는 장면에서 전장 정리가 안된 부분이 나온다. 거란군이 걸어놓은 사다리 두어 개가 그대로 남은 장면. 공성전에서 기습은 흔한데 실전이었다면 적에게 통로를 준 장면이다. 정석적으로 보자면 수비군은 공격군의 사다리나 갈고리를 단 밧줄이 성벽에 걸치지 않게 제거하고, 성 내 민간인이라도 동원해서 보초를 세워야 하는 것이 맞다. 연출로 이해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으나, 실제 전쟁사에서 경계 실패로 패배한 전투는 널렸다. 당장 고려사에 기록된 강조부터가 경계 실패로 목이 날아갔다. 오히려 비장한 연출과는 거리가 먼 정석적인 지휘관이었기에 양규는 당대 최강의 요군에게 온갖 굴욕을 안겼다고 보는 것이 옳다.
3.7. 7회
- 식솔을 개경 밖으로 피신시키려는 유진, 최항, 채충순 등의 조정 신료들에게 쓴소리를 한 강감찬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아울러 현종 또한 원정왕후에게 꾸준히 간언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특별히 고려시대 여성의 인권을 의식했다기 보다는 단순한 공처가 묘사에 가깝다. 공처가는 동서고금의 사회상을 막론하고 항상 존재했으며, 고대 로마의 대 카토가 "지중해를 지배하는 것은 로마고, 우리 원로원은 로마를 지배하는 패권자다. 하지만 우리 위에는 마누라라는 또 하나의 패권자가 있다."고 언급했는가 하면 유교가 자리잡은 조선시대에도 현종이 왕비가 무서워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 한 사례도 있었다. 고려 현종 역시 출신의 한계 때문에 제왕학을 배우지 못한 데다가 벼락치기로 제위에 올랐으니 정치적 동지이자 친족인 원정왕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남존여비 사회로 여겨지는 전근대 시대지만 과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강지처로 대표되는 정처, 정실부인의 가정 내 권한이 의외로 큰 편이어서 가장이라도 정처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 고려 3대 왕 정종 때 창설된 고려의 준군사조직인 총 30만의 광군이 언급된다. 본래 광군은 예비군 병력으로 평시에는 공사 등을 담당했기에 즉시 전력감이 아니나, 전쟁 발발로 인해 본군에 편입시켜 삼수채에 주둔하게 했다는 것이 언급된다. 원작 소설에서는 기록상 과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총 10만 대군이 삼수채에 있었다고 소개된다.
- 흥화진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장면에서 불을 붙일 때 사극에서 잘 보여주지 않던 부싯돌을 사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봉화의 연조가 4개인 봉화대는 후대인 고려 의종때 정비된 체계로, 그 이전에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알려진대로 5개로 늘어난다.
- 야율융서가 흥화진 전투의 패장들을 참하려다 소배압이 만류하여 다시 기회를 준다. 드라마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나 소배압은 야율융서의 외척으로 당시 유일하게 황제에게 간언할 수 있는 위치였다. 소배압은 거란 5대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딸이자 야율융서의 누이 위국공주 야율씨와 결혼했다. 아울러 소배압 본인이 승천태후의 오라비[140]의 아들, 즉 조카이기도 했으며 소배압의 장녀가 야율융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즉 소배압에게 있어 야율융서는 처남이자 고종사촌동생, 장인이었다. 이 쪽도 고려만큼이나 족내혼이 복잡한 셈이다.
- 장연우가 탈영하려는 병사들을 눈감아준다. 황보유의는 칼을 빼어 즉결처분하려고 하나 장연우가 덮어주고 본진으로 돌려보낸다. 실제로 당시 삼수채의 고려군 대부분은 6위의 직업군인이 아닌 예비군인 광군 또는 징집병이었기 때문에 사기가 낮았을 가능성이 높아서 드라마처럼 흥화진 소식이 알려지지 않아 탈영병이 속출했으리라는 각색은 개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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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첨이 활을 불에 쪼여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각궁 관리 디테일을 살린 묘사이다. 전통적인
국궁 중
각궁은 수분이 침투하거나 열을 받으면 활에 쓰이는 접착제인
아교(
민어의
부레로 만든 풀) 특성상 즉시 풀리기 때문에 습기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이 문제는 당연히 당시에도 인지해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이 점을 구실로 삼기도 했다.[141] 드라마에서는 딱히 활을 보관하여 건조시킬 장소가 군영 중에 마땅치 않으므로 습기를 말리려는 의미로 불을 쪼이는 묘사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장력이 매우 약한 30파운드 안팎의 활을 준비한 것인지 성인 남성인 배우가 시위를 빠르게 여러 번 당겨대는 모습이 조금 방정맞게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활을 쏘는 과정대로 시위를 엄지손가락으로만 당기는 것보다 주먹쥐고 당기는 게 훨씬 수월하다.
- 드라마에서는 고려군이 숙련도 문제 때문에 한데 뭉쳐 훈련에 급급한 것으로 나오므로, 통주 전투 이전에 최사위가 귀주 북쪽의 육돈(恧頓)·탕정(湯井)·서성(曙星)에서 패한 일이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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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철갑기병이 묘사된다. 보병 위주인 고려군에 비해 전투력이 강하지만 검차에 격퇴된다. 다만 폭력성 완화를 위한 것인지 말이 검차를 보고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기수가 낙마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드라마에서 철갑기병으로 불리는 거란의 중장기병은 벽화에는 마갑을 착용한 것으로 나오나, 이 전투에서는 말의 컨디션 및 예산 문제인지 제대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가죽 찰갑을 씌운 것 같은데 감싸는 부위가 적고 두께도 얇아 얼핏 보면 마갑이라기보다 안장 장식에 가까워 보인다. < 태종 이방원> 때 말 학대 사건이 해당 재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142] 다만 거란의 기록에도 철제 마갑은 가장 좋은 말만이 버텨낼 수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 군사서적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검차와, 그 검차로 짜는 전차진의 개념도. 조선 후기의 병법서라 궁노수 대신 총수가 원거리 투사무기 운용병을 대신했다. 출처링크 |
- 고려군이 호각으로 지휘하는 묘사가 나온다. < 남한산성>에서 장수들이 지휘를 위해 호각을 쓴 장면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호루라기의 경우 십자군 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에서 장궁수들에게 명령하기 위해서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에서 쓰였다는 기록이 있어 실제로 과거 군대에서 쓰이기도 했으나[143] 사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지휘 도구는 고취(鼓吹, 북과 피리, 혹은 나발)로 대표되는 군악대와 깃발 등으로 이루어졌다. 군악대는 현대에는 주로 행진, 열병식 등 행사에서 활동하지만 본디 전투 목적으로 탄생했다. 전자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 시대에 지휘관의 명령을 하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팔이나 북을 사용해 명령을 전달하고 박자를 맞춤으로써 진형을 유지, 변경하거나 부대 간격 등을 능동적으로 조정하는 등의 역할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고취는 곧 지휘권을 의미했기에 이를 두고 장수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144] 또한 과거의 전쟁에서는 깃발, 즉 군기가 병력 그 자체를 의미했으며 기수 없는 백 명보다 기수가 있는 열 명의 부대가 더 강하다고 할 만큼 중요한 도구였다. 음성 증폭 장치가 없던 시절에 수만 명이 뒤엉켜 싸우는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깃발 정도였으므로 부대를 결집하여 생명과도 같은 대형을 유지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표식으로 중요한 신호 수단이었다.
- 고려군의 투석병이 나와 투석구를 이용해서 윈드밀 피칭으로 돌을 날려보내는 것까지 구현했다. 투석병은 그동안 한국 사극에서 묘사되지 않았다. 중국사에서는 별 기록이 없으나 한국과 일본은 투석을 많이 사용했다. 일본이야 전국시대를 다루는 각종 매체에서 아주 많이 보일 정도로 잘 써먹었고,[145] 한국 역시 고대로부터 석전이라는 전통놀이까지 있을 정도로 투석을 중요시했다. 이는 산악 방어전이 많아 고지대에서 저지대로의 투석이 막강했던 한민족 국가의 전쟁 양상에 기인한다. 고려군에서 투석병과는 정규 편제였다.[146]
- 강조와 이현운이 군사에 대해 논하며 원작 소설의 묘사대로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사 강조열전에 따르면 이는 탄기(彈棋 또는 彈棊)로 나오는데, 탄기라는 게임에 대해 대한민국이나 중국, 일본의 오래된 문헌들을 보면 당시 즐겨 했던 게임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인 돌의 배치나 규칙 설명은 현대의 알까기와는 다르긴 하며, 아이들 장난 같은 놀이로 취급되는 현대의 알까기와 달리 중국에서는 사대부들이나 황제도 즐겨 하던 군자의 놀이로 취급되는 고상한 놀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려사 강조 열전의 탄기 묘사는 강조가 애들 장난 같은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당대 고려의 높으신 분들의 여유와 방심을 보여주는 묘사이다. 또한 탄기의 뜻이 바둑을 두는 행위로 나오는 사전도 있다.
- 통주 전투의 패배 과정 묘사가 사료와 다르다. 사료에서는 통주 서쪽에 진영을 만들었고, 그 중 강조는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며 거란군의 공격을 몇 번 격퇴하다 보니 방심하여 탄기를 하다 거란의 선봉장 야율분노가 상온(詳穩) 야율적로를 거느리고 세 강의 합류 지점에 있었던 고려 본군 진영을 정면으로 돌파하자 더 들어오게 두라며 여유를 부리다 패배하고 강조는 담요에 싸여 포획된다.[147] 반면 드라마에서는 정체가 불분명한 탄기 대신 바둑을 두는 것은 비슷하나, 단순히 방심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전투를 치른 뒤 이현운과 다음 전략을 논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게다가 거란군의 기습 소식을 들었을 때도 "대군이 올 만한 길목은 모두 막아두었으니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다"는 나름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148] 게다가 바둑 도중 강조가 언급한 거란군의 다음 전술은 소배압의 계획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그러나 야율분노의 독단적인 기습이 변수가 되어 거란군은 군량미를 공격하여 본진의 병력을 바깥으로 유인하고 그 사이에 본진에 남은 강조를 포획한 뒤 높은 곳에 걸어두고 불을 밝혀 사령관 포획 소식을 선전하여 고려군 전열을 무너뜨렸다는 각색이다. 사료와 드라마를 비교하면 고려군 전열 돌파와 강조 포획의 선후관계가 다르다. 또 강조가 방심했다는 묘사를 지우는 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친 고려군의 승리가 누락되었다.[149][150]
- 강조와 이현운이 거란군의 전술을 논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 자문으로 참여했던 학자들이 지적한 부분과 비슷하다. 이 다큐에서 드라마 자문이기도 한 길승수 작가의 의견에 따르면 통주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강조의 방심보단 실전 경험이 많은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통주 전투에서 사용된 거란군의 전술은 일단 소규모 기병부대를 보내 탐색전을 진행하고 약점을 파악한 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 중에서도 약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함과 동시에 별동대로 후방의 퇴로를 차단해버린 것이라고 한다.
- 강조가 '적의 공격을 받아내며 계속 들어오게 하라'는 고려사에도 기록된 발언을 한다.[151] 물론 방심한 강조는 야율분노의 병력에 기습당해 거란군에 잡힌다. 다만 발언의 뉘앙스는 좀 다른데, 고려사에서는 방심을 상징하는 뉘앙스지만 본작에서는 음식 드립은 치지 않고 "거듭 방어하며 적의 마음이 조급해지길 기다린 다음 역공한다"라는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발언이다. 전략으로서 얼마나 유효한지는 둘째치고 발언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 드라마에서는 정면 돌파와 강조 포획의 순서가 바뀌어서 화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실은 강조 포획 과정에서도 고려군의 피해가 매우 컸다. 거란군은 고려군 지휘부 중 강조, 이현운과 도관원외랑 노전(盧戩), 감찰어사 노의(盧顗),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은 사로잡고 노정(盧頲)과 사재승 서숭(徐崧), 주부 노제(盧濟) 등을 죽였다. 거란이 본진을 격파하고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리면서 고려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드라마에도 나오는 것처럼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일제히 공격해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 통주 전투의 대패 직후이자 거란군에 잡혀가기 직전 패배에 망연자실한 강조 앞에 죽은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 꾸짖고 강조가 이에 혼비백산하여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고려사의 서술은 묘사되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은 고려사 강조 열전 내에서도 너무 설화적인 요소가 강한 부분이라 뺀 듯 하다.[152] 또 고려사에서는 살을 발라내는 고문을 당하다 마지막에 참수된 것을 약간 비틀어서 도끼로 여러 차례 난도질 당해 죽는 것으로 바뀌었다.
3.8. 8회
- 야율분노가 야밤 중 소수 특작부대의 기습으로 강조를 사로잡은 것을 보고하자 하루 정도 더 기다려서 고려군 전체에 대한 섬멸전을 노리던 소배압이 자신의 빅 픽처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분노하여 야율분노를 걷어차고 일갈을 날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야율분노가 고려군과 거란군의 회전 중 정당하게(?) 강조의 본진을 들이쳐서 회전으로 이들을 대파하고 고려군을 박살냈기 때문에 그가 소배압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는 2차 침입 이후로는 볼 일이 없는 야율분노와는 달리 소배압은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귀주 대첩에서 강감찬의 맞수로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배압을 판 전체를 읽을 줄 아는 지장으로 만들어서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53] 다만 치열한 전면전을 벌이는 도중 지휘관의 오만함과 방심으로 인해 지휘부가 돌파당하여 참패한 실제 역사와는 달리 본작에서는 '강조가 기습당했기 때문에[154] 고려군이 제대로 된 회전도 해보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패했다'는 식으로 통주 전투 참패가 윤색되는 감도 있다.
- 강조가 사로잡혀 지휘부가 붕괴된 고려군이 각지로 흩어져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가거나 인근 성으로 대피하여 방어 체계를 정비한다. 드라마에서는 김훈이 적을 막는 동안 최사위가 흩어진 패잔병들을 수습해 각각 곽주와 서경으로 배치하여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개경에 전투 결과를 보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최사위의 개입 말고는 실제 사실을 반영한 각색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던 고려군은 거란군에 추격당하다 완항령에서 매복한 좌우기군장군 김훈과 김계부, 이원, 신영한 등이 거란군의 추격을 막아 병력을 보존한 채 퇴각할 수 있었다. 완항령 전투는 통주 전투 패배로 인한 고려군의 추가적 피해를 틀어 막은 꽤 의미 있는 전투인데, 드라마에서는 김훈의 대사로만 언급되고 묘사되진 않았다.
- 강조가 잡힌 뒤 통군사인 최사위가 퇴각 명령을 내릴 때 고려의 장수들에게 마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고 떠밀리듯이 퇴각 의사만 밝힌 명령을 내려 고려군이 장수와 군사 가릴 수 없이 아무렇게나 퇴각하며 뿔뿔히 흩어지게 되어 사실상 30만 고려군을 방치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되었다.[155]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패전 기록이 있고 군사적인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9년 뒤에 현종에게 공신으로 임명되는 만큼 그가 극 중 묘사처럼 큰 잘못을 범할만큼 무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나마 극 중 현종이 강조가 잡혔기에 고려군이 진즉에 와해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였고, 최사위가 군사들을 다시 수습하고 있다는 것도 언급되었다.
-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죽은 척 개그를 하면서 영주로 도주하는데, 사실 장연우와 황보유의는 이 때 어디로 도주했는지 기록에 없어서 각색으로 보인다. 이현운이 거란 군영에서 보고하길 곽주성의 방어사와 영주성의 안북도호부사는 심약한 자들 이라서 공격을 시작하면 알아서 도망갈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장연우 일행이 영주성에 도착할 때 장교들이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도망치고 도호부사가 성을 버렸다는 병사의 외침과 함께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묘사가 나온다. 이름이 나오진 않았지만 당시 영주성 책임자는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박섬으로 훗날 현종의 몽진 행렬에 합류해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포위에 대항하는 공을 세우기도 해서 면책되었다.
- 반면에 곽주 방어사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한 것은 사실인데, 음력 1010년 12월 거란군이 곽주(郭州)를 침입하자 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가 밤에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곽주에 있던 이들이 모두 도주한 것은 아니었고 통주 전투에서 흩어진 지휘부도 합류했기 때문에 우습유(右拾遺) 승이인(乘里仁)과 대장군(大將軍) 대회덕(大懷德)·신영한(申寧漢), 공부낭중(工部郞中)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禮部郞中) 간영언(簡英彥) 등이 남아 싸웠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드라마에서는 단순히 약점을 공략 당해 함락되는 걸로 간단하게 묘사 되었다.
- 강조와 이현운을 포함해 노전, 노의 등 총 6명의 장수가 사로잡힌 것이 나오고, 이들은 과거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거란의 한기와 재회한다. 실제 한기가 제2차 여요전쟁에 종군한 건 사실이지만, 이들이 통주 전투 이후에 만났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드라마의 각색이다.
- 야율융서가 강조와 이현운 등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이냐고 묻자 이현운은 고려사 강조 열전에 나온 대사[156]를 그대로 말하며 앞으로 야율융서를 섬기겠다고 한다. 이현운은 분기탱천한 강조에게 발길질을 당하는데, 이 역시 고려사 강조 열전에 실제로 나오는 기록이다. 다만 네놈도 고려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강조가 꾸짖는 말은 생략되었다. 원래 역사에서 강조는 끝까지 야율융서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살을 발라내는 고문을 당하다가 처형되지만, 당연히 지상파 심의상 그런 잔인한 부분을 대놓고 내보낼 수는 없고 전개 속도 문제도 있으니 여기서는 강조가 야만인이라고 막말을 하자 극대노한 야율융서가 친히 강조를 부월로 여러 차례 찍어 참살하고 목을 베어 군영에 효수한다. 이후 강조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거란이 강조를 반역자로 칭했으므로 본작과 비슷한 결과를 맞았으리라고 볼 여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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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운이 거란에 전향하여 고려군의 약점을 드러내고 곽주(평안북도 곽산군)와 영주 함락에 기여한다. 여기서 이현운이 곽주성의 약점으로 북쪽 문을 언급하는데 실제 곽주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동, 서, 남 세곳에 성문이 있지만, 특이한 점으로 북쪽에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이 있다고 한다. 이 비밀통로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의문이나, 만약 고려시대에 개축했을 당시에도 존재했다면, 후일 양규와 고려군이 이곳을 탈환했을 때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거란에 항복한 이후의 이현운의 행적은 어느 사료에도 없다. 이 때 사로잡힌 고려 장수들 중 일부가 고려의 성에 항복을 종용하러 다니지만 이현운의 모습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데, 드라마에서는 원작 소설을 반영하여 매국노가 된 그가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으로 갔다가 분노한 고려군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한기에게 청탁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소설에서 이현운은 결국 흥화진에 사신으로 갔다가 양규에 의해 죽기에 그의 최후 역시 이렇게 그려질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다.
- 강조가 패하여 잡혀간 이후 현종이 강조의 부인을 불러 사실을 알리고 위로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강조는 하필 고려의 기록이 대거 소실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고 반역자로 기억되어서 제대로 된 가족 관계조차도 찾기 힘든 인물이다. 다만 강조가 신천 강씨라는 추측은 있다. 강조(고려) 문서 참조.
- 최질이 항복을 종용하러 온 배반자 노전과 요의 합문사 마수를 감금하고 항전을 결의한 것은 사실이다. 『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통주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도록 하니, 성 안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노전과 마수를 붙잡고, 이내 방어사(防禦使) 이원구(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자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하나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노전 같은 경우 고려 덕종 때까지 고위직에 오른 기록이 있고, 먼 훗날인 충선왕의 즉위년에는 노전과 더불어 서희, 양규, 하공진의 손자와 현손에게 관직을 주라는 내용의 교서를 충선왕이 내린 기록이 기재돼 있는지라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요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세 명처럼 다시 고려군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다. 따라서 이후의 전개를 좀 더 지켜볼 여지는 있다.[157]
- 드라마에선 정당문학 최항의 대사를 통해 야율융서가 고려를 침공한 진짜 목적은 어머니 승천황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인의 권위를 확립하고 진정한 거란의 황제로 거듭나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여 복속시키는 성과를 거두려 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 시기에 최항이 실제 항복을 주청하지는 않았으며, 이 시기에 최항은 그저 열전 등에 현종에게 팔관회 부활을 청했던 기록밖에는 없다. 또한 실제 거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고려 목종의 역신 강조를 잡고 고려를 복속시키는 것이라는 표면적인 목적 외에는 딱히 나온 바가 없다.[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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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 거란과 맺은 '
전연의 맹'을
채충순이 언급한다. 다만
북송과 고려는 상황이 전혀 달랐으며, 오히려 북송의 경우가 여요 전쟁 이상으로 선전하여 수도와 국체를 온전히 지키는데 성공한 사례이다. 1004년의 송은 국경의 영주와 정주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고, 요 성종과 예지황후가 친정을 나온 거란에 맞서
황제가 친정하여 전주에서 반격을 가했다. 여기서 전주의 방어군은 요의 원정군 총사령관 소달람까지 저격해 요군의 예봉을 꺾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송군은 수도 코앞에 있는 수십 만의 기병 군단이 부담스러웠고, 요군은 송의 금군이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는 영주, 정주의 수비군을 중심으로 하북의 송군이 퇴로를 막고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양측 모두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자, 송 · 요 양국은 화친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고려와 송의 상황을 서로 비교하자면, 요군이 국경의 요새를 우회해 깊숙히 진격해온 것은 양국이 모두 맞닥뜨린 사실이지만, 송은 금군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텨낸 반면에 고려는 통주 전투로 주력군이 붕괴해 버렸다. 전연의 맹을 맺은 후, 송은 세폐를 보내는 조건으로 오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고려는 2차 여요전쟁에서 수도 개경이 결국엔 함락되었고 요군을 격퇴한 뒤에도 다시 요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아내야 했으며 요의 침공 의지를 1019년,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꺾은 후에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 7회와 8회에 걸쳐서 현종이 자주 백성들을 만나면서 "전투는 고려군이 이기고 있으며 거란군을 물리칠 것이니 백성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오!"라는 무책임한 말을 날리는 오리지널 각색이 있는데, 당연히 실제 현종은 이런 무책임한 행위를 실제 역사에서 하고 다니진 않았다.[159] 이 때 현종은 1년(1010년) 음력 11월에 거란이 침입이 통보한 후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임어하여 연악(宴樂)을 관람하였다고 나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애초에 저 시대에 군주가 저렇게 수시로 궁밖에 나가서 백성들을 무작위로 만나는 것 자체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군주는 함부로 자기 의견을 아무한테나 표출하고 다닐 수 없다. 왕의 모든 의사표명은 관련 기구를 거쳐서 나온다.
- 강감찬이 현종에게, 거란 측에 고려의 군주가 친조할 것이라는 거짓 표문을 올리고 그 사이 동북면의 군사를 서경으로 이동시켜 거란에 대항하자고 고한다. 또한 강감찬은, 만약 현종이 정말로 거란 황제에게 친조한다면 "자주적인 나라가 아니라 거란의 속국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며[160] 바꾸어야 했고 친조 약속은 언제까지나 시간 벌이용 계책임을 언급하고, 이어 본인이 거짓 표문을 지어 직접 사신으로 가겠다고 고한다.
- 고려가 동북면 군사를 동원해 서경을 방어한 것이나 거란 상대로 친조 약속이라는 사기를 치며 시간을 끈 것은 사실이다. 다만 통주 전투 패배 소식을 받아든 조정이 소환한 동북면 군대가 서경에 도착한 시점과 친조 사절이 거란 진영에 도착한 시점은 거의 비슷했으며, 친조 블러핑을 주도한 것이 강감찬이라는 것은 드라마의 각색이다.[161] 동북면 군대의 신속한 기동 덕분에 친조 사절은 불과 하루 정도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었다.
- 서경 공방전 당시 사절로 간 인물은 누군지 불명이고, 몽진 이후 사절로 가 시간을 끌었던 사람은 하공진이므로 강감찬의 사신행은 드라마의 오리지널 각색이다. 강감찬이 당시 외교를 담당하는 예부시랑이기도 했고 후일의 한조처럼 예부시랑 직을 맡아 외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도 있고 하니 납득 불가능한 각색은 아니다. 강감찬은 동북면 군대 패배 이후 현종에게 몽진을 주청한 것 외엔 딱히 행적이 없는데도 그것만으로도 큰 공으로 인정받고 우대받은 데다 드라마 주역의 하나이므로 그러한 우대를 납득 가능한 오리지널 플롯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 곽주와 영주 함락과 친조 사절 도착 타임라인은 『고려사절요』를 따라갔다. 『요사』의 타임라인을 바탕으로 실제로는 통주 전투 패배 6일 후인 음력 11월 30일에 현종의 친조 사신이 도착했고 시간 끌기에 속아서 열받은 요 성종이 곽주를 음력 12월 6일에 함락시켰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는 친조 사절 도착을 음력 12월 10일 기사에 실었다. 음력 12월 11일에 서경성 북문에 도착한 한기의 기병 200명이 이동하는 데 11일이나 걸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고려사절요의 시간 순서가 더 합리적이다.
3.9. 9회
9회 방영분은 상당수가 강감찬의 본작 오리지널 행적을 집어 넣었기에 창작 요소가 많다.[162] 다만 이 와중에서도 2차 여요전쟁의 전개 과정을 상당히 집어 넣었으므로 우선 통주 전투 후 고려의 상황을 제2차 여요전쟁 문서의 내용을 빌어 시간 순으로 설명하도록 한다.- 강감찬이 야율융서를 만나 현종의 거짓 친조 표문을 전하면서 현종을 가리켜 '성상', '군주'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성상(聖上)이라는 용어 자체는 원칙상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라 현종을 가리켜 성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야율융서 앞에서 현종을 황제라고 호칭한 셈이라 완전히 고증을 지킬려면 성상이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 원래 역사에서 현종은 통주 전투로 서북면의 주력군이 소멸한 소식을 듣자,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과 중랑장 지채문[163]에게 급히 서경으로 갈 것을 명했다. 드라마에서는 탁사정과 지채문 중 9회까지 지채문만 보이는데 이들이 이끄는 동북면 군사들이 통주 전투 후 서경으로 움직였다.[164] 거란군은 통주 전투 승리 후 곽주를 점령할 때까지 강동 6주에서 또 열흘 가량 발이 묶였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동북면 군대의 기동은 매우 신속했다. 한편 요 성종은 침공 초기에 여러 성들에 항복을 권했는데, 여기에 서경이 응답했다. 서경부유수 원종석을 비롯한 서경 수뇌부는 통주 전투 이후 항복을 결정했고 이것은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
- 현종이 조근[165]하겠다는 시간끌기용 사신이 성종의 거란군 본대에 도착했다. 8회 문단에서도 설명했지만 이 때 사신이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는데 드라마에서는 이를 강감찬으로 설정했다.
- 야율융서가 강감찬의 친조 약속을 받고 타초곡을 금하라 명하는데 성종이 고려의 항복을 기뻐하며 약탈을 금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개경유수[166]로 정사사인 마보우(馬保佑)를 임명하여 태자태사 을름(乙凜)의 기병 1,000명의 호위를 받아 개경으로 부임하게 하고, 그 길에 합문인진사 한기(韓杞)[167]의 기병 200명을 서경으로 향하도록 했다.[168] 드라마에서는 자체적인 타임라인상 한기 파견이 친조 사절 도착과 개경유수 파견 전이라 마보우나 을름은 나오지 않았다.
- 극적인 긴장감을 위해서인지, 서경과 관련된 행보가 역사와 상당히 다르다. 원래 역사에서는 지채문이 서경성에 먼저 도착했으나 원종석이 성문을 닫은 상태였다. 지채문 휘하의 최창이 대신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성에 들어가 궁궐 남쪽에 머무르며 원종석을 말렸으나 듣지 않자 지채문은 즉각 항복 사절을 추격해 죽이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음력 12월 11일, 아무것도 모른 채 서경의 북문 앞까지 온 한기의 군사를 탁사정과 지채문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이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나아가 을름과 마보우의 거란군도 패퇴시켰다. 즉 원래 역사에선 지채문의 군대가 서경과 접촉한 것이 먼저고 한기가 죽은 것이 그 다음이며 한기는 드라마와 달리 원종석과 접촉하기도 전에 지채문에게 살해당했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한기가 원종석과 접촉한 후에 원종석의 배신으로 고려의 기만책을 알게 되고, 강감찬을 끌고 거란 진영으로 돌아가다 지채문의 선발대와 마주쳐서 강감찬이 겨우 구출되는 등 실제 역사를 적당히 비틀어서 긴박감을 연출했다.
- 강감찬이 서경 부유수의 배신으로 포박되어 한기 등에 의해 거란 진영으로 가던 도중 지채문에게 구출되고 이후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거란 군영으로 가는 것 역시 픽션이다.
- 서경의 행정 기관은 중앙의 조정을 모방한 형태로서 크게 민정, 군사, 사법 세 부분으로 나뉘어 다른 지방과 체계가 달랐다. 사법을 담당하는 분대어사 조자기가 민정을 담당하는 부유수 원종석의 뜻과 달리 자체적으로 지채문과 접촉하여 아무 문제 없이 성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독립적인 권한과 동원 가능한 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69][170] 그럼에도 드라마에서 조자기가 원종석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묘사가 추가된 것은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기 위한 각색이다. 명령을 따랐을 뿐 문서 참조.
- 소배압이 강감찬에게 자신의 동생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을 언급한다.[171] 다만 소배압과 강감찬이 이때 만났다는 건 당연히 픽션이다.[172] 고려에는 신하도 많을 텐데 당신 같은 나이 많은 신하가 항복 사신으로 왔느냐고 말하는 소배압에게 강감찬이 그러는 거란도 당신 같은 노장이 참전하지 않느냐고 맞서는데 강감찬은 948년 생으로 제2차 여요전쟁 때 이미 환갑이 넘었고 소배압은 요 성종 야율융서가 즉위한 983년에 이미 황제의 친위군인 피실군의 장군인 좌피실 상온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복(몽골) 원정에서 큰 전공을 세워 성종의 신임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최소한 군문에 있은지 30여년은 넘었다고 볼 수 있기에 충분히 노장이라고 할 만했다. 본작은 이런 기록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원정왕후가 거란이 서경까지 함락시키면 땅을 떼어줘서라도 나라를 지키라고 한다. 당장 원정왕후의 아버지 성종 대에도 할지론을 통해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려고 했으나, 서희가 담판을 벌인 덕에 보전할 수 있었으며 강동 6주까지 추가로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고려는 거란군과의 몇 차례 교전에서 승리했기에 할지론을 잠재우고 서희의 담판을 이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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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부의 말을 통해 당시 지방에서는 호장의 힘이 상당히 셌다는 것이 언급된다. 고려의 지방 행정 제도는 주현의 읍사에서 계수관이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들을 감독하는 체제였다. 지방 향리들의 힘은 막강하여 신라의 상대등을 모방한 당대등, 대등이란 직책을 썼고 병부(兵部)와 창부(倉部)를 거느려 군권과 징세권까지 보유했다. 고려 조정은 성종 2년에 와서야 향리 조직을 개편해 이들의 직책을 호장과 부호장으로 개칭하는 것으로 통제권을 강화하고 향리들의 권위를 꺾었다. 그리고 제3차 여요 전쟁을 1년 앞둔 1018년에 지역 별로 향리의 정원을 정하고 공복도 제정했다. 조정에서는 이미 광종대에 공복이 제정되고 조직 개편도 착실히 이뤄졌지만, 지방 향리들의 공복 제정과 조직 개편은 그보다 한참 뒤에 이뤄졌던 것을 보면 고려의 지방 통제력이 미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호장들의 아들들을 병(군)역에서 편법으로 면제해주는 부정을 목격한 절도사 김은부의 딸이 명색이 절도사가 되어 마치 허수아비처럼 호장들의 비위나 맞추셨던 거냐고 따지는 대목이 나온다. 원성왕후의 결기가 돋보이는 대목이지만 사실 이 때만 해도 각 지방의 독립성이 강해 호족들은 영주나 마찬가지였다. 고려, 조선 양대 왕조에서 천년 가까이 지방 통제력을 강화해서 오늘날처럼 중앙이 강하고 지방이 약한 한국 - 북한의 행정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이런 지방 세력의 불만은 고려 국왕이 주는 것도 없이 갈취하기만 한다며 고려 제일의 도적이라고 비판하는 충주 호족 박진의 행적에서 계속 묘사된다.
- 상서좌복야 유진이 고려가 일단 항복해야 발해처럼 멸망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한다. 항복하면 세폐를 바치고 서북면의 영토를 떼어줘야 함을 언급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는 거란의 막강함을 재설명하고 드라마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 성종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발해의 멸망과 전연의 맹을 시청자들에게 상기시킨 것에 가깝다.
3.10. 10회
- 9회뿐만 아니라 10회에서의 강감찬 관련 내용들은 전부 드라마의 창작이다. 강감찬과 만난 장연우와 황보유의의 묘사도 마찬가지. 다만 이들이 통주 전투 패배 후 개경으로 돌아가 조정에 합류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장연우가 계속 폼 잡으며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인다.'고 자꾸 시를 지으려다가 황보유의에게 타박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단순한 개그 장면일 수도 있으나 별이 많고 밝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양규의 곽주 전투 당시 곽주에 유성이 떨어진 것의 복선일지도 모른다.
- 장연우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갑자기 시를 짓는 개그 장면을 찍는데, 실제로 장연우는 문학에 대한 소양을 인정받아 향찰로 전해지던 고려가요를 바탕으로 그가 지은 한시 〈한송정곡(寒松亭曲)〉이 『 동문선』에 실렸다. #
- 원래는 서경에 지채문이 도착한 후 지채문 휘하의 최창이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닫힌 문을 열고 성에 들어가 궁궐 남쪽에 머물며 거란 사절을 억류하라고 원종석과 실랑이를 벌였으나 듣지 않자 지채문과 모의하여 거란 사절을 추격해 죽이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그런데 막상 서경의 민심이 뒤숭숭하다보니 지채문은 성 밖 남쪽으로 나가서 주둔하다 탁사정의 주력군이 서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다시 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실랑이를 모두 날리고 조자기가 문을 열어주면서 지채문이 낭아봉으로 원종석을 곧바로 쳐 죽이고 효수하는 것으로 내용을 축소했다. 한편 원종석 살해 자체는 사료에는 없는 추정이다. 지채문이 거란 사절을 추격하여 죽였을 때나 탁사정이 합류하고 한기와 마보우, 을름의 기병을 격퇴했을 때 원종석까지 휘말려 죽은 것으로 추정 또는 오인된 것 같다.
- 채충순이 서희를 언급할 때 염윤(廉允)이라고 부르고 여기에 자막으로 서희의 자(字)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 고려사』 서희 열전에 따르면, 염윤은 서희의 자가 아니라 소자(小字), 즉 아명이다. 그리고 설령 자라고 해도 서희는 목종 때까지 조정에 있던 선배이고, 채충순은 목종 대부터 관직이 확인되는 한참 후배라 저렇게 다짜고짜 자를 부르는 건 예절이 아니었다. 정 부르려면 서희의 관직인 태보 내사령이라고 하던가, 서희의 시호인 '장위공'이라고 부르는게 훨씬 자연스럽다.
- 친조 표문을 짓는 과정에서 패싱당한 유진이 사직을 요청하고 현종은 그것을 윤허하고 다시 복귀를 청하는데 원래 역사엔 그런 기록은 없고 각색이다. 사실 당시 고려 조정에 항복파와 주전파가 얼마나 되었는지, 현종이 친조를 청하면서 요 성종을 속이는 거짓말을 할 때 얼마나 그 의견에 동의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종이 몽진할 때 현종을 버리고 간 신하들을 보건데 내심 항복하기를 원하거나 싸우고 싶지 않았던 신료들이 드라마에서처럼 많았음은 짐작할 수 있다.
- 서경에서 거란과 싸운 승려 법언과 승병들이 언급되는데,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 법언은 탁사정과 함께 함께 군사 9천을 이끌고 1011년 1월 24일(음력 1010년 12월 12일), 임원역(林原驛, 오늘날의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남쪽에서 거란군 3천여 명을 살해하는 전공을 거두고 전사했고, 이에 현종은 그를 수좌(首座)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10회의 서경성 전투는 예산이 없는 것인지 시간이 없는 것인지 원 역사 서경성 전투보다 묘사가 많이 축소된 편이다.[173]
- 법언의 승리 다음날 지채문의 마탄(馬灘, 말여울, 평양시 승호구역 봉도리) 전투도 많이 축소된 편이다. 본작에서는 지채문이 그냥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거란의 매복 궁수대에 당한 걸로 나오는데, 원래는 지채문이 나가 싸우자 거란군이 패배해 달아났다. 이에 서경성의 군사를 더 이끌고 나와 추격했으나, 거란군이 군대를 돌려 고려군을 격파한 거란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이후 지채문 휘하 군대의 기록이 없어지고, 음력 12월 27일에 개경에 도착한다. 따라서 지채문 군대는 4일 가량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다가, 음력 12월 17일 거란의 성종이 서경 포위를 풀고 이동할 때 겨우 개경으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4]
- 양규가 야간을 틈타 흥화진에서 출격하여 김숙흥과 만나는 장면에서 당장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무장도 가볍게 하고 말발굽마저 헝겊으로 덮은 양규가 김숙흥과 큰 소리로 농담하며 대화하거나 김숙흥이 불빛 없는 산에서 활을 쏘는 자세로 장난을 거는 부분은 작품 분위기에 환기를 넣기 위해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연출한 장면이다. 만약 실제 상황이었으면 김숙흥은 아군에게 화살을 맞았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양규는 김숙흥과 소리내서 농담할 것이라면 차라리 갑옷을 걸친 게 살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00, 통주에서 1,000명을 동원하여 곽주 탈환전에 나선다. 역사에서 곽주 탈환전에 동원된 병력이 700에 1,000을 더한 것인지, 700에서 1,000이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일단은 평화전쟁 1019의 전례를 따라 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 야율융서가 사찰에 머물며 불공을 드리다가 고려 승려에게 암살될 뻔한 장면은 사료에는 없고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 나오는 거란주가 성 서쪽의 사찰에 머물렀다(契丹主次城西佛寺)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각색이다. 거란군은 서경의 중흥사 탑을 불태웠지만 절 전체를 태우지는 않았다. 지채문 역시 자혜사라는 또 다른 절에 주둔하기도 했기 때문에 서경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킬만한 규모의 절이 여럿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대도수가 사찰에 머무는 야율융서를 습격하려다가 포로가 되었고,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은 대도수를 돕기로 했으나 약속을 깨고 서경성에서 나와 도망치는데 이는 원래 역사에서 지채문이 패하고 서경성이 위태롭자 탁사정이 대도수에게 동문으로 나가 거란군의 주의를 끌도록 하고, 서북면의 주력은 서문으로 나가 거란군을 기습하겠다는 작전을 내놓아 공격을 개시했는데 탁사정이 서문을 나오자마자 거란군을 공격하기는커녕 남쪽으로 도망쳤던 것을 각색한 것이다.
3.11.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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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회 후반부와 겹치면서
서경을 지키던
동북면 군대가 와해되자 전령이 조정에 서경성에 지휘관이 없다고 보고한다.[175] 실제로 서경에 남은 하급 관리와 장교들은 점까지 쳐가며 우왕좌왕하다 결국
강조 행영에서 통군사
최사위 휘하에 있었던 통군녹사
조원을 자기들끼리 지휘관으로 추대해야 했다. 과거에 급제한 지 3년 6개월 정도 된 햇병아리 관리가 지휘관이 되어야 했던 상황에서 서경이 처했을 혼란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관이 부족해 현지 임관을 지시하는 묘사를 통해 상급은커녕 하급 무관마저 부족할 정도로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항전을 이어가고 있는 서경을 그려냈다. 다만 작중 전개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조원이 강민첨과 조자기에게 서경성 내 남은 무신들의 수에 대해 얘기할 때 자신들 이외에 별장은 죽고 교위와 대정인 이들 밖에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지채문 열전에 실린 당시 관련 기록에 따르면, 탁사정 도주 후 서경에 대해 의논할 때 조원과 강민첨 외에 낭장인 홍협, 방휴 등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선 극중 전개와는 달리 최대 낭장급까지만이 전투 가능한 인원이었거나 서경 내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고려사 등에 기록된, 서경의 장군들이 점을 쳐서 보니 길조가 나와서 고려군이 서경을 지킬 수 있었다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서부터 돌풍이 불어 거란군의 진공이 하루 지체된 것 같은 천재지변, 괴력난신의 일화들은 생략되었다.
- 거란군이 서경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직공한다. 거란군은 이 전쟁에서 공성을 일주일 넘게 유지한 적이 없었다. 서경 포위도 5일만에 끝났다. 그러나 드라마에서처럼 신속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고 야율융서의 본대가 개경에 입성할 때까지 14일이 걸렸다. 서경 전투나 개경 진격과 관련된 배역의 개입은 모두 창작이다. 이 때 소배압이 다른 거점없이 곽주 하나에만 의지한 위태로운 보급선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사에서는 양규의 곽주성 함락이 먼저이고 요 성종이 개경 직공을 통해 고려 현종을 사로잡기로 결심한 것이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이다. 즉 원래 역사에서는 아예 거란군의 뒤가 끊긴 상황에서 요 성종이 고려 현종만 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던 것이다.[176]
- 몽진을 주청하면서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강감찬의 대사는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기재된 강감찬의 발언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중과부적이기 때문에,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今日之事, 罪在康兆, 非所恤也. 但衆寡不敵, 當避其鋒, 徐圖興復耳)"을 그대로 따 온 것이다. 다만 고려사 원문에는 "오늘의 죄는 강조에게 있다"고 강조를 탓하는 표현을 하는데, 이 표현은 야율융서를 기만하면서 비슷한 발언을 하는 것으로 각색해서 현종의 면전에서는 강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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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개경 수호 의지를 다지고 방어 태세를 갖춘 것은 사료에서 거란군의 서경 포위 해제와 현종의 몽진 결정 사이에 떠있는 11일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드라마의 창작이다.[177]
통주 전투나
서경 전투처럼 큰 전투를 치를 때마다 거란군의 진격이 열흘 가량 붕 뜨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주변 거점 공략이나
현지 보급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개경 쪽에서는 서경의 상황을
지채문이 도착하고 나서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고, 지채문 도착 바로 다음날 몽진을 떠났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절령에서 방어 태세를 갖출 여유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채문이 서경 상황에 대해 보고한 기록이 실려있는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 따르면 지채문과 같이 서경 전투에 참전했던 이원과 최창이 지채문보다 빠른 시기에 개경에 와서 현종을 만나 호종을 자청했으나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종과 개경 조정이 서경의 상황을 좀 더 일찍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요사』 성종 본기 기록을 보면 요 성종이 소배압과 야율분노를 보내 개경을 공격하게 했는데, 이후 고려병을 만나[178] 패배시켰고, 현종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 마침내 개경을 불태우고 청강(淸江)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되어 있어 거란군이 개경 혹은 개경 근처에서 고려군을 마주쳤음이 확인되고 있고,[179][180] 『고려사』에는 현종 몽진 직후 당시 낭중이었던 백행린이란 인물이 무단으로 높은 관직을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했으나 막상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와해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뒤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있는지라 개경 혹은 개경 주변에서 고려와 거란 간의 충돌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사에는 고려군의 패배 후 현종이 개경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에는 백행린이 몽진 이후 군대를 조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미묘한 차이가 있다보니 거란군과 백행린의 군대 간의 충돌 만이 전부인지, 아니면 거란군이 그 전에 그들의 계속된 진격에 미리 주둔 중이었던, 혹은 시간 끌기 등의 목적으로 몽진 호위 병력을 제외하고 남은 정규 고려군과도 싸운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181]
- 현종이 부족한 지휘관을 충당하려고 유배된 장수들을 복직시키려는 장면은 이전에 유배됐던 하공진을 염두에 둔 것이다.
- 현종이 거란군이 밀려와도 자신은 궁에 남을 것이라고 하며 전란이 수습되거든 다른 용손에게 보위를 전하라는 조서를 남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포함하여 몽진 당시의 갈등은 항복 건의를 제외하면 전부 드라마의 창작이긴 하지만, 일단 강조의 종친 강화 정책에 의해 현종을 제외하고도 광종 당시 폐서인된 효은태자(동양군)의 자식들이 종친으로 복권된 상태였으므로 드라마에서 언급된 다른 용손의 존재는 있었다.[182][183]
- 몽진 당시 기록이 없는 강감찬의 행적을 개경에 남아 거란군과 마주한다는 설정으로 창작했다. 현종은 2차 여요전쟁 이후 전시에 맡은 자리에서 임무를 철저히 수행한 자들과 그러하지 않고 도망한 자들에 대해 신상필벌을 확실히 했다. 몽진 당시 강감찬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전후 강감찬이 승진을 거듭하여 3차 여요전쟁까지 이끌게 된 것으로 보아 도망간 것이 확실시되는 조정의 몇몇 관리들과는 달리 무엇인가 역할을 수행하였거나 내부적으로 공을 세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김숙흥이 일종의 트로이 목마로 일부러 사로잡힌 후 곽주성 내부에서 몰래 호응하려는 작전을 펼치는데 사실 실제 어떻게 소수의 병력으로 양규와 김숙흥이 다수의 거란군을 상대로 공성을 펼쳐 이를 물리쳤는지는 고려사나 요사 양측의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고려사에 기록된 당시 곽주에 떨어진 큰 유성으로 거란군이 큰 혼란을 겪은 틈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유성은 묘사되지 않았다.
3.12. 12회
- 현종의 명에 따라 유진과 최항은 몽진 도중 헤어지는데 이유는 재상단이 한 번에 잡힐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 요소를 없애려 한 것이라고 나온다. 다만 사서에 나온 대로 채충순은 현종의 몽진을 호종한다. 이때 현종은 후비, 채충순을 비롯한 관료들, 금군 50여명 등과 함께 밤중에 개경을 나섰다.[184] 주전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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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말미에서 나온 곽주성 함락이 그대로 재현되는데, 양규가 야밤중에 야습해 고려군 1,700명으로 6,000명의 거란군을 상대로 공성을 펼쳐 이들을 모두 죽이고 무찌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곽주성 공략에 실제로 나선 병력들이 1,000명인가 1,700명인가는 좀 애매한데, 본작은 1,700명 설을 택했다. 또 본작에서는 곽주성에 있는 주민들을 통주로 옮기고 성을 불태우라고 하는데 양규 열전에서는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고만 나온다.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자칫 '양규가 곽주성을 치니 하늘이 도와 유성이 떨어져 거란군을 공격했다'는 식으로
삼국지연의 등에 묘사되는
괴력난신 전술처럼 보일 소지가 있어서 스토리라인이 망가지니 묘사 자체를 안한 것 같고,[185]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탈환했는지 남은 기록이 없는데다가 워낙 양규의 전공기록 자체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수성군을 무찔렀다는 초인적인 기록이라 제작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양규 장군이 실제로 했을 법한 전략전술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본작에서는 병력의 열세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불을 끈 상태에서 성의 성문들을 에워싼 후 활로 성벽 위의 거란군을 저격만 하는 전술로 공격했고, 거란군이 대군이 포위했다는 착각 속에 전 병력을 성벽 위로 배치한 틈을 타 일부러 포로로 잡힌 김숙흥 및 예하 병력들이 감시병을 죽이고 포로들을 규합하여 성문을 열고 안팎에서 치는 양동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탈환했는지 남은 기록이 없어서 드라마에서의 묘사가 실제 역사와 규합하는지를 확인할 수 없으며,[186] 곽주성 전투 과정에서 최충이 참여하는데, 실제 『고려사』 양규 열전이나 최충 열전에는 없는 본작의 각색이다. 다만 제작진이 최충이 단순 문신이 아니라 무장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참전 용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서 최충의 곽주성 전투 참여 묘사를 넣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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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에 의한 개경 약탈전이 재현되었다. 11회 부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개경은 현종이 몽진한 후 남아있던 오합지졸의 급조 병력이 지키고 있다가 함락되는데, 이 점은 묘사되지 않았다. 원래 성이 이렇게 '명예롭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함락되면 공격 측이 자비를 배풀어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었으며,
약탈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강제조항도 넣었다. 최후까지 항복을 거부했다면, 전투 패배 후 본작 묘사처럼 성 내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하고 거주민은 살해당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통, 공성추가 성문을 처음 때린 시점부터 방어측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가 박탈된다고 보았다. 작중 거란군이 개경을 약탈, 학살하거나 부녀자들을 약취하는 걸 진행하는데, 거란군 장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전근대 시절 저항하던 성을 함락하여 도성(屠城)하고 병사들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적군, 아군 모두 인정하는 승자의 권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거란군은 곽주가 함락됨으로써 보급선이 끊겨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물자를 끌어오기 위해 약탈을 진행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개경이 불타 고려의 본궐인
만월대도 불에 타는데, 본작에서는 아무래도 세트장에 불을 지를 수는 없었는지 개경에서의 방화 행위는 묘사되지 않았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 따르면 거란이 퇴각할 때 불을 질렀다고 하므로 그 때 묘사할 수도 있다.
이 장면에서 풀과 나무가 우거진 장면들이 나오는데, 현종의 몽진과 거란군의 개경 함락은 1010년 음력 12월[187]로 겨울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 옥의 티'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후 현종의 피난 행렬에서도 낙엽과 단풍, 갈대밭이 펼쳐진 점으로 볼 때 위의 약탈 장면과 마찬가지로 여름~가을철에 사전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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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고려 본궐에 주둔 중이던 요 성종과 거란 신료들이 곽주 함락 소식을 듣고 동요하는데, 11회 부분에서도 나왔지만 오히려 곽주가 함락되었기에 다급해진 요 성종이 개경으로 직공을 간 것이라서 선후관계가 뒤바뀌었다.[188] 다만 소배압과 거란 신료들이 "우리는 고려 땅이 남쪽으로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고 고립된 상황에서 언제까지 진격해야 하느냐, 너무 위험하니 이제라도 후퇴해야 한다."라고 진언하고 요 성종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실제 거란군이 당시 맞닥뜨렸던 상황을 잘 묘사한 것이다. 이후
하공진의 블러핑이 먹혔던 것도 거란이 고려의 지리를 잘 몰라 고립된 상황에서 언제까지 진격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현종이 어디까지 도망갔는지 파악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로부터 수백년 전 당 태종 이세민이 요동성을 함락하고 주필산 전투에서 승전한 후 고구려의 약한 거점인 오골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으로 직공을 가는 안건이 제시된 적이 있었는데 당 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입니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합니다."라고 마치 본작의 소배압처럼 만류하여 이세민이 이를 따른 바가 있다. 이렇듯 원 역사에서 요 성종 야율융서의 개경 직공 자체도 비록 통주 전투에서 승전했다고는 하나 본작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대국 천자의 친정치고는 너무 위험했고 자칫 본인의 신상도 위태로울 수 있는 경솔한 행동이 맞았다. 때문에 거란이 마치 장손무기가 지적한 상황처럼 위태로운 보급선과 적의 후방병력을 뒤에 둔 걸 생각하지 않고 진격한 탓에 거란의 주요 적국인 송나라가 특별히 '고려의 대승'이라 기록할 정도로 후퇴할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 이 회차에서 강감찬이 보여준 활약[189]들은 모두 본작의 오리지널 각색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2차 여요전쟁 당시 강감찬의 행적이 워낙 없기에 창작된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다.
- 몽진 일행이 적성현(積城縣)에서 단체로 식사를 하는 와중에 현종이 죄책감에 밥을 못 먹겠다고 하는데, 몽진 도중은 아니지만 실제로 제2차 여요전쟁 1년 후인 1012년(현종 재위 3년차) 2월, 현종이 전란으로 백성들이 풍족하지 못한데 본인만 풍족하게 살 수는 없다며 반찬 수를 줄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이 묘사는 해당 기록의 각색으로 볼 수 있다.
- 충주 호장 박진이 현종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회차 후반에 암살단을 꾸려 현종 일행을 죽이려 한다. 이것은 ' 박진' 문서에서도 설명되었지만, 현종이 피난길에서 만난 적도들과 중앙 정부에 적개심을 보이던 지방 호족들, 아전들의 행적을 단 한 명에게 몰아넣은 것이 박진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종이 충주 쪽으로 몽진을 가는데 원래 역사에서는 행렬이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에 먼저 이르렀다가 그날 저녁, 날이 저물었을 때 행렬이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렀던 과정에서 연이어 습격을 받은 것이다. 원 역사대로라면 충주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다. 또 작중에서 현종 일행이 습격을 받자 호종하던 인원들이 상당수 현종을 버리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데,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드라마에서는 거란군이 뒤쫓는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도망쳤다. 실제로는 천운으로 몽진 일행은 거란군을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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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사신이 서경성에 현종이 죽었다는 거짓 소식을 전하며 '고려 국왕이 훙서했다'고 말한다. 천자가 사망하면 이를 붕어(崩) 혹은 승하(昇遐)했다라고 하고 제후가 사망하면 훙서(薨)했다고 적는다. 당시 거란 입장에서 고려는 제후국이었으므로 고려 국왕의 죽음을 가리켜 제후의 사망을 뜻 하는 용어인 '훙서'를 사용한 것이고 양규를 비롯한 고려인들 입장에서는 자국의 국왕은 해동천자이니 현종의 죽음을 가리켜 승하라고 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양규가 현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급히 서경으로 제장들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다가 거란의 사신을 맞이하고 이어서 강감찬과 만나는 장면은 본작의 오리지널 각색이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 따르면 양규는 곽주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통주로 옮긴 다음 거란군이 퇴각하고 몽진이 끝나고 나서야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000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 명을 되찾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란 사신이 서경에 있던 양규와 장수진 일동에게 항복을 권하는 장면은 창작이지만 사실 이런 비슷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통주 전투 이후 시간상의 문제로 흥화진 전투 당시에 있었던 일이 은근히 생략되었는데 원래 요 성종은 통주 전투 후 통주성 밖에서 벼를 베던 남녀를 사로잡아 각각 비단옷을 하사하고, 종이로 감싼 화살 하나를 준 뒤, 병사 300여 명으로 하여금 흥화진까지 호송하여 항복을 권유했고, 이에 반박하는 고려 흥화진 주둔 장수들과 요 성종간의 서신 교환이 있었다. 성종은 고려 장수들에게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흥화진 안의 고려군 장수들에게 차등있게 하사하고, 칙서를 내리는 등 고려군을 회유하려다 실패했다.[190] 사실 이 부분을 진중하게 묘사하려면, 1~2회는 너끈하게 잡아먹을 것이므로 다 생략해 버리고 서경성에서 정중히 항복을 권하는 시퀀스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3.13. 13회
이 회차의 경우, 현종이 몽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 외에는 강감찬이나 양규, 이현운, 대도수, 노전 등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기록이 부족한 이들의 행적을 창작해서 묘사하는 터라 오리지널 각색이 많은 편이다.- 앞선 회차에서도 여러차례 언급되었으나 몽진 당시 충주 쪽으로 가던 현종이 처음으로 위협받은 곳은 적성현(積城縣) (현재 파주시 적성면)의 단조역(丹棗驛)으로 『 고려사』의 지채문 열전에 의하면, 그 곳의 무졸(武卒)인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장차 행궁을 범하려고 하니, 지채문이 말을 몰면서 활을 쏘자 적도가 달아나 흩어졌다가 다시 서남쪽의 산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길을 막자 지채문은 또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본작에서는 박진에게 모든 악역을 몰아주다 보니 인근의 역을 지키는 역인들은 벌써 도망간 것으로 묘사되었다.
- 거란 관리와 함께 서경성에 붙잡힌 노전이 다시 고려 측에 전향하여, 양규와 강감찬의 명을 받고 거란을 기만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수행한다. 앞선 회차에서도 여러차례 언급되었으나 실제 노전은 여요전쟁 이후인 1018년(현종 9) '중추원부사 상호군(中樞院副使 上護軍)'에 임명되었고, 현종이 죽고 덕종이 즉위하던 1031년에는 호부상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이후 충선왕이 즉위 및 복위할 때 교서에 서희, 하공진, 양규와 같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번 회차에서 보여준 노전의 행동은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다시 고려 측에 전향하여 상당한 공훈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되어 이를 바탕으로 고려의 신하로써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각색을 한 것으로 보인다.
- 현종 일행이 충주로 가던 도중 암살단의 습격을 받지만, 박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리친다. 이후 어느 빈 관아에서 머물며 충주가 아니라 공주를 거쳐 나주로 향하기로 했는데, 원정왕후의 발언에서 "과거 태조대왕이 나주와 맺었던 인연이 있어 그 곳 백성들은 황실에 호의적일 것."이라는 이야기 또한 듣게 된다. 실제로 왕건의 두번째 왕후인 장화왕후가 나주에 기반을 둔 호족인 오다련의 딸이고, 왕건이 과거 태봉국의 왕 궁예의 신하였던 시절부터 후백제의 견제를 위해 당시 후백제의 후방이었던 금성(錦城, 이후 나주로 개명)을 점령하고, 한동안 주둔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주 지역의 근왕 의식은 어느 지역보다도 투철했다. 이는 이 전란이 있고 나서 230여년이 흐른 뒤 이 지역에서 '백제 부흥'을 외쳤던 ' 이연년 형제의 난'이 벌어질 때 김경손이 나주에서 이를 진압할 때 이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현종이 충주로 향한 기록 자체가 없어서 충주로 가다가 중간에 길을 틀었다는 설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 거란에 항복해 관리로 행동하던 이현운과 서경에서 포로로 잡힌 대도수의 최후를 나름 창작으로 그렸다. 원작 소설에서 대도수는 포로로 잡힌 후 참수당하여 소배압이 고려 조정의 사기를 꺽기 위해 그의 목을 보낸다. 드라마에서는 이현운이 개경 거리에서 포로인 대도수를 끌고 다니며 능멸하였으며 그 와중에 강감찬의 처를 발견하고 잡으려다 놓친 후, 대도수를 꿇여 앉히고 다시 이런저런 모욕을 하다가 방심한 사이 칼을 뺏겨 대도수에게 죽임을 당하며, 대도수 또한 뒤따라온 거란 병사들과 맞서다가 중과부적으로 창에 찔린 채 죽었다. 실제로 이 둘의 이후 기록들이 없어서 나름 ' 매국노에 대한 정의구현' 차원에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원래 역사에서 강조가 이현운에게 했던 '네 놈이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이 대도수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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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빈 관아에서 머물면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던 현종이, 자신과 원정왕후에게 음식을 준 백성들에게 고을
호장의 가렴주구에 대한 고충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각 고을의 호장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호장은 관할 거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거나 다양한 부역에 징발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극중 창화현의 백성들이 '호장은 우리 고을에서 왕이나 마찬가지'라고 언급하는데, 실제 고려시대 호장의 경우에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에서는 수령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기도 하는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치 중세 유럽의 영주와 흡사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고려 6대 왕 성종은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명군 중 1인으로, 고려의 향직 제도를 개편하고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하여 난립하는 호족 세력을 견제했던 유능한 군주였다. 이러한 성종의 지방 정책을 이어나간 현종은 그 혼란스러웠던 거란과의 전쟁 와중에 내치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치적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손에 꼽는 것이 바로 이 무렵까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1018년(현종 9년)[191] 전국에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을 두어 지방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임금의 권한을 강화시키면서 드디어 체계적인 군현제를 확립하였다. 성종 시기 12목을 설치하면서 파견했던 12명의 지방관 수가 이때에 이르러 116명까지 확대되었으니, 이는 곧 고려 지방 제도의 완성이었다. 현종은 각 군현 호장(戶長) 등을 비롯한 향리들의 정원(定員)을 규정하고,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억눌린 호족 세력을 어르기 위한 유화 정책으로써 그 자제들에게 과거(科擧) 응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1022년에는 지방 향리 세력에 대한 호칭을 전면 개정하면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어느정도 완성하게 되었다.
- 절령에서 강감찬과 소배압이 만나면서 거란군의 철수에 대해 논쟁했고, 소배압이 "고려 국왕이 차후 거란에 입국하여 친조한다는 약조 정도가 있어야 철군이 가능하다."고 강감찬을 압박한다. 물론 이 장면은 극 중 창작이지만, 실제 거란군은 고려 국왕인 현종의 전후 친조 약속을 받고 철군했는데, 철군 도중 고려의 건재한 병력들에 의해 사방팔방으로 얻어터진 채 압록강으로 철수했다. 물론 현종의 친조 약속은 말뿐이며, 실제 이행되지 않았다.
- 야율분노가 소배압과 단독 교섭을 한 강감찬을 포로로 잡아 야율융서에게 끌고 간다. 야율융서는 부월로 강감찬을 참살하려고 하나, 야율분노가 소배압과 강감찬의 내통을 밝혀내겠다며 야율융서에게 청해 강감찬을 끌고 가 고신을 가한다. 몽진 이후 강감찬의 기록이 없기에 이는 제작진 측에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야율융서는 강감찬과 내통한 의혹을 받는 소배압을 개인적으로 부르지만, 소배압은 되려 '본인이 하는 모든 일은 황제 폐하를 위한 것'이라고 반문하고 야율융서도 그러한 소배압을 크게 질책하지 못한다. 극중 강경파인 야율분노는 현실주의자인 소배압을 이리저리 견제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야율분노는 야율융서의 매제이자 사위, 외사촌형인 소배압의 권위를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192]
3.14. 14회
- 몽진 도중에 어느 강변에서 지채문이 현종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날아가는 기러기에 활을 쏘아 맞추는 묘기를 선보이며 '이렇게 활을 잘 쏘는 신하를 두셨으니, 도적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 있으리까?'라고 말한다.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사실로 현종 또한 지채문의 활솜씨에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고 하며 이 또한 극중에서 그대로 고증하였다. 살짝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는 말을 달리며 몸을 돌려 활을 쏴서 맞췄다고 한다.
-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현종을 지키기 위해 거란군과 싸울 군사를 징병하면서 이전에 빼낸 호장들의 아들까지 편입하려고 하자, 호장들이 반발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상술했듯이 실제로 고려 초기에는 중앙집권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서 조정에서 파견한 절도사가 기존의 지방 호족(호장)들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 현종의 몽진 도중 창화현에서 호장 1명이 나타나 '하공진이 대군을 이끌고 왕을 잡으러 온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이에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 일부가 달아나는데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당시 하공진은 현종의 명령 없이 여진족을 참살한 일로 귀양가 있다 복직한 상태였으므로 황실에 대해 원한이 아예 없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하공진은 근왕 의식이 매우 투철한 자였으므로 현종에게 반기를 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에 호장의 이간계는 실패하였다.
- 몽진 일행에 합류한 하공진이 현종에게 '거란 황제에게 친조를 약속하는 표문을 올려 철군을 요청하자'고 주장한다. 이때 현종은 채충순이 새롭게 작성한 표문에 '고려국왕지인'이라고 새겨진 국인[193]을 찍는데, 이 때의 인장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70년 명나라에서 사여받은 인장[194]을 그대로 고증한 것이다. 한편, 현종이 국인을 찍은 표문에는 요 성종의 두번째 연호이자 가장 오랜 기간 사용했던 연호인 '통화(統和)'가 표기되어 있으며 그 연도는 '27년'으로 적혀있는데, 사실 작중 시점인 서기 1010년은 '통화(統和) 28년'이다. 제작진 측에서 연호의 원년을 잘못 파악해서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 하공진이 표문을 가지고 가던 중 거란군 추격대와 마주쳐 '우리 왕은 이미 남쪽 멀리 피난갔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공진은 거란군 추격대에게 '현종이 이미 남쪽 수천 리 밖으로 피난 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속인 뒤 요 성종에게 현종의 친조 표문을 전하며 거란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 김은부의 맏딸 김씨가 자매들과 함께 등장하는데, 자매들은 김씨를 '형님'으로 부른다. 이는 본 문서의 언어 문단에도 설명되어 있는데,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성별 상관없이 손위 형제나 자매에게는 '형'이라고 호칭하였으며, 손아래 형제나 자매에게는 '아우'라고 호칭하였다.
- 현종의 몽진 도중에 고양이가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고양이에 대한 명시적 기록은 김부식의 '아계부(啞鷄賦)'라는 글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김부식은 현종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기록으로 보아 최소 고려시대부터는 사람들이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작에서도 그러한 기록을 반영하여 이미 1회와 2회에서 신혈사에 고양이가 뒹구는 장면을 재현한 바 있으며 이번 회에서도 재현하였다.
- 개경에 진주한 요군에서 탈영병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것은 제작진의 상상력이 더해진 것이라 딱히 문제 삼을 것이 없지만, 굳이 사리군이 탈주했다고 하는 것은 부적절했다. 사리군은 각 유목 부족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만든 병력으로서 대놓고 전투력이 좋지 못했다고 기록된 군대이지만, 거란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탈영을 할만한 동기가 적은 자들이다. 본인이 탈영을 하면 본국의 가족들이 어찌될지 너무나도 잘 아는 자들이 집단으로 탈주했다는 것은 재현성 측면에서 조금 부적절하다. 요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지고 통제를 적게 받는 속국군이나 발해계 부대에서 탈주가 발생하고 있다고 묘사하는 게 재현성 측면에서는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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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이 현종의 표문을 들고 야율융서를 찾아가 현종의 친조 의사를 전한다. 이에 야율융서의 몇몇 신하들은 '고려 국왕의 친조 약속을 받아들여 철군한다면 송을 비롯한 제후국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길 것'이라 말하며 넌지시 철군을 종용한다. 여기서 '송을 비롯한 제후국'이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이는 당시 거란에 세폐를 보내는 송나라 또한 다른 제후국들과 같은 취급을 한 것으로 읽힐 수도 있고, 그저 송과 다른 제후국들을 뭉뚱그려 언급한 것으로 읽힐 여지도 있는 중의적 표현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송나라와 거란이 전연의 맹을 맺어 송나라가 거란에 세폐를 보내는 대신 서로가 형제국[195]으로서 동등한 위치에 놓이는 관계를 수립하였으므로 고려-거란, 서하-거란, 송-서하와 같은 군주-신하 관계나 조공-책봉 관계는 맺지 않았다. 요 왕조의 신민들은 송 왕조를 '남조'로 생각하여 자신들과 대등한 왕조로 여겼고 요 성종의 후계자인 흥종은 송 인종에게 보내는 국서에 자신을 동생으로 지칭했다. 내부적으로도 요의 신민들이 송을 제후국으로 여긴 기록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3.15.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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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왕후를 다른 곳으로 보낸 현종과 지채문, 채충순, 양협 등이 공주로 몽진길에 나서면서 험준한 산을 오르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이는
실제 기록들과 차이가 있다. 이전 회차인 14회가 모두
1010년 12월 30일(이하 음력)에 해당된 일들이며, 이후 현종 일행은
한강을 건너
광주(廣州)에서
요탄역(饒呑驛)에 머물던 두 왕후와 합류하면서 사흘 동안 머물다가(
1011년 1월 1일)
비뇌역(鼻腦驛)(1월 4일) →
양성(陽城, 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1월 5일) →
사산현(蛇山縣),
천안부(天安府)(1월 6일) →
공주(公州),
파산역(巴山驛),
여양현(礪陽縣, 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1월 7일)까지 내려갔다. 지금으로 치면, 하루 종일 창화현에서 발이 묶인 현종이 이후 일주일 동안 경기도 광주시(당시 광주의 읍치는 현
하남시 교산동)에서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까지 주파[196]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해당 경로에 '차령고개'와 같은 산 줄기가 있지만, 예고편이나 본 회차에 나온 것처럼 엄청 높은 곳까지 오른 건 아니다.
그리고 원정왕후와 헤어진 시점도 현종이 공주에 도착하기 전이 아니라 공주를 지나 파산역에 이르렀을 때이며, 당시 원정왕후뿐만 아니라 원화왕후도 현종의 몽진에 같이 참여했다. 이 드라마의 11회에 원화왕후는 원정왕후의 명으로 개경의 관리와 무장들의 가족, 일부 백성들과 함께 먼저 피난을 가는 장면이 나왔는데, 실제로는 현종, 원정왕후와 함께 공주까지 몽진을 함께 갔으며, 이후로도 나주까지 현종과 함께 몽진했다.
- 현종 일행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공주에 도착해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환대를 받는다. 현종뿐만 아니라 그를 호종한 채충순, 장연우, 황보유의, 지채문도 극진한 대접을 받는데, 이 중 장연우가 유독 음식을 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전 몽진 초반 어느 빈 마을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장연우가 지채문의 밥을 노렸던 장면이 나오는데, 이러한 장연우의 모습은 이후 그가 무신들의 영업전을 가로채면서 발생한 김훈·최질의 난에 대한 암시로 보여질 수 있는 장면이다.
- 김은부가 관아에서 현종에게 가족들을 소개할 때 구성원들이 모두 등장한다. 실제 김은부는 아내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이씨(李氏)'[197]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병부상서를 지낸 김충찬(金忠贊), 차남은 경덕국사(景德國師)가 된 김난원(金爛圓)[198]이며, 세 딸은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이다. 다만, 이들 남매들의 생년이 정확하지 않아서 나이 서열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199], 드라마에서는 딸 세 명을 내리 낳고 이후 아들 두 명이 태어난 것으로 묘사[200]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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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원성왕후가 되는 김은부의 장녀 김씨가 아버지와 상의하지도 않고 현종의 침소에 들고자 한다. 김씨는 현종의 어의를 지어 바친다는 명목으로 잠자리 시중을 들고자 하며,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다만, 실제로는 현종이 나주에서 개경으로 돌아가는 중에 일어난 일이며, 드라마에서 현종이 처음부터 마음을 열지 않고 되려 김씨에게 화를 내며 '그러한 방식으로 권력자의 환심을 사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과거에는 집안에 귀한 빈객이 방문하면 딸에게 시침(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나온다. 사실 중세에는 딸이 아버지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라서 집주인의 의향에 따라 미혼인 빈객에게 딸을 내어주고, 잘 되면 결혼으로까지도 이어지는 시침 문화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존재[201]했다. 다만 본작의 김은부는 원성왕후가 되는 김씨의 발언처럼 그런 식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감히 생각도 못하는 고지식한 인물이라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낮았다.
- 야율융서가 소배압의 간언을 받아들여 고려에서 철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 정궁( 만월대)을 모두 불태운다. 실제로 당시 개경 정궁은 거란군에 의해 모두 전소되었으며,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정궁을 재건할 동안 임시 궁궐인 수창궁에 기거하게 된다.
- 거란군의 철군 도중, 거란의 선봉군 1만과 선봉도통 야율분노가 양규의 결사대에게 전사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야율분노는 2차 여요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북원대왕으로 봉해진다. 원작 소설의 전개를 따르는 것으로 결정해 각색한 듯하다. 사실 야율분노는 천추태후에서도 2차 여요전쟁 도중에 죽는 등 묘하게 한국 사극에서의 취급이 안 좋은데, 어차피 작품의 무대는 고려인 데다가 3차 여요전쟁에는 야율분노가 없었으므로 사실 2차 전쟁에서 죽었다고 각색해도 이후의 전개엔 큰 지장은 없긴 하다. 철군 도중의 이 첫 전투에서 거란군 1만 명이 전사한 것은 실제 역사와 같다.
- 본작에서는 양규와 김숙흥의 게릴라 전이 두 사람이 함께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되나, 실제 역사 및 원작 소설에서는 김숙흥과 양규가 서로 반대 방향에서 연계하며 거란군을 압박하다가 중간에 합류했다. 또한 두 사람의 활약에 분노한 야율융서가 양규를 죽이기 위해 함정을 파라고 지시하는데, 이는 실제 『고려사』에서 표현한 양규의 최후를 더 극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202] 이때 소배압이 보고를 하면서 탈환된 포로의 수가 3만 명에 이른다고 언급하는데, 실제로 양규와 김숙흥 부대는 1개월 동안 총 3만 명을 구출하였다.
- 거란군이 고려군의 '효시(울음소리를 내는 화살)'에 상당히 겁을 먹는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 효시는 공격 신호를 주는 역할과 동시에 적군이 겁에 질리게 하는 역할 또한 수행하였다. 이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운용한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와도 비슷한데, 슈투카 또한 기체에 '제리코의 나팔'이라는 소음장치를 달아 폭격 전부터 적군이 겁에 질리게 하는 효과를 얻은 바 있다.
- 양규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던 노전이 거란군 본대에서 탈출해 다시 고려군에 합류한다. 양규는 '왜 하공진은 함께 탈출하지 않았냐'고 노전에게 묻는데, 노전은 '하공진은 사신 신분으로 간 것이기에 본인이 스스로 남기를 택했다'고 양규에게 전한다. 사실 야율융서가 내린 철군 결정은 '고려 국왕이 차후 거란 황제에게 입조한다'는 표문을 명분으로 삼아 가능한 것이었기에, 친조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표문을 전한 사신을 억류하는 것이 거란 입장에서도 당연한 처사였다. 하공진 또한 그 시점에서 사신인 본인이 탈출하면 전후 양국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해 남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3.16. 16회
- 양규와 김숙흥이 남은 결사대를 이끌고 야율융서의 본대인 피실군 3만과 마주하게 된다. 야율융서는 항복하면 거란의 신하로 삼겠다고 하나, 양규와 김숙흥, 그리고 결사대는 야율융서의 말을 무시하고 거란 본대를 향해 돌격한다. 철갑옷으로 무장한 양규와 김숙흥을 비롯한 결사대는 앞서 구출한 포로들이 달아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초반에는 거란군 보병을 상대로 용맹히 싸웠으나, 끝내 거란 궁수단에 의해 양규와 김숙흥은 온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채 장렬하게 전사한다. 실제로 몸에 화살이 박히고 선 채 죽은 이들의 모습과 함께 나레이션 대신 대입한 『 고려사』의 '양규 열전'에서도 '양규가 온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전사했다'고 기록되었다.[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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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전투에서 양규와 김숙흥 및 이하 결사대는 한 사람 당 족히 수십 명은 되는 거란군에 둘러싸여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그대로 받아 넘겨가며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는 걸로 묘사하고 있다. 기존 사극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칼질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버텨내는 모습이 낯설 것이다. 상당한
연출이 더해진 장면이고 현장에서도 감정선을 쌓아가는 연출을 요구했지만
# 실제 역사에서의 완전무장한
중보병들의 전투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며 과장한 연출이다. 전신을 보호하는 금속제 중갑옷을 입은 정예병들은 일반 경보병들의 무장으로는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도 평범한 도검의 공격조차 막을 수 없는 갑옷을 굳이 비싼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거추장스럽게 장비할 이유는 없기 때문. 따라서 현실에서 이런 중장보병을 상대하는 방법은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부위를 노리거나 대형 둔기처럼 갑옷이 막지 못할 정도의 타격력을 줄 수 있는 무기로 공격하는 게 기본이었다. 극중에서도 그런 모습이 여실히 나타나는데 한창 양규와 뒤엉켜 육박전을 펼치던 거란 병사 하나가 양규의 목가리개를 뜯어낸 다음 목을 노리라고 아군에게 외치거나, 김숙흥이 연속적인 대형 철퇴의 공격에 그로기 상태에 빠지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204] 더불어 고려 결사대의 전투 방식 또한 무척이나 현실적인데 거란 병사들 역시 흉갑은 다들 챙겨 입고 있었기에 기존 사극처럼 대놓고 몸통을 베는 공격 같은 건 보이지 않고 목과 어깨, 옆구리나 겨드랑이 등 흉갑이 보호해 줄 수 없는 부위나 발등처럼 갑옷이 없는 부위를 노리고 무기를 휘두른다.[205]
로버트 경은 말에서 손을 떼고 멋진 보르도 검을 뽑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훌륭한 솜씨로 폭도들을 주변에서 물리쳤다. 그에게 달려든 자들이 많았지만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목이나 팔, 발, 다리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아무리 용감한 자도 그에게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했다. 4만이나 되는 폭도에 둘러싸인 기사는 열두 명을 죽이고 많은 자들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결국은 폭도들의 돌팔매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존 프루아사르 경(Sir John Froissart),<Chronicles of England, France and Spain, tr. Lord Berners, 1523-5>, 존 캐리, <역사의 원전> - 다만 갑옷은 그냥 적이 들고 있는 날붙이 냉병기에 몸을 노출하는 실수를 했을 때 바로 죽거나 다치지 않는 보험일 뿐이라 본작에서처럼 적에게 둘러싸이면 영웅적인 버티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상대가 들고 있는 칼이며 둔기로 맞는건 실제로는 쇠몽둥이로 맞는 것과 다를바가 없어 타격을 당하면 충격이 상당하기 때문에, 칼로 인한 자상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본작과 같이 맞으면서 버티는건 물리적 충격이 누적되기에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위의 기록에서처럼 과거의 중무장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보다 오래 버틸수는 있게 해주지만 물량으로 밀어 붙이는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실제 갑옷의 유용함은 옛날 사극의 종이장갑과 고거전에서 나오는 물리데미지 면역 강철갑옷 사이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이야기. 해당 장면에서도 거란군은 매너있게 정확하게 갑옷을 입은 곳만 때려주는 모습도 보인다. 물론 지금까지 사극의 종이갑옷 수준 고증에 비하면 이 정도는 드라마적 허용으로 충분히 봐줄 수 있는 부분이다. 가장 큰 과장된 연출은 요 성종을 활로 겨누는 양규를 거란군이 겁먹고 방관하는 장면인데, 아무리 냉병기 시기 전쟁이 기세 싸움이고 쓰러지지 않는 적장을 보고 사람으로서 겁을 먹을 수는 있지만, 자칫하다간 황제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하여 삼족을 멸할 대역죄를 자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에 거란병들도 오히려 더 죽기 살기로 싸웠을 것이다.
- 양규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성이 압록강을 건너는 거란군 후미를 공격하는데, 이는 사료에 나와있는 제2차 여요전쟁의 마지막 전투이다. 하지만 야율융서는 이미 압록강을 건넌 상태였기에 거란군 후발대 일부만 피해를 보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 다만 당시 이 전투를 기록한 송나라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역사서 『 송사』에 의하면 거란은 이 전쟁에서 문신들도 다수 죽고 휘하 군대도 많이 상했다고 언급되는 바, 송나라 기록의 과장을 감안해도 요 성종이 본작처럼 여유롭게 철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양규의 죽음으로 비장함과 슬픔이 강조되어서 그렇지 귀주 협곡 전투나 포로 구출, 정성의 최후의 공격 등을 봐도 굉장히 스케일이 작게 묘사되거나 생략당했다. 이 때문에 드라마만 보면 거란이 괴멸적인 피해를 받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206]
- 제2차 여요전쟁 당시 나주까지 피신한 현종의 모습이 나오면서 그가 공주에서 김은부가 올린 글[207]을 읽다가 강감찬의 명을 받고 내려온 애수진장 강민첨의 거란군 철수 소식을 듣고 바로 개경으로 향한 모습이 나왔다. 실제로는 이전 회차 부분에 언급된 파산역(현 익산시 여산면) 이후 전주에서 절도사 조용겸이 삼례역 부근에서 현종을 겁박하는 등 전주에서도 큰일을 겪었고, 이후 나주에 도착하고 나서 거란군이 개경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궁길에 올라 다시 공주에 6일간 머물면서 김은부의 환대를 다시 받으면서 그의 큰 딸이 지은 어의를 받고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는데, 아무래도 32부작이라는 극의 특성상 몽진 기간 동안 현종을 괴롭혔던 대표적인 호족이나 관리(창화현의 호장 제외)들을 가상의 인물인 충주 호장 박진으로 함축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 몽진 도중 현종과 헤어져 따로 피신한 원정왕후가 왕손을 사산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원정왕후는 몽진 도중에 임신 상태였다고 나오나, 그 이후 태어났을 왕손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기에 극중에서는 왕손을 사산한 것으로 설정한 듯하다.
- 현종이 불타버린 개경 정궁( 만월대)을 재건하는 동안 별궁인 수창궁에 머문다. 수창궁은 정궁에 비해 훨씬 협소한 이궁이었는데 극 중에서 그러한 점을 잘 고증하였다. 현종 사후에도, 수창궁은 고려 국왕이 정궁을 중수할 일이 있을 때 임시 거처로 활용되어 고려 때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는데, 정궁이었던 만월대는 관련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후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다가 1362년( 공민왕 10)에 일어난 홍건적의 난으로 완파되어 복구하지 못했고,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는 수창궁이 정궁으로 사용되면서 조선으로 넘어가서도 태조, 정종, 태종이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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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수창궁에 머물며 조정 신료들에 대한 인사를 진행했는데, 드라마에는 한 번에 언급했지만 실제 해당 인사들은 아래와 같이 현종이 나주에서 개경으로 환궁하던 중인 1011년 1월 29일(이하 음력)부터 그 해 8월까지 이어졌다.[208]
1011년 1월 29일, 채충순을 비서감(秘書監)으로, 박섬을 사재경(司宰卿)으로 임명한다.
1011년 3월 15일, 탁사정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였다.
1011년 3월 28일, 유진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최사위를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1011년 4월 4일, 탁사정(卓思政)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1011년 4월 6일, 황보유의를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고, 김종현을 감찰어사(監察御史)[언급]로 임명하였다.
1011년 5월 5일, 유방을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상장군(上將軍)으로, 최충을 우습유(右拾遺)[언급]로 임명하였다.
1011년 6월 1일, 강감찬을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 承旨)로 임명하였다.
1011년 7월 2일, 최사위를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장연우과 채충순을 모두 중추사(中樞使)로 임명하였다.
1011년 8월 9일, 장연우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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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된 인사들을 포함해 최전선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운 장수들이나 몽진 당시 현종을 호종했거나 현종의 명으로 피해있거나 별도의 임무를 수행한 신하들 대부분이 승진한 반면, 전쟁에서 도망쳤던 신하들도 용서받고 승진을 하면서 김훈, 최질, 최사위를 비롯한 조정 신료들이 반발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중 박섬에 대해선 사재경에 임명될 당시 아래의 언급이 있다.[213]
박섬은 안북(安北)에서 도망쳐 개경(開京)으로 돌아와서 가족을 이끌고 그의 고향인 무안현(務安縣)으로 갔는데, 도중에 왕의 수레를 만나 왕을 따라 나주(羅州)까지 왔으나 얼마 뒤에 사직하고 돌아갔다. 또 거란군(契丹軍)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왕을 알현하였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으나, 당시 여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 현종을 나주까지 호종했던 채충순은 '중추사'로 승진했는데, 이는 강조가 만든 비서기관인 '중대성'과 그 장관인 '중대사'가 전후 원래의 이름인 '중추원'과 '중추사'로 환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지채문이 친종장군에 임명되는데, 당대 기록이 부족해서 실제 그가 전쟁 이후 이 직책을 지냈는지 알 수 없다.
- 왕손을 사산한 원정왕후를 위로하던 현종이 '(죽은) 아이는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불교의 윤회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기에, 고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언젠가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3.17. 17회
- 현종이 호족 세력의 병폐를 뿌리뽑기 위해 김은부를 형부시랑으로 등용하여 지방의 호족에 대한 대개혁을 실행하고자 한다. 다만, 김은부 본인을 포함해서 당시 고려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가 크고 작은 호족 출신이었기에 현종의 정책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강감찬 또한 현종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대해 반대한다.
- 다만 강감찬은 본인이 호족의 가문이기 때문에 반대한 것보다 지금 당장 호족 개혁을 하면 차후 거란의 침공에 맞서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현종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었다. 강감찬은 호족 개혁이 7~8년은 소요될 대개혁으로 판단하여, 일단 거란의 침공에 맞서고, 보다 나라가 안정되면 그때 개혁을 해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해서였다. 여기서 강감찬이 7~8년을 잡은 것은 실제로 2차 전쟁과 3차 전쟁의 간격 및 현종대 군현제의 확립에 걸린 시간을 염두에 둔 대사로 보인다.[214]
- 작중 현종은 다음 전쟁을 이유로 반대하는 강감찬의 진언을 거부하고 강경하게 호족 개혁의 뜻을 밀어붙이는데, 실제로 고려의 중앙 집권화가 완전히 마무리된 건 3차 여요전쟁 이후지만 그 기틀이 되는 군현제 자체가 확립된 건 3차 전쟁이 발발한 1018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디어가 단숨에 나왔을 리가 없으니, 2차 전쟁 이후로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고안과 검토가 7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부분을 감안하여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묘사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 현종이 호족 개혁 정책을 펼침과 함께, 예부에 과거를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려 새로운 인재를 뽑고자 한다. 이러한 개혁은 선대왕인 광종 시기 시행되었던 정책들인데, 광종 역시 호족 세력을 숙청하며 그 빈 공간을 과거 실시를 통해 등용된 신료들로 채워넣은 바 있다.
- 이전 회차에서 내사시랑평장사로 승진한 유진의 모습이 그려진다. 당시 고려는 내사령(후일 중서령)이나 문하시중에 보임된 이가 없었을 시 내사시랑평장사와 문하시랑평장사가 조정의 영수 역할을 했기에 내사시랑평장사로서 조정을 이끄는 유진의 모습은 고증에 부합한다.
- 현종이 자신의 호족 개혁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김은부를 포함하여 채충순, 최사위, 장연우,[215] 황보유의, 김종현, 조자기, 최충 등의 믿을 만한 신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중 채충순은 현종의 뜻에 찬성하면서도 '자신은 송나라에서 귀화한 가문 출신이기에 호족 개혁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채충순은 광종 시기 송나라에서 귀화한 채인범의 아들이었다. 선대왕인 광종이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 쌍기, 채인범 등의 귀화인 세력을 등용했기에 현종 또한 비호족 세력, 즉 호족과 이해타산의 여지가 없는 채충순을 등용하여 호족을 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극중에서도 '(채충순이) 호족 세력이 아니기에 되려 개혁에 더욱 앞장설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부탁한 것'이라는 현종의 대사가 나온다.
- 원화왕후가 원정왕후에게 김은부의 딸인 김씨(후에 원성왕후)가 현종의 시침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김씨가 혹시라도 폐하의 아이를 잉태했으면 어쩌냐?"고 말한다. 그러나 원정왕후는 되려 쿨하게 "그럴 수도 있다. 만약에 정말 폐하의 아이를 잉태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궐 밖의 천한 여인이 낳은 아들일 뿐이며, 용손 신분인 우리 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로 원화왕후를 격려하며 은연 중에 김씨를 깎아내리기까지 한다.[216]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할 수 있는데, 사실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의 모친은 왕실의 여인이 아닌 지방 호족의 딸로,[217] 이 둘 역시 성종이 궐 밖의 여인과 족외혼을 맺어 태어난 공주이다.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원정왕후와 원화왕후 또한 극에서 말하는 용손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용손은 '부모 둘 다 태조 왕건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극 중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설정과 배치되는 대사를 굳이 집어넣은 까닭은 의문이다.
- 이전 회차에서 김치양이 본인의 아들을 언급하면서 '이 아이는 태후께서 낳으셨으니 용손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물론 당시의 대사는 김치양이 아들과 함께 강조의 군사들에게 제거될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말한 것으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급하게 둘러댄 것일 수도 있지만, 전반적인 대사들을 종합해보자면 어느 순간부터 본작은 '부모 중 한 쪽만 왕실의 피가 흘러도 용손으로 인정한다'는 설정 또한 확립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만약 김씨가 현종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잉태하였더라도 그 아이 또한 용손으로 볼 수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며, 극중 원정왕후의 발언을 따르자면 그녀의 모친이자 지방 호족의 딸인 문화왕후 또한 김은부의 딸과 마찬가지로 '궐 밖의 천한 여인'이라는 해석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원정왕후의 본래 혈통을 고려한다면 이번 회차에서의 그녀의 대사는 어떻게 보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 물론 원정왕후의 외할머니이자 김원숭의 아내인 화의군대부인이 왕씨로 기록되어 있기에 원정왕후는 오리지널 용손에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반론 또한 있다. 다만, 당시 고려 왕실의 여인들은 왕씨 성을 쓰지 않고 외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태조 왕건의 결혼 정책에 따라 태조의 남성 자손 또는 경순왕 김부 등의 구 신라 왕족과 결혼하는 경우밖에는 없었다. 김원숭과 결혼한 화의군대부인은 외가의 성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왕씨 성으로 기록되었기에 오리지널 개성 왕씨가 아닌, 즉 왕순식처럼 공을 세워 사성받은 개성 왕씨의 후손이거나 아예 본관이 다른 왕씨인 강릉 왕씨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화의군대부인이 오리지널 개성 왕씨이자 태조의 후손이라면 같은 태조의 후손과 족내혼하거나 못해도 구 신라 왕족과 결혼했을 텐데, 이도저도 아닌 선산 김씨 가문의 김원숭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화의군대부인은 태조의 후손이 아니며, 사성받은 개성 왕씨나 본관이 다른 왕씨의 후손일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볼 수 있다.
- 병부낭중으로 임명된 '최구'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박진과 내통하며 현종의 호족 개혁 정책을 사전에 누설하는 일을 벌인다. 실제 이 인물에 대한 기록은 후에 김훈·최질의 난을 진압했던 왕가도의 열전에 짧게 언급되어 있으며, 흔히 '최구'라고 하면, 고려 중후반에 등장한 최충헌의 넷째 아들이 동명이인으로 등장한다.
- 야율융서와 소배압이 차담을 나누며 차후 고려 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218] '다음 원정에는 10만 정도의 병력을 보낼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아울러 그 명분은 '고려 국왕이 친조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삼기로 함을 언급하는데, 이는 실제로 제3차 여요전쟁 시기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주 명분으로 이어지게 된다.
- 중간에 야율융서와 소배압의 대화를 보면 거란이 1년도 안 되어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3차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2차와 3차의 간격은 무려 7년 9개월이다. 정확히는 2차 전쟁 종결 후 국지전이 여러 번 벌어지고 거란이 친조를 요구하는 등 긴장 관계가 계속되다가, 7년이 넘게 지나서야 정식으로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며 3차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 또한 거란이 고려를 정탐하기 위해 계속 척후병을 보내고 있는 것이 드러났는데, 실제로 제2차 여요전쟁이 일어난 1011년과 제3차 여요전쟁이 일어난 1018년 사이에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었고, 거란 또한 계속해서 침공을 준비하였기에 당연히 척후병을 보내 고려 국경에 대해 정탐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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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과 김은부의 대화를 통해 강감찬이 당시 '고려의 10대 호족' 중 하나인 금주 지방의 대호족 출신으로 언급되었고,[219] 이후 현종이 강감찬의 면전에서 "금주의 대호족 출신이기에 호족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냐?"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여기서 등장한
'금주'라는 지역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의 남부 지역으로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현재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관악구를 비롯해
금천구,
영등포구 일대의 지역을 말한다. 이후 고려 중엽에는 이 근처인 지금의
경복궁 뒤쪽에 서경과 함께 고려의 또 다른 '부수도' 역할을 한
남경이 세워지기도 했다.
현종과 김은부의 대화에서 '한림학사 승지는 국왕의 최측근이 임명되는 자리'임이 언급된다. 실제로 승지라는 직책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이는 조선에도 이어져 황희, 홍국영 등이 승지의 직책에서 주로 활약하며 왕명을 수행한 바 있었다.
- 지난 회차에서 현종에게 용서받은 탁사정이 이번 회차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공공의 적'으로 묘사[220]된다. 사실 현종은 본인도 백성들에게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탁사정을 용서하여 품고 가려고 했던 것이 작중 설정으로 보이는데, 실제 탁사정이 전후 얼마 되지 않아 강조의 당여로 몰려 귀양을 갔다고 나오기에 현종이 탁사정의 처분에 대한 간언을 받아들여 얼마 못 가 파직될 것으로 예측된다.[221]
- 최충이 우습유라는 직책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습유는 좌/우로 나누어진 내사문하성(후일 중서문하성)의 낭사(간관) 직책으로 청요직에 해당하였다. 습유는 예종 시기 '정언'으로 개칭되었다가 원 간섭기 시절 관제가 격하되며 '사보'로 개칭, 이후 공민왕 시기에 다시 정언으로 개칭되었다가 조선 개국 직후 다시 습유라는 이름으로 돌아가며,[222] 태종 시기에 사간원이 독립하며 최종적으로 정언이라는 이름의 관직으로 자리잡는다.
- 현종의 호족 개혁 정책에 반대하여 상서6부의 신료들 대부분이 사직하거나 출근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현종 대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집권자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사직과 출근 거부를 하는 사례는 역사에 종종 있었다. 예종 대에도 예종이 여진 정벌에 실패한 윤관에 대한 처벌을 반대하자 신하들 대부분이 일찍 퇴근해버려 문제가 된 사례가 있었으며 공양왕 대에도 정몽주 등의 온건 개혁파들과 갈등을 겪던 이성계가 사직하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여 문제가 된 사례가 있었다.
- 호족 개혁 정책에 일관되게 반대하던 강감찬이 극 마지막에 현종의 명에 의해서 파직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제2차 여요전쟁 이후 잠시 동북면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기에, 파직되지 않고 잠시 동북면으로 떠나 있는 모습이 그려질 것으로 예측된다.
3.18. 18회
- 강감찬이 한림학사 승지에서 파직되고 집에 돌아와 관복과 관모를 옷장에 넣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오히려 잘 됐다."면서 "그동안 못 본 자식들과 손주들 얼굴이나 보라."라면서 강감찬을 잠시 떠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 인해, 극 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독립하여 타지에 거주하고 있는 강감찬의 자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강감찬은 '강행경'이라는 아들을 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아들로부터 대가 이어져 조선 시대에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 등 여러 직계 후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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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왕후가 호족 개혁 정책으로 신료들과 갈등을 겪는 현종과 대화를 나눈다. 원정왕후는 '폐하께서 처벌할 호족들은 황실과 조정에 충성하는 호족이 아닌 지방에서 폐하의 길을 가로막았던 호족'이라면서 고려의 전통적인 대호족인 '
황주 황보씨', '
정주 류씨', '
충주 유씨', '
나주 오씨', '
경주 김씨' 등의 가문과 협력할 것을 간언한다. 여기서 원정왕후가 언급한 호족들은 모두
태조 왕건의 왕후를 배출한 대호족 가문[223]으로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에 큰 공이 있는 가문들이었다.
원정왕후가 지방 곳곳에 관리를 파견하겠다는 현종에게 "그러면 폐하의 어머님이신 효숙왕태후(헌정왕후)의 고향과 저의 외가[224]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시겠느냐?"면서 맞서는데, 이 대목에서 현종의 모친인 헌정왕후가 당시 태후로 추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현종은 즉위년에 아버지인 왕욱과 어머니인 헌정왕후를 각각 '안종 효의대왕'과 '효숙왕태후'로 추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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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6부의 대다수 관리들이 현종의 호족 개혁 정책에 반발하여 사직한다. 인재가 시급했던 현종은, 김은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죄를 지었던 수많은 관리와 장수들을 조정에 복귀시켜 호족 개혁 정책에 동참하게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시 조정에 복귀하기를 원치 않는 관리들까지도 죄를 지었기에 갚아야 한다는 명분, 소위 '목줄을 잡는 식'[225]으로 끌고 나오기까지 한다. 물론 대다수의 관리들은 현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정에서 다시 업무를 시작했으며, 기존에 이미 용서를 받은 탁사정과 박섬 또한 현종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는데, 박섬의 경우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만 탁사정은 현종에게 '만약 저희가 따르지 않으면 어떡하실 겁니까'라고 말하며 겉으로라도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런 스토리는 거의 모두 작중의 창작이며 실제로 이런 상황은 사료에 없는 내용들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박섬의 경우 현종에게 용서받아 조정에 복귀하여 승진을 거듭한 뒤, 문종 시기에는 공신각에 초상화가 걸리는 등의 영예를 누린다. 다만 탁사정의 경우에는 결국 강조의 당여로 몰려 귀양을 가는 방식으로 역사에서 퇴장하는데 본작 또한 그러한 역사에 맞게 박섬은 제대로 뉘우쳐 용서를 받는 것으로, 탁사정은 끝까지 불만만 가지고 있다가 결국은 파직되는 방식의 스토리를 그릴 것으로 예측된다.
- 현종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충주 호장 박진이 개경에 상경하여 유진을 만난다. 박진은 유진에게 "영공은 우리 고을의 대호족 가문"이라고 추켜세우는데,[226] 실제로 유진은 3대 정종과 4대 광종의 모후인 신명왕후 유씨의 인척인 '충주 유씨' 가문 출신으로 유진이 조정에 출사, 그것도 음서로 등용된 것이 이러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 노전과 조원이 서경 판관이 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노전은 전쟁 당시 거란에 포로로 잡혔다가 고려 측에 재전향하여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었기에 서경 판관 벼슬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 현종의 뒤를 이은 덕종 때에는 공부상서까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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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개혁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유진이 최항과 대화하며 "오랫동안 조정에서 일하며 성군도 모셔보고 혼군도 모셔봤다."면서 "지금의 폐하께서는 성군이 될 수도 있고 폭군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대사에 표면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집안 배경으로 인해 광종 말기에 조정에 음서로 등용되어 현종까지 모신 사람으로, 유진이 말하는 '성군' 중 1명은 성종일 것이며[227] '혼군' 중 1명은 목종일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유진이 공과가 뚜렷한 광종과 경종 두 군주에 대해서는 과연 성군으로 생각했을지 혼군으로 생각했을지에 대해서는 추측의 영역이기는 하다.[228]
실제로 다음 회차인 19회에서 유진이 목종을 언급하며 '남색을 즐겼던 혼군'이라고 평가하였기에 유진이 언급했던 혼군 중 1명은 목종인 것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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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이 해당 정책을 맡은 김은부를 몰아내고자 한다. 이전 회차에서 김은부가 공주 지역 호장들의 자제 총 31명을 군역에서 제외시키는 혜택을 준 바 있는데, 반대파들은 그것을 비리로 규정하여 김은부에 대한 탄핵을 시도한다.[229]
물론 실제 역사에서 김은부가 비리를 저지른 기록은 없지만, 전후 사신의 임무를 맡아 거란으로 향하기에 본작에서 김은부의 전시 행위에 대한 처분을 내린다면 그것은 거란 사행 임무를 맡기는 것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당시 고려 국왕이 거란 황제에 대한 친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양국의 관계는 꽤 험악했으므로, 사신으로 간다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죽으러 가는 길로 여겨질 만한 것이 거란으로의 사행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김은부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수개월 동안 억류당한 뒤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230]
- 현종이 김은부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린 강감찬의 집에 찾아가 거의 멱살을 잡을 듯이 분노한다. 현종은 강감찬에게 '아예 개경에서 떠나라'고 명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전후에 강감찬이 잠시 동북면으로 파견되어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현종의 분노에 의해 개경에서 잠시 떠나 동북면에 가 있다 복직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군주가 신하의 집에 찾아가 다투는 것은 현종과 강감찬의 갈등을 보여주기에는 적절했지만, 재현성 측면에서는 조금 부적절했다. 이는 영화 '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도 언급하지만, 군주가 신하를 찾아가는 법은 없다. 이렇게 하면, 관료계 전체의 이목을 끌게 되고 군주의 권위에도 손상이 간다.
3.19. 19회
해당 회차의 전체적인 내용은 중반 최사위가 서경으로 발령가는 장면과 최후반 김은부의 큰딸이 현종의 아내가 되어 궁에 들어오는 장면을 제외하면 모두 극 중 창작이다.- 원정왕후가 김은부를 내쫓기 위해 유진과 짜고 재상들을 좌천시킨 뒤 직접 정전에 들어 김은부를 문책한다. 이 과정에서, 원정왕후는 마치 판사처럼, 유진은 검사처럼 행동하며 김은부를 추궁하고 자택을 압수수색해 김은부가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231]를 찾아내고 김은부의 아내와 자식들을 정전으로 끌어내는 '가족 인질극'을 벌이기까지 한다.[232] 아울러 수십 명의 증인들을 소환하고 원정왕후가 직접 김은부의 자식들을 겁박하여 보다못한 김은부가 죄를 자복하게 하는 소위 '원님 재판'에 가까운 국문을 벌인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모두 창작이며 실제 고려시대에 이런 식으로 국문이 진행되었는지도 불명이다. 애초에 정식으로 왕을 대리해 섭정을 맡지 않은 내명부의 수장이 이런 국문을 벌인 사례 자체가 왕실이 막장이 되지 않는 이상에야 상당히 드물다.
- 말에서 떨어진 현종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병석에 누운 뒤에도 계속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의는 증상을 묻는 원정왕후에게 '갈비뼈의 골절로 인해 출혈이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보아, 아마 현종은 낙마로 인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 뼈가 폐를 찔러 출혈을 유발하는 폐렴 증상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233]
- 강감찬이 현종의 명으로 인해 고향인 금주(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관악구, 경기도 광명시 일대)로 낙향한다. 실제 기록대로라면 이 시기 동북면으로 향했어야 했으나, 일단 금주로 낙향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설정한 듯하다.[234] 일반적으로 강감찬이 '금주 시흥의 호족'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를 경기도 시흥시로 표기하는 오류가 상당히 많은데, 본 드라마에서는 금주의 오늘날 위치를 정확히 표기했다.[235]
- 실제 역사에서 김은부의 큰딸 김씨가 궁으로 들어온 건 제2차 여요전쟁 와중에 거란군이 퇴각하고 현종이 나주에서 환궁하다가 공주에 유숙하던 1011년 2월 4일(음력)이었고, 이후에 김은부를 형부시랑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극에서처럼 김은부가 먼저 형부시랑이 되고 그의 큰딸 김씨가 현종의 아내가 되어 들어온 것과 시간상 바뀐 것으로 보인다.
-
극 중
강감찬이 회상하는, '유아 시절 유성의 기운을 받았다'는 묘사는 아래의 『고려사』 '
강감찬 열전'을 참고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강감찬이 태어난 관악구
봉천동 일대에 '
낙성대(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236]
세상에 전하기를, “어떤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始興郡)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人家)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사신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姜邯贊)이었다.”라고 한다. 재상으로 있을 때 송(宋)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권 94 열전 권 제7, 강감찬, '강감찬의 탄생과 관련된 성신설화가 세상에 전해지다'
- 강감찬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서른이 넘어 과거를 합격하여 외방만을 전전하였다"고 언급했는데, 실제 그는 983년 36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현종 때 중앙 정계로 들어서기까지는 지방관으로만 활동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다만, 지방관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뒷날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나 각종 야사집 등에 전하는 이야기고, 『고려사』에서는 과거에 급제하고 현종 때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 최항이 유진과 대화를 나누며 부상당해 의식이 없는 현종을 대신해 김은부를 심문하고자 하는 원정왕후를 비판한다. 최항은 이 과정에서 '엄연히 3성 6부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데, 당시 고려는 '내사성(후일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과 '이부, '병부', '호부' '예부, '형부', '공부'의 6부가 있었으나 내사성(중서성)과 문하성의 경우 '내사문하성(중서문하성)'이라는 합좌 기관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실질적으로는 '2성 6부' 체제로 여겨질 수 있는 요소들도 꽤 있었다. 다만 내사성(중서성)과 문하성이 내사문하성(중서문하성)이라는 합좌 기관으로 운영되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건물에 위치하였고[237] 각 관원들의 직제에 따른 녹봉도 따로 책정되어 지급되었기에 양 기관을 별도의 기관으로 묘사한 드라마의 고증이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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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으로 마제은(馬蹄銀)을 활용했다. 아직
은병(銀甁)을 주조하기 전의 시대라 어쩔 수 없이 원 · 명대에 처음 쓰기 시작한 마제은을 쓴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엔 화폐의 일종으로 은병을 썼는데
고려 숙종 6년 (1101년) 처음으로 발행하였고 은(銀) 1근(斤)으로 고려의 국토 모양을 본떠서 병(甁)을 만든 일종의 은화(銀貨)로 위가 넒은 잔 모양으로 활구(闊口)라고도 하였다. 가치는 쌀 15, 16석(石) 내지 50석, 포 100여 필에 이르는 고액화폐. 따라서 일반 상거래보다는 권문세가들이 재산축적용으로 주로 사용하던 화폐였다.
사실 은자 문서에도 나오지만, 원래 은자는 기본적으로 이름 그대로 그냥 은조각으로 여겨졌고 은 자체의 가치로 그 값어치가 매겨졌다. 때문에 은 자체의 무게가 중요했고, 매 거래 때마다 은자의 무게를 달아야했다. 반면 은의 모양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민간거래에서는 작게 쪼개진 소액 화폐라고 할 수 있는 쇄은(碎銀) 혹은 은정(銀錠)이 유통되었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가위 등으로 즉석으로 은조각을 잘라서 사용했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은자의 모습은 말 그대로 조그마한 은 덩어리라 보면 된다. 본작에 나온 마제은 역시 그저 수십가지 은자 종류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그 특유의 모양새 덕분에 은자를 대표하는 스테레오 타입이 되어서 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진 것이다. 때문에 고증을 맞추려면 다양한 종류의 은괴를 쓰는 게 맞을 것이지만, 그런 소품을 구하기 어려웠던 듯 하다.
- 원정왕후가 의식을 잃은 현종을 대신해 정전에 들어 김은부를 문책하고자 한다. 이 때, 원정왕후는 붉은색 포를 입고 정전에 드는데, 이는 '강사포(강사의)'라고 불리는 복식이자 홍포 중 하나로 본래는 군주가 착용하는 복식 중 하나였다. 다만 유교적 복식체계 하에서 홍포는 황포보다는 한 급수 낮은 복식이며 제후가 착용할 수 있는 복식이기도 했다.[238] 때문에, 어찌 보면 군주의 제후이자 신하 중 1명인 왕후가 국사를 처결하기 위해 정전에 들 때 붉은색의 강사포를 착용한 것은 복식 고증에는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 충주 호장인 박진이 '장작주부'라는 관직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장작주부는 '장작감'이라는 관청의 벼슬인데, 장작감은 '9시 5감' 중 5감(도수감, 국자감, 장작감, 소부감, 군기감)을 이루는 관청의 하나인데, 3성 6부와 마찬가지로 고려 성종이 중국에서 들여온 천자국 관제의 일부였다.
3.20. 20회
- 현종이 김은부의 장녀 김씨를 아내로 들이면서 그녀를 왕후 다음가는 지위인 '왕비'[239]로 책봉하고자 하나, 김씨 스스로가 사양하여 일단은 '부인'이라는 지위에 머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실제로 원성왕후 김씨는 처음 입궁하였을 때는 단지 '궁인'으로만 불리다가 1013년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책봉되었으며, 원정왕후가 죽은 뒤인 1018년 7월에 '연경궁주(延慶宮主)'가 되었고,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된 것은 원자이자 훗날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 덕종'이 되는 왕흠(1016년 생)이 1022년(고려 현종 13) 5월 왕태자에 봉해진 이후 같은 해 10월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도 역사 고증에 따라 바로 왕비에 책봉되는 것이 아닌 부인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 한편, 현종의 제2비 원화왕후 또한 극중에서 '왕비'라는 칭호로 불리는 장면이 이번 회차에 나왔는데, 실제로는 제1비 원정왕후를 제외하고는 생전에 '왕후' 칭호를 받은 적이 없으며, 원화왕후 또한 생전에는 '향춘전왕비', '상춘전왕비' 등의 존호로 불렸고 사후에 왕후를 시호로 받은 것으로 보아 고증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 부인으로 입궁한 김은부의 장녀 김씨가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를 알현한 자리에서 "왕후나 왕비는 '용손' 출신만이 될 수 있으므로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하면서 왕비 책봉을 사양한 이유를 밝힌다. 다만,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의 경우 본 문서의 '4회와 18회 단락'에 설명되어 있듯이 엄밀히 따지면 극에서 말하는 '용손'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정왕후의 모친인 문화왕후 역시 지방 호족의 딸이었으며 원화왕후의 모친 연창궁부인 역시 조정 신료의 딸이었다. 특히, 연창궁부인은 문화왕후와는 달리 아예 왕후로 추증되지도 않았으며, 사후에도 계속 '부인'이라는 시호로 불렸기에 그 품계에 있어서는 막 입궁한 김은부의 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실제 역사와는 별개로, 극 중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를 계속 '용손'이라고 묘사하며, 이 둘의 출신 가문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극 중에서는 두 왕후가 '완전한 용손 출신'이라는 설정을 확립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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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문학
최항이 내사시랑평장사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제 조정의 일에서는 손을 떼고 전란 중에 불탄 선대 군주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 힘을 쓰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현종은
1013년 9월 27일에 아래와 같이 최항과 최충 등을 임명하면서 지난 전쟁에서 불에 탄 선대[240]의 실록을 편찬하도록 명했고, 이에 이들은 널리 사료를 수집하고, 옛 사실을 알고 있는 고로(古老)들을 탐방 취재하는 끝에
1034년(고려 덕종 3)
실록을 모두 완성하였다. 이후 후대 고려 국왕들도 사후에 실록이 쓰여져 보관되다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병진[241]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 최항(崔沆)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심언(金審言)을 수국사(修國史)로,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저(周佇)·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시어사(侍御史) 황주량(黃周亮)·우습유(右拾遺) 최충(崔冲)을 모두 수찬관(修撰官)으로 임명하였다.
『고려사』권 4 세가 권 제4, 현종, '최항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 강감찬이 가문의 어른들에게 '은천(殷川)'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불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고려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면, 상술된 19회의 각주에 언급했듯이 현재 강감찬이 태어난 곳인 관악구의 행정동 명칭이 되었다.
- 현종이 기존의 호족 개혁 정책에서 일보 후퇴하여 기존의 절도사를 대체하는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하는 선에서 일단 매듭을 짓는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관직은 제2차 여요전쟁이 끝난 1012년(고려 현종 3) 전국 75개 지역에 파견해 군사와 백성의 안무 등 목민(牧民)의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지방 행정 제도 개편을 통해 내정을 다지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본다. 이후 제3차 여요전쟁 직전인 1018년(고려 현종 9) 혁파되어 지방에 '지주사(知州事)'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체했지만, 현종 이후에도 안무사를 파견한 기록이 고려사 곳곳에 있다.( 안무사의 연혁과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 김훈과 최질에게 불만을 품은 우간의대부 탁사정이 "(김훈과 최질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본인을 병부상서에 임명해 달라."고 현종에게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원정왕후에게 빌붙어 김훈과 최질을 좌천시키는 것을 대가로 김은부의 죄상을 논하는 상소를 현종 앞에서 읊는다. 다만, 호장 자제들의 군역을 면제시켜 준 김은부의 행위는 그가 몽진 중이던 현종을 성심껏 대접한 것이 참작되어 이미 조정에서 논하지 않기로 결정된 사안이었기에 탁사정의 상소는 통하지 않고 오히려 탁사정이 벌을 받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탁사정은 "이미 제 죄를 용서해주시기로 했는데 무슨 명분으로 저를 벌하실 것입니까?"라면서 현종에게 맞서지만, 현종은 "명분은 만들면 된다."[242]며 과거 탁사정이 '강조의 당여로서 목종 시해를 도왔다는 명분'으로 즉석에서 그를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낸다. 실제 역사에서도 탁사정은 어사중승, 우간의대부를 거치다가 1011년 8월 15일(음력), 강조의 당여로 몰려 박승, 강은 등과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이상의 기록이 없다. 다만 ' 탁사정'에도 나왔듯이 실제 그가 유배를 간 배경에 대해 기록된 것이 없어서 드라마에서는 원정왕후에게 빌붙는 등의 창작 과정을 통해서 그를 유배보낸 것으로 연결지은 것으로 보인다.
3.21. 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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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 현종이 금주(현
서울특별시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광명시 일대)에서 호족 가문들의 대표 격인 여수장과의 대화에서 여수장이 "고려가 서기 이전부터 우리는 그자들을 다스려왔다."라고 말하는데, 실제 통일신라 말기 수도인 서라벌(지금의 경주)에서 진골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자, 지방의 관리나 6두품, 마을을 다스리던 촌주 등이 세력을 모았는데, 이들을 가리켜 '
호족'이라고도 한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도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가문 출신이며, 그의 처가들('18회 단락' 참고)은 물론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박수문&박수경 형제, 유금필, 김순식(왕순식), 이총언, 함규(왕규), 윤신달, 서필 등도 그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었다.
다만, 17회와 20회, 그리고 이 회차까지 나오는 이들 호족들의 위세가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이 지난 극 중 시점까지 남아있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관련 블로그), 사실 고려를 건국하는데 일조했던 호족 세력들은 왕건 사후 혜종에서 경종에 거치는 동안 왕실 내 권력 다툼 과정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에, 성종 초 '시무 28조'를 올렸던 최승로가 역대 제왕들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지은 '오조 치적평'의 내용 중에 아래와 같이 많은 신하들의 희생되었는데 희생된 신하들 대부분이 호족 출신으로 추정되며, 이후 광종 때에 시행된 과거제를 통해 신진 관료들이 들어서고 현종 때부터는 지방 개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부 문벌귀족화 된 호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지방의 향리층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략) 더구나 경신년(광종 11, 960)부터 을해년(광종 26, 975)까지 16년간은 간흉(姦兇)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하여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서, 군자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인은 그 뜻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고 종(奴)이 그 주인을 논박하기에 이르러, 상하 간에 마음이 떠나고, 군신간이 해체되었습니다. 구신(舊臣)과 숙장(宿將)들은, 서로 차례로 죽어 멸족을 당했고(誅夷),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다 전멸(翦滅)당하였습니다. (중략) 또한 일찍이 혜종·정종·광종 세 임금께서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를 보니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개경·서경(兩京)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종 말년에 이르러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되었어도 대부분 정말로 죄가 없었고, 역대의 훈신(勳臣)과 숙장(宿將)들이 모두 죽음(誅鋤)을 면하지 못하고 없어졌습니다. 경종께서 즉위하시니(踐祚) 옛 신하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피해를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후생(後生) 참적(讒賊)들이므로 진실로 애석하지 않습니다. (후략)
『고려사』권 94 열전 권 제6, 최승로, '최승로가 성종에게 글을 올려 선왕들의 업적을 평가하다'
- 금주에서 다시 개경의 집으로 돌아온 강감찬이 집 청소를 하다가 아내와 작은 말다툼을 벌이는데, 이 대목에서 그의 아내가 '계속 이럴 거면 갈라서자'고 말하며 '개경의 집은 본인에게 달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부부 다툼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이를 통해 고려 당시의 부부 관계와 상속제도에 대해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부부의 이혼이 자유로웠으며, 재산 또한 아내에게 상속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 장면에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현종의 친조를 압박하기 위해 고려를 찾은 거란의 사신이 현종을 줄곧 '대량원군' 또는 '전하'로 호칭한다. 거란 입장에서 고려는 거란의 제후국이기에 현종에 대해서 거란의 황제보다 한 단계 낮은 호칭인 '전하'로 호칭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지만, 실제로 '대량원군'이라는 호칭을 고집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양국 간 정상적인 조공-책봉 관계가 구현되지 않았고, 거란 황제인 성종(야율융서) 또한 현종을 정식으로 '고려의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계속 즉위 전의 봉호로 호칭하는 것으로 극에서는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거란이 현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 것은 모든 전쟁이 다 끝난 1022년 4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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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거란의 칩입을 막기 위해 자신의 병환을 핑계삼아 친조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는데, 사신을 영접하는 야율융서(거란 성종)가 거란의 수도인 상경임황부가 아닌 초원의 게르에 머물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해당 회차의 시점이 아직 1011년이지만, 그 이듬해인
1012년(통화(統和) 30 → 개태(開太) 원년) 거란 성종은 상경에서 아래와 같이 고려를 협박한 것으로 보인다.
1012년 4월 3일(음력), 고려가 채충순(蔡忠順)을 보내와서 예전처럼 신하를 칭하겠다고 청하므로, 조서를 내려 왕순(王詢, 현종)에게 친조(親朝)하라고 하였다.
1012년 8월 24일(음력), 고려왕 왕순(王詢, 현종)이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병 때문에 조근(朝覲)할 수 없다고 하므로, 조서를 내려 다시 6주(州)의 땅을 취하라고 하였다.
여담으로 거란 성종은 전공지를 접경할 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강동 6주를 요구했지만, 전공지가 그 부당함을 간하자 요구를 철회했다고 전하는데, 드라마에서는 극 중 진행과 갈등 구조 문제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일부러 누락한 것으로 보인다.
- 거란의 거부에도 고려는 거란의 칩입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고자 하며, 되도록이면 신원이 보증된 신료를 사신으로 보내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때문에 형부시랑이자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를 1011년 11월 거란에 사신으로 보내기로 하는데, 사행 명목은 거란 황제의 생일인 '천령절'을 하례하기 위함임이 극 중에서 언급된다. 절일은 황제나 국왕 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국가의 중대한 명절이었으며, 고려 또한 성종부터 충렬왕까지 각자의 절일이 존재[243]하였다.
- 극 후반 초원의 게르에 머물고 있던 야율융서가 전령의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면서 급히 수도인 상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당시 거란에 사신으로 왔다가 포로로서 거란의 관리가 된 하공진이 다른 관리에게 연유를 묻자 그 관리는 모른다면서 따라오라고 말하는데, 야율융서에게 소식을 전한 전령의 입에서 '서북로 초토사(西北路 招討使)'가 언급된 점이 주목된다.
- 거란(요) 왕조의 '서북로 초토사'는 자막에 언급한대로 거란의 서북 지역의 방위를 책임지는 직책으로서 요 왕조에서 '조복(阻卜)'이라 부른 몽골 부족들을 통제하고 위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 회차의 시점이 위에 언급한대로 여전히 1011년에 머물러 있는데, 위에 언급된 장면은 1012년 발생한 몽골 부족들의 반란[244]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뿐만 아니라 1013년에는 몽골의 반란에 영향을 받은 오고, 당항, 적렬부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이 무렵 거란은 무려 개 방면에서 반란군의 저항을 받은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래도 조복의 반란은 북원 추밀사 야율화가가 진압했으며 타타르의 포위망은 진주의 방어군이, 오고, 당항, 적렬부의 반란은 1013년 1월에 야율연수, 3월에 야율화가를 재투입해 잃은 지역들을 모두 수복했지만, 이후에도 몽골, 오고, 적렬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더해 서남로 초토사 야율사진이 당항의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하는 등 거란(요) 왕조의 서북과 서남면은 불안한 상태였다. 이에 거란은 1014년 10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 다시 군사를 압록강 쪽으로 보낼 때까지 고려에 군대를 보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드라마 제작진들도 ' 제2차 여요전쟁 이후에도 고려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침략을 준비하던 거란이 왜 1014년까지 고려를 공격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한 설명으로 이 상황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 이번 회차에서 '무장(武將)', '무관(武官)'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 武'자는 혜종의 휘로 피휘의 대상이었으므로 고려 때에는 ' 虎'로 많이 대체되었다. 고증에 맞춘다면 '호장', '호관' 등으로 표현하고 피휘 관련 내용은 해설이나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이 맞으나 전쟁 장르 특성상 자주 나오는 단어여서 생략했을 가능성도 있다.
3.22. 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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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회차에서 김은부는 사신으로 왔다가 붙잡혀 처형당할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후 하공진의 조언으로 객관 근처에 매어놓은 말을 타려다가 거란군에 붙잡혀 객관에 억류당한 신세가 된다.실제 김은부는 위에 언급했듯이 1011년 11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무렵, 거란에서 아래와 같은 이유로 몇 달간 억류했다 돌아왔다. 한편, 매어둔 말과 관련된 일은 하공진과 연관이 되는데, 후술되는 '23회 단락'에도 나오지만, 『고려사』의 '하공진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전락) 거란에 보내어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게 하였는데, 돌아오는 중에 내원성(來遠城)에 이르렀을 때 거란이 여진(女眞)에게 알리니, 그를 잡아 가게 되어 여러 달 만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고려사』권 94 열전 권 제7, 김은부 中( 관련 내용)
- 거란에 사신으로 간 김은부는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나, 마침 야율융서의 생일인 '천령절'을 축하하기 위해 온 송나라에서 온 사신과 당항에서 온 사신의 만류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여기서 '당항'은 ' 서하'의 옛 이름으로 탕구트계 민족이 주류가 되어 건국한 나라였고, 고려와 마찬가지로 거란의 침입을 수차례 막아냈으며 겉으로는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 그들의 군주가 '하국왕'으로 책봉되었고, 안으로는 군주를 황제로 호칭하는 외왕내제 국체를 갖추고 있었다.
- 김은부와 거란의 관리, 송나라 사신과 당항(서하) 사신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의 복두 형태가 고증되었다. 기본적으로 송나라와 요나라는 전각복두에 사각의 긴 뿔 형태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오며 고려의 경우도 전체적인 모양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각복두에 긴 뿔을 사용하는 등 송나라의 제도를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당항(서하)의 경우 복두의 각이 느슨하며 사각의 뿔이 존재하지 않는, 마치 명나라와 조선의 '익선관'과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서하의 벽화에 등장하는 관료들의 모자를 일부 모방한 것으로서 서하의 관료들은 뿔이 없는 형태의 관을 썼다.
- 송나라 사신이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 측의 관리들이 몰살당해 글만 아는 자들이면 관리로 등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김은부에게 언급하였다. 지난 16회에서 거란군이 압록강으로 퇴각할 때 제대로 다루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거란도 극심한 피해를 입어 이같은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실제 거란은 2차 여요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남성 장졸들이 전사하여 나라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어져 새로 뽑아 써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 고려와 당항이 실제로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간접적인 교류는 일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김은부가 거란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마주친 거란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에 당도하자마자 현종의 친조를 막던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렀고, 현종은 친종장군 지채문을 포함한 친위대를 보내 제지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사실 이는 『 고려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대목이다.
- 이후 거란 사신이 현종과의 알현이나 이후 고려 재상들과의 연회 자리에서 시종일관 현종을 '대량원군'이라고 호칭하자, 채충순이 "이제는 우리 성상을 고려 국왕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물었으나 거란 사신은 "이미 그러한 관계는 의미가 없어졌다며 불가능하다."라고 언급했다. 이전 '21회 단락'에서 언급했지만, 양국 간 정상적인 조공-책봉 관계가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 거란과의 모든 전쟁이 끝난 1022년 4월에서야 현종은 거란으로부터 '고려 국왕'으로 책봉받을 수 있었다.
- 거란 측이 현종의 입조를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하자 '강동 6주'를 할양받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다만, '강동 6주' 전체를 할양받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최북단의 흥화진을 할양받아 압록강 이남에 고려를 공략하기 위한 보루를 세우려고 한다. 실제 거란은 전간기(제2차 여요전쟁에서 제3차 여요전쟁 사이인 1011년 3월부터 1018년 11월까지) 동안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 '현종의 친조'나 '강동 6주의 할양'을 요구했고, 혹은 흥화진과 그 주변을 침략한 기록이 『고려사』에 여러 번 나온다.
- 여담으로 이 드라마에서는 직관성을 위해 '압록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지만, 실제로 거란은 제1차 여요전쟁 이전인 991년 압록강 근처에 내원성을, 전간기 기간인 1014년에는 압록강 너머에 보주성(포주성)을 쌓고 이 두 성을 기반으로 고려를 침공할 전초기지를 확보하려고 했었다.[245] 특히, 1014년에서 1015년 사이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고려사와 요사에 있는 만큼, 흥화진 자체를 내주지는 않았지만 힘의 열세로 인해 바로 인근의 영토를 내주어야만 했던 역사를 고증하려는 복선일 가능성도 있다. #1 #2
- 고려 재상들과의 주연 자리에서 "강동 6주를 내놓으라."는 사신의 요구에 강감찬이 "현재 거란이 지배하는 영토 대부분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었다."면서 그 연원을 찾자며 으름장을 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서희가 제1차 여요전쟁 당시 소손녕과 담판을 나누며 한 발언과 같은 맥락과 같다. 사실대로 거란이 강동 6주를 요구한다고 해도 그 땅은 엄연히 고구려와 그 후신인 발해의 영토였기에 강감찬의 저 발언은 영토 할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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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이후 작중에서 소배압이 등장할 때 자막이나 야율융서의 발언을 통해 '난릉군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에 거란에 머물고 있던 하공진이 그에게 '전하'라고 불리는 장면이 나온다. 거란 제국 내에서 소배압은 난릉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왕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전하'라는 경칭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23. 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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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의 최후의 경우, 위 '22회 역사 탐구 단락'에서 언급된 하공진의 최후에 대해 실제와 비슷하게 서술하긴 했다. 실제로는 아래의 내용처럼 실렸는데, 드라마에서는 상경의 발해인 후손들과 함께 김은부를 구출하고 중간 지점에서 자신의 관복을 김은부와 바꿔입고, 말 여러 필을 내줘 보낸 후, 뒤쫓아오는 거란군과 싸우다 전멸하고 자신은 사로잡혀 거란 황제의 요구에도 고려인임을 강조하다가 형틀에 묶인 채 심장과 간이 적출당해 죽는 것으로 묘사했다.[246]
곧이어 (고려) 왕이 국도(國都)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거란 임금은) 고영기를 중경(中京)에 살게 하고, 하공진을 연경(燕京)에 살게 한 후에 양가(良家)의 딸을 배필로 삼아 주었다.[247] 하공진은 좋은 말을 많이 사서 고려로 가는 길(東路)에 차례로 배치해 두었는데, 어떤 자가 그 계획을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이 그를 국문하자 하공진은 상세히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기고 그를 풀어주면서 절개를 바꿔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하공진의 말투가 더욱 강경하고 불손해지니, 마침내 그를 죽이고 앞다투어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고려사』권 94 열전 권 제7, 하공진 中( 관련 내용)
- 한편, 드라마에서는 이 두 기록(하공진의 최후와 김은부의 억류)를 적절하게 배합해[248] 하공진이 김은부를 탈출시키려다 붙잡히고, 이후 김은부마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억류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아울러, 실제 역사에서 야율융서가 친거란 여진 부족을 통해 김은부를 다시 잡아오게 한 것을 각색하여 강감찬과 소배압의 협상을 통해 김은부에 대한 야율융서의 귀환 허락이 내려질 때까지 억류된 김은부가 고려와 거란의 중립지대인 여진족의 부락에서 머물도록 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 김은부가 거란에 억류된 사실을 안 강감찬이 그를 귀국시키기 위해 고려에 와 있던 거란 사신들을 억류하여 협상 카드로 사용하고자 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김은부를 귀환시키기 위해 거란 사신을 억류하거나 한 기록은 없으며, 김은부가 억류된 시점(1011년)에서 훌쩍 시간이 지난 1015년 4월 11일(음력)에 강동 6주를 돌려달라고 찾아온 거란 사신 야율행평을 억류했다는 기록은 있다. 극 중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적절히 섞어 동일한 시간대에 벌어지는 사건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 하공진이 김은부를 탈출시키려 한 것에 분노해 소배압을 소환한 야율융서가 소배압을 '소파아이'로 호칭하며 고함을 치는데, 여기서 '소파아이'는 소배압의 거란식 발음이다.
- 고려와 거란의 국경에 위치한 '내원성'이라는 성이 등장하는데, 위의 '22회 단락'에도 언급했듯이 내원성은 거란이 1차 여요전쟁 종전 이후 고려와 국교를 맺으며 압록강변에 쌓은 성으로 전쟁 이후에는 고려와 거란의 교역 창구 역할을 하였다. 차후 요-금 교체기에 일시적으로 고려에 귀속되기도 하나 금 건국 이후 내원성은 다시 금나라에 귀속되어 고려와 금나라를 잇는 교역 창구로서 작용하였다.
- 김은부를 억류한 소배압이 부하들과 대화하며, "고려가 만약 북진해 쳐들어온다면, 우리 '동경'을 장악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동경'은 거란의 수도 중 하나인 '동경요양부'가 위치해 있는 곳으로 과거 고구려의 요동성이 위치해 있던 지역을 의미한다. 또한 소배압이 "고려가 거란을 침입할 '100분의 1'의 확률이라도 있다면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언급했는데, 백분율의 개념 자체는 14~15세기에 정립되었으나 100분의 1을 뜻하는 '백분지일(百分之一)'이라는 말 자체는 구당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 눈앞에서 김은부가 억류당하는 것을 지켜본 흥화진사 정성이 거란의 행위에 분개하며 압록강변에 고려의 군사들을 대기시키고 여차하면 부교를 설치하여 북진할 수도 있음을 밝힌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거란 측에서 부교를 설치해 넘어와 흥화진 바로 목전에 '보주성'을 설치하였으며 고려는 이를 막지 못하였다. 보주성은 이후 요-금 교체기 들어서야 고려가 수복하여 계속 점유하게 되었는데, 위 문단에서 언급한 오늘날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지역으로 추정된다.
- 이번 회차에서 '병부상서'였던 유방이 '참지정사'에 더해 '서북면행영도병마사'가 되었고, '내사시랑평장사' 유진이 '문하시랑'으로, '한림학사승지' 강감찬이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이동하는 등 관직 변동이 잦은데, 실제 기록에서 유방은 1011년 10월 1일(이하 음력)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叅知政事 西京留守 兼 西北面行營都兵馬使)'로 임명되었고, 유진은 1012년 2월 20일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임명되었다. 강감찬의 경우는 해당 관직이 언제 임명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직전 관직인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된 게 1011년 6월 1일이었고, 약 1년 뒤인 1012년 6월 17일 현종이 강감찬을 비방한 감찰어사 이인택을 파직할 당시 강감찬이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방과 유진이 임명된 그 사이에 벌어진 일로 추측된다. 사실 고려사 전체의 기록이 이후 전란과 궁궐 방화 등으로 인해 소실되거나 후에 조선 초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일부 기록을 누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 관직 변동과 관련해 무관인 상장군 김훈과 장군 최질이 불만을 가지는데, 이는 군사를 지휘하는 '행영병마사' 직책을 문관인 유방(서북면)과 강감찬(동북면)에게 맡겼다는 것 때문이었다. 해당 과정에서 지방 호족 출신의 장작주부 박진이 지속해서 김훈과 최질을 충동질하는데, 이는 차후 김훈·최질의 난으로 이어지는 트리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유방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이끈 유금필의 후손이자 첫 등장 시에는 '친종장군'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마치 무관 출신인 것으로 비추어질 여지가 있으나 그는 엄연한 문관 출신으로 무관직보다는 문관직에 머문 기간이 더 많았다. '친종장군' 자체만 놓고 보자면 무관직이 맞으나, 그냥 무관직이 아닌 '문관이 보임될 수 있는 무관직'으로 '행영병마사' 등과 같은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현종 대에 '친종장군'을 역임한 지채문 또한 그 용력이 엄청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엄연한 문관 출신이다. 이는 차후 지채문이 우상시, 상서우복야 등의 문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알 수 있으며, 당시 고려에서 오리지널 무관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최고 직책은 정3품의 ' 상장군'으로 극중에서 김훈이 맡고 있는 직책이 그것이었다. 또한 최질이 맡고 있는 '장군'은 정4품인데, 정작 고려의 국정을 주도하는 '재추회의'는 '상장군'과 같은 급인 정3품 '중추원부사'[249]를 포함해 종1품 문하시중까지로 무관직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
- 반론 : 고려사의 기록상 현종 즉위 초까지 유방은 낭장, 친종장군과 같은 무관직을 맡았기에 낭장, 중랑장을 맡았던 지채문과 더불어 무신이었다고 봐야 된다. 유방이 '병부상서 겸 상장군'에 이어 '서경유수 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를 맡은 것은 제2차 여요전쟁 직후라는 시점과 '안융진 전투'의 영웅이라는 경력 등이 요인이 되어 그 이전에 목종의 신임을 얻고 현종기에 이르러 '검교 상서우복야 겸 상장군'까지 이른 안소광 같은 경우처럼 특별히 임명되었던 것일 가능성이 크고, 특히 '병부상서 겸 상장군'이란 관직은 훗날 응양군 상장군이 병부상서직을 겸임하며 반주라 불리게 된 것을 감안하면 유방이 그 시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유방이 형부상서로 임명된 때는 현종 7년인 1016년으로, 같은 해 다른 시기에 우상시와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된 지채문과 원우, 다음 해인 1017년에 용호군 상장군 겸 호부상서로 임명된 이원과 더불어 고려사 기록상 무신이 군사 관련이 아닌 관직에 임명된 첫 사례인 것을 보면 그 전인 현종 5-6년 사이에 일어난 김훈, 최질의 난을 겪은 현종이 무신들에 대한 차별을 인식했거나 계속된 거란과의 전쟁 등의 이유로 무신들을 위해서 그들을 문신계 관직으로도 임명시켰을 가능성이 크다.[250]
- 강감찬이 고려가 2차 여요전쟁 당시 치렀던 전투가 기록된 자료들을 열람하면서 복기하던 중 그 곳에 들른 현종을 만났고, 이어 현종에게 "차후 거란과 일전을 치른다면 흥화진이나 귀주에서 대회전을 치러야 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전략을 밝혔는데, 언급된 지역들을 보면, 이는 제3차 여요전쟁에서 전개될 전투 양상의 복선이 되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 흥화진에서의 유방과 강감찬의 대화에서 두 사람과 비슷한 시대를 살다 간 성종 시절의 명신인 ' 서희'가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작중에서 '염윤'이라는 자(字)로 언급했다. 다만 '10회 단락'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염윤'이라는 자(字)보다 죽을 때 받은 '장위공(章威公)'이라는 시호(諡號)로 서희를 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유방이 "염윤의 협상으로 인해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는 대신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는 발언대로 실제 서희는 제1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군을 이끌던 소손녕의 협박에 대부분의 대신들이 서경( 평양) 이북의 땅을 내어주는 '할지론'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했고[251], 이후 직접 거란 진영으로 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면서 그 결과 고려가 송과 단교하고 거란과 통교하면서 사대를 하는 대신,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땅(강동 6주)을 획득하고 이후 2년간 고려 백성들을 그 땅에 이주하면서 성을 단단하게 짓는 등 고려 서북쪽 국경의 방비를 더욱 단단히 하는데 일조해 이후 2차례 더 치른 여요전쟁과 30여년에 걸친 여몽전쟁을 막는데 도움을 주었다.
- 회차 최후반 현종이 강감찬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임명하고 나서 강민첨과 김종현이 부장으로 그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강민첨과 김종현은 강감찬 못지않게 기록이 없고[252], 강민첨은 1012년 5월 2일(음력) '도부서(都部署)'로서 당시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한 동여진을 상대로 문연(文演), 이인택(李仁澤), 조자기(曹子奇)와 함께 무찔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부분은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253]
3.24. 24회
- 여진 부락에 잠시 머물던 형부시랑 김은부가 이후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야율융서와 소배압의 대화에서 거란 내부의 반란이 더 커지게 되어 고려를 침략할 수 없다고 나오며, 이후 소적렬을 위시한 거란군이 다시 침입하지만 흥화진의 장군 정신용에 의해 격퇴된 장면이 나레이션으로 나왔다. 드라마에서는 한 번에 연결지어서 설명했지만, 실제 김은부가 돌아온 것은 1012년 윤 10월(이하 음력)이며, 정신용이 거란군을 격퇴한 것은 1014년 10월 6일이다. 정신용은 비록 이후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끝내 전사하긴 했으나 거란의 맹공세를 여러 번 격퇴하며 분전한 '여요전쟁의 숨겨진 수훈자'라는 의견이 많아서 이 중요한 일과 인물을 나레이션으로 단역 처리하고 생략한 것에 대한 비판이 많다.
- 극 중 동북면행영병마사로 부임한 강감찬은 그 곳의 중랑장으로 있었던 도용수로부터 인근의 여진족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듣게 된다. 당시 고려와 거란 사이에 모여 살던 여진족들은 각 부족마다 노선이 서로 달라서 고려에 우호적인 부족은 고려에 내조해 토산물을 바치는 등 우호적인 반면, 고려에 우호적이지 않거나 거란과 가까웠던 일부 부족들은 동북면과 동해안을 무대로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만행들을 저지른 것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현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간간이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조을두(鉏乙豆)라는 여진 족장은 우호적인 인물로서 『고려사』에는 그가 제2차 여요전쟁이 종료된 1011년 5월 2일(이하 음력) 무리들을 이끌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과 1012년 윤 10월에 '모일라(毛逸羅)'를 비롯한 여러 부락들을 인솔해 화맹(和盟)을 간청한 기록이 있다.
- '이자림'이란 인물이 화주(和州)[255] 방어사로 드라마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이후 ' 김훈·최질의 난'을 진압하고, 강감찬이 건의한 개경 나성 축성의 공으로 국성을 하사받아 ' 왕가도'라고 불리는 인물로 두 딸을 현종과 덕종의 후비로 삼게 했고, 현종의 배향공신이 되는 인물이다.( 『고려사』 열전 '왕가도')
- 서경과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나온 현종의 발언에서 고려시대 지방군에 해당하는 주현군 중 하나로 '일품군'이 언급된다. 주현군은 보승군(保勝軍)·정용군(精勇軍)·일품군·이품군·삼품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승군·정용군은 전투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품군의 경우에는 이품군·삼품군과 함께 동원 목적을 공역(工役)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회차 중반에 고려 중앙군의 편제가 확인되는데, 고려군은 응양군(鷹揚軍), 용호군(龍虎軍)의 2군과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의 6위가 존재했다. 극에서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는 서경으로 갔으며, 개경에는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3개의 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극중에서는 이들 3개의 부대가 무신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에 가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는 고려군의 2군인 응양군과 용호군은 김훈, 최질의 난 이후에 설치된 것이라는 점이다.[256]
- 회차 후반에 제2차 여요전쟁 와중에 불탔던 정전이 복구되어 현종과 원정왕후, 원화왕후, 김씨 부인(후에 원성왕후), 신하들이 정전을 향해 걷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불탔던 궁궐이 복구된 때는 1014년 1월 6일이었으며, 이때까지도 김은부의 큰 딸인 김씨 부인은 어떠한 존호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그 이전에 강감찬과 강민첨, 김종현이 개경으로 복귀하는 장면이 나오고 강감찬이 현종 뒤에서 등장하는데, 강감찬이 개경에 복귀한 이후 어떤 벼슬에 올랐는지는 드라마에서 알 수 없으나 『고려사』 열전의 기록으로 보아 '중추사'로 임명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회차 말미 김훈과 함께 들어선 최질이 휘하 무장들을 소집할 때, 무장들이 최질을 '상장군'이라고 언급하는데, 실제로 난이 벌어진 1014년에 최질 또한 상장군까지 올라 김훈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 있었다.
3.25. 25회
이전 회차 말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김훈-최질의 난'이 다뤄지는데, 이 문단을 포함해 28회 ~ 29회까지 아래에 언급되는 일부 사실적인 내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극 중 창작이라고 봐야 한다.-
이 시점에서 관직 이동이 벌어지는데, 이전 23회 이후(1012년 2월)부터 반란이 벌어진 1014년 11월까지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관직 이동은 아래와 같다.
1012년 2월 20일(이하 음력), 유진(劉瑨)을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최사위(崔士威)를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최항(崔沆)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채충순(蔡忠順)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명하였다.
1014년 4월 21일, 유진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檢校太師 守門下侍中)으로, 최사위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1014년 8월 26일, 노전(盧戩)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1014년 11월 김훈과 최질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장연우가 '중추원사(中樞院使)', 황보유의가 '일직(日直)'을 맡은 것으로 나오는데, '일직'은 ' 중추원'의 관직으로 중추원은 성종 때인 991년에 도입되어 앞서 지난 '16회 단락'에서도 나왔지만, 현종이 즉위한 이후 강조에 의해 '중추원'이 '중대사'로 바뀌었다가 제2차 여요전쟁 이후인 1011년(현종 2) 다시 복구되었다. 처음 도입 당시에는 '사(使) 2인'과 '부사(副使) 2인', 그리고 '직학사(直學士)', '승선(承宣)' 등이 더해졌고, 복구가 된 이후에는 '사', '지사', '동지사(同知事), '부사', '직학사', '일직' 등이 두어졌다. 이 '일직'이란 관직은 여요전쟁이 다 끝난 1023년(현종 14)에 '좌/우승선'으로 바뀌었다. ( 출처) -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이때 '판어사대사'였던 장연우가 '중추사'에 올랐고, 채충순 또한 '중추사'[258]에 머무는 모습이 나오며, 여기에 더해 강감찬 또한 '중추사'로 등장(위의 '24회 단락' 참고)해 총 3명의 중추사가 나오는데, 당시 중추원은 종2품의 '판중추원사' 1인 밑에 '중추사' 2인이 존재하는 시스템이라서 이 세 사람 중 1명은 '판중추원사'로 가야 한다.[259]
- 한편 유진이 받은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은 크게 셋으로 나누는데, '검교'는 정식 직위가 아닌 명예직이며, '태사'는 기본적으로 천자(고려 황제)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문하시중'은 문하시중 바로 아래의 직위로 현종 대까지는 존재했다가 이후 직제 개편을 거치며 사라졌다가 고려 말인 공민왕 때 다시 그 이름이 부활하는데, 이인임, 이성계, 정몽주 등이 해당 관직을 가졌다.
- 강감참과 강민첨의 대화를 통해 1011년 마무리된 제2차 여요전쟁 이후에도 거란이 지속적으로 고려를 침공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실제로 이 기간 즉, 1011년부터 1018년까지 거란은 사신을 보내 '현종의 친조'나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는 한편, 최소 6만에서 최대 10만의 병력을 움직여 고려의 서북면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공했다. 고려는 그때마다 거란을 격퇴했지만, 고려에서도 장수와 군사들이 일부 희생당하는 등 피해가 많았다.
-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재상들의 요구에 따라 군인들의 '영업전'을 회수하여 백관들의 녹봉으로 충당하자는 상소를 올리는데, 언뜻 보면, 문신들이 무신들의 영업전을 불합리하게 빼앗으려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나 그 내막은 약간 달랐다. 사실 '영업전'은 기본적으로 문신과 무신을 가리지 않고 해당 신하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게 되었는데, 무신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할 경우, 유가족들의 생계를 이유로 해서 가족과 자손들에게 세습되는 경우가 많아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드라마에서 가장 식견이 있는 신하인 강감찬도 영업전 회수에 있어서 반대하지 않는 대신 전사한 무관들의 유가족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건의했고, 현종 또한 "영업전을 회수하는 대신 무신들의 가족들이 불편을 겪지 않게 왕실의 자산을 줄여서라도 그들을 지원하라."라는 명을 내린다. 실제 현종은 이 시점으로부터 2년 전인 1012년 교서를 내려 '전쟁과 가뭄으로 백성들이 힘드니 반찬의 수를 줄이라.'라고 명한 것처럼 이 시기 고려는 이전에 치른 전쟁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채 지진과 가뭄 등 여러 이상 재해로 몸살을 앓았었다.[260] 다만 김훈과 최질은 끝까지 왕명을 듣지 않고 정전에서 퇴청하여 난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
- 김훈과 최질이 2군 6위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난을 일으키는데, 위의 '24회 단락'에서 언급했듯이 고려군의 2군은 김훈, 최질의 난 이후에 설치된 것이기에 6위는 몰라도 2군이 가세하는 것은 잘못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반란군은 자신들과 근위대의 식별을 하기 위해 투구에 피아식별띠까지 두르는 용의주도함을 보이는데, 이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의종 때에 무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의방, 이고 등의 견룡군은 자신들과 근왕군의 식별을 위해 우측 어깨를 걷어올린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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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김훈-최질을 난을 진압하기 위해 강감찬, 노전, 김종현 등에게 명해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사들을 동원하고자 한다. 여기서 현종은 강감찬 일행에게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쥐어 주는데 삼주호부란 고려시대에 사용된 호랑이 모양의 부절(符節)로서 군사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옥으로 만든 신표이다. 이러한 호부는 국왕과 각 지역에 주둔하는 병마사가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었으며 국왕이 반란 등으로 긴급히 군사를 동원해야 할 시 신하를 통해 호부를 보냄으로써 군사를 몰고 개경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표식이었다.
실제로 고려 의종 대에도 무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과 동북면으로 각각 구원 요청을 한 바 있다. 서북면과 동북면의 병마사들은 각각 군사를 몰고 오려고 했으나 호랑이에 길이 막히는 등 여러 악재로 인해 개경에 군사를 들이지 못하였고 결국 의종 대의 무신정변은 무신들의 승리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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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배후 인물인 장작주부 박진은 원정황후를 압박해 서북면과 동북면의 구원군을 물리는 '교서'를 작성하는데, 여기서 나온 '교서'는 '천자가 내리는 명령'인 '조서'보다 한 단계 낮은 격식으로 '제후가 내리는 명령'을 의미한다. 고려 때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외왕내제'를 추구하면서 '황후'는 '천자인 국왕(대왕)의 신하이자 제후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황후' 소리를 들었던 원정황후 입장에서는 '조서'가 아니라 '교서'를 내리는 것이 고증에 부합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에서 후대에 왕의 어머니나 왕비가 이러한 명령을 내려 왕의 뜻에 반대한 일이 있었다.
경신(庚辰, 그 날의 간지)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려 하자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강보(姜保)가 말하기를, “금년에는 친히 제사를 지내서는 아니되옵니다.”라고 하였다. 첨의부(僉議府)가 강보를 책망하며 말하기를, “제사는 국가의 대사인데 네가 어찌하여 임금님을 저지하느냐?”라고 하였다. 또 어떤 간사한 신하가 왕대비(王大妃)에게 알려서 이를 중지시키도록 하였다.
- 『고려사』, 권 제38 세가, 공민왕, '강보의 만류에 따라 태묘 친향을 중지하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왕이 몸소 종묘(大室)에서 강신제(祼)를 행하려 하자 공주가 왕을 모시는 신하들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이르기를, “너희들이 왕을 모시고 태묘(太廟)에 나아간다면 내가 반드시 죄를 줄 것이다.”라고 하니, 이로 인해 왕이 가지 못하였다.
- 『고려사』, 권 제89 열전 권 제2, 휘의 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中 '승의공주가 공민왕이 태묘에 제사지내는 것을 저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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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도 언급했듯이 이 반란의 순서가 드라마와 실제 기록과 다르게 나타난다.[261] 드라마에서는 위에 언급된 '영업전 몰수 관련 상소'와 관련해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김훈과 최질이 조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반란을 결행했고, 뒤이어 궁궐 정전을 포위한 상태에서 김훈이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내놓으면서 유배할 것을 청했고, 이어 자신들도 국정에 참여해달라고 현종에게 요청한다. 이후 하룻밤을 지키다가 다음 날 새벽 무렵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자청해서 나오자 최질이 장연우를 때리는 것을 신호로 수뇌부들이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폭행한 것으로 회차를 마무리했지만, 실제 기록상으로는 1014년 11월 1일(음력)에 김훈과 최질의 군사들이 궁궐에 난입해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폭행을 당한 이후 유배를 건의 당하고 실행한 것으로 하루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장연우와 황보유의 두 사람은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로는 아래의 『고려사』의
황보유의의 열전에 나온 것처럼 당했다.
(그들(김훈, 최질 등 반란군들)은)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려 거의 죽게 하였으며, 궐 안에 이르러 왕을 대면하고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들의 영업전을 점탈하였으니, 사실상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일이지 특별히 조정[公家]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가락을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분노와 원한을 이기지 못하니, 요청하옵건대 나라를 좀먹는 자를 제거하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많은 사람들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황보유의·장연우를 제명하고 귀양 보냈다.
『고려사』, 권 제94 열전 권 제7, 황보유의 中( 관련 내용)
3.26. 26회
- 이전 회차에서 폭행당했던 장연우가 황보유의가 유배길에 오를 때 소달구지에 탄 채 이동하는데, 소달구지는 사실 사형수들만 이용하는 것이다. 전작인 <태종 이방원>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많았으며, 이 드라마 4회에 과거 목종 때 김치양의 권세에 기대었던 이주정을 포함한 사람들이 유배를 갈 때 줄에 묶인 채 걷는 모습이 정확한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 반란을 성공시킨 무신들이 주연을 베풀 때 상장군 최질을 치켜세우면서 "상장군 만세!"를 지속적으로 외치자 그나마 개념이 있었던 김훈이 이를 우려스럽게 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문서 위에 '언어 단락'에서도 나오지만, '만세'라는 표현은 국가나 군주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개 신하를 대상으로 그렇게 외치는 것은 봉건왕조에서는 엄연한 대역죄이자 불경죄라고 할 수 있다.
- 최질이 기존의 어사대와 삼사를 각각 '금오대(金吾臺)'와 '도정서(都正署)'를 세워 관리의 감찰권과 녹봉을 주는 권한을 무신들이 담당할 것을 건의하는 등 주요 요직의 관원들을 무신들이 겸직하게 할 것을 요청한다. 실제 이 두 기관은 반란 당시 그렇게 개칭되다가 난이 진압된 이후 다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262] 한편, '금오대'라는 명칭은 난에 가담한 6위 중 '금오위(金吾衛)'와 한자까지 같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 반란에 '금오위'가 주도했기 때문에, 그 공으로 어사대를 해당 부대의 이름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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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회차에서 반란군에 제압당해 옥에 갇혔던 지채문이 탈옥해 강감찬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제의에 따라 궁에서 쫓겨난 김씨 부인을 찾으러 개경을 탈출한다. 다만, 실제 반란 당시 강감찬이나 지채문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에 드러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은 극 중 창작이라고 봐아 한다.
개경을 탈출할 때 지채문은 강감찬의 처가 마련한 공양미 수레에 몸을 숨겼는데, 성문에서 그를 찾기 위해 검문을 하던 반란군들이 공양미 더미를 칼로 쑤시자 강감찬의 처가 "부처님에게 벌을 받기 전에 공양미를 쑤시는 행위를 멈추라!"라고 소리치자 행위를 그만두고 통과시킨다. 이전 회차에서도 사찰에서 기도를 드리거나 승려들의 모습이 많이 비추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불교가 고려 백성들의 삶에 깊이 녹아 있었으며 부처를 대상으로 불경한 행위를 하는 것이 터부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실제로는 김훈과 최질 모두 반란을 주도한 '공동 주범'이지만, 드라마에서 김훈은 그나마 불만은 있어도 개념이 탑재되어 있어서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고 한 반면, 최질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다혈질로서 완전히 천하를 쥐었다고 생각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면서 마침내는 동지였던 김훈마저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한다.
-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조정이 마비가 되는 와중에 이들이 궁궐 내 궁녀들까지 겁탈하는 성추행 장면이 있었고, 최질은 그저 방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연출이 구식인데다가 실제로는 일어난 일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약 150년 뒤에 일어난 무신정권기에도 그러한 사례는 이의방에 이어 집권한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 정도로 드물었으며, 정균과 이지영의 행동은 이후 그 아버지들의 권력을 무너트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물론 이 시기(1014년 12월)에 사면이나 조세 감면 등 여러 조치들이 이뤄졌는데, ' 김훈 최질의 난'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김훈 최질의 난')의 각주 13번을 참조.
3.27. 27회
- 드라마에서 귀양지에 도착한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안무사가 관리한다고 나오는데, 안무사가 절도사를 대체해서 일부 지역을 관할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귀양 온 이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드라마에서 나온 안무사가 "기본적으로 죄인 2명을 한 군데에 둘 수 없다."라고 말했지만, 황보유의가 간청하면서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것을 눈감아주는데, 이는 복수의 귀양자들을 한 군데에 두면 그 곳에서 공모해 다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실제 이후 벌어진 이자겸의 난 당시 주모자인 이자겸의 일족들을 서로 다른 귀양지에 나누면서 이후로도 이들이 공모하지 못하게 한 사례가 있다.
- 이 회차의 시점이 '거란이 침입하여 정신용 장군이 격퇴하고 3개월 이후'라고 나왔는데, 실제 정신용이 흥화진에서 거란을 격퇴한 일이 1014년 10월인 점을 감안하면, 해당 회차는 1015년 1월로 추정된다.
- 현종이 김훈을 따로 불러 박진과 최질을 도모할 것을 부탁하나 미리 눈치챘던 박진에 의해 최질이 미리 대비하면서 실패했다. 물론 앞 문단에 나온 것처럼 김훈과 최질은 '공동주범'이다. 이러한 현종의 계획은 사실 이후 인종 초에 벌어진 이자겸의 난 당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가 틀어지자 인종은 이를 이용해 척준경을 다독여 이자겸을 도모하도록 했고, 본 드라마의 김훈처럼 비록 반란에 동참했지만, 군주에 대한 충심이 남아있었던 척준경은 군사들을 이끌고 이자겸과 그의 당여들을 모두 체포하면서 3개월만에 반란을 끝냈다.[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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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질에 의해 요직을 차지한 박진의 관직이 '개성부윤(開城府尹)'으로 나오는데, 이 회차에서 박진이 거란의 사신을 데리고 온 서경판관 조원에게 자신을 설명할 때 '개경부윤(開京府尹)'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개성부'는 고려의 수도 개성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윤(尹)'이 임명할 수 있지만, 개경을 다스리는 자는 고려 국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임명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는 드라마에서 박진의 대사 실수로 보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고려사』기록에 따르면, 991년(성종 14) '부(府)'가 되면서 주변 고을들을 다스렸다가 1018년(현종 9) 없앴으며, 이후 문종 때 다시 복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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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변 소식을 들은 야율융서가 "지금 고려는 충신과 역신이 뒤섞여 있어서 우리(거란)을 이길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실제 야율융서가 이 말을 했는 지 알 수 없지만, 해당 발언과 비슷한 말은 한참 후대인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한 이후 이를 알리려 명으로 간 고려 사신에게 명 태조(주원장)이 한 말이 『고려사』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이를 차용해 야율융서의 대사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윤승순(尹承順)·권근(權近)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홍무(洪武) 22년(1389) 8월 초8일에, 본부의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 등의 관원이 봉천문(奉天門)에서 성지를 받았습니다. '고려(高麗)는 나라 안에 일이 많아 배신이 된 자들 중에 충신과 역신이 섞여 있으니 그 행위가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임금의 지위가 왕씨로부터 시해를 입어 후사가 끊기었으며, 후에 비록 왕씨를 가장하였으나 이성(異姓) 왕이 되었으니, 이것도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켜온 좋은 법이 아니다. 예로부터 임금을 시해하는 역적이 있는 것은 임금의 악행이 너무 심했기 때문으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비록 난신적자(亂臣賊子)이지만, 또한 어진 정치를 폄으로써 하늘의 뜻을 돌이키고 백성들을 평안히 만든 경우도 있었다. 지금 고려는 배신들이 음모를 꾸미고 온갖 거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안녕하지 못하고 있다. 설사 역모로 정권을 얻었다 한들 역모로 그것을 지키려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만일 역모를 떳떳한 일로 치부한다면 역신들이 줄을 지어 역모를 일삼을 것이다. 모두 앞장서 반역한 자들이 그렇게 가르친 것이니,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예부에서는 어린 왕에게 공문을 보내 경사(京師)에 오지 말라고 하라.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제 자리에 있어 위로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정하고 나라에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마련한다면, 비록 수십 년 동안 입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해마다 입조한다고 한들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또한 처녀도 보내지 말라고 명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권 제137 열전 권 제50, 창왕(昌王)[264], '명 황제가 왕의 입조를 거절하다'
- 한편, 야율용서는 소배압에게 '고려 국왕을 거란에 친조해 인질로 삼아 거란 땅에 머물게 하고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고 나서 고려군을 거란의 정복 전쟁에 마음껏 동원하겠다.'라고 밝혔는데, 실제 여몽전쟁을 거치면서 몽골과 강화를 한 이후 고려는 말 그대로 몽골(원)의 속국이 되었다.[265] 이후 이러한 언급은 다음 회차 중간에 현종과 박진의 대화 과정에서 한 번 더 나온다.
- 동북면의 화주 방어사를 지낸 이자림이 임기를 마치고 개경에 돌아와 현종에 의해 서경유수판관(드라마에서는 권서경판관)으로 임명되고, 현종은 그를 통해 밀지를 서경에 주재하던 서북면 행영도병마사 유방에게 전해 자신이 친조를 하는 척 서경에 반란군 수뇌부들과 함께 서경에 행차할 때 서경에서 반란군 수뇌부들을 주살하라는 명을 배린다. 다만, 이는 실제 기록과 다르다. 이자림이 화주 방어사를 마치고 개경에 돌아온 건 같지만, 이후 '중추원 일직'에 있던 '김맹(金猛)'에게 "주상께서는 어찌 한(漢) 고조(高租)의 운몽지유(雲夢之遊)[266]를 본받지 않으시는가?"라면서 자신의 계책을 말하자 김맹이 이를 현종에게 전했고, 현종은 이자림을 서경으로 보내 반란군 수뇌부를 처단할 계책을 실행하게 했다. 드라마에서는 이를 모두 건너뛰고, 현종이 직접 이자림을 불러 서경판관으로 보내면서 밀지를 전달하는 등 자신이 직접 그 계책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설정[267]했다.
- 반란 당시 반란군(그리고 그 배후에 있던 박진)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난 김씨 부인(김은부의 큰 딸)이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채문에 의해 구원되어 흥륜사에 머무는 것으로 나오는데, 현재 대한민국 내 '흥륜사'라는 절은 두 군데가 존재하는데, 한 곳은 신라 때 경주에 세워진 곳이며, 다른 한 곳은 고려 말 나옹이라는 승려가 인천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곳[268]이라 시대나 당시 이동 거리를 고려하면, 여러모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 역시 극 중 창작으로 실제 반란 당시 김씨 부인은 물론 아버지인 김은부의 집안도 화를 입은 적이 없었다.
- 회차 후반 거란의 사신이 찾아와 재침공을 통보하자 상장군 최질은 처음에 강조처럼 도통사가 되어 나가서 싸우려고 했지만, 이내 권력을 잃기 싫었던 반란 동지들과 박진의 만류로 계획을 바꾸어 현종을 거란에 입조하게 하면서 본인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사실 드라마에서 강조는 실질적인 지배자이었지만, 주변의 요청에도 자신은 '신하'라는 위치에 두면서 스스로를 통제했고,출정할 때에도 현종의 명을 받고 출정한 반면, 최질은 "내가 출정할 테니, 폐하는 그리 알고 계시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또한, 이후 실제 권력을 잡은 무신 집권자들 특히 최충헌 때 거란의 잔여 세력의 침공과 최충헌 사후 여몽전쟁의 과정에서 당시 집권자들은 하나같이 직접 사령관이 되어 전장으로 가서 싸우지는 못했어도 국왕을 상대하던 국가에 입조하게 하는 도를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269]해야 한다.
3.28. 28회
- 드라마 초반 서경으로 가던 중 현종의 발언에 최질이 개경에 있는 병부낭중 최구와 연금 중이던 상장군 김훈 등 다른 수뇌부들을 모두 서경으로 데려오도록 불렸다. 실제 김훈과 최구는 최질과 함께 서경에서 주살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고증을 따르기 위해 반란군 수뇌부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모으는 스토리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 김씨 부인이 흥륜사에서 현종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온 현종의 회상 장면에 본인과 원정왕후의 어린 시절이 나온다. 이때 드라마에서는 현종보다 원정왕후가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서 원정왕후가 현종보다 연상이라는 설정을 채택했지만, 실제 원정왕후의 생년은 992년생인 현종과 달리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와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 서경에서 반란군 수뇌부를 척살 계획을 세우는 이자림이 서경 내 어느 건물을 가리켜 "폐하께서 오시면 늘 머물던 곳"이라고 설명하는데, 실제 고려 국왕이 서경에 행차할 때 머물던 그 건물의 이름은 ' 장락궁'이라는 궁궐로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당 회차에서 문하시랑평장사로 나오는 최사위가 개수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곳에서 현종이 행차하면서 반란군 수뇌부들을 모두 척살했다.
- 이후 반란군 수뇌부들(정확히는 최질과 박진)이 서북면 군사들을 우려해 서경에 있던 서북면 행영도병마사 유방과 휘하 군사들을 모두 통주성으로 보내면서 서경에는 이자림, 노전, 조원, 김종현이 그 곳으로 잠입한 김씨 부인과 지채문, 도용수를 비롯한 동북면 군사들이 반란군 수뇌부들의 척살을 벌이는데, 이 중 이자림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참여와 행동은 모두 극 중 창작으로 이는 관련 기록들이 하나같이 부실해 이들의 행적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 박진의 조카이자 양자인 박영이 박진과 대화하면서 "군주를 거란에 넘기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며 차라리 이 장소에서 죽이고 남아있는 늙은 용손을 찾아 옹립해야 한다."고 말하다가 박진의 분노를 샀는데, 이를 통해 드라마상 '용손'은 현종 외에 적어도 1명 이상 남은 걸로 볼 수 있다. 실제 현종 즉위 이후 광종 때 역모로 인해 처형당한 효은태자의 직계 후손인 '동양군 왕림'과 '온결공 왕정'이 살아남아 종실에 복권되었고, 이후 왕정의 아들 왕경수가 이 무렵 생존하고 있어서 이 무렵까지 후계자를 가지지 못한 현종이 유고 시 대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만, 효은태자 사후 종친 대접을 받지 못해 구걸했다는 이들 후손들이 '용손'이 맞는지는 확인해 볼 여지가 있다.[270]
- 소배압이 야율융서에게 '현종의 친조'를 전하면서 "고려 국왕이 거란의 인질이 되어 있으면 고려에서 그자들(반란군 수뇌부)의 권력을 위협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자들이 '고려의 황제'나 마찬가지이다."라면서 야율융서에게 전했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는 제후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황제'보다는 '왕'이라는 표현이 나을 것으로 보여 이는 대사 설정의 실수로 보인다. 한편, 이를 들은 야율융서가 압록강 부근의 거란군을 대기하라고 명했는데, 실제로는 반란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거란은 고려를 한 번 정도 침략했다.
- 회차 최후반 현종과 반란군 수뇌부의 연회에서 무희들이 춘 ' 향발무'를 췄는데, 이는 조선 전기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후 반란군 수뇌부를 척살하기 위해 지채문과 도용수를 비롯한 군사들이 ' 방상씨 탈'을 쓴 채 칼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방상씨 탈'은 궁궐에서 나례나 장례 등을 치를 때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관련 문서에도 나오지만, 그 기원은 고려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 해당 장면에서 김훈은 봉두난발을 한 가운데, 최질에 의해 모욕을 당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최질과 같이 만취하도록 마시다가 이자림에게 붙잡혀 참수당했다. 또한, 가상 인물인 박진 부자와 같이 있던 최구도 연회장 안팎을 살피다가 지채문에 의해 먼저 살해되는데, 실제로 그도 이들과 함께 잡혀 참수당했다.
- 연회가 다 끝나고 현종이 술을 따르면서 마시기 전 한 발언에서 당시 현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데,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읜데다가 줄곳 사찰에 머물면서 암살 위협을 당했던 탓에 현종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꺼렸으며, 이 반란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죄인들의 경우, 최고 형량을 먼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정할 정도였다.
3.29. 29회
해당 회차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 김훈 최질의 난'의 진압 및 뒷수습, 나레이션으로 처리된 전간기 후반부(1015년 3월 이후 ~ 1018년 12월), ' 제3차 여요전쟁'으로 볼 수 있다.※ ' 김훈 최질의 난'의 진압 및 뒷수습
- 지난 회차 말미부터 현종이 지채문, 이자림 등의 도움으로 김훈, 최질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들과 배후인 박진까지 모두 척살하는 데 성공한다. 이 회차 초반에 그 상황이 그려졌는데, 『고려사』의 ' 왕가도 열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김훈과 최질 등 반란군 수뇌부들이 모두 취한 틈에 군사를 동원해 무찌른 반면,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현종과 고려에 대한 반발이 최질보다 적은 김훈이 최질을 막아서다가 끝내 최질에 의해 살해당한 장면으로 그려졌다.
- 박진까지 죽고 난 이후, 현종이 죽은 이들(반란 주동자)의 남은 가족들을 벌하지 말고, 시신을 보내 장례를 치르라고 명령하는데, 반란이 진압되고 1년 정도가 지난 1016년 2월의 『고려사』기록 중에는 이들 주동자들의 가족이나 친척들을 풀어주되, 통상적인 사면이나 등용은 허용하지 않되 본관(本貫)으로 돌아가도록 명해 목숨을 구제했다고 한다.
- 현종이 서경에서 개경에서 올라온 여러 재상들[271]과 서경판관인 이자림, 조원이 있는 상황에서 거란의 사신을 알현하는데, 친조를 요구하는 사신의 태도에 참지 못하고, 거란과의 단교를 선언함과 동시에 사신을 개경으로 억류한다. 이때 억류된 사신은 '야율행평(耶律行平)'이라는 거란의 장군으로 그는 김훈, 최질의 반란 진압 이후인 1015년 4월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되어 제3차 여요전쟁이 끝난 1020년에서야 거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전간기 후반(1015년 3월 이후 ~ 1018년 11월)
- 위의 군사 사열 장면 이후 나레이션을 통해 1015년부터 1017년까지 연달아 고려를 침공[273]했지만 고려군이 격퇴했다고 언급하는데, 실제 이 시기 고려는 수십 번에 걸친 거란과의 국지전을 물리치긴 했으나 이전 24회에 나레이션으로 언급된 정신용[274]을 비롯한 서북면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잃었고, 서북면 지역(정확히는 강동 6주 지역)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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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1015년 3월부터 1018년 11월까지)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관직 이동이 많이 벌어졌는데, 아래와 같다.
1015년 5월 24일(이하 해당 문서에 언급된 날짜들은 모두 음력), 김은부(金殷傅)를 지중추사(知中樞事)로 삼았다.
1015년 윤6월 26일, 장연우(張延祐)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다.[276]
1016년 1월 13일, 강민첨(姜民瞻)을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임명하였다.[277]
1016년 1월 22일, 김은부(金殷傅)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최충(崔冲)을 우보궐(右補闕)로 임명하였다.
1016년 1월 24일, 채충순(蔡忠順)을 다시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명하였다.[278]
1016년 4월 11일, 조자기(曹子奇)를 시어사헌(侍御司憲)으로 임명하였다.[279]
1016년 6월 4일, 김은부(金殷傅)를 중추사 상호군(中樞使 上護軍)으로,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하였다.
1016년 11월 13일, 최항(崔沆)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유방(庾方)을 형부상서 참지정사(刑部尙書 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1016년 12월 11일, 지채문(智蔡文)을 우상시(右常侍)로 임명하였는데, 무직(武職)을 겸하게 하였다.
1017년 12월 2일, 채충순(蔡忠順)을 좌산기상시 중추사(左散騎常侍 中樞使)로 임명하였다.
1018년 2월 11일, 노전(盧戩)을 중추원부사 상호군(中樞院副使 上護軍)으로 임명하였다.
1018년 5월 18일, 강감찬(姜邯贊)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 內史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1018년 6월 4일, 채충순(蔡忠順)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1018년 10월 19일,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임명하였다.
- 나레이션 중반 이후부터 현종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채 등장한다. 해당 장면에서 시립한 지채문의 복장이 친종장군이며, 그 다음 장면에서 궁궐 내 회의실에서 재상들(서북면에서 복귀한 유방과 이자림 포함[280])과 유배에서 돌아온 황보유의가 개경의 나성 축조(아래 후술)를 설명하는 장면으로 보아 1016년 6월 ~ 12월 사이로 추정한다. 현종이 1009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니 이 무렵이면 24 ~ 25세가 된다.
- 드라마에서 강감찬이 서경에서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을 때, 강민첨이 '대장군', 김종현이 '병마판관'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기록에 두 사람이 해당 관직을 받은 날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강감찬의 '서북면행영도통사' 임명 시기를 고려하면, 이 때 같이 임명되었는데 기록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후 개경에 돌아온 강감찬이 현종과 대신들 앞에서 거란의 재침을 알리면서 '대회전' 전술을 밝힐 때, 그의 복두가 기존의 '전각복두'에서 무관이 착용하는 '절각복두'로 교체되었다. 본 드라마에서 같은 문관이라도 '전각복두'와 '절각복두'가 나뉘어 있는 것으로 나오며, 경우에 따라 복두를 혼용하기에 혼선이 있을 수 있지만, '전각복두'를 착용하는 문관은 외관직이나 무관직을 겸하지 않는 문관, '절각복두'를 착용하는 문관은 외관직이나 무관직을 겸하거나 병부에 소속된 문관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즉 문관으로서 외관직(무관직)을 수행하는 처지이기에 무관과 같이 '절각복두'를 착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한편, 최항과 최사위가 '문하시랑평장사'로 나오는데, 현종의 아들인 문종 때의 평장사는 내사(중서)평장사 1인, 문하평장사 1인, 내사(중서)시랑평장사 1인, 문하시랑평장사 1인 이렇게 총 4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렇듯 평장사 4인은 그 명칭이 각각 다르며, 문하시랑평장사는 1인만 존재하였기에 최항과 최사위는 서로 명칭이 다른 별개의 평장사여야 하는데, 최항은 1017년 4월 사주(泗州, 현재의 사천시)에 있던 안종(安宗)의 관(梓宮)을 개경으로 옮길 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있던 것으로 보아 최항은 '문하평장사', 최사위는 '문하시랑평장사'로 등장하는 것이 맞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 정원이 들쭉날쭉했으며 서로 다른 명칭에도 불구하고 업무상의 차이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딱히 잘못된 고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앞에서 나성 축조 당시 중앙에 들어온 이자림이 1018년 무렵에는 '상서우승'으로 나온다. '상서우승'은 '상서좌승'과 함께 상서도성의 종3품 직위였으며 '상서령'(종1품)과 '상서복야'(좌/우, 정2품), '지성사'(종2품) 다음의 직책이다. 자세한 건 상서성 문서 참조.
- 지채문의 경우, 우상시로 임명된 이후 '전각복두'를 착용했는데, 지채문과 관련된 기록이 현저하게 적어서 그가 처음 관직이 문관인지 무관인지 알 수 없어서 해당 복식으로 보아 원래 문관이었는지, 아니면 현종을 호위하고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
- 나레이션 중반 언급된 나성 축조 장면에서 강감찬이 대화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원래 개경에는 황성만 있어서 별다른 방어 시설이 없던 지역이라 방어에 매우 취약했다. 제2차 여요전쟁 이후에 강감찬이 건의해 축성을 시작한 개경의 나성은 황보유의와 이자림 등이 주도했는데, 워낙 길었는지 여요전쟁이 다 끝나고도 공사가 더 이어져 현종 재위 말년인 1029년이 되어야 완공되었다.
- 1015년 11월에 사망한 장연우, 1017년 5월에 사망한 김은부, 1018년 4월에 사망한 원정황후의 최후 모습이 주변 인물들의 회상이나 해당 회차 후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 장연우의 경우, 그와 늘 따라다녔던 황보유의의 회상에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김훈, 최질, 박진이 주도한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돌아왔지만, 반란 당시 구타당한 일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서 결국 병으로 사직한 채 궁궐을 나가는 장면을 최후로 그려졌다. 다만, 위에도 나왔듯이 반란 진압 이후 돌아와 윤6월에 '호부상서'가 되었지만, 같은 해 11월에 죽기까지 사직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김은부의 경우,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당해 여진에 머문 이후로는 뚜렷한 기록 없이[281] 이 무렵부터는 왕의 장인이었던 까닭에 관직이 '지중추사' → '호부상서'[282] → '중추사 상호군'[283]를 지내다가 1017년 5월 사망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죽기 전에 현종이 문병을 왔지만, 실제 현종은 문병 대신 김은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처는 물론 그 윗대 선조들(김은부의 부모와 장인 이허겸)을 모두 추증하게 한다.
- 한편, 김은부의 다른 두 딸[284]도 드라마에서는 이 무렵 궁에 들어오는데, 실제 두 딸이 언제 궁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나중에 '원혜왕후'가 되는 둘째 딸은 이 시점에는 '안복궁주'라고 불렸는데, 드라마에는 그냥 '훗날의 원혜왕후'라고 적어놓았다.
- 위 두 사람에 대한 회상이 마무리되고 중병을 앓던 원정왕후가 현종의 품에 사망한다. 이후 우보궐[285] 최충이 영주(寧州)의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286]에서 거란을 상대로 전략을 짜던 상원수 강감찬에게 찾아와 "왕후 전하께서 '훙서(薨逝)'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예기(禮記)』의 '곡례(曲禮)'편을 보면, '훙서'는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단어로서 '황후', '왕', '왕후', '상왕', '대비' 등 무품에 속하는 계층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 드라마에서는 원정왕후가 강감찬이 상원수로 임명되어 출정한 직후에 사망한 장면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거란군이 처들어 오기 전인 음력 4월에 사망했다. 물론 언제 사망했든 그녀는 이후 현종이 부모(안종 왕욱과 헌정왕후 황보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현화사에 그녀의 진영(眞影, 초상화)를 안치했다고 '현화사비'의 뒷면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현종이 생전에 각별히 사랑했던 왕후가 바로 원정왕후였음을 알 수 있으며, 드라마에서도 비록 후반부에 잠시 갈라서긴 했지만, 원정왕후를 아끼는 현종의 모습을 알 수 있다.
- 원정왕후가 사망하기 전 '연경원(延慶院)'에 들려 자고 있던 왕흠을 보고 난 후 연경원주 김씨(김은부의 큰 딸, 후에 원성황후)와 화해할 때, "저 아이(왕흠)가 이제 태자가 될 것이네. 그 다음에는 이 고려의 국왕이 될 것이네. 폐하께서 궐 밖의 여인을 통해 대를 잇게 한 것은 태조대왕이 유력한 가문의 여인들을 맞아 후손을 본 것과 같은 취지이며, 폐하께서는 고려를 다시 건국한 것일세."라고 말했는데, 실제 현종은 태조 왕건과 2대 혜종, 3대 정종 이후 처음으로 '족외혼'[288]을 통해 많은 부인과 자식들을 두었으며, 이 중 원혜왕후 소생인 문종을 거치면서 왕씨 왕조가 이어지게 된 '중시조'라 할 수 있다.[289] 기록에 따르면, 현종은 7명의 왕후와 6명의 후궁 사이에서 6남 8녀를 두었는데, 기록에 누락된 이들도 있어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략) 사찰(金地)을 건립하는 공사가 막 끝나고 옥호(玉毫)의 묘상(妙相)도 온전히 빛났습니다. 이로 인해 사찰 내 서북 쪽 땅에 별도로 진전(眞殿) 1좌(座)를 열고 우리 황고(皇考) 안종헌경영문효의대왕(安宗憲景英文孝懿大王), 황비(皇妣)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 및 돌아가신 누이(皇姊) 성목장공주원정왕후(成穆長公主元貞王后)의 진영(眞影)을 안치함으로써 좋은 인연을 받들도록 명하셨으니, 살아계실 적처럼 편안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필시 부처님(佛天)의 복록과 선함에 의지하고 또한 신령의 보살핌(靈鑒)으로 쌓인 상서로움을 이을 것입니다. (후략)
'현화사비'의 뒷면 내용 中[287]
- 회차 중반부터 현종과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흠이 등장하는데, 후에 '덕종'으로 불린다. 1016년 5월 2일 태어난 그는 6살이던 1022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16세가 되던 1031년 아버지 현종이 38세(『고려사』 기록에는 40세)에 승하하자 뒤를 이어 즉위해 3년 동안 재위했다. 왕흠이 태어난 이후, 김씨 부인은 '연경원주(延慶院主)'에 봉해졌고, '연경원'을 비롯해 여러 물품과 노비, 토지 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 한편, 1달 뒤에는 ' 왕수(王秀)'라는 왕자도 태어났는데,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 한편, 드라마 시점인 1018년 11월이 되면, 훗날 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정종'이 되는 왕형(王亨)도 1018년 7월에 태어나면서 이 시점에서는 왕형도 등장해야 하며, 김씨 부인이 '연경궁주(延慶宮主)'로 불려져야 하나, 왕형은 최종회까지 등장하지 않았고, '연경궁주'라는 호칭도 31회와 최종회에 언급되는 점이 아쉽다.
- 강감찬과 강민첨, 김종현이 개경으로 내려가는 중, 현종과 여러 조정 대신들과의 대화에서 지방 개혁이 얼추 완성되어 안무사 대신 새 관리들을 파견했고, '역(驛)'과 '역도(驛道)'의 정비도 마무리되었다고 유진과 최항이 각각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이 시기(1018년)에 가서야 비로소 지방 개혁이 완성되어 우리가 잘 아는 5도 양계가 이때부터 고려 말까지 이어지는데, 기존 3경(개경, 서경, 동경)과 5도호부, 12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4도호(都護)·8목을 비롯해 군(郡)·현(縣)·진(鎭)' 등을 설치하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물론 고려 때에는 모든 지역에 관리가 파견하지 않았고,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비로소 모든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관리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 제3차 여요전쟁 관련
- 야율융서가 소배압에게 지휘봉을 내리며 "'우피실군'을 비롯해 정예병력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고려를 침공하라."라고 말한다. 당시 '우피실군'은 자막에 나온 것처럼 '거란 황제의 친위대'를 의미했고, 고려로 치면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응양군', '용호군'과 같은 포지션이었다.
- 강감찬이 거란과의 대회전을 지휘할 '상원수'로 임명되어 현종으로부터 부월을 하사받고, 그를 보좌할 사람으로 강민첨과 김종현, 조원[290]이 등장한다. 실제로 이들 세 사람은 제3차 여요전쟁 당시 강감찬을 따라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3.30. 30회
- 해당 회차 내내 고려군이나 거란군의 진영, 개경의 모습에 눈이 내리거나 쌓인 모습이 나오는데, 실제 제3차 여요전쟁 기간이 겨울철(음력으로 1018년 12월 ~ 1019년 2월)에 해당하기 때문에 겨울로 묘사되는 것이 맞다.[291]
- 거란 성종(야율융서)가 거란군의 승리를 위해 승려들을 모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회차 초반에 나온다. 사실 거란(요나라)는 고려 못지 않게 불교 국가였으며, 황제부터 백성까지 대부분이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번 회차에 등장한 거란 승려의 복장은 요나라 시대 불상에 등장한 복장을 비교적 흡사하게 고증하였다.
- 회차 후반 거란군의 회의에서 거란식 헤어스타일인 '곤발'이 아닌 두건을 쓴 군인들이 보이는데,이는 거란의 영향에 있던 한족이나 발해인 군인들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된 부분을 제외하고 해당 회차는 크게 ' 삼교천 전투와 거란군의 개경 직공', '현종의 개경 사수'로 나눌 수 있다.
※ 삼교천 전투와 거란군의 개경 직공
- 회차 초반 거란군이 어느 성도 공격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고자 할 때 소배압이 "불을 지피지도 밥을 짓지도 마라. '건포'를 씹으면서 달릴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실제 거란을 비롯한 북방 민족들은 전쟁이나 원정 중에는 해당 지역을 약탈하면서 식량을 조달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건포'와 같은 육포 등을 이용해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한편 이 때 소배압과 거란군이 머물렀던 곳을 자막에는 ' 검동도'라고 표현했는데, 현재도 존재하는 이 섬은 과거 거란이 압록강가에 설치한 내원성이 있었던 곳이며, 여요전쟁 이후에도 고려와 거란의 접경지역으로 유지되었다.
- 회차 초반 고려군이 거란군을 상대하기 위해 영주 안북대도호부에서 흥화진으로 행군할 때, 노란 바탕에 황룡이 그려진 고려의 의장기가 비춰졌다.
-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흥화진 인근에 주둔한 강감찬이 휘하 장수들에게 ' 어린진'과 ' 학익진'을 설명하면서 거란군을 섬멸할 방법을 설명하고, 이어 군영을 순시하다가 검차와 무기를 정비하던 병사들 앞에서 달군 검에 망치를 두드리면서 "이런 식으로 적을 궤멸시킨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등장한 '어린진'은 물고기 비늘 형태의 다중 쐐기 진형을 말하고, '학익진'은 학 날개 형태의 포위 진형을 말하는데, 해당 진법은 일반 대중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해상전[292]을 통해 알려졌지만, 사실은 이전부터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사에 기록된 진법들이고, '학익진'은 서양에서도 ' 망치와 모루 전술'[293]와 비슷하다.
-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 부근에 도착하면서 진격로를 뚫기 위해 과거 통주 전투처럼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의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강감찬은 이를 대비해 대장군 강민첨에게 후방에 남도록 했고, 이후 강민첨이 거란군의 선발대를 격퇴하는 동안, 중갑기병을 이용해 거란의 선발대를 섬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다. 원래 기록에는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1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에,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들이 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놓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고려사』권 94 열전 권 제7, 강감찬 中)라고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재현의 어려움과 해당 드라마 분량 문제로 수공 대신 거란의 기습과 이를 고려군이 격퇴하는 장면으로 대체했다.
- 첫 전투 이후 거란군이 보이지 않았던 강감찬이 텅 비었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고 뒤늦게 개경을 직공해 현종을 사로잡으려는 소배압의 목적을 알고 나서 휘하의 강민첨, 김종현, 조원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자신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동하는데, 기병 위주인 거란군보다 느린 속도로 이동했다. 그 사이 강민첨은 자주(慈州, 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조원은 마탄(馬灘, 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거란군을 격퇴하면서 거란군 수만 명[294]을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이 유격전 상황을 각 군의 전령이나 부장의 대사로 처리했다.
- 거란이 이렇게 다른 성들을 건드리지 않고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직공하고자 한 배경에는 해당 시점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할 때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거란군은 발해의 여러 성들을 우회하고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직공해서 군주 대인선을 사로잡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다만 이러한 방식은 빠른 기동력이 없으면 자칫 고립이 될 수 있는 상당히 위험한 전술이다. 회차 초반 소배압이 고려를 '늪', '진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거란은 위험을 부담하면서 개경으로 직공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렇게 이동하던 중 거란군이 김종현의 1만 중갑기병들을 막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김종현의 기병 1만이 북방에서 개경까지 온 후 다시 귀주로 돌아오기까지의 행적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창작으로 보인다.
※ 현종의 개경 사수
-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전투를 피하면서 개경으로 직공한다는 상원수 강감찬의 서신을 접한 현종은 몽진해야 한다는 조정 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경을 사수할 것을 결심한다. 실제 현종은 이 전쟁 당시 현릉에 안치된 태조 왕건의 관을 부아산(負兒山) 향림사(香林寺)로 옮겼으며, 개경에 삼엄한 경계를 내리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 여기서 현종이 자신의 몽진을 떠나고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한 이후 벌어질 일들을 설명하면서 ' 경기'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조선 초에 생겨나 오늘날의 ' 경기도'가 아닌 당시 고려 수도였던 개경의 주변 지역(현 경기도 파주시, 장단군, 개풍군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 경기도보다 좁은 면적과 의미를 지녔다. 여담으로 당소 고려의 제2수도 역할을 한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서울)의 주변에도 각각 '서경기', '동경기', '남경기'라고 불렸으며, ' 고려가요'와 함께 고려시대 문학 중 하나로 남아있는 ' 경기체가' 또한 '개경 주변의 노래'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보면 된다.
- 현종의 명을 받들어 조정 신료들이 개경 안과 주변 백성들을 대상으로 조서를 발표할 때, 조서에 '고려국왕지인'이 찍혀 있는데, 이전 '14회 단락'에도 언급되었지만, 해당 인장은 현재 유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려의 국인이라 본 드라마에서는 일관되게 사용했다. 사실 해당 국인은 기본적으로 중화권 왕조에 사대하며 사여받은 인장으로 대부분 그들과의 외교관계에 사용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천자의 나라를 표방한 고려답게 '서조보' 등의 독자적인 옥새를 만들어 사용했음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 현종과 조정 신료들이 백성들을 설득하면서 소배압의 거란군을 상대로 ' 청야 전술'을 펼친다. 본 문서의 '6회 단락'에서 귀주성 부분에 언급되었지만, 사실 청야 전술은 수비하는 쪽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지로 적군이 보급할 수 있는 군수물자(특히 식량)들을 모두 파괴하는 것으로 현지 백성들의 고통과 부담을 줄 수도 있었다. 실제 드라마에서는 백성들이 일부 반발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따랐으며, 민가까지 불태우는 정석적인 장면을 재현하기보다 민가는 내버려두고 사용할 수 있는 물자를 태우거나 우물을 메우는 장면으로 표현했다.
- 병부에서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위에게 강감찬과 강조, 양규의 부인들이 와서 무기를 달라고 할 때, 강조의 처가 "활을 쏠 줄 아니 활을 달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이전 14회에서 훗날 원성황후가 되는 김은부의 큰딸 김씨가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고려 시대 여성들이 이후 시기보다 활발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개경에 남은 군사가 드라마에 언급된 것처럼 약 500명 정도 있었으며,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개경이나 주변에서 청야에 협조해 온 백성들 중에 아마 군인으로 뽑혀 북방으로 가지 않은 일부 장정들이나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던 노인들이나 어린이들, 또는 승려들이 참여해 성을 지켰기 때문에 굳이 아녀자들까지 나서서 창검이나 활을 들고 적군과 대치하지는 않았다.
- 회차 말미에 소배압이 개경을 정찰할 목적으로 기병 300명을 별동대로 보내는데, 이는 다음 회차에서 다룰 금교역 전투를 암시한다. 한편, 소배압이 개경의 외성을 설명할 때 '고려를 오간 사신들의 첩보'라고 말했는데, 이전 '29회 단락'에서 언급된 야율행평의 억류(1015년 4월 11일(음력))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3.31. 31회
해당 회차는 크게 ' 금교역 전투와 거란군의 철수', ' 귀주 대첩'으로 볼 수 있다.※ 금교역 전투와 거란군의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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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을 사수하기 위해 현종과 주요 대신들이 회의를 할 때, 현종은 지채문의 의견을 수용해 척후차 개경으로 다가온 적 선발대 300기을 아군의 기병 100기와 일부 궁병을 동원해 아래와 같이 격퇴했다. 다만 실제로는 밤에 야습으로 섬멸했지만, 드라마에서는 낮에 기병들이 개경 주변을 돌면서 분산되어 있던 적 선발대를 없앰과 동시에 이자림과 황보유의가 이끈 궁병들은 퇴로에 매복해 막았다.
기미 10년(1019) 봄 정월 신유[295] 소손녕(蕭遜寧)[296]이 신은현(新恩縣)에 이르렀는데, 개경(京城)과의 거리가 1백 리(里)였다. 왕이 성 밖의 백성들을 거두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청야(淸野) 전술로 〈거란군을〉 대비하였다. 소손녕이 보낸 야율호덕(耶律好德)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대를 돌리겠다고 아뢰었다. 몰래 정찰 기병 3백 여 명을 보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보낸 군사 1백 명이 밤을 틈타 엄습하여 죽였다.
『고려사』권 4 세가 권 제4, 현종, '소손녕이 개경 가까이 진군해오다' - 금교역 전투 문서에도 나오지만, 당시 거란군은 야율호덕이란 자가 지휘한 반면, 고려군은 당시 누가 지휘했는지 기록상 알 수 없다. 드라마에서는 이에 당시 거란을 상대했던 대신들 중 최고참격인 참지정사 유방을 필두로 지채문, 노전, 황보유의와 거란은 아니지만, 여진과 상대한 경험이 있는 이자림이 나서서 막은 것으로 처리했다.
- 훗날 원성황후(『고려사』기록에는 '원성왕후')라 불리는 김은부의 큰 딸이 '연경궁주'라고 자막에 나온다. 물론 위의 '29회 단락'에서 언급했지만, 실제 그녀는 장남 왕흠(후에 덕종)을 낳은 1016년 음력 5월부터 '연경원주'라고 불렸고, 극 중 시점인 1018~1019년에는 '연경궁주'로 불려야 하는데, 제작진의 착오로 뒤늦게나마 '연경궁주'로 나오게 되었다. 드라마 29회 중후반 시점이 1018년 11월이라 '연경원주'를 건너뛰고 바로 '연경궁주'라고 부르는 것에 다소 부담이 생길 것 같아 적용한 것이라도 시점에 따라서 제대로 적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한편 백성들에게 입힐 갑옷을 제작하고 있던 연경궁주 자매들이 침방에 들어온 원화황후(『고려사』기록에는 '원화왕후')를 향해 '전하'라고 부르는데, 원화황후가 실제 황후로 봉했는지 기록상 알 수 없지만, 1018년 4월 원정황후(『고려사』기록에는 '원정왕후')가 훙서한 이후 원화황후가 현종의 여러 부인들 중 서열이 가장 높고, 생전 '대명왕후(大明王后)'로 불리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 시점에는 황후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현종을 돕기 위해 남하하던 상원수 강감찬이 뒤쳐진 보병들로 인해 멈춘 사이 병마판관 김종현이 이끄는 중갑기병들은 개경을 향해 진군하지만,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먼저 개경 근처에 다다랐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강감찬은 거란군이 남하하자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1만 기병을, 동북면 병마사에게 3,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도록 했지만, 이 두 병력은 끝내 거란군보다 먼저 개경에 도착하지 못했다.
- 결국 거란군이 개경 근처까지 진군해오자, 현종은 대신들과 백성들과 함께 개경 밖에서 횃불로 거란군을 기만하는 전술로 마침내 철수시킨다. 횃불을 이용해 거란군을 속인 장면은 극중 창작이지만, 몽진 대신 개경 사수를 택한 현종의 결단에 백성들이 동참해 청야전술을 주도해 적은 병력과 전투 경험이 부족한 백성들로 대략 8~9만 명 정도 되는 거란군을 속여 퇴각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고려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 거란군이 철군하는 와중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본대가 거란군을 상대로 연주(漣州)와 위주(渭州)에서 적병 500여 명을 섬멸했지만,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과정 없이 거란군이 먼저 귀주 벌판에 다다르고, 그 뒤를 쫓아 고려군이 귀주 벌판에 다다름과 동시에 퇴로들을 막으면서 진형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연주(漣州)'는 현재의 평안남도 개천시, '위주(渭州)'는 현재의 평안북도 영변군에 해당하는데, 최전방 흥화진(현재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었던 강감찬의 본군이 귀주 대첩을 앞두고 이 시점까지 내려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거란군의 후미를 격퇴하면서 저들을 귀주로 유인해 섬멸하려는 압박 작전을 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귀주대첩
- 귀주 대첩을 앞두고 강감찬이 소배압에게 개인적으로 서찰을 보내면서 '두 늙은이들끼리 양국의 명운을 걸고 당당히 맞서자.'라면서 피하지 말고 정면 승부할 것을 전한다. 물론, 관련 기록이 없어서 이 당시 양국 군대의 사령관끼리 서신이 오간 경우는 없기 때문이 이는 극 중 창작이고, 비슷한 경우가 흔히 살수 대첩으로 대표되는 제2차 고수전쟁 당시 고구려의 총사령관인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 여수장우중문시'[297]와 비슷할 수 있다.
- 서찰 끝에 '좌하(座下)'라는 단어가 적혔는데, 이 단어는 편지글에서 받는 사람을 높여서 그의 이름 또는 호칭 아래에 쓰는 단어로 '귀하(貴下)', '존하(尊下)'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강감찬이 서찰에서 '두 늙은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당시 강감찬의 나이가 71~72세에 해당하며, 소배압은 생년을 알 수 없지만,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60대 중후반의 노장으로 추정된다.
- 고려와 거란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르기에 앞서 '서전(緖戰)'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서전은 전쟁이나 시합의 첫 번째 싸움을 의미하며 서로 화살세례를 주고받는 등의 과정이 해당되었다. 아울러 거란은 서전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그들만의 민속의식을 치르는데, 이는 거란이 유목민족으로 토템 신앙을 숭배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귀주 대첩 시작 전에 거란의 여러 장수들이 고려군이 강 두 개를 모두 건너는 것을 유도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야율팔가 혼자 다른 작전을 주장하고, 소배압이 이를 따랐다는 과정이 있으나 드라마에서는 생략되었다. 드라마에서는 휘하 장수들이 회전 장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장면은 없고, 그 대신 소배압이 고려군의 중갑기병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평원의 대회전을 결정한다.[298] 또한 소배압은 고려군에 중갑기병이 빠져 있는 지금 싸워야 이길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리는데, 실제로 거란군은 고려군의 중갑기병대를 아예 전략에서 배제하고 대비조차 하지 않았다.
- 서전 단계에서 바람이 거란군에겐 순풍, 고려군에겐 역풍으로 분다. 실제로 귀주 대첩 당시 처음에는 바람의 방향이 이와 같았으나, 김종현의 기병대가 등장하는 타이밍에 바람이 정반대로 뒤집어져서 고려군의 순풍으로 바뀌었다.
3.32. 32회(최종회)
여기서는 ' 귀주 대첩'과 '고려와 거란의 전후처리', '강감찬의 사직과 엔딩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귀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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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이 만든 가상의 지형[299] | 합리적인 귀주 대첩 전개의 예시[300] |
- 1월 2일 남하했던 김종현의 기병대가 돌아오고, 그 순간 바람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소나기가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극중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 상공 뷰(진영)에 심각하게 오류들이 많다. 우선 동서방향이 반대다. 귀주성 동남쪽 두 하천 사이의 평원은 전장의 가로가 길어야 하나, 세로가 긴 가상의 지형을 만들었다. 석천/구릉/귀주성도 없다. 또한 역사와 거꾸로 거란군이 훨씬 많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 거란군에 휩싸여 사각방진이 된 검차1진이 펴지면서 학익진을 완성하기란 어렵다.
- 귀주 대첩의 종료 시점에 거란군이 뿌린 철질려(鐵蒺藜)가 날아가는 장면 이후 장면을 전환해 바로 고려가 승전한 장면을 집어넣었는데 귀주 대첩의 자세한 전개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스킵을 시전했다며 많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원래 철칠려는 거란의 사촌격 민족인 몽골 군대가 퇴각하면서 뿌리는 전술에 사용된 물건인데 거란 역시 비슷한 풍습이 있다고 설정하여 거란의 결정적 패배를 상징하는 연출로 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나, 시청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연출 미스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차라리 이런 설명을 귀주 대첩 전에 설명하는게 더 좋았을 수도 있다.
- 강민첨이 소배압을 비롯한 거란의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섬멸할 것을 제안하나 강감찬은 이를 말리며 '그냥 두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제3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군은 대패하여 퇴각하는 거란군을 억지로 추격하여 섬멸하려고 한 기록은 없는데, 아마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현종이 개경의 밖에 나와 임시 천막을 설치하여 강감찬을 맞으며, 이는 고려사에 영파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역명을 굳이 밝히진 않았다. 현종은 강감찬의 머리에 '금화팔지'라고 불린 금꽃을 꽂아주며 승전을 치하하는데, 이와 같은 장면은 실제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수많은 개경의 백성들이 강감찬을 맞는 장면 또한 등장하는데 이 또한 고려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 전쟁에서 패배한 소배압이 야율융서와 대면한다. 야율융서는 분노로 가득차 꿇어앉은 소배압을 도끼로 치려고 하나, 이내 성정을 가다듬고 "수고했소. 가서 쉬시오."라는 말과 함께 어전을 나간다. 실제 기록에서는 야율융서가 소배압에게 "낯가죽을 벗겨 죽이겠다"는 등의 험담을 한 내용이 있지만 극중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나오지 않았으며 소배압을 용서하는 내용만 고증되었다.
- 현종이 전쟁의 전사자 가족들에게 곡식을 하사하고 사찰에 전사자들의 공덕을 기릴 것을 명한다. 아울러, 전쟁에 공이 있는 9472명의 전공자들을 모두 치하하라는 말을 하는데 실제 이 9472명이라는 전공자 숫자는 고려사에 기록된 수치이다.
- 고려의 승전보가 이웃 국가에도 전해지면서 여진 추장과 송나라의 사신이 내빙하고 철리국과 동흑수국, 탐라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아라비아의 사신들까지 고려를 찾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여요전쟁 승전 이후 철리국과 흑수국, 탐라국 등에서 사신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나 이 당시 일본과 아라비아의 사신이 고려를 찾아왔다는 기록은 없어 이 부분은 극중의 창작으로 보인다. 다만 현종 이후 고려에 평화가 자리매김하고 일본과 대식국(아라비아)의 사신이 고려에 찾아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존재하기는 한다.
- 극중에서 각국 사신들의 복식을 그대로 고증하였는데, 일본 사신의 복두 또한 그대로 고증하였다. 극중 일본 사신이 쓴 복두는 ' 칸무리'라고 불리는 일본의 전통 관모 중에서도 신하들이 착용하는 '스이에이노칸(垂纓冠)'이다. 이 시기의 일본은 헤이안 시대로 당시의 칸무리는 지금보다 모자의 크기가 훨씬 컸는데, 작중에서도 헤이안 시대의 칸무리를 거의 정확하게 고증했다.
- 현종이 아들 왕흠을 태자에 책봉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후일 덕종이 되는 왕흠은 제3차 여요전쟁이 끝난 지 3년 후인 1022년에 태자로 책봉된다.
- 현종이 송나라로부터 거란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거란을 공격하는 것에 찬성하나, 현종은 강감찬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란을 공격하지 않고 되려 거란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정상화시켜 지속적으로 거란을 상국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한다. 아울러 거란에 바로 사신을 보내 양국 간의 화의와 고려 국왕의 책봉을 요청하고, 거란의 황제는 고려가 억류했던 사신 야율행평을 돌려보낸 것을 치하하며 고려 국왕의 죄를 용서하는 식으로 양국의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었는데, 실제로 이러한 내용은 고려사와 요사에 모두 기록된 사실이다.
- 그러나, 위의 드라마 전개는 서순이 잘못되었다. 고려가 먼저 화의를 청하고 유화적으로 나온 것은 2차 전쟁 이후이며, 3차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요 왕조 측에서 먼저 화의를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준으로 고자세를 유지했고, 성종이 사신을 몇 번 보낸 뒤에야 화의 요청에 응해 요 왕조와의 조공 - 책봉 관계를 정상화했다. 2차 전쟁 이후에 나와야 할 묘사가 불필요한 치정극과 밀실 암투, 박진의 분탕질 때문에 등장하지 못하고 최종화가 되어서야 나온 것이다.[301]
- 현종이 고려는 거란과 송나라 양국 간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을 유지하며 양국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 파견을 요청해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송나라는 거란을 치기 위해 고려의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으며, 거란 또한 이후 금나라의 발호를 막기 위해 고려에 군사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고려가 거절한 바 있다. 이처럼 고려가 거란이나 송나라와 같은 상국의 군사 출병 요청을 자의적으로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거란, 고려-송나라의 관계가 의례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넘어선 종속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 강감찬이 현종에게 사직을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종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거듭된 강감찬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사직을 윤허한다.[302] 실제로 강감찬은 1020년 6월에 사직하고 흥국사에 석탑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030년(현종 21년)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1020년 6월 이후에 조정에서 활동한 기록이 사실상 없다는 것과 황성 남쪽의 별장에서 노후를 보내며 문집을 남겼다는 강감찬 열전 기록으로 봤을 때에 문하시중 임명 건은 강감찬의 급에 맞는 관직을 명예수여한 사안으로 현재는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복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며, 설령 조정의 일에 관여했다 하더라도 비공식적으로 국왕이나 재상들에게 자문 역할 정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1031년(덕종 즉위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303][304]
[1]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2]
최종석(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 손성욱(2021), "‘우리’의 동아시아사 깊이 읽기 - 『동아시아사 입문』 (동북아역사재단, 2020)", 《동북아역사논총》 73, pp.187~188.
[3]
고려 신료들이 고려 군주를 ‘황제(천자)’임과 동시에 ‘대왕’으로 호칭하는 혼용상에 대해서는
언어 문단을 참조. 이 때문에
고려/외왕내제 여부에 관한 논쟁이 있다.
[4]
소식은 송나라에 조공하러 온 고려 사신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난했는데, 그는 송-고려 관계가 트집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 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백성들이 힘들고,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게 넘기며 말로는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가 심지어 송나라의 허점을 탐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대파로부터 그건 서하나 거란도 다 하고 있는 것이며, 저 나라들과는 달리 그래도 아우를 자처한 고려와 관계를 끊으면 거란이 만약 침범하려 들 때에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자 이러한 맹렬한 반박을 이기지 못하여 황제에게 사죄한 후 고려 사신들의 접대를 직접 하게 되었다.
[5]
고려사
우왕 편에 수록된,
명나라
홍무제가 고려에 전한 칙서 중 하나에는 역대
중화제국이
한반도를 침공한 기록들이 나와 있다. 그 중 '요나라는 고려를 총 4차례 정벌하였으며 그 중 하나는 강조의 반역을 치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요전쟁은 총 3차례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2차 여요전쟁과 3차 여요전쟁 사이의 국지전들 또는 3차 여요전쟁 이후 있었던 소규모 침공을 거란이 정식으로 수행한 고려와의 전쟁 중 하나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요사에 의거하면, 1016년 북원추밀사 야율세량이 요 성종의 명을 받아 곽주를 크게 친 적이 있었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보통 이 전투를 거란이 정식으로 수행한 고려 침공 중 하나로 기록해온 듯하다.
[6]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육정임, 동북아역사논총, 2011, vol., no.34, pp. 11-52 (42 pages))
[7]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親征)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 동방학지, 2021, vol., no.197, pp. 1-25 (25 pages))
[8]
사극/시대극 팬 및 국궁 동호인들은 주연 배우부터 단역까지 죄다 엉망인 사법(射法)에 대해선 오히려 '활이란, 단기간에 배우기 어려운 기예'임을 고려해 관대하다. 연출/편집권을 지닌 쪽에 대한 아쉬움인 셈.
[9]
매복 공격 장면에서 주로 등장하는데, 공중에 불화살이 올라오면서 들리는 뭔가 요란한 소리가 바로 효시를 묘사한 것이다.
[10]
의외의 사실이라면 의외의 사실인데 사실 이 고증은 고증을 강조한 고거전보다 이전의
여요전쟁 사극인
천추태후가 훨씬 잘했다.
#
[11]
몽골군은 이 트레뷰셋 전문가들을 중동에서 고용하여 공성 무기를 제작하게 하고 회회포(回回砲)란 이름을 붙여 양양성 공략에 사용했다. 회회포가 투입된 양양성 전투는 동아시아에서 인력식 투석기가 아닌 다른 종류의 투석기를 사용한 사례 중 하나다. 드라마에 나오는 투척 방식이나 거리 측정법은 몽골군이 중동 지역의 공성술을 습득하여 활용하던 방식과 유사하다.
[12]
투석기는 지렛대의 원리로 작동하는 "무게추식 투석기"와 "인력식 투석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중세부터 이용된 무게추식
트레뷰셋(counterweight trebuchet)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주로 동양에서 활용한 '포(砲)' 계열의 투석기들이 대표적이다. 인력식 포(砲)는 규모에 따라 5명 ~ 50명 이상의 인원이 동시에 발사 팔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돌을 던졌다. 무경총요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용된 가장 강력한 인력식 투석기(traction trebuchet, mangonel)는 57~63kg의 돌을 75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당 전쟁 때, 요동성을 함락시킬 때 당군이 사용한 투석기는 300근의 돌을 1리(약 390미터)나 날렸다고 한다. 한편 유럽과 중동에서 등장한 무게추식 투석기(counterweight trebuchet)는 250kg의 돌을 160미터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13]
사실 도검 패용은 조선 시대에도 활이나 조총을 쓸 때는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아 두기도 했고, 따로 다른 무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손으로 들고 다녔기에 고리를 쓰지 않는 것 자체는 문제점이 아니다. 다만, 무장한 군인들 상당수가 손으로 드는 것이 어색한 것.
[14]
대표적으로 6회에서 양규가 활을 쏘던 중 시위가 끊겨 활에 시위를 다시 거는 장면이 있다.
[15]
고려군이 절박해서 수레라도 끌고왔나 보다는 식으로 언급한다.
[16]
『육도삼략』 호도 군용편
[17]
19분 39초부터.
[18]
실제로 검차는 운용의 유연성이 떨어져서 잘 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즈모드 제대로 자리잡아서 이론상의 장점을 뽑아내는데만 성공하면 검차는 기병에게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
[19]
다만 원작에서도 검차 자체가 신식 무기까지는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소배압 등의 거란인들이 고려의 검차를 처음 볼 때에 수레 또는 전차로만 불렀고, 이후 야율융서의 반응을 보아 이름이 검차라는 것은 모른 듯하다.
[20]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상대적으로 밀집한 오위진법 방진을 짰더니 오히려 여진족의 투사병기에게 입는 피해가 훨씬 크다는 평가가 나온적도 있다.
#
[21]
후기
로마군 역시 점점 거대한 영토 전반을 커버하기엔 대규모 중무장 정예 상비군을 유지하기가 버거워지고
사산조 페르시아,
훈족과 같은 유목 전통을 가진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며 투사병기와 기병을 위주로 한 병력의 기동력을 중시하게 되어, 테스투도 같은 밀집 방진이 점점 쇠퇴하게 되는 경향성을 보이는데, 동양과 비슷한 환경을 맞이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수렴진화가 일어난 결과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22]
실제로
파이크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런 창병 밀접방진 전통이 없었던
동유럽에서도 주요 전술로 쓰던 방식이다.
[23]
상포는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언급한 고려 국왕의 복식명으로, 고려사 등에서 언급된 정식 복식명이 아닌, 그저 '담황색의 포'를 의미하는 서긍 개인의 지칭이다. 실제로는 그냥 황포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예복이 아닌 평상시의 집무복에 해당한다.
[24]
자황포는 적황색으로 줄여서 '자포'로도 불렸다. 자황포는 예복으로서 조회를 비롯한 다양한 예식에 활용되었다.
[25]
치황의는 국왕이 연등소회에서 입었던 예복이다. 다른 황색 예복과는 달리 왕태자도 관례 시에 착용할 수 있었으며 관례를 치르는 왕태자가 입을 경우에는 '조라통정책(공정책)'이라는 모자와 짝을 맞춰 입었다.
[26]
당나라에서는 삼황색을 신민들의 복색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당나라에서 금지한 삼황색의 종류는 담황색, 적황색, 웅황색(치황색)이며 송나라에서도 해당 삼황색의 사용을 금지했다.
[27]
고려 문종 조에는 국왕이 중서문하성에 명해 신민들의 담황색과 치황색 사용을 금지시킨 바 있다. 적황색의 경우는 국초부터 자황포를 국왕의 조복으로 썼기 때문에 이미 신민들에게 사용이 금지되고 있었지만, 국왕의 평상복 색깔에 해당하는 담황색과 치황색은 신민들에게 별도로 금지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종이 추가로 금지시킨 것으로 보인다.
[28]
강사포는 고려말 공민왕 시기에 처음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인 문종조부터 고려사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조복의 하나였던 자황포와 명확히 구분되는 용례가 기록되어 있다.
[29]
한자대로 해석하자면 전자의 자황포는 산뽕나무 열매로 황색빛을 낸포이며, 후자의 자황포는 붉은 흙으로 황색빛을 낸 포이다. 산뽕나무 열매와 붉은 흙의 색상이 사실상 같은 색상이라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의 채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둘은 한자만 다르고 사실상 같은 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전자의 자황포는 국초 이후로는 언급되지 않으며 문종이 즉위하는 시점부터는 사실상 후자의 자황포가 임금의 공식 조복으로 언급된다.
[30]
강사포는 국왕이나 왕태자가 착용 가능한 진홍색 단색의 예복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강사포는 기존의 얕은 홍색 도포를 한 번 염색하여 진홍색의 포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강사포는 통천관(또는 원유관)과 짝을 이루어야 하나 공민왕 이전의 고려 국왕이 통천관이나 원유관을 착용했다는 문헌상의 명확한 기록이 없다. 공민왕 이전 시기의 기록에도 강사포가 존재했으나, 강사포에 착용하는 왕관을 '모자'로 뭉뚱그려 기록해 놓아서 이것이 복두인지 원유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동시기 송나라 황제가 24량 통천관을 사용한 것이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태조 왕건 청동상에도 24량 통천관이 도금되어 있으며, 충목왕과 충정왕 시기 국왕이 착용한 칠량 원류관의 그림이 남아 있기에, 여말선초 이전에도 강사포와 짝을 맞추어 복두와는 다른 제사용 모자를 쓰긴 썼을 것으로 보인다.
[31]
고려 문종이 '임금의 의복 색에 다른 사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신하들이 '의례에 있어서는 황색, 자색(붉은색), 강색(진홍색), 작은 모임에서는 편의대로이니,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 이외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 적이 있다. 때문에 해당 색깔의 범주 내에서 적절히 혼합하여 의복을 만들어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기에 국왕은 황색 복식을 포함해 모든 색의 복식을 착용했으며, 신하와 백성들은 그 하위의 색인 자색, 홍색 복식부터 착용했다. 조선으로 넘어오고 나서는 명나라가 세종조의 조선에 대홍포를 사여하여 자색 내지 홍색이 조선 국왕의 평상시 복색이 되면서 국왕은 황색을 쓰지 않게 되고, 신하, 백성에게는 자색과 홍색을 금지했으나 잘 통하지는 않았다. 대신 중국과의 외교 현장에서는 신하의 황색, 자색, 홍색 사용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32]
다만, 당시 고려 왕실에서 자황포는 단지 예복을 넘어 정무복으로도 널리 쓰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기본적으로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일일조회 시간에는 상포가 아닌 자황포를 입은 듯하며 작중 목종이 자황포를 입은 시기도 대부분이 일일조회가 이루어지는 아침 시간에 편중되어 있다.
[33]
조선은 특성상 색 차이는 없으나
대왕 세종에서도
태종의 곤룡포에는 무늬가 있는 반면,
세종은 무늬 없는 곤룡포를 입었고,
문종은 다시 무늬 있는 곤룡포를 입는 것으로 보아 대를 걸러 복장을 교체하는 것은 나름 관행에 가까운 방식이다.
[34]
고려도경의 원화가 모두 소실된 지금에는 상색이 어느 정도로 엷은 노란색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어진을 보면 상당히 엷은 계열의 노란색 단령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려가 복제 또한 당 · 송의 제도를 따랐다고 가정한다면 당 태종이나 송 태조의 단령과 같은 상포를 입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5]
특히 상포에 착용하는 허리띠인 '자라늑건', 즉 자주색 옥대는 당 태종 이세민의 어진에 나온 옥대와 매우 흡사하게 재현하였다.
태종(당) 문서 참조.
[36]
고려 의복을 다루는 옛 문헌에는 절상건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에는 절상건이 그저 복두의 다른 말이라서 오늘날처럼 뿔이 위로 뻗은 복두를 한정하여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날 그러한 복두를 따로 절상건이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현대인의 편의에 의한 것이다.
[37]
중국에서는
수양제 초상화에 나오는 양쪽 수행원이 착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모자도 오사고모라고 한다.
[38]
송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드 '청평악'에서는 송나라 인종이 개인 집무복에는 연각복두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전각복두를 착용하는 장면으로 구분하여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9]
이 소품은 MBC 고려시대 사극인
신돈(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같은 방송사의 고려시대 사극인 직지,
무신(드라마)에 나왔다. KBS 대하드라마에서는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 나왔고,
제국의 아침,
천추태후 같은 이전 작에서는 형태는 같은데 테두리가 아니라 모체에 금색 무늬를 그린 소품이 나왔다.
[40]
다만 외왕내제를 고수하던 고려가 중원으로부터 받은 면류관복의 양식을 내부적으로 철저하게 지켰는지는 의문이다. 의종 대 만들어진 상정고금예문에 의하면, 면류관의 류(줄)의 개수는 제후국 복제에 따라 앞뒤 각 9류로 하되 각 류마다 달린 구슬의 개수는 천자국 복제에 따라 12개씩 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천자국과 제후국의 복제 양식을 적절히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41]
지방의 무관은 뿔이 없는 무각복두를 쓴다고 하나 드라마 상황상 갑주를 착용한 모습 밖에 나오지 않는다.
[42]
드라마 배역 기준으로는
정전에 백관과 나란히 입시할 정도의 지위를 가진 군인이라면 전각복두를 착용했다고 봐도 좋다.
[43]
송나라에서 무관, 군인의 복두로 절각복두, 교각복두 등 뿔을 위로 꺾어올린 형태가 유행한 것은 송나라 복두 특유의 과장된 뿔의 형태 때문에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정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고려 군인들의 절각복두도 단순히 뿔 끝만을 구부러뜨린 형태로 보기는 어렵다.
[44]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라고 적혀져 있는데, 이는 갑옷의 상하의가 붙어 있는 포형 갑옷이며 옆구리가 붙어 있지 않고 트여 있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말선초부터 임진왜란까지 조선에서 사용된 찰갑의 구조 역시 이 설명에 부합한다. 서긍이 자신이 본 고려군의 갑옷을 두고 특별히 찰갑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당대 동아시아 갑옷의 주류가 찰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되려 특별히 재질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찰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45]
개심사지 오층석탑 부조는 불교 예술품이기에 양식적인 묘사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으나,
현종이 집권하고 있던 당대에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고증에 참고할 만하다. 몽고습래회사는 드라마 속 배경이 되는
여요전쟁보다 한참 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워낙 시각 자료가 부족한 고려시대의 특성상 고려 무기를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 자료 중 하나이다.
[46]
물론 고증에 맞게 하려면 요나라 황제가 공석에서는 중국식 복식으로 나오고 사석에서는 유목민의 복식으로 나오는 게 좀 더 나을 것이다.
[47]
사실
문경시
문경새재 세트장은 2000년대 초반 KBS에서 고려사 시리즈를 위해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꾸민 것이지만, <
무인시대> 이후 조선시대 배경 사극 촬영을 위해 싹 바뀌었다.
[48]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전은 강당에 가깝다.
[49]
본 드라마뿐 아니라
옷소매 붉은 끝동,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등 제작처를 가리지 않고 최근의 사극에서 많이 보이는 부분이다.
[50]
<
대왕의 꿈>에서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지 않을 때면 반드시 두건을 착용하고, 투구를 쓸 때도 먼저 두건을 착용하는 묘사가 나왔으나 이러한 묘사는 계승되지 않았다.
[51]
원작 소설에서도 삼수채의 고려군 병력이 기록에 적혀 있는 30만이 아니라 10만 대군이라고 소개된다.
[52]
사실 동아시아만의 문제는 아니고 서양에서도 무슨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수백만 대군', '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동원한 총 병력은 15만 대군'이라는 식의 호왈 뻥튀기가 심했던 편이다.
# 다만 서양의 경우엔 사학이 발전하면서 이런 과장된 기록에 대해선 가차없이 의고가 들어가는 반면 동양 사학계에서는 이런 비판의식이 서양보다는 덜해서 현대에는 동양 쪽 과장이 더 두드려지는 면이 있다. 각국에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동원한 군대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53]
당장 귀주 대첩의 패전 이후에도 거란 황제가 다음해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서하 원정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54]
물론 이것도 장부상의 가라 병력이거나 애초에 이것 역시 후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가감되는 경우가 잦아 주의를 요한다.
[55]
물론 이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나레이션이며,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러 이런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56]
허인욱(2018), "君主號로 본 고려 전기의 대외인식", 《한국중세사연구》 55, p.371.
[57]
실제로 고려 전기까지 백성들에게 천자의 조정, 즉 '천정'은 고려의 조정을 일컫는 단어였다. 대표적인 예로, 윤관이 동북9성을 돌려받고 싶으면 직접 천정(고려 조정)에 입조해 요청하라고 여진족 추장들에게 말한 바가 있다. 다만 원 간섭기 이후부터 천정은 고려 조정이 아닌 상국인 원나라 조정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으며 고려 국내에도 그러한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58]
『
고려사』 및 『
고려사절요』에는
태조 대부터 고려의 군주를 '
성상' 또는 '
주상'으로 불렀고, 군주 또한 태조 대부터
원종 대까지 자기 자신을 '짐'으로 칭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의 제신 열전에서는
문종,
예종, 그리고
인종을 '
폐하',
예종 9년의 기록에서 예종을 '성상 폐하'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 의하면
무신정권 당시의 임금 중
의종,
명종, 그리고
고종은 '폐하'로 불렸다는 점을 볼 수 있다.
[59]
아울러
김부식의 「
진삼국사기표」나
이규보의 『
동국이상국집』 전집 등의 다른 기록에서도 고려의 군주를 가리켜 '성상 폐하'로 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60]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같은 사서들에서 확인되는 호칭 사용 건수를 보자면 '왕'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였으며 개서 가능성이 없는 고려시대 당대의 금석문들에서조차도 '왕'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다만, 사서들에 한정해서는 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실제로 조선 전기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고려의 '황제', '천자'라는 용어가 들어간 자료는 가능하면 선택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선택될 경우 해당 용어를 '왕'으로 개서하거나 부분 삭제했으며, 이러한 개서 과정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연구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61]
고려 전기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 중에서는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천추태후(드라마)가 '황제 폐하'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타 방송사의 고려사 드라마 중에서는
무신(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가 '황제 폐하' 호칭을 사용하였다. 열거한 드라마들에서는 재위 중인 고려 국왕뿐만 아니라 선대 고려 국왕들 또한 일관되게 황제로 호칭하였다.
[62]
단,
무인시대에 한해서는 '황상 폐하'라는 호칭이 '황제 폐하' 호칭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다만 이것은 무인시대를 집필한 유동윤 작가 개인의 설정이며 그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태후 폐하'라는 호칭을 처음 시도한 작가 또한 무인시대의 유동윤 작가이다.
[63]
극내에서 김치양은 고려 성종을 언급하며 '성종대왕' 호칭을 쓰기도 하고 '선제'라는 호칭을 쓰기도 한다. 동일인의 대사에서도 선대 군주에 대한 호칭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고려 초기의 국체를 고증하려고 한 제작진의 의도를 알 수 있다.
[64]
조선 사관들에 의한 개서의 여지가 없는 금석문이나 비문 같은 경우에도 고려가 일관성 있게 황제국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1025)의 비문을 보면 '광종대왕이 황위에 올랐다' 식의 사용례가 나오는데 이렇게 대왕호와 황제호를 혼용한 사실을 통해 당시 고려 왕실이 사용한 용어 자체가 썩 일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5]
대내 방면으로 ‘대왕’과 황제적 용어 사이에서, 현란함과 별개로 급의 차이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구려의 '태왕'호를 대왕호의 상위라고 보긴 하지만, 원래 태(
太)와 대(
大)는 별개의 글자가 아니라 대(大)가 특정 상황에서 태(
泰)로 읽히는 경우를 표시하기 위해 표점을 찍은 것이 그대로 별개의 한자로 분리된 경우로 한국사에서는 조선시대 전까지 혼용되었다.
로마자의
다이어크리틱이나
키릴 문자의
Ё 용례와 비슷하다. 문제는 당시 사람이 아니면 문자적으로 나타나는 大의 의도된 발음이 대 또는 태인지,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금석문의 신뢰성이 서지류보다 높다고 보지만 太와 大는 마멸되면 오히려 구분이 어려워져서 한 금석문 안에서도 분명 고유 명사로서 같은 발음과 용법인 게 분명한데 어느 부분은 太로, 어느 부분은 大로 판독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자료에는
삼사,
태위 같은 관직이나
태자의 태(太)를 대(大)로 쓴 것이 많고, 고려사에는 반대로 추존
대종의 시호에 태왕이라고 되어 있어 혼용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66]
동덕여대 최종석 교수는 일련의 연구 끝에, 고려 전기 황제국 용어들은 어디까지나 군주를 높이는 존군 차원에서의 미칭이며 중국과의 대등의식이나 외왕내제적 목적의식 또는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 없이 사용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고려전기 외왕내제의 이중 체제를 전론으로 다룬 연구가 그동안 전무했으며,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는 우리 시대의 언설은 고려전기의 국제를 황제국 체제로 보는 연구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었을 따름이어서, 이러한 전제가 성립·기능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연구 성과는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는 지적을 하였다. 하지만
서울대 노명호 명예교수나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 등의 선행 연구처럼, 당시 고려 왕실이 외왕내제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황제국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통설로 여겨진다. 본 드라마에서는 통설에 따라 고려를 '자주적인 황제의 나라'로 설정하고 있다. 관련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를 참조.
[67]
다만 황태후 또한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한 바 있다. 특히 송나라와 명나라는 황태후에게 폐하 경칭을 사용한 기록이 다수 있으며 조선 또한 명나라에 표문을 보낼 때 생존해있는 황제의 모친에게 '황태후 폐하'라고 호칭한 바 있다.
[68]
황후에게 폐하 경칭이 쓰이게 된 것은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고대~중세에는 황제 1명에 복수의 황후가 존재하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황후에게 폐하 경칭을 쓴다면 경칭이 남발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극의 주인공의 현종만 해도 7명의 왕후를 두었으나 유일하게 생전에 '왕후' 칭호를 받은
원정왕후를 제외하면 특별히 누구도 독점적인 지위를 갖지는 못했다. 때문에 황제보다 명백히 항렬이 위이자 각 한 명씩만 존재할 가능성이 큰 태상황제, 태황태후(+황태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현직 황제의 황후에게는 전하 경칭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직접 쓴 황명조훈에도 '황후 전하'라는 호칭이 규정되어 있다.
[69]
단 조선 왕조의 경우에는 국왕과 왕후의 경칭을 '전하'로 통일하였다. 왕 한 명에 정실 왕후가 여러 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일부다처의 고려 왕조와는 달리, 조선 왕조에서는 왕이 오직 한 명의 정실 왕후를 둘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후궁으로 간주하는, 즉 일부일처제에 축첩제가 가미된 방식이었기 때문에 왕후 또한 국왕과 동일한 경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조선 또한 왕이 정실 왕후를 여러 명 둘 수 있었다면 왕후에게는 전하보다 한 단계 낮은 '저하' 경칭을 붙이는 것이 예법상 옳았을 것이다.
[70]
실제로 조선은 주상(국왕)과 중궁(왕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 모두 '전하' 경칭을 붙였으며 동시에 5명의 '전하'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조선 성종 대와 고종 대인데, 성종 대에는 성종(주상), 왕후 한씨(중궁), 대왕대비 정희왕후(세조비), 왕대비 소혜왕후(의경세자빈), 왕대비 안순왕후(예종비) 이렇게 5명이 동시에 전하로 불렸고, 고종 대에는 고종(주상), 왕후 민씨(중궁), 대왕대비 신정왕후(효명세자빈), 왕대비 효정왕후(헌종비), 왕대비 철인왕후(철종비) 이렇게 5명이 동시에 전하로 불린 바 있다.
[71]
고려는 '폐하', '전하', '저하', '각하', '합하', '장하(승려만 해당)'의 경칭이 존재하였으며 조선은 '전하', '저하', '각하', '합하'의 경칭이 존재하였다. 본디 '저하'는 고려 전기 공작이나 후작위에 있는 이성 제후에 대한 경칭이었으며
최충헌 등이 '영공 저하'로 불렸다. 다만 원 간섭기를 거쳐 제후국제로 전환, 폐하라는 경칭이 사라졌으며, 경칭의 등급 또한 기존보다 한 단계씩 격하되어 기존에 왕후, 태자 등의 고위 왕족을 호칭할 때 쓰던 전하 경칭은 대비, 왕, 왕비에 대한 경칭으로 자리잡았으며, 공작 또는 후작위에 있는 이성 제후에 대한 저하 경칭은 세자를 비롯한 차등급 정도 되는 왕실 일원에 대한 경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72]
송나라의 경우 태후에게 '폐하' 경칭을 붙인 것이 송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직전 왕조인 당나라에서 태후에게 '전하' 경칭을 붙인 것과는 대비된다.
[73]
중화제국의 경우 일관되게 '전하' 경칭을 받은 황후와 달리, 태후의 경우에는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한 것으로 나온다. 한나라와 후한, 서진, 동진의 경우 '태후 폐하', 당나라의 경우는 '태후 전하'라고 불렀고, 그 뒤를 이은 송나라와 요나라는 '태후 폐하'라고 불렀으며, 이민족 국가인 금나라의 경우 '태후 전하'라고 불렀다. 이후 등장한 원나라와 명나라의 경우에는 '태후 폐하'라고 불렀고, 중원의 마지막 왕조이자 이민족 국가인 청나라에서는 명나라의 예법을 이어받아 '태후 폐하'로 부르는 등, 황실의 큰어른인 태후에 대해서는 왕조에 따라 경칭의 차이가 있었다. 이유는 태후 또한 황제의 신하 중 한 명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황제와 동등하거나 상위의 위치라고 보아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기 때문이다. 중화권 왕조와는 동떨어진 일본의 경우에는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에게는 전하로 호칭하고 오로지 천황에게만 폐하로 호칭하다가 메이지유신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이들의 경칭을 폐하로 통일하였다.
[74]
결국 천자국 중 태후에게 전하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국가는 당나라, 금나라, 고려, 일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금, 고려, 일본은 당나라 제도인 당육전의 규범을 받아들여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타 중원 국가에서는 문치주의의 발흥과 효 사상이 대두되어 과연 천자의 모후에게 천자보다 하위의 경칭을 쓰는 것이 맞는가 하는 논의가 있었고 송나라가 처음으로 태황태후와 황태후에게도 천자와 같은 폐하 호칭을 쓴 이후 요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천자의 배필인 현직 황후(중궁)의 경우 왕조를 막론하고 근대(청나라 광서제, 대한제국 고종황제, 일본 메이지덴노) 이전까지는 무조건 전하 호칭으로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위 내내 폐하 경칭을 받은 황후는 대한제국 순종의 황후가 유일하며, 명성황후의 경우에는 생전에 황후가 아니었기에 재위 중에는 대부분 '중궁 전하'라는 경칭으로 불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실시 이후 을미사변으로 시해되는 1895년 10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왕후 폐하'라는 경칭으로 격상되어 불린 바 있다.
[75]
고려전기 사극 중, 고증에 맞추어 왕후에게 '전하' 경칭을 사용한 것은 본작이 최초이다. 이전 고려전기 사극들에서는 대부분 왕후에게 '마마'로 호칭했으며, 전작 중 고증이 잘 되었다고 평가받는
무인시대 또한 왕후에게 '폐하'로 호칭하는 오류를 범했다. 태후의 경우 한자문화권 국가의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하였지만 황후(왕후)는 중국이나 한반도, 일본 모두 일관되게 '전하'로 호칭하였다. 동아시아에서 황후가 '폐하' 경칭을 받게 된 것은 무려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76]
이는
상록수 같은 근대 문학이나 기록은 물론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현대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77]
물론 정식 공문서인 조서에서는 짐이라는 자칭을 사용한다.
[78]
보통 신라/고려의 다른 여러 고승비는
최치원,
최언위 등
한문 문장을 잘 쓰는 신하에게 쓰라고 시켜서 '신하된 누구누구가 왕명을 받아 썼다'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반면 이 비문은 임금이 직접 지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지었다고만 썼다.
[79]
조선
정조가 작성하기 시작한 국정일기인
일성록은 왕의 일기답게 왕을 1인칭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과인'이 아닌 '나(予)'를 1인칭 대명사로 썼다.
[80]
원사에 따르면, 강화에 머무를 때는 만세를 불렀는데 자신의 시대에는 천세를 부른다는 충렬왕의 말이 나온다.
[81]
이와 같은 방법은 고려 말기 공민왕이 우왕에게 강릉대군(강령대군) 작위를 세습하는 것으로 되풀이된다. 공민왕의 강릉대군 작위 또한 부왕인 충숙왕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82]
이 때문에
요나라는 현종을 목종의 친척 형뻘로 인식했다.
[83]
이 주(主)라고 하는 표현은 오늘날
군주 용어의 쓰임과 같은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 군주를 한주(漢主)라고 지칭하는 것이 있다.
[84]
외국인 배역이 외국어만 사용하고 통역을 배치하는 연출은 대개 극의 전개상 외국인 배역의 비중이나 중요도가 낮은 경우에 사용되어 왔다. <
징비록>에서는 조선과 일본 배역의 비중이 엇비슷해서 일본 배역의 대사가 한국어로 처리됐다. 본작 역시 거란 배역 비중이 크기에 외국어 처리를 별도로 하지 않고 드문드문 사용한다.
[85]
언어 외에도 몽골의 전통 창법인
흐미를 거란측 OST에 사용하고 있는 것 또한 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86]
김인희(2020), 『움직이는 국가, 거란』
[87]
뛰어난 전투력으로
오스만 제국,
폴란드,
러시아를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때 주역이 되었지만 대규모 회전과 같은 정규전에서는 쥐약이었던 유목집단
카자크와 같이 아무리 삶이 전쟁인 유목민이라도 제대로 된 훈련이 없으면 정규전의 군대로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88]
요측에는 발해상온
고청명이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했고, 고려측에는
대도수가 2차 여요전쟁 당시 실종되었다.
[89]
서경대동부는 성종 다음 황제인
흥종대에 승격되었다.
[90]
고려 이후 조선에서도 '
강무'라고 하여 사냥 겸 군사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91]
다만 본작에서는 타초곡을 설명하면서 "사람"을 강조하고 그 참혹함에 현종이 경악하는 묘사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세세한 고증보다 직관적인 잔혹함과 전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92]
여기에 방어군 측은 자국에서 부여한 권한을 넘어선 물자 조달이 약탈로 간주될 수 있다.
[93]
사실 이 고증부분은 대조영때 부터 거란쪽의 깃발로 사용되었고 이후에 천추태후와 현재의 고려거란전쟁까지 재활용되었다.
[94]
참고로 원작에선 거란 황제 야율융서의 깃발은 높이가 3장(丈)에 달하고 짙은 황색 바탕에 구름 위를 힘차게 뛰어노는 백마가 그려져 있다고 묘사되며, 깃발을 올리면서 어느 정도 연출을 통해 군사들의 사기를 올린 채 소배압 등의 장수들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95]
유목민이기 때문에 이동할 때는 말을 타고 이동하고 싸울 때만 말에서 내려 싸우는
승마보병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96]
기병으로 유명했던
몽골 제국도 보병은 운용했다.
[97]
비슷한 시대를 다룬
천추태후에서도 이 두 사람이 언급되었지만, 반란과 관련해서는 통편집되었다.
[98]
가장 대표적인 것이 23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부인이던 강비와 왕건의 부인이던 신의왕후, 장화왕후, 신명왕후의 이름을 극중 창작으로 정했다고 나레이션으로 밝혔다.
[99]
예를 들어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부인의 본명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손상향이나
손인같은 이름을 임의로 붙인 사례나,
여씨에게
여령기나
여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등등.
[100]
일반적으로 유약하고 무력한 군주로 인식되는 고려 목종이나 조선 순조는 멀쩡한 왕권을 누렸다. 전제군주정 체제 하에서 왕권이 약한 군주는 사치스럽거나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군주의 업무이고 존재의의라서 명예적으로 돈을 퍼 주는 입헌군주국과 달리 전제군주정에서 군주가 사치하고 방탕할 수 있는 재력은 결국 군주 본인이 쥔 권력에서 나온다. 때문에 왕권이 약한 군주, 일례로 고려의
공양왕이나 조선의
철종은 성실하다고 보긴 어렵더라도 방탕함과는 거리가 먼 조용한 삶을 살았다.
[101]
야사에는 당시 신혈사 주지였던 진관스님이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102]
요사 성종 본기 5권. 통화 26년(1008년) 겨울 10월 1일. 중경에 행차하셨다(冬十月戊子朔, 幸中京) 통화 27년 봄 1월, 요하에서 낚시를 했다(二十七年春正月, 鉤魚土河)
[103]
실제 역사에서는 명령없이 군사를 이끌고 왔고, 예상과 달리 개경이 평온하여 반역죄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게 된 원인이 되었지만, 극중 상황이라면 강조가 반역자로 여겨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104]
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이다. 파주가 개성 바로 옆동네인걸 생각하면 정말로 개경을 나오자마자 살해된 것이다.
[105]
강조는 반역 열전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료에서는 망설였다는 기록이 제법 있다. 물론 현종을 옹립한 인물인 만큼 의도적으로 그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반면 본작의 강조는 능동적으로 반역의 의지를 굳힌 후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면모가 강하다.
[106]
중추원, 은대 '등'이라 하여 뭉뚱그린 이유는, 중대성으로 통합된 3관을 고려사에서는 '중추원과 은대남북원', 고려사절요에서는 '은대중추남북원'이라고 하는 문구의 해석을 두고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의 국역에는 '중추남북원'을 중추남원, 중추북원이라고 해석했으나 고려사에서는 '은대남북원'이라는 문구 앞에 중추원이 별개로 떨어져 있어서 둘의 내용이 다르므로 중추원이나 은대 중 하나가 남북으로 나뉜 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의 궁궐 업무 보조 기구 중에는 선휘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형식적으로 남북원으로 나뉘어 있었고, 7대 목종
전시과에는 선휘 계열 관직의 녹봉이 규정되어 있는 반면 비서 기구 통합 이후의 11대 문종 전시과에는 사라져 있기 때문에 대체로 남북원은 선휘원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고려사 백관지에 선휘원 또는 남북원에 대한 내용이 없고, 목종과 문종 사이의 9대 덕종 때의 예법 규정에는 선휘사라는 관직에 대한 내용이 있어 연원과 운영 형태 및 존폐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일반적인 경우에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고려와 마찬가지로 거란 또한 송나라 제도를 따와 추밀원을 설치하였으나 유목과 정주 이원 통치 체제에 따른 북·남면관 구분의 영향으로 북추밀원과 남추밀원으로 나뉘었고 기능도 고려와 달리 최고 정무 기관이었다.
요나라/행정 제도 문서 참조.
[107]
실제로
이자겸이 자신의 딸이자 예종의 두 번째 왕후인
문경태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이 『
고려사』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관련 내용), 최계방 묘지명에 최계방의 이종사촌 누이이자 숙종의 왕후인
명의태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
관련 내용)이 있다. 아울러 야사 성향이 강한 『
삼국유사』에
경순왕 김부의 딸이자 경종의 첫 번째 왕후인
헌승왕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
관련 내용) 또한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사관들이 고려의 황제국 칭호 사용례를 개서하려고 했으나 미처 개서하지 못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하나, 실제 조선시대 개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들에서도 '황후'라고 지칭된 경우는 1건(최계방 묘지명)에 불과할 정도로 애초에 비공식적인 표현이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108]
선대 황제인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와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 그리고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의 아버지인 성종은 친 남매 지간이다.
[109]
현종은 조부인 태조 왕건 다음으로 많은 왕후와 후궁들을 두었으며, 정식 왕후만 7명이다. 그 중 왕후 2명이 성종의 딸, 다른 왕후 1명(
원용왕후)는 성종의 조카이며, 나머지 안산 김씨 왕후 3명은
김은부의 딸들이며 이천 서씨 왕후 1명은
서희의 손녀이다. 심지어 현종의 5비이자 성종의 조카인 원용왕후는 그 부모 또한 고려 왕족끼리 혼인한 용손이었다.
[110]
원정왕후의 어머니인 문화왕후는 김원숭과 왕씨 부인의 딸이며 원화왕후의 어머니 연창궁부인은 최행언과 김씨부인의 딸로, 고려 왕실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화왕후의 경우 어머니 화의군대부인이 왕씨로 기록되어 있어 모계 쪽은 왕가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국초의 왕가 여인들은 왕씨가 아닌 외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왕씨로 기록된 화의군대부인은 왕가 여인이 아닌 왕씨 성을 하사받은 공신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111]
목종 사후 남은 태조의 후손은 천추태후와 현종,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 원용왕후, 효은태자의 아들들이 전부였다. 다만 효은태자의 아들 2명은 거의 족보에서 파인 수준이었으며 천추태후 또한 황주로 유배가게 되어 제대로 된 왕족 대접을 받는 태조의 후손은 현종,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 원용왕후 이렇게 4명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강조가 효은태자의 아들들도 모두 찾아 종실에 복권시켜주며, 천추태후 또한 현종 말년에 개경 숭덕궁으로 돌아와 왕족 대우를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
[112]
해당 장면은
무인시대 후반부에 나온다.
[113]
후대에는
조선 건국 이후 조선
태조가 명나라
홍무제에게 조선국왕으로의 책봉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책봉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조선국왕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었다.
[114]
이후 작중에서도 포로로 잡힌 강조에게 한기가 살고 싶으면 성종에게 대답을 잘 하라며, 성종은 역신 강조를 처단하기 위해 고려에 왔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115]
삼국지로 치면
유선이
제갈량이 북벌할 때와
이릉대전과
석정 전투에서
손권이
육손에게 마찬가지로 황월을 전해주는 장면을 생각하면 되며, 본 드라마 이후의 고려시대를 다룬
정도전에서
최영이
공민왕에게 수여받은 부월(황월)을 손에 쥐고 새로 등극한
우왕을 접견하는 장면이 있다.
[116]
나중에 여진정벌 실패의 책임으로 귀환 도중에 부월을 회수당하고 근신한다.
[117]
이런 군 지휘관에 대한 부월 하사는 조선 왕조에서도 이어져서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부월을 내린 적이 있고
인조도 부월을 내렸다는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
[118]
고구려 성들이
치를 두르고, 신라
삼년산성의
성문들이 각양각색의 구조를 가진 것에 비해 효율적이고 단순한 구조이다.
[119]
철도가 일반화되어 아주 낮은 운송비로 전선까지 물자를 전달할 수 있게 되기까지, 민간 취락의
약탈이나
징발, (좀 온건한 사령관이나 상태가 비교적 좋은 군대, 지역의 경우) 지역 상업망을 통한 구매나 '
좋은 말로 달래어 현지의 협조를 얻는 것'까지를 포괄한 '현지 보급'은 군대의 보급품 수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
손자병법』에서는 '적의 식량 한 승(10섬)을 먹는 것은 보급으로 식량 스무 승(200섬)을 먹는 것과 같다.'고 평했고, 『
사기』 '주보언 열전'에서는 본국에서 192곡을 보내야 1석이 도달하는 현실에 대해 강변했다. 보급에 나선 말이나 소, 사람도 밥을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므로, 아무리 많은 식량을 준비한들 전쟁터에 도달하는 식량의 양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120]
나폴레옹의 보급은 현지인에게 언제까지 물품 가격을 치르겠다는 증명서를 주고 보급품을 가져가는 일종의
징발이었지만, 현지인 입장에서는 총칼을 들이민 뒤 같잖은 종이 쪼가리 하나 던져주고 빼앗다시피 하는 그냥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나폴레옹의 라이벌인 영국군은 넘쳐나는 돈으로 현지인에게 보급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121]
최악의 경우엔 강제적인 청야에 불만을 품은 지역들이 침공군에 협조할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조조가 전쟁에서 적의 공세를 막기 위해 했던 필살기 중의 하나 현지 조달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에서 접경지역을 청야로 초토화하고 해당 지역의 인구를 모조리 소개하는 청야전술이었다.
관도대전에서부터
원소를 막기 위해 대규모 청야를 실시한 조조는 남부의 위협적인 적인
손권과
유비의 공세를 상대하기 위해서도 각각
적벽대전과
한중 공방전의 패배 이후
회남과
한중 일대에서 대규모 청야와 소개를 진행한 바가 있다. 이는
합비에서 손권을, 옹양주에서 제갈량을 좌절시킨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회수 이남의 수십만 백성들이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손권에게 귀부하여 회남은 회남대로 황폐해지고 손권 좋은 일만 시켰던 적도 있었다.
[122]
고려와의 전쟁 이전에 요 성종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몇 번 친정한 적이 있지만 이때는
승천태후가 최고 결정권자였다.
[123]
손자병법에서도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많은 부담을 안는 전투가 바로 공성전이다. 더군다나 작중 묘사되는 흥화진은 한국 특유의 산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러면 평지 성보다 더 공략이 어렵다. 소배압이 무리해서 성을 공략하기보단 압도적인 물량을 이용해 고려군에게 먼저 피로를 가중시키라고 조언한 것도 이런 이유인 것이며, 양규를 비롯한 고려군은 요군의 파상 공세 때문에 일주일 만에 극심한 피로에 빠지게 된다.
[124]
이걸 작중에서 시청자들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는지 중간에 '흥화진이 최대한 버텨주면서 징집병들은 그 사이에 훈련하고 교전준비 마치게끔 시간을 끌어주기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현종에게 조정 신료들이 브리핑 하는 장면도 나온다.
[125]
고대로부터 전투수레는 기병이 부족하거나 보병의 방진 훈련이 엉망인 군대가 사용하는 미봉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루가 될 수 있는 보병의 숙련도가 떨어지고 적 기병을 견제할 기병도 별로 없어서 이동형 차폐물을 만들어 적 기병의 접근을 막고 투사병기로 원거리에서 적을 요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상대의 공격 방식에 따라 방어 전략을 짜야 하므로 전투의 주도권은 적에게 넘겨주게 되며, 크고 무거운 수레를 사용하기에 진형을 짜고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유연성이 부족하다. 때문에 상대가 변칙적인 공격을 하는 경우에는 대처하기 힘들고, 포위되거나, 대포처럼 더 먼 거리에서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투사병기의 과녁이 될 위험도 있었다.
[126]
조선의 경우만 해도 건국 초기
정도전 등이 주도한 진법훈련 체제가 이미 태종이나 세종 무렵부터 와해되기 시작해서 정예보병인
팽배수가 점점 약화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 세조가
궁기병 위주의 체제로 군사체제를 재정비한 바가 있다. 세조가 궁기병이나 궁시만 중시했다고 오늘날 욕을 많이 먹긴 하지만 세조 나름대로는 평화시대에 돌입하면서 점점 약화되는 조선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인 면도 있었던 것이다.
[127]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고려 주력군을 격파하지 못해 결국 개경 코앞까지 와서 돌아가야 했던 상황과 대비된다.
[128]
이들이 이런 전투마차의 약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마륭의 경우엔 진무제
사마염이 내려준 풍부한 군자금을 사용하여 강한 정예병을 뽑아 조련하고 튼튼하고 강력한 무기, 특히 강노같은 강력한 투사무기를 많이 동원하고 물자 보급을 풍부히 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얀 지슈카의 경우엔 병력의 질은 훨씬 떨어졌지만 기존 투사무기보다 사용이 그나마 쉬운 화약무기, 핸드캐논 등 강력한 투사병기를 보유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긴 했다. 즉 이런 종류의 전투마차를 사용하려면 최소한 아군의 투사무기가 매우 강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작중 등장하는 고려군은 기초적인 방진 훈련부터 전쟁중에 해야 할 만큼 숙련도가 몹시 떨어지는 걸로 묘사되는데 이 정도라면 투사무기 같은 무기술의 사용에서도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궁수는 대부분 숙련병이며 활 자체가 숙련하기 어려워 장기적으로 육성해야 하거나 생업으로 활을 사용하는 사냥꾼을 차출해서 운용하는 병종이었기 때문이다.
[129]
이 발언과 관련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한 말들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
[130]
고대, 중세의 공성전과 달리 근대의 공성전의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내려간 것도 투석기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화력의
화포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포에 대항하기 위해
성형 요새가 등장하기도 했다.
[131]
민가를 박살내는 장면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어 그 위력에 질린 백성들이 공포에 질려가는 모습을 묘사했고, 양규와 흥화진 수비군은 대조적으로 요군의 포탄 공세에 침착히 버티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
[132]
1회에서 서역 상인들이 저잣거리에 보이는 등 교역이 활발하다는 묘사가 있다.
[133]
이는 1일차에 보병대가 성벽에 접근하다 미리 설치해 놓은 함마갱에 걸려 양규에게 발각된 장면으로 다시금 강조되며, 현대전에서도 경계나 수색, 매복시 유용하게 사용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공성전이 낮에 벌어지는데다 성 밖은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는 개활지라 이를 응용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채색한 돌을 기준 거리마다 배치하여 사거리와 무기를 조정하는 묘사가 나왔다.
[134]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 관련 묘사가 있다.
[135]
비슷한 시기를 다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다큐멘터리라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해 거란군이 고려군 앞에서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자 양규가 차마 이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 있다.
[136]
이전 작품인
정도전에서는 남원을 침공했던 왜구가 이성계를 도발하기 위해서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연출했다. 후대의 몽골 제국군 또한 수성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잔혹한 짓을 하거나 포로를 화살받이로 썼고, 시체를
회회포로 상대 진영에 날려 보냈다. 특히 후자의 방식은 유럽 원정 도중 몽골군 내에서 흑사병이 돌자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을 시신 처리도 할 겸해서 날려 보낸 것이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137]
비유를 하자면 전쟁으로 군비가 확장되며 국가직 공무원들의 월급이 밀려버린 것으로 국무를 보는 이들에게 월급을 못 준다는 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전문 인력들이 돈 못받는다고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최소 태업만 해도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는게 불가능해지기 때문.
[138]
공성전에서 공격 측은 노병보다는 궁병이 낫다. 노병은 장전까지 혼자할 경우 궁병보다 연사속도가 느리고 더 지치기 쉽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보조 인원을 붙이면 가뜩이나 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비 측보다 사거리나 위력은 짧다. 차라리 혼자 지칠 때까지 쏠 궁병이나, 말의 운동에너지로 사거리와 위력을 더할 궁기병의 엄호가 성벽을 오를 근접병과에게 더 낫다.
[139]
노병은 시위를 당기는 제1장전수 1인, 화살을 매기는 제2장전수 1인, 사수 1인의 3인 1조로 연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수성전에서는 사수를 제외한 장전수 역할을 민간인들이 맡을 수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JTBC의
다큐멘터리에서 흥화진 전투의 묘사에 다양한 노병이 등장하기도 한다.
[140]
승천태후의 오라비는 소계선이라는 자인데 원래 승천태후의 친오빠는 아니고 촌수가 꽤 먼 오라비이다. 그러나 소계선이 승천태후의 아버지인 소사온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남매관계가 성립되었다.
[141]
이성계는 2차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데 그중 네번째가 '때가 장마철이니 활의 아교가 녹고 군대에 역병이 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시대에는 활에
옻칠을 하면서 최대한 습기에 대한 대비를 하고, 아예 장마를 대비해 습기에 강한 다른 종류의 예비 활도 구비했다고 한다. 현대처럼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건조한
온돌방에서 활을 보관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누라는 윗목에서 재워도 활은 아랫목에서 재운다"는 속담도 생겨났을 정도다.
[142]
그 망작 드라마라는 옛날
연개소문에서도 마갑 부분은 그럴듯하게 구현된 적이 있는데, 이걸 고려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
[143]
이 때문인지 HBO 드라마
ROME에서도
로마군의 지휘체계에 호루라기가 쓰이는 묘사가 있다.
[144]
삼국지에서도
유봉과
맹달이 고취, 즉 군악대를 두고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온다.
[145]
일본의 투석병을 '츠부테'라고 하는데,
센고쿠 시대의 기록을 보면 한 전투에서 사상자의 과반수가 츠부테 투석병에 의해 난 경우도 더러 있다. 이들은 센고쿠 시대가 끝나는 무렵인 16세기 말을 기점으로 쇠퇴하여
에도 막부 시대에 걸쳐 없어지는데,
조총의 대량 보급과 전투가 없어짐이 대표적인 이유다.
[146]
조선 시대에는 일종의 민방위 편제에서 항시 고려되는데,
삼포왜란 때 안동의 유명한 석전 프로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어 막대한 전공을 올린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전반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행주 대첩에서도 전투 후반에 화살이 떨어지자 투석을 시행하였고,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시에는
돌팔매꾼 조씨 전설도 구전되고 있다. 이후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자 군에서의 투석 사용은 쇠퇴하고,
민간에서만 전해지다 일제강점기에 사멸한다.
[147]
고려사의 설명은 간단한 편이지만 이때 고려군이 입은 피해 묘사로 보면 거의 삼국지에서
장료가
손권의 진영을 돌파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148]
실제로 드라마에서는
야율분노가 소배압 몰래 길목을 찾아 별동대를 운용하여 기습한 것이므로 규모가 크진 않았을 것이다.
[149]
원작인 고려거란전쟁 소설에서는 통주-삼수채 전투를 비롯한 주요 전투들은 고려군과 거란군 장수들이 치열하게 머리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원작 묘사
[150]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 각색으로 생각되는데, 기병대가 방진을 부수는 장면을 영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특히 검차와 같이 마차로 구현하는 경우 더욱 그렇다. 또한 사료에 묘사된 대로 강조의 방심을 표현하려면 여러번 전투가 있어야 하며, 또한 초반부터 잡힌 강조의 캐릭터성을 희생해야 했다. 이를 설득력있게 표현하려면 상당한 예산과 시간이 들어갈 터인데, 드라마 대조영에서 초반 안시성 전투에서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예산부족으로 중요한 천문령 전투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던 KBS로는 패배한 통주전투에 많은 예산과 시간을 할당하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151]
실제로는 '입 안의 음식물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으니 적이 계속 들어오게 하라'는 발언이다. 물론 작중에서는 음식물 이야기는 빼고 보다 완화한 대사로 표현하였다.
[152]
사실 목종 역의
백성현을 두고 이미 제작진 측에서 특별출연한 해당 배우에게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넣은 적이 있어 목종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본인이 반역죄로 죽지 않기 위해서 반역을 일으킨 강조와 다르게, 해당 작품에서는 강조가 자신의 의지로 반역한 것으로 나와 목종에 대한 죄책감도 실제 역사보다 적었을 것이므로 이 장면을 넣기에 어색하긴 한다.
[153]
소배압이 '적이 알아서 성 밖에 다 나와 있는 상황에서 대회전으로 일거에 적을 전멸시키지 못하고 다 쫓아 버렸으니 이제 도망친 고려군이 죄다 성에 틀어박힐 것이 뻔한데, 조그마한 흥화진 하나 뚫지 못하면서 앞으로 공성전을 어찌할 것이냐'고 분노하자 강조를 잡지 않았냐는 야율분노의 항변에 황제 폐하께서 40만 대군을 이끌고 이제 강조를 잡았으니까 그럼 그냥 복귀하라는 소리냐며 식견을 보이는 장면은 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이제부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154]
고려사의 기록대로 강조가 바둑을 두다가 잡히기는 하나, 이때도 전략 회의를 하면서 바둑을 두던 도중 정말 예상치 못하게 의표를 찔리면서 잡혔다는 식으로 연출되고 있다. 방심한 나머지 오만하게 굴다가 허무하게 잡혔다는 식의 연출은 아니다.
[155]
다만 그가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이미 수많은 고려군이 지시도 없이 진영을 이탈했기에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마지못해 한 말에 가깝다.
[156]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 마음이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
[157]
극중 노전 본인은 거란 황제에게 일단 충성은 맹세했지만 과연 이게 과연 옳은 것인지 고뇌하고, 학대 당하는 어린 고려인 포로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만일 역사의 기록을 따라간다면, 노전은 최질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을 계기로 다시 고려군에 종군함으로써 당시 거란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와 고려에 대한 항복 권유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행위였음을 증명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158]
다만 본 문서의 외교 문단에 적혀 있듯이 실제로 이런 이유가 작용하였으리라는 시각은 있다. 그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59]
물론 전장에서의 승전 소식을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공표했을 때는 실제 고려군이 흥화진에서 승리했기에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현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나 강감찬의 간언을 받아들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방향으로 가기로 하여 고려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공표하게 된다.
[160]
실제로 훗날 몽골과의 전쟁 가운데, 원종이 왕실 보위를 위해 몽골 조정에 친조한 것을 계기로 고려는 국체를 보존받는 대가로 몽골의 속국으로 전략하고 만다.
[161]
현종이 삼군(三軍)이 패배하고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기 때문에 저항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요 성종에게 표문을 올려 조회할 것을 청하자, 요 성종은 이를 허락하여 마침내 노략질을 금지한 뒤 마보우(馬保佑)를 개경유수(開京留守),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삼아 을름(乙凛)이 이끄는 기병 1,000명을 데리고 개경에 부임하게 했다. 물론 현종은 이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요 성종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총독으로 오던 마보우와 왕팔도 서경의 고려군에게 몰살을 당해 부임하지 못하게 된다.
[162]
강감찬 역할(배역)을 맡은 최수종의 열연 덕분에 순간(분당) 최고시청률이 10.1%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10%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출처 : 한국일보)
[163]
거란군의 침략 직후 현종의 명령으로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수비하고 있었다.
[164]
출처: 『고려사』 지채문 열전
#
[165]
朝覲, 제후로서 황제를 뵈러 감.
[166]
삼국통일전쟁 때 당나라가 신라에게 명목상 설치했던
계림대도독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167]
『요사』에 기록된 탁사정한테 죽었다는 사신 한희손(韓喜孫)이 한기와 같은 일행이었거나,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68]
출처: 『요사』
#
[169]
유수는 이 모든 행정망을 아우를 수 있는 지위였지만
임용한 교수가
유튜브에서 지적한 대로 당시 서경유수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임용한은 유수가 궐석이었거나 감금당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니면 관행 중 하나로서 재상이
개경에 머물면서 겸직했을 수도 있다. 서경유수는 경우에 따라 현지에 부임해서 임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고, 개경에 머무르더라도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유수 부재 시에도 부유수가 유수를 대체하지는 않았다. 부유수의 공문 등급은 경우에 따라 원래 부유수급에게 적용되어야 할 등급보다 한 단계 더 깎일 정도로 유수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170]
공문 서식상으로는 부유수보다 낮은 도순검사였던
강조를 거란 측에서는 유수로 오인한 것을 볼 때 당시에는 두 나라의 유수 권한이 달랐을 수도 있다. 다만 고려사 강조 열전에 기록된 강조가 도순검사 이전에 임명된 관직(중추사, 우상시)이나 고려사 백관지에서의 서경 부유수의 품계를 비교하면 다른 이들은 몰라도 강조같은 경우에는 원종석보다는 좀 더 윗 서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종석은 유수 명의 또는 권한을 획득 내지 탈취한다든가, 유수관 속관을 제외하면 서경 내의 모든 행정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171]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소손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소손녕은 승천태후의 조카이자 부마였는데, 병석에 있던 소손녕을 위해 승천태후가 보낸 궁녀와 소손녕이 간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진노한 승천태후는 소손녕에게 사약을 보내 사사한다.
[172]
상술했다시피 강감찬이 이때 사신으로 간 것 자체가 픽션이므로 사신으로 가서 일어난 모든 일이 따지고 보면 픽션이기는 하나, 그것과 별개로 사료에 기록된 이름 없는 사신이 소배압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173]
축소라기보다도 슬로우 모션으로 지채문 포함 몇 명이 싸우는 걸 꼴랑 몇 초 보여주고 나머진 전부 전령의 대사로 때워서 전투라고 할 만한 게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
[174]
드라마에서도 설정상으론 실제 역사와 비슷한 흐름일 가능성이 있다. 직전에 지채문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한창 이기고 있다는 듯 기세 좋은 태도로 전진하고 옆에서 "너무 깊이 들어간다"며 걱정하는 대목이 있다. 즉 드라마에서도 한 번 승리하여 적을 추격하는 상황이었으나 너무 깊게 들어갔고, 매복한 궁수대에게 당했다고 볼 수 있다.
[175]
사실 탁사정, 지채문, 대도수 이외에도 완항령 전투의 영웅 중 한명이자 지채문과 같이 싸웠으며, 차후에는 여러 고위직에 임명되는 장군 이원도 있었고, 이원처럼 지채문과 함께 했으며 훗날 병부상서가 되는 대장군 정충절같은 이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원은 지채문과 함께 있다 마탄 전투에 휘말린 듯 서경 대신 개경으로 와서 현종의 몽진 호종을 자청했다가 사라졌고, 정충절은 당시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다른 상급 무신들처럼 서경 외에 있었거나, 서경 내에 있었어도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76]
다만 이후 극중에서도 묘사되었듯 양규가 곽주성의 거란군을 전멸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양측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 성종이 곽주성을 믿고 서경을 떠나 개경으로 향했다가 뒤늦게서야 고려군의 곽주 탈환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177]
참고로 원작과는 반대되는 행보인데, 원작에서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정은 성상께서 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현종은 몽진이 항전의 수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여 강단 있게 몽진을 결심하며, 이에 조정 신료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하지만 강감찬이 성상이 결정하셨으니 우리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하자 모두 수긍한다.
[178]
『요사』 권115 열전45에 실린 이국외기에는 개경 서쪽에서 마주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
『요사』 기록은 대체로 여러 날짜에 걸쳐 일어난 일을 한 기사에 뭉뚱그리는 경향과 함께 선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 날짜에 여러 날짜의 기록을 넣는 것은 『고려사절요』도 마찬가지지만 『고려사절요』는
간지와 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고 사건이 자세하다. 그러나 『요사』는 사건이 자세하지 않다. 요사에서 제2차 여요전쟁과 관련해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서경 포위 5일 뿐이다. 이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1) 소배압과 야율분노의 거란군이 개경에서 고려군을 마주치고 패퇴시켰다. 2) 현종이 몽진했다. 3) 개경을 함락했다. 이 3가지 팩트의 단순 나열인데 1)과 2)는 해석에 따라 끊거나 이어 읽을 수 있다. 3)의 경우 본기 기록 특성상 문장에서 성종의 행위를 가리킬 경우 주어가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고려사』 기록과 비교하여 시점과 주어를 찾아야 한다. 3)의 경우 『고려사』 기록에서 확인되는 야율융서의 개경 진입 이전에 창화현까지 넘어온 거란 선봉군인 소배압과 야율분노의 군대가 개경의 군대를 깨고 그대로 지나쳐 온 것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180]
『
요사』는 거란 멸망 수백년 후에
원나라가 편찬했고 같이 편찬된 『
금사』나 『
송사』와 달리 원전 사료가 다른 두 나라 보다 더 없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 사실 거란은 정사서를 지은 원나라에게 망한 게 아니라 원나라가 세워지기 백여년 전에
금나라와
송나라에게 망했는데 이들은 거란이 망한 이후 거란의 정사서를 쓰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원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수백년간 정사서가 쓰이기 않아 원전 사료가 산일되어서 원나라가 직접 멸망시키고 원전 사료를 획득한 다른 두 나라보다 사료가 부족하고 불명확해진 것이다. 이런 사료문제에 더하여 고작 1년안에 날림으로 편집하여 편찬하는 바람에 요사는 중국전통역사서인 24사 중에서도 가장 오탈자 많고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아 최악의 역사서로 꼽힌다.
[181]
원작 소설에서는 이를 각색하여 백행린의 부대가 예상보다 빨리 온 거란군을 잠시나마 막는 동안에 강감찬이 남아있는 20여명의 관리들을 모아 젊은 이들 중 김종현 등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00여명의 군사들로 최대한 거란군의 남하를 지체시키도록 하며, 그마저도 감악산으로 가는 수천의 부대만 바람과 눈보라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 참고로 원작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정사의 기록 외에 유일하게 추가된 강감찬의 활약이다.
[182]
효은태자의 장남 왕림은 현종 재위기에 유진의 뒤를 이어 상서좌복야를 지냈으며 부친의 동양군 봉호 또한 물려받는다. 차남인 왕정 또한 동시기에 조정에서 일하며 사후 온결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왕경수라는 이름의 아들까지 남겼고, 이 왕경수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양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183]
아울러 현종조 과거에 급제한 왕총지라는 인물 또한 태조 왕건의 증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왕총지의 조부는 왕유라는 인물로 왕건의 수많은 아들 중 하나이자 국초 '원보'라는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왕단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아울러, 개성 왕씨에서 강릉 왕씨로 본관을 바꾸어 분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 본관을 바꾸었는지 명확히 기록된 바는 없으나, 광종조의 무자비한 숙청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분적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왕총지가 종친이라면 누구나 적용되는 음서가 아닌 과거를 통해서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 개성 왕씨에서 분가된 지 오래되어 종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왕총지는 현종조 과거 급제를 계기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였고, 이후 조정의 명신으로 자리매김하여 문종조에 문하시중, 중서령까지 지내고 1067년 사망하였다.
[184]
개경에 궁인들이 남아있다가 거란군에게 당한 것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 고려 왕실을 호위하거나 섬기던 사람들이 겨우 50여명이 전부일리는 없기 때문이다.
[185]
사실 이전부터 서경의 장군들이 점을 쳐서 보니 길조가 나와서 고려군이 서경을 지킬 수 있었다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서부터 돌풍이 불어 거란군의 진공이 하루 지체된 일도 묘사되지 않아 아무래도 천재지변은 개연성을 위해 삭제한 듯하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그저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양규가 보는 장면으로 나올 뿐이지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186]
기록이 부족한 곽주 탈환전은 고려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거란군이 지키는 성을 탈환한다는 특성상 어지간한 영화 시나리오는 능가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펼쳐졌을 테니 후대의 입장에선 아쉬울 뿐이다.
고려실록이 현존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187]
양력으로 환산하면 1011년 2월 9일에 해당한다.
[188]
다만 양규가 곽주성의 거란군을 전멸시켰던 만큼 양측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뒤늦게서야 고려군의 곽주 탈환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189]
현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주, 유배에서 풀려나온 하공진과의 만남, 서경으로 향하는 거란의 사신을 발견하고 뒤쫓아 양규 등의 서북면 고려군에게 진실을 밝히는 장면 등이 있다. 참고로 원작에선 양규가 회군하는 거란군으로부터 자신이 구한 포로에게서 현종과 서경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된다.
[190]
원작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초반부에 빠지지 않고 묘사되며, 흥화진의 군사들이 항복할 의향이 없음을 알자 야율융서는 약간 실망하면서도 그들의 기개에 감탄한다.
[191]
제2차 여요전쟁 이후이자 고려 건국 100주년인 해이며 거란의 3차 침공(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한 그 해(
귀주대첩 1년 전)이며 원정왕후가 이 때 세상을 떠난다.
[192]
야율분노 또한 국성인 야율씨를 쓰기에 공신의 자손이거나 방계 황족의 자손일 가능성은 있다. 다만 당시 황제인 야율융서와 무려 3중의 혈연 관계로 얽혀 있었던, 즉 황제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소배압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193]
국인은 의례용이나 기념/보관용으로 제작되는 '어보'와 달리 외교나 내정 등의 실무에서 활발히 사용되었던 인장이다. 기본적으로 천자국의 인장은 '국새' 또는 '옥새'로, 제후국의 인장은 '국인' 또는 '금인'으로 불렸으며 국인의 경우에는 제후국이 상국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다만 내적으로는 천자국을 표방한 고려답게, 여진/일본 등 제후국과의 외교, 그리고 내부 행정에 있어서는 상국에서 하사받은 국인이 아닌 고려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인장을 사용했다고 하며 그 이름을 천자국의 격식에 맞게 '옥새'라고 명명하였다는 사실이 정종(3대)조, 숙종조, 예종조, 인종조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천자의 명, 즉 '조칙'을 내릴 때 사용하는 '서조보(書詔寶)'라는 인장을 별도로 제작해 사용했다는 기록 또한 고려사 여복지에 남아 있다.
[194]
링크 내 '고려국왕지인'이 찍힌 문서는 1389년(고려 창왕 1) 치러진 과거에서 '병과 3인(丙科 第三人)'으로 급제한 최광지(崔匡之)의 홍패로 202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고려국왕지인'이란 인장은 조선 개국 후에도 잠시 사용했다가 1393년(조선 태조 2) 명에 반환되었다.
[195]
재위 중인 양국 황제의 나이에 따라 형과 동생을 정하는 방식이다. 즉 양국 황제의 즉위와 붕어 시점에 따라 언제든 형제 서열이 바뀔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였다. 이러한 형제 관계는 차후 한반도 왕조와 중국 정복 왕조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금이 요를 몰아낸 이후, 금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형제 관계를 맺자는 국서를 보내며 '자신이 더 연상이니 형'임을 명시했고, 정묘호란 이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인조와 형제 관계를 맺으며 역시 '자신이 더 연상이니 형'임을 명시한 바 있다. 물론 맺어질 당시에는 동등한 형제 관계로 출발했지만 차후 힘이 더 강해진 금과 청은 고려와 조선에게 군신 관계라는 수직적인 관계를 요구했고 정복 왕조의 국력에 밀린 고려와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6]
해당 회차 방영일인 2024년 기준으로 약 200km에 육박(고속도로 및 자동차전용도로 이용을 제외하고 가장 빠르게 이동할 경우)하고,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이다.
[197]
인천 이씨 시조인 이허겸의 딸로서 이후 인천 이씨는 김은부의 이 일을 본받아 이자연이 문종에게 딸 셋을 시집보낸 일을 계기로 고려 최대 문벌 귀족으로 성장한다.
[198]
'복흥사 경덕국사 묘지명(福興寺 景德國 師墓誌銘)'에 따르면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으로 의천이 출가했을 때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고 한다.
[199]
김은부의 차남인 김난원의 묘지명에 언급된 나이를 보면, 김난원은
999년(고려 목종 2)에 태어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나머지 자녀들의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200]
드라마를 보면, 세 딸은 성인 배우가 열연하는데, 아들들은 아역 배우들이다.
[201]
20여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에서도 유 장자(유천궁)가 자신의 딸에게 당시 나주 공략을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왕건의 '시침'을 들게 했다. 또한, 이 드라마의 5회에서도 김은부가 공주를 방문한 행영도병마판관 황보유의에게 "늦었으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는가?"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바 있었는데, 만약 황보유의가 당시 김은부의 집에서 묵었다면 황보유의 또한 김은부의 딸 중 한 명에게 시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02]
고려사에선 야율융서의 구체적인 의도는 언급되지 않고, 애전에서 거란군 한 부대를 습격하여 전투를 벌인 직후 야율융서의 본대가 나타나서 마지막 혈투를 치르고 전사했다. 이 부분을 드라마에서는 아예 함정을 위한 미끼 부대를 보내고 본대로 양규 부대를 치는 방향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실제 역사에서도 양규의 게릴라전이 거란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고 일부 부대와의 전투 직후에 본대가 나타난 것을 보면 이러한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사료에는 남아 있지 않다.
[203]
기록에 근거하여 유추한다면 양규는 궁기병 간의 교전 끝에 전사했거나 거란의 궁기병들에게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사한 곳이 오히려 장애물이 많은 산악지형이었어야 작중 묘사처럼 거란이 작정하고 궁병으로 둘러 싸 온 몸에 화살이 박혀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사한 곳이 애전艾田이므로 들판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연출이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다.
[204]
진짜 과장은 김숙흥의 경우다. 실제로는 그로기 상태가 아니라 즉사했을 것이다. 둔기의 경우, 살 뿐만 아니라 뼈가 버티지 못한다. 철갑옷은 날붙이와 화살을 막아줄 뿐이고, 통으로 이어진 투구에 가한 둔기의 충격은 오히려 진동이 더 증폭될 수 있다. 도끼의 경우도 날 뿐만이 아니라 둔기로서의 효과가 더해진다. 괜히 고구려가 갑옷 대신 방패로 보호장비를 간소화한 부월수를 편제한 것이 아니다. 도끼나 철퇴를 든 경보병이 중보병 및 낙마한 중장기병의 근접 카운터였기 때문이다.
[205]
여담으로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한창 싸우던 고려 결사대가 들고 있던 환두대도가 전투 와중에 휘어버리자 신경질을 내며 집어던지고는 단검을 꺼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실제 역사의 전투에선 빈번하게 나오던 광경이다. 이러한 이유로 냉병기 시절의 전사들은 주 무장 외에도 다른 부 무장을 여럿 장비하고 있었다.
[206]
기록으로 살펴보면 이 전투로 거란은 장족(귀족)과 병졸, 수레도 돌아간 것이 드물었고, 관속들 태반이 전몰하면서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결원을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 될 정도로 큰 피해를 받았다. 드라마에서도 몇 만이 죽었다고 언급되지만 전투 스케일이 작아 실감이 안 나고, 야율융서나 소배압에게서 다급함이 느껴지지 않다 보니 고려군의 활약 및 거란군의 피해가 대단치 않은 느낌을 준다.
[207]
고려의 적폐인 호족 세력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였다.
[208]
아래의 언급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 위주로 언급하되 드라마에서 전전승지 양협이 밝히지 않은 인물들은 각주로 따로 언급한다.
[언급]
드라마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
[211]
그 전날
탁사정이 강조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언급]
[213]
물론 그는 이후 상서우복야에까지 오르고 초상이 공신각에 그려지는 등의 영예를 누렸다.
[214]
2차 여요전쟁이 1011년 3월에 끝났고, 국지전을 제외한 본격적인 3차 여요전쟁은 1018년 12월에 발발하였으므로 7년 9개월 정도 걸렸다. 그리고 현종대 군현제가 확립된 게 3차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018년 시기였으므로 실제로 7년 정도 걸렸다.
[215]
장연우는 처음에 이런저런 사정을 들며 미적대다가 현종과 맞닥뜨린 뒤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고 어명을 받들겠노라고 고하는 코믹스러움을 보여준다.
[216]
다만, 원정왕후 본인도 은근히 신경쓰였는지 차후 유진을 불러 현종이 김은부를 등용한 이유에 대해 묻고, 유진이 '김은부의 여식이 폐하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았으며, 폐하 또한 김은부의 여식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이니 그 일로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자 내심 안도하기도 한다.
[217]
원정왕후의 모친인 문화왕후는 호족 출신의 신료 김원숭의 딸이며 원화왕후의 모친 연창궁부인 또한 호족 출신의 신료 최행언의 딸이다. 흔히 성종이 고려 최초로 족외혼을 한 국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최초로 족외혼을 한 국왕은 혜종으로 병부령 임희의 딸을 정비로 맞았으며 그 다음 국왕인 3대 정종 또한 박영규의 딸을 정비로 맞아 각각 자식들을 두었다. 물론 임희와 박영규는 고려 건국과 삼한일통에 크게 일조한 개국공신이며, 일개 호족인 김원숭과 최행언 등과는 수준이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아울러 혜종과 정종이 막 성년이 되었을 때는 태조 또한 후비로부터 딸을 많이 보기 전이었으므로 혜종과 정종에게 당장 결혼시킬만한 이복여동생도 많이 없었기에 개국공신의 딸을 배필로 맺어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을 것이다.
[218]
대화 당시의 시점이 제2차 여요전쟁으로부터 1년 지난 시점임이 소배압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219]
실제로 강감찬의 아버지인 강궁진은 삼한벽상공신 중 한 명이다.
[220]
극 초반에는 지채문에게 멱살을 잡혀 나가 떨어진 것은 물론 그의 칼에 베일 뻔 했고, 지채문을 말리던 강감찬 역시 이후 현종에게 탁사정의 엄벌을 요청했다. 그리고 극 후반에는
제2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한 대도수와 양규의 처가 함께 불공을 드리던 현종에게 "탁사정을 벌하여 달라"면서 눈물로 간청하기도 했다.
[221]
드라마상으로도 강조의 반역 때 그에게 찬동하여 무혈입성을 도왔던 만큼, 이 사실을 문제 삼으면 구실도 만들 수 있다.
[222]
조선 초 이숙번이 좌습유를 역임한 바 있다.
[223]
태조 왕건의 첫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와 제6비인
정덕왕후 류씨는 '정주 류씨', 제2비인
장화왕후는 '나주 오씨',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는 '충주 유씨', 제4비인
신정왕태후는 '황주 황보씨', 제5비인
신성왕태후는 '경주 김씨'이다.
[224]
대사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효숙왕태후(헌정왕후)의 고향은 황주이며 원정왕후의 외가는 선산이다. 다만 효숙왕태후의 경우, 본관만 황주를 따랐을 뿐 생전 대부분 거주한 곳은 개경이기에 엄연히 따지면 고향이 황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효숙왕태후의 할머니 신정왕태후의 고향이 황주이기에 왕후가 되기 전 개경과 황주를 오가며 기거했을 가능성은 있으며, 전작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효숙왕태후가 입궁 전에 줄곧 황주에 기거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225]
어사대에서 전쟁 당시의 죄로 인해 파직된 관리들에 대한 소위 '살생부'라는 명단의 리스트를 만든 뒤 각 관리들을 자택에서 억지로 끌고 나와 업무에 복귀시키는 방법을 취했는데 마치 현대의 '캐비닛 정치'와도 매우 유사하다.
[226]
다만 유진은 "나는 개경에 상경한 지 오래되었기에 충주와는 크게 인연이 없다."고 웃어넘긴다.
[227]
극중 성종에 대해서는 등장인물들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며 은근히 평가가 좋다. 극 초반, 김치양과 이주정은 '성종이 팔관회와 연등회를 없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말한 바 있으며, 김은부의 장녀 김씨 또한 '성종이 거란과의 전쟁에서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했다'고 말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 군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 있다.
[228]
사실 광종과 경종에 대해서는 유진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최승로가 성종 즉위 이후 쓴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에 담겨있으며, 이 중 광종에 대해서는 전작인
제국의 아침에서 드러냈다.
[229]
원정왕후와 유진이 김은부에 반대하여 그를 몰아내고자 시도하며, 강감찬 또한 취지는 다르지만 김은부가 제대로 된 처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상소를 올리게 된다.
[230]
처음에는 사신으로 온 김은부를 무난히 보내주는 듯 했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뀐 요 성종이 친거란 여진 부족을 이용하여 국경을 넘어가려던 김은부를 잡은 뒤 다시 거란으로 끌고 와 수개월 동안 억류했다는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231]
호장 자제의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대신 은자를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어지는 병부낭중 최구의 표정으로 보아 조작된 증거로 보인다.
[232]
이러한 국문 과정에서, 장연우가 오히려 김은부로 인해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고 변호하고 그러한 내막을 기록한 문서를 공개하기도 하지만 유진의 기세에 밀려 변호를 이어나가지 못한다.
[233]
현대에는
페니실린 등의 항생제가 있어 폐렴을 쉽게 치료할 수 있으나, 중세에는 폐렴에 걸리면 치료가 쉽지 않아 치사율이 높았다.
[234]
금주에 도착하자 금주 가문의 호족 대표 내외가 강감찬을 맞이하는데, 그 호족 대표는 지난 17회에서 박진을 비롯한 전국의 호족 대표들과 함께 조정의 호족 개혁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던 인물로 이후 21회에서 강감찬을 가리켜 '조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정황상 강감찬의 숙부거나 친척 어른으로 보인다.
[235]
사실 현재의 '시흥시'는 이름만 빌려왔지, 과거의 '시흥'이라 불렸던 '금천' 지역과 확연하게 다르다. 자세한 건
시흥군 및
시흥시/역사 문서 참조.
[236]
이후 2008년 관악구의 행정동을 개편하면서 기존 '봉천본동'과 '봉천1동'~'봉천11동'으로 불렸던 명칭을 변경하는데, 이 중 기존 '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합쳐서 강감찬의 아명(兒名)인 '은천(殷川)', '봉천7동'을 강감찬이 태어난 '낙성대(落星垈)', '봉천11동'을 강감찬의 시호인 '인헌(仁憲)'으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강감찬이 실제 태어난 곳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한 낙성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자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237]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중서성과 문하성 관청이 분리되어 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다만 중서성과 문하성이 사실상 합좌 기관의 성격을 띄는만큼 양 기관의 관청이 가깝게 붙어 있는 걸로 묘사되기는 한다.
[238]
대내외적으로 일관되게 제후국을 표방한 조선의 경우에는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 국왕이 홍포를 착용하였다.
[239]
본래의 칭호는 왕비이나 극중에서는 고려의 외왕내제 천하관을 차용하여 '황비'라는 대사와 자막으로 처리되었다.
[240]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의 7대 임금.
[241]
丙辰, 해당 일의 간지이다.
[242]
이같은 현종의 모습은 과거 야율융서가 고려 침공을 위해 '강조의 정변에 대한 치죄'라는 명분을 만든 모습과 클로즈업된다.
[243]
예외적으로 현종의 경우에는 절일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현종이 자신의 가족사와 그로 인해 부모가 겪었던 고통 등으로 인해 본인의 생일을 기리는 날을 지정하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종 이후 12대 순종(현종의 3남 문종의 장남)의 경우에는 왕태자 시절의 절일만 존재하고, 즉위 이후 일찍 붕어함으로 인해 국왕의 절일은 제정되지 않았고, 14대 헌종의 경우에도 숙부 숙종의 압박으로 조기 퇴위함으로 인해 국왕으로서의 절일이 제정되지 않았다.
[244]
이 반란은 사실 절도사의 잘못된 통치에 원한이 깊은 몽골인들이 절도사를 살해하고 일으킨 아리저의 난으로서 비록 이는 초동에 제압되지만 세력은 계속 남았다. 12월에 일어난 반란의 규모는 그야말로 대단해 한 달 만에 서북로 통치의 핵심이 되는 진주가 몽골계 부족인
타타르에게 포위당해 초토사인 소도옥이 진주에 갇혀 있을 정도였다.
[245]
이 내원성과 보주성은 오늘날
평안북도
의주군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여요전쟁 이후에도 고려의 영토가 되지 못하다가 16대 예종 때인
1117년 당시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대항하기 어려웠던 거란(요나라)의 장수가 성을 고려에게 넘기고 그대로 달아났다. 여담으로 흥화진이 오늘날 의주군 위원면(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피현군)에 자리잡았고, 내원성과 보주성은 오늘날 의주군 의주읍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46]
물론 심장과 간을 빼내는 건 잔인하기 때문에 형틀에서 거란군이 둘러싸여 빼내기 전 "나는 고려인이다."라고 말한 후 바닥의 멍석에 피가 흘리는 장면으로 처리했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에서는 형틀에 묶인 채 거란군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된 채 죽었는데, 실제 행적을 보면 이 드라마가 맞다고 볼 수 있다.
[247]
드라마에서 22회에 하공진과 소배압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소배압은 "왜 남경으로 가지 않느냐?"라면서 나름 의심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담으로 거란(요)의 남경은 오늘날의
베이징이다.
[248]
김은부가 거란에 사신으로 간 건
1011년 11월 13일(음력)이었고, 하공진이 거란에서 죽은 건
1011년 12월이었다.
[249]
극중
채충순이 초기에 맡았던 관직이다.
[250]
추가로 문신이 도통사나 병마사와 같은 총사령관급이 아닌 무신계 관직에 임명된 것도 유방이 형부상서로 임명된 현종 7년에 중추사 겸 상호군으로 임명된 김은부가 최초인 것을 보면 김훈, 최질의 난으로 인한 무신 수의 감소 등의 이유로 그 시점에서부터 관직 제도가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251]
만약 '할지론'대로 했다면, 고려는 서경 이북뿐만 아니라 자칫 수도였던
개경은 물론 지금의
서울 지역까지 내줄 뻔 했고, 서희도 이렇게 거론하면서
할지론에 반대했다.
[252]
김종현은 『고려사』 열전조차 없고, 강감찬 열전에 귀주대첩 당시를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253]
3차 여요전쟁의 마지막이자 이 작품의 최후반을 장식할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 김종현이 병마판관을 맡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서사를 미리 부여하려는 의도로 유추된다.
[254]
나나이족은 청나라의 변발 양식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변발이 필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본작의 여진족 추장들도 금전서미 형태의 변발이 아니라 치렁치렁하게 땋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255]
현재
함경남도
영흥군 지역으로 고려의 동북쪽 최전선이었다. 훗날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기도 하다.
[256]
원작 소설에서는 실제 사실을 반영하여 1010년대 초반의 고려의 중앙군은 6위만 소개되었다.
[257]
이는 지난 전쟁 당시 소실된 실록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 자세한 건 이 문서의 '20회 단락' 참고.
[258]
1013년 1월에 거란에 사신으로 갈 때 관직이 '중추사'였다.
[259]
물론 이후에 언급되지만, 장연우가 반란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이후 파직, 유배에 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채충순과 강감찬, 두 사람이 반란 와중에 중추사로서 남는다.
[260]
실제 1012년에서 1014년까지의 『고려사』 기록을 보면, 거란과의 관계 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여러 이상 재해와 관련된 내용이다.
[261]
사실 이렇게 실제 기록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고, 본 드라마에서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상황이 순서를 뒤집은 경우가 많다.
[262]
물론 '금오대'는 '사헌대(司憲臺)'로 개칭되는 과정을 거쳤는데, 사실은 '사헌대'에서 '어사대'로 바뀐 것을 '금오대'라고 부르다가 다시 '사헌대'를 거쳐 다시 '어사대'로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263]
물론 척준경도 이후 반란 당시 행적에 대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유배를 당했다.
[264]
『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건 '『고려사』' 문서 참조.
[265]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면서 몽골과 강화를 처음 한 원종이 태자 시절 몽골에 입조한 이후 그의 아들인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의 국왕들은 왕자부터 원에 입조했고, 국왕이 된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원 조정에 호출되어 문책을 받거나 폐위, 복위를 반복했고, 심지어 귀양을 떠나거나 살해를 당하는 등의 수난을 겪었으며, 고려군 또한 원의 지시로 인해 일본 원정에 동원되는 등 몽골군의 하위 조직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266]
한 고조 유방이 운몽현에 순유할 때 초한쟁패에 큰 공을 세웠던 회음후 한신을 체포한 일을 뜻한다.
[267]
물론 해당 밀지에는 토벌 명령만 있고, 계책의 내용은 없기 때문에 이자림이 서경에서 유방과 함께 계책을 준비하는 형태로 전개해 '이자림의 공'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268]
본래는 '청량사'라고 불렸다가 이후 이름이 두 번 바뀌었고, 현재의 이름은 광복 이후인 1966년에 붙어진 것이다.
[269]
실제 여몽전쟁 이후 몽고(원)에 입조한 인물은 국왕이었던 원종이 자청해서 한 것이며, 당시 집권자인 무신 김준과 임연은 이러한 원종의 입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270]
여담으로 효은태자의 조카(효은태자의 형 효목태자의 딸) 중 한 명은 유방과 결혼했는데, 유방은 유금필의 후손(손자로 추정)이며, 효은태자 형제도 유금필의 외손(유금필의 딸 동양원부인 유씨와 왕건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5촌 ~ 6촌간 혼인으로 본다.
[271]
검교태사 수문하시중 유진과 참지정사 최항, 내사시랑평장사 최사위, 중추사 채충순과 강감찬.
[272]
이는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 <
천추태후>에서도 구현되었다. 특히나 당시 성종 역의 김명수가 황금 갑주를 입고 군사들을 독려하는데, 이번 작품의 현종 역의 김동준도 황금 갑주(전작인 <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 역의 주상욱이 조사의의 난 당시 착용했던 갑주)를 착용하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273]
해당 회차 후반에 소배압이 자기 휘하 장수들에게 고려를 설명하면서 "거란이 이미 고려를 5번 침공하였다."는 언급을 했는데, 이는 993년(제1차 여요전쟁), 1010년(제2차 여요전쟁)에 더해 이 시기 3년 연속으로 침입한 것을 말한다.
[274]
그는 사후인 1016년 1월, '상서우복야 상주국(尙書右僕射 上柱國)'으로 추증했고, 그 아들 정균백(鄭均伯)을 낭장 겸 상승봉어(郞將 兼 尙乘奉御)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275]
이 부분은 사료로 언급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제3차 여요전쟁의 2번 문단 전체를 참고. 여담으로 이 시기 고려는 거란뿐만 아니라 일부 강경파 여진도 상대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거란에서 많은 이들이 고려로 내투하기도 했다.
[276]
이때 임명된 장연우는 같은 해 11월 23일 사망한다. 자세한 건 후술.
[277]
1017년에 '태복경(太僕卿 - 왕명 출납 및 의복, 수레와 말 등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임명되었다고 언급출처 필요되었는데, 이는 족보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고려사』의 '세가'나 '열전'의 기록상에는 나오지 않는다.
[278]
이전 '21회 단락'과 '25회 단락' 부분을 참고하면, 채충순은 1012년에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거란으로 사신으로 갈 때 '중추원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에 다시 '예부상서'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79]
기록상 조자기가 등장하는 마지막 부분인데, 드라마에서는 20회 이후 사실상 퇴장했다.
[280]
재상들과 달리 절각복두에 홍단령이다.
[281]
때문에 '27회 단락'에서 나왔듯이 드라마에서 반란 당시 화를 당한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282]
이전 호부상서를 맡은 장연우가 죽은 이후 맡은 것으로 보인다.
[283]
궁에 들어온 큰 딸이 현종의 뒤를 잇는 왕흠(후에 덕종)을 1016년 5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받은 것으로 보인다.
[284]
둘째 딸은 후에 문종을 낳은 원혜왕후이며, 막내딸은 원평왕후가 된다.
[285]
'우보궐'은
중서문하성의 정6품 관직으로 간쟁·봉박(封駁) 등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의 헌납이 이에 해당한다.
[286]
현재의
평안남도
안주시이다.
『고려사』 기록.
[287]
해당 면의 글씨는 채충순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288]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고려 황실은 4대 광종이 이복여동생인 대목황후 황보씨를 아내로 맞이한 이후 줄곳 '족내혼'을 유지했다. 이때 결혼하는 여인의 경우, 반드시 어머니이나 할머니의 성씨를 쓰도록 했다.
[289]
태조 왕건은 기존의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므로 무조건 족외혼을 통해 후손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현종은 기존 고려 왕실의 대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끊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족외혼을 통해 후손을 늘리는 것이 국왕으로서의 책무였다.
[290]
당시 병부시랑인데, 드라마에서는 해당 회차 최후반에 등장한다.
[291]
이 문서의 '12회 단락'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사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주요 사건들의 배경은 늦가을 ~ 겨울철인데, 드라마 초반은 사전에 미리 제작했기 때문에 녹음이 짙은 여름철에 나온 장면들이 많았다.
[292]
그나마도 '학익진'만 집중적으로 알려졌는데, 해상전은 함포 사격을 통한 접근거부가 기본 방침이었고, 육상에서는 야전보다 공성전과 게릴라전이 더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293]
두터운 보병대가 적의 앞을 막아주고(모루) 날랜 기병대가 적의 뒤를 기습하여(망치) 양동하는 전술
[294]
삼교천과 자주에서 거란군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탄에서 조원의 고려군에게 당한 거란군이 1만 정도라는 기록으로 보아 소배압이 10만 정도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는데, 개경에 다다를 무렵에는 8~9만 정도 남은 것으로 보인다.
[295]
음력상으로 보면,
1019년
1월 3일에 해당한다.
[296]
『
고려사』에는 '소손녕'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소배압'이다.
[297]
물론 이 시는 100% 우중문을 비롯한 수나라 군대 전체를 조롱하는 의도가 분명하다.
[298]
실제로 사료에 거란군이 회전에 임한 구체적인 계기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고려군이 먼저 진을 치고 이를 본 거란군이 나와서 대회전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평원에서의 전투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왔다는 관점이 있다.
[299]
동서방향이 반대고, 가로세로길이가 반대고, 고려거란 군세가 반대다.
[300]
극중 전개를 따라 검차1진이 양 옆으로 웅크러들며 후퇴했으나, 중갑기병대가 북방에서 등장하자 다시금 용기내어 학익진으로 변하고, 거란군이 석천을 힘겹게 건너 반령벌판으로 도망친다는 전제.
[301]
작중 야율융서는 왜 승자인 고려가 먼저 화의를 청하느냐면서 자신을 조롱하느냐고 분노하는데, 실제 역사의 고려는 야율융서가 말하는 대로 승자로서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302]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현종이 지팡이와 의자를 내려주고 사흘에 한 번씩 출근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종종 조정에 나와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303]
1031년은 현종이 붕어한 해이자 덕종이 즉위한 해이다. 고려시대 당시에는 유년칭원법이 아닌 즉위년칭원법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원래대로라면 1031년은 현종 23년과 덕종 1년이 공존하는 것이 맞다. 다만 유년칭원법이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사관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역대 고려 임금들의 즉위년과 붕어년(훙년)을 세는 기준을 바꾸었고, 이는 1031년은 현종 22년(덕종 즉위년)이 되었으며 1032년부터를 덕종의 치세인 덕종 1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304]
현재 연호나 시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인 일본의 경우에는 과거 고려가 그랬듯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하여 군주가 붕어한 바로 다음날을 새로운 군주의 치세가 시작하는 날짜로 보고 있다. 만약 조선의 유년칭원법대로였더라면 전임 군주가 붕어한 연도는 해당 군주의 연호와 시호로 기록되고 신임 군주는 그 다음 연도부터 정식으로 1년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