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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역사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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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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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 고려· 거란· 기타 국가) 문서 참고.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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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밴드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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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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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YAGI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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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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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총론
2.1. 외교2.2. 전쟁2.3. 의복2.4. 건축2.5. 문화2.6. 언어2.7. 거란( 요나라)
3. 회차별
3.1. 1회3.2. 2회3.3. 3회3.4. 4회3.5. 5회3.6. 6회3.7. 7회3.8. 8회3.9. 9회3.10. 10회3.11. 11회3.12. 12회3.13. 13회3.14. 14회3.15. 15회3.16. 16회3.17. 17회3.18. 18회3.19. 19회3.20. 20회3.21. 21회3.22. 22회3.23. 23회3.24. 24회3.25. 25회3.26. 26회3.27. 27회3.28. 28회3.29. 29회3.30. 30회3.31. 31회3.32. 32회(최종회)

1. 개요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

2. 총론

사건과 인물을 제외한 시대 고증은 대체로 문종 이후 ~ 원 간섭기 이전까지 약 200여 년에 걸친 시대상을 폭넓게 재현했다. 이는 남아있는 고려 시대 문물이 한정적이라 조선 시대와 달리 시기별로 세세하게 추적하고 재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복 고증은 대체로 인종 즉위 시점의 문물을 관찰한 고려도경이나 의종 때의 공복 규정을 따르고 있으며 이는 드라마 배경보다 약 100 ~ 150년 이후의 모습이다. 이렇듯 시대 재현에 있어 현대와 가깝고 기록이 많은 조선 시대에 비해 역체감이 크지만 이전 고려 시대 배경 드라마들에 비해서는 더 많은 기록과 이미지가 반영되었다.


여담으로 임용한 박사가 KBS의 장혁진 기자와 함께 본작에 관하여 일부 역사 탐구를 다룬 영상이 있다.

2.1. 외교

2.2. 전쟁

2.3. 의복

2.4. 건축

파일:42607_57018_5220.jpg
고려왕궁 만월대의 초입인 신봉문. 경복궁의 광화문격에 해당한다.
* 고려의 본궐을 묘사하며 광화문(廣化門) 뒤로 궁궐의 내문들이 열을 맞춰 쭉 배치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고려의 개경은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이 동쪽으로 나있었고, 광화문을 지나 3성 6부가 모여있는 대로(한성의 육조거리에 대응한다)를 쭉 따라간 후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야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다. 이러한 오류는 드라마 대왕 세종을 위해 만들어진 광화문(光化門) 세트에 현판만 바꿔달아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후국 양식을 따른 조선은 도성에서 궁궐의 정전까지 4개의 문( 숭례문-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통과하도록 구성되었지만, 고려는 황제국 방식을 모방해 황성에서 궁궐의 정전까지 5개의 문(광화문-승평문-신봉문-창합문-회경문)을 통과하도록 구성되어 있기에 경복궁 광화문에 실질적으로 대응되는 문은 승평문임을 간과하고, '황성'의 정문이라는 설명을 '궁궐'의 정문으로 해석해 발생한 문제로 보인다. 만약 경복궁 광화문이나 창덕궁 돈화문 앞처럼 본궐의 외부를 묘사하고 싶었다면 승평문이나 신봉문 현판이 더 적절하다.

2.5. 문화

2.6. 언어

2.7. 거란( 요나라)

파일:external/photos.wikimapia.org/63_full.jpg
금나라의 초기 수도인 상경회령부 궁성 모형
* 드라마에서는 상경임황부를 요나라의 수도로 설명했지만, 성종 대의 수도는 상경임황부, 동경요양부, 중경대정부, 남경석진부의 4개였다.[89] 오랜 수도로서 위상이 높았던 상경을 진정한 제1수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의 배경 시점에서는 중경의 위상이 높아져 상경은 점점 영향력을 잃고 있었고, 종국에는 중경에게 수도로서의 역할을 내주게 된다.
CG로 구현한 상경성의 모습도 평지성인 원래의 상경성과는 다르고, 겨울이어서 눈으로 뒤덮여야 할 곳이 신록으로 무성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경임황부는 제대로 된 복원도도 없는 형국이라 제작진의 상상력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고, 드라마 제작 시점도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까지 재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CG의 특성상, 실제 지표면과 그래픽 사이에 가장 큰 이질감이 생기는 석축부를 나무로 덮어버리는 것 역시 필연적이었다.

3. 회차별

3.1. 1회


3.2. 2회

3.3. 3회

3.4. 4회

3.5. 5회

3.6. 6회

3.7. 7회

파일:external/www.1392.org/c5a9b1e2baafc8af_c7b3c3b5c0afc7e2.jpg
조선 후기 군사서적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검차와, 그 검차로 짜는 전차진의 개념도.
조선 후기의 병법서라 궁노수 대신 총수가 원거리 투사무기 운용병을 대신했다. 출처링크
* 고려의 검차진을 보고 거란군이 사각방진이라고 한다. 병서 풍천유향의 조선시대 검차 진형에 대한 묘사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군이 검차 뒤에서 다양한 장병기와 투석병으로 거란 기병을 무찌르는데 전근대 동아시아 전투 마차는 전통적으로는 뒤의 손잡이를 병사들이 밀면서 전진하고, 방패 뒤에서 궁노수들이 화살을 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점은 재현되지 않았다.

3.8. 8회

3.9. 9회

9회 방영분은 상당수가 강감찬의 본작 오리지널 행적을 집어 넣었기에 창작 요소가 많다.[162] 다만 이 와중에서도 2차 여요전쟁의 전개 과정을 상당히 집어 넣었으므로 우선 통주 전투 후 고려의 상황을 제2차 여요전쟁 문서의 내용을 빌어 시간 순으로 설명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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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10회

3.11. 11회

3.12. 12회

3.13. 13회

이 회차의 경우, 현종이 몽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 외에는 강감찬이나 양규, 이현운, 대도수, 노전 등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기록이 부족한 이들의 행적을 창작해서 묘사하는 터라 오리지널 각색이 많은 편이다.

3.14. 14회

3.15. 15회

3.16. 16회

3.17. 17회

3.18. 18회

3.19. 19회

해당 회차의 전체적인 내용은 중반 최사위가 서경으로 발령가는 장면과 최후반 김은부의 큰딸이 현종의 아내가 되어 궁에 들어오는 장면을 제외하면 모두 극 중 창작이다.

3.20. 20회

3.21. 21회

3.22. 22회

3.23. 23회

3.24. 24회

3.25. 25회

이전 회차 말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김훈-최질의 난'이 다뤄지는데, 이 문단을 포함해 28회 ~ 29회까지 아래에 언급되는 일부 사실적인 내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극 중 창작이라고 봐야 한다.

3.26. 26회

3.27. 27회

3.28. 28회

3.29. 29회

해당 회차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 김훈 최질의 난'의 진압 및 뒷수습, 나레이션으로 처리된 전간기 후반부(1015년 3월 이후 ~ 1018년 12월), ' 제3차 여요전쟁'으로 볼 수 있다.

※ ' 김훈 최질의 난'의 진압 및 뒷수습
※ 전간기 후반(1015년 3월 이후 ~ 1018년 11월)
제3차 여요전쟁 관련

3.30. 30회


위에 언급된 부분을 제외하고 해당 회차는 크게 ' 삼교천 전투와 거란군의 개경 직공', '현종의 개경 사수'로 나눌 수 있다.

※ 삼교천 전투와 거란군의 개경 직공
※ 현종의 개경 사수

3.31. 31회

해당 회차는 크게 ' 금교역 전투와 거란군의 철수', ' 귀주 대첩'으로 볼 수 있다.

금교역 전투와 거란군의 철수

귀주대첩

3.32. 32회(최종회)

여기서는 ' 귀주 대첩'과 '고려와 거란의 전후처리', '강감찬의 사직과 엔딩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귀주 대첩
파일:귀주_이정우피셜.png
파일:귀주_전개예시.png
제작진이 만든 가상의 지형[299] 합리적인 귀주 대첩 전개의 예시[300]


[1]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2] 최종석(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 손성욱(2021), "‘우리’의 동아시아사 깊이 읽기 - 『동아시아사 입문』 (동북아역사재단, 2020)", 《동북아역사논총》 73, pp.187~188. [3] 고려 신료들이 고려 군주를 ‘황제(천자)’임과 동시에 ‘대왕’으로 호칭하는 혼용상에 대해서는 언어 문단을 참조. 이 때문에 고려/외왕내제 여부에 관한 논쟁이 있다. [4] 소식은 송나라에 조공하러 온 고려 사신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난했는데, 그는 송-고려 관계가 트집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 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백성들이 힘들고,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게 넘기며 말로는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가 심지어 송나라의 허점을 탐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대파로부터 그건 서하나 거란도 다 하고 있는 것이며, 저 나라들과는 달리 그래도 아우를 자처한 고려와 관계를 끊으면 거란이 만약 침범하려 들 때에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자 이러한 맹렬한 반박을 이기지 못하여 황제에게 사죄한 후 고려 사신들의 접대를 직접 하게 되었다. [5] 고려사 우왕 편에 수록된, 명나라 홍무제가 고려에 전한 칙서 중 하나에는 역대 중화제국 한반도를 침공한 기록들이 나와 있다. 그 중 '요나라는 고려를 총 4차례 정벌하였으며 그 중 하나는 강조의 반역을 치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요전쟁은 총 3차례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2차 여요전쟁과 3차 여요전쟁 사이의 국지전들 또는 3차 여요전쟁 이후 있었던 소규모 침공을 거란이 정식으로 수행한 고려와의 전쟁 중 하나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요사에 의거하면, 1016년 북원추밀사 야율세량이 요 성종의 명을 받아 곽주를 크게 친 적이 있었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보통 이 전투를 거란이 정식으로 수행한 고려 침공 중 하나로 기록해온 듯하다. [6]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육정임, 동북아역사논총, 2011, vol., no.34, pp. 11-52 (42 pages)) [7]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親征)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 동방학지, 2021, vol., no.197, pp. 1-25 (25 pages)) [8] 사극/시대극 팬 및 국궁 동호인들은 주연 배우부터 단역까지 죄다 엉망인 사법(射法)에 대해선 오히려 '활이란, 단기간에 배우기 어려운 기예'임을 고려해 관대하다. 연출/편집권을 지닌 쪽에 대한 아쉬움인 셈. [9] 매복 공격 장면에서 주로 등장하는데, 공중에 불화살이 올라오면서 들리는 뭔가 요란한 소리가 바로 효시를 묘사한 것이다. [10] 의외의 사실이라면 의외의 사실인데 사실 이 고증은 고증을 강조한 고거전보다 이전의 여요전쟁 사극인 천추태후가 훨씬 잘했다. # [11] 몽골군은 이 트레뷰셋 전문가들을 중동에서 고용하여 공성 무기를 제작하게 하고 회회포(回回砲)란 이름을 붙여 양양성 공략에 사용했다. 회회포가 투입된 양양성 전투는 동아시아에서 인력식 투석기가 아닌 다른 종류의 투석기를 사용한 사례 중 하나다. 드라마에 나오는 투척 방식이나 거리 측정법은 몽골군이 중동 지역의 공성술을 습득하여 활용하던 방식과 유사하다. [12] 투석기는 지렛대의 원리로 작동하는 "무게추식 투석기"와 "인력식 투석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중세부터 이용된 무게추식 트레뷰셋(counterweight trebuchet)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주로 동양에서 활용한 '포(砲)' 계열의 투석기들이 대표적이다. 인력식 포(砲)는 규모에 따라 5명 ~ 50명 이상의 인원이 동시에 발사 팔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돌을 던졌다. 무경총요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용된 가장 강력한 인력식 투석기(traction trebuchet, mangonel)는 57~63kg의 돌을 75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당 전쟁 때, 요동성을 함락시킬 때 당군이 사용한 투석기는 300근의 돌을 1리(약 390미터)나 날렸다고 한다. 한편 유럽과 중동에서 등장한 무게추식 투석기(counterweight trebuchet)는 250kg의 돌을 160미터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13] 사실 도검 패용은 조선 시대에도 활이나 조총을 쓸 때는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아 두기도 했고, 따로 다른 무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손으로 들고 다녔기에 고리를 쓰지 않는 것 자체는 문제점이 아니다. 다만, 무장한 군인들 상당수가 손으로 드는 것이 어색한 것. [14] 대표적으로 6회에서 양규가 활을 쏘던 중 시위가 끊겨 활에 시위를 다시 거는 장면이 있다. [15] 고려군이 절박해서 수레라도 끌고왔나 보다는 식으로 언급한다. [16] 『육도삼략』 호도 군용편 [17] 19분 39초부터. [18] 실제로 검차는 운용의 유연성이 떨어져서 잘 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즈모드 제대로 자리잡아서 이론상의 장점을 뽑아내는데만 성공하면 검차는 기병에게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 [19] 다만 원작에서도 검차 자체가 신식 무기까지는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소배압 등의 거란인들이 고려의 검차를 처음 볼 때에 수레 또는 전차로만 불렀고, 이후 야율융서의 반응을 보아 이름이 검차라는 것은 모른 듯하다. [20]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상대적으로 밀집한 오위진법 방진을 짰더니 오히려 여진족의 투사병기에게 입는 피해가 훨씬 크다는 평가가 나온적도 있다. # [21] 후기 로마군 역시 점점 거대한 영토 전반을 커버하기엔 대규모 중무장 정예 상비군을 유지하기가 버거워지고 사산조 페르시아, 훈족과 같은 유목 전통을 가진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며 투사병기와 기병을 위주로 한 병력의 기동력을 중시하게 되어, 테스투도 같은 밀집 방진이 점점 쇠퇴하게 되는 경향성을 보이는데, 동양과 비슷한 환경을 맞이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수렴진화가 일어난 결과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22] 실제로 파이크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런 창병 밀접방진 전통이 없었던 동유럽에서도 주요 전술로 쓰던 방식이다. [23] 상포는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언급한 고려 국왕의 복식명으로, 고려사 등에서 언급된 정식 복식명이 아닌, 그저 '담황색의 포'를 의미하는 서긍 개인의 지칭이다. 실제로는 그냥 황포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예복이 아닌 평상시의 집무복에 해당한다. [24] 자황포는 적황색으로 줄여서 '자포'로도 불렸다. 자황포는 예복으로서 조회를 비롯한 다양한 예식에 활용되었다. [25] 치황의는 국왕이 연등소회에서 입었던 예복이다. 다른 황색 예복과는 달리 왕태자도 관례 시에 착용할 수 있었으며 관례를 치르는 왕태자가 입을 경우에는 '조라통정책(공정책)'이라는 모자와 짝을 맞춰 입었다. [26] 당나라에서는 삼황색을 신민들의 복색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당나라에서 금지한 삼황색의 종류는 담황색, 적황색, 웅황색(치황색)이며 송나라에서도 해당 삼황색의 사용을 금지했다. [27] 고려 문종 조에는 국왕이 중서문하성에 명해 신민들의 담황색과 치황색 사용을 금지시킨 바 있다. 적황색의 경우는 국초부터 자황포를 국왕의 조복으로 썼기 때문에 이미 신민들에게 사용이 금지되고 있었지만, 국왕의 평상복 색깔에 해당하는 담황색과 치황색은 신민들에게 별도로 금지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종이 추가로 금지시킨 것으로 보인다. [28] 강사포는 고려말 공민왕 시기에 처음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인 문종조부터 고려사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조복의 하나였던 자황포와 명확히 구분되는 용례가 기록되어 있다. [29] 한자대로 해석하자면 전자의 자황포는 산뽕나무 열매로 황색빛을 낸포이며, 후자의 자황포는 붉은 흙으로 황색빛을 낸 포이다. 산뽕나무 열매와 붉은 흙의 색상이 사실상 같은 색상이라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의 채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둘은 한자만 다르고 사실상 같은 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전자의 자황포는 국초 이후로는 언급되지 않으며 문종이 즉위하는 시점부터는 사실상 후자의 자황포가 임금의 공식 조복으로 언급된다. [30] 강사포는 국왕이나 왕태자가 착용 가능한 진홍색 단색의 예복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강사포는 기존의 얕은 홍색 도포를 한 번 염색하여 진홍색의 포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강사포는 통천관(또는 원유관)과 짝을 이루어야 하나 공민왕 이전의 고려 국왕이 통천관이나 원유관을 착용했다는 문헌상의 명확한 기록이 없다. 공민왕 이전 시기의 기록에도 강사포가 존재했으나, 강사포에 착용하는 왕관을 '모자'로 뭉뚱그려 기록해 놓아서 이것이 복두인지 원유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동시기 송나라 황제가 24량 통천관을 사용한 것이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태조 왕건 청동상에도 24량 통천관이 도금되어 있으며, 충목왕과 충정왕 시기 국왕이 착용한 칠량 원류관의 그림이 남아 있기에, 여말선초 이전에도 강사포와 짝을 맞추어 복두와는 다른 제사용 모자를 쓰긴 썼을 것으로 보인다. [31] 고려 문종이 '임금의 의복 색에 다른 사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신하들이 '의례에 있어서는 황색, 자색(붉은색), 강색(진홍색), 작은 모임에서는 편의대로이니,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 이외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 적이 있다. 때문에 해당 색깔의 범주 내에서 적절히 혼합하여 의복을 만들어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기에 국왕은 황색 복식을 포함해 모든 색의 복식을 착용했으며, 신하와 백성들은 그 하위의 색인 자색, 홍색 복식부터 착용했다. 조선으로 넘어오고 나서는 명나라가 세종조의 조선에 대홍포를 사여하여 자색 내지 홍색이 조선 국왕의 평상시 복색이 되면서 국왕은 황색을 쓰지 않게 되고, 신하, 백성에게는 자색과 홍색을 금지했으나 잘 통하지는 않았다. 대신 중국과의 외교 현장에서는 신하의 황색, 자색, 홍색 사용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32] 다만, 당시 고려 왕실에서 자황포는 단지 예복을 넘어 정무복으로도 널리 쓰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기본적으로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일일조회 시간에는 상포가 아닌 자황포를 입은 듯하며 작중 목종이 자황포를 입은 시기도 대부분이 일일조회가 이루어지는 아침 시간에 편중되어 있다. [33] 조선은 특성상 색 차이는 없으나 대왕 세종에서도 태종의 곤룡포에는 무늬가 있는 반면, 세종은 무늬 없는 곤룡포를 입었고, 문종은 다시 무늬 있는 곤룡포를 입는 것으로 보아 대를 걸러 복장을 교체하는 것은 나름 관행에 가까운 방식이다. [34] 고려도경의 원화가 모두 소실된 지금에는 상색이 어느 정도로 엷은 노란색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어진을 보면 상당히 엷은 계열의 노란색 단령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려가 복제 또한 당 · 송의 제도를 따랐다고 가정한다면 당 태종이나 송 태조의 단령과 같은 상포를 입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5] 특히 상포에 착용하는 허리띠인 '자라늑건', 즉 자주색 옥대는 당 태종 이세민의 어진에 나온 옥대와 매우 흡사하게 재현하였다. 태종(당) 문서 참조. [36] 고려 의복을 다루는 옛 문헌에는 절상건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에는 절상건이 그저 복두의 다른 말이라서 오늘날처럼 뿔이 위로 뻗은 복두를 한정하여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날 그러한 복두를 따로 절상건이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현대인의 편의에 의한 것이다. [37] 중국에서는 수양제 초상화에 나오는 양쪽 수행원이 착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모자도 오사고모라고 한다. [38] 송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드 '청평악'에서는 송나라 인종이 개인 집무복에는 연각복두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전각복두를 착용하는 장면으로 구분하여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9] 이 소품은 MBC 고려시대 사극인 신돈(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같은 방송사의 고려시대 사극인 직지, 무신(드라마)에 나왔다. KBS 대하드라마에서는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 나왔고, 제국의 아침, 천추태후 같은 이전 작에서는 형태는 같은데 테두리가 아니라 모체에 금색 무늬를 그린 소품이 나왔다. [40] 다만 외왕내제를 고수하던 고려가 중원으로부터 받은 면류관복의 양식을 내부적으로 철저하게 지켰는지는 의문이다. 의종 대 만들어진 상정고금예문에 의하면, 면류관의 류(줄)의 개수는 제후국 복제에 따라 앞뒤 각 9류로 하되 각 류마다 달린 구슬의 개수는 천자국 복제에 따라 12개씩 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천자국과 제후국의 복제 양식을 적절히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41] 지방의 무관은 뿔이 없는 무각복두를 쓴다고 하나 드라마 상황상 갑주를 착용한 모습 밖에 나오지 않는다. [42] 드라마 배역 기준으로는 정전에 백관과 나란히 입시할 정도의 지위를 가진 군인이라면 전각복두를 착용했다고 봐도 좋다. [43] 송나라에서 무관, 군인의 복두로 절각복두, 교각복두 등 뿔을 위로 꺾어올린 형태가 유행한 것은 송나라 복두 특유의 과장된 뿔의 형태 때문에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정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고려 군인들의 절각복두도 단순히 뿔 끝만을 구부러뜨린 형태로 보기는 어렵다. [44]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라고 적혀져 있는데, 이는 갑옷의 상하의가 붙어 있는 포형 갑옷이며 옆구리가 붙어 있지 않고 트여 있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말선초부터 임진왜란까지 조선에서 사용된 찰갑의 구조 역시 이 설명에 부합한다. 서긍이 자신이 본 고려군의 갑옷을 두고 특별히 찰갑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당대 동아시아 갑옷의 주류가 찰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되려 특별히 재질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찰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45] 개심사지 오층석탑 부조는 불교 예술품이기에 양식적인 묘사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으나, 현종이 집권하고 있던 당대에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고증에 참고할 만하다. 몽고습래회사는 드라마 속 배경이 되는 여요전쟁보다 한참 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워낙 시각 자료가 부족한 고려시대의 특성상 고려 무기를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 자료 중 하나이다. [46] 물론 고증에 맞게 하려면 요나라 황제가 공석에서는 중국식 복식으로 나오고 사석에서는 유목민의 복식으로 나오는 게 좀 더 나을 것이다. [47] 사실 문경시 문경새재 세트장은 2000년대 초반 KBS에서 고려사 시리즈를 위해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꾸민 것이지만, < 무인시대> 이후 조선시대 배경 사극 촬영을 위해 싹 바뀌었다. [48]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전은 강당에 가깝다. [49] 본 드라마뿐 아니라 옷소매 붉은 끝동,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등 제작처를 가리지 않고 최근의 사극에서 많이 보이는 부분이다. [50] < 대왕의 꿈>에서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지 않을 때면 반드시 두건을 착용하고, 투구를 쓸 때도 먼저 두건을 착용하는 묘사가 나왔으나 이러한 묘사는 계승되지 않았다. [51] 원작 소설에서도 삼수채의 고려군 병력이 기록에 적혀 있는 30만이 아니라 10만 대군이라고 소개된다. [52] 사실 동아시아만의 문제는 아니고 서양에서도 무슨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수백만 대군', '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동원한 총 병력은 15만 대군'이라는 식의 호왈 뻥튀기가 심했던 편이다. # 다만 서양의 경우엔 사학이 발전하면서 이런 과장된 기록에 대해선 가차없이 의고가 들어가는 반면 동양 사학계에서는 이런 비판의식이 서양보다는 덜해서 현대에는 동양 쪽 과장이 더 두드려지는 면이 있다. 각국에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동원한 군대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53] 당장 귀주 대첩의 패전 이후에도 거란 황제가 다음해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서하 원정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54] 물론 이것도 장부상의 가라 병력이거나 애초에 이것 역시 후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가감되는 경우가 잦아 주의를 요한다. [55] 물론 이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나레이션이며,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러 이런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56] 허인욱(2018), "君主號로 본 고려 전기의 대외인식", 《한국중세사연구》 55, p.371. [57] 실제로 고려 전기까지 백성들에게 천자의 조정, 즉 '천정'은 고려의 조정을 일컫는 단어였다. 대표적인 예로, 윤관이 동북9성을 돌려받고 싶으면 직접 천정(고려 조정)에 입조해 요청하라고 여진족 추장들에게 말한 바가 있다. 다만 원 간섭기 이후부터 천정은 고려 조정이 아닌 상국인 원나라 조정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으며 고려 국내에도 그러한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58] 고려사』 및 『 고려사절요』에는 태조 대부터 고려의 군주를 ' 성상' 또는 ' 주상'으로 불렀고, 군주 또한 태조 대부터 원종 대까지 자기 자신을 '짐'으로 칭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의 제신 열전에서는 문종, 예종, 그리고 인종을 ' 폐하', 예종 9년의 기록에서 예종을 '성상 폐하'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 의하면 무신정권 당시의 임금 중 의종, 명종, 그리고 고종은 '폐하'로 불렸다는 점을 볼 수 있다. [59] 아울러 김부식의 「 진삼국사기표」나 이규보의 『 동국이상국집』 전집 등의 다른 기록에서도 고려의 군주를 가리켜 '성상 폐하'로 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60] 하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같은 사서들에서 확인되는 호칭 사용 건수를 보자면 '왕'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였으며 개서 가능성이 없는 고려시대 당대의 금석문들에서조차도 '왕'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다만, 사서들에 한정해서는 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실제로 조선 전기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고려의 '황제', '천자'라는 용어가 들어간 자료는 가능하면 선택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선택될 경우 해당 용어를 '왕'으로 개서하거나 부분 삭제했으며, 이러한 개서 과정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연구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61] 고려 전기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 중에서는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천추태후(드라마)가 '황제 폐하'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타 방송사의 고려사 드라마 중에서는 무신(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가 '황제 폐하' 호칭을 사용하였다. 열거한 드라마들에서는 재위 중인 고려 국왕뿐만 아니라 선대 고려 국왕들 또한 일관되게 황제로 호칭하였다. [62] 단, 무인시대에 한해서는 '황상 폐하'라는 호칭이 '황제 폐하' 호칭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다만 이것은 무인시대를 집필한 유동윤 작가 개인의 설정이며 그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태후 폐하'라는 호칭을 처음 시도한 작가 또한 무인시대의 유동윤 작가이다. [63] 극내에서 김치양은 고려 성종을 언급하며 '성종대왕' 호칭을 쓰기도 하고 '선제'라는 호칭을 쓰기도 한다. 동일인의 대사에서도 선대 군주에 대한 호칭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고려 초기의 국체를 고증하려고 한 제작진의 의도를 알 수 있다. [64] 조선 사관들에 의한 개서의 여지가 없는 금석문이나 비문 같은 경우에도 고려가 일관성 있게 황제국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1025)의 비문을 보면 '광종대왕이 황위에 올랐다' 식의 사용례가 나오는데 이렇게 대왕호와 황제호를 혼용한 사실을 통해 당시 고려 왕실이 사용한 용어 자체가 썩 일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5] 대내 방면으로 ‘대왕’과 황제적 용어 사이에서, 현란함과 별개로 급의 차이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구려의 '태왕'호를 대왕호의 상위라고 보긴 하지만, 원래 태()와 대()는 별개의 글자가 아니라 대(大)가 특정 상황에서 태()로 읽히는 경우를 표시하기 위해 표점을 찍은 것이 그대로 별개의 한자로 분리된 경우로 한국사에서는 조선시대 전까지 혼용되었다. 로마자 다이어크리틱이나 키릴 문자 Ё 용례와 비슷하다. 문제는 당시 사람이 아니면 문자적으로 나타나는 大의 의도된 발음이 대 또는 태인지,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금석문의 신뢰성이 서지류보다 높다고 보지만 太와 大는 마멸되면 오히려 구분이 어려워져서 한 금석문 안에서도 분명 고유 명사로서 같은 발음과 용법인 게 분명한데 어느 부분은 太로, 어느 부분은 大로 판독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자료에는 삼사, 태위 같은 관직이나 태자의 태(太)를 대(大)로 쓴 것이 많고, 고려사에는 반대로 추존 대종의 시호에 태왕이라고 되어 있어 혼용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66] 동덕여대 최종석 교수는 일련의 연구 끝에, 고려 전기 황제국 용어들은 어디까지나 군주를 높이는 존군 차원에서의 미칭이며 중국과의 대등의식이나 외왕내제적 목적의식 또는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 없이 사용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고려전기 외왕내제의 이중 체제를 전론으로 다룬 연구가 그동안 전무했으며,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는 우리 시대의 언설은 고려전기의 국제를 황제국 체제로 보는 연구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었을 따름이어서, 이러한 전제가 성립·기능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연구 성과는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는 지적을 하였다. 하지만 서울대 노명호 명예교수나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 등의 선행 연구처럼, 당시 고려 왕실이 외왕내제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황제국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통설로 여겨진다. 본 드라마에서는 통설에 따라 고려를 '자주적인 황제의 나라'로 설정하고 있다. 관련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를 참조. [67] 다만 황태후 또한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한 바 있다. 특히 송나라와 명나라는 황태후에게 폐하 경칭을 사용한 기록이 다수 있으며 조선 또한 명나라에 표문을 보낼 때 생존해있는 황제의 모친에게 '황태후 폐하'라고 호칭한 바 있다. [68] 황후에게 폐하 경칭이 쓰이게 된 것은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고대~중세에는 황제 1명에 복수의 황후가 존재하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황후에게 폐하 경칭을 쓴다면 경칭이 남발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극의 주인공의 현종만 해도 7명의 왕후를 두었으나 유일하게 생전에 '왕후' 칭호를 받은 원정왕후를 제외하면 특별히 누구도 독점적인 지위를 갖지는 못했다. 때문에 황제보다 명백히 항렬이 위이자 각 한 명씩만 존재할 가능성이 큰 태상황제, 태황태후(+황태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현직 황제의 황후에게는 전하 경칭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직접 쓴 황명조훈에도 '황후 전하'라는 호칭이 규정되어 있다. [69] 단 조선 왕조의 경우에는 국왕과 왕후의 경칭을 '전하'로 통일하였다. 왕 한 명에 정실 왕후가 여러 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일부다처의 고려 왕조와는 달리, 조선 왕조에서는 왕이 오직 한 명의 정실 왕후를 둘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후궁으로 간주하는, 즉 일부일처제에 축첩제가 가미된 방식이었기 때문에 왕후 또한 국왕과 동일한 경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조선 또한 왕이 정실 왕후를 여러 명 둘 수 있었다면 왕후에게는 전하보다 한 단계 낮은 '저하' 경칭을 붙이는 것이 예법상 옳았을 것이다. [70] 실제로 조선은 주상(국왕)과 중궁(왕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 모두 '전하' 경칭을 붙였으며 동시에 5명의 '전하'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조선 성종 대와 고종 대인데, 성종 대에는 성종(주상), 왕후 한씨(중궁), 대왕대비 정희왕후(세조비), 왕대비 소혜왕후(의경세자빈), 왕대비 안순왕후(예종비) 이렇게 5명이 동시에 전하로 불렸고, 고종 대에는 고종(주상), 왕후 민씨(중궁), 대왕대비 신정왕후(효명세자빈), 왕대비 효정왕후(헌종비), 왕대비 철인왕후(철종비) 이렇게 5명이 동시에 전하로 불린 바 있다. [71] 고려는 '폐하', '전하', '저하', '각하', '합하', '장하(승려만 해당)'의 경칭이 존재하였으며 조선은 '전하', '저하', '각하', '합하'의 경칭이 존재하였다. 본디 '저하'는 고려 전기 공작이나 후작위에 있는 이성 제후에 대한 경칭이었으며 최충헌 등이 '영공 저하'로 불렸다. 다만 원 간섭기를 거쳐 제후국제로 전환, 폐하라는 경칭이 사라졌으며, 경칭의 등급 또한 기존보다 한 단계씩 격하되어 기존에 왕후, 태자 등의 고위 왕족을 호칭할 때 쓰던 전하 경칭은 대비, 왕, 왕비에 대한 경칭으로 자리잡았으며, 공작 또는 후작위에 있는 이성 제후에 대한 저하 경칭은 세자를 비롯한 차등급 정도 되는 왕실 일원에 대한 경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72] 송나라의 경우 태후에게 '폐하' 경칭을 붙인 것이 송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직전 왕조인 당나라에서 태후에게 '전하' 경칭을 붙인 것과는 대비된다. [73] 중화제국의 경우 일관되게 '전하' 경칭을 받은 황후와 달리, 태후의 경우에는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한 것으로 나온다. 한나라와 후한, 서진, 동진의 경우 '태후 폐하', 당나라의 경우는 '태후 전하'라고 불렀고, 그 뒤를 이은 송나라와 요나라는 '태후 폐하'라고 불렀으며, 이민족 국가인 금나라의 경우 '태후 전하'라고 불렀다. 이후 등장한 원나라와 명나라의 경우에는 '태후 폐하'라고 불렀고, 중원의 마지막 왕조이자 이민족 국가인 청나라에서는 명나라의 예법을 이어받아 '태후 폐하'로 부르는 등, 황실의 큰어른인 태후에 대해서는 왕조에 따라 경칭의 차이가 있었다. 이유는 태후 또한 황제의 신하 중 한 명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황제와 동등하거나 상위의 위치라고 보아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기 때문이다. 중화권 왕조와는 동떨어진 일본의 경우에는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에게는 전하로 호칭하고 오로지 천황에게만 폐하로 호칭하다가 메이지유신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이들의 경칭을 폐하로 통일하였다. [74] 결국 천자국 중 태후에게 전하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국가는 당나라, 금나라, 고려, 일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금, 고려, 일본은 당나라 제도인 당육전의 규범을 받아들여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타 중원 국가에서는 문치주의의 발흥과 효 사상이 대두되어 과연 천자의 모후에게 천자보다 하위의 경칭을 쓰는 것이 맞는가 하는 논의가 있었고 송나라가 처음으로 태황태후와 황태후에게도 천자와 같은 폐하 호칭을 쓴 이후 요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천자의 배필인 현직 황후(중궁)의 경우 왕조를 막론하고 근대(청나라 광서제, 대한제국 고종황제, 일본 메이지덴노) 이전까지는 무조건 전하 호칭으로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위 내내 폐하 경칭을 받은 황후는 대한제국 순종의 황후가 유일하며, 명성황후의 경우에는 생전에 황후가 아니었기에 재위 중에는 대부분 '중궁 전하'라는 경칭으로 불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실시 이후 을미사변으로 시해되는 1895년 10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왕후 폐하'라는 경칭으로 격상되어 불린 바 있다. [75] 고려전기 사극 중, 고증에 맞추어 왕후에게 '전하' 경칭을 사용한 것은 본작이 최초이다. 이전 고려전기 사극들에서는 대부분 왕후에게 '마마'로 호칭했으며, 전작 중 고증이 잘 되었다고 평가받는 무인시대 또한 왕후에게 '폐하'로 호칭하는 오류를 범했다. 태후의 경우 한자문화권 국가의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하였지만 황후(왕후)는 중국이나 한반도, 일본 모두 일관되게 '전하'로 호칭하였다. 동아시아에서 황후가 '폐하' 경칭을 받게 된 것은 무려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76] 이는 상록수 같은 근대 문학이나 기록은 물론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현대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77] 물론 정식 공문서인 조서에서는 짐이라는 자칭을 사용한다. [78] 보통 신라/고려의 다른 여러 고승비는 최치원, 최언위 한문 문장을 잘 쓰는 신하에게 쓰라고 시켜서 '신하된 누구누구가 왕명을 받아 썼다'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반면 이 비문은 임금이 직접 지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지었다고만 썼다. [79] 조선 정조가 작성하기 시작한 국정일기인 일성록은 왕의 일기답게 왕을 1인칭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과인'이 아닌 '나(予)'를 1인칭 대명사로 썼다. [80] 원사에 따르면, 강화에 머무를 때는 만세를 불렀는데 자신의 시대에는 천세를 부른다는 충렬왕의 말이 나온다. [81] 이와 같은 방법은 고려 말기 공민왕이 우왕에게 강릉대군(강령대군) 작위를 세습하는 것으로 되풀이된다. 공민왕의 강릉대군 작위 또한 부왕인 충숙왕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82] 이 때문에 요나라는 현종을 목종의 친척 형뻘로 인식했다. [83] 이 주(主)라고 하는 표현은 오늘날 군주 용어의 쓰임과 같은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 군주를 한주(漢主)라고 지칭하는 것이 있다. [84] 외국인 배역이 외국어만 사용하고 통역을 배치하는 연출은 대개 극의 전개상 외국인 배역의 비중이나 중요도가 낮은 경우에 사용되어 왔다. < 징비록>에서는 조선과 일본 배역의 비중이 엇비슷해서 일본 배역의 대사가 한국어로 처리됐다. 본작 역시 거란 배역 비중이 크기에 외국어 처리를 별도로 하지 않고 드문드문 사용한다. [85] 언어 외에도 몽골의 전통 창법인 흐미를 거란측 OST에 사용하고 있는 것 또한 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86] 김인희(2020), 『움직이는 국가, 거란』 [87] 뛰어난 전투력으로 오스만 제국, 폴란드, 러시아를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때 주역이 되었지만 대규모 회전과 같은 정규전에서는 쥐약이었던 유목집단 카자크와 같이 아무리 삶이 전쟁인 유목민이라도 제대로 된 훈련이 없으면 정규전의 군대로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88] 요측에는 발해상온 고청명이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했고, 고려측에는 대도수가 2차 여요전쟁 당시 실종되었다. [89] 서경대동부는 성종 다음 황제인 흥종대에 승격되었다. [90] 고려 이후 조선에서도 ' 강무'라고 하여 사냥 겸 군사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91] 다만 본작에서는 타초곡을 설명하면서 "사람"을 강조하고 그 참혹함에 현종이 경악하는 묘사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세세한 고증보다 직관적인 잔혹함과 전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92] 여기에 방어군 측은 자국에서 부여한 권한을 넘어선 물자 조달이 약탈로 간주될 수 있다. [93] 사실 이 고증부분은 대조영때 부터 거란쪽의 깃발로 사용되었고 이후에 천추태후와 현재의 고려거란전쟁까지 재활용되었다. [94] 참고로 원작에선 거란 황제 야율융서의 깃발은 높이가 3장(丈)에 달하고 짙은 황색 바탕에 구름 위를 힘차게 뛰어노는 백마가 그려져 있다고 묘사되며, 깃발을 올리면서 어느 정도 연출을 통해 군사들의 사기를 올린 채 소배압 등의 장수들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95] 유목민이기 때문에 이동할 때는 말을 타고 이동하고 싸울 때만 말에서 내려 싸우는 승마보병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96] 기병으로 유명했던 몽골 제국도 보병은 운용했다. [97] 비슷한 시대를 다룬 천추태후에서도 이 두 사람이 언급되었지만, 반란과 관련해서는 통편집되었다. [98] 가장 대표적인 것이 23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부인이던 강비와 왕건의 부인이던 신의왕후, 장화왕후, 신명왕후의 이름을 극중 창작으로 정했다고 나레이션으로 밝혔다. [99] 예를 들어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부인의 본명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손상향이나 손인같은 이름을 임의로 붙인 사례나, 여씨에게 여령기 여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등등. [100] 일반적으로 유약하고 무력한 군주로 인식되는 고려 목종이나 조선 순조는 멀쩡한 왕권을 누렸다. 전제군주정 체제 하에서 왕권이 약한 군주는 사치스럽거나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군주의 업무이고 존재의의라서 명예적으로 돈을 퍼 주는 입헌군주국과 달리 전제군주정에서 군주가 사치하고 방탕할 수 있는 재력은 결국 군주 본인이 쥔 권력에서 나온다. 때문에 왕권이 약한 군주, 일례로 고려의 공양왕이나 조선의 철종은 성실하다고 보긴 어렵더라도 방탕함과는 거리가 먼 조용한 삶을 살았다. [101] 야사에는 당시 신혈사 주지였던 진관스님이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102] 요사 성종 본기 5권. 통화 26년(1008년) 겨울 10월 1일. 중경에 행차하셨다(冬十月戊子朔, 幸中京) 통화 27년 봄 1월, 요하에서 낚시를 했다(二十七年春正月, 鉤魚土河) [103] 실제 역사에서는 명령없이 군사를 이끌고 왔고, 예상과 달리 개경이 평온하여 반역죄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게 된 원인이 되었지만, 극중 상황이라면 강조가 반역자로 여겨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104] 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이다. 파주가 개성 바로 옆동네인걸 생각하면 정말로 개경을 나오자마자 살해된 것이다. [105] 강조는 반역 열전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료에서는 망설였다는 기록이 제법 있다. 물론 현종을 옹립한 인물인 만큼 의도적으로 그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반면 본작의 강조는 능동적으로 반역의 의지를 굳힌 후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면모가 강하다. [106] 중추원, 은대 '등'이라 하여 뭉뚱그린 이유는, 중대성으로 통합된 3관을 고려사에서는 '중추원과 은대남북원', 고려사절요에서는 '은대중추남북원'이라고 하는 문구의 해석을 두고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의 국역에는 '중추남북원'을 중추남원, 중추북원이라고 해석했으나 고려사에서는 '은대남북원'이라는 문구 앞에 중추원이 별개로 떨어져 있어서 둘의 내용이 다르므로 중추원이나 은대 중 하나가 남북으로 나뉜 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의 궁궐 업무 보조 기구 중에는 선휘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형식적으로 남북원으로 나뉘어 있었고, 7대 목종 전시과에는 선휘 계열 관직의 녹봉이 규정되어 있는 반면 비서 기구 통합 이후의 11대 문종 전시과에는 사라져 있기 때문에 대체로 남북원은 선휘원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고려사 백관지에 선휘원 또는 남북원에 대한 내용이 없고, 목종과 문종 사이의 9대 덕종 때의 예법 규정에는 선휘사라는 관직에 대한 내용이 있어 연원과 운영 형태 및 존폐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일반적인 경우에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고려와 마찬가지로 거란 또한 송나라 제도를 따와 추밀원을 설치하였으나 유목과 정주 이원 통치 체제에 따른 북·남면관 구분의 영향으로 북추밀원과 남추밀원으로 나뉘었고 기능도 고려와 달리 최고 정무 기관이었다. 요나라/행정 제도 문서 참조. [107] 실제로 이자겸이 자신의 딸이자 예종의 두 번째 왕후인 문경태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이 『 고려사』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관련 내용), 최계방 묘지명에 최계방의 이종사촌 누이이자 숙종의 왕후인 명의태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 관련 내용)이 있다. 아울러 야사 성향이 강한 『 삼국유사』에 경순왕 김부의 딸이자 경종의 첫 번째 왕후인 헌승왕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 관련 내용) 또한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사관들이 고려의 황제국 칭호 사용례를 개서하려고 했으나 미처 개서하지 못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하나, 실제 조선시대 개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들에서도 '황후'라고 지칭된 경우는 1건(최계방 묘지명)에 불과할 정도로 애초에 비공식적인 표현이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108] 선대 황제인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와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 그리고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의 아버지인 성종은 친 남매 지간이다. [109] 현종은 조부인 태조 왕건 다음으로 많은 왕후와 후궁들을 두었으며, 정식 왕후만 7명이다. 그 중 왕후 2명이 성종의 딸, 다른 왕후 1명( 원용왕후)는 성종의 조카이며, 나머지 안산 김씨 왕후 3명은 김은부의 딸들이며 이천 서씨 왕후 1명은 서희의 손녀이다. 심지어 현종의 5비이자 성종의 조카인 원용왕후는 그 부모 또한 고려 왕족끼리 혼인한 용손이었다. [110] 원정왕후의 어머니인 문화왕후는 김원숭과 왕씨 부인의 딸이며 원화왕후의 어머니 연창궁부인은 최행언과 김씨부인의 딸로, 고려 왕실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화왕후의 경우 어머니 화의군대부인이 왕씨로 기록되어 있어 모계 쪽은 왕가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국초의 왕가 여인들은 왕씨가 아닌 외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왕씨로 기록된 화의군대부인은 왕가 여인이 아닌 왕씨 성을 하사받은 공신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111] 목종 사후 남은 태조의 후손은 천추태후와 현종,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 원용왕후, 효은태자의 아들들이 전부였다. 다만 효은태자의 아들 2명은 거의 족보에서 파인 수준이었으며 천추태후 또한 황주로 유배가게 되어 제대로 된 왕족 대접을 받는 태조의 후손은 현종, 원정왕후-원화왕후 자매, 원용왕후 이렇게 4명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강조가 효은태자의 아들들도 모두 찾아 종실에 복권시켜주며, 천추태후 또한 현종 말년에 개경 숭덕궁으로 돌아와 왕족 대우를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 [112] 해당 장면은 무인시대 후반부에 나온다. [113] 후대에는 조선 건국 이후 조선 태조가 명나라 홍무제에게 조선국왕으로의 책봉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책봉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조선국왕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었다. [114] 이후 작중에서도 포로로 잡힌 강조에게 한기가 살고 싶으면 성종에게 대답을 잘 하라며, 성종은 역신 강조를 처단하기 위해 고려에 왔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115] 삼국지로 치면 유선 제갈량이 북벌할 때와 이릉대전 석정 전투에서 손권 육손에게 마찬가지로 황월을 전해주는 장면을 생각하면 되며, 본 드라마 이후의 고려시대를 다룬 정도전에서 최영 공민왕에게 수여받은 부월(황월)을 손에 쥐고 새로 등극한 우왕을 접견하는 장면이 있다. [116] 나중에 여진정벌 실패의 책임으로 귀환 도중에 부월을 회수당하고 근신한다. [117] 이런 군 지휘관에 대한 부월 하사는 조선 왕조에서도 이어져서 선조 서산대사에게 부월을 내린 적이 있고 인조도 부월을 내렸다는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 [118] 고구려 성들이 를 두르고, 신라 삼년산성 성문들이 각양각색의 구조를 가진 것에 비해 효율적이고 단순한 구조이다. [119] 철도가 일반화되어 아주 낮은 운송비로 전선까지 물자를 전달할 수 있게 되기까지, 민간 취락의 약탈이나 징발, (좀 온건한 사령관이나 상태가 비교적 좋은 군대, 지역의 경우) 지역 상업망을 통한 구매나 ' 좋은 말로 달래어 현지의 협조를 얻는 것'까지를 포괄한 '현지 보급'은 군대의 보급품 수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 손자병법』에서는 '적의 식량 한 승(10섬)을 먹는 것은 보급으로 식량 스무 승(200섬)을 먹는 것과 같다.'고 평했고, 『 사기』 '주보언 열전'에서는 본국에서 192곡을 보내야 1석이 도달하는 현실에 대해 강변했다. 보급에 나선 말이나 소, 사람도 밥을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므로, 아무리 많은 식량을 준비한들 전쟁터에 도달하는 식량의 양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120] 나폴레옹의 보급은 현지인에게 언제까지 물품 가격을 치르겠다는 증명서를 주고 보급품을 가져가는 일종의 징발이었지만, 현지인 입장에서는 총칼을 들이민 뒤 같잖은 종이 쪼가리 하나 던져주고 빼앗다시피 하는 그냥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나폴레옹의 라이벌인 영국군은 넘쳐나는 돈으로 현지인에게 보급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121] 최악의 경우엔 강제적인 청야에 불만을 품은 지역들이 침공군에 협조할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조조가 전쟁에서 적의 공세를 막기 위해 했던 필살기 중의 하나 현지 조달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에서 접경지역을 청야로 초토화하고 해당 지역의 인구를 모조리 소개하는 청야전술이었다. 관도대전에서부터 원소를 막기 위해 대규모 청야를 실시한 조조는 남부의 위협적인 적인 손권 유비의 공세를 상대하기 위해서도 각각 적벽대전 한중 공방전의 패배 이후 회남 한중 일대에서 대규모 청야와 소개를 진행한 바가 있다. 이는 합비에서 손권을, 옹양주에서 제갈량을 좌절시킨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회수 이남의 수십만 백성들이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손권에게 귀부하여 회남은 회남대로 황폐해지고 손권 좋은 일만 시켰던 적도 있었다. [122] 고려와의 전쟁 이전에 요 성종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몇 번 친정한 적이 있지만 이때는 승천태후가 최고 결정권자였다. [123] 손자병법에서도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많은 부담을 안는 전투가 바로 공성전이다. 더군다나 작중 묘사되는 흥화진은 한국 특유의 산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러면 평지 성보다 더 공략이 어렵다. 소배압이 무리해서 성을 공략하기보단 압도적인 물량을 이용해 고려군에게 먼저 피로를 가중시키라고 조언한 것도 이런 이유인 것이며, 양규를 비롯한 고려군은 요군의 파상 공세 때문에 일주일 만에 극심한 피로에 빠지게 된다. [124] 이걸 작중에서 시청자들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는지 중간에 '흥화진이 최대한 버텨주면서 징집병들은 그 사이에 훈련하고 교전준비 마치게끔 시간을 끌어주기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현종에게 조정 신료들이 브리핑 하는 장면도 나온다. [125] 고대로부터 전투수레는 기병이 부족하거나 보병의 방진 훈련이 엉망인 군대가 사용하는 미봉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루가 될 수 있는 보병의 숙련도가 떨어지고 적 기병을 견제할 기병도 별로 없어서 이동형 차폐물을 만들어 적 기병의 접근을 막고 투사병기로 원거리에서 적을 요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상대의 공격 방식에 따라 방어 전략을 짜야 하므로 전투의 주도권은 적에게 넘겨주게 되며, 크고 무거운 수레를 사용하기에 진형을 짜고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유연성이 부족하다. 때문에 상대가 변칙적인 공격을 하는 경우에는 대처하기 힘들고, 포위되거나, 대포처럼 더 먼 거리에서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투사병기의 과녁이 될 위험도 있었다. [126] 조선의 경우만 해도 건국 초기 정도전 등이 주도한 진법훈련 체제가 이미 태종이나 세종 무렵부터 와해되기 시작해서 정예보병인 팽배수가 점점 약화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 세조 궁기병 위주의 체제로 군사체제를 재정비한 바가 있다. 세조가 궁기병이나 궁시만 중시했다고 오늘날 욕을 많이 먹긴 하지만 세조 나름대로는 평화시대에 돌입하면서 점점 약화되는 조선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인 면도 있었던 것이다. [127]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고려 주력군을 격파하지 못해 결국 개경 코앞까지 와서 돌아가야 했던 상황과 대비된다. [128] 이들이 이런 전투마차의 약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마륭의 경우엔 진무제 사마염이 내려준 풍부한 군자금을 사용하여 강한 정예병을 뽑아 조련하고 튼튼하고 강력한 무기, 특히 강노같은 강력한 투사무기를 많이 동원하고 물자 보급을 풍부히 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얀 지슈카의 경우엔 병력의 질은 훨씬 떨어졌지만 기존 투사무기보다 사용이 그나마 쉬운 화약무기, 핸드캐논 등 강력한 투사병기를 보유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긴 했다. 즉 이런 종류의 전투마차를 사용하려면 최소한 아군의 투사무기가 매우 강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작중 등장하는 고려군은 기초적인 방진 훈련부터 전쟁중에 해야 할 만큼 숙련도가 몹시 떨어지는 걸로 묘사되는데 이 정도라면 투사무기 같은 무기술의 사용에서도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궁수는 대부분 숙련병이며 활 자체가 숙련하기 어려워 장기적으로 육성해야 하거나 생업으로 활을 사용하는 사냥꾼을 차출해서 운용하는 병종이었기 때문이다. [129] 이 발언과 관련해 마키아벨리 군주론에서 한 말들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 [130] 고대, 중세의 공성전과 달리 근대의 공성전의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내려간 것도 투석기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화력의 화포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포에 대항하기 위해 성형 요새가 등장하기도 했다. [131] 민가를 박살내는 장면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어 그 위력에 질린 백성들이 공포에 질려가는 모습을 묘사했고, 양규와 흥화진 수비군은 대조적으로 요군의 포탄 공세에 침착히 버티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 [132] 1회에서 서역 상인들이 저잣거리에 보이는 등 교역이 활발하다는 묘사가 있다. [133] 이는 1일차에 보병대가 성벽에 접근하다 미리 설치해 놓은 함마갱에 걸려 양규에게 발각된 장면으로 다시금 강조되며, 현대전에서도 경계나 수색, 매복시 유용하게 사용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공성전이 낮에 벌어지는데다 성 밖은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는 개활지라 이를 응용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채색한 돌을 기준 거리마다 배치하여 사거리와 무기를 조정하는 묘사가 나왔다. [134]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 관련 묘사가 있다. [135] 비슷한 시기를 다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다큐멘터리라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해 거란군이 고려군 앞에서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자 양규가 차마 이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 있다. [136] 이전 작품인 정도전에서는 남원을 침공했던 왜구가 이성계를 도발하기 위해서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연출했다. 후대의 몽골 제국군 또한 수성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잔혹한 짓을 하거나 포로를 화살받이로 썼고, 시체를 회회포로 상대 진영에 날려 보냈다. 특히 후자의 방식은 유럽 원정 도중 몽골군 내에서 흑사병이 돌자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을 시신 처리도 할 겸해서 날려 보낸 것이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137] 비유를 하자면 전쟁으로 군비가 확장되며 국가직 공무원들의 월급이 밀려버린 것으로 국무를 보는 이들에게 월급을 못 준다는 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전문 인력들이 돈 못받는다고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최소 태업만 해도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는게 불가능해지기 때문. [138] 공성전에서 공격 측은 노병보다는 궁병이 낫다. 노병은 장전까지 혼자할 경우 궁병보다 연사속도가 느리고 더 지치기 쉽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보조 인원을 붙이면 가뜩이나 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비 측보다 사거리나 위력은 짧다. 차라리 혼자 지칠 때까지 쏠 궁병이나, 말의 운동에너지로 사거리와 위력을 더할 궁기병의 엄호가 성벽을 오를 근접병과에게 더 낫다. [139] 노병은 시위를 당기는 제1장전수 1인, 화살을 매기는 제2장전수 1인, 사수 1인의 3인 1조로 연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수성전에서는 사수를 제외한 장전수 역할을 민간인들이 맡을 수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JTBC 다큐멘터리에서 흥화진 전투의 묘사에 다양한 노병이 등장하기도 한다. [140] 승천태후의 오라비는 소계선이라는 자인데 원래 승천태후의 친오빠는 아니고 촌수가 꽤 먼 오라비이다. 그러나 소계선이 승천태후의 아버지인 소사온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남매관계가 성립되었다. [141] 이성계는 2차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데 그중 네번째가 '때가 장마철이니 활의 아교가 녹고 군대에 역병이 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시대에는 활에 옻칠을 하면서 최대한 습기에 대한 대비를 하고, 아예 장마를 대비해 습기에 강한 다른 종류의 예비 활도 구비했다고 한다. 현대처럼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건조한 온돌방에서 활을 보관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누라는 윗목에서 재워도 활은 아랫목에서 재운다"는 속담도 생겨났을 정도다. [142] 그 망작 드라마라는 옛날 연개소문에서도 마갑 부분은 그럴듯하게 구현된 적이 있는데, 이걸 고려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 [143] 이 때문인지 HBO 드라마 ROME에서도 로마군의 지휘체계에 호루라기가 쓰이는 묘사가 있다. [144] 삼국지에서도 유봉 맹달이 고취, 즉 군악대를 두고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온다. [145] 일본의 투석병을 '츠부테'라고 하는데, 센고쿠 시대의 기록을 보면 한 전투에서 사상자의 과반수가 츠부테 투석병에 의해 난 경우도 더러 있다. 이들은 센고쿠 시대가 끝나는 무렵인 16세기 말을 기점으로 쇠퇴하여 에도 막부 시대에 걸쳐 없어지는데, 조총의 대량 보급과 전투가 없어짐이 대표적인 이유다. [146] 조선 시대에는 일종의 민방위 편제에서 항시 고려되는데, 삼포왜란 때 안동의 유명한 석전 프로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어 막대한 전공을 올린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전반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행주 대첩에서도 전투 후반에 화살이 떨어지자 투석을 시행하였고,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시에는 돌팔매꾼 조씨 전설도 구전되고 있다. 이후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자 군에서의 투석 사용은 쇠퇴하고, 민간에서만 전해지다 일제강점기에 사멸한다. [147] 고려사의 설명은 간단한 편이지만 이때 고려군이 입은 피해 묘사로 보면 거의 삼국지에서 장료 손권의 진영을 돌파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148] 실제로 드라마에서는 야율분노가 소배압 몰래 길목을 찾아 별동대를 운용하여 기습한 것이므로 규모가 크진 않았을 것이다. [149] 원작인 고려거란전쟁 소설에서는 통주-삼수채 전투를 비롯한 주요 전투들은 고려군과 거란군 장수들이 치열하게 머리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원작 묘사 [150]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 각색으로 생각되는데, 기병대가 방진을 부수는 장면을 영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특히 검차와 같이 마차로 구현하는 경우 더욱 그렇다. 또한 사료에 묘사된 대로 강조의 방심을 표현하려면 여러번 전투가 있어야 하며, 또한 초반부터 잡힌 강조의 캐릭터성을 희생해야 했다. 이를 설득력있게 표현하려면 상당한 예산과 시간이 들어갈 터인데, 드라마 대조영에서 초반 안시성 전투에서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예산부족으로 중요한 천문령 전투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던 KBS로는 패배한 통주전투에 많은 예산과 시간을 할당하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151] 실제로는 '입 안의 음식물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으니 적이 계속 들어오게 하라'는 발언이다. 물론 작중에서는 음식물 이야기는 빼고 보다 완화한 대사로 표현하였다. [152] 사실 목종 역의 백성현을 두고 이미 제작진 측에서 특별출연한 해당 배우에게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넣은 적이 있어 목종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본인이 반역죄로 죽지 않기 위해서 반역을 일으킨 강조와 다르게, 해당 작품에서는 강조가 자신의 의지로 반역한 것으로 나와 목종에 대한 죄책감도 실제 역사보다 적었을 것이므로 이 장면을 넣기에 어색하긴 한다. [153] 소배압이 '적이 알아서 성 밖에 다 나와 있는 상황에서 대회전으로 일거에 적을 전멸시키지 못하고 다 쫓아 버렸으니 이제 도망친 고려군이 죄다 성에 틀어박힐 것이 뻔한데, 조그마한 흥화진 하나 뚫지 못하면서 앞으로 공성전을 어찌할 것이냐'고 분노하자 강조를 잡지 않았냐는 야율분노의 항변에 황제 폐하께서 40만 대군을 이끌고 이제 강조를 잡았으니까 그럼 그냥 복귀하라는 소리냐며 식견을 보이는 장면은 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이제부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154] 고려사의 기록대로 강조가 바둑을 두다가 잡히기는 하나, 이때도 전략 회의를 하면서 바둑을 두던 도중 정말 예상치 못하게 의표를 찔리면서 잡혔다는 식으로 연출되고 있다. 방심한 나머지 오만하게 굴다가 허무하게 잡혔다는 식의 연출은 아니다. [155] 다만 그가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이미 수많은 고려군이 지시도 없이 진영을 이탈했기에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마지못해 한 말에 가깝다. [156]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 마음이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 [157] 극중 노전 본인은 거란 황제에게 일단 충성은 맹세했지만 과연 이게 과연 옳은 것인지 고뇌하고, 학대 당하는 어린 고려인 포로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만일 역사의 기록을 따라간다면, 노전은 최질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을 계기로 다시 고려군에 종군함으로써 당시 거란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와 고려에 대한 항복 권유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행위였음을 증명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158] 다만 본 문서의 외교 문단에 적혀 있듯이 실제로 이런 이유가 작용하였으리라는 시각은 있다. 그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59] 물론 전장에서의 승전 소식을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공표했을 때는 실제 고려군이 흥화진에서 승리했기에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현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나 강감찬의 간언을 받아들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방향으로 가기로 하여 고려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공표하게 된다. [160] 실제로 훗날 몽골과의 전쟁 가운데, 원종이 왕실 보위를 위해 몽골 조정에 친조한 것을 계기로 고려는 국체를 보존받는 대가로 몽골의 속국으로 전략하고 만다. [161] 현종이 삼군(三軍)이 패배하고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기 때문에 저항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요 성종에게 표문을 올려 조회할 것을 청하자, 요 성종은 이를 허락하여 마침내 노략질을 금지한 뒤 마보우(馬保佑)를 개경유수(開京留守),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삼아 을름(乙凛)이 이끄는 기병 1,000명을 데리고 개경에 부임하게 했다. 물론 현종은 이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요 성종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총독으로 오던 마보우와 왕팔도 서경의 고려군에게 몰살을 당해 부임하지 못하게 된다. [162] 강감찬 역할(배역)을 맡은 최수종의 열연 덕분에 순간(분당) 최고시청률이 10.1%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10%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출처 : 한국일보) [163] 거란군의 침략 직후 현종의 명령으로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수비하고 있었다. [164] 출처: 『고려사』 지채문 열전 # [165] 朝覲, 제후로서 황제를 뵈러 감. [166] 삼국통일전쟁 때 당나라가 신라에게 명목상 설치했던 계림대도독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167] 『요사』에 기록된 탁사정한테 죽었다는 사신 한희손(韓喜孫)이 한기와 같은 일행이었거나,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68] 출처: 『요사』 # [169] 유수는 이 모든 행정망을 아우를 수 있는 지위였지만 임용한 교수가 유튜브에서 지적한 대로 당시 서경유수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임용한은 유수가 궐석이었거나 감금당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니면 관행 중 하나로서 재상이 개경에 머물면서 겸직했을 수도 있다. 서경유수는 경우에 따라 현지에 부임해서 임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고, 개경에 머무르더라도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유수 부재 시에도 부유수가 유수를 대체하지는 않았다. 부유수의 공문 등급은 경우에 따라 원래 부유수급에게 적용되어야 할 등급보다 한 단계 더 깎일 정도로 유수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170] 공문 서식상으로는 부유수보다 낮은 도순검사였던 강조를 거란 측에서는 유수로 오인한 것을 볼 때 당시에는 두 나라의 유수 권한이 달랐을 수도 있다. 다만 고려사 강조 열전에 기록된 강조가 도순검사 이전에 임명된 관직(중추사, 우상시)이나 고려사 백관지에서의 서경 부유수의 품계를 비교하면 다른 이들은 몰라도 강조같은 경우에는 원종석보다는 좀 더 윗 서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종석은 유수 명의 또는 권한을 획득 내지 탈취한다든가, 유수관 속관을 제외하면 서경 내의 모든 행정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171]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소손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소손녕은 승천태후의 조카이자 부마였는데, 병석에 있던 소손녕을 위해 승천태후가 보낸 궁녀와 소손녕이 간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진노한 승천태후는 소손녕에게 사약을 보내 사사한다. [172] 상술했다시피 강감찬이 이때 사신으로 간 것 자체가 픽션이므로 사신으로 가서 일어난 모든 일이 따지고 보면 픽션이기는 하나, 그것과 별개로 사료에 기록된 이름 없는 사신이 소배압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173] 축소라기보다도 슬로우 모션으로 지채문 포함 몇 명이 싸우는 걸 꼴랑 몇 초 보여주고 나머진 전부 전령의 대사로 때워서 전투라고 할 만한 게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 [174] 드라마에서도 설정상으론 실제 역사와 비슷한 흐름일 가능성이 있다. 직전에 지채문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한창 이기고 있다는 듯 기세 좋은 태도로 전진하고 옆에서 "너무 깊이 들어간다"며 걱정하는 대목이 있다. 즉 드라마에서도 한 번 승리하여 적을 추격하는 상황이었으나 너무 깊게 들어갔고, 매복한 궁수대에게 당했다고 볼 수 있다. [175] 사실 탁사정, 지채문, 대도수 이외에도 완항령 전투의 영웅 중 한명이자 지채문과 같이 싸웠으며, 차후에는 여러 고위직에 임명되는 장군 이원도 있었고, 이원처럼 지채문과 함께 했으며 훗날 병부상서가 되는 대장군 정충절같은 이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원은 지채문과 함께 있다 마탄 전투에 휘말린 듯 서경 대신 개경으로 와서 현종의 몽진 호종을 자청했다가 사라졌고, 정충절은 당시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다른 상급 무신들처럼 서경 외에 있었거나, 서경 내에 있었어도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76] 다만 이후 극중에서도 묘사되었듯 양규가 곽주성의 거란군을 전멸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양측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 성종이 곽주성을 믿고 서경을 떠나 개경으로 향했다가 뒤늦게서야 고려군의 곽주 탈환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177] 참고로 원작과는 반대되는 행보인데, 원작에서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정은 성상께서 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현종은 몽진이 항전의 수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여 강단 있게 몽진을 결심하며, 이에 조정 신료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하지만 강감찬이 성상이 결정하셨으니 우리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하자 모두 수긍한다. [178] 『요사』 권115 열전45에 실린 이국외기에는 개경 서쪽에서 마주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 『요사』 기록은 대체로 여러 날짜에 걸쳐 일어난 일을 한 기사에 뭉뚱그리는 경향과 함께 선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 날짜에 여러 날짜의 기록을 넣는 것은 『고려사절요』도 마찬가지지만 『고려사절요』는 간지와 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고 사건이 자세하다. 그러나 『요사』는 사건이 자세하지 않다. 요사에서 제2차 여요전쟁과 관련해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서경 포위 5일 뿐이다. 이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1) 소배압과 야율분노의 거란군이 개경에서 고려군을 마주치고 패퇴시켰다. 2) 현종이 몽진했다. 3) 개경을 함락했다. 이 3가지 팩트의 단순 나열인데 1)과 2)는 해석에 따라 끊거나 이어 읽을 수 있다. 3)의 경우 본기 기록 특성상 문장에서 성종의 행위를 가리킬 경우 주어가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고려사』 기록과 비교하여 시점과 주어를 찾아야 한다. 3)의 경우 『고려사』 기록에서 확인되는 야율융서의 개경 진입 이전에 창화현까지 넘어온 거란 선봉군인 소배압과 야율분노의 군대가 개경의 군대를 깨고 그대로 지나쳐 온 것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180] 요사』는 거란 멸망 수백년 후에 원나라가 편찬했고 같이 편찬된 『 금사』나 『 송사』와 달리 원전 사료가 다른 두 나라 보다 더 없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 사실 거란은 정사서를 지은 원나라에게 망한 게 아니라 원나라가 세워지기 백여년 전에 금나라 송나라에게 망했는데 이들은 거란이 망한 이후 거란의 정사서를 쓰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원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수백년간 정사서가 쓰이기 않아 원전 사료가 산일되어서 원나라가 직접 멸망시키고 원전 사료를 획득한 다른 두 나라보다 사료가 부족하고 불명확해진 것이다. 이런 사료문제에 더하여 고작 1년안에 날림으로 편집하여 편찬하는 바람에 요사는 중국전통역사서인 24사 중에서도 가장 오탈자 많고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아 최악의 역사서로 꼽힌다. [181] 원작 소설에서는 이를 각색하여 백행린의 부대가 예상보다 빨리 온 거란군을 잠시나마 막는 동안에 강감찬이 남아있는 20여명의 관리들을 모아 젊은 이들 중 김종현 등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00여명의 군사들로 최대한 거란군의 남하를 지체시키도록 하며, 그마저도 감악산으로 가는 수천의 부대만 바람과 눈보라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 참고로 원작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정사의 기록 외에 유일하게 추가된 강감찬의 활약이다. [182] 효은태자의 장남 왕림은 현종 재위기에 유진의 뒤를 이어 상서좌복야를 지냈으며 부친의 동양군 봉호 또한 물려받는다. 차남인 왕정 또한 동시기에 조정에서 일하며 사후 온결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왕경수라는 이름의 아들까지 남겼고, 이 왕경수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양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183] 아울러 현종조 과거에 급제한 왕총지라는 인물 또한 태조 왕건의 증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왕총지의 조부는 왕유라는 인물로 왕건의 수많은 아들 중 하나이자 국초 '원보'라는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왕단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아울러, 개성 왕씨에서 강릉 왕씨로 본관을 바꾸어 분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 본관을 바꾸었는지 명확히 기록된 바는 없으나, 광종조의 무자비한 숙청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분적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왕총지가 종친이라면 누구나 적용되는 음서가 아닌 과거를 통해서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 개성 왕씨에서 분가된 지 오래되어 종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왕총지는 현종조 과거 급제를 계기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였고, 이후 조정의 명신으로 자리매김하여 문종조에 문하시중, 중서령까지 지내고 1067년 사망하였다. [184] 개경에 궁인들이 남아있다가 거란군에게 당한 것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 고려 왕실을 호위하거나 섬기던 사람들이 겨우 50여명이 전부일리는 없기 때문이다. [185] 사실 이전부터 서경의 장군들이 점을 쳐서 보니 길조가 나와서 고려군이 서경을 지킬 수 있었다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서부터 돌풍이 불어 거란군의 진공이 하루 지체된 일도 묘사되지 않아 아무래도 천재지변은 개연성을 위해 삭제한 듯하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그저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양규가 보는 장면으로 나올 뿐이지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186] 기록이 부족한 곽주 탈환전은 고려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거란군이 지키는 성을 탈환한다는 특성상 어지간한 영화 시나리오는 능가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펼쳐졌을 테니 후대의 입장에선 아쉬울 뿐이다. 고려실록이 현존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187] 양력으로 환산하면 1011년 2월 9일에 해당한다. [188] 다만 양규가 곽주성의 거란군을 전멸시켰던 만큼 양측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뒤늦게서야 고려군의 곽주 탈환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189] 현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주, 유배에서 풀려나온 하공진과의 만남, 서경으로 향하는 거란의 사신을 발견하고 뒤쫓아 양규 등의 서북면 고려군에게 진실을 밝히는 장면 등이 있다. 참고로 원작에선 양규가 회군하는 거란군으로부터 자신이 구한 포로에게서 현종과 서경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된다. [190] 원작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초반부에 빠지지 않고 묘사되며, 흥화진의 군사들이 항복할 의향이 없음을 알자 야율융서는 약간 실망하면서도 그들의 기개에 감탄한다. [191] 제2차 여요전쟁 이후이자 고려 건국 100주년인 해이며 거란의 3차 침공(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한 그 해( 귀주대첩 1년 전)이며 원정왕후가 이 때 세상을 떠난다. [192] 야율분노 또한 국성인 야율씨를 쓰기에 공신의 자손이거나 방계 황족의 자손일 가능성은 있다. 다만 당시 황제인 야율융서와 무려 3중의 혈연 관계로 얽혀 있었던, 즉 황제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소배압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193] 국인은 의례용이나 기념/보관용으로 제작되는 '어보'와 달리 외교나 내정 등의 실무에서 활발히 사용되었던 인장이다. 기본적으로 천자국의 인장은 '국새' 또는 '옥새'로, 제후국의 인장은 '국인' 또는 '금인'으로 불렸으며 국인의 경우에는 제후국이 상국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다만 내적으로는 천자국을 표방한 고려답게, 여진/일본 등 제후국과의 외교, 그리고 내부 행정에 있어서는 상국에서 하사받은 국인이 아닌 고려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인장을 사용했다고 하며 그 이름을 천자국의 격식에 맞게 '옥새'라고 명명하였다는 사실이 정종(3대)조, 숙종조, 예종조, 인종조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천자의 명, 즉 '조칙'을 내릴 때 사용하는 '서조보(書詔寶)'라는 인장을 별도로 제작해 사용했다는 기록 또한 고려사 여복지에 남아 있다. [194] 링크 내 '고려국왕지인'이 찍힌 문서는 1389년(고려 창왕 1) 치러진 과거에서 '병과 3인(丙科 第三人)'으로 급제한 최광지(崔匡之)의 홍패로 202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고려국왕지인'이란 인장은 조선 개국 후에도 잠시 사용했다가 1393년(조선 태조 2) 명에 반환되었다. [195] 재위 중인 양국 황제의 나이에 따라 형과 동생을 정하는 방식이다. 즉 양국 황제의 즉위와 붕어 시점에 따라 언제든 형제 서열이 바뀔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였다. 이러한 형제 관계는 차후 한반도 왕조와 중국 정복 왕조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금이 요를 몰아낸 이후, 금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형제 관계를 맺자는 국서를 보내며 '자신이 더 연상이니 형'임을 명시했고, 정묘호란 이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인조와 형제 관계를 맺으며 역시 '자신이 더 연상이니 형'임을 명시한 바 있다. 물론 맺어질 당시에는 동등한 형제 관계로 출발했지만 차후 힘이 더 강해진 금과 청은 고려와 조선에게 군신 관계라는 수직적인 관계를 요구했고 정복 왕조의 국력에 밀린 고려와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6] 해당 회차 방영일인 2024년 기준으로 약 200km에 육박(고속도로 및 자동차전용도로 이용을 제외하고 가장 빠르게 이동할 경우)하고,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이다. [197] 인천 이씨 시조인 이허겸의 딸로서 이후 인천 이씨는 김은부의 이 일을 본받아 이자연이 문종에게 딸 셋을 시집보낸 일을 계기로 고려 최대 문벌 귀족으로 성장한다. [198] '복흥사 경덕국사 묘지명(福興寺 景德國 師墓誌銘)'에 따르면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으로 의천이 출가했을 때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고 한다. [199] 김은부의 차남인 김난원의 묘지명에 언급된 나이를 보면, 김난원은 999년(고려 목종 2)에 태어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나머지 자녀들의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200] 드라마를 보면, 세 딸은 성인 배우가 열연하는데, 아들들은 아역 배우들이다. [201] 20여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에서도 유 장자(유천궁)가 자신의 딸에게 당시 나주 공략을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왕건의 '시침'을 들게 했다. 또한, 이 드라마의 5회에서도 김은부가 공주를 방문한 행영도병마판관 황보유의에게 "늦었으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는가?"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바 있었는데, 만약 황보유의가 당시 김은부의 집에서 묵었다면 황보유의 또한 김은부의 딸 중 한 명에게 시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02] 고려사에선 야율융서의 구체적인 의도는 언급되지 않고, 애전에서 거란군 한 부대를 습격하여 전투를 벌인 직후 야율융서의 본대가 나타나서 마지막 혈투를 치르고 전사했다. 이 부분을 드라마에서는 아예 함정을 위한 미끼 부대를 보내고 본대로 양규 부대를 치는 방향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실제 역사에서도 양규의 게릴라전이 거란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고 일부 부대와의 전투 직후에 본대가 나타난 것을 보면 이러한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사료에는 남아 있지 않다. [203] 기록에 근거하여 유추한다면 양규는 궁기병 간의 교전 끝에 전사했거나 거란의 궁기병들에게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사한 곳이 오히려 장애물이 많은 산악지형이었어야 작중 묘사처럼 거란이 작정하고 궁병으로 둘러 싸 온 몸에 화살이 박혀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사한 곳이 애전艾田이므로 들판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연출이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다. [204] 진짜 과장은 김숙흥의 경우다. 실제로는 그로기 상태가 아니라 즉사했을 것이다. 둔기의 경우, 살 뿐만 아니라 뼈가 버티지 못한다. 철갑옷은 날붙이와 화살을 막아줄 뿐이고, 통으로 이어진 투구에 가한 둔기의 충격은 오히려 진동이 더 증폭될 수 있다. 도끼의 경우도 날 뿐만이 아니라 둔기로서의 효과가 더해진다. 괜히 고구려가 갑옷 대신 방패로 보호장비를 간소화한 부월수를 편제한 것이 아니다. 도끼나 철퇴를 든 경보병이 중보병 및 낙마한 중장기병의 근접 카운터였기 때문이다. [205] 여담으로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한창 싸우던 고려 결사대가 들고 있던 환두대도가 전투 와중에 휘어버리자 신경질을 내며 집어던지고는 단검을 꺼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실제 역사의 전투에선 빈번하게 나오던 광경이다. 이러한 이유로 냉병기 시절의 전사들은 주 무장 외에도 다른 부 무장을 여럿 장비하고 있었다. [206] 기록으로 살펴보면 이 전투로 거란은 장족(귀족)과 병졸, 수레도 돌아간 것이 드물었고, 관속들 태반이 전몰하면서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결원을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 될 정도로 큰 피해를 받았다. 드라마에서도 몇 만이 죽었다고 언급되지만 전투 스케일이 작아 실감이 안 나고, 야율융서나 소배압에게서 다급함이 느껴지지 않다 보니 고려군의 활약 및 거란군의 피해가 대단치 않은 느낌을 준다. [207] 고려의 적폐인 호족 세력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였다. [208] 아래의 언급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 위주로 언급하되 드라마에서 전전승지 양협이 밝히지 않은 인물들은 각주로 따로 언급한다. [언급] 드라마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 [211] 그 전날 탁사정이 강조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언급] [213] 물론 그는 이후 상서우복야에까지 오르고 초상이 공신각에 그려지는 등의 영예를 누렸다. [214] 2차 여요전쟁이 1011년 3월에 끝났고, 국지전을 제외한 본격적인 3차 여요전쟁은 1018년 12월에 발발하였으므로 7년 9개월 정도 걸렸다. 그리고 현종대 군현제가 확립된 게 3차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018년 시기였으므로 실제로 7년 정도 걸렸다. [215] 장연우는 처음에 이런저런 사정을 들며 미적대다가 현종과 맞닥뜨린 뒤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고 어명을 받들겠노라고 고하는 코믹스러움을 보여준다. [216] 다만, 원정왕후 본인도 은근히 신경쓰였는지 차후 유진을 불러 현종이 김은부를 등용한 이유에 대해 묻고, 유진이 '김은부의 여식이 폐하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았으며, 폐하 또한 김은부의 여식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이니 그 일로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자 내심 안도하기도 한다. [217] 원정왕후의 모친인 문화왕후는 호족 출신의 신료 김원숭의 딸이며 원화왕후의 모친 연창궁부인 또한 호족 출신의 신료 최행언의 딸이다. 흔히 성종이 고려 최초로 족외혼을 한 국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최초로 족외혼을 한 국왕은 혜종으로 병부령 임희의 딸을 정비로 맞았으며 그 다음 국왕인 3대 정종 또한 박영규의 딸을 정비로 맞아 각각 자식들을 두었다. 물론 임희와 박영규는 고려 건국과 삼한일통에 크게 일조한 개국공신이며, 일개 호족인 김원숭과 최행언 등과는 수준이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아울러 혜종과 정종이 막 성년이 되었을 때는 태조 또한 후비로부터 딸을 많이 보기 전이었으므로 혜종과 정종에게 당장 결혼시킬만한 이복여동생도 많이 없었기에 개국공신의 딸을 배필로 맺어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을 것이다. [218] 대화 당시의 시점이 제2차 여요전쟁으로부터 1년 지난 시점임이 소배압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219] 실제로 강감찬의 아버지인 강궁진은 삼한벽상공신 중 한 명이다. [220] 극 초반에는 지채문에게 멱살을 잡혀 나가 떨어진 것은 물론 그의 칼에 베일 뻔 했고, 지채문을 말리던 강감찬 역시 이후 현종에게 탁사정의 엄벌을 요청했다. 그리고 극 후반에는 제2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한 대도수와 양규의 처가 함께 불공을 드리던 현종에게 "탁사정을 벌하여 달라"면서 눈물로 간청하기도 했다. [221] 드라마상으로도 강조의 반역 때 그에게 찬동하여 무혈입성을 도왔던 만큼, 이 사실을 문제 삼으면 구실도 만들 수 있다. [222] 조선 초 이숙번이 좌습유를 역임한 바 있다. [223] 태조 왕건의 첫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와 제6비인 정덕왕후 류씨는 '정주 류씨', 제2비인 장화왕후는 '나주 오씨',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는 '충주 유씨', 제4비인 신정왕태후는 '황주 황보씨', 제5비인 신성왕태후는 '경주 김씨'이다. [224] 대사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효숙왕태후(헌정왕후)의 고향은 황주이며 원정왕후의 외가는 선산이다. 다만 효숙왕태후의 경우, 본관만 황주를 따랐을 뿐 생전 대부분 거주한 곳은 개경이기에 엄연히 따지면 고향이 황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효숙왕태후의 할머니 신정왕태후의 고향이 황주이기에 왕후가 되기 전 개경과 황주를 오가며 기거했을 가능성은 있으며, 전작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효숙왕태후가 입궁 전에 줄곧 황주에 기거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225] 어사대에서 전쟁 당시의 죄로 인해 파직된 관리들에 대한 소위 '살생부'라는 명단의 리스트를 만든 뒤 각 관리들을 자택에서 억지로 끌고 나와 업무에 복귀시키는 방법을 취했는데 마치 현대의 '캐비닛 정치'와도 매우 유사하다. [226] 다만 유진은 "나는 개경에 상경한 지 오래되었기에 충주와는 크게 인연이 없다."고 웃어넘긴다. [227] 극중 성종에 대해서는 등장인물들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며 은근히 평가가 좋다. 극 초반, 김치양과 이주정은 '성종이 팔관회와 연등회를 없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말한 바 있으며, 김은부의 장녀 김씨 또한 '성종이 거란과의 전쟁에서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했다'고 말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 군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 있다. [228] 사실 광종과 경종에 대해서는 유진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최승로가 성종 즉위 이후 쓴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에 담겨있으며, 이 중 광종에 대해서는 전작인 제국의 아침에서 드러냈다. [229] 원정왕후와 유진이 김은부에 반대하여 그를 몰아내고자 시도하며, 강감찬 또한 취지는 다르지만 김은부가 제대로 된 처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상소를 올리게 된다. [230] 처음에는 사신으로 온 김은부를 무난히 보내주는 듯 했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뀐 요 성종이 친거란 여진 부족을 이용하여 국경을 넘어가려던 김은부를 잡은 뒤 다시 거란으로 끌고 와 수개월 동안 억류했다는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231] 호장 자제의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대신 은자를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어지는 병부낭중 최구의 표정으로 보아 조작된 증거로 보인다. [232] 이러한 국문 과정에서, 장연우가 오히려 김은부로 인해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고 변호하고 그러한 내막을 기록한 문서를 공개하기도 하지만 유진의 기세에 밀려 변호를 이어나가지 못한다. [233] 현대에는 페니실린 등의 항생제가 있어 폐렴을 쉽게 치료할 수 있으나, 중세에는 폐렴에 걸리면 치료가 쉽지 않아 치사율이 높았다. [234] 금주에 도착하자 금주 가문의 호족 대표 내외가 강감찬을 맞이하는데, 그 호족 대표는 지난 17회에서 박진을 비롯한 전국의 호족 대표들과 함께 조정의 호족 개혁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던 인물로 이후 21회에서 강감찬을 가리켜 '조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정황상 강감찬의 숙부거나 친척 어른으로 보인다. [235] 사실 현재의 '시흥시'는 이름만 빌려왔지, 과거의 '시흥'이라 불렸던 '금천' 지역과 확연하게 다르다. 자세한 건 시흥군 시흥시/역사 문서 참조. [236] 이후 2008년 관악구의 행정동을 개편하면서 기존 '봉천본동'과 '봉천1동'~'봉천11동'으로 불렸던 명칭을 변경하는데, 이 중 기존 '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합쳐서 강감찬의 아명(兒名)인 '은천(殷川)', '봉천7동'을 강감찬이 태어난 '낙성대(落星垈)', '봉천11동'을 강감찬의 시호인 '인헌(仁憲)'으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강감찬이 실제 태어난 곳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한 낙성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자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237]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중서성과 문하성 관청이 분리되어 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다만 중서성과 문하성이 사실상 합좌 기관의 성격을 띄는만큼 양 기관의 관청이 가깝게 붙어 있는 걸로 묘사되기는 한다. [238] 대내외적으로 일관되게 제후국을 표방한 조선의 경우에는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 국왕이 홍포를 착용하였다. [239] 본래의 칭호는 왕비이나 극중에서는 고려의 외왕내제 천하관을 차용하여 '황비'라는 대사와 자막으로 처리되었다. [240]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의 7대 임금. [241] 丙辰, 해당 일의 간지이다. [242] 이같은 현종의 모습은 과거 야율융서가 고려 침공을 위해 '강조의 정변에 대한 치죄'라는 명분을 만든 모습과 클로즈업된다. [243] 예외적으로 현종의 경우에는 절일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현종이 자신의 가족사와 그로 인해 부모가 겪었던 고통 등으로 인해 본인의 생일을 기리는 날을 지정하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종 이후 12대 순종(현종의 3남 문종의 장남)의 경우에는 왕태자 시절의 절일만 존재하고, 즉위 이후 일찍 붕어함으로 인해 국왕의 절일은 제정되지 않았고, 14대 헌종의 경우에도 숙부 숙종의 압박으로 조기 퇴위함으로 인해 국왕으로서의 절일이 제정되지 않았다. [244] 이 반란은 사실 절도사의 잘못된 통치에 원한이 깊은 몽골인들이 절도사를 살해하고 일으킨 아리저의 난으로서 비록 이는 초동에 제압되지만 세력은 계속 남았다. 12월에 일어난 반란의 규모는 그야말로 대단해 한 달 만에 서북로 통치의 핵심이 되는 진주가 몽골계 부족인 타타르에게 포위당해 초토사인 소도옥이 진주에 갇혀 있을 정도였다. [245] 이 내원성과 보주성은 오늘날 평안북도 의주군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여요전쟁 이후에도 고려의 영토가 되지 못하다가 16대 예종 때인 1117년 당시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대항하기 어려웠던 거란(요나라)의 장수가 성을 고려에게 넘기고 그대로 달아났다. 여담으로 흥화진이 오늘날 의주군 위원면(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피현군)에 자리잡았고, 내원성과 보주성은 오늘날 의주군 의주읍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46] 물론 심장과 간을 빼내는 건 잔인하기 때문에 형틀에서 거란군이 둘러싸여 빼내기 전 "나는 고려인이다."라고 말한 후 바닥의 멍석에 피가 흘리는 장면으로 처리했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에서는 형틀에 묶인 채 거란군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된 채 죽었는데, 실제 행적을 보면 이 드라마가 맞다고 볼 수 있다. [247] 드라마에서 22회에 하공진과 소배압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소배압은 "왜 남경으로 가지 않느냐?"라면서 나름 의심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담으로 거란(요)의 남경은 오늘날의 베이징이다. [248] 김은부가 거란에 사신으로 간 건 1011년 11월 13일(음력)이었고, 하공진이 거란에서 죽은 건 1011년 12월이었다. [249] 극중 채충순이 초기에 맡았던 관직이다. [250] 추가로 문신이 도통사나 병마사와 같은 총사령관급이 아닌 무신계 관직에 임명된 것도 유방이 형부상서로 임명된 현종 7년에 중추사 겸 상호군으로 임명된 김은부가 최초인 것을 보면 김훈, 최질의 난으로 인한 무신 수의 감소 등의 이유로 그 시점에서부터 관직 제도가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251] 만약 '할지론'대로 했다면, 고려는 서경 이북뿐만 아니라 자칫 수도였던 개경은 물론 지금의 서울 지역까지 내줄 뻔 했고, 서희도 이렇게 거론하면서 할지론에 반대했다. [252] 김종현은 『고려사』 열전조차 없고, 강감찬 열전에 귀주대첩 당시를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253] 3차 여요전쟁의 마지막이자 이 작품의 최후반을 장식할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 김종현이 병마판관을 맡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서사를 미리 부여하려는 의도로 유추된다. [254] 나나이족은 청나라의 변발 양식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변발이 필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본작의 여진족 추장들도 금전서미 형태의 변발이 아니라 치렁치렁하게 땋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255] 현재 함경남도 영흥군 지역으로 고려의 동북쪽 최전선이었다. 훗날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기도 하다. [256] 원작 소설에서는 실제 사실을 반영하여 1010년대 초반의 고려의 중앙군은 6위만 소개되었다. [257] 이는 지난 전쟁 당시 소실된 실록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 자세한 건 이 문서의 '20회 단락' 참고. [258] 1013년 1월에 거란에 사신으로 갈 때 관직이 '중추사'였다. [259] 물론 이후에 언급되지만, 장연우가 반란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이후 파직, 유배에 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채충순과 강감찬, 두 사람이 반란 와중에 중추사로서 남는다. [260] 실제 1012년에서 1014년까지의 『고려사』 기록을 보면, 거란과의 관계 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여러 이상 재해와 관련된 내용이다. [261] 사실 이렇게 실제 기록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고, 본 드라마에서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상황이 순서를 뒤집은 경우가 많다. [262] 물론 '금오대'는 '사헌대(司憲臺)'로 개칭되는 과정을 거쳤는데, 사실은 '사헌대'에서 '어사대'로 바뀐 것을 '금오대'라고 부르다가 다시 '사헌대'를 거쳐 다시 '어사대'로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263] 물론 척준경도 이후 반란 당시 행적에 대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유배를 당했다. [264]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건 '『고려사』' 문서 참조. [265]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면서 몽골과 강화를 처음 한 원종이 태자 시절 몽골에 입조한 이후 그의 아들인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의 국왕들은 왕자부터 원에 입조했고, 국왕이 된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원 조정에 호출되어 문책을 받거나 폐위, 복위를 반복했고, 심지어 귀양을 떠나거나 살해를 당하는 등의 수난을 겪었으며, 고려군 또한 원의 지시로 인해 일본 원정에 동원되는 등 몽골군의 하위 조직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266] 한 고조 유방이 운몽현에 순유할 때 초한쟁패에 큰 공을 세웠던 회음후 한신을 체포한 일을 뜻한다. [267] 물론 해당 밀지에는 토벌 명령만 있고, 계책의 내용은 없기 때문에 이자림이 서경에서 유방과 함께 계책을 준비하는 형태로 전개해 '이자림의 공'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268] 본래는 '청량사'라고 불렸다가 이후 이름이 두 번 바뀌었고, 현재의 이름은 광복 이후인 1966년에 붙어진 것이다. [269] 실제 여몽전쟁 이후 몽고(원)에 입조한 인물은 국왕이었던 원종이 자청해서 한 것이며, 당시 집권자인 무신 김준과 임연은 이러한 원종의 입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270] 여담으로 효은태자의 조카(효은태자의 형 효목태자의 딸) 중 한 명은 유방과 결혼했는데, 유방은 유금필의 후손(손자로 추정)이며, 효은태자 형제도 유금필의 외손(유금필의 딸 동양원부인 유씨와 왕건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5촌 ~ 6촌간 혼인으로 본다. [271] 검교태사 수문하시중 유진과 참지정사 최항, 내사시랑평장사 최사위, 중추사 채충순과 강감찬. [272] 이는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 < 천추태후>에서도 구현되었다. 특히나 당시 성종 역의 김명수가 황금 갑주를 입고 군사들을 독려하는데, 이번 작품의 현종 역의 김동준도 황금 갑주(전작인 <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 역의 주상욱이 조사의의 난 당시 착용했던 갑주)를 착용하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273] 해당 회차 후반에 소배압이 자기 휘하 장수들에게 고려를 설명하면서 "거란이 이미 고려를 5번 침공하였다."는 언급을 했는데, 이는 993년(제1차 여요전쟁), 1010년(제2차 여요전쟁)에 더해 이 시기 3년 연속으로 침입한 것을 말한다. [274] 그는 사후인 1016년 1월, '상서우복야 상주국(尙書右僕射 上柱國)'으로 추증했고, 그 아들 정균백(鄭均伯)을 낭장 겸 상승봉어(郞將 兼 尙乘奉御)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275] 이 부분은 사료로 언급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제3차 여요전쟁의 2번 문단 전체를 참고. 여담으로 이 시기 고려는 거란뿐만 아니라 일부 강경파 여진도 상대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거란에서 많은 이들이 고려로 내투하기도 했다. [276] 이때 임명된 장연우는 같은 해 11월 23일 사망한다. 자세한 건 후술. [277] 1017년에 '태복경(太僕卿 - 왕명 출납 및 의복, 수레와 말 등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임명되었다고 언급출처 필요되었는데, 이는 족보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고려사』의 '세가'나 '열전'의 기록상에는 나오지 않는다. [278] 이전 '21회 단락'과 '25회 단락' 부분을 참고하면, 채충순은 1012년에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거란으로 사신으로 갈 때 '중추원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에 다시 '예부상서'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79] 기록상 조자기가 등장하는 마지막 부분인데, 드라마에서는 20회 이후 사실상 퇴장했다. [280] 재상들과 달리 절각복두에 홍단령이다. [281] 때문에 '27회 단락'에서 나왔듯이 드라마에서 반란 당시 화를 당한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282] 이전 호부상서를 맡은 장연우가 죽은 이후 맡은 것으로 보인다. [283] 궁에 들어온 큰 딸이 현종의 뒤를 잇는 왕흠(후에 덕종)을 1016년 5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받은 것으로 보인다. [284] 둘째 딸은 후에 문종을 낳은 원혜왕후이며, 막내딸은 원평왕후가 된다. [285] '우보궐'은 중서문하성의 정6품 관직으로 간쟁·봉박(封駁) 등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의 헌납이 이에 해당한다. [286] 현재의 평안남도 안주시이다. 『고려사』 기록. [287] 해당 면의 글씨는 채충순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288]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고려 황실은 4대 광종이 이복여동생인 대목황후 황보씨를 아내로 맞이한 이후 줄곳 '족내혼'을 유지했다. 이때 결혼하는 여인의 경우, 반드시 어머니이나 할머니의 성씨를 쓰도록 했다. [289] 태조 왕건은 기존의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므로 무조건 족외혼을 통해 후손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현종은 기존 고려 왕실의 대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끊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족외혼을 통해 후손을 늘리는 것이 국왕으로서의 책무였다. [290] 당시 병부시랑인데, 드라마에서는 해당 회차 최후반에 등장한다. [291] 이 문서의 '12회 단락'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사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주요 사건들의 배경은 늦가을 ~ 겨울철인데, 드라마 초반은 사전에 미리 제작했기 때문에 녹음이 짙은 여름철에 나온 장면들이 많았다. [292] 그나마도 '학익진'만 집중적으로 알려졌는데, 해상전은 함포 사격을 통한 접근거부가 기본 방침이었고, 육상에서는 야전보다 공성전과 게릴라전이 더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293] 두터운 보병대가 적의 앞을 막아주고(모루) 날랜 기병대가 적의 뒤를 기습하여(망치) 양동하는 전술 [294] 삼교천과 자주에서 거란군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탄에서 조원의 고려군에게 당한 거란군이 1만 정도라는 기록으로 보아 소배압이 10만 정도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는데, 개경에 다다를 무렵에는 8~9만 정도 남은 것으로 보인다. [295] 음력상으로 보면, 1019년 1월 3일에 해당한다. [296] 고려사』에는 '소손녕'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소배압'이다. [297] 물론 이 시는 100% 우중문을 비롯한 수나라 군대 전체를 조롱하는 의도가 분명하다. [298] 실제로 사료에 거란군이 회전에 임한 구체적인 계기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고려군이 먼저 진을 치고 이를 본 거란군이 나와서 대회전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평원에서의 전투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왔다는 관점이 있다. [299] 동서방향이 반대고, 가로세로길이가 반대고, 고려거란 군세가 반대다. [300] 극중 전개를 따라 검차1진이 양 옆으로 웅크러들며 후퇴했으나, 중갑기병대가 북방에서 등장하자 다시금 용기내어 학익진으로 변하고, 거란군이 석천을 힘겹게 건너 반령벌판으로 도망친다는 전제. [301] 작중 야율융서는 왜 승자인 고려가 먼저 화의를 청하느냐면서 자신을 조롱하느냐고 분노하는데, 실제 역사의 고려는 야율융서가 말하는 대로 승자로서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302]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현종이 지팡이와 의자를 내려주고 사흘에 한 번씩 출근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종종 조정에 나와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303] 1031년은 현종이 붕어한 해이자 덕종이 즉위한 해이다. 고려시대 당시에는 유년칭원법이 아닌 즉위년칭원법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원래대로라면 1031년은 현종 23년과 덕종 1년이 공존하는 것이 맞다. 다만 유년칭원법이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사관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역대 고려 임금들의 즉위년과 붕어년(훙년)을 세는 기준을 바꾸었고, 이는 1031년은 현종 22년(덕종 즉위년)이 되었으며 1032년부터를 덕종의 치세인 덕종 1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304] 현재 연호나 시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인 일본의 경우에는 과거 고려가 그랬듯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하여 군주가 붕어한 바로 다음날을 새로운 군주의 치세가 시작하는 날짜로 보고 있다. 만약 조선의 유년칭원법대로였더라면 전임 군주가 붕어한 연도는 해당 군주의 연호와 시호로 기록되고 신임 군주는 그 다음 연도부터 정식으로 1년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