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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0:58:33

임용한

<colbgcolor=#003863><colcolor=#fff>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임용한
林容漢
파일:임용한 역사학자.jpg
이름 임용한(林容漢)
출생 1961년 12월 9일 ([age(1961-12-09)]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거주지 세종특별자치시
학력 마포고등학교 ( 졸업)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 신학 / 학사)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 사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 사학 / 석사[1])
경희대학교 대학원 ( 사학 / 박사[2])
경력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공군사관학교 강사
경희대학교 강사
광운대학교 강사
현직 現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소장
엠키스 강사
삼성 SERICEO 강사
별명 삼국지 아저씨, 전쟁민수[3]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유튜브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임용한TV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인문채널휴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사피엔스 스튜디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건들건들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차이나는 클라스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EBS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캐내네 스피치

1. 개요2. 전쟁사 관련 주요 견해 및 저술 활동3. 저서4. 출연 및 강의
4.1. 과거 출연
5. 논란6. 기타7. 어록8. 출연 프로그램
8.1. 방송8.2.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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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역사학자. 1980년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에 진학해[4] 졸업하고, 이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로 다시 입학하여[5] 학부를 2번 졸업했다. 1991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8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 공군사관학교 강사, 한국 군사 사학회 이사와 한국 경영사학회 기업사 연구회 부회장을 겸임하면서, KJ인문경영연구원(한국역사고전연구소)의 대표를 맡아 운영하며 각종 오프라인 강연과 국내 및 해외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인문채널휴 유튜브 채널에서 '임용한의 전쟁사', '유튜브 한국사', '인문학 특강' 등의 컨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국방TV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 8시에 방영하는 토크멘터리 전쟁사[6]에 고정 출연 중이고, 최근에는 순삭밀톡, 삼국지뒤집기에서 단독진행을 맡고 있다. 2018년 7월부터 팟빵에서 임용한 이세환의 비디오가게라는 전쟁영화[7]를 리뷰하는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다가 2019년 2월에 유튜브[8]로 플랫폼을 옮겼다.

그 외에도 SERICEO에서 <전쟁과 경영>,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강연을 하였고, 동아 비즈니스 리뷰(DBR)에서 <전쟁과 경영> 칼럼, 이코노미 조선에서 <WAR&STRATEGY> 칼럼, 동아일보에서 < 임용한의 전쟁사>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각종 지상파 및 종편에도 출연하면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2. 전쟁사 관련 주요 견해 및 저술 활동

전쟁사 저작이 히트를 치면서 대중적으로는 전쟁사, 그것도 한국전쟁사 쪽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진 계기도 《전쟁과 역사》라는 한국 전쟁사 관련 서적 때문이다.[9]

의아하게도 그의 첫 번째 전쟁사 서적이었던 "전쟁과 역사1 : 삼국편 (2001년.혜안)"의 서문이나 후기를 보면 도리어 전쟁사를 집필할 계획이나 의도는 없었는데, "이 방면에 저술가나 연구자가 너무 없으니 니가 한번 해보라"라는 선배 및 지도학자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음을 회고하고 있다.

어찌 됐든 현재는 현실적인 통찰력과 예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그 누구보다 본질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색다른 시각이 신선한 충격을 준다.

신라 화랑은 우리가 흔히 배우듯 전체주의적으로 창설된 무사 집단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화랑이라는 정체가 다소 불분명한 집단은, 진골로 대표되는 특권/지배계층은 매우 협소하고 계급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고대신라의 고착된 신분제 하에서 차상위계층이 신분상승을 위해 전쟁에 투신할 수 있는 창구의 역할을 하였고, 이것이 작고 약하며 가장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대당강경파로 유명한 연개소문은 실제로는 당나라와의 평화를 추진하면서 일가의 직할지를 확보하기 위해 신라 침공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10]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독재정권에서 수반되는 내부적 갈등과 분열의 정황으로 보았다. 연개소문의 집권이 당 침공의 명분이 된 것뿐 아니라 고구려의 국방 약화로 이어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궁예는 단순히 미치광이가 되어 폭정을 저지르다가 쫓겨난 것이 아니라, 도적떼 두목에서 영역국가의 왕으로 발전해 나감에 따라 통치방법도 그에 맞춰 진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타락(?)의 원인을 지적했다.[11] 그 때문에 체계적인 국가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국정이 한계에 달하고 민심이 이반되자 의심이 늘어 왕건과 같은 최고위 장수를 조폭 충성 서약을 받듯 유치하고 험악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12] 심지어 자신의 처인 강비와 아들까지 죽이기에 이르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륵을 자처하며 종교적 권위와 관심법과 같은 초능력(!)에 의지하는 등의 폭정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인구는 몰리는데 강이 없어서 물류 운송이 불편하여 값이 안정되지 못하고 천정부지로 뛰는 철원을 도읍지로 정한 것부터가 궁예가 도적떼 두목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증거이며, 궁예가 민심을 잃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사딸라밖에 없는 이유가..

서희의 진정한 공은, 제1차 여요전쟁 소손녕을 세 치 혀로 정통성과 명분 싸움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13], 요나라( 거란족)의 침공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는 명분과 실리를 주어 소손녕을 철군시킨 것[14], 그리고 동시에 고려 청천강 이북 평안북도 지방을 확보하고 강동 6주라는 강력한 북방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후 지속되는 전쟁에서 고려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15], 거란의 3차에 걸친 침입을 물리친 최고 공로자는 서희라고 평가하였다.[16]
서희의 전기들을 보면 세 치 혀로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표현이 많은데, 그것이 오히려 서희의 공과 노력을 폄하하는 역할을 한다. 강동6주를 확보하고, 이 2년 동안 평안북도 지역 개척과 축성작업에 바친 서희의 노력이야말로 선구자적인 업적이었고, 역사적 값어치도 높았다.
만약 이 방어선이 없었더라면, 거란군이 이 난코스를 그냥 통과하고 청천강이나 서경 앞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더라면, 거란군은 몇 번이고 개경을 함락했을 것이고, 중부 이남지역까지도 손쉽게 진출했을 것이다.
보통 역사책에서 서희는 거란의 1차 침공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건 잘못되었다. 거란전쟁을 통틀어 최고 수훈자는 서희다. 서희가 확보하고 개척한 강동6주가 6번에 걸친 거란의 침공에서 고려를 구했다. 이 완고한 방어선과 험로가 없었다면 강감찬 귀주대첩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고려와 그의 후손을 구한 것이다. 더욱이 그의 외교적 승리는 국가적 외교정책이란 것이 없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값진 것이었다.[17]

윤관 오연총의 여진 정벌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도,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해설을 내놓았다. 별무반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군은 강해서 얼마 후에 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나라( 거란)와 북송을 멸망시키는 여진을 두렵게 할 정도로 잘 싸웠으나, 애초에 지형정보가 잘못되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동북 9성은 동서 방향으로 일자처럼 늘어서 있는데, 가장 먼 길주성의 출구쪽이 병목 지역이라 그곳만 막으면 동북 9성이 깊은 종심을 형성하는 방어선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막상 점령하고 보니 동북 9성 모두가 북쪽으로부터 여진의 공격에 노출되어 모든 성이 고립되었으며, 서로 구원하거나 후방 지원을 받기가 불가능하였다. 결국 고려는 수많은 위기상황을 간신히 버티다가 동북 9성을 반환하였는데, 여진도 고려군의 용맹함에 탄복하여 남은 고려인들을 해치지 않고 되돌려 보냈으며, 금이 건국된 후에도 고려를 침공하지 않고 중원으로 진출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진정벌 과정에서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일화들을 자세히 소개하여 그가 재조명받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연개소문, 왕건, 공민왕, 세조에 대한 비판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였다(연개소문에 관한 내용은 상술한 내용 참조). 왕건은 궁예와 견훤보다는 통치자로서 비교우위에 설 수 있었기에 후삼국의 최종승자가 되었으나, 후대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혼인정책과 후계대책으로 본인 사후 혜종- 정종- 광종- 경종으로 이어지는 왕실의 분열과 내홍을 낳았고, 그로 말미암아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행정망 및 동원체제를 갖추는 것이 매우 지연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게다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에 후방의 여진족과 고려를 손볼 것이 뻔한 북방의 라이징스타 거란족에 대해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기는커녕 만부교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불태우고 이를 국시로 삼았다. 결국 전국행정망이 정비되지도 않고 전쟁 준비도 안 된 상태로 개성 황해도의 직할 및 중앙세력만으로 힘겹게 싸우다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며, 최종적으로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상처뿐인 승리에 그치게 된 거란과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왕건을 지목하였다( 경종 다음 왕인 성종이 처음으로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거란전쟁은 바로 이 성종 대에 시작되었다).[18]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와 북로남왜라는 격변기에 반원정책과 왕권강화라는 기조는 제대로 잡았으나 너무 음험한 숙청과 배신의 정치를 반복하다가( 흥왕사의 변도 공민왕이 김용을 이용해 벌인 자작극으로 봤다) 정치는 나락으로 빠지고 본인도 살해되었다고 보았으며, 공민왕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부국강병보다는 중국 황제와 같은 전제왕권이었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선국왕이야기》에서는 세종대왕이 진정으로 위대한 군주였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세종의 노력과 장점은 정작 -그토록 세종을 치켜세우며 존경해 마지않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서 실종되어 있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세조는 문무겸비라고 자뻑이 강했는데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의 자질은 문종보다 훨씬 못했으며,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사고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왕권의 강화라는 것도 계유정난 공신들에게 과도한 권력과 특권을 몰아주고 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구조였고, 이것이 바람직한 구도도 아니었을뿐더러 훈구파를 대두시키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고려 현종을 재조명하였다. 그는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피를 동시에 가진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아이일 때부터 암살의 위험을 수차례 겪으며 강조의 정변으로 우연히 왕이 되고 나서 거란의 침공을 피해 나주로 파천을 하기까지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으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과 왕국의 주인이 되어 결국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던 이 근성의 인생역경은 신하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며 최충 이제현의 평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 큰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현종은 1031년 5월에 사망하였는데, 왕위에 있은 지 22년째 되는 해였지만 그때 나이가 겨우 40세였다. 현종의 삶과 승리는 그를 따르던 신하들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현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던 문헌공도 최충은 현종의 죽음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국사를 바로잡은 뒤에는 거란과 화친을 맺어 군사들을 쉬게 하고 문학에 힘쓰며 부세와 요역을 경감하며 재주 있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를 공평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안팎이 무사하였으며 해마다 농사가 잘 되었으니 그(현종)를 주나라 성왕, 강왕 한나라 문제, 경제에 비기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후세의 대유학자 이제현 최충의 글에 뒤이어서 보다 간결하게 자신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노라."[19]

그가 처음 《전쟁과 역사》 시리즈를 냈을 시기[20]는 한국 대중역사서 시장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때였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저서는 그의 《전쟁과 역사》 시리즈가 거의 유일하다시피했을 정도. 2012년 12월에 기존 《전쟁과 역사》 1권 삼국편의 개정증보판인 《한국고대전쟁사》 3권을 완간했다.

전투를 복기하여 서술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다른 책들은 그냥 1차 사료에 나와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다 읊는 수준이고, 1차 사료도 두루뭉실하게 기록되어 있어[21] 전투의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반면, 그는 사서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단서나 현장답사에서 얻은 지형 정보를 토대로, 그리고 합리적인 전술적 추정을 더해 입체적으로 전개 상황을 서술하기 때문에 이해가 쉽고 재미있다. 《조선국왕이야기》 1권에서 나하추의 고려 침공 때 이성계가 맞서 싸웠던 함관령 전투나 왜구와의 황산대첩, 《전쟁과 역사》 2권에서 제2차 여요전쟁 통주 전투와 평양성 전투, 거란 3차 침입의 귀주대첩, 《전쟁과 역사》 3권에서 묘청의 난의 평양성 전투, 몽골군과의 귀주성 전투, 그리고 충주성 전투는 그야말로 압권.[22]

전쟁사 뿐 아니라 정치 및 권력구도, 제도 등 일반적인 역사 전반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서도 남다르다. 피상적인 현상에 주목하기보다 항상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물음을 던지고 그 원인을 분석해서 교훈을 준다. 《한국고대전쟁사》에서 통일전쟁기 신라의 복잡한 권력구도와 그 한계, 그리고 거기서 찾을 수 있는 화랑의 의의와 역할에 대한 설명, 《전쟁과 역사》에서 고려 최씨 정권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여몽전쟁의 추악한 민낯에 대한 고발, 《조선국왕이야기》에서 여말선초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과 각 국왕들의 개성 및 각종 제도에 대한 분석, 《시대의 개혁가들》에서 수많은 개혁가들이 부딪쳤던 현실과 시대적 한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위에 서술된 궁예, 서희, 왕건, 공민왕, 혜종, 세조, 중종 등에 대한 비평 등등. 그의 진가는 그의 저서를 읽어야 알 수 있다.

《시대의 개혁가들》에서 서술했던 박제가에 대한 평전을 아예 새로 쓴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도 출간하였는데, 불만투성이 국까 서얼 실학자로만 알려져 있던 박제가의 불우함 속에 빛나는 남다른 비범함,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조선 사회의 고리타분함과 답답함, 가난함을 매우 인상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에서는 에파미논다스 알렉산드로스 3세에서부터 한니발 바르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칭기즈칸 척계광을 거쳐 에르빈 롬멜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 명장들의 전쟁과 전투를 집필하면서 우리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교훈들을 함께 서술했다.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와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에서는 유명했던 전쟁과 전투에서 얻을 수 있는 인문학적 교훈과 경영, 리더십을 접목시키는 내용을 담았다.

2016년 6월 8일부터 국방TV에서 제작하여 유튜브에서 방영하는 콘텐츠인 '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이세환 기자와 함께 고정패널로 출연 중이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1부

2022년부터 자신의 유튜브 활동을 책으로 정리한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를 출간한다. 1권은 병자호란 편.

2.1.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논평

3. 저서

4. 출연 및 강의

4.1. 과거 출연

5. 논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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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라이브에서 시작되어 곳곳의 커뮤니티로 퍼져 나간 "대학원 데려가주마" 짤방의 주인공이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드라마는 드라마고, 역사는 역사다. 그러니까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는 사람의 잘못이지, 작가나 만드는 분한테는 죄가 없다. 드라마야 말로 상상력 아니냐, 그래서 저는 상상력 발휘하는 부분을 되게 좋게 봐요."
KBS 머니올라 고려거란전쟁 스페셜 8부에서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이 '드라마는 역사에 충실해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저는 이 얘기는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는 것 자체가 잘못이야. 드라마는 그냥 즐겨야지!"

(중략)

"다만 이제 그런건 있는건 같아요. 창작을 해서 드라마를 했는데, 사람들이 보니까 안어울려 (중략)[59] 캐릭터의 공감의 문제인것 같아요."

(침착맨:정확하게는 이게 노잼죄죠. 그렇게 해서 재밌으면 상관 없잖아요?)
"(웃음)재미만 있으면! 맞아요."
침착맨 방송 고려거란전쟁 특강에서
다만 작품의 조잡함을 소비자로서 비판하는 것과 역사 인물을 다룰 때 별다른 조치 없이 해당 인물의 이미지와 어긋나는 묘사로 인해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데 실패하는 것은 문제라고 평했다.
(드라마가 역사고증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재미가 없어서 욕을 먹는거라는 이야기 후) 근데 아무리 창작물이라고.. 역사책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그 사람의 가치관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뭐 그 가치관이 좀 안맞는다거나.. 예를 들면 뭐 "우리가 그때 일본의 식민지가 됐으면 훨씬 잘살텐데" 뭐 이런얘기하면 다들 싫겠죠.
동일한 특강에서, 해당 문장처럼 역사왜곡 및 식민사관과 같은 '상상력'의 산물은 역사책과는 별개로 인식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7. 어록

내 수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적이 내 의도대로 움직일 것이라든지, 내 능력 정도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등)
역사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지 저주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당시 유럽은 이랬는데 조선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의 인식에 대해)
합리와 비합리와의 싸움이 아니라 그쪽 입장에서 합리와 다른쪽 입장에서의 합리와의 싸움이다.
미래의 시각으로 결과를 알기 때문에 결과론 적으로 한쪽이 비합리로 보일진 몰라도 스스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후대인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긴 쪽의 선택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각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을 많이 착각하는데,
과거에 A라는 행동을 했고 B라는 결과가 나왔으니 A라는 행동을 하자, 하지 말자라는 것이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왜 그 사람들은 A라는 행동을 했는가까지 아는 것이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조선은 국방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중국인들이 말하는 숫자는, 우리가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 관우 장비는 1만 명을 상대할 능력이 있다." - 만인지적 장수에 대한 이야기 中 -)
이것이 제국의 마인드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고대 로마 미국 등의 강대국이 적의 기술이나 체제 중 유용한 것이 보이면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설명하면서 주로 하는 말)
진실은 안 팔려.
쉬워 보이는 일도 쉬운 게 없어요. 맨날 " 보초병 졸아서 뚫렸다"고 하는데, 보초병 안 졸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전 세계 어떤 군대도 해결 못 했을걸? 평화 시에 365일 보초병이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틸 수 있게 하는 군대, 세상에 없어요. 쉬워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 있는 거에요.
후대에 갈등을 떠넘기는 리더는 역사의 가장 큰 죄인이다.[60]
보통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분석하죠. 그러나 손자처럼 당위를 찾지 않습니다. 손자처럼 내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의 나라를 홀라당 먹어야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보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석을 한다음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내가 가진 무기가 무엇인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걸 가지고 자신의 목표를 선택하고 자신이 갈 길을 선택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하고 성공한다면 그저 운이 좋은 것이 되는 겁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데 상황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이 못하는 이유를 갖다 넣어요. 사회가 이렇고 집안 사정이 이렇고...

전부 맞는 말인데, 그래도 당위가 있다면 그 상황에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지금 처한 현실의 상황을 무시해라 이런 말이 아닙니다. 전부 너 자신의 탓이야. 이런 뜻이 아니에요. 이런 현실에 부딪치면 바로 포기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제가 말하는 남탓입니다. 손자는 그렇지 않았어요. 당위를 먼저 보고 적합한 방법을 찾아 도전한 거에요. 목표가 절대로 불가능하고 실패하면 내게 남는 것이 없어보이지만, 이것이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길을 찾아 가야만 내가 성공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당위를 가지고 방법을 찾는 사람이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전쟁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독일의 경우 입니다. 전쟁을 잘했다라는 게 아니에요

독일은 유럽의 전통적 강자인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둘러쌓여서, 바다로 나가려면 영국이 육지는 사방이 막혀 있어요. 그런데 또 독일의 문제가 자원이 없다는 거에요. 무언갈 할 때 들어가는 자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예 없으면 모르는데 옆에 있어요. 옆에. 우크라이나에 다 있어요.

그래서 독일사람이 생각한 게 저걸 어떻게든 먹자. 거듭 강조하지만 전쟁을 잘했다라는 게 아니에요. 있었던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저 그때 독일에 있지도 않았어요 주변이 바본가요.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치면 주변국들이 함께 독일을 치기로 협정을 맺어요. 무협지에서 천하의 고수도 앞에 10명 두고 싸우는 거 보다, 앞에 1명 등 뒤에 1명 두고 싸우는 게 더 힘들어요. 그래서 이 양면 전쟁이라는 건 적어도 10배의 전략이 필요합니다.그런데 10배는커녕 지금 1대1로 붙어도 안 돼요. 그러면 어떡해야 하죠? 포기해야죠. 얼마나 편합니까. "신은 왜 우릴 이런 땅에다가, 왜 옆에는 러시아를 두고 옆에는 누구를 두고. 난 못해." 그런데 독일이 이때 우리가 살아나가려면 우크라이나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럼 러시아와 프랑스를 동시에 쳐야한다. 양면 전쟁을 해야한다. 이것을 당위로 내놓습니다.

러시아와 싸우기 전 프랑스를 단기간에 굴복시켜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보통은 여기서 포기하기 마련이죠. 그러나 독일은 이것이 우리의 운명적 과제니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손자가 말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당위에 방법을 맞추는 것이죠. 그 순간부터 독일은 모든 국력을 동원해서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교육 제도까지도 바꿉니다. 화약 만들 재료마저 부족해서, 국가적으로 화학에 투자하고 질소에서 질산염을 추출하는 기술까지 개발합니다.

프랑스가 이 소식을 듣고 대비를 했을까요? 비웃고 말았죠. 우리를 6주 만에 굴복시켜? 쟤들이 뭘 잘못먹었나. 그런데 결국 이 사람들은 했거든.
토크콘서트 화통 "진정한 영웅이란?"
삼국사기 읽으세요.
(유튜브 라이브에서 역사공부하고 싶은데 무슨 책을 읽으면 되겠냐는 질문이 나오면 항상 하는 말[61])

8. 출연 프로그램

8.1. 방송

8.2. 유튜브


[1] 석사 학위 논문 : 麗末鮮初(여말선초)의 守令制(수령제) 整備(정비)와 運營(운영)(1991). [2] 박사 학위논문 : 朝鮮初期(조선초기)의 守令制(수령제) 연구(1998). [3] 전쟁사를 주제로 침착맨 방송에서 한 주제로 방송을 길게 이어가는 게스트를 뜻하는 밈인 "민수" 타이틀을 얻었다. 그만큼 해당 분야에서 길게 토크를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전문가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전쟁광(...)으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4]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진학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5] '전쟁과 역사', '조선국왕이야기' 등 임용한의 초기 저서들을 보면, 분명 연세대 신학과와 사학과를 모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임용한은 감리회 목사이기도 했다. 학부를 2번 나온 것은 허준과 이세환 기자와의 허준의 허튜브 고인물 방송에서 이야기 중에 나온다. [6] 200회로 종영 [7] 전쟁영화를 주로 리뷰하는데, 꼭 전쟁영화로 국한하는 것은 아니고 황야의 7인, 무숙자, 황색리본을 한 여인 등의 서부영화, 007 시리즈, 7인의 사무라이, 코만도, 월드워 Z, 소림사, 동방불패 등의 영화도 리뷰하고 있다. [8] 기존의 인문채널휴 채널 [9] 원래 《전쟁과 역사》 1권에서 고조선 멸망부터 후삼국 통일까지 다루었는데, 개정증보판 《한국고대전쟁사》 1-3권으로 그 시기를 더 자세하게 서술했다. 《전쟁과 역사》 2권은 고려시대 거란 1-3차 침입과 여진 정벌을, 《전쟁과 역사》 3권은 묘청의 난, 거란 전쟁, 몽골 항쟁, 삼별초의 난, 홍건적 왜구와의 전쟁을 다뤘다. [10] 요동성이 함락당할 때 관리가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 백암성주가 부하들의 눈치를 보며 항복을 번복하다가 당나라에 항복을 한 것, 고혜진· 고연수의 군대가 주필산에서 당군과 대결하다가 궤멸하고 안시성의 기록이 없는 것 등 [11] 실제로 당대에 기훤 양길처럼 도적떼 두목을 벗어나지 못한 군웅들은 궁예에게 흡수되어 후고구려(이후 태봉)의 밑거름이 되고 만다. 정작 궁예도 이름만 왕이지 속은 계속 두목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12] 널리 알려진 최응 '어이쿠 붓이 떨어졌네' 하면서 왕건에게 살아날 방도를 귀띔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13] 상식적으로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가 누가 고구려를 계승했는가 말싸움에서 졌다고 조용히 철수하고 영토를 양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회군이나 다름없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다. [14] 손자도 외국과의 분쟁에서 벌모(伐謀)가 최선이고 그 다음으로 벌교(伐交), 벌병(伐兵)이며 공성(攻城)이 최하라고 했다. 서희의 협상은 완벽한 벌모에 해당한다. 발리앙의 협상 [15] 서희가 직접 여진족을 구축하고 강동6주 성을 쌓아 고려의 북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참고로 10년 전에 이겸의의 고려군이 이 지역을 침공했다가 대패한 바 있다. 서희는 2년간 이 사업을 진행한 뒤에 병을 얻어 3년간 투병 후 사망했다. [16] "흔히 우리가 배우듯이 '서희가 세 치 혀로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표현은, 서희의 진정한 공로와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일갈이다. [17] 《전쟁과 역사》 2권 108쪽 [18] 물론 전쟁사 전문가이지 고려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한계이기도 하다. 실제 고려사를 전공한 대부분의 교수들은, " 왕건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나 교통의 요충지를 지배하는 호족들의 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고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장남에게 후계자를 일찍 정해준 것과 강력한 군사 지도자인 박술희 혜종의 지지세력으로 확보하고 왕규, 군부의 실력자 임희 등을 혜종의 장인으로 낙점하는 등 후대의 혼란을 대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국가 체제의 정비가 늦어진 것에 대해 왕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도 시대를 감안하지 않은 악의적인 평가이다. 왕건이 통일한 고려는 지방통치체제가 모두 무너진 나말여초의 연속이었고 왕건은 그 과정에서 지방세력들끼리 서로를 견제하게 하며 중앙정부를 커지게 하고 불교를 이용하여 지방통치제도를 위탁하는 등 한국사를 통틀어도 최고 수준의 정치력을 발휘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고 이는 고려사를 전공한 학생들이면 모두 이해하는 부분이다. 또 고려사에 대해선 확실히 비전공자임을 보여준 예가 있는데, 저서 《시대의 개혁가들》에선 광종이 숙청한 이복동생 효은태자가 누군지 몰라서 광종의 아들이 아닐까 추측한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19] 《전쟁과 역사》 2권 238-239쪽 [20] 1권 2001년, 2권 2004년, 3권 2008년 [21] 특히 동양의 전투 기록은 정말 성의(?)가 없고, 문관의 시각에서 성리학적 가치에 따라 기록되어 있어 군사학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22] 《전쟁과 역사》 1권이나 《한국고대전쟁사》 1-3권은 상대적으로 기록이 너무 소략하고, 지형도 비정되지 않은 고대를 다루다 보니 전투를 복기하여 서술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전쟁의 흐름과 전략 분석에서 빼어난 혜안이 돋보인다. 성왕, 무왕, 의자왕의 대신라전쟁과 백제부흥운동, 그리고 나당전쟁의 서술 역시 압권. [23] 합의문 도출은 없다고 크렘린궁이 밝히기 이전의 논평이다. [24] 여현덕, 임용한 공저 [25] 태조~ 예종까지 다뤘다. [26] 성종~ 인종까지 다뤘다. 본인 말로는 조선국왕 이야기 3권은 너무 힘들어서 언제 쓸지 모른다고 밝혔다. [27] 역사학자 18인 공저 [28] 윤훈표, 임용한, 김인호 3인 공저 [29] 윌리엄 위어 저, 임용한, 강영주 공역 [30]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김인호, 임용한, 한정수 공저 [31]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기획, 임용한 총괄 및 공저 [32] 2009년 저서 《난세에 길을 찾다》의 개정판. [33] 니탕개의 난, 을묘왜변 등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었다. [34] 임용한, 이혜옥, 노혜경, 김태완, 윤성재 공저 [35] 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공저 [36] 김인호, 노혜경, 윤훈표, 임용한 역 [37]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은 역주본으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각 5천 부씩만 발행되었으며 차후에 정식 출판본으로 다시 출간될 예정이다. [38] 위에서 언급한 정식 출판본으로, 책에는 '개정판'으로 적혀 있다. [39]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 1권 [40] 임용한, 전인구 공저 [41]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 2권 [42]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 3권 [43] 인문채널 휴 강의가 많아지면서 하차, 대신 윤지연 아나운서 합류 [44] 해당 회차가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다시보기 편에서 지워져서 제작진과의 갈등설이나 정치적 이유 등으로 임용한을 탄압한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는 등 다소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2021년 8월에 다시 임용한을 섭외하여 삼국지에 대한 내용을 강연한 것을 볼 때 제작진과의 갈등설 등은 단순한 음모론일 수 있다. 물론 해당회차가 왜 삭제 된 것인지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45] 산호초인 타라와에는 내륙 산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산호초가 아니어서 저걸 할 수 있었던 펠레리우에서 미군은 3달 동안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서야 완전 점령이 가능했다. [46] 다만 지뢰며 철조망 같은 장애물을 해안가에 잔뜩 쌓아놨던 데다 상륙도 이상한 데서 하는 바람에 기동성 자체가 떨어지다보니 상륙이 안 된 건데 그 상황에서 대체 어디에 돌격해서 싸우라는 이야기인지는 좀.... [47] 정확하게는 " 몽골제국은 어떤 나라와도 대등한 외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정도를 덧붙였다. [48] 동북아역사재단· 경북대학교 한중교류연구원 엮음,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2011, 74쪽. [49] Ishjamts N. et. al., Mongolyn ezent gürnii gadaad khariltsaa (ⅩⅢ~ⅩⅣ), 1995, 55~65쪽. [50] 정확하게는 "차라리 식민지배라고 한다면 인정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현실과 정반대인 권력관계를 이미지화 시킬 수 있기에 그런듯. [51] 역사적으로 도로와 운송망은 정치적 목적에서 건설되고, 이것이 높은 경제성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의 도로는 지방을 통제할 목적에서 건설되었으나, 그 도로를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52] 운하건설은 막대한 비용이 든다. 중국이나 이집트처럼 단순히 평지를 파는 것이라면 문제가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비용이 든다, 암반층이 등장하면 팔 수가 없다. 비슷한 예로 파나마 운하의 경우 드러나 암반층을 파는 것이 불가능하자, 아에 물을 산으로 올려서 배를 산으로 보내는 식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니까 태안반도의 운하건설은 20세기급 과학기술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53] 소장했던 유일한 제트기 라인이었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54]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민족주의...라고 하기에도 이상하고 진보 좌파적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무언가를 위한 프로파간다' [55] 다른 인물이나 이야기를 설명하더라도, 결국엔 조조 유비에 대한 고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56] 임용한은 조조와 유비를 제외한 다른 군벌들에 대해선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중점적으로 설명하면서도, 그들이 그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장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원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인물에 대한 에피소드에서 잠깐 언급하는 수준이다보니, 원술에 대해 좋은 이야기나 나올리가 없었다. [57] 원래 발언을 인용하자면 '하늘에다 대고 짖더니' [58] 특히 단순 사실관계를 넘어 특정인물의 리더십 등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드라마를 통해 배우려는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강조했다. [59] 중략 부분에는 세종대왕을 가벼운 캐릭터로 만들어서 마치 훈민정음 창체를 아무생각 없이 시도하면 어떻겠냐는 예시를 들었다. [60] 발언 당시 정권 지지자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말이다. 임용한 본인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특정한 정치세력을 저격하기 위해 사실이나 분석, 교훈 등을 왜곡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61] 교수 시절 우연히 사학과 4학년생이 삼국사기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현재 한국에 삼국사기 원전을 직접 완독해본 사람은 사학도 중에서도 상당히 드물다고 한다. 수준 떨어지는 경우에는 석사과정까지 갔는데도 해설본만 읽고 원전은 안 본 사람도 있다고. [62] 전직 교수 3명(임용한,윤훈표,김인호)에 현직 교수 1명(노혜경)으로 구성되어 사실상 유튜브 한국사 채널중에서 권위만으로는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63] 2021년 12월부터 2022년 3월 1일 현재까지 인문채널휴의 채널명이 Yong Han Lim으로 변경되어 있는데 구글에서 프로필상 이름과 제출한 서류의 영문 이름이 다르다는 안내받은 이후에 처리될 때까지 임시로 변경 된다고 커뮤니티를 통해 공지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