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21:32:49

효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raitors_heads_on_old_london_bridge.jpg

1. 개요2. 목적3. 역사4. 이후 처리5. 매체에서6. 기타7. 효수를 당한 인물
7.1. 실존인물7.2. 가상인물

1. 개요

[1]

참수형이나 거열형, 부관참시를 당한 죄인의 을 막대기에 거는 일.[2] 효시[3](梟示)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head on a spike.[4]

2. 목적

조선 시대와 같은 전근대 왕조시대에는 반역죄, 살인죄, 절도죄 중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효수를 집행하고, 그 머리를 저잣거리나 주요 장소에 매달아 백성들이 이를 보도록 했다. 이는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처벌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포정치의 일환이었다.

효수는 단순히 형벌을 넘어 국가 권력과 통치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특히 반란이나 모반을 일으킨 자들의 머리를 효수함으로써 통치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조선 세조 시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뒤 이시애와 관련자들의 머리를 효수하여 반란 진압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알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효수된 머리는 단순히 전시되는 데 그치지 않고 군중들이 직접 돌을 던지거나 오물을 던지는 등의 행위가 허용되기도 했다. 이는 대중의 분노를 해소하고 통치자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 등 반대파 인물들의 머리가 효수되었을 때, 군중들이 이를 조롱하거나 공격하며 분노를 표출하도록 유도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효수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기능했다. 조선 시대에는 세금 횡령이나 공물 훼손 같은 경제적 범죄에도 효수가 적용되었으며, 이는 국가 재정과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로 이어졌다.

또한, 효수는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거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세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와 황보인 등 반대파가 효수된 사례는 정치적 숙청의 대표적인 예로, 효수가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효수는 범죄 억제, 권력 과시, 대중의 분노 해소, 사회 질서 유지, 정치적 목적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형벌로, 조선 사회에서 중요한 통치 도구로 자리 잡았다.

효수는 단순히 반역이나 범죄자의 처벌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전쟁 중 적군의 주요 인물, 특히 장군이나 수장급 인물의 머리를 베어 적군의 사기를 꺾는 목적으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적군의 수급을 전시해 백성들에게 아군의 전공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는 죽은 자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효수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효수의 대상이 되는 자들은 대부분 대형 범죄자였으나, 국가의 부당한 정책에 저항하다 희생된 이들 중에서도 효수된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효수가 단순한 처벌을 넘어 공포와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때로는 정당성과 도덕적 논란을 낳았음을 보여준다.

3. 역사

참수의 역사만큼 효수의 역사도 오래되었다.

효수의 유래는 중국의 상고시대에 모반자에게 처한 형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 구장률에서는 오형 중의 하나로 규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160년에 어미를 죽인 군졸인 장언)(張, 1176년 군사를 일으켜 무신정권에 대항한 조위총, 1363년에는 역모를 꾀한 석기를 효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계유정난 때 김종서 부자 · 황보인 등 10인을 저잣거리에서 효수하였고, 박기년을 비롯한 5인도 백관을 군기감 앞길에 둘러 세워 뭇사람이 보는 가운데 거열로 죽인 뒤 3일 동안 효수하였다.

효수 장소는 형장인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저잣거리였으며, 참수할 때 장대를 삼각으로 세우고 죄인의 상투 끝에 끈을 매달아 연결한 후 머리를 베어 그 끈을 잡아 당겨 장대 끝에 매다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일본에서는 고쿠몬(獄門),[5] 쿄슈(梟首, きょうしゅ), 사라시쿠비(晒し首, さらしくび)라고 한다.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실시했는데, 키케로 올리버 크롬웰이 유명하다.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참수형, 거열형과 함께 폐지되었다. 김옥균은 딱 그 직전에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뒤에 조선에 보내져 시체가 거열형에 처해진 후 목이 효수되었고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과 함께 찍힌 흑백사진이 남아있다. 마침 개화기였기에 근대 유럽 문화가 들어온 시점이라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6]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의 몇몇 독재자들이 반대파 내지 반군들을 효수하기도 했으며,[7] 21세기에도 아주 드물긴 하지만 효수 사례가 있긴 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흉악범들의 시신을 효수하기도 하며,( #) 북한에서도 장성택의 시신이 효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4. 이후 처리

조선시대의 경우 기간은 보통 3일. 그런데 이후의 처리를 어떻게 하라는 규정이 없어서 효수해 놓고 까먹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은 연고자들이 수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육신 사건이나 천주교 박해 관련해서 목숨걸고 수급을 빼돌렸다는 식의 일화가 많다.

저자에 걸린 머리들은 대부분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건드려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 훼손하는 경우도 발생할 정도였다.

5. 매체에서

효수는 워낙 잔인해서 사극에서 효수 장면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나올 경우 모자이크 또는 검은 실루엣만 보이게 한다거나( 왕과 비 181화, 무인시대 5화 및 129화), 좀 선명하게 보이더라도 대갈치기 구도로 찍어 화면 가득 머리가 나오게 해서 덜 잔인하게 보이는 연출로 나오곤 한다. 영화 간신 오프닝에서는 꽤 적나라하게 효수 장면이 나온다.

멀리서 작게 보이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공주의 남자, 왕과 비의 사육신 효수 장면 태조 왕건[8]등. 특히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의 폭정을 강조하는 의미로 심심찮게 효수 장면은 물론 백성들이 돌을 던지거나 손가락질하는 장면까지 나오곤 했다. 굳이 효수하지 않아도 잘린 목 자체의 잔혹성 탓에 이걸 클로즈업 하는 경우는 현재 드문 편이다.

화랑, 명량, 임금님의 사건수첩,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후반부 등지에서처럼 그냥 적나라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다.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도 정몽주의 효수 장면이 클로즈업 되었다.

반대로 고어물이나 호러물에서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해 사형 장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효수된 머리통이 일종의 장식품처럼 나오기도 한다. 특히 주술사 강령술사 등이 주변에 자주 두는 아이템.

폴아웃 4에서는 레이더들의 주둔지마다 지나가던 커먼웰스 정착민들을 죽이고 전시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4편부터 E키를 꾹 눌러서 가벼운 물체를 들 수 있게 된 관계로 유일한 생존자또한 흉기 등을 이용해서 죽은 NPC의 시체에서 머리를 분리해 선반에 올려둘 수도 있다.

6. 기타

효수에 그치지 않고, 팔, 다리까지 사방에 돌려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연산군 시대에 장녹수 모함을 받아 거열형 궁녀 전향과 수근비가 이런 처우를 당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사용자들을 공개처형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이며, 그 대상은 '효수자'가 되어 나쁜 의미로 유명해져 두루두루 까인다. 나무위키가 이 효수대로 악용되는 일이 종종 있다.

마인크래프트에서는 자신이 죽인 유저의 머리를 드랍해서 아이템으로 소장 가능한데, 이를 이용해 자신의 공간에 죽은 유저들의 머리를 전시할 수 있다. 2015년 어느 한 악질 유저가 여러 유저들을 상대로 그리핑을 일삼고, 그 유저들의 캐릭터를 효수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디지털 연쇄 살인으로 불린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인크래프트/사건 사고 문서
3.2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효수를 당한 인물

7.1. 실존인물

7.2. 가상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직역하면, 올빼미이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올빼미가 자라서 어미새의 눈알을 파먹는 불효새로 여겼고, 올빼미를 보기만 하면 때려 죽인 후 경고의 의미로 장대에 매달아놓았다고 한다. 이게 훗날 죄인의 목을 베어 걸어놓는 것으로 바뀌었다. [2] 목을 걸어두는 경우는 보통 죄수가 장발일 때 해당하며, 민머리나 단발일 때는 창에 꽂았다. [3] 이때는 효수하여 경고한다는 약간의 의미차이가 있다. [4] 영국에는 효수나 부관참시, 거열형(능지처참)과 비슷한 처벌이 있었다. [5] 이건 정확하게는 에도시대의 극형 중 참수형+효수+남은 몸체는 타메시기리에 쓰게하고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가리킨다. [6] 조선의 개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계몽 운동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 사건을 계기로 흑화했고, 청의 이홍장도 조선에 김옥균의 시신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김옥균의 시신을 훼손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7]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이디 아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폴 포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수하르토 [8] 신숭겸 수급도 포함된 장면 및 문소성 성루에 성주의 머리가 효수된 장면 [9] 정확히는 장성택의 측근 리룡하 장수길이 고사포로 처형되었다. [10] 우간다 제2의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