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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2:42:29

숭례문

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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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彰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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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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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1. 서울 숭례문
  1.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2.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3. 여주 고달사지 승탑
  4.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5.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6.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7.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8.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9.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10. 익산 미륵사지 석탑
  11.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2.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13. 영천 거조사 영산전
  14. 안동 봉정사 극락전
  15.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16.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17.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18. 영주 부석사 조사당
  19. 경주 불국사 다보탑
  20.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21.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22.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23. 경주 석굴암 석굴
  24.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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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5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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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5.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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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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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0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1.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7
  2.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
  3.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4. 충주 고구려비
  5.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6.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7.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8. 보협인석탑
  9.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10.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11.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12. 금동탑
  13.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1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 31
  15. 정선필 인왕제색도
  16. 정선필 금강전도
  17. 아미타삼존도
  18.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19.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20.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21.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22. 경복궁 근정전
  23. 경복궁 경회루
  24. 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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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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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번호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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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호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 Sungnyemun[1]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29, 숭례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시설 1동
건축시기 조선시대, 1398년(태조 7)
복구 2013년
지정일자 1962년 12월 20일
소실 2008년 2월 10일
복원 2013년 4월 29일
관리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파일:pixta_46365348_M-1.jpg
숭례문

1. 개요2. 명칭
2.1. 숭례문(崇禮門)2.2. 남대문(南大門)
3. 국보4. 숭례문과 주변
4.1. 숭례문
4.1.1. 기능4.1.2. 구조4.1.3. 현판
4.2. 남지(南池)4.3. 남대문시장
5. 역사
5.1. 조선시대5.2. 개화기 ~ 일제강점기5.3. 현대5.4. 2008년 방화 사건
6. 사건·사고7.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8. 다른 매체의 숭례문9. 찾아오는 방법10. 여담11. 갤러리12. 외부 링크13. 국보 제1호14.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남문(南門)으로 건립된 성문으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서울 랜드마크 중 하나로서 기능하고 있다.

2. 명칭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南大門)이라 하고...
태조 5년 9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숭례문(崇禮門)남대문(南大門)이 있다. 숭례문은 정식 명칭이자 현판에 쓰인 이름이라면, 남대문은 일반 명사로서 흔히 불린 명칭이다.

2.1. 숭례문(崇禮門)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왕조가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반영하여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양 도성의 주요 성문에는 오행(五行) 사상에 따라 해당 방위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 즉 오상(五常)을 이루는 인(), 의(), 예(), 지(), 신()[2]을 대응시켜 이름을 지었는데, 특히 동문, 서문, 남문에 이러한 대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남문의 이름인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인다'는 뜻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君子德性而道問學 (군자존덕성이도문학)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면서도, 묻고 배우는 것을 길로 한다.

大而. (치광대이진정미)
넓고 큼에 이르면서도, 정미함을 다하며

高明而道中 (극고명이도중용)
고상하고 현명한 것에 이르면서도, 중용을 길로 여기고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옛 것을 쌓아가면서도, 새 것을 알며

(돈후이숭례)
예를 높이는 것으로써, 돈독하고 두터워진다.

上不 下不(시고 거상불교 위불불부)
이 때문에 윗사람이 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되어도 배반하지 않는다.
중용》 27장 中
정도전(鄭道傳)의 시문집인 『삼봉집』(三峯集)[6]에서는, 도성 팔문의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였다. # 공식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른 진술 중 정도전이 권중화 등과 함께 한양의 도시계획을 구상[7]하고 경복궁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어 바친 것[8], 한양의 팔경시(八景詩)를 지어바친 것[9] 등이 교차 확인된다.[10]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것을 인용하였다. #

2.2. 남대문(南大門)

숭례문은 "도성의 남쪽 대문"이라는 뜻의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자주 불렸다. 정식 명칭이라기보다는 일반 명사로 시작하였으나[11], 조선 시대에도 숭례문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불려온 명칭으로 보인다[12]. 특히 한문을 잘 모르는 서민의 경우 현판을 읽을 수 없으니 보다 직관적인 "남대문"이 지배적으로 쓰였으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언급 빈도로 볼 때 한문을 잘 알던 권력층에서도 "남대문"을 매우 자주 사용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13] 1996년까지는 "서울 남대문"을 공식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사실상 고유명사화되어 주변 지명도 전부 "남대문"을 사용하였고('남대문'시장 등), "숭례문"은 거의 잊혀질 정도였으나 이후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울 숭례문"으로 개칭하였다.

3. 국보

국보 제1호라는 타이틀로도 유명한데, 가장 중요한 국보라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전자의 의미로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2021년 11월 19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국보 제1호'라는 말이 없어지고 '국보 서울 숭례문' 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4. 숭례문과 주변

4.1. 숭례문

4.1.1. 기능

파일:0010100.jpg
도성도(대동여지도)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남대문이라는 이명이 알려주듯, 도성의 남쪽 대문으로서 기능하였다. 한양은 지형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사이로 문을 냈는데 북쪽은 북악산이, 남쪽은 남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숭례문은 남서쪽에 자리잡았다. 숭례문은 흥인문과 함께 도성의 가장 중요한 두 관문으로 여겨져[16] 문루 또한 2층으로 크고 화려하게 지었으며, 통행량도 가장 많았다. 숭례문은 주로 한양의 서쪽 교통을, 흥인문은 주로 한양의 동쪽 교통을 담당하였다.

숭례문은 국토의 북쪽으로는 의주로, 남쪽으로는 삼남로 등의 최종 관문이었다. 의주로는 가장 중요한 외교국이었던 중국과 통하는 길이며, 무악재를 넘어 돈의문 바깥에 있던 모화관(慕華館), 영은문(迎恩門)을 따라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정식 루트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대외적으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대표하는 이미지 역할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명 동월(董越)[17]의 <조선부(朝鮮賦)>에는 도성문 중 숭례문만이 따로 기록되어 있다. #)
삼남로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통로로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가는 길, 임금의 행차길 등 다양한 기능을 맡았으며 특히 비중 높은 삼남 지방의 세곡과 물자가 마포(麻浦) 등 큰 나루터에서 하역하여 도성으로 수송되었다. 태종 대에는 물류 운송을 편하게 하기 위해 숭례문 근처 만초천(蔓草川)까지 운하를 뚫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도성 내에서는 광화문으로 뻗는 육조거리, 동서 방향으로 한양을 꿰뚫는 운종가(雲從街)와 함께 한양의 핵심 도로였던 남대문로(현재는 태평로가 뚫려있어 위상이 이전보다 축소되었다.)로 이어졌으며 그 끝에는 청계천에서 가장 통행이 많던 광통교(廣通橋)와 한양의 종루였던 보신각(普信閣)이 있었다. 성문 바깥으로는 칠패(七牌) 저자가 들어섰다. 1896년 도시개조사업으로 가가(假家)가 모두 정리된 이후에는 선혜청(宣惠廳) 내부에 창내장(創內場, 현 남대문 시장)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외에, 숭례문은 한양의 비보풍수(裨補風水; 풍수 상 부족한 요소를 인위적으로 보충함)와 관련하여 여러 기능을 담당하였다.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오른팔은 지세가 낮아 기가 허(虛)하다 하여 바깥에 연못(남지南池)을 팠고, 그 안에는 불을 제압하기 위해 부적이 들어간 현무 조각을 넣기도 하였다. 또한, 음양사상에 관련하여 가뭄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숭례문(남문; 陽)을 닫고, 숙정문(북문; 陰)을 열어 음기(陰氣)를 강화하고[18] 장마가 시작되면 다시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다.

4.1.2. 구조

숭례문은 견고한 육축 위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가진 성문이다. 흥인지문, 팔달문 등과 함께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성문 중 최대 규모이다.

흥인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공포 구조 등을 살펴보면 숭례문은 조선 전기 양식, 흥인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흥인문은 고종 당시 문루를 중건했기 때문이다.) 숭례문의 경우 전체적으로 장식이 소박하고, 부재가 굵고 짜임이 건실하여 조선 초기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2층 잡상의 개수는 9개, 1층 잡상의 개수는 7개이다.

숭례문의 현재 단청은 1961년 ~ 1963년 보수 당시 발견된 옛날 패턴을 참고하여 63년 당시 채색된 버전에 가깝게 복원하였는데, 이외에도 숭례문은 54년, (63년), 70년, 73년, 88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단청을 다시 칠하면서 문양이 조금씩 변화하였기에 그 중 어느 것이 원본이다라고 하는 것이 조금 무의미한 측면이 있다. 다만 63년의 것이 유일하게 고증 비슷한 걸 한 사례이기에 복원 당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른 조선 초중기 건물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단청과 비교했을 때 조선 초 단청에 가깝기에 고증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 편. 최근 복원된 창경궁 명정문의 단청과 비교해볼 수 있다.

2010년 복원 당시 밝혀진 사실로 숭례문의 원래 기단은 지금의 지면보다 1m 60cm 정도 아래에 있었다. 즉 15세기 무렵의 도로는 현재보다 훨씬 낮았고, 상대적으로 숭례문의 성벽은 더 높았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기단이 묻혔고, 안그래도 특히 흥인문이 행차 때마다 흙을 퍼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기단을 낮추라 하였으나[19] 지반 안정성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복구 작업 시에도 구한말과의 연속성, 그리고 지반 안정성 등 다양한 이유로 지반은 드러내지 않은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4.1.3. 현판

파일:서울_숭례문_현판과_우진각지붕_(촬영년도___2015년).jpg
숭례문 현판[20]
(중략) 문장과 필법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비록 양녕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바였지만 말을 하여 문장을 이루고 붓을 휘둘러 신묘한 경지에 든 것은 절로 숨길 수 없었습니다. 만년에 묘향산을 유람할 적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짓기를 ‘산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덩굴에 걸린 달을 밤에 등불로 삼네. 홀로 외로운 바위 아래에서 자는데, 한 층의 탑만 그대로 남아 있구나.’라고 하였는데, 비록 문사(文士)로 이름난 자라 하더라도 이보다 뛰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외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장편과 단운(短韻)도 모두 굳세고 맑고 빼어나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쓴 숭례문(崇禮門)의 편액(扁額)은 자체(字體)가 굳세고 생동감 있어 세상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태종께서도 양녕에게 문장과 글씨의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셨으니, 양녕의 겸손히 스스로 감추는 실제를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중략)
승정원일기》 영조 12년 6월 12일 자 기사, 양녕대군의 사당에 편액을 내려 줄 것 등을 청하는 유학 이명희 등의 연명 상소[21]
숭례문 현판 글씨는 그 자체로 명필로 꼽힌데다 도성의 정문이라는 본체의 상징성 때문에 세간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현대에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현판 작품으로 남았으며, 600년 세월이 흐르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전한다.
테두리목과 선대(현판 가장자리에서 길게 뺀 부분)를 구름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이러한 예는 고려 14세기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이나 조선 초~중기 창경궁 명정전 현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특히 테두리목 부분이) 이러한 장식이 생략되고 단순 일자형으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에 복구된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근정전 등은 모두 테두리목의 장식이 생략되었다. 이걸 이용해서 현판 테두리목의 장식여부에 따라 시대를 짐작할 수도 있는데, 연대가 오래된 현판일수록 테두리목과 선대의 장식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숭례문 현판은 이런 점에서 조선 초의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서체의 유형은 전형적인 설암체(雪菴體)로 평가되는데, 설암은 원나라의 승려 이부광(李傅光)을 지칭한다. 설암체는 특유의 전체적인 볼륨감과 굵고 뚜렷한 획으로, 멀리서도 잘 보여야 하는 현판 글씨의 특징과 맞물려 고려 후기~조선 전기에 현판 글씨로 크게 유행하였다. 숭례문 현판도 이러한 서체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숭례문 글씨의 작자(作者)에 관한 서적의 일부 인용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

4.2. 남지(南池)

파일:남지.jpg
숭례문 밖, 남지는 왼쪽에 있다.(도쿄 한국연구원 소장)
숭례문 바깥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이를 남지(南池) 또는 연지(蓮池)[27]라고 불렀다. 세종의 언급에 따르면 경복궁 서쪽의 지세가 약한 것을 보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판 것이다.[28] 한명회는 주산(북악산)이 화산의 형국이기 때문에 불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하였다.[29] 이 둘은 모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근거한다.
열한 분의 연세 팔백 년을 이루었네 / 十一人成八百年
낙사의 하삭음 어찌 셀 수 있으랴만 / 洛社幾拚河朔飮
곡강지(曲江池)의 연꽃 모임 또 다른 뜻이 있지 / 官池自有曲江蓮
연꽃 향기 솔솔 용연인 듯 애애하고 / 香風入座龍涎暖
코끼리 코 기울여 술을 잔뜩 따르누나 / 淥酒傾筒象鼻偏
표거(飆車) 타고 학상선(鶴上仙)으로 하늘에서 놀기보단 / 鶴背飆輪大寥廓
영원히 지행선으로 사는 게 더 좋으리 / 不如長作地行仙}}}

* 임진왜란 직후 실종된 현판이 남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다.[30] (다만 그 바깥 청파주교(靑坡舟橋)에서 발견되었다는 버전도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남지를 파내면 남인(南人)이 득세한다는 속설을 전하였다. #
순조(純祖) 23년(계미) 늦봄에 숭례문 밖에 사는 백성들이 돈과 곡물(穀物)을 서로 거두어 이 말라붙은 못을 다시 파내고 물을 채워 한결같이 예전 모습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풍설(風說)이 나돌기를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대각(臺閣)에 들어갈 때에 이 못을 팠었고 지금 또 이 못을 팠는데, 이 못을 파던 날에 정승(政丞) 채제공(蔡濟恭)이 복작(復爵)되었다.’ 하였으니, 이 못이 남방(南方)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남인(南人)에게 응험이 있는 것이고 남인 가운데 문과(文科) 급제자가 넷이나 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 남지에 살던 고니
1896년 4월 자의 『독립신문』에는 "칠패 아침 저자에 고니라는 큰 새를 어떤 사람이 팔러 왔는데 그 동리 사람이 열냥을 주고 사다가 남문 밖 연못에 놓아주니 유적(幽寂)한 정취가 뭇 새와 달랐다. 이 새가 연못 물과 물고기를 좋아해 날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논 지 한 달가량 되었다."라고 하며 남지에 방생되어 살던 고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후 열흘 뒤에는 "일전에 일본 사람이 강으로 사냥 가는 길에 고니에 총을 놓으려 하거늘 그 근처 순검이 팔을 붙들고 쏘지 못하게 하였다더라"라는 후속 기사를 전했다.[31][32]

* 청동용두(靑銅龍頭)의 귀(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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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용두의 귀 등껍질 안에서 나온 종이 유물[33]
1926년 남지 터에 "조선우선회사"로 추정되는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등껍질 부분은 뚜껑처럼 열 수 있고, 내부에서는 부적처럼 팔괘와 함께 화(火)자를 중심으로 수(水) 자가 가득 적혀 둘러싼 모양의 종이가 발견되었다. 등껍질 안쪽에도 동일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음양오행 상 "물"을 상징하는 현무(玄武)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문화재청, "숭례문 - 기억, 아쉬움 그리고 내일", 2009)

남지는 위생 등의 문제로 1907년 숭례문 성벽 철거 전후로 매몰되었고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4.3. 남대문시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남대문시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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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안쪽에 있던 대형 창고인 선혜창(宣惠倉)에 창내장(倉內場; 남대문시장의 전신)이 들어섰다.
숭례문은 지방 물자가 조달되는 한강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관문으로 근처에 조세 및 공물을 보관하기 위한 대규모의 창고가 세워졌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즉위년(1608)에는 대동법(大同法)을 시범적으로 시행하면서 선혜청(宣惠廳)을 신설하여 숭례문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북창(北倉), 남창(南倉)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현재 북창동, 남창동의 어원이다. # 이후 한양 내외의 인구 증가에 따라 생활용품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숭례문과 소의문 바깥에 위치한 칠패(七牌)에서 차츰 새벽에 열리는 사설 시장(조시朝市/난전亂廛)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칠패란 어영청(御營廳)이 분담하여 방어하던 여덟 구역(패牌) 중 7번째로서 남대문 밖 남지(南池)까지의 영역을 지칭한다. 이곳에서는 쌀, 포목, 어물 등을 팔았으나 그 중 어물전(魚物廛)의 규모가 가장 컸다. 18세기 전반에는 이현(梨峴; 배오개), 운종가(시전; 市廛)와 함께 서울 최대 상업지로 성장하였다. #

이후, 1896~1897년 한양 개조 사업이 진행되면서 남대문 주변의 가가(假家) 및 시장을 모두 철거하고 전부 선혜청 내부로 몰아넣으면서 1897년 1월 남대문시장의 전신이 탄생하였다. 이곳은 남문(南門) 내장, 창내장(倉內場) 등으로 불렸으며 상설시장이었고 시장의 경계가 명확하여 재래시장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졌다. 이곳은 상인과 고객 양측이 조선인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경성)의 가장 큰 시장 지위를 유지하였다. 일제에서는 몇 차례 남대문 시장 중심의 상권을 해체하고 일제 중심 시장으로의 개편을 시도하였으나, 1901년 시장의 관리권이 왕실의 내장원(內藏院)으로 넘어간 후 1911년에 시장에 화재가 발생한 뒤에는 친일파인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곧장 시장을 인수하고, 1921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형태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소유가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남대문시장은 유지되었고 시장권은 오늘날의 형태로 구축되었다. 실록사전

5. 역사

5.1. 조선시대

태조가 즉위하고 한양 천도가 확정된 뒤(1394년 10월) 종묘사직과 궁궐이 먼저 세워졌고(1395년 9월), 그 다음이 바로 도성이었다.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에서 도성 각 문의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짓고 남문 이름을 숭례문이라 했다고 언급하였으나, 실제로 숭례문이 완공된 기사는 태조 7년 2월 8일에 확인된다. 숭례문이라는 이름도 언제 지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예를 들어 광화문을 태조 4년 9월 29일 기사에 이미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광화문은 태조 7년 이후에 완공되었고 이름은 세종 8년(1426)에 지어졌다. # 이것은 현 태조실록이 1448년 증보 편수한 것이기 때문으로 # 이 사이에 일어난 사실들이 섞여 있다. 숭례문 현판을 썼다고 알려진 양녕대군은 (사실일 경우) 태종 대에 글씨를 썼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사이의 일은 알 수 없다. 첫 숭례문은 판사 최유경(崔有慶)의 감독 하에 완공되었으며, 태조 5년(1396) 10월 6일 자의 초축 상량문 2건이 남아있다.[34][35]

이후, 세종은 1443년(세종 15년) 한양의 풍수지리 관련 논의의 일부로써 숭례문이 낮아 경복궁의 오른팔이 약하므로 지반을 높게 하여 산맥을 연결하고 그 위에 문을 다시 쌓을 것을 제안하였고 대신들은 찬성하였다.[36] 그러나 공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세종 29년 신축이 결정되었고[37] 곧이어 세종 30년(1448) 완공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숭례문이 기울어지자 성종 10년(1479) 크게 수리하였다. 당시 동부승지 채수(蔡壽)가 숭례문을 중수하면서 옹성도 쌓자고 건의하였으나 성종은 "우리 나라의 민력(民力)이 넉넉하지 못하니, 어찌 한결같이 중국과 같을 수 있겠는가? 만약 옹성을 쌓게 되면 마땅히 민가를 헐어야 하니, 빈궁한 자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도적이 이 문에 이른다면 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못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니 쌓지 말게 하라." 라 답하며 거절하였다.[38]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한양에 남은 건물은 숭례문과 흥인문 뿐이었다. 나머지 6문은 거의 100년이 지난 숙종 이후 돈의문 광희문을 시작으로 하나씩 문루를 복구하였다. 숭례문과 흥인문이 성문으로써 기능을 다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거나 대전쟁을 빗겨가고 긴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대공사는 고종 시기로 알려져 있다. 복구 공사 당시 해체 결과 고종 당시의 부재가 있어 적어도 지붕을 크게 들어내는 큰 공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5.2. 개화기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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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숭례문(1890년대) <colbgcolor=#bf1400> 한양도성 성곽이 연결되어 있는 숭례문의 원형 모습.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외국인들이 들어오고, 한양이 본격적으로 서양 세계에 알려지면서 한양에 들어오는 정문인 숭례문 역시 서울에 관광 온 외국인의 입을 통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대표적으로 퍼시벨 로웰(percival lowell)은 1883년 조선을 여행한 기행문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서울에 입성하는 순간의 숭례문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윽고 가파른 길을 벗어나자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고 집들도 더욱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일행이 한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거기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도시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처럼 아름답고 색다른 풍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본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내 어릴적 꿈을 상기시켜 주는 장면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마술사가 빚어 놓은 무엇처럼 내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숭례문’[영원한 의식의 문(The Gate of Everlasting Ceremony)]이었다. 남문인 숭례문은 서울을 에워싼 여덟 개의 입구 가운데 하나이다. 문 양편에는 마치 팔을 펼친 듯 위가 들쑥날쑥한 톱니 모양의 벽이 뻗어 있었고, 벽 너머로 기와지붕이나 초가지붕을 한 나지막한 단층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39]
Percival Lowell, "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6, 76p. (조경철 역,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
한편, 서양에서 랜드마크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숭례문의 의미도 단순히 관문이 아닌,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대표한다는 의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숭례문을 한국을 홍보하는 엽서 등에 삽입하면서 숭례문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표상 중 하나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숭례문의 성곽이 헐린 것은 그 존재 의미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1907년 숭례문의 좌우 성곽이 헐렸으며[40][41]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등이 고종에게 교통에 방해되므로 철거하자고 건의하여 이루어졌다.[42] 같은 해 10월 요시히토 황태자의 방한이 있었는데, 이와 연결지어 황태자의 방한과 맞추어 성벽을 헐었다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는 설이다. 숭례문은 양팔을 잘리고 도로 한 가운데에 고립된 모양새가 되었다.
한편, 1907년 8월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일제의 해산 명령에 반발하면서 벌어진 전투인 남대문 전투에서는 하필 숭례문을 일제가 차지해서 싸우는 바람에(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 성벽이었기 때문이다.) 숭례문에서 벌어진 최초의 실전 전투가 일제의 방어전이 된 씁쓸한 일도 있었다.

이로써, 숭례문은 서울의 관문으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상실하고 관광물/랜드마크라는 정체성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제 강점기로의 전환과 잘 대응된다. 이후, 서울의 관문 기능은 1900년 건립된 남대문역, 1925년 건립된 구 서울역이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다만, 서울역이 절묘하게도 숭례문을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져서 전통적 관문 및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이 대신 강화되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 이후에도 숭례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성과 함께 서울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문학을 비롯한 여러 대중매체에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숭례문의 신세 한탄을 빌어 고립된 숭례문에 대한 측은지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43] 일부에서는 민족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 발표된 <남대문 타령南大門打鈴>은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치안 방해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한양성중 사대문에 남대문이 으뜸일세
파루 소리 장단 맞춰 열고 닫던 문도 좋다
여는 때는 새벽바람 닫는 때는 저녁 연기
만호 장안 너만 믿고 잠꼬대도 깊었었다
넝쿨넝쿨 푸른 잎이 천만년을 기약더니
편갈리고 발이 잘려 열린 채로 해가 가네
열렸거든 닫히거라 닫혔거든 열리거라
닫던 사람 어델 가고 열던 사람 오는구나
<남대문 타령南大門打鈴>, 이고범 작사, 1933.

외국인들에게도 숭례문은 서울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결핵 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료 선교사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이 기획한 크리스마스 실(1932) 도안에서 숭례문과 황궁우가 등장하는데, 숭례문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조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그림"임과 동시에,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임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엽서에서 숭례문은 서울의 상징이었으며 이는 일제에서 만든 엽서도 마찬가지였다.[44]

한국인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 않는 사실이지만 일제가 숭례문을 보존한 이유에는 이를 일종의 개선문처럼 여긴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실상 실권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제국 말부터 일본은 교통을 위해 숭례문도 철거하려고 했지만,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온 성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군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입성한 문입니다. 조선출병( 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라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 실려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숭례문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한양 점령'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여겼으며, 훗날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면서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을 이뤄낸 자신들의 역사를 빛내는 시초의 건축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이유도 이 이유가 크다. 같은 이유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과한 흥인지문 역시 철거가 취소되었다.

숭례문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관문인데다 서울의 역사에 맞먹는 시간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쌓임에 따라 매우 다양한 기억과 복합적인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35년의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당시 일제 및 총독부는 숭례문을 일제 치하 조선의 긍정적(소위 내선일체적) 상징으로서 여겼다면, 광복을 기다리는 어떤 한국인들은 숭례문을 나라를 잃은 민중을 대변하거나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대상으로 여겼다. 당시 일방적 갑이었던 일본 측의 역사적 고려는 숭례문을 보존하는 선택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일제가 물러나면서 숭례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 셈이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불국사를 태워먹었다)

5.3. 현대

파일:숭례문 김일성 스탈린.jpg
파일:external/english.chosun.com/2006062261018_3.jpg
<colbgcolor=#bf1400> 숭례문에 걸린 김일성[좌]과 스탈린[우]의 초상화 및 북한 국장 <colbgcolor=#bf1400> 한국전쟁 당시 숭례문
해방 이후,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서울을 뒤덮은 융단폭격에도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비록 건물의 일부가 피탄되어 무너졌으나 다행히 화재로 번지지 않아 전후에 복구할 수 있었다.

1961년~1963년 전면적인 해체 수리가 진행되었다. 방화 사건 직전의 숭례문은 이 때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이니만큼 최고의 장인들을 동원해 심혈을 기울여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용마루가 짧아지는 등 몇가지 변형이 있었다. 수리 이전 숭례문은 용마루를 길게 하기 위해 목구조 상의 추녀와 추녀마루가 일치하지 않았으나, 수리 과정에서 둘을 맞추면서 용마루가 짧아진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부분은 2008 ~ 2013 복구 공사 당시 옛 사진과 도면을 참고해 수정되었다. 한편 단청은 이후 잦은 변경이 있었으나 이 때의 단청이 가장 고증에 충실하여 1963년의 단청을 기준으로 복원되었다. 당시 제작된 수리 보고서인『서울南大門修理報告書』는 2013년 문루 복구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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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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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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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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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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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파일:서울_숭례문_현판과_우진각지붕_(촬영년도___2015년).jpg
숭례문의 단청은 1954년, 1963년, 1970년, 1973년, 1988년 각각 재시공되었는데, 1954년 단청은 전후 복구에 따른 것으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며 1963년의 단청은 상기한대로 해체 수리 과정에서 적심에서 발견된 옛 부재에 남은 단청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기 오염으로 빠르게 색이 변질되자 1970년에 재시공하였고, 1973년에는 보다 화려하게 금단청을 입혔다가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맞추어 단청을 재변경하였다.[47]
숭례문은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을 새로 제정하면서 국보 1호로 지정되었고, 그 이름이 주는 상징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되었고 대외적으로도 그러한 방향으로 홍보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는 1934년 일본이 보물 1호를 숭례문으로 지정한 데에서 비롯된 거라 논란이 이전부터 거셌다. 이 역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대표적인 논란이 된 것이지 사실 숭례문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기에, 한국 문화재 목록의 역사적 맥락, 행정 관리 등 문화재계 전체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되었다.
해당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것은 1996년 광복 50주년 기념 차원에서 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 위원회"를 연 것이다. # 이 때 일제 강점기에 지정된 503 건의 문화재에 대한 전체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국보 1호 변경 논란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숭례문보다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국보 1호로 교체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해당 주장 측에서는 석굴암, 불국사, 훈민정음 등을 예로 들었다. # 이 때 당국에서는 "국보 "1호" 등 지정 번호는 가치 순이 아닌 지정 순서"라며 실제 교체는 이뤄지지 않고 "서울 남대문"을 "서울 숭례문"으로 이름이 교체되는 데에 그쳤다. # 이후 2005년에 같은 논란이 일어났으나 국민 여론으로 무마되었다. # 이 논란은 방화 사건, 부실 복구 논란 직후 재점화되었는데, 결국 문화재청 측에서는 2021년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추가적인 논란을 차단하였다.

숭례문은 수십 년 동안 섬처럼 고립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숭례문 본래의 관문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 이후 서울시에서는 광장을 조성하여 2006년 3월 3일 개방하여 숭례문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

5.4. 2008년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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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ds21.egloos.com/c0209256_591f8a4e1a5c8.jpg
<colbgcolor=#bf1400> 방화 사건 7년 전인 숭례문의 모습 (2001년 4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숭례문 방화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건축 이래 큰 이변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에 방화로 인해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2층 문루의 90%, 1층 문루의 10%가 붕괴되고 석축과 여장이 일부 파손되었다. 복원 작업은 5년 뒤인 2013년에 완료되었으나, 단청이나 목재 등에 대한 부실 공사 논란이 발생하였다.

6. 사건·사고

7.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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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DSC_5785.jpg
<colbgcolor=#bf1400> 숭례문 교대식 행사
전소하기 전날까지 숭례문을 지키는 사람(수문장)을 교대하는 의식을 보여주는 행사를 했다. 저녁때쯤 철수했다고 한다.

현재는 파수의식으로 대체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수문장 교대식 문서 참조.

8. 다른 매체의 숭례문

파일:C7758-06.jpg }}} ||
<colbgcolor=#bf1400> 〈투모로우〉 한국판 포스터
지구온난화로 인한 빙하기가 배경인 영화 〈투모로우〉의 한국 전용 홍보 포스터로 다름 아닌 숭례문이 눈에 파묻혀 얼어붙은 모습이 쓰였다.[48]
* 괴혼 시리즈 중 '데굴데굴 쫀득쫀득 괴혼'에서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처 지형은 서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 에이지 오브 코난〉에서 퀘스트로 '파괴된 숭례문 복구'를 한다고 밝혔다.
* 〈 야채부락리〉의 마을맵 중 하나로 나온다. 거기다가 몬스터로는 방화범(...)이 나온다.
* 숭례문 복원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백괴사전에서는 '례문'(...)이라는 항목명으로 등재했었다. 숭례문 복원 공사가 완료된 후에는 다시 숭례문으로 돌려놓았다.
* 남성 듀엣 바이브 4집에 숭례문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한 〈숭례문〉이 수록되었다. 남성 테너와 여성 소프라노까지 기용한 나름 웅장한 곡이다. 사실 전주 부분만 바이브가 부르고 성악 파트가 훨씬 많다.
* ||<table width=500><tablebordercolor=#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kimgabul1.jpg }}} ||
<colbgcolor=#bf1400> 〈아랑전설2〉에 나온 숭례문
아랑전설 2〉에서 최초의 외국 게임 속 한국인 캐릭터 김갑환의 스테이지에 최초의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
* 숭례문 복원 이후 신한은행에서 CF를 찍어 홍보했다.[49] 사실상 숭례문 복원 후의 최초 TV 광고이다.
* 〈 모두의마블〉과 〈 프렌즈마블 시즌2〉에서도 서울의 랜드마크로 숭례문이 나온다.[50]
* 〈 뽀롱뽀롱 뽀로로〉의 스핀오프작 중 하나인 〈 뽀로로의 한국대모험〉에서는 뽀롱뽀롱 숲으로 돌아가려던 뽀로로 크롱이 숭례문을 발견하고 문 앞에 앉아있다가 잠에 빠진다.[51]
* 〈 외계+인 2부〉에서의 시간 여행을 위한 포탈의 2022년 쪽 입구가 숭례문에 있다.
* K리그1 2020시즌 공식 인트로에 남산서울타워, 서울월드컵경기장과 함께 FC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로 등장했다.
* 온라인 TPS 게임 APB Reloaded에 등장하는 고급 차량 '숭례문 모이라이'가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시설이다보니 심시티 시리즈 시티즈: 스카이라인과 같은 시티빌더 게임의 한국 에셋으로 단골 출연하고 있다. 2023년 출시된 시티즈: 스카이라인 II에는 아예 기본 에셋으로 포함되었다. #

9. 찾아오는 방법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 서울역에서 약 400m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버스의 경우 옛 YTN타워 앞의 정류장이나 숭례문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가 많으므로[52] 이것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일부 노선들은 한쪽 방향에만 숭례문에 정차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중앙차로는 서울역 방향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서울역버스환승센터 7번 승강장은 숭례문 쪽으로 직결되어 있다.[53]

버스 정류장명 중 서울역 방향으로 "서울역, YTN"으로 된 정류장이 있는데, 정작 서울역에서는 이 정류장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고 지하철 출구를 횡단해야 한다. 게다가 노숙자들을 보면서 횡단해야 한다.

정류장이 옛 YTN타워와 신한은행 바로 앞에 있고 이 정류장에서 숭례문이 코앞인데다가 YTN이 본사를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정류장명도 숭례문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버스들은 여전히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버스들이 이 낚시성 표기를 많이 하므로, 수도권 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서울역과 숭례문을 오갈 때 유의해야 한다.

10. 여담

11. 갤러리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파일:서울 숭례문_홍예기석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홍예기석
파일:서울_숭례문_현판과_우진각지붕_(촬영년도___2015년).jpg
숭례문의 현판과 우진각지붕
파일:서울 숭례문 측면 전경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측면 전경
파일:서울 숭례문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문
파일:서울 숭례문_홍예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홍예
파일:숭례문 홍예 천장(2015).jpg
숭례문의 홍예 천장
파일:숭례문 현판(2015).jpg
숭례문의 현판
파일:숭례문 정면.jpg
숭례문의 정면
파일:숭례문 전경(2013).jpg
숭례문의 전경
파일:숭례문 야경(2013).jpg
숭례문의 야경
파일:숭례문 복구 기념식(2013.05.04).jpg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에서의 숭례문
파일:문루 해체 과정(2010.02~2010.04).jpg
화재 후, 문루 해체 중의 숭례문
파일:오전의 숭례문 전경.jpg
오전의 숭례문 전경
파일:숭례문 수문장(1965).jpg
1965년, 숭례문과 수문장
파일:숭례문 야경(1963).jpg
1963년, 숭례문의 야경
파일:attachment/seoulsouthgate.jpg
1904년, 숭례문과 숭례문의 성곽
파일:남대문 시장과 숭례문(1904).jpg
1904년, 남대문 시장과 숭례문
파일:숭례문(1882).jpg
1882년의 숭례문
파일:봄 숭례문(2015).jpg
숭례문의 춘경

12. 외부 링크

13. 국보 제1호

파일:정부상징.svg 문화재 설명문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화재로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Ο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훼손되었다.

14. 같이 보기


[1] 로마자 표기법에서는 발음되는대로 적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Sungnyemun이 맞다. [2] 사단(四端)인 인/의/예/지로 한정하기도 한다. [3] 첫 기록: 태조 5년 9월 24일 [4] 승정원일기에서는 순조 대까지 발견 [5] 첫 기록: 중종 18년 6월 29일 [6] 현전하는 본(本)은 1791년(정조 15) 보완 [7] 태조 3년 9월 9일 [8] 태조 4년 10월 7일 [9] 태조 7년 4월 26일 [10] 하지만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한양의 주산을 두고 논쟁하였으며 무학이 "200년 후를 지켜보라"고 발언하였다는 등의 훗날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야사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삼봉집』에서는 임진왜란을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또한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 아니다. 세종 8년 10월 26일 [11] 어느 성곽이나 남쪽 문은 남문 또는 남대문이라 불렸으며 특히 개성 내성의 남문은 공식 명칭이 남대문이었다. [12]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리고, 수원 장안문이 보통 북문으로 불린 것과 유사하다. [13] 단순 계산으로 <실록>은 '남대문' 252건, '숭례문' 203건이며 <승정원일기>는 '남대문' 212건 , '숭례문' 1516건이다. [14] 해당 실록은 1413년 3월 편수하고, 1448년 6월 증보 편수하였으므로 적어도 1448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15] 원문: 雲峴之始得政也, 甞因公會, 盛氣向諸宰曰,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16] 숭례문, 흥인문은 각각 남대문, 동대문으로 불렸으나 돈의문은 옛날에는 서대문이 아닌 새문(신문新門)이라고 불렸다. 규모도 평범한 1층 문루였다. [17] 1448년 홍치제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관리 [18] 태종 16년 6월 5일 [19] 영조 즉위년 11월 25일 [20]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울 숭례문 [21] 양녕대군 후손들이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 편액을 내려달라고 영조에게 요청하는 상소문의 일부로써 전체 내용은 대부분 양녕대군에 대한 칭송이다. 문중 입장에서 당연히 최대한 포장해서 썼을 것이기에 행적 부분은 감안해서 봐야하지만, 적어도 당시 숭례문 편액이 양녕대군의 작품이며 잘 쓴 글씨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다. [22] 유진동과 관련해서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는데 2008년에 출간된 '죽당 유진동'이라는 책에서 숭례문의 현판에 관련한 내용을 총정리한 적이 있다. # 이 책에서는 중간에 작자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23] 이 때쯤 이승보가 현판 탁본을 떴다고 전해지는데, 이 탁본이 훗날 현판 복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24] "신은 듣건대, 우리 서울(國都)의 주산(主山)이 화산(火山)의 〈형국(形局)이기〉 때문에 당초 도읍을 정할 때에 모화관(慕華館) 앞과 숭례문(崇禮門) 밖에 못을 파서 진압하게 하였는데, 신이 직접 본 바로는 병오년부터 화재가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전자에 이중(里中)으로 하여금 요령(搖鈴)을 가지고 길에 돌아다니면서 서로 경계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이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25] 원래 전통적으로 잘 썼다는 글씨는 괴이한 빛을 발한다는 식의 야사가 많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편액의 경우 글씨가 밤에도 빛난다고 해서, 근처 고개 이름이 “야주개”(夜照現)였을 정도다. [26] 중앙은 지덕사 소장 현판 탁본, 우측은 화재 당시 손상된 현판. [27] 신증동국여지승람 # [28] 세종 15년 7월 21일 [29] 성종 13년 11월 9일 [30] 『오주연문장전산고』 # # [31]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58)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남대문 옆 연못, 南池 # [32]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33] 문화재청 [34] 상량문 : 洪武二十玖年丙子十月初六日 判事嘉靖大夫中樞院使崔有慶正憲大夫全羅道觀察黜陟使李茂 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完山府尹孫興宗 副判事前嘉善大夫開城府尹李之浩 前嘉善大夫戶曹典書石崇使前中直大夫司僕卿尹乙休 副使前司僕少卿景廉 判官前中郞將張仁哲前中直大夫司僕卿朴理 前書雲副正張璡 前中郞將權乙奇 司損司直兪英俊 前中郞將金建 前中郞將鄭壽山 前中郞將崔興國 前中郞將任富前中郞將金渚 前中郞將金允甫 前中郞將庚鼇山 常務錄事 都評議錄事前別將孫興夏 都評議錄事前別將張籍 別監役 前南部令朴貴生石手 某主 ○○ 鄭化 ○○…○賢布 富議 ○同…○天湜 金豆彦王持…○○ 軍人 全羅道完山府 任領內 合陸仟捌伯拾柒名 (考古美術同人會, 7~8쪽) [35] 서치상, "여말선초 목조건축 부재 묵서명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2018), vol.27, no.3, 통권 118호 pp. 43-58 # [36] 세종 15년 7월 21일 [37] 세종 29년 8월 30일 [38] 성종 10년 1월 17일 [39] The trail gradually became steeper, entered a defile, and passing through a cut in the hills emerged upon other suburbs more densely populated than those below. The travel increased, the house thickened; we turned a corner, and the great walled city of Korea lay spread out at our feet. / I have seen sights as beautiful, as strange, before; but I never beheld anything that so completely realized the fancies of my boyish dreams as what I stood gazing upon then. There they all lay spread out before me as if conjured up to life, —the imaginations of the time when, as a lad, my thoughts sped away from the pages of the "Arabian Nights" to the dreamy Orient. In front of me rose the south gate, —by name, "The Gate of Everlasting Ceremony,"—one of the eight clasps of the city's girdle. On either hand stretched a crenellated wall, encircling as with an arm the spot it loved. Protected within, nestling to it for safety from without, huddled the low one-storied houses, —a sea of roofs, some tiled, some thatched. archive [40]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성벽같이 생긴 담벽이 바로 숭례문 성벽이다.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보도블록에는 성돌이 박혀있다. 성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놓은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숭례성터길이다. [41] 여담으로, 이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2008년 숭례문 복원할 당시 숭례문 옆 아스팔트 도로 위에다 붉은색으로 숭례문을 연결한 한양도성이 지나간 자리를 성돌 모양으로 표시해놨었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 재포장으로 인해 지워진 상태이다. [42]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電車)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門樓)의 좌우 성첩(城堞)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線路)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고종 44년 3월 30일 [43] "오늘은 ○○ 행차의 자동차 바람뿐이오 미국 관광단의 인력거 행렬뿐이니 신세가 이 꼴에 무슨 소리를 하오리까". "구문팔자타령(九門八字打鈴)-남대문(南大門) (3)" , <동아일보>, 1928년 4월 26일. [44] 목수현, "관광 대상과 문화재 사이에서 -숭례문, 황궁우, 경회루를 통해 본 근대 ‘한국’ 표상 건축물의 위상-",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9집|15~42쪽|2014.11 [좌] [우] [47]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 및 성곽 복원공사 수리보고서", 2013 # [48] 파일:ds_040617_003.jpg
세종대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얼어붙어 있고 광화문이 눈에 파묻혀 있는 또 다른 버전도 있다.
[49] 숭례문 바로 건너편에 신한은행 본점이 있다. [50] 월드맵 한정, 한국맵은 N서울타워 [51] 이때 뽀로로 曰.엄청 큰 집이다. [52] 노선 목록은 이곳 참조 [53] 그래서 742번, 750A/B번, 752번은 도로 구조 때문에 상행(수색, 신촌방향)은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아예 정차하지 못한다. [54] 구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 현 서울교통공사 [55] 현재는 선후불 교통카드, 1회용 교통카드, 기후동행카드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