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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16:22:40

귀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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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guijusungfly.png
구글어스로 보면 일부 성벽이 지도상에 나타나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귀주성
龜州城

북한의 국보 제 60호.

1. 소개2. 역사3. 관련항목

1. 소개

평안북도 구성시 북쪽 이구산에 축조된 으로 귀주성이란 이름은 이구산을 감싼 성벽의 모양이 거북이 등껍질 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종 13년(994)에 평장사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게 한 다음 귀주성을 쌓게 했다.(成宗十三年 命平章事徐熙 率兵攻逐女眞 城龜州。) -《 고려사》지(志)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 졌는데 내성은 귀주성의 본성(本城)이고 외성은 그 후에 덧붙어 쌓았다고 전해진다. 내성은 약 5km, 외성은 1,5km 정도 된다. 높이는 5m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가 41개나 된다고 《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축조방식은 산능선의 바깥면을 깎아내고 거기에 성돌을 대는 외면 축조방식으로 쌓았으며 성돌들 사이로 삼화토로 메워 성벽이 평평하도록 만들었다. 남문과 동문, 서문, 북문터와 4개의 사이문터가 있는데 내성과 외성 사이를 잇는 지하문도 존재한다.

파일:attachment/guijusungdoor1.jpg
귀주성의 남문은 원래 것은 6.25 전쟁 당시 파괴되었고 현재는 1979년에 복원 된 것이다.

2. 역사

발해의 멸망 이후 강동 6주는 요나라의 영토가 되었지만 실상은 요나라의 영향력이 적어 발해 유민이나 여진족들이 날뛰는 무법지대에 가까웠다. 그러나 제1차 여요전쟁에서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요나라는 강동 6주를 고려에 양도하며 물러났다. 서희는 다시 올 거란의 침공을 대비해 강동 6주를 철저히 요새화했다. 귀주성도 이 때 건설되었다.

서희의 예상대로 제2차 여요전쟁이 일어나 요 성종이 침공해 개경까지 남하했지만 목표인 고려 현종을 놓쳐 회군하던 차 귀주 일대를 지나가던 거란군이 귀주 중랑장 보량과 별장 김숙흥에게 만 여명이 척살되었다.

제3차 여요전쟁에서 개경 공략을 실패해 철군하던 소배압이 귀주성 동쪽의 평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과 충돌해 귀주대첩이 일어나 소배압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도주했다.

여몽전쟁에서 1차 침공 때 몽골군이 귀주성을 포위했으나 고려군의 분전으로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3. 관련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