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6700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6700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
<rowcolor=#670000>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
<rowcolor=#670000>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덕종 | 정종(靖宗) | 문종 | 순종 | |
<rowcolor=#670000>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
<rowcolor=#670000>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
<rowcolor=#670000>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
<rowcolor=#670000>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
<rowcolor=#670000>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
<rowcolor=#670000> 제33대 | 제34대 | |||
창왕 | 공양왕 | |||
}}}}}}}}}}}} |
고종 관련 틀
|
||||||||||||||||||||||||||||||||||||||||||||||||||||||||||||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23대 대왕
고종 | 高宗 |
|||
|
|||
홍릉 전경 | |||
출생 |
1192년
2월 10일[1] (음력 명종 22년 1월 18일) |
||
즉위 |
1213년
9월 3일[A] (음력 고종 즉위년 8월 10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강안전 (現 경기도 개성시 송악동) |
|||
사망 |
1259년
7월 28일[B] (향년 67세) (음력 고종 46년 6월 30일) |
||
고려
강도
강화군
류경의 사저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
|||
능묘 | 홍릉(洪陵) | ||
재위기간 | 고려 왕태자 | ||
1212년
8월 26일[4] ~
1213년
9월 2일[5] (음력 강종 원년 7월 21일 ~ 강종 2년 8월 9일) |
|||
고려 제23대 대왕 | |||
1213년
9월 3일[A] ~
1259년
7월 28일[B][8] (음력 고종 즉위년 8월 10일 ~ 고종 46년 6월 3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개성 왕씨 | |
휘 | 진(瞋)[9] / 질(晊) → 철(㬚) | ||
부모 |
부왕
강종 모후 원덕왕후 |
||
형제자매 | 10남 2녀 중 장남 | ||
배우자 | 안혜왕후 | ||
자녀 | 2남 2녀 | ||
종교 | 불교 | ||
자 | 대명(大明) / 천우(天祐) | ||
묘호 | 고종(高宗) | ||
시호 |
고려: 안효대왕(安孝大王) 원: 충헌왕(忠憲王)[10] |
||
절일 | 경운절(慶雲節) | }}}}}}}}} |
[clearfix]
1. 개요
고려 제23대 대왕.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고려가 올린 '안효대왕'(安孝大王)과 원나라가 내린 '충헌왕'(忠憲王)이 있다. 보통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헌안효대왕'(忠憲安孝大王)으로 불린다.
휘는 '철'(㬚). 자는 '대명'(大明) 혹은 '천우'(天祐). 제19대 명종의 손자이자, 제22대 강종 원효대왕의 아들로, 권신 최충헌의 적(嫡) 매형이자 사돈지간이기도 했다.[11]
치세는 우봉 최씨 일가에게 끌려다니는 굴욕과 몽골과의 전쟁 두 가지로 표현된다. 이 시기의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고려대장경》[12]을 조판했다는 점인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우봉 최씨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는 했다.
2. 시호, 묘호, 존호
고려가 자주적으로 올린 공식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고종'이란 묘호는 '고조'(高祖) - '고종'(高宗) 등 '고'(高) 자 세트로서 상당히 좋은 묘호인데 한나라 태조 고황제 유방의 존칭이 '고조'였으며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묘호도 '고종'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시호를 받은 임금은 전부 국가가 멸망하기 직전일 때의 임금들이다보니 인식이 좋지 않다.[13]시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려의 천자로서 받은 독자적 시호인 '안효대왕'(安孝大王)이다. 시호가 아들 원종이 올린 시호뿐인데, 이는 고려가 워낙에 혼란스러웠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다보니 추가적인 시호를 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충헌왕'(忠憲王). 원나라가 제26대 충선왕의 증조부이자 제25대 충렬왕의 조부이니 원나라의 제후로서 3대조를 봉해준 것이다.
고종과 그의 후계자 원종은 묘호를 받고 고려의 천자식 종묘[14]에 안치된 마지막 두 군주였다. 누구의 제후로 안치된 것이 아니기에 원나라가 하사한 시호도 없었지만 1310년에 손자 충렬왕의 시호를 정할 때 원나라는 충렬왕을 포함해 그의 선왕들 2명도 시호를 정했다. 이는 원나라가 그들을 신하로 취급하는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다.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천자'(天子)[15], '만년천자'(萬年天子)[16], '지존'(至尊), '성황'(聖皇)[17], '아황'(我皇), '제'(帝)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는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했으며( 외왕내제), 이러한 점은 거란, 여진, 몽골 등 외부의 이민족에 대해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생애
1192년 1월 18일 아버지 강종이 태자이던 시절에 태어났다.[18] 5세 때인 1197년 할아버지 명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원덕태후는 모두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어린 고종은 어떻게 됐는지 《 고려사》에 나오지 않아 알 수 없다.수창궁 사변 이후, 1212년 아버지가 최충헌에 의해 임금으로 옹립되면서 서해도 풍주 안악군에서 다시 개경에 돌아왔으며, 이후 만 20세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고령의 아버지 강종이 재위 1년 8개월만에 붕어하면서 1214년 천위(天位)에 올랐다.[19]
1215년 아버지 강종을 태묘에 모시면서 선조들[20]에게 시호를 더하고, 위봉루에서 사면령을 내리며 국정 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규보는 고종에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을 지어 올리며, 고종을 '성황'(聖皇), '제'(帝)라고 찬양했다.[21] 고종은 왕실 제사를 크게 치르며 제18대 의종 이후 추락할대로 추락한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려 한 듯하지만 힘이 없어 최충헌의 눈치를 보는 신세였다. 특히 최충헌은 고종이 움직일 때 왕의 허가도 없이 어가에 같이 타는 무례함을 보이며, 고종을 우습게 봤고 최충헌의 중방이 조정을 마음대로 다루며 왕실의 건물을 부수는 등 만행은 여전했다.
고종 3년, 몽골 태조 칭기즈 칸 11년인 1216년부터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전란을 통해 당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몽골 제국과 고려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문서와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 참조.
1216년 금나라에 반란이 일어나고, 가뭄이 드는 등 나라 꼴이 막장이 되자 금나라가 구원 요청을 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지만 모두 무시하고 차단했다. 하지만 금나라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온갖 재화를 들고 고려 국경에 와서 당시 밀무역이 흥했다고 한다. 8월에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들이 고려에도 선전포고를 해오자 군대 인사를 재조정했고, 9월부터 작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달단군"(몽골군)이 금나라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참고.
1217년 거란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해와 황주[22]가 속절없이 공격당했다.
1218년 금나라 반란군[23]에 후요까지 침공하며 북방은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12월에 몽골군이 포선만노와 힘을 합쳐 거란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고려 북방으로 군대를 몰고 들어왔다.
1219년 1월 몽골과 고려의 정식 접촉이 성사됐지만 몽골의 장군들은 무례하고 고려의 예법을 몰라[24] 자신들의 털옷과 활을 찬 채로 고종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려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고종의 안색이 변하고 좌우가 당황했을 때 한 신하가 "감히 추한 오랑캐(醜虜)가 지존(至尊)에게 다가가려 하다니!"[25] 라고 외치며 나가라고 하자 결국 몽골 장군들은 고려 예법대로 고려식 의복을 입고 읍을 했다.[26]
1219년 9월 20일 제5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초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자가 되었다. 1221년 9월 몽골 사신이 또 와서 늘 했던대로 오만하게 굴자 고종은 몽골 사신을 내쫓고 사신을 더이상 받지 않으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해 화를 냈다고 한다. 고종은 고려 대왕의 왕권이 아무리 추락했다고 해도 고려 안에서는 천자(天子)로서 군림했으니 몽골의 무례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1223년 '황태후'(皇太后)를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는데 태황태후는 당시 사망한 희종의 모후 선정태후와 생존해 있던 고종의 모후 원덕태후 2명 중 1명으로 보인다.
1224년 1월 신하들이 최우의 집에서 논의하여[27] 몽골 사신에게 예물을 쥐어주고 화친의 뜻을 담아 돌려보냈다. 근데 사신단은 비단 등을 국경에서 버리고 자기들이 요구한 수달 가죽만 들고 갔다.
1225년 1월 몽골 사신들은 몽골로 돌아가던 길에 강도에게 살해되었다.[28] 고려는 진상 확인을 한 뒤 강도에게 죽었다고 전했으나 몽골은 이를 믿지 않고 결국 단교했는데 이 사건이 나중에 길고 긴 여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고종은 최우에게 강제로 강화도로 끌려가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강화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살면서 온갖 '도량'을 벌였는데 '도량'은 불교 기도식으로, 역대 고려 제왕들이 자주 행했지만 고종만큼 자주 한 군주는 없었다. 천병신중(天兵神衆) 도량, 공덕천(功德天) 도량, 화엄신중(華嚴神衆) 도량, 인왕(仁王) 도량, 제석천(帝釋天) 도량[29] 등이었다. 보통 도량은 승려가 기도문을 읽는데 몇몇 도량은 고종이 직접 기도했다고 한다. 아마 국난을 기도로라도 풀길 바랬을 것이고, 실권은 최우가 쥐고 있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기도 했다. 불공을 드린다는 명목으로 감시 투성이인 궁을 잠시라도 나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한 몫했을 것이다.
1249년 11월 제6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제2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우가 죽고, 천출이었던 최항이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고종은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1254년 7월 강화도를 잠시 나와 승천부(昇天府)[30]에 있는 궁궐[31]로 가 몽골의 사신들에게 자신이 강도에서 나오겠다고 언급했다.
1257년 4월 제7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제3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이 죽고, 역시 천출이었던 젊은 최의가 집권자가 되었다. 제8대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최의는 선대 최항의 측근들과의 갈등 끝에 1년 정도 밖에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1258년 3월에 그 일족과 함께 주살되었으며(무오정변), 김준이 제9대 무신정권 집권자가 되었다. 1258년 5월과 8월에 다시 바다를 건너 승천부의 궁궐로 가 몽골 사신들을 접견했으며, 강화 협정에 따라 태자 왕전이 원나라에 입조하러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신하 류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가 결국 1259년 6월 30일에 붕어했다.
나는 덕이 부족한데 중한 자리를 맡은데다가 병까지 위중하다. 왕위는 오래 비워둘 수 없으며 하물며 나의 원자는 그 덕(德)이 상국에까지 잘 알려져 있으니 명하여 왕위를 잇게 하노라. 무릇 너희 해당 관사(官司)에서는 각기 일을 집행하는데 있어 새로 즉위한 왕의 명령을 따르라. 새로 즉위한 왕이 사행(使行)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국가의 중요한 일은 태손(太孫)의 명을 따르도록 하라. 능묘[山陵]의 제도는 검약에 힘쓰고,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상복을 입고[易月之服], 3일이 지나면 〈상복을〉 벗도록 하라.
- 《고려사》 <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유조(遺詔)이다.
- 《고려사》 <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유조(遺詔)이다.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거부한데다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조(遺詔)에 의해 태손 왕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 왕전은 이듬해인 1260년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50년 뒤인 1310년 7월 을미일, 과거 중국 한나라 제후의 시호는 한나라 황제가 하사했다는 전례에 따라 원나라에서는 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 고려국 충헌왕(高麗國 忠憲王)이라는 관작 및 시호를 추증했다.
4. 평가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의 시대에는 안으로는 권신(權愼)들이 서로 이어가며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하였고, 밖으로는 여진(女眞)과 몽고(蒙古)가 군대를 보내어 해마다 침입하였으므로 당시 나라의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보위(寶位)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親朝)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社稷)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고려사》< 고종 세가> 권 제24.
그러나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보위(寶位)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親朝)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社稷)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고려사》< 고종 세가> 권 제24.
고려 역대 제왕 중 가장 재위 기간이 긴 임금이었는데 무려 46년이었다.[32] 이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 광무제보다 긴 재위 기간이었지만 존재감은 훨씬 떨어지는데 그 기간 내내 최충헌을 비롯한 우봉 최씨 무신정권에게 권력을 빼앗긴 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33] 거기에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도로 옮기며 9차례나 벌어진 몽골 침략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최항 집권기에는 매우 큰 굴욕을 당하기도 했으며[34] 이러다보니 고종은 얼마나 최씨 무신정권에 쌓인게 많았는지 후에 김준이 마지막 집권자 최의를 죽이고, 이를 아뢰었을 때 공을 치하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그래도 최충헌 집권 때 5세로 우봉 최씨 무신정권의 흥망(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4대)을 모두 지켜본 풍운의 임금이었다.[35] 최씨 무신정권이 망하자 심한 낭비
《 동국통감》에서는 그야말로 붙어사는 왕으로 취급받지만 분수를 지켜 장기간의 재위를 했다는 점을 빌려 사직을 지킨 마지막 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권신들을 자체적으로 제거한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장기간의 재위 동안 권신들의 연이은 권력 독점에 손놓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37] 또한 원종에 대한 견제를 다 놓아 안경공 왕창이 원종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결국 안경공이 임연에 의해 왕에 올랐으나 원나라의 압력으로 폐위되어 원종이 다시 왕에 올라 안경공이 제거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그 사이 숱한 역모와 반란이 터지는 등 후사 문제를 말끔히 해결짓지 못했다. 조선 제16대 인조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었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 반대로 나간 덕택에 고종 나름대로 독이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오랜 재위를 바탕으로 무오정변을 이룩하는데 간접적 영향을 주며 내정면에서는 아들 원종보다 그나마 나았으나 권신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파탄내도 지켜만 보았고, 무오정변 이후 왕권을 공고히 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대신 외교에서는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점에서 보면 조선 제11대 중종과 비슷했다. 외치에서 성과를 거두고 권신들의 농락 속에서 재위를 오랜 기간 버틴 것은 높은 평가를 받으나 단지 그뿐이었고, 고려에서는 재위 기간을 놓고 볼 때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군주였으며, 그래서 평타만 치던 왕이었는데 이러한 점은 고려 17대 인종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애초에 고종 자체가 우봉 최씨 정권의 초대 권력자인 최충헌이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할 인물이었다.[38] 결국 즉위 초부터 권력 기반이 전무했기에 4대 62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의 만행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39]
5. 기타
- 베트남의 리• 쩐 교체기때 쩐투도에 의한 리씨 대량 학살을 피해 탈출한 리 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한 명인 리롱뜨엉 황자[42]를 받아줘서 잘 대우한 군주이기도 하다. 리롱뜨엉, 즉 이용상은 '화산군'에 봉해져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참고로 리롱뜨엉의 형이 대월의 황제였는데 그의 묘호도 고종이다.
- 다음 왕조에서 같은 묘호를 받은 군주와 능호도 ' 홍릉'(洪陵)으로 한자까지 일치한다. 또한 두 사람 다 재위 기간이 40년을 넘었으며[43], 수명도 만 67세로 일치하고[44] 재위 내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는 절묘한 공통점이 있다. 거기다가 두 임금들의 아들인 원종과 순종도 각기 외세의 지배를 받는 시대인 원 간섭기와 일제강점기를 맞이했고, 손자인 충렬왕, 영친왕[45]은 간섭/침략국 황족 배우자를 맞았으며, 증손자인 충선왕, 이구에 이르면 외국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그래도 침략국의 부마('귀르겐')국 형태로 나라가 유지는 됐으나 후자는 아예 나라 자체가 문을 닫은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전자가 후자에 비하면 나은 처지.
6. 대중매체
징기스칸 4 일러스트[46] |
-
<
무신> - 고종 (
이승효 분)
2012년 MBC 드라마 < 무신>에서는 배우 이승효[48]가 연기했다. 실제 역사대로 최씨 무신정권에 눌려 별다른 힘을 내지 못한 유약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정치적 실권은 최씨 상국들이 대를 물려가며 독점했고 고종의 곁에는 이장용과 소수의 신하, 환관들만이 함께 했을 뿐. 이 때문에 몽골 제국과 전쟁을 시작할 때, 최우가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김약선이 역모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 최항이 권력을 승계할 때 등 극 중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황실에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49]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 ||||||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세가(世家)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2권 | 3권 | 4·5권 | |||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
<rowcolor=#670000,#fedc89> 6권 | 7·8·9권 | 10권 | ||||
정종靖宗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 15·16·17·18·19·20권 | 21권 |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 25·26·27권 | 28·29·30·31·32권 | ||||
고종 | 원종 | 충렬왕 | ||||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 36권 | 37권 |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 133·134·135·136·137권열전 | 45·46권 |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
[ 표(表) ] | ||||||
86·87권 「연표(年表)」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
||||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 「공주(公主)」 |
||||||
태조 | ||||||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 ||||||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 성무부인 소생 공주)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혜종 | 정종 | 광종 | |||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 ||||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 경춘원군 · ( 문성왕후 소생 공주) |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 ||||
경종 | 성종 | 목종 | ||||
헌숙왕후 김씨 · 헌의왕후 유씨 · 헌애왕태후 황보씨 · 헌정왕후 황보씨 · 대명궁부인 유씨 | 문덕왕후 유씨 · 문화왕후 김씨 · 연창궁부인 최씨 | 선정왕후 유씨 · 궁인 김씨 | ||||
- | 원정왕후 · 원화왕후 | - | }}} | |||
현종 | ||||||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 ||||||
평양공 왕기 · 검교태사 왕충 · 효정공주 · 천수전주 · 인평왕후 · 경숙공주 · 효사왕후 · 효경공주 · 경성왕후 · 아지 | ||||||
덕종 | 정종 | |||||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 |||||
상회공주 · ( 유씨 소생 공주) |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 |||||
문종 | ||||||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 ||||||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 ||||||
순종 | 선종 | |||||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
-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 |||||
숙종 | 예종 | |||||
명의태후 유씨 |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 |||||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 승덕공주 · 흥경공주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인종 | 의종 | 명종 | |||
폐비 이씨 · 폐비 이씨 · 공예태후 임씨 · 선평왕후 김씨 | 장경왕후 김씨 · 장선왕후 최씨 | 광정태후 김씨 | ||||
대령후 왕경 · 원경국사 충희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 효령태자 왕기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궁주 | 왕선사 · 왕홍기 · 왕홍추 · 왕홍규 · 왕홍균 · 왕홍각 · 왕홍이 · 연희궁주 · 수안궁주 | }}} | |||
신종 | 희종 | |||||
선정태후 김씨 | 성평왕후 임씨 | |||||
양양공 왕서 · 효회공주 · 경녕궁주 | 창원공 왕지 · 시령후 왕위 · 경원공 왕조 · 대선사 경지 · 충명국사 각응 · 안혜태후 · 영창공주 · 덕창궁주 · 가순궁주 · 정희궁주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강종 | 고종 | 원종 | |||
사평왕후 이씨 · 원덕태후 유씨 | 안혜태후 유씨 | 순경태후 김씨 · 경창궁주 유씨 | ||||
수령궁주 | 안경공 왕창 · 수흥궁주 | 시양후 왕이 · 순안공 왕종 · 경안궁주 · 함녕궁주 |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
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 ||||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 세자 왕감 · 덕흥군 | 용산원자 | ||||
충혜왕 | 공민왕 | 공양왕 | ||||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 휘의 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 순비 노씨 | ||||
석기 · 장녕공주 | -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92권 | |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 ||||||
93권 | ||||||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 ||||||
94권 | ||||||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 ||||||
95권 | ||||||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 ||||||
96권 | ||||||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 ||||||
97권 | ||||||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 ||||||
98권 | ||||||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 ||||||
99권 | ||||||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 ||||||
100권 | ||||||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 ||||||
101권 | ||||||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 ||||||
102권 | ||||||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 ||||||
<rowcolor=#670000,#fedc89> 103권 | 104권 | |||||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 |||||
105권 | ||||||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 ||||||
106권 | ||||||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 ||||||
<rowcolor=#670000,#fedc89> 107권 | 108권 | |||||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 |||||
109권 | ||||||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 ||||||
<rowcolor=#670000,#fedc89> 110권 | 111권 | |||||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 |||||
112권 | ||||||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 ||||||
113권 | ||||||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 ||||||
114권 | ||||||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15권 | 116권 | 117권 | |||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 ||||
<rowcolor=#670000,#fedc89> 118권 | 119권 | 120권 | ||||
조준 | 정도전 |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 | |||
121권 | ||||||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 「충의(忠義)」 | |||||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 |||||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 「열녀(烈女)」 | |||||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 |||||
122권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 「환자(宦者)」 | 「혹리(酷吏)」 | |||
김위제 · 이녕 (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 송길유 · 심우경 | }}} | |||
123권 「폐행1(嬖幸一)」 | ||||||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 ||||||
124권 「폐행2(嬖幸二)」 | ||||||
윤수 윤길보 (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 ||||||
125권 「간신1(姦臣一)」 | ||||||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 ||||||
126권 「간신2(姦臣二)」 | ||||||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 128권 「반역2(叛逆二)」 | 129권 「반역3(叛逆三)」 | |||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 정지상) |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 |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 131권 「반역5(叛逆五)」 | |||||
한순 다지 · 홍복원 (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 |||||
132권 「반역6(叛逆六)」 | ||||||
신돈 | ||||||
133·134·135·136·137권 | ||||||
신우(우왕) ( 신창(창왕)) | }}}}}}}}}}}} |
[1]
율리우스력
2월 3일
[A]
율리우스력
8월 27일
[B]
율리우스력
7월 21일
[4]
율리우스력
8월 19일
[5]
율리우스력
8월 26일
[A]
[B]
[8]
역대 고려 군주 중 재위기간이 45년 10개월로 제일 길다.
[9]
'눈목 변' 대신 '날일 변'
[10]
《고려사》 <고종 세가>에 따르면 처음 시호를 올릴 때 원나라의 시호는 없었다. 이후 50년 뒤인 1310년에 고려가 완전히 원나라의 제후국이 되어버렸을 때 원나라 제3대
무종 카이산 칸이 보냈다.
[11]
최충헌은 고종의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했는데, 고종의 아들인 제24대
원종의 장인이었던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사위였다.
[12]
현재 《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하다.
[13]
물론 고려가 이후 130년간 존속한 것은 맞지만 천자국으로서의 고려는 다음 군주인
원종 대에 멸망하고 사실상 몽골의 속국이 되어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앞의 서술이 마냥 틀린 것은 아니다.
[14]
7묘제 9실 종묘.
[15]
<
이규보 묘지명>, 《
보한집》 <권하>.
[16]
《
동국이상국집》 17권.
[17]
《동국이상국집》 <성황조향태묘송>.
[18]
이 때 강종의 나이는 무려 41세였으므로, 그는 아버지가 매우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였다.
[19]
수창궁 사변으로 제21대
희종이 폐위되고, 고종의 부왕인 제22대 강종이 올려지는 과정에서 고종을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강종과 최충헌 사이에 밀담이 오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20]
1대 태조, 2대 혜종, 8대 현종, 13대 선종, 15대 숙종, 16대 예종, 17대 인종, 20대 신종, 22대 강종. 당시 고려
종묘가 천자식 9실 7묘제였기 때문에 9명에게 올렸고, 사실상 당시 대표적인 군주 전원에게 올린 것이었다.
[21]
《
동국이상국집》 19권 기록.
[22]
현
황해북도 황주시. 고려 초
황보제공,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황주량 등을 배출한
고구려계 황주
호족의 본거지이다.
[23]
포선만노의
동하.
[24]
당시 몽골은 그 어떤 나라도 막지 못하는 최강의 나라였으니 무례한건 당연했고, 고려와는 단절되어 있었으니 고려의 예법을 몰랐다.
[25]
《고려사》원문에 실제로 이렇게 기록됐다.
[26]
원래 고종에게 절을 해야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27]
여전히 왕권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28]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9]
일반적으로
제석원에서 이루어졌다.
[30]
원래 정주(貞州)로 개경 개성부의 경기(京畿)(부속 도시)였다. 제16대
예종이 자신의 어머니인
명의태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승천부'로 떼어냈다.
[31]
'승천궐'(昇天闕)이라 한다. 승천부에 있는 궁궐이라 승천궐이었다.
[32]
2위는 37년의 11대
문종, 3위는 33년 혹은 34년의 25대
충렬왕(충선왕에게 물려준 7개월의 공백기가 있었다).
한국사 전체를 보아도 8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33]
무인정권, 그리고 전란 속의 왕권
[34]
당시 강화도로 도망갔던 최항은 미친 듯이 술잔치를 열어제꼇는데 정작 고종 본인은 왕실 재산이 바닥나는 바람에 점심 식사를 줄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종은 이 일을 지시하기 위해 좌창별감(창고지기) 윤평을 불렀는데 윤평은 2~3번이나 쌩까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왕이라고 고종은 분노하여 윤평을 파직시키려 했으나 "오늘 내쫒아도 내일이면 다시 복귀할 테니 이게 뭔 징계냐"라는 말과 함께 그만두었다. 이쯤 되면 진짜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신세로 동시에 최항이 고종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푸대접했는지 알 수 있다.
[35]
그의 할아버지인 제19대 명종도 같은 일을 겪었다.
[36]
물론 당시 기준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지만 특이하게도 《
고려사》의 사관은 '최씨 무신정권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살만해지니까 늙어 노망든거니 적당히 까여야 된다'는 평가를 내렸다.
[37]
최우가 죽기 일보 직전, 최항이 연이어 집권하기 직전에도 손을 못썼다.
[38]
최충헌이 고종의 할아버지인
명종(제19대)을 폐위시키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이자 고종의 부왕인 태자 시절의
강종을 강화도로 쫓아보내고, 명종의 동생인
신종(제20대)을 왕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신종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희종이 최충헌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여(수창궁 사변) 역으로 폐위당한 뒤 강종이 즉위하면서 고종 역시 태자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39]
희종도 권력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최충헌을 처치하려다가 역으로 그에게 당하고 만다.
[40]
기록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뒤를 이은 원종과 충렬왕 초기까지는 임금을 폐하라 불렀을 확률이 높다. 충렬왕 초기인 1276년에 원나라가 고려를 압박하여 기존의 천자국 국체를 모두 격하시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나라도 원종 재위기까지는 고려의 천자국 국체를 존중해 주었으나 충렬왕 재위기부터는 고려 내에 존재하던 천자국 국체를 얄짤없이 제후국의 것으로 격하시켰고 그 다음 군주인 충선왕 때부터는 고려 내에서 천자국 국체나 예법을 한 점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41]
이후 공민왕 시기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잠깐동안은 다시 폐하라는 경칭을 되찾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공민왕 말기 다시 명나라에 칭신하며 다시 경칭을 격하시켜 조선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42]
당시 대월(베트남)은 외왕내제를 취하고 있었다.
[43]
고려 고종 46년, 조선 - 대한제국 고종 43년.
[44]
생몰연도가 각각 정확히 660년 차이가 난다.
[45]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동생이다.
[46]
그런데
고려의 문신인
이규보와 동일한 얼굴이다.
[47]
동아시아 지역에서 재야 장수로 나온다.
[48]
2009년 MBC 드라마 <
선덕여왕>에서는
알천 역.
[49]
아버지
강종과 5촌 당숙
희종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이 겪은 일들을 알고 있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