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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3:32:09

원앙진

鴛鴦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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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에 나온 원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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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풍운대전에 나온 원앙진[1]

원앙진(鴛鴦陣)은 명나라의 당순치라는 장수가 설계한 진법으로, 척계광이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를 발전시켰다. 기효신서에 수록된 원앙진은 장창, 낭선, 당파, 쌍수도, 등패, 곤방을 기초로 하는 병사들을 단위로 묶어 만든 진법으로으로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척계광은 16세기 명나라에서 왜구 토벌로 명성을 떨친 장수이다.[2]

척계광은 기효신서에 다음과 같이 썼는데,
일본인들이 장도를 무장하고 흩날리듯 돌진하면 그 번쩍이는 모습에 우리 군대는 이미 용기를 잃었다.
일본인들은 힘차게 뛰어오르며 한 발을 내딛으면 한 자 이상, 장도의 길이가 다섯 자(尺)이면 총 일곱 자(尺)[3]까지 순식간에 돌격해온다.
이들의 검은 날카롭고 양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무게가 강력해,
우리 군대는 짧은 무기로는 그들의 무기를 받아들이기 힘들고, 긴 무기로는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워 그들과 맞섰을 때 무릎 꿇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일본군 혹은 일본 해적 등의 강력한 양손검 돌격, 그들의 기량과 호전성에 밀려 패퇴하는 것을 반복한 것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12명의 여러 종류의 무기를 지닌 병사들로 조를 이루어, 병사들이 겁에 질려 흩어지는 것을 막고 일본도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 요지이다.

척계광의 원앙진은 이정이 개발해 수백년간 동아시아에서 진법의 기본으로 쓰이던 육화진법을 빠르게 대체했다. 기효신서에 기록된 무예 6기는 후일 조선에도 전해져 무예제보에 실렸고, 이후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진다. 기효신서의 이 6가지 무기들은 각자 장단점이 있다. 장창은 긴 무기로 원거리에 적을 처리하기에는 좋으나, 낭선은 길이에 더불어 가지의 철붙이로도 공격하니 장창은 낭선을 당하지 못한다. 낭선은 그 기법이 등패를 뚫지 못해 등패는 낭선을 이기지만, 곤방의 음양수에 당해내지 못해 뒤집어진다. 곤방은 쌍수도를 당해내지 못하고, 쌍수도는 당파를 당해내지 못하며, 당파는 길이에 있어서 장창을 당해내지 못한다.(장창→낭선→등패→곤방→쌍수도→당파→장창→...) 이렇게 가위 바위 보처럼 물고 물리는 무기들을 하나로 모아 진으로 구성함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원앙진이다.

원앙진이라는 이름에 진법의 요체가 있는데, 이 이름은 새의 종류인 원앙에서 따온 것으로 한쪽이 죽으면 다른쪽이 따라 죽는 원앙부부의 금슬에서 따온 것으로 말은 멋지지만 사실 매우 무서운 군율을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만약 원앙진을 지휘하는 대장이 전사하고 전투에서 패배하면 분대원 모두가 사형을 당한다. 원앙진의 구성은 분대장 한명이 깃발을 들고 요도와 등패를 든 병사가 둘, 낭선이 둘 장창이 둘 당파가 둘, 화병(취사, 잡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실전 경험이 전무하고 제대로 된 규율을 갖추지 못해 터무니없이 낮은 전투력을 보였던 명나라 군대를 실전투입이 가능한 군대로 바꾸기 위한 진법이었다.

원앙진은 현대로 치면 소규모 분대에 적용된 진법이었다. 당시 남해안을 위협하던 왜구들 대부분은 통일되지 않은 소규모 집단들이었고, 간혹 대군이 오더라도 교전지역이 논두렁이나 시가지 등등이라 소규모 전투 빈도가 높아 높은 효과가 있었다. 원앙진의 원리를 잘 살펴보면 소수의 적을 다수의 병사가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명나라의 궤멸적인 훈련도와 실전경험에 비추어 보았을때 소수를 잘 훈련된 다수로 때려잡는다는 것은 당연한 발상이었고 실제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

현대의 원앙진은 한국에서 2002년 경에 24반무예 대학동아리 수련생들[4]에 의해 최초로 복원 및 시연 발표 하였고, 이후 십팔기보존회에서 후발 주자로 복원하여 현재 시연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조선 군대의 체계가 바뀐만큼 조선과 무관한 진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 다만 실제 원앙진은 이 정도로 빡빡한 등패수 방진을 짜진 않았다.저렇게 빡빡하게 하면 낭선을 쓸 곳이 없다 영화적 허용이라고 해야 할듯. [2] 16세기 명나라군고작 72명의 왜구들을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900명이 전사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왜구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나 이랬던 명나라군을 왜구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척계광이다. [3] 약 2.12미터 [4] 당시 복원발표를 진행한 인물들이 무예24기보존회에 대거 소속되었다. 따라서 무예24기 측의 복원이라 해도 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