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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09:36:13

김훈·최질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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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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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배경2.2. 무신 정변2.3. 거란의 침입2.4. 정변의 진압2.5. 진압 이후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6. 둘러보기

1. 개요

고려 현종 재위기에 김훈, 최질 등의 고위급 무신들이 일으킨 반란. 1014년 음력 11월부터 1015년 음력 3월까지 약 4개월 간 지속된 반란이었다.[1]

2. 전개

2.1. 배경

2.2. 무신 정변

2.3. 거란의 침입

2.4. 정변의 진압

2.5. 진압 이후

3. 평가

"영업전을 박탈당한 자들이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던 점을 볼 때, 영업전은 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경제 기반이었을 것이다. 영업전의 박탈이라고 표현했지만 토지 그 자체를 빼앗기보다는 영업전 소출을 녹봉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백관의 녹봉은 民田에서 거두는데, 경술년(1010, 현종 1)에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어 녹봉이 부족해졌으니 경군영업전으로 충당하자는 것이 황보유의의 의견이었다. 영업전이 民田과 동일한 국가수조지였다면 녹봉으로 사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영업전은 군인에게 복무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였다. 따라서 영업전을 녹봉의 재원으로 사용하게 되면 군인의 보수가 박탈당하게 되니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
역사학자들이 논문을 통해 김훈·최질의 난이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분석한 점을 종합해 보면, 황보유의가 관료로서 실력이 좋지 않고 결국 김훈과 최질 등이 불만을 품을 만한 일이었기에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 중론이다.[27] 물론 해당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문관 겸직에 대한 욕망 또한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 외에 색다른 해석으로는 문무 차별보다 유교관인층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28]

학자에 따라서는 현종이 무관이 문관직을 겸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금방 수락해준 것을 보면 의외로 이전에는 그것이 가능하였을지도 모르고, 장연우와 황보유의는 말 그대로 건의만 하였기에 이 의견을 수락한 권력자들이 따로 있었을 것이며, 이를 강조의 정변 당시 강조로 인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현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던 과거제 출신 관리들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강조의 정변과 과거제 출신 관리들이 군인 대우가 박해진 원인이었을 것이며, 난을 진압한 것도 과거제 출신의 이자림이였기에 그런 관리들의 권위가 높았을 것으로 해석한다.[29]

어쨌든 이런 큰 실책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종은 나름 뒷수습은 잘 했다. 주살한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이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는 군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무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하는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더라도, 그들이 무력으로 왕(현종)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기에 그들을 처벌하여 앞으로의 폐단을 막는 일도 왕조 시절 임금으로서 겸했던 것이다. 이는 직전에 바로 전대 국왕이었던 목종이 결국 시해당한 강조의 정변까지 현종이 직접 겪어봤던 것을 생각해보면 필요한 선에서 반란의 주모자들과 그 주변 관련자들에게 정말로 관대한 처벌을 내린 것이다.

이후 현종은 무관에 대한 예우도 개선하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과의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만여 명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 것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당시 고려의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하면 리스크도 꽤 클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종은 요나라와 큰 전쟁을 벌여야 했고, 전쟁 중인 상황에서 군인들의 월급을 죄다 횡령하고 나쁜 대우를 해주면 당장 칼과 창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해당 조치의 고려의 재정에 리스크가 컸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저렇게 뒷수습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오히려 2차 무신반란의 가능성마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래서 현종이 이러한 대책을 내놓았고, 기존의 문신들도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훗날 이런 교훈을 완전히 잊어서 터졌던 것이 의종 시절 경인년에 일어난 무신정변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현종 재위기간 중에 일어난 최악의 실책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문제있는 정책을 택하였고 문신들이 무신들의 월급이라 할 수 있는 영업전을 죄다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미친 짓을 방치한 현종 본인의 실책은 분명 비판 받을 수 있겠지만 해당 정책을 고안하고 집행했던 문신들의 역량 부족 또한 비판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마 무신들이 문신들의 정책에 불만이 있던거지 현종까지 폐위하지는 않은 덕분에 정변의 도중에도 문신들을 죄다 죽이지는 않고 귀양만 보내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고, 무신들이 현종을 강제로 폐위하고 강조의 정변 당시 목종의 사례처럼 왕을 죽인 다음 새로운 허수아비 국왕을 옹립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정변의 진압 이후 문신들은 현종에게 더욱 더 충성하게 된다.

4. 여담

5. 대중매체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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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건은, 현종의 재위기에 일어난 최악의 실책으로 거론되며 대략 이의방, 정중부가 주도한 경인년에 벌어진 무신정변보다 약 150년 정도 먼저 일어나서 고려 역사상 최초의 무신정권이 세워진 사건이기도 하다. 비록 어이없게 무너지기는 했지만 김훈과 최질은 약 4개월 동안 정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어쨌든 최초의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들로 볼 수 있겠다. [2] 고려는 무관들이 조선처럼 종2품 이상으로 승품하는게 불가능했던 탓에 더 높게 승품을 하려면은 필수적으로 문관에 임관돼야만 했다. 고려는 무과가 없었던 국가로 무반들은 가문대대로 승계되어 오든가,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그냥 뽑아서 임명하였다. [3] 참고로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종2품 이상으로 승품이 가능하여, 조선 역사상 극히 드물기는 했지만 조영무 최윤덕 같은 무관 출신 정승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당장 이순신도 정3품~종2품 품계의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더 상계 품위인 정2품 상계 정헌대부에서 역임했었다. 다만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운 것이 조선의 재상들은 크게봐서 정1~정2품직인 것과는 달리 고려의 재상들 중 가장 높은 문하시중이 종1품이고, 그외에 대체적으로 재상들은 정2~종2품직이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정1품 삼정승과 종1품 좌/우찬성이 재상이지만, 각 행정업무를 분할해서 담당하는 판서직과 몇몇 중요직들도 재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4] 대신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문관 못잖게 학문을 닦았다. 사실상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선비들 중 무술에 능한 이들이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했다고 보면 될 듯. 당연히 이순신도 문무에 모두 능했는데 이는 난중일기를 봐도 알 수 있다. [5] 여담으로 똑같은 한자어가 조선 후기 쓰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토지개혁책으로 한전론을 주장했는데, 한전론이란 매매가 불가능한 토지인 영업전을 두어 토지 소유자들이 생계에 지장이 없게 하고, 나머지 토지들은 매매를 허용해 토지들이 매매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토지분배가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6] 다만 원문을 어찌 해석하냐에 따라 1010년부터 시작한 군비 증강으로 인한 녹봉 문제가 난이 일어난 1014년에서야 큰 문제로 터져서 장연우와 황보유의 등이 그 해에 주장했을 가능성, 즉 수년간에 걸친 일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특히 관련 기록에도 언급되었듯 이미 무관의 관직 상승 제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최질 등의 무신들이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해도 문신들이 수년간 저런 행위를 하는 것을 해당 주장이 나온 첫 해에 항의했으면 모를까 묵과할 리 없었을 것이란 점도 있다. [7] 즉,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당시 백관들에게 줄 녹봉이 부족하다라는 이유로 황보유의 장연우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모두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큰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손가락만 빨게된 셈이 되었다. [8] 고려군의 중앙군은 당시 6위였다. 김훈·최질의 난이 진압된 후 2군이 추가되어 2군 6위가 되었다. 즉, 왕실 직속의 임금의 호위를 담당하던 친위군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셈이라 현종이 도저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9] 이로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강조의 정변의 시퀄이자, 무신정권의 프리퀄이 4개월간 이어졌다. [10] 고려사/고려사절요는 ' 겉과 속이 다른', ' 문외한', '정사가 어지러워져' 등으로 무신들을 비난한다. [11] 실제로 민심이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12] 또한 개경 인근 여러 사찰들은 고려왕실의 보호를 받던 특별집단으로 후대의 무인정권시절에도 왕실을 위협하던 무인정권을 상대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13] 이 시기에 이뤄진 사면은 반란 세력이 민심을 얻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기에 억지를 부린 부분은 꽤 있으나 한편으로는 무관이 문관직을 겸하는 것에 대하여 문관들에게도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무관들에게는 일부를 승급시킨 것 외에 은전을 지급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윤훈표 (2021) 『고려 목종·현종대 실시된 사면과 은전의 내용 분석과 그 특징』) [14] 당연히 장연우-황보유의는 제외. [15] 거란 성종이 강조의 정변 때처럼, 고려의 혼란을 놓치지 않고 침략한 것이다. [16] 앞서 1014년 6월, 요 성종이 "압록강에 부교를 놓고, 보주(保州)·선의주(宣義州)·정원주(定遠州)에 전진기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요사 # - 요사의 날짜는 실제와 1년까지 다를 수 있다. [17] 훗날 '왕가도(王可道)'로 개명했다. 해당 인물 문서 참고. [18] 한 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운몽의 연회'라는 고사를 가리킨다. [19] 이자림이 일찍이 서경에 인심이 있으므로, 제수에 무관들이 의심을 갖지 않았다. 현종은 계책을 제시한 이자림 스스로에게 먼저 가서 암살의 준비를 갖추게 한 것이다. [20] 이자림의 연회 준비가 마쳐진 것이다. 1월 말부터 거란이 압록강 남단에 전진기지까지 짓고 상시 대치하기 시작했으므로, 현종이 김훈-최질에게 '고려 측도 서경까지 가서 전방을 예의주시하자' 라고 제안하는 것은 특별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21] 이로서 4개월 간의 무신 정권이 끝났다. [22] 최구는 김훈-최질이 현종의 감시역으로 붙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사절요는 '성품이 거칠고 비루한 인물'이라고 기록한다. [23] 뒷수습을 나름 잘 한 것이다. 군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그들이 높인 대우는 유지하되, 무력으로 왕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처벌해 폐단을 막은 것이다. 앞서 목종이 결국 시해당한 강조의 정변을 직접 체험한 현종으로서는 관대한 처벌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24] 난의 최대 피해자인 그에게 재정을 관할하는 역할을 맡겼다. 일종의 '피해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25] 무관들이 만든 관호를 없애는 날에 동시에 무관들의 관급을 높여 다독인 것이다. 이후 1016년 1월에도 군인 및 전사자에 대한 포상이 있으나, 이는 이어진 제3차 여요전쟁의 국지전들의 포상 성격이었다. [26] 국왕에게 정사에 대해 간쟁하는 임무의 중서문하성 산하의 종4품 관직이다. [27] 박종기 (1998)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김보광 (2014) 『고려 성종·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 [28] 김두향 (2005)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박재우 (1997) 『11세기 권력구조와 정치운영』 [29] 김당택 (2008) 『고려 顯宗代 과거 출신 관리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 [30] 고려가 내부도 혼란스럽고 양면전선까지 열리니 강동 6주를 이번만큼은 내놓을 것이리라 생각하고 온 것으로 보이나, 현종이 내부도 진압하고 외적도 다 물리친 상황이라 자신있게 무례한 사신 따위는 인질로 삼은 것이다. [31] 조선왕조는 고려와는 달리 무과를 폐지하지 않고 계속 실시했으며, 무관들의 품계도 올려주는 등, 군인들의 대우는 대체로 고려왕조보다는 훨씬 나았다. 애초부터 태조 이성계가 백전노장의 무관 출신이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예를 들어 이순신은 생전 자신의 직위인 삼도수군통제사(정3품 ~ 종2품)를 더 높은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품계를 가지고 수행했으며, 전사 이후에는 정1품 상계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32] 중앙 정규군한테 1년이 넘도록 군량미를 지급하지도 않고, 그 후에는 모래와 겨를 섞는 군납비리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해당 사태 책임자였던 민겸호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지 않고 조사관으로 임명해서 피해자들이었던 군인들을 탄압하는 역대급 막장짓을 선보였다. [33] 78회 최종회가 1011년 제2차 여요전쟁의 최후인 '애전 전투'부터 시작해 전후 처리를 거쳐 1018~1019년 제3차 여요전쟁( 귀주대첩)을 후반 5분 정도로 정리하고 추석연휴 이전에 드라마를 급하게 마무리되면서 이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을 모두 통편집한 것이다. [34] 이는 오히려 예산 분배가 엉망인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35] 임오군란 여흥 민씨 즉 황후의 외척인 민겸호 군납비리를 저질러 이에 대한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벌인 난이었으나, 이정우 각본가는 자신이 각본을 담당한 조선 총잡이에서 이 사건을 안동 김씨들이 군인들을 선동시켜 원래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난을 일으킨 것처럼 왜곡시켰다. [36] 심지어 박진은 충주의 호장 출신에 당시 벼슬도 겨우 종7품 장작주부로 상장군까지 찍는 등 무관으로선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 김훈과 최질이 만나줄 만한 건덕지도 없는 인물이었다. [37] 후에 원성왕후 [38] 참고로 실제 역사상 권세를 탐했던 김훈과 최질 등으로 인해 조정이 혼란스러워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1014년 12월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의외로 원활하게 돌아간 부분도 있었다. 게다가 기록상 김훈과 최질 등이 직접 요구한 것은 어사대 혁파와 무관이 문관직을 겸하게 해달라는 것이 전부이다. # [39]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역사왜곡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엄연히 실존인물이 있는데 이렇듯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고 심지어 당시 무장들을 겁탈자처럼 심각한 가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각색의 범주를 심히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실존 군인들을 철저히 비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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