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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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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홍범도 · 이범석 · 안무
비판 비판,( 지역주민에 대한 폭력 · 빈주 사건),
대중매체 대중매체,( 야인시대에서),
관련 단체 육군무관학교 · 북로군정서
기타 청산리 전투 · 자유시 참변 · 김좌진 장군묘 ·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 김좌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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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역주민들의 희생을 동반한 활동과 지역주민에게 까지 폭력을 행사한 과격한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을 다룬 문서

2. 지역주민에 대한 폭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좌진/비판/지역주민에 대한 폭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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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역 주민들에겐 김좌진을 마왕, 폭군이라 부를 정도의 비판적인 정서가 있었다. 이것을 강제적인 군자금 모집만으로 해석하는 오해가 있다. 물론 강제적인 자금 모집도 김좌진이 비판받은 중요한 이유였다. 다른 이유는 독립운동이 지역 주민들의 희생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김좌진에 대한 연구자인 박환은 주민들에게 협력을 강요한 김좌진의 행동도 분명히 비판하지만 주민들의 "민족의식 저하"도 원인이라 평가한다.[1]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로 이주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저 생계 목적으로 이주한 것이었기에 민족의식도 옅고 한반도 본토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데에 열의가 없었다. 주민들이 이렇듯 독립운동가들에게 협력할 의사가 거의 없었기에 협조를 얻기 위해 폭력이 사용됐다.
김좌진은 주민들에 대하여 군자금을 요청하면서 대한국민으로서, 배달민족으로서 자각해서 그 의무와 천직을 다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은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이에 중국 지방 관헌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들을 체포하려 하였다.[2]
김좌진의 국내 진공을 위한 원대한 꿈은 재만 동포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군사 훈련에 동원되어야 했고 또한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군자금을 제공해야만 했다. 결국 이러한 제반 조건의 미비는 김좌진의 무장 투쟁을 북만주에 있는 친일파 제거에 국한시키게 되었다. 아울러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였다.
결국 김좌진의 무리한 무장 투쟁 노선의 추구와 일반 주민들의 이에 대한 이해 부족은 신민부의 분열로 나타났다.[3]
군정파는 적을 토벌하고 적 기관을 파괴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었다. 실제 친일 한국인의 암살 및 국내 진입을 위한 예비 공작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공작의 수행은 희생적 모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민부가 통치하고 있는 구역의 농민들이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생활을 보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무장 대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협조를 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일부 주민의 항일민족의식의 부족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군정파원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마치 무슨 권력이나 쥔 듯이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농민들을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군정파의 중심인물로 김좌진의 총애를 받은 이백호였다. 결국 농민들은 자연히 군정파에서 멀어져 갔다. 또한 김좌진을 "마왕·폭군"이라고까지 지칭하게 되었다.[4]
한편 김좌진의 무장 투쟁 노선은 주민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신민부 시절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에 대항하여 민정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부 주민들은 김좌진을 "민중의 생명을 학살한 혁명 전선의 교란자, 혁명적 사기한"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던 것이다.[5][6]
당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재만 독립군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민중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하였을 뿐 아니라, 수십만에 달하는 영세한 한인 교포에게 군자금 · 군수품 등의 제공, 통신 연락 등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로 인하여 독립군들은 한인 사회에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민중들로부터 경원시되었다. 심지어는 김좌진조차 한인 사회로부터 마왕 · 폭군으로 불리워지기까지 하였다.[7]

죽기 싫은 지역 주민들이 협력을 꺼린 건 매우 당연했고, 독립운동가들은 주민들에게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폭력을 동반한 위협을 가한 것이다.

3. 여담

김좌진의 폭력은 의외로 유명했었는데 주성하 기자의 글에도 언급된다.
중국측 사료를 보면 독립군은 러시아 국경인 밀산이라는 곳에 후퇴합니다. 그리고 김좌진 부대는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민가와 상점들을 약탈하는 토비부대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중략) 저는 김 장군의 부대가 훗날 토비부대가 됐다고 해서 김 장군의 업적까진 폄훼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시대에 살아보지도 못한 우리가 그 시대를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천박한 일인지 어렴풋이나마 압니다. #[8]
주성하도 김좌진의 업적까지 폄훼하고 싶진 않지만 김좌진의 부대를 토비부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8 # [2]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8 # [3]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11 # [4]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19-20 # [5]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28-29 # [6]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1988년 12월 30일, 아카이브 2021년 11월 26일 23:14:32 UTC의 평가와 일치한다. [7] 이호룡. (2001).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 혁명근거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6), 291쪽 # # [8] 2021년 12월 5일 00:44:13 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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