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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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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헌법의 벗 결사단 (1789~1792) 자유와 평등의 벗, 자코뱅 결사단 (1792~1794) |
원어 이름 |
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 Société des Jacobins, amis de la liberté et de l'égalité |
배경색 | 빨간색 |
창당 | 1789년 10월 6일 |
해산 | 1795년 11월 6일 |
정파 | 지롱드파 / 마레파 / 몽테뉴파 |
후계정당 | 클뢰브 뒤 팡테옹 |
당원 | 500,000 |
이념 |
자코뱅주의 ( 공화주의, 계몽주의, 폐지주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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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시기에 생긴 당파 중 하나이다. 명칭의 유래는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한 데서 유래되었다.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혁명을 추진한 시기로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주류 세력으로, 후술되어있듯 초기엔 여러 계파가 있었으나 계파 투쟁 끝에 막바지엔 공포 정치를 펼치다 테르미도르 반동(테르미도르 쿠데타)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민공회에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 좌익’의 어원이 되었다.( 링크)
2. 정의
원래는 클뢰브 데 자코뱅이라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정치 클럽이었다. 이 정치적인 클럽은 혁명 초기에 의회에서 의원들이 중구난방으로 발언하는 것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미리 토론도 하고 합의하여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파리를 벗어난 프랑스 각 지방에서도 자율적인 자코뱅 지부가 설립되어 혁명의 진전에 힘을 보탰다.그러나 혁명을 거치면서 신념과 정책에 의해 분열되었고, 먼저 입헌군주파이던 푀양파가, 이어 온건공화주의자들인 지롱드파가 이 클럽에서 탈퇴되고 궁극적으로 몽테뉴파(Montagnards, 산악파)[1]라는 급진공화주의자 집단이 자코뱅에 남아 있고 주도권을 쥐게 된다. 루이 16세의 '국가방위군'에 의해 진압되는 일이 있었으나 1년 후 공화정 수립을 주도하고 다시 지롱드파를 몰아내어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몰락한다.
이런 역사를 보면 시기에 따라 자코뱅의 구성이나 성격이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코뱅 하면 공화정 수립 이후 지롱드와 대립했던 시기의 급진공화세력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푀양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나 지롱드의 대표 주자인 자크 피에르 브리소 등 여러 성향의 인물들이 한때 자코뱅 소속이었지만, 그들을 가리켜 자코뱅파라고 하지는 않는다.[2] 권력을 잃은 이후에도 자코뱅은 급진공화주의의 대명사처럼 쓰였다("그 사람은 골수 자코뱅이야"하는 식).
3. 파벌
파벌 간 충돌이 심각해지기 이전에는 장 폴 마라,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세 명을 가리켜 “자코뱅 세 거두”라고 불렀다.3.1. 몽테뉴파
3.1.1. 에베르 파
급진 좌파로 극좌 세력이었다. 중요한 멤버 중 한 사람은 자크 르네 에베르이다.3.1.2. 당통 파
자코뱅의 우파 세력으로, 별칭 관용파로 불리기도 했다. 당통을 영수로 하고, 카미유 데물랭, 에로 드 세시르 등도 유력한 멤버이다. 술이나 여자, 갬블 등 인생을 즐기고 있던 향락적인 인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숙청당할 때도 반혁명과 더불어 부패가 주 혐의였다.3.1.3. 로베스피에르 파
자코뱅 내에서 일종의 중도파(에베르 파와 당통 파와 대비하여)로 분류하지만, 성향은 부르주아 중심의 정치적 개혁에 그치지 않고 평등주의적 경제정책을 추구하는 좌파에 가까웠다. 이는 자코뱅(급진공화파) 내에서의 중도라는 뜻이지, 전체 세력 중 중도파는 산악파와 대비되는 이름이 붙여진 평원파(자코뱅과 지롱드 사이)이다.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영향력이 컸고,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조르주 오귀스트 쿠통이 주요 인물이다.
지롱드 파를 몰아낸 이후 급진적이었던 에베르 파와 그 반대편이었던 당통 파를 거의 동시에 숙청하고 테르미도르 반동까지 공포정치의 절정기에 국정을 주도했다.
3.2. 네오 자코뱅
가장 급진적인 평등주의자 그룹이다. 너무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고,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유 재산의 폐지를 요구하는 등 분배 중심의 초기 사회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공산주의의 뿌리로 알려진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국제적인 직업 혁명가 필리포 부오나로티 등이 여기의 멤버로 거론된다.3.3. 마레파
몽테뉴파와 지롱드 중간에 위치한 계파.3.4. 지롱드파
고전적 자유주의, 온건 공화주의 계파지만 입헌군주주의자들과도 대화의 여지를 남기는 등 자코뱅 내에서는 '상대적 보수주의'였다. 자코뱅을 몽테뉴파가 장악해 사실상 자코뱅=몽테뉴가 되어버리자 대립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공화주의 계파지만 루이 16세 처형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한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3] 이때 국민공회에서 오른쪽 위치에 앉아서 상대적인 우파로 분류되기도 했었다. 이것이 우파의 직접적인 유래가 되기도 했으나, 지롱드 자체는 보수주의가 아닌 자유주의, 공화주의 계파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