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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01:04:08

산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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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호암미술관-산신도.jpg
호암미술관 소장 산신도[1]

1. 개요2. 상징
2.1. 성별
3. 산신 신앙
3.1. 한국의 산신 신앙
4. 목록5. 창작물에서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산신령()은 을 지키고 다스리는 신령을 말한다.

2. 상징

한국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적 존재로, 주로 백발에 긴 흰수염을 가지고 흰옷을 입은 할아버지로 묘사된다. 등장 장소는 주로 속이나 산중의 알 수 없는 곳, 또는 연못, 옹달샘 등이다. 산 하나와 가까운 지역을 관리하며, 호랑이를 수하로 부리며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2] 선도에서는 수행을 열심히 하는 이를 직접 보호하거나 부하를 시켜 보호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대충 취미로 산삼 등의 희귀식물을 키우며 애완동물로 야수를 키우는, 늙지 않는 산 관리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다시 말해 산의 인격화.

산이 많은 한국답게 전래동화에 단골로 출연하며, 주로 심마니에게 산삼의 장소를 가르쳐주거나[3] 도끼를 빠뜨린 나무꾼에게 귀금속 도끼를 막 주거나[4][5] 한다.

2.1. 성별

파일:여성산신도.jpg
여성 산신을 묘사한 보기드문 조선시대 산신도[6]
산신은 보통 할아버지로 많이 묘사되지만 할머니나 아줌마, 부부 산신도 존재한다. 일설에 따르면 본래 산신은 농경신/지모신적인 여신이었는데 이에 짝을 지우고, 유교 전통이 깊숙히 침투함에 따라 그 남편이 산신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여성 산신의 일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첩자의 꼬임으로 적성국( 고구려) 탐험여행을 떠나려다 세 미녀의 만류로 돌아온 김유신 설화이다. 이때 김유신을 구한 세 미녀가 서라벌을 지키는 세 산의 산신이었다.[7]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의 어머니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로 여신으로 되어 있는데, 가야산 해인사의 산신각에는 한동안 수염이 난 남자 산신의 그림이 모셔져 있었다.[8] 삼국유사에는 남해 차차웅의 부인으로 노례 이사금의 어머니인 운제부인이 운제산성모가 되었다거나, 중국 공주였던 사소가 바다 건너 진한으로 와서 박혁거세 알영 두 사람을 낳았고 선도산에 들어가 선도성모라는 산신이 되었다는 전승도 싣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쪽 5대조인 호경도 부소산(송악산) 여신에게 장가들어서 신이 되었다고 고려사 고려세계에 남아 있다. 지리산 산신도 지리산성모라는 이름의 여신으로 그 석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위숙왕후 한씨가 지리산성모라고 하는 전승도 있다. 조선 시대의 천예록에는 북악산의 산신이 여신으로 마주 보고 있는 목멱산( 남산)의 신과 부부사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권필이라는 선비가 북악산 여신의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이까짓 여자 귀신 따위가 뭐라고" 하고는 산신의 초상화를 찢고 제삿상도 엎어버렸다가 산신의 저주를 받아 귀양을 가게 되고 유배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강릉단오제에서 범일국사(성황신)와 함께 모시는 정씨 처녀(여성황) 역시 산신의 범주로 볼 수 있다. 덧붙여 일본에서는 산의 신은 질투가 심한 여자라고 한다.

그러나 산신을 원시시대 수렵이 주 경제수단이던 시절의 사냥의 신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에서는 남신이라고 하며, 과거 주요 사냥터였던 산을 다스리는 점과 사나운 맹수 호랑이와 관계되거나 호랑이를 부리는 것을 그 근거 중 하나로 들고 있다. 중국의 고서인 후한서 「동이전」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고 호랑이에게 제사 드리며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서술하고 있어 최소 원삼국시대 때부터 한국에서는 호랑이를 산신격으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산신멩감신앙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산신멩감은 수렵신으로 산신군졸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남성적인 성향을 보인다.

3. 산신 신앙

산신도 위격에 따라 등급이 있어 낮은 산신들은 야트막한 산을 다스리지만 높은 산신은 특정 지역에서 가장 높고 지역 산줄기의 중심이 되는 높고 거친 산에 살면서 다스린다고 한다. 산신기도를 지낼 때도 낮은 산신은 조금만 소원을 빌어도 잘 받아주지만 큰 일은 잘 못하며, 높은 산신은 어지간해서는 기도를 잘 받지 않지만 정성이 닿으면 큰 일도 쉽게 들어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산은 풍부한 물자를[9] 품고 있으나, 호랑이나 늑대, 등 맹수들의 서식처이기 때문에 보고이자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에 따라 산신이나 산신령 등 산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역할을 하는 신들은 매우 격이 높은 신으로 여겨졌다고 한다.[10]하지만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불교 유교 사상이 들어서고, 기술이 발달해 산의 위험이 줄어들면서 점점 그 격이 떨어졌다고 한다.[11]

다만 결국 산신령 역시 민간 신앙의 측면이 강한 만큼,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산신령에 대한 설화나 인식 역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3.1. 한국의 산신 신앙

산악에 대한 숭배 관념은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데, 한국에서도 단군신화에서 산신이 등장할 만큼 오래되었다. 워낙 민담에 자주 등장하여 친근한 이미지고, 산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현대에 와선 그냥 평범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한국 민속 신앙에선 상당히 격이 높은 신이다. 산을 하늘과 땅을 잇는 중간 지역이자 신이 거주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겼으며, 산신신앙이 천신신앙의 연장선격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산신은 천신으로도 여겨졌다. 실제로 산신을 산웅천왕 등 하늘과 관련된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꽤 있고, 산신을 모시는 신당을 천왕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예 천신이 산으로 내려와 산신이 되었다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런 만큼 그 권능이나 역할 역시 사실상 천신처럼 딱히 능력의 제약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신령은 전쟁에 앞서기 전 제사를 지내는 대상인 호국신으로도 여겨졌고, 비를 내려주는 기우제의 대상으로도 여겨졌으며, 병을 치료하거나 마을을 지켜주는 등 다양한 못 모습을 보인다. 산신 신앙은 천신, 지신, 수신에 대한 신앙을 모두 함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신령이 높게 여겨진 것은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처음 지상에 내려와 좌정한 곳이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였고, 천신의 자식이자 고조선의 시조신인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의 산신령이 된 것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가 있었고,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남아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 아라1동의 제주대학교 후문 근처에는 조선 시대 한라산 산신령에게 한라산신제를 지냈던 산천단이 남아 있다.

한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 중국의 제사 제도를 본떠서 국토의 중요한 명산 다섯 곳을 골라 오악(五嶽)으로 지정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신라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난 뒤 토함산(吐含山), 계룡산(鷄龍山), 지리산(智異山), 태백산(太伯山), 팔공산(八公山) 이렇게 다섯 산을 국가의 오악으로 지정했는데, 이들 산은 모두 국가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토함산의 경우는 신라 4대 왕(이사금)이었던 석탈해가 죽어서 묻힌 곳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내 무덤을 파서 내 뼈와 진흙을 섞어서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모시라"고 명령했고 이후 석탈해가 동악대신(東岳大神)으로 모셔졌다고 적고 있다. 오악 외에도 신라삼산(新羅三山)이라고 해서 김유신이 고구려의 간첩 백석에게 속아 고구려로 납치될 뻔한 위험을 막아준 호국신이 이들 삼산신이었고, 삼산신은 국가 제사 편제에서 격이 가장 높은 대사(大祀)로 쳤다. 삼산의 위치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라가 진한 소국이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신앙이라고 한다.

산신은 신라 말기에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왕의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49대 헌강왕의 앞에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어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이 모두 떠나버려서 나라가 멸망하고 말 것"을 경고했지만 신의 모습은 왕 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고, 왕은 신이 추는 춤을 따라 추면서도 그게 그냥 신이 나타나서 내 태평성세를 축하해 주시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고...

고려 시대 부소산이라고도 불렸던 송악산 산신의 경우는 고려 태조의 외가쪽 조상이기도 한 성골장군 호경이[12] 송악산신의 남편이 되어 또한 자신도 산신이 되었으며, 몽골의 침공 때는 산의 소나무가 일제히 사람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몽골군이 "신이 있는 산이다"라며 물러갔다고 하고, 고려 혜종의 외가이기도 했던 나주의 금성산은 삼별초를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정녕공(定寧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세워진 뒤에는 새로운 수도가 된 한양의 사방에 위치한 산신에게 작호를 내려 한양의 방호를 청했다고 한다. 이때 북악산을 진국백(鎭國伯),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고 작호를 주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낮은 위격의 산신[13]이라 해도 서낭신이나 솟대, 장승 등 마을신보다는 높은 위격의 신으로 모셔진다.[14] 다만 지역에 따라 분류가 애매모호하여 서낭당 등에서 모시는 당신, 동신 등 마을을 지키는 신을 산신령과 동일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죽은 사람 중 일부는 사후 산신령이 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유신, 석탈해 등이 있으며, 간혹 마을의 창시자나 지역 유력 가문의 조상 같은 조상신을 산신령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민간에선 산에서 만나는 영험한 짐승, 요컨대 호랑이나 오래 산 큰 구렁이 등을 두고 산신령의 수하 내지는 산신령이 둔갑한 모습, 혹은 산신령 자체로 여기기도 했다.

4. 목록

5. 창작물에서

6. 여담

7. 관련 문서



[1] 출처 [2] 삼국유사, 고려사와 같은 고문헌기록이나 민간신앙 등을 비롯한 내용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수하로 나오거나 산신과 동일시 되기도 했다. [3] 산신의 도상은 대부분이 지팡이 든 반대편 손에 산삼을 들고 있다. [4] 자신이 가진 도끼가 쇠도끼라는걸 솔직히 말한 나무꾼에게만 한정. 그렇지 않은 사람의 도끼는 호통과 함께 도끼마저 빼앗아가 버린다. [5] 다만 이 금도끼 은도끼 설화는 본래 한국의 전래동화가 아니라 이솝 우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거기다 산신령 역할은 본래 헤르메스가 맡은 것이다. 헤르메스는 원전에서는 도둑과 상업의 수호신이라고 한다. [6] 출처 [7] 김유신은 나중에 그 본인이 대령산신(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진다. 조선 시대 이후에는 단종이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8] 지금은 여신의 그림으로 바뀌었고 원래 있던 남신의 그림은 따로 보관 중이라고 한다. [9] 금은이나 철, 구리 같은 광맥, 집 짓는데 사용하는 목재나 식재료 및 각종 약재로 쓰이는 식물은 물론 주요 하천이 발원하는 수원지(水源地)이기도 하다. [10] 예로 무속에서는 보통 마을을 담당하는 당산신보다도 해당 마을과 인접한 산신령을 보다 상위로 취급한다. [11] 불교가 들어서면서 불교에 흡수되어 사찰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있으며, 사찰에서도 산신대제를 열기도 한다. [12] 호경은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백두산에 있었다고 언급된다. [13] 대체로 국가제사에서 소사(小祀)로 분류되는 경우. [14] 민속학에서 산신은 상당신, 장승이나 서낭신 등의 마을신은 하당신으로 분류된다. [15] 세종시 양화리 원수산 산신제의 전통과 전승양상 [16] 지리산(智異山) 신상(神像)의 머리가 갑자기 부서져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 찾게 하였는데, 수개월이 지나서야 찾았다( 고려사). [17] 지리산 성모에 대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인식과 태도 : 지리산 유람록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