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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8 17:15:30

이보림(고려)

고려 정당문학
계림군(鷄林君) 문숙공(文肅公)
이보림
李寶林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
사망 1385년
본관 경주 이씨
시호 문숙(文肅)
부모 부: 이서종(李瑞種) - 종부시부령 증 문하시랑
모: 풍산 홍씨, 홍유(洪侑)[1]의 딸
1. 개요2. 생애3. 일화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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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말의 문신. 부친은 증 문하시랑 이서종(李瑞種)이고, 조부는 문하시중 계림부원군 문충공 이제현이다. 본관은 경주.

2. 생애

공민왕 때 우사간, 안렴(按廉)을 역임했다. 1363년(공민왕12) 안렴으로 있을 때 흥왕사의 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계림부(鷄林府)에 압송된 김용(金鏞)의 국문을 담당하였다.

우왕 초 판안동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이 으뜸이었으므로 발탁되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고려사 열전 이제현 전 이보림 기사를 보면, 1375년(우왕 1) 대사헌으로 있을 때 이인임(李仁任)이 백관(百官)들과 함께 연명서를 북원(北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려고 하였는데, 임박(林樸)이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서명하지 않으므로 탄핵하여 유배 보냈는데,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이인임의 뜻에 아부한 것이라 조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사 열전 임박 전을 보면, 이인임이 북원에 올리려던 연명서는 원조(元朝)에서 반역자 김의(金義)의 말을 듣고 심왕(瀋王)을 고려 국왕으로 옹립할 것을 의논하자 이를 반박하고 탄원하기 위한 문서였다. 이 연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던 임박은 심왕을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보림이 단순히 이인임에게 아부하기 위해 임박을 탄핵하고 유배 보내었다는 기록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대관계를 두고 친원파 친명파의 첨예한 대립이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후 밀직부사로 옮겼을 때 제주(濟州)에서 바친 산양을 여러 주(州)에 나누어 기르게 하였는데 많이 죽고 번식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값을 변상하도록 하였다. 재상들이 남은 산양을 나눠 기르려고 하자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말하기를, "백성에게서 돈을 변상 받아서 우리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도리에 맞는가?"라고 하여 이를 막았다.

관직은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아들은 없다.

3. 일화

사람됨이 굳세고 단정하며 정사(政事)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정사를 행함이 이처럼 엄하고 밝았다.

4. 기타

숙부 이창로(李彰路)[3]와 함께 조부 이제현(李齊賢)의 시문(詩文)을 수집, 편찬하여 1363년(공민왕 12) 익재난고(益齋亂藁, 보물 제1892호)를 간행하였다. 원고가 많이 흩어져 모두 거둘 수가 없으므로 난고(亂藁)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익재(益齋)는 이제현의 호이다.
[1] 대제학(大提學). 부친은 도첨의사인 지제고(都僉議舍人 知制誥) 홍간(洪侃). [2] 여름이 되어 말 주인의 보리는 싹이 나서 수확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보리 주인의 보리는 이미 싹이 거의 먹혀버렸기 때문에 수확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개성윤(開城尹). 이제현의 막내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