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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0:00:46

신진사대부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1. 개요2. 등장3. 집권과 분열4. 조선 건국 이후5. 잘못된 용어6. 주요 인물들

1. 개요


신진사대부()란, 고려 말기(1388년~1392년)의 집권세력이자 조선의 핵심 건국세력을 일컫는 표현이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면서 새롭게 등장했다.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이 중영되고 이색을 중심으로 하여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른다.

사대부란 士(교양인)와 大夫(관료)의 합성어로써[1],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갖춘 학자적 관료를 일컫는다. 이 용어 자체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특별히 새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춘추전국시대의 용어를 가져와서 사용한 것이다. 그렇기에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라는 의미로 신진사대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향리,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나 자작농 등 중간 계층에 해당하였다고 알려졌다.

실질적으로 신진사대부가 고려의 정계를 장악한 시기가 위화도 회군 이후임을 감안한다면 겨우 4년 남짓이나, 그 사람들이 그대로 조선을 건국하다보니 고려의 집권세력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2. 등장

사대부 계층의 기원으로 흔히 말하는 것이 능문능리(能文能吏) 관인층이다. 무신정권시기 무신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최우가 만든 서방을 통해 관인층( 이규보, 최자 등)이 등용되었다. 이렇게 등용된 관인층은 무신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대접받았고 무신들보다 더 대접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관인층은 원간섭기 오히려 권문세족으로 발전하였으며 성리학과도 전혀 무관한 계층이었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뿌리로 보기는 어렵다.

원 간섭기 충선왕 대도 만권당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중국에서 주류 유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이때 고려의 많은 선비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입하고 나서도 크게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안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고려 왕실이 추진하는 여러 개혁정치에 참가하며 힘을 키우기도 했으나 그 개혁은 대부분 전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권문세족 내부의 권력다툼인 경우가 많았다.

신진사대부라는 계층이 정치 세력으로써 만들어진 시기는 공민왕 시기가 되겠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숙청하면서 그 반대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특히 노국대장공주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공민왕은 신돈에게 전권을 맡기게 되면서 신돈은 개혁의 일환으로 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덕분에 이색을 비롯한 성리학에 밝은 관리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라는 뜻에서 '신진사대부'라 불린다.

3. 집권과 분열

최영 이성계 이인임을 몰아낸 무진피화 이후 제2차 요동정벌을 두고 대립했고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는 것을 계기로 고려의 정계를 장악했다. 하지만 곧바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내에서 개혁을 단행하자는 온건 개혁파와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의 제도를 부정하고 새롭게 나라를 개창하자는 급진 개혁파로 나뉘었다.

두 세력은 공양왕 옹립까지는 대체적으로 뜻을 같이했으나, 세력 다툼 끝에 결국 과전법이 시행되고 정몽주를 이방원이 살해하면서 온건 개혁파는 몰락했고 고려 역시 1392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온건 개혁파는 고려 멸망 이후 국왕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이들로 조선시대에도 그 이름이 칭송받았으나 정도전은 태종에게 찍혀 이름도 남기 어려웠다.

4. 조선 건국 이후

급진 개혁파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조선의 지배층이 되었다. 이후 이들이 관학파를 형성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조선 왕조의 주요 지배 계층으로 자리잡아 가고 세종 집권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단종 집권기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세조가 집권했고, 이에 성삼문 집현전 계통의 사대부들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여파로 집현전 경연 사대부들의 정치적 기반이 폐지되면서[2] 그 기세가 위축됐다. 이쯤부터 관학파의 일부 갈래이자 계유정난에 가담하거나 찬성한 사대부들이자 중앙에 권력기반을 가진 사대부인 훈구파와 온건 개혁파의 일부 갈래이자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성장하는 사대부들인 사림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사림파가 성종의 중용과 조광조의 개혁 등을 계기로 중앙정계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며 훈구파와 반정공신과 외척 등의 반대세력들의 견제로 인한 온갖 사화를 겪으면서도 끝내는 선조 때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여 결국 조선의 지배층 자리를 확고히 한다. 이후 선조 때 사림파 붕당정치가 시작된다.

5. 잘못된 용어

기록 부족으로 논쟁이 끝나지 않는 문벌 귀족 vs 문벌 관료 논쟁과 달리 신진 사대부라는 표현은 현재는 문제가 있는 용어로 어느정도 논쟁이 마무리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 20여 년이 지나 국내외에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대두했다. 기본적으로 용어 자체가 어색하다. 고려 전기, 중기엔 관료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관료집단을 통틀어 일컫는 '사대부'라는 용어를 고려말 유신 집단에게만 가져다 붙일순 없다.

또한 성리학을 원에서 들여온 이들이 소위 '권문세족'이고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바로 불교식 생활양식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서 성리학과 불교를 통한 구분도 합당치 않다. 성리학자들이 불교와 거리를 두는 건 보다 성리학적 생활 양식이 체계적으로 뿌리내린 조선 중기나 가서다. 조선 초기엔 집 밖에선 유학 경전을 논하고 귀가 후 불공드리고 사후에 불교식 수륙재 지내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았다.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결구도가 잘못된 해석이다. 권문세족들도 조선 건국에 적극 참여하고, 반대로 신흥 유신 중에도 조선 건국에 저항한 사람들이 존재하니[3] 조선 건국 참여 여부를 놓고 구분할 수도 없다. 원에 대한 입장에 서도 중국의 세력향방에 따라 달라졌지 일방적으로 친원 VS 친명으로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토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 사대부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만고만한 지주가 아니었다.

여기에 신진 사대부라고 분류된 인물들 대다수가 이르면 고려 초기부터, 늦어도 고려 중기 이후 중앙에 진출한 이른바 문벌귀족이라고 불리는 세력과 일치한다고 보기도 하며[4][5] 이는 무신정변 이후 지방의 토착 세력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세력을 이루었다는 기존의 학설과 대치된다. 게다가 이들의 세력은 원 간섭기 이후 집권한 세력들과 상당수가 교집합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최신 논문일수록 신진사대부란 용어 대신 신흥 유신, 신흥 사류, 신진 관료 등의 대체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신진 사대부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학자들은 여말선초 정치사 전공자가 아니거나 학부 교양 수준으로 설명하는 케이스다. 권문세족도 과거의 친원, 친불교, 보수 같은 정의 대신 원간섭기에 급성장한 세력들을 아울러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며 적극적으로 원에 영합한 세력은 부원세력으로 따로 구분한다.

6. 주요 인물들

후술된 이들의 가문과 혼맥, 학맥을 살펴보면 권문세족과 신흥 유신의 이분법적 구분은 말이 안 됨을 알 수 있다. 일부 예외라고 우기기엔 케이스가 너무 많다.

[1] 흔한 오해인데 사대부(事大夫)가 아니다. [2] 다만 집현전과 경연이 폐지된 것은 세조의 독선적인 성향과 함께, 세조가 이 제도들을 귀찮게 여긴 것 때문이기도 했다. [3] 사실 조준도 말이 좋아 권문세족이지 가문을 제외하면 신진사대부라는 카테고리에도 잘 들어맞기에 신진사대부로도 분류된다. [4]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 ,역사비평사, 2009, 217~218쪽 [5] 이 부분도 논쟁거리다. 고려의 기득권층이 문벌귀족인지 문벌관료인지는 학계에서 결론나지 않았다. [6] 그가 치사(致仕)한 후 개혁정책 후반기를 주도한 것이 신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