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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0:33:02

왕위 계승의 법칙

1. 개요2. 대원칙3. 왕위 계승 법칙의 종류
3.1. 주요 방식
3.1.1. 살리카 방식
3.1.1.1. 준 살리카 방식(Semi-Salic law)3.1.1.2. 현대화된 살리카 방식
3.1.2. 부자 상속( 적장자 상속) - 종법제3.1.3. 아들 우선 상속법(Male-preference cognatic primogeniture)3.1.4. 절대적 맏이 상속법(Absolute primogeniture) 3.1.5. 형제 상속3.1.6. 투표법( 선거군주제)
3.2. 부가적인 방식들
3.2.1. 협의제3.2.2. 분할 상속
3.2.2.1. 말자 상속(Ultimogeniture)
3.2.3. 로마 방식3.2.4. 숙질 계승3.2.5. 근친혼 계승3.2.6. 환생 계승3.2.7.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3.3. 추가조건
4. 왕위 계승 법칙의 필요성5. 현존하는 왕실의 왕위 계승 법칙6. 옛 왕실의 왕위 계승 법칙7. 귀족 작위 계승8. 기타

1. 개요

군주가 죽거나 퇴위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물려줄 때 계승 순서를 정하는 규칙.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왕위 계승 제1순위는 보통 군주의 장자이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왕세자, 황태자, 황태제 같은 특별한 호칭을 받는다.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보통 군주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인데, 이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각 문화권이나 나라마다 다양한 계승 법칙이 존재했다.

귀족도 작위와 영지를 상속할 때 왕과 비슷한 문제를 겪기 때문에 이 항목은 귀족 작위의 계승법까지 포괄한다.[1]

이런 계승법을 확실히 따지기 위해 계보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크게 발전했다.

2. 대원칙

모든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은 이 대원칙을 따른다.

첫째, 선행 조건이 같다면[2] 손위 형제자매의 계승권이 우선된다.

왜냐하면 맏이가 왕위를 안정적으로 계승할만한 나이에 더 가까울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더 오랫동안 인지되었기에 권위가 더 수월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자식들을 냅두고 어린 자식을 왕위에 앉혔을 경우 찬탈당할 위험이 커진다. 특히나 창업군주의 경우는 이 문제에서 더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불안정하기에 1대 왕 사후 형제분란의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상위 계승권자의 모든 자손들은 하위 계승권자보다 계승권이 높다.[3] 예를 들어서 국왕에게 제1왕자와 제2왕자가 있다고 하자. 이때 제1왕자가 낳은 자손( 손자)은 모두 제2왕자보다 계승권이 높게 되는 것이다. 조선의 수양대군 단종보다 왕위계승서열이 밀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제1왕자의 계승권이 자녀( 손자)에게 상속된다고 보면 제1왕자의 자녀는 장자든 아니든 삼촌보다 계승권이 높은 것이 당연하다.

셋째, 형제 계승이 발생할 경우, 같은 적통이라면 국왕과 동복인지 이복인지는 상관없다.

예를 들어서 국왕에게 제1왕후 소생의 제1왕녀와 제2왕후 소생의 제1왕자, 제2왕녀가 있다고 하자. 이때 제1계승권자는 당연히 국왕의 장남인 '제2왕후 소생의 제1왕자'다. 그러나 제1왕자가 국왕이 된 후 자식 없이 죽는다면? 제1왕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국왕(제1왕자)에게 남동생이 없으니 누이들인 제1왕녀와 제2왕녀가 계승권을 가지는데, 이때 제1왕녀가 비록 국왕의 이복 누이이나 국왕의 친누이인 제2왕녀보다 언니이므로 계승권이 더 높다.

유럽에서는 모계 계승권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상관 없지만, 결혼한 여성에게 승계가 이뤄지는 상황이 발생할 때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이게 유럽권에서는 보기보다 심각한 문제인데, 전근대 유럽 왕실들은 외국의 왕실과 통혼을 했으므로 국왕의 누이인 왕녀들은 이미 외국 왕실에 시집가 왕후나 왕태자비, 왕자비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이 왕녀들이 이때까지 살아있어 여왕으로 즉위한다면 모를까, 이미 사망해버린 경우 왕녀들이 외국의 국왕, 왕태자, 왕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 쉽게 말해 외국 왕실의 일원들이 왕위 계승권을 두고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이 때문에 일어났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식으로 마치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것 같은 여지를 두고 표현한 것은, 사실 현대 한국인들이 조선시대 이래로 동성동본 혼인이 금지되어 온 역사가 길고 오늘날에도 헌재 위헌 판단 및 그에 따른 법령 개정으로 금지는 풀렸지만 여전히 성혼(成婚)에 있어 구속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잘 떠올리기 힘들기 때문인데, 바로 왕실 내부의 결혼이다. 보통 아주 가까운 근친은 피했고 왕실 본가와 촌수가 꽤 벌어진 국내의 방계 왕가에 시집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그 남편이나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부계로 따지면 촌수가 멀어서 계승권이 거의 의미가 없었다가 왕실 직계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순식간에 계승 순위가 확 땡겨져서 그야말로 대박. 주의사항으로는 촌수가 너무 먼 경우엔 왕족이라기보다는 먼 조상에 왕이 있기는 했던 일반 귀족으로 간주되기 때문에[4] 귀천상혼이 되어버려서 말짱 꽝이 되므로 본가와의 촌수가 근친혼으로 여겨질 정도로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귀천상혼으로 여겨질 정도로 너무 멀어도 안 되는 까다로운 조건이 선행된다는 것에 있다.

또한 왕실 본가에서 직계 남성이 단절될 것을 고려하여 유사시 그쪽으로 계승시킬 수도 있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결혼을 추진할 경우, 촌수뿐만 아니라 인물의 자질도 고려 대상인데, 문제는 늦게라도 직계에서 아들을 보게 될 경우 예정된 방계 계승을 물러야 하는데, 요쪽의 인망이나 능력이 너무(?) 좋으면 무르기도 힘들다. 즉 자질 면에서도 너무 잘나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너무 못나도 안 된다.(...) 또한 진짜 쌩 방계 말고 왕의 형제·3촌·4촌 정도의 상당히 가까운 왕족들에게는, 저 먼 뒷줄에서 갑자기 맨 앞줄로 후계자가 갑툭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므로 여기서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높다.

프랑스의 앙리 4세를 예로 들어 조금 더 들어가 보자면, 능력이야 충분히 좋았고, 순수 부계로만 따지면 전왕과 20촌 이상으로 엄청 멀었지만 할머니를 통한 (진)외가로는 6촌으로 확 가까워졌고 여기에 직계 공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결혼으로 더더욱 가까워졌다. 게다가 왕실 본가에서 촌수가 아무리 멀다 해도 나바라 왕국 집안인 덕에 통치가문이라서 귀천상혼의 제약을 받지 않았지만서도, 한편 나바라는 완전한 외국 공실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프랑스 내지(內地)의 번국은 더더욱 아니고[5] 스페인 쪽에도 반쯤 걸쳐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주류 귀족사회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질감을 느낄 만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16세기 종교 전쟁의 시대에 위그노라서... 당연히 카톨릭 위주의 주류 귀족사회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고, 결국 군사적으로는 우세를 점했지만 압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참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타협을 통해 귀족사회의 저항을 뚫어내고 부르봉 왕조를 개창하는 데 성공했다.

그 외에도, 신라의 선덕왕(26대 여왕 말고 37대 김양상), 조금 더 넓게 볼 경우 고려의 공양왕을 들 수 있다.

참고로 조선은 유교적 종법주의를 더더욱 내재화, 체계화했기 때문에 동성동본끼리 결혼할 수가 없어 이 근처에도 가는 사례가 없었다. 왕위계승과 직접 관련이 있던 범위 내에서의(즉 조선 전기에 진작 갈라진 OO군파 10대손 이상 그런 거 말고) 전주 이씨 간 동성동본 결혼은 딱 한 번 있었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 전주 이씨(전산군부인 추봉)를 첩으로 들였었고, 이 사이에서 나온 아들의 아들이 철종이다. 그런데 우선 정실부인이 아니라 첩인데다가, 전산군부인은 어찌 됐건 국왕의 친할머니였는데도 구체적인 계보나 계파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치 삼국지의 유비처럼 본관만 전주 이씨라서 넓은 의미에서 왕족일 뿐 실제로는 한미한 출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6]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직계 우선, 손위 자녀 우선의 원칙은 다 같기 때문에 계승법의 종류는 대개 여성과 여계 자손의 계승권을 인정하는가, 인정한다면 직계 우선, 손위 자녀 우선과 남성 우선 중 어느 것이 선행 조건인가로 나뉜다.

3. 왕위 계승 법칙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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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주국들의 왕위 계승 방식. 녹색은 절대적 맏이 상속법, 검은색(리히텐슈타인)은 살리카법. 짙은 갈색(모나코)는 아들 우선 상속법, 옅은 갈색( 스페인)은 아들 우선 상속법이지만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개정할 예정이다.[7] 파란색은 선거/임명을 통한 선출.

위 지도의 두 개의 파란 점 중 왼쪽이 안도라 공국인데, 이 나라는 특이하게도 군주가 2명이나 있다. 한 명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도시인 우르헬 시의 주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웃기게도 공화국 프랑스 국가원수 프랑스 대통령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군주제가 나온 이유가 원래 프랑스 대통령에게 할당된 군주 지위는 프랑스의 군주가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정치 체제가 바뀌면서 자연스레 군주의 역할과 지위를 대통령이 이어받다 보니 군주제를 부정하는 나라의 국가원수가 타국의 군주를 겸하는 황당한 예가 나온 것이다.[8]

3.1. 주요 방식

다음은 동서양에서 왕위가 계승된 주요 원칙들이다. 원칙이라지만 각 왕조의 시대나 국가마다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전엔 A방식이었는데 후대엔 B방식이 성립되었다거나 하는 식. 그리고 각종 현실적인 제약으로 여러 가지 부차적인 방법들이 개발되고 예외가 성립했다.

3.1.1. 살리카 방식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살리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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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카법은 부계 남성 계승권자의 계승권을 우선한다. 살리카 법에서도 부계 계승권자가 없으면 모계 남성의 계승권을 인정한다. 살리카 법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만, 군역 의무 수행과 관련되어 있는 토지의 상속권은 부정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아들이 있으면 이 아들이 외손자의 권리를 행사해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고 만약에 외손의 나이가 어리다면 여성은 후견인으로서 자식이 성년이 될 때까지 토지를 관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원래의 살리카 법이 처음부터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남성의 계승을 부정한 건 아니었다. 카페 왕가 역시 백년 전쟁 이전까지는 잘만 모계 상속권을 이용해 영지를 확장했었고 살리카 법 자체도 헌법마냥 강력한 권위를 갖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살리카 법은 '살리 프랑크'의 법이었기에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선 대체로 적용되지 않았고 동유럽의 러시아는 아예 슬라브 관습법과 비잔틴 법을 섞어 쓰는 판이었다.

그러나, 백년 전쟁을 계기로 외국 왕실에서 태어난 외손자들이 외가를 등에 업고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국가 간 전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거니와[9], 귀족들도 외국의 왕족이 혈통을 근거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다.[10]

또한 르네상스 이후에는 부계 후손이 있더라도 모계 후손 남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부계 남성 자손들 자체가 남아있긴 하더라도 귀천상혼자 배제 법칙이 철저하게 적용되어 왕위계승권을 가진 부계 남성 후손들이 단절되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

유럽사에서는 바로 그런 경우에 왕조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여성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지 모계 계승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모계 계승을 인정하는 제도는 나중에 준 살리카 방식으로 재정의되는데 아래쪽 준 살리카 방식 참조.

여성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외에 살리카법을 적용하던 문화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귀천상혼을 하면 가문의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계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살리카법을 엄격히 적용하는 왕가의 국왕 가문은 같은 국왕급 가문이거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가문, 최소한 신성 로마 제국의 유력 제후 가문과 결혼할 경우에만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귀족 가문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컨대 공작 가문의 사람과 백작 가문의 사람이 결혼하면 그 사람은 백작 이상의 작위를 계승하지 못한다.

살리카법의 계승 순서는 다음과 같다. 동일한 위치이면 나이가 많은 쪽이 우선이고 만약 어떤 계승권자가 이미 사망했는데 남계 후손이 존재하면 대습상속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나이가 너무 적으면 그 다음 순서로 넘어갔지만 서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상속권도 인정했다.

예를 들면 명나라를 말아먹은 부패한 환관이었던 위충현은 자신을 총애하던 천계제가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 되자, 아직 태아 상태이던 천계제의 아이를 황제로 즉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예로부터 동아시아는 나이가 너무 적거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겐 제위를 계승시키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지속되었으므로 천계제의 남동생인 숭정제의 즉위를 막지 못했고, 그에게 살해당하기 직전에 자살했다.

서양에서 이와 같은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 것은 봉건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단순히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왕위가 계승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 제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리카 법제하에선 각종 결혼이나 세습에 따라 영토가 같이 따라갔고, 살리카 법에 따라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 지도의 영토 구분이 막장인 까닭, 유럽 역사 내내 민족의 분포와 영토가 일치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모계 계승이 발생할 때 왕위계승분쟁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특정 국가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면 다른 나라의 왕이나 여러 대귀족에게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발생하니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이 발생하곤 했다. 이 때문에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이 바로 백년전쟁 장미전쟁이다.
3.1.1.1. 준 살리카 방식(Semi-Salic law)
살리카 법에서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을 때 서양에서 사용하는 왕위 계승 법칙이다. 살리카 법 체계에서는 너무 먼 방계로 왕위가 넘어가게 되니 군주의 딸을 제1 왕위 계승권자로 삼는 법칙이다. 여성 계승권자가 1회에 한해서 대타로 뛰는 것이라 그 이후의 계승은 도로 살리카 법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모계로 왕위가 이어지는 것이니 여성이 왕이 된 이후에는 부군의 성을 따라 왕가의 성이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다.

준 살리카 법의 계승 순서는 다음과 같다.

2011년까지는 룩셈부르크가 이 방법을 채택했었으나 절대적 장자 상속법으로 갈아탔다. 준 살리카 법 자체가 살리카 법에서 남성 후계자가 단절되었을 때 사용하는 대타로 만든 법칙이어서 흔하지 않은 사례이기 때문.

러시아 제국 파벨 1세 이후로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현재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논란 있음)인 마리야 여대공은 이에 근거하여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로마노프 왕가의 남계후손이 없음을 이유로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황족들이 러시아 제국 멸망 이후에 귀천상혼한 후손들의 계승권 인정을 주장하는 등의 이유로 마리야 여대공의 수장 지위에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상태이다.

준 살리카 법으로 즉위한 왕은 보르본 왕조 펠리페 5세, 합스부르크 왕조 마리아 테레지아, 로마노프 왕조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표트르 3세, 룩셈부르크 마리아델라이드 샤를로트 등이 있다. 유럽에서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가문은 모두 준 살리카 법을 한 차례씩 거쳤다. 준 살리카 법을 고안한 이유는 왕들이 딸바보라서 순수한 살리카 법에 따라 왕위 계승을 하면 너무 먼 방계에서 계승이 이루어져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가 왕위에 오르면 정국이 불안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3.1.1.2. 현대화된 살리카 방식
부계로 왕위가 계승된다는 점이나 왕의 가장 가까운 혈족에게 왕위가 이어진다는 점은 변화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왕위 계승에 따라 영토가 변하지 않는다. 입헌군주제와 근대국가가 성립된 이후 더 이상 영토는 군주 개인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 왕실 가운데 살리카 방식을 따르는 왕가는 리히텐슈타인밖에 안 남았다.

각국이 영토와 왕위 계승을 명확히 구분하여 헌법화했기 때문에 오늘날 영국 왕세자가 스페인 왕세녀와 결혼해서 그 손자가 영국-스페인 동군연합을 만들 가능성은 0%다. 거기다 근대에 들어서면 외국의 왕위 계승자와 결혼하는 왕족은 상당수가 관습적 또는 법적으로 자국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 예를 들어 1964년 당시 덴마크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던 아네마리 공주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 결혼하면서 덴마크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결국 그 길고 긴 세월을 거쳐 동아시아의 부자 상속제와 마찬가지가 된 셈이다. 이 부분은 배타적 영토 개념이 비교적 일찍 확립된 동아시아에 비해 봉건제 유럽의 영토 개념은 상대적으로 덜 배타적이었다는 데서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혀 다른 나라의 귀족, 또는 다른 나라 왕을 데려다 자국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 인정받을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고, 국민국가 개념이 완성된 후에는 유럽에서도 예전처럼 영토가 결혼 한 번에 달라질 수 없게 된 것이 당연하다.

3.1.2. 부자 상속( 적장자 상속) - 종법제

주나라 때 정한 종법 체제를 바탕으로 한 왕위 계승 방식이다. 왕실뿐 아니라 귀족과 사대부까지 영향을 주었고 기본적 골격은 동아시아의 각국 왕조들에도 전파되었다. 조선에서는 지배층을 넘어 일반 백성들의 상속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계 가문의 계승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살리카적인 상속 방식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원칙은 첫 번째 입적(立嫡: 적자 우선), 두 번째 입장(立長: 장자 우선), 세 번째 입선(立善: 성품이나 능력)으로, 적자 중에서 장자가 물려받아야 하고, 적자가 없으면 서자 중 장자 우선,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병이 있거나 불효자거나 기타 계승하기 어려운 사유가 있을 때에만 3번째 순서가 적용된다. 이 계승 방식의 이념은 유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직계상전(直係相傳)의 원칙에 의거해 항렬로 따라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아들, 아들에서 손자로 넘어가는데, 항렬로 계승되는 '종법' 체제에 바탕을 둔 것이지, 연장자를 우대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차남 이하의 지손(서손[11])은 승계에서 후순위로 밀린다.

또한 항렬이 중요한 것이지, 혈통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서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여 적자로 삼으면 동생이나 조카보다 우선한다.[12] 이때는 같은 항렬의 친척으로부터 본인이나 조상과 가까운 혈통을 들이는 게 원칙. 보통 조카뻘 되는 친척을 영입하지만 남송의 고종이나 위나라 조예처럼 먼 친척에서 들여온 사례도 있긴 하다. 윗항렬에서 아랫항렬로 내려가면서 '부자관계'로 상속한다고 보면 된다.

후손으로서 조상( 창업군주)의 보위를 잇는 건 당연하다는 관념이 강했다. 그래서 서양과 달리 왕위 계승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왕위 계승 의무가 있을 뿐이다. 원칙적으로는 물려주는 입장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없고 물려받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능력치 높은 4남보다 물러터진 장남 및 한참 어린 손자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고[13], 만력제 당시 '쟁국본'이라 하여 3남을 총애한 대신에 맏아들의 황태자 책봉을 20년(...) 동안 미루며 버티던 황제가 결국엔 물러섰다. 절대황권을 자랑했던 명나라가 이 정도였다.

즉 요약을 하면 계승할 ' 권리'가 아니라 계승할 의무였다. 한나라 애제가 농담삼아 총신인 동현에게 선양한다고 했을 때 대신인 왕굉이 "천하는 한고제의 것이지,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종묘를 계승한 몸으로서 자손에게 이를 물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라는 직언을 남긴 사례[출처1]나, 동진 간문제가 재상 왕탄지에게 후사를 맡기면서 어린 아들의 행실이 좋지 않을 시 찬탈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자 왕탄지가 “ 나라는 선제( 사마의)와 원제의 나라인데 어찌 폐하께서 오로지 하려 하십니까?“라는 발언을 하며 조서를 찢으며 거부한 사례[출처2]를 통해 이러한 관념을 알 수 있다. 이는 "난세를 정리한 창업군주의 업적을 인정해서 그 후손들은 능력이 부족해도 군주라고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의 정식 묘호에 孝자가 눈에 잘 안 띄는 중간쯤이 아니라 눈에 띄는 맨 앞이나(한나라), 맨 뒤에 주로 붙어 있는(당·고려·조선 등)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심지어 형제를 죽이고 옥좌를 아버지에게서 사실상 탈취한 공통점이 있는 당태종 이세민도 공식 시호가 문무대성대광황제고, 조선 태종 이방원도 문무예철성렬광대왕이다.(...) 굉장한 아이러니이지만서도, 어쨌든 두 명 다 왕조를 단명에 그치게 하지 않고 오래가게끔 만들어 놓아, 아버지가 세운 사직을 발전시켜 무사히 물려주었다는 것을 더 큰 효도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살리카 법과 가장 큰 차이점은, 직계 남자 후손의 계승권이 소멸할 때의 계승권을 누구에게 주냐는 점이다. 살리카 법은 방계 왕족이나 통혼을 맺은 다른 왕국의 왕에게도 왕위 상속권을 주는 대신 서자의 계승권은 없다.[16] 유럽 기독교 문화권이 동아시아보다 일부일처제에 좀 더 엄격한 데 따른 영향이다. 애초에 서양에서 서자는 공식적인 위치로 취급한 적도 없으며 정실이 아닌 여자( 로얄 미스트리스)와 통정하여 아이를 낳더라도 제도권 내의 존재인 서자조차 되지 못하는 사생아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종법제에서 서자는 혼인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기에 아버지 가문의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부자 상속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적용되는 제도로 운영했다. 그래서 아들을 우선하며 태어난 순서도 적용하지만, 끝까지 적자가 태어나지 않아 서자만 남은 경우가 아니라면 무조건 적자를 우선시했다.

그래서 적자를 제치고 서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그는 재위기간 동안 정통성에 큰 흠을 가지고 지내야 했다. 광해군이 이 사례에 들어간다. 분조활동으로 국가에 공적도 세웠고, 왕위를 이어받을 나이가 되었으며, 왕세자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오며 실력도 검증되었다. 그러나 늦게 적자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광해군은 왕세자 지위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17]

또한 '같은 성씨를 공유하는 부계 가문 내에서만' 양자를 들여 계승자로 삼는다. 즉, 왕조 창시자로부터 남계로 내려오는 자손 중에서만 계승자를 구한다. 그래서 왕족(종친)과 외척의 구분이 매우 뚜렷하다. 왕족과 외척의 구분이 한자문화권만큼 뚜렷한 문화권은 거의 없다.

때문에 종법제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다. 적장자가 없다 해도 친족 중 누군가를 '입양'하는 방법으로 명분을 세우면 되기에 오히려 탄력적인 면모를 보인다. 계승의 정당성이 입적 과정에서 만들어지기에 왕족 집단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입양할 수 있는 것.[18][19]

물론 친아들이 있으면 친아들에게 물려줘야지, 친아들을 두고 양자에게 물려주기는 힘들었다. 더 가까운 왕족이 있음에도 더 먼 왕족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면 내분의 가능성이 높은데다 군주 본인도 친아들이 있는데 굳이 양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지는 않으므로 생전에 양자를 들여 후계자로 지명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뒤 가까운 방계 왕족을 즉위시키면서 양자로 입적시키거나 죽기 직전에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가 웬만하면 후궁을 두었기 때문에 말년에 뒤늦게 후사를 얻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서 군주 생전에 양자를 들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20] 그래서 조선 경종이 아직 30대였는데도 이미 후사를 볼 수 없다고 전제하고서 동생을 세제로 삼으라느니, 청에 가서 왜 너희 조선은 세자가 아닌 세제가 있냐는 질문에 저희 왕의 생식능력이 문제가 있다느니 했던 노론 대신들은 왕권을 우습게 보고 정면도전을 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유교적 종법제인 이 원칙은 절대권력을 휘두른 명의 홍무제, 만력제일지라도 쉽게 어기기 힘들었던 것이라, 위에 형 임해군이 있었던 광해군은 능력을 인정받고도 세자 자리가 위태로웠다.[21] 명나라에서도 임해군이 개막장인 걸 알았어도 본국의 사정 때문에 '나라가 위급할 땐 예외'라는 조선의 주장에 반대하며 책봉을 반대했고 명나라 장수는 "군자는 자기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않는 법" 드립을 치면서 광해군에게 포기를 요구했다.[22]

숙부에 의한 계승도 인정하는 살리카 법과 달리, 항렬이 더 높은 왕족이 계승하는 역상속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숙부가 조카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제사를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왕이 아들이나 형제 없이 죽었는데 숙부와 사촌동생이 모두 살아있다면 사촌동생이 계승해야지, 숙부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를 무시하면 찬탈이라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세조와 그의 조카 단종이 있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세손으로 책봉받아, 날 때부터 삼촌-조카라도 엄연히 군신관계가 성립했다. 하지만 세조는 유교적 종법으로 패륜에 해당하는 탈적(奪嫡)[23]으로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데다, 상왕으로 있던 단종을 내치고 죽이기까지 했다. 예법상 후대 왕은 전왕의 '아들'로서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 패륜 합쳐서 트리플 패륜을 저질렀다.[24]

때문에 세조는 정통성에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사육신, 생육신) 이게 바로 태종과 세조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태종은 적자고 형이므로 서자인데다 동생인 방석보다 계승권에서 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받았기에 난을 일으켰어도 사대부들이 별로 반대하지 않았는데 비해, 세조는 패륜을 저지르고 계승권을 역행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대부들로부터 그 정당성에 도전을 받아 왔다. 결국은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공신을 남발하여 이권을 나눠줘야만 했다.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위 계승이 외부의 요인을 크게 받거나, 계승권을 가진 가까운 왕족이 없다면 예외적으로 평화로운 역상속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의 철종이다. 항렬 상 선왕 헌종의 숙부 뻘이었지만, 본인의 가계를 제외한 왕족들이 지나치게 먼 왕족이라 다른 대안이 없어 다음 왕으로 결정되었다.[25]

어쨌든 유교질서가 확립될수록 이 원칙은 절대적이다. 삼국시대 왕들은 왕권이 강화되는 시기마다 엄격한 부자상속 원칙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좀 멀쩡한 계보가 신라 왕가의 김씨인데, 내물 이사금 이래, 또 중대( 통일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 이래 이어지긴 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고구려 고국천왕 이래 (정확히는 산상왕 이래) 부자세습이 확립되었다.

고려는 원칙적으론 이 규범에 의해 왕위가 상속된다고 했으나 조선과 같이 원칙이 확고하지 않았다. 왕조 초기부터 형제 상속이 밥 먹듯이 이어졌고 현종처럼 사생아 군주라는 꽤 충격적인 사례도 있다. 그 현종도 강조가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서야 제대로 즉위한 것을 볼 때 고려의 왕위 계승이 그때까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왕위 계승이 부자상속으로 확고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목민들이 세운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

그래서 이 방식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확립된 것은 가장 유교 원칙에 충실했던 조선시대다. 세종, 세조 인조를 제외하고 전부 이 원칙으로 왕위가 계승됐다.[26][27]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장기존속한 국가들은 대체로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 노력했다. 후한은 말기에 어린 나이의 황제들의 계승이 반복되는 불운 중에도 이 원칙을 끝까지 어기려 하지 않았다. 또 명은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과 재상의 폐지로 황권이 매우 막강한 상황에서 이러한 원칙을 적용했는데, 자질 미달의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고 견제는 못 하면서 나라는 막장으로 흘러갔다.[28] 이 외에도 오대십국시대 후주 곽시영은 곽시영의 고모부인 곽위는 황제 즉위 전에 가족들이 대부분 몰살당하는 바람에 처조카인 시영에게 곽씨 성을 주고 양자로 삼아서 명목상의 부자 상속을 이어가기도 했다.[29]

일본은 좀 더 특수하다. 일본에서 부자 상속 원칙이 확립된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쇼토쿠 태자 이후, 실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유교가 전파되어 제도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헤이안 시대 이후다. 어쨌든 헤이안 시대 이후로는 중화식의 부자 상속제가 어느 정도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리적, 문화적 특수성, 무엇보다도 유교 문화에 대한 피상적 이해 때문에 심하게 변형되어 적용되었다.

다만 중국, 한국과는 달리 초창기의 일본에서는 종법 체제가 잘 지켜지지는 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헤이안 시대 말기의 '상황 정치' 인세이 막부 정치처럼 명목상의 권위와 실제 정치가 분화했다. 후기의 에도 막부에서는 비교적 종법제가 잘 지켜진 편이며 그런만큼 다른 막부보다 오래 지속되었다.[30]

유목민 풍습이 남아있는 이민족 출신 왕조나 정복 왕조, 한족화되었던 왕조에선 혼란기나 왕조 초기에는 적장자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많았다.[31]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찬탈에 가까웠다. 이들도 결국엔 왕조가 지속되면서 안정화되면 다시 부자상속제의 원칙을 확립하려 했다.
3.1.2.1. 서양자 제도
일본에서 쓰는 계승 법칙. 그러나 정작 진짜 군주인 일본 황실이나 쇼군 가문에서는 채택하지 않았다.[32] 그래서 왕위 계승의 법칙으로 소개하기에는 적절하진 않다.

중화의 부자 상속이 변형된 형태로, 사위를 양자로 삼아서 계승권을 주는 법칙이다. 일본의 쇼군이나 영주들은 기본적으로 군인이자 관료라서 여성의 지위가 낮았고, 천황이나 쇼군 가문을 제외하면 모계 혈통 계승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사위가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는 형식을 취했다. 민간에서는 보통 데릴사위라고 하는 제도가 비슷한 개념이다.

일본에서 왕위를 이런 식으로 계승하지 않지만, 구 화족제도에서는 작위를 서양자가 계승하는 일이 꽤 많았다. 지금도 가업을 사위에게 물려주는 일은 잦으며, 이 경우 사위가 처가의 성씨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가 이런 방식으로 외조부의 성을 이어받은 사례. 아베 신조의 친동생 기시 노부오가 외가의 성을 이은 것은 서양자로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자녀가 없던 기시 가문의 외삼촌 내외에게 양자로 입적되면서 받은 것이므로 여기와는 다른 경우다.

3.1.3. 아들 우선 상속법(Male-preference cognatic primogeniture)

부자상속제의 원칙을 지키되, 군주에게 아들이 없다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방식. 국왕의 자녀 가운데 아들이 전혀 없다면, 그때에야 딸에게 계승권이 돌아가며, 그 다음 계승권은 국왕의 형제 자매들에게 돌아간다. 물론 이때도 국왕의 남자 형제들이 먼저 계승권을 가지고 여자 형제들은 그 다음이다.

원래는 '절대적 장자 상속법'의 개념이다. 아랫 문단의 절대적 맏이 상속법이 장녀에게도 우선권을 주는 것과 달리 큰아들에게서부터 아들들에게 출생 순서로 우선권을 준다.

살리카법과의 차이라면 귀천상혼 문제를 적용하지 않는 케이스가 많았고(즉 평민과 결혼하더라도 장남이 우선, 물론 예전에는 따진 경우도 있다)[33] 딸의 계승권도(나라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통상적으로 인정 가능하다는 점이 있다. 원래는 절대적 장자 상속법이 살리카 법과 함께 오랫동안 유럽의 주류 상속법이었다. 역사적으로 살리카법이나 준살리카법을 채택하지 않은 유럽 국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계승법이었고, 근현대에는 살리카법을 따르던 유럽 국가들이 후계자 부족 등의 이유로 이 방식으로 계승법을 개정한 예도 있다.[34]

예를 들어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의 맏이였으나 당시의 아들 우선 상속법에 따라 남동생 에드워드 7세에 밀려 왕위를 잇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둘째인 프린세스 로열 앤 공주도 뒤에 태어난 두 남동생보다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렸다.

현재 아들 우선 상속법을 채택하는 유럽 국가는 스페인 모나코뿐이다. 스페인에서는 아들 우선 상속법 때문에 알폰소 13세가 태어나자마자 즉위하는 일이 있었다. 부왕인 알폰소 12세의 사망 후 왕위 계승자인 누나들이 있었으나 어머니 뱃속에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아기의 성별을 확인하느라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6개월 간 왕위가 공석이었던 것으로, 결국 6개월 후 알폰소 13세가 태어나서 누나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영국은 2015년부터 2011년 이후 출생자에게 절대적 맏이 상속법이 적용되었다.

스페인은 국왕인 펠리페 6세가 슬하에 딸 둘뿐이라 장녀 레오노르 왕세녀가 자녀를 보기 전에는 개정 실익이 없다고 보아 미뤄둔 듯하다. 아들 우선 상속법이 입헌군주제와 같이 스페인 헌법에 박혀 있기 때문에 계승법을 바꾸기 위해선 헌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귀족 작위 상속은 2005년경에 절대적 장자 상속제로 바꾸었다.

3.1.4. 절대적 맏이 상속법(Absolute primogeniture)

아들딸 구별 없이 무조건 맏이에게 계승권을 주는 법칙. 비교적 현대에 와서야 일반화된 계승 법칙이다. 당연하지만 자녀가 없어 동생에게 계승권이 넘어가는 경우에도 성별 관계없이 먼저 태어난 동생이 1순위 계승권자가 된다.

중세 시대 바스크인들이 이 방법으로 작위를 상속했으며, 현대에는 1980년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됐다. 이로 인해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의 맏이인 빅토리아 공주 남동생 칼 필립 왕자를 제치고 왕위 계승자(왕세녀)가 될 수 있었다.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딸 샬럿 공주도 이 법 덕분에 남동생이 태어났음에도 왕위 계승 순위가 밀리지 않았다.

이 방법이 도입된 이유는 귀천상혼이나 살리카법 등으로 인해 왕가의 구성원은 많지만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 전무하다는 엽기적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가의 이름이 바뀌고 구성원이 그만큼 많아져 재정부담이 커질 우려가 있는 단점이 있지만 현대적인 성평등 의식과 계승 방법이 복잡하지 않고 왕통이 끊길 위험성이 적으므로 현대에는 유럽 여러 국가에 전파되었다. 2009년 6월 7일 덴마크에서는 이것과 관련해 국민투표가 이뤄졌는데 85.3%가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의 개전에 찬성하여 채택되었다.[35]

재위 중인 유럽 왕가들과 달리 폐지된 유럽의 구왕가들은 이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고 왕정 폐지 당시의 살리카법인 장자 계승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보통인데, 이는 지위가 법률로 보장되어 계승법이 바뀌어도 왕가의 정체성에 큰 영향이 없는 현 왕가들과 달리, 구 왕가들은 왕가의 전통을 내세우지 않으면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승법을 바꾸면 순위가 밀리는 가문원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이 경우 계승 순위가 밀리는 친척들에게도 모두 재산을 떼줘야하는 골치아픈 사태가 생긴다. 당장 유럽에서는 전근대까지만 해도 계승법에 대한 논란으로 수틀리면 전쟁이 벌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참조.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구왕가들도 가문을 이을 계승권자가 부족하거나 가문 내 다른 파벌과의 계승권 분쟁 등의 이유로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계승법을 바꾸는 경우가 간혹 있다.

3.1.5. 형제 상속

군주가 죽으면 그 군주의 아들이 아니라 그 군주의 형제에게 계승권을 주는 법칙. 그 세대의 형제들이 모두 사망해야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왕권이 강하지 못한 경우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권력을 나눠 가진 왕의 형제들이 자신들에게 영원히 왕위가 돌아오지 않는 부자상속에 저항하기 때문에 이들을 배려한 상속법이 채택되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부자 상속제 하에서도 삼촌들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때때로 벌어지기는 하지만, 형제상속법은 법제화된 왕위 계승 방식이라는 점에서 찬탈과 차이가 있다.

이 계승 방식의 장점은 창업군주나 왕조를 중건한 1세대 왕의 다음 2세대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왕조 중흥의 국력을 투입해야 할 시기에 어린 자식에게 왕위가 돌아갈 위험성이 완전히 차단된다. 특히 평균수명이 짧고 군주의 업무가 과중했던 과거에는 한 번 부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 아들 역시 어지간한 강골이 아니고서야 어린 나이에 즉위해 10~20년간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30~40대에 사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쉬워 형제상속이 선호되는 면이 있었다. 이렇게 형제상속을 하는 국가들은 보통 일부다처제 혹은 일부다처에 가까운 일부일처다첩 문화로 창업군주가 권력의 안정을 위해 이런 저런 집안들과 복수로 혈연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왕자들 본인도 그렇지만 이 건국군주의 서포터라 할 수 있는 처가들이 돌아가면서 왕을 배출해 권력을 나눠 가진다는 개념에 가깝다. 동복형제들일 경우에는 이 자리에 왕자들의 처가가 대신 들어간다.

또한 2세대 형제들 전체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기에 일종의 가족경영 체제가 되어 국정이 톱니바퀴처럼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다. 2세대가 모두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므로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고려 광종처럼 자신과 대립하는 정실 적장자보다는 이복동생을 신뢰해 후계자로 점찍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1세대부터 바로 형제상속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 1세대→2세대는 부자상속을 하지만 2세대에서 형제상속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2세대 다음의 3세대는 사촌지간인데, 이 3세대들은 혈연의 정이 매우 옅어지고 이전 세대와는 달리 태어났을 때부터 왕자로서의 권리나 봉토가 주어지기에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된다. 게다가 3세대의 사촌형제 중 누가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지 판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원칙상으로는 큰아버지의 맏아들에게 우선권이 있겠지만 둘째 삼촌이 형제 중 가장 잘난 사람이라 왕조에 대한 공헌이 커서 그의 자식들을 따르는 무리가 가장 많을 수도 있고, 막내 삼촌, 즉, 가장 최근의 왕이었던 자의 아들들이 당연히 현 시점에서 가장 왕권에 근접한 자들이다. 아니면 아버지는 순서가 앞인데 나는 나이가 적거나 나이는 많은데 아버지의 순서가 낮을 수 있다.[36]

때문에 3세대에선 반드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난다. 운이 나쁘면 내전의 여파로 국가 멸망, 운이 좋으면 50~100년 이내에 3세대 계승권 분쟁이 끝나고 왕조를 중흥할 '새로운 1세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죽고 왕위를 물려받은 2세대들이 죽고 다시 3세대가 왕위를 물려받을 시점이 되면 또 한 번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난다.

따라서 형제 상속은 건국 초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그 장점을 발휘하며, 후대로 가며 왕권이 강화되면 슬그머니 부자 상속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형제 상속은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인 사우드 가문은 1953년 개국군주인 이븐 사우드 사망 후 현재까지 2세대 군주들이 돌아가며 해먹고 있다. 또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같은 토후국 체제의 아랍 군주국들도 무조건 아들 세습이 아닌 형제나 친척들을 후계자로 하고 있다. 근대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대부분 살리카나 맏이 상속 방식을 따르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색적이다. 다만 사우드 가문이나 쿠웨이트의 사바흐 가문은 중동의 유목민이 뿌리라 유목민적 전통으로 보면 특이한 것은 아니다.

현대에 와선 새로운 부작용이 발생했는데, 바로 평균수명이 현저히 늘어나버려 형제상속이 유지되는 기간이 너무 길어졌다는 것.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도 2017년 6월 21일, 살만 국왕이 조카 나예프를 왕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친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삼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왕위 계승에 있어서 세대교체는 물론이거니와 부자 상속까지 확정지으면서 역사의 법칙을 손수 증명했다. #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위 계승의 법칙이 생긴 근본적인 원인, 국가의 기본이 되는 영토와 자원, 인구를 쪼개지 않고 중앙집권을 통한 국력 강화(그리고 그 소유자에겐 자신의 자식에게만 물려주고 싶다는 욕구)라는 이유가 필요 없이 그냥 쏟아져나오는 석유빨로 사우드 가문 전체[37]를 유지하기 때문에 석유로 인한 이권만 잘 나눠주면 왕위 계승이 별 잡음 없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론적으로는 오누이 상속 등도 가능하지만[38] 형제 상속은 남성 계승만 인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계승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유목민 특유의 집안 맏어른으로서의 어머니의 권위나 형사취수 제도 등의 이유로 왕실의 여성들이 계승권 인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한반도에서도 고구려가 초기에는 이런 방식을 선호했다고 추정되며, 고려의 왕위 계승에서도 태조의 유훈인 훈요십조에서부터 특별한 경우에 한해 형제 간에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 등 형제 상속의 흔적이 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일례로 고려 문종의 세 아들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 것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선종이 어린 아들 헌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하고, 결국 헌종은 선종의 동생인 숙종에게 양위했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형제상속이 더욱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39] 고대 중국 역사에도 형제상속의 흔적이 있으나 부자 상속이 법제화되면서 일찌감치 사라졌다.

원래 꽤 오랫동안 지역에서 실력행사하던 토후국(왕국보다 한 단계 낮은 정도의 국가. 아랍에미리트가 이런 토후국들의 연합국이다)가문에서 갑자기 왕족이 되어 생기는 현상. 몽골 제국도 그렇고 역사에서 갑자기 세력이 커진 유목민 국가에서 2세대까진 이런 현상이 보인다.

역사적으로 이 계승법을 채택한 경우로는 키예프 루스 류리크 왕조가 유명하다. 류리크 왕조는 형제 상속 + 분할 상속으로 왕의 자식들이 영토를 나눠갖고, 다시 형제 상속으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영토를 물려받는다는 난잡함의 끝판왕급 상속제를 사용했다. 물론 괜히 이런 짓을 한 건 아니고 류리크 왕조 러시아의 성립 과정 자체가 바이킹 정복자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의 슬라브족을 정복해 세운 국가이다 보니 정복과 국가 운영 과정에서 지배자의 친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고, 따라서 각자의 지분을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40] 그리고 당시의 기술 수준이나 루스 지역의 개발 상태로는 어차피 한 사람이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는 힘들었기에 각 통치 단위를 잘게 쪼개는 것이 유리하기도 했다. 형제가 죽으면 각 형제들이 한 자리 윗형의 영토로 거점을 옮겨야 했기에 독자세력화도 생각보다는 덜한 편이었고.

여기에 더해 류리크 왕조는 형제 상속제 특유의 아랫세대 계승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각 영토의 지배자들이 사촌 이상으로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그냥 내전 한 판, 이긴 쪽이 먹는다. 그리고 이긴 쪽은 다시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을 해서 몇 대 또 흐르면 다시 왕위 계승 전쟁으로 땅을 합친다. 이런 식이어도 혈족주의가 강한 분할 상속이다 보니 누가 이기건 승자는 여전히 류리크 가문 출신. 만약 다른 가문 출신 지배자가 나오면? 그때는 류리크 왕조 출신의 지배자들이 다구리를 친다.

다만 류리크 왕조의 왕위 계승 방식은 류리크 왕조 출신자가 왕위를 이어나간다는 것만 충족했을 뿐 국가 발전에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었다. 전국 각지에 거대한 봉토와 강력한 군사력 및 경제력까지 가진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있는 사람들이 할거하는 상태가 지속되는데 이건 사실상 군웅할거보다 더 사태가 안좋다. 국가 내부에서 매일 내전이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루스 지역도 시대가 흐르면서 개발도 가속화하고 기술도 발전해서 중앙집권적 체제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키예프 루스의 말기로 갈수록 오히려 중앙권력이 붕괴되고 각 지역의 공국들이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국가해산상태가 발생한다. 각 지역의 공국들이 워낙 강력하기에 중앙정부인 키예프 대공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어떤 자가 내전에서 승리해서 키예프 대공 자리를 차지해도 반대파를 섬멸하기는커녕 반대파가 자기 고향의 공국으로 돌아가서 병력을 모은 다음에 바로 설욕전으로 들어가니 내전만 계속 일어나는 꼴이 지속된 것이다. 그래서 키에프 대공이 되었다가 쫒겨났다가 다시 복위하는 사태가 뱌체슬라프 1세부터 발생하였고 류리크 2세는 5회나 복위하니 중앙정부가 멀쩡할 리가 없다.

결국 키예프 루스의 중심국가인 키예프 대공국은 약화되고 여러 공국들로 분열한 가운데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등이 강국으로 성장하는 국가분열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렇게 분열된 키예프 루스는 덩치에 비해 국력을 효율적으로 육성 및 동원하지 못하므로 몽골 제국이 침입해서 분열된 공국들을 하나씩 각개격파하여 몽골-타타르의 멍에가 일어나게 되는 큰 원인을 제공한다. 물론 키예프 루스의 공국들도 칼가강 전투에서 보듯이 연합해서 싸워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손발을 맞추는 일이 어려우니 결국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모스크바 대공국부터는 가급적 중앙집권체제로 가려고 했고 이는 현대의 러시아까지 이어지게 된다.

3.1.6. 투표법( 선거군주제)

투표로 정한다! 왕권이 강하지 않을 경우, 또는 왕통이 유서깊지 않은 경우 왕 후보들끼리 치고받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채택하는 방법이었다. 역사적으로 동프랑크 왕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과 카페 왕조 초기 프랑스, 그리고 동쪽에 위치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선거군주제를 따랐다. 보통 이렇게 정한 왕은 당대에 국한하며 차기 왕은 현임 왕이 죽은 다음 또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선거로 뽑는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공화제 국가들의 보통 선거를 떠올리기 쉽지만, 다른 점이 많다. 투표제라 해도 현대와 달리 일반 농민 A가 갑툭튀 출마해서 당선되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없다. 갑툭튀 출마해서 당선된 인간이 나중에 황제가 된 사례는 있긴 하다 후보자는 물론이거니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선거 상속은 대체로 잡음이 많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유력한 대귀족 뿐 아니라 힘은 없지만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잘 맞는 중소 지방 귀족들이나 아니면 교황이 점찍은 사람들이 후보로 마구 난립하였다. 제후들이 투표 결과에 불복하는 경우도 많아서 대립왕이나 대립황제가 나타기도 했다. 새로 즉위한 국왕은 이런 적대적인 귀족과 대립왕을 처단하면서 왕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곤 했다.

따라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지면 불안정한 선거제는 소멸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 프랑스의 카페 왕조는 자기가 실권이 있을 때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을 달래고 협박해서 아들을 공동 군주로 임명하거나 후임 군주로 미리 선출하는 방식으로 선거제를 명목으로만 남겨두고 실질적으로는 부자상속을 이루었다. 선거제가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부자상속이 더욱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선거제가 더욱 유명무실해지는 선?악?순환을 반복하며 프랑스에서는 선거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선거제의 명목은 유지했지만 결국 중반 이후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를 거의 독점하게 된다. 다만 전통은 남은탓에 카를 5세가 황제가 될때는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도전하기도 했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선제후들이 대거 프랑스에 넘어가자 더 이상 제국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현재 이 제도를 채택하는 왕실은 캄보디아 바티칸이 있다. 캄보디아 군주는 노로돔 왕가의 구성원으로서 30세 이상인 사람이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으며, 교황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군주다. 명목상 말레이시아도 선거군주제를 택하고 있지만 관례적으로 각 지역의 술탄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3.2. 부가적인 방식들

3.2.1. 협의제

유목민들이 3세대에서 일어나는 왕위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도입한 방식. 대표적인 것으로 몽골의 쿠릴타이가 있다.

말 그대로 왕실과 귀족들이 모여 다음 왕을 협의해서 뽑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투표나 선거가 아니었다는 것. 이론상 다음 왕은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또 이 협의제는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자. 협의제에서 왕이 될 사람의 후보들은 선왕의 아들, 형제들이거나 손자들이기 마련이다.

협의가 잘 되면 좋지만 당연히 잘 되기 어려웠다. 애초에 왕위 계승이 매끄러웠다면 협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만장일치'로 뽑힌다 해도 늘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결국 왕위 계승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협의라고는 하지만 사실상의 순번을 정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지게 운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의 남북조시대 직전, 천황 가문이 두 계통으로 분열되면서 두 계통의 천황이 교대로 집권했던 시기가 있었다. 또 신라 극초기에도 박-석-김 3성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다는 것도 이 예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안 가서 김씨 독점세습이 되지만.)[41]

경우에 따라서는 협의 자체가 양분되어 각자 자신을 따르는 세력만 가지고 회의를 열어 지도자를 추대하므로 각 회의에서 추대된 지도자가 전쟁을 벌여 승리해야 한다. 당장 자신의 지지세력만으로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서 선출된 쿠빌라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신라에서 몇몇 건은 이 사례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성골이 단절되자 화백회의를 통해서 진골 중에서 후보를 추리고 김춘추가 추대되었다.

3.2.2. 분할 상속

중세 초기 게르만 문화권의 국가나 몽골계 국가인 티무르 왕조와 쇠퇴 이전의 오스만 제국에서 시행되던 방식. 아들들에게 왕국을 사이 좋게 나눠 분봉시켜주는 것이다.

본래 부족 또는 부족국가 시기에는 흔히 있던 방식이다. 어차피 빈 땅은 많지만, 아직은 사회적/기술적으로 미성숙해서 멀리 떨어진 정착지에까지 지배력을 행사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모여 살면 자원 고갈 등 여러가지 문제가 터지므로, 자식들에게 적당히 한 무리 떼어주고 새로운 정착지에서 새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국가 또는 영토국가 수준까지 발전한 나라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대번에 나라가 사분오열되므로, 일정 이상으로 복잡해지고 커진 사회에서는 적어도 군주의 국가 상속 방식으로는 채택하지 않는 게 정상적이고, 만약 시행하더라도 내전을 치르든 아예 타국이 되어 남남이 되든 영토가 쪼개져보면 다시는 그런 짓거리를 안 하려고 발버둥치는 게 일반적이다. 분할 상속제를 시행한 국가들이 하나같이 부족 사회에서 영토국가로 갓 성장한 국가들인 건 이런 이유가 있으며, 보통은 부족 시대의 전통을 어길 수 없어 분할 상속을 했다가, 몇 세대 가지 않아 적어도 왕위만큼은 장자 상속으로 바꾼다.

몽골 제국이 칭기즈 칸 이후 원나라,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등 여러 국가로 나뉘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티무르 왕조의 건국자 티무르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몽골인의 관습을 지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가운데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인지를 콕 집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티무르 사후 티무르 왕조는 자연스럽게 내가 정통이네 아니네 하는 이유로 내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 티무르가 오래 살아 손자들에게까지 영토를 나누어줬기에 자연스레 헬게이트 오픈. 티무르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샤 루흐의 치세에도 이런 형태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샤 루흐가 문무에 두루 능통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는 한편 군대를 이끌고 왕국 전역을 순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뒤를 이은 아들 울루그 베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소양은 물려받았어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해 즉위 2년만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왕국 분열

원래 유목민들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명확한 권위를 가진 계승권자 없이 황자들이 12세 이후 각지의 영주로 분봉되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새로 즉위한 술탄은 그의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즉, 술탄이 죽으면 그 아들들이 서로 하나뿐인 술탄 자리를 놓고 피를 흘리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처음부터 형제간에 피를 흘렸던 것은 아니다. 2대 술탄[42]인 오르한의 동생 알라딘 베이는 오스만 제국의 초대 재상으로서 내정을 훌륭히 이끌었다. 하지만 4대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즉위 직전 동생을 처형하고 그 후 바예지드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옥사한 뒤로 그 아들 4형제가 10년에 걸쳐 내전을 벌이면서 형제를 협력 대상이 아닌 라이벌로 보게 되었다. 술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관습이 되었고, 메흐메트 2세 대에 들어 아예 형제 처형을 법제화했다.

하지만 이 살벌한 경쟁 속에서 성장기의 오스만 제국은 유능한 술탄들을 줄줄이 맞이하는 행운을 가진다. 역대 술탄 가운데 처음으로 형제를 처형하지 않은 인물이 바로 쉴레이만 1세다. 아버지인 셀림 1세가 자신과 아들을 제외한 남자 황족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리다시피 해서 쉴레이만에게는 경쟁자가 될 형제가 없었다. 어찌 보면 행운.

하지만 이 제도는 술탄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급사하기라도 하면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약점이 있었고, 결국 16대 술탄 아흐메트 1세 때에 폐지되었다.

이후로는 술탄의 형제는 처형하는 대신 카페라고 불리는 커피숍 아니다 황궁내의 밀실에 가두어두게 된다. 장자상속의 전통이 오래되지 않아, 형제가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무능력자가 술탄이 되어 오스만 제국이 막장으로 치닫는 원인 가운데 하나를 제공했다.

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 때에 이러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창건자인 클로비스 1세부터가 네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고, 이후 프랑크 왕국은 나라가 갈라졌다 합쳐졌다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베르됭 조약이나 메르센 조약은 이 분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
3.2.2.1. 말자 상속(Ultimogeniture)
막내아들이 계승권을 받는 법칙. 주로 유목민들에게서 보이던 상속법으로 우선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장남부터 차례대로 부모의 재산 중 자기 몫을 챙겨서 독립하여 분가를 했고, 최종적으로는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 사후 나머지를 상속받는 것이었다. 동시에 일찍 독립하여 경험과 세력을 쌓은 노련한 형들은 일족의 영역 중 확장이 용이한 외곽을 차지하고, 나이가 어린 자식일수록 형들이 차지한 영역에 둘러싸여 안전하지만 확장은 불가능한 중심부를 물려받는다는 의미 또한 있었다.

이 상속제도는 유목민들의 특수한 상황에 바탕을 두는데, 농경민족의 토지와 달리 유목민족은 주요 재산이 자체적으로 수가 늘어날 수 있는 가축이기에 가능한 제도이다. 거기에 '유'목이란 단어 뜻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목)초지의 고갈은 생존의 최대 위협이고, 새로운 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것은 필수였다. 따라서 유목환경에서는 노동집약적인 농업과는 달리 아들이 노동 가능한 연령이 되면 가능한 한 빨리 분가시키는 것이 초지 고갈을 막을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말자 상속 자체는 왕위 계승법이라기보다는 재산 상속법의 원칙에 가까운 것이고, 그중에서도 분할상속(分割相續), 특히 균분상속(均分相續)의 한 형태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동아시아나 유럽등의 정주 사회에서도 사회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던 시기에는 분할상속이 대세였다가 사회구조가 보다 복잡해짐에 따라 가문의 재산이 분할되어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자에게 재산을 집중시켜 몰아주는 장자 우선 상속제, 더 나아가 장자 단독 상속제가 정착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정주 사회보다 사회구조가 단순하고 생산기반인 목초지가 인구 집중에 취약한 유목 사회의 상속 제도에서 분할상속이 대세였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상속 원칙이 '동등 분할 상속'이 아니라 '말자 상속'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장자가 종가의 명분을 상속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던 다른 문화권의 기준에서 대단히 특이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목민 '가족'이 성공적으로 번창해 나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족은 아들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결혼을 시키고, 완전히 장성할 때마다 가족의 가축(+만약 세력이 큰 가족이라면 가족에 속한 예속민이나 노예까지)중 일부를 나눠주며 첫째 큰아들부터 둘째, 셋째 및 그 이하의 작은 아들까지 차례로 독립시키게 된다. 이는 유목민의 주된 재산인 가축과 그 기반인 목초지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어차피 한 가족이 차지할 수 있는 목초지의 넓이는 제한적이고 그 목초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가축의 수 역시 제한적이다. 반면 가축은 번식을 통해 수가 불어나는 특성상 당장 한 무리를 떼어주어 수가 줄어들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불어난다. 그러니까 자식들을 빨리빨리 독립시켜 새 가족을 꾸리게 하여 새 목초지를 차지해야 혈연동맹인 대가족(친족) 집단의 총 재산이 늘어나고 영역도 넓어지는 것이다.

이 아들들은 먼저 독립한 큰형일수록 가능한 한 아버지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하여 넓은 목초지를 확보하려 할 것이고, 그 이후 독립한 형제들은 가능한 한 이전에 독립한 형들이 이미 진출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출하여 사방으로 퍼져나감으로써 형제간에 영역(목초지)를 두고 갈등을 벌일 가능성을 피함과 동시에 더욱 넓은 목초지를 확보하려 들 것이다. 이런 분가가 순조롭게 이뤄질 경우 친족의 영역 자체가 크게 성장하게 되는 것.

형들이 모두 독립해 나가면 아버지의 집에는 막내 혼자 남게 되는데, 그러면 막내는 독립할 필요가 없다. 막내까지 성인으로 키워냈을 시점쯤 되면 아버지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니, 아버지를 도와 가족을 지킬(아버지가 좀 더 나이들면 아버지를 모실) 젊은 남자가 가족에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내는 끝까지 아버지 곁에 남아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재산과 영역을 물려받게 된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해 나간 형들이 '분가'가 되고, 아버지의 집에 남아있다가 그 집을 그대로 물려받은 막내가 '본가(종가)'의 명분을 물려받게 되는 것. 하지만 유목 사회의 특성상 본가의 권위나 실권이 그렇게 강력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농경 사회였던 한국의 ' 종가'는 극히 비탄력적인 재화인 토지(농토)의 주된 부분을 종가가 물려받는다는 특성상 강력한 권위와 실권을 가지지만, 유목민의 주된 재산인 가축은 어차피 극히 탄력적인 재화이기 때문이다.

가축은 한파나 약탈등의 재난으로 확 수가 줄어들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번식으로 다시 수가 늘어난다. 하지만 개체수가 늘어나 봤자 마냥 좋은 것도 아닌것이 가축이 불어난다고 해도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목초지의 부양 한계를 넘는 수의 가축을 기를수는 없고 게다가 먹이를 구하기 힘든 겨울이 되면 이 부양 한계가 확 줄어든다. 즉 겨울이 오기 전에 가축을 대규모로 도축해서 수를 줄여야 하는 것. 차라리 현대 사회라면 이 고기를 팔아서 화폐의 형태로 축적하는 것이라도 가능하겠지만 화폐경제는 커녕 교역망의 발달도 제한적이고 운송과 통신 기술도 보잘것없던 전근대에는 이조차도 어려웠다. 결국 자신들의 겨울나기 식량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3] 결론은 유목민 특유의 단순한 사회상, 그리고 유목 특유의 산업구조로 인하여 유목민의 재산은 그 탄력성이 지극히 높은 동시에 축적 가능한 상한은 아주 낮았다. 쉽게 말하면 <좀 망해도 재기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부자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차례차례 독립한 아들들 사이에 독립 당시 가족의 처지에 따라 좀 더 많은 지원을 받고 나오거나 덜 받고 나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차가 결정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리고 독립 이후 스스로 자기 재산을 운영하다 보면 결국 어지간하면 자기 능력에 따라 재산을 꾸리고 세력을 일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분권적, 분산적인 유목민 사회의 구조까지 더해질 경우 결국 고만고만한 '가족'들로 이뤄진 같은 친족(씨족) 공동체 내에서 본가(종가)가 가지는 위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다.

굳이 종가의 의미를 찾아본다면 마침 막내 가족의 영역은 씨족 영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니 씨족의 모임( 쿠릴타이)가 열린다면 종가의 영역에서 열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고, 씨족의 연락이나 교류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기에도 편리할 것이라는 정도. 약탈이 일상인 유목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라는 장점도 있지만, 이는 반대로 약탈하러 나가기는 불편한 위치라는 단점으로 상쇄될만한 것이다. 만약 씨족이 단합된 행동(특히 군사행동)을 취하기 위해 이나 베그와 같은 지도자를 옹립한다 하더라도, 이는 씨족의 귀족 혈통중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인 자가 '선출'되는 것이지 종가가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즉 말자상속은 얼핏 보면 '장성한 자식일수록 부모의 세력과 재산을 일구는데 큰 보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혈연 사회의 현실을 거스르는 상속 원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막내에게 물려주는 본가의 계승권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기에 형들로써는 그냥 웃으며 막내에게 줄 수 있는, 또는 굳이 유목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우방인 가족의 화합을 깨트리면서까지 탐낼 가치는 없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제는 유목민들이 종종 폭발적인 기세로 성장하여 주변을 휩쓸어버리고 거대한 유목 제국을 건설할 때 나타났다. 한 무리의 말과 양을 거느리고 게르 유르트에서 지내던 유목민들은 한 세대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유목 제국은 그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체계와 질서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탄생하고 급팽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특히 강력한 왕권을 갖춘 나라일수록 손윗 형제자매의 계승권을 우선시하고 특히 장자 우선 원칙을 강력하게 적용한 이유는 이것저것 다 해봤더니 그게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목민 사회는 '장자에게 모두 몰아주는 게 그래도 제일 안정적이더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기껏 세워진 나라가 토막토막 쪼개질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도 새 제국의 지배층이 된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아비의 재산(=새 유목제국)은 자식들이 모두 공평하게 나눠받아야 하는 것이지, 첫째라고 모두 다 가지는 법이 어디 있느냐?" 라거나, "원래 일족의 근거지(중심지)는 막내가 물려받는 것이 옳다. 큰 자식들은 멀리 외곽을 물려받아서 더욱 더 영토를 넓혀야 한다" (영토를 더 넓히자는 뜻은 좋지만, 정주국가를 정복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이상 강력한 중심부의 구심력이 없으면 이 제국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유목 제국치고 이 문제, 즉 '창업군주 사후의 급격한 분열과 혼란'에 휘말리지 않은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유명한 유목제국이라 할 몽골 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몽골인들은 그나마 유목지역과 정주지역 사이의 변경에 터를 잡고 정주민의 문화를 얼마간이라도 받아들여온 케이스조차 아닌, 진짜 생 유목민이었던 데다가 한 세대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44]에 역사상 유래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이후에도 유목민 시기의 풍습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칭기즈 칸의 큰아들 주치의 경우, 어차피 혈통에 대한 의혹 때문에라도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주치가 킵차크 칸국을 받은 이유는 '장자가 아버지의 영역에서 가장 먼 땅을 받는' 유목민의 전통 때문이었다고 할 정도로 유목시대의 전통이 가진 영향력이 명확히 남아있었던 것.

물론 칭기즈 칸은 생전에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명확히 지명해두었고, 덕분에 그의 아들 세대까지는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도 불안요소가 있었던 것이, 칭기즈 칸(테무진) 생전 각각 일군을 이끌고 다른 방면의 사령관을 맡았던 형들(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와는 달리 툴루이는 아버지 곁에서 활동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자상속의 전통을 따른 것이 맞다. 그리고 그 결과 칭기즈 킨 사후 몽골 제국의 주력군에 대한 지휘권을 물려받은 것은 툴루이이고, 각지로 원정나갔던 군대와 그 지휘관들이 돌아올 때까지 2년간 대칸의 지위를 대행하게 된 것도 툴루이였으니 바로 이런 식으로 유목민 사회에서는 말자상속이 일어나는 것인데, 문제는 '단순한 유목민 씨족의 본가'를 누가 잇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가 누구인지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

그나마 당대에는 툴루이 자신이 2년 후의 쿠릴타이에서 아버지가 남겼던 뜻에 따라 오고타이를 지지함으로써 이것이 내분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주력군의 지휘권과 임시 대칸으로서 쿠릴타이의 운영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만약 이를 뒤집으려 했다면 심각한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즉, 칭기즈 칸이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내정한 이상 사실은 오고타이를 자기 곁에 머무르게 하고, 툴루이에게 일군을 맡겨 다른 방면으로 원정을 내보내는 쪽이 더 안정적인 계승구도 구축에 유리했을 것이지만 몽골인에게 익숙한 유목민의 풍습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니나다를까, 이후 오고타이계와 툴루이계는 몽골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미묘한 다툼을 벌이게 되고, 툴루이계의 몽케가 주치계의 지원에 힘입어 대칸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툴루이계가 다시 대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 툴루이의 4남인 쿠빌라이가 형의 대칸위를 물려받으면서 내세운 명분이 바로 '말자 상속제', 몽골의 전통인 말자 상속제에 따르면 징기스칸의 막내인 툴루이계가 몽골제국의 각지를 다스리는 칸들의 본가인 대칸위를 이어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쿠빌라이는 툴루이의 말자가 아니었고, 말자상속제를 철저히 적용하면 대칸위는 말자인 툴루이의 말자인 아리크부카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 결국 이로 인해 몽골제국의 분열을 가져오는 내전이 벌여지고, 쿠빌라이는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경우에도 말자 상속의 잔재가 보인다. 청나라에서 적장자 출신으로 등극한 황제는 도광제 동치제밖에 없다.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거의 막내 아들인 도르곤이 제위에 오를 뻔했으나 이미 장성하여 권력을 쥐고 있던 8남 홍타이지가 거의 가로채다시피 해서 황제가 되었다.[45]

이후에도 청나라는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적이 거의 없는데, 그나마 장자가 황제가 된 것도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제위에 오른 것이지 장남이기 때문에 황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외아들은 장자이면서 동시에 말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말자 상속이 적용되는 사례라 볼 수도 있다.

청나라는 보통 4~5남 이하의 황자가 황제가 되었고 8남 이하도 적지 않다. 진짜 막내아들이 제위를 물려받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현실적인 측면 때문이다.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릴 수 있는 황제는 죽는 순간까지 자식을 계속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황제든 승하 시점에서 막내 아들은 젖먹이 상태였다. 그러나 젖먹이인 막내가 제위를 물려받는다면 왕조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유아기를 벗어나 소년기에 있는 어린 황자가 제위를 잇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장성한 황자가 제위를 이어받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그나마 전성기 해당하던 시절에는 워낙 황제들이 장수했기 때문에 30대의 늙은(?) 나이에 황제가 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불혹을 넘겨 황위에 오른 옹정제.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다시 어린 나이의 황자들이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청나라는 어린 황자들이 제위를 물려받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도르곤이나 서태후처럼 막강한 섭정이 나타나기도 했다. 청나라는 아래에 태자밀건법이라는 특이한 계승자 지명법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해당 제도는 실제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난점이 많은 제도였기 때문. 대신 청나라에 '장자계승법'과 같은 명확한 왕위 계승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써는 유효하다.

위에서 제시된 몽골 제국이나 청나라, 또 다른 예로 오스만 제국등 유목민을 기원으로 한 제국의 경우, 정주제국에 비하면 '장자를 정당한 계승자로 여기는 정서'는 적었다. 하지만 역시 위에서 지적된대로, 유목민 특유의 말자계승법은 씨족 수준에서 재산을 분배할 때 유효한 상속법이지 거대 제국의 왕위 계승법으로는 역시 부적절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유목제국 기반의 제국들에서는 사실상 명시적이고 확고한 왕위 계승 원칙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꼭 누가 다음 황제가 되어야 할지 그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반대로 보면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인지 고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의 풍습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던 몽골 제국은 전통적인 유목민의 칸 선출 방법인 쿠릴타이를 통한 선출을 했고, 중국식 제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청나라는 '세자 책봉'과 유사한 제도를 거치되 꼭 적장자 우선으로 하지 않고 현임 황제가 보기에 똘똘한 놈을 골랐다. 그런데 차기 황제를 대놓고 임의로 고르면 그 부작용이 염려되니 '고르기는 골랐으나, 누굴 골랐는지는 비밀로 해 두겠다' 는 특이한 제도를 만든 것이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왕자들이 12살이 넘으면 각 지역의 영주로 임명하여 서로 경쟁시키고, 이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자가 차기 파디샤가 되는 (내전까지 각오한) 극단적인 경쟁구도를 만들었던 것. 결국 이 모든 부가적 제도들은 누군가를 황제로 '고르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제도의 장점과 단점 역시 명확하다. 꼭 자식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유능한 이를 고를 수 있으므로 잘만 돌아가면 대대로 유능한 황제가 즉위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 그 대신 극도로 정국안정성이 떨어져 내전이나 분열의 위험성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태조 이성계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도 이 제도의 영향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성계가 여진족이 많이 거주하던 동북면 출신이기 때문에 여진족과의 접촉을 통해서 유목민식 상속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이안사 이래 이성계의 조상들을 보면 주로 4남 이하의 서열이 쌍성의 천호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이미 이성계 집안은 그 전부터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또한 새 왕조를 떠받치는 소위 신진사대부는 친명배원 성향이 강했다는 것. 하지만 어떠한 설도 문헌적 근거는 빈약하다. 자세한 내용은 1차 왕자의 난 문서에 나와 있다.

여담으로 고려시대 동북면, 쌍성총관부 지역인 강원도(북한) 통천군 출신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그룹 후계자를 실질적 막내 아들인 정몽헌에게 물려주어 당시에 상당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래 정주영은 처음에 정몽준에게 그룹을 물려줄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하나, 정몽준 본인이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비춰왔었기 때문에 정주영은 정치 밑천이 되도록 현대중공업을 일찌감치 떼서 그에게 주었고, 대신 5남인 정몽헌에게 그룹을 물려주었다.그리고 정몽준은 아들 잘못키워서 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도 초기에는 막내가 계승했다고 한다.

3.2.3. 로마 방식

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에서 제위가 계승된 방식.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공화정을 제정(원수정)으로 전환하면서 명목상 공화국의 형태를 유지시킨 데에서 비롯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란 직책은 설명하자면 일종의 세습 가능한 종신 대통령직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면 왕이랑 다를 게 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명목상으론' 왕이 아니었기에 이론적으론 인정만 받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황제는 그 대상으로 자신의 아들을 지명했으며 시민들 또한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직관적으로 그냥 (바실레우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로마 제정은 명목상 공화정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관계로 확고한 권위를 가진 왕위 세습 규범이 없었고 때문에 황제로 누가 즉위하건 찬탈당하기 쉬운 위치에 놓였다. 이 때문에 황제의 후계자는 안정적인 세습을 위해 어느정도의 공적(권위)이 필요했다. 황제의 후계자가 아무 공적 없이 황위에 올랐다면 곧장 제위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혈연에 의한 황위 세습이 이어진 끝에, 로마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동아시아의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여겨지게 됐지만, 그와 별개로 시민들은 황제가 자신들에게 빵과 서커스를 베풀어줄 수 없을 때 쉽게 황제를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목상 공화정 시절의 관념이 어느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서유럽에서는 귀족이 아닌 평민이 역성혁명을 통해 제위를 찬탈하는 것이 대부분 불가능했지만, 로마 제국의 후예인 동로마 제국에서는 가능했다.

원칙은 법규에 따른다는 것이지만 계승권이 불분명한 상황에선 실제로는 힘센 놈이 짱이어서 그가 황제가 된다. 때문에 조금만 계승이 꼬여도 다른 놈이 현임자의 실정 운운하며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 대립황제로 추대되는 바람에 내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계승 원칙으로도 안 될 정도로 꼬이면 원로원에서 황제를 옹립하거나 변경 로마군들이 자기들 중에서 황제를 옹립한 뒤 원로원에서 승인을 받는 식으로 황위를 이어나갔다. 후대에 이르면 원로원에 한정짓기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등 국가 고위층의 승인을 받는 식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로마 제위의 계승이 이런 복잡한 방식이 된 것은 로마 황제라는 자리의 특수성 때문이다. 애초에 공화정이던 나라에서 실권을 틀어쥔 자가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명분상으로는 공화정과 로마법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황제로 군림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이 로마 제정이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는 그 시작 단계에서는 군단 지휘관과 호민관 특권을 동시에 가진 하나의 '관직'이었고, 그 관직의 계승은 주로 '이전까지 황제직을 수행하던 자가 차기 계승자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정제( 아우구스투스 또는 임페라토르)가 자기 자식을 부제( 카이사르)로 임명함으로써 차기 계승자로 인정받게 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고, 아니면 죽은 황제의 황후가 가장 유력한 귀족과 결혼을 해서 아우구스투스(=정제, 선임황제) 작위를 물려받게 함으로써 황위를 이어가게 하는 방식으로 계승할 수도 있다. 동로마 중흥기 마케도니아 왕조 황녀, 황후, 여황제 조이가 대표적인 사례.

관습적으로 자식에게 계승권을 주는 일이 많았기에 혈통 계승처럼 보이지만 법적으로는 딱히 혈통 계승이라고 정해진 바가 없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기 황제들도 혈통 계승이 아닌 양자 계승이었다. 그러니까 살리카 방식이나 동아시아의 부자 상속과 달리 로마의 황제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자식이 잇긴 했지만 혈통에 근거한 것도 아닌, 로마법에 따른 계승이라는 것.

어쨌든 갖다 붙인 법이라도 법적으로 인정만 받으면 황제가 되기 때문에 고대 로마 제국을 그대로 이어받은 동로마 제국을 1400년대 후반까지 존속 가능케 한 바탕이 되었다. 중간중간 혈통이 소멸되고 듣보잡 오랑캐가 황제가 되어도 인정받은 이상 어쨌든 황제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심지어 듣보잡 오랑캐까지도 황제가 될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은 반대로 말하면 혈통조차도 제위를 보호해주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제위 불안정성을 뜻한다. 명문화된 계승 방식이 없다는 것은 결국 아무나 (주로 장군과 호족들이) 무력만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규칙을 뒤엎을 수 있다는 뜻이기에, 군인 황제 시대, 3세기의 위기, 20년간의 혼란, 라틴 제국의 성립, 그 외 세기도 힘든 무수한 반란과 찬탈이 로마 제국 천오백년 역사 곳곳에 상처를 남겼고, 이는 결국 서로마와 동로마의 명줄을 조이고 끊어버렸다.

십자군 전쟁을 전후하여 동로마에서도 서유럽식의 왕위 계승 방식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1000년 넘게 이어진 왕위 계승 방식을 봉건제 비슷하게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았다. 콤니노스 왕조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이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질적으로 확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동로마 이래로 이 방식을 그대로 도입한 국가는 없다.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의 투표 방식이 로마 방식에서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

3.2.4. 숙질 계승

백부· 숙부에게서 (주로 남자)조카에게 계승되는 방식이다. 주로 미혼이 원칙인 주교후 등 성직제후 승계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몬테네그로 공국의 전신인 몬테네그로 주교후국에서 페트로비치네고시 가문이 이 방식을 통해 4세기 가량 주교후직을 세습했다.

그 외에도 네스토리우스파의 경우처럼 이슬람의 탄압으로 인해 교단의 생존 자체가 힘들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교단의 생존을 위해 결속력을 유지하고 구심점인 총대주교의 사도 전승을 보존하려는 의도로서 총대주교를 선출에서 특정 가문에서 세습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혼인이 불허된 자리였기 때문에 숙질 계승으로 승계하게 된다.

하지만 총대주교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딤미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세금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특정 가문만의 숙질 계승은 바꾸기가 어려웠다. 결국 16세기 초에 교단이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된다.

3.2.5. 근친혼 계승

왕위를 다른 가문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근친혼을 통해 외척이 들어오지 못 하게 하는 방식이다. 왕위 계승자는 부모 둘 다 왕족이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 왕가는 왕가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근친혼을 거듭하며 계승했다. 고려 초기엔 너무 많은 호족 출신 외척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근친혼 관계에서 태어난 왕자를 계승 순위 1위에 올리기도 했다.

장점 하나는 확실하다. 이렇게 태어난 후계자는 누구도 태클 걸 수 없는 로열 블러드라 막강한 정통성을 갖게되며 자연히 왕권도 강해진다.

그럼에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역시 근친상간에 대한 생물학적 혐오감일 것이다. 사촌혼도 아니고 남매혼을 밥먹듯 했던 고대 이집트에서도 오직 왕가만이 근친혼을 했으며, 이것도 파라오를 인간이 아닌 신의 화신으로서 섬겼기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신화에서 신들의 근친상간은 흔히 나타난다. 하지만 인간의 근친상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죄악시 되지 않았던가.

다음으로 나타나는 문제점은 대를 이어갈수록 왕위 계승의 자격이 있는 후손이 줄어든다는 것과 골품제와 비슷하게 변질하면서 일반적인 방식인 부계상속에서 모계상속으로 전환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후궁을 들여도 왕위 계승자를 얻지 못해서 단절되는 왕가가 생기는 판국에 일부일처제나 다름없는 왕족과 왕족간의 혼인에서 왕위 계승자가 나올 확률은 더 떨어지니 결국 대를 이어갈수록 왕족의 수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후계 왕족의 수가 더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 왕족과 비슷할 정도로 여성 왕족의 위세가 강해지므로 남성 왕족이 없다면 여성 왕족이 여왕으로 즉위하거나 여성 왕족과 왕족이 아닌 남자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가 발생하게 된다.

실제의 사례에서도 신라 성골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남성 성골의 대가 끊어져서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는 두명의 여왕이 연속으로 즉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고려의 경우에도 목종의 후계자로 헌애왕후 김치양이 사통하여 얻은 아들을 김치양이 추대하려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뒤집어지고 현종이 즉위한 사례가 존재한다.

하지만 고대 국가에서 여왕이 즉위하면 보통의 경우에는 군사력이 약해지기 십상이라 비담의 난같은 내부반란이나 당나라 태종이 643년에 신라의 구원을 요청한 사신에게 자신의 사촌을 보낼 테니 신라의 왕으로 삼으라고 조롱한다거나 의자왕에게 신라 영토를 심각할 수준으로 빼앗긴다던지 하는 사태가 일어나서 별로 좋지 않은 성과를 보였다. 요나라 예지황후처럼 군사 방면에도 재능이 출중한 경우도 있으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며 예지황후의 경우에도 아들로 성종이 굳건하게 존재하며 아들을 돕는다는 의미로 섭정을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다.

여성 왕족과 왕족이 아닌 남자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보위에 올리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부른다. 왕가의 성씨가 바뀌는 역성혁명이나 마찬가지의 사태가 터지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로 인해 왕가의 단절이 많아서 여성 왕족이 타국의 왕족과 결혼해서 대를 이어나가거나 아예 이전 대의 공주와 결혼한 타국의 왕족이 즉위하는 경우가 많은 서양에서도 이런 경우에는 왕가의 성씨가 완전히 변경되는 문제가 터지고 일이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여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게 된다. 신라에서도 결국 성골이 완전히 단절된 뒤에나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여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는 방법으로 전환되며 고려의 김치양이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가 비극으로 끝난게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다른 문제점도 많은 편이다. 반복되는 근친혼으로 세대를 거듭할수록 온갖 유전병을 주렁주렁 달게 된다는 것.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무능한 후계자들이 줄줄이 태어나게 되었다. 물론 어지간하면 유전병이 발현될 정도로 근친혼을 하는 일조차 극히 드물어서 의외로 잘 나타나지 않은 단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파라오의 계승 이외에는 특정한 이유에 의한 일시적인 사례 정도로만 시도되었으며 파라오의 경우에도 외국으로부터 근친혼을 한다는 식의 비난을 담은 외교문서를 받아보는 등 외부로부터의 평가가 좋지 않았다. 고려도 현종 이후에는 ' 용손'(龍孫)이라는 개념만 유지하고 근친혼으로 낳은 자식만 왕위계승권이 있다는 것은 서서히 폐기하였고 풍습만 간간히 이어지다가 충렬왕의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부터 근친혼이 소멸하고 용손이라는 개념만 남았다.

3.2.6. 환생 계승

몇몇 불교왕국에 있는 방식으로, 불교의 윤회설과 결합한 특이한 계승 방식이다. 선대가 사망하면 윤회에 의거하여 그의 영혼이 다른 아이의 몸으로 환생한다고 믿기에, 선대가 죽으면 그가 남긴 환생 단서를 통해 그 뒤를 이을 계승자가 될 아이를 승려들이 찾아, 적법한 심사를 거쳐 환생자로 판명되면 즉시 선출되었다.

즉, 이들 나라의 지도자는 보살의 화신으로 티베트와 다른 모든 중생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열반으로 이끌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금 태어난다는 것이고, 이 쪽 세계관에서는 왕위 계승이 아니라 계속 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혈통으로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도 다른 세계와 다른 특이한 부분이다.

이렇게 선출된 경우 보통 아주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치세가 대단히 길게 이어지고 어린 시절 정치적인 권한은 관례적으로 정부와 섭정에게 있다.

티베트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몽골 젭춘담바 후툭투(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 Jebtsundamba Khutuktu)가 이에 해당한다. 셋 다 지금은 왕이 아니지만 역사적으로는 군주와 마찬가지인 지위였던 적이 있었고, 티베트 독립운동의 경우 달라이 라마를 사실상의 국가원수로 간주하고 있다. 젭춘담바 후툭투 8세는 복드 칸이고, 복드 칸국의 군주였다. 9세는 1932년생으로 공산화를 피해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생활하다 몽골이 민주화되면서 귀국해 2012년 입적, 10세는 몽골의 어린이로 다시 태어났다는데 아직 너무 어려서 정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4대를 마지막으로 환생하지 않겠다(=후계자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붓다가 되어 열반에 든다는 의미로 해석한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기보다는 "달라이 라마"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더이상 태어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달라이 라마를 계승하려면 환생자를 찾아내고 이를 공인할 판첸 라마가 꼭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정부가 (달라이 라마가 인정한) 11대 판첸 라마 게둔 최키 니마를 연금하고 자기네들이 별도로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 라마로 옹립하였으므로, 달라이 라마 사후에 중공의 입맛에 맞는 꼭두각시를 15대 달라이 라마라며 옹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3.2.7.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청나라 시절 옹정제 이후 사용된 제위 계승 방식. 황제가 생전에는 황태자를 공표하지 않고 그 이름을 써서 건청궁( 자금성의 침전 겸 편전)의 옥좌 뒤의 순치제가 쓴 정대광명이란 현판에 밀봉해 두었다가 황제 사후 이것과 내무부의 밀지를 맞추어 다음 황제를 지정하는 방식이다.

청은 3대 순치제 때까지는 전통에 따라 바일러들이 선황의 자손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를 추대하는 선출제의 방식으로 계승을 하다가 4대 강희제 때 와서 중국의 장자 상속의 원칙을 도입하지만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어서 태자는 자질 문제로 여러 차례 폐위, 복위를 반복했고, 강희제의 치세 말기는 차기 제위를 둘러싼 여러 황자들 사이의 파벌 싸움으로 혼란스러웠다.[46]

이런 과정을 거쳐 즉위한 5대 옹정제는 황태자를 일찍 정해버리면 황태자가 교만해지고 그를 둘러싼 파벌이 형성될 것이라 지적하며 위와 같은 방식을 도입한다.

이 방식의 장점은 첫째로 황제의 아들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을 택할 수 있고, 둘째로 야심 있는 황자들이 모두 제위를 얻기 위해 능력을 닦겠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날 행동은 할 수 없으니 권력 다툼이 억제되며, 셋째로 황제 사후 제위를 둘러싼 친족이나 환관의 농간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다만 이 방식을 쓰려면 황제가 매우 강력한 황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고 난 뒤 선황의 유언 따위는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제위가 엉뚱한 곳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급사했거나, 결정했더라도 나중에 과실이 있어 바꿔야 하는데 미처 그러지 못하고 죽었다면 대혼란이 일어난다.

거기에 황제의 모든 아들들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제위 계승을 위해 레이스를 하는 상황이라 그들 중 누군가가 승자가 된다 해도 탈락한 황자들의 야심 + 그들이 구축한 세력을 다음 황제가 감당해야 한다. 차라리 계승자가 정해져 있다면, 암투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진작에 포기하거나 황태자에게 달라붙어 그의 친위세력이 되거나 할텐데 모든 황자에게 계승 자격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달려보지 않겠는가?

다만 아래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경우엔 누가 후계자가 될지 온 동네가 다 알고 있었다. 또 청나라는 황자들에게 다 친왕직을 주지는 않았고, 황제의 총애나 업무 능력에 따라 화석친왕-다라군왕-다라패륵-고산패자로 나뉘는데 건륭제 때를 빼고 옹정제 때부턴 황제의 아들 중에서 단 1명만이 화석친왕에 임명되었다.

그러니 정작 청에서 온전하게 이 방식으로 제위가 계승된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옹정제가 이 제도를 창안한 이후 제위를 계승한 황제들은 다음과 같다.

죽 살펴보았듯이 밀건법이 완전하게 적용된 예는 사실상 전무하다. 밀건법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장자가 아니라도 능력 있는 황자가 뒤를 이은 사례가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청나라 역시 적장자 원칙을 웬만하면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청나라와 만주국 황위 요구자들도 사실상 한족식 적장자 원칙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에는 오만에서 계승 방법의 하나로 사용중이다. 왕실 협의회가 술탄 승하 3일 안에 후계자를 확정하거나, 술탄이 생전 남긴 서한을 따른다.

2020년 카부스 빈 사이드 술탄이 승하했을 때도 술탄의 사촌인 하이삼 빈 타리크 알사이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술탄의 서한이 공개되었다.

3.3. 추가조건

독자적인 계승 방식이 아니라 국왕이 즉위할 때 추가하는 조건. 각 국가와 개별 왕에 따라서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며 이웃 국가들이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세세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일단 대표적인 사례는 아래와 같다.

이런 추가조건들은 즉위하고서 안 지키거나 아예 무시할 수야 있지만,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는데다 지속적으로 정통성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나므로 보통 지킨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조건들 때문에 왕위 계승은 각 사례마다 모두 독자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복합적으로 섞인 경우도 있는데 에스와티니의 왕위 계승 방식은 꽤 복잡해서 일단 선왕의 자식이 물려받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왕이 생전에 직접 후계자를 지명할 순 없고 '리코코'라는 위원회에서 왕이 생전에 들였던 왕비들 중에서 '위대한 왕비'를 선정하고 그렇게 당선된 왕비의 자식이 물려받는다고 한다.[53]

4. 왕위 계승 법칙의 필요성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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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실사판 찍는다.

이러한 왕위 계승의 법칙들은 현대사회의 시선으로 보기엔 불합리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의 특성상 계승법을 지키지 않거나 줏대없이 적용할 경우 불합리성을 훨씬 상회하는 혼란이 발생하며, 전쟁으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갈등으로 나라가 쪼개져 버린다.

대부분의 왕위 계승법칙은 능력이나 인망같은 리더로서의 능력을 거의 보지 않으며, 성별이나 출생순, 적자/서자 여부 등 현대인이 보기엔 지극히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계승 순서가 정해진다. 그나마 선거군주제 같은 경우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 만인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도 아니며 협의제는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이 더 제한되어 있다. 심지어 이 두 방식도 반발하는 측에서 무효니 뭐니 하면 반발하는 측을 제압해야 안정적으로 계승받을 수 있다.

이런 결과 무능한데 장남이라서, 적자라서, 서열이 높아서 즉위하는 경우가 왕왕 생기고 나라는 쇠락의 길로 빠져든다. 게다가 왕족들끼리 혈연으로 얽힌 유럽의 경우 국가간의 왕위계승규범 차이에 따라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왕왕 생겼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바보라서 이런 법칙을 만들고 따른게 아니다. 다소 불합리한 면이 있더라도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는 게, 왕위 계승 법칙을 바꾼다는 건 대체적으로 권력의 양도 방식을 바꾼다=이견을 가진 자가 언제든 이전의 계승 법칙으로 내전을 촉발시킬 수 있다라고도 해석 가능하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군주라는 존재 자체가 오로지 조상 덕으로 대대손손 철밥통으로 해먹는 불합리의 상징이겠지만, 군주제가 주로 통용되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절대 다수의 인민들은 의사나 능력 이전에 정치에 참여할 물리적 방법 자체가 없던 시대였다. 촌락 단위 이상으로 사회가 성장해도 확고한 권력을 손에 쥔 군주라는 존재가 없이 안정적인 통치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고[54], 이러다 보니 애초에 군주라는 자리 자체가 국가의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그 승계방식 또한 안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이런 왕위 계승 법칙조차 없었다면 그 나라는 권력을 체계적으로 양도할 방법이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최고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내분의 걱정을 한시 안고 살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55][56]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든 왕위를 주장하며 반기를 들 수 있다는 말이다. 중세 이전의 공화정 국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에는 로마 공화국처럼 나라가 도시국가를 초과하는 규모로 커지면 많은 야심가들이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설령 반란이 직접적으로 발생하지 않더라도 군주는 정통성이 아킬레스건이 되어 국정이 안정된 상태로 이끌고 가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내분을 방지하기 위해 과도한 의심과 사회적 비용이 초래되었다.

군주A와 무능하지만 왕위계승권한이 있는 후계자 B, 왕위계승 순위와 전혀 무관했지만 능력있어 A의 사랑을 받는 C의 예시를 들어보자.
가정1. A는 적법한 왕위계승절차에 의해 혈연으로 왕이 되었다.
그럼 그 나라는 대체적으로 혈연으로 물려받는 나라였을 텐데 한순간에 전통을 바꿔버리니 누군 무능하더라도 정통성이 있는 B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B를 지지하고 다른 누군 능력있다고 C를 지지하여 즉각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 B가 전통에 따라 왕이 된 뒤 암군이 된다. 이에따라 선왕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고, 졸지에 왕위 계승권이라는 전통이 선왕의 의지보다 우월하게 취급되며 권력이 분열된다.
* C가 왕위 쟁탈에 성공해서 군주가 된다. 하지만 왕위 쟁탈전 끝에 혈연승계 전통은 무너졌고, C가 가진 정통성은 선왕의 인정+자신의 능력 밖에 없다. 이에 따라 혈연 왕위계승절차 전통은 크게 손상되었고, 그 결과 야심이 있다면 선왕의 지지와 능력을 명분으로 너도나도 왕족 혈통을 짓밟으며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다.

가정2. A는 자수성가한 혁명가로서 혈연과 무관하게 왕이 되었다.
이 경우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B는 고대부족사회의 족장제 전통이나 타국의 왕위 계승체계에 따라 적법하다고 판단된 계열이다. 그말인 즉슨 이 나라는 아직 적법한 왕위 계승 절차가 없으며, 다른 권위에 의존하여 왕위 계승체계를 뜯어 고치려는 B를 지지하는 측과 선왕의 뜻+능력으로 C를 지지하는 쪽이 순수한 힘싸움을 시작하며 즉각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 어느 쪽이 이기든 승리한 측이 새로운 왕위 계승 절차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해당 국가는 이와 같은 추가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 해당 왕위 계승 절차를 대대로 준수하게 된다.
...결국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단초만 제공한 꼴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이뤄지는 계승도 너무 이상적인거고, C같은 적합한 후계자를 찾는 건 쉽지 않고 혹은 능력이 있더라도 즉위 후 타락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덧붙여 능력이 보일만큼 자질이 충분해야 하므로 천재가 아닌 이상 상당히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 물려받은 사람이 오래 재위하기도 힘들다.[57]

그런데 이것마저도 이상적이고 진짜 왕위 계승의 법칙이 오직 능력(=힘)이라면 이보다 더한 개판이 벌어져서 틈만 보이면 왕위를 탈취하려 호시탐탐 노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은 왕권이 약한 편이었던데다 10지파의 연합체로 출발하여 계승도 불안해 일단 기본적으로는 왕이 죽으면 그 아들이 물려받는다는 (그 시대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방식으로 계승했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쿠데타가 일어나 고작 200년 남짓 정도 존속한 기간동안 19명의 왕, 9개의 왕조가 지나갔으며 시므리 왕조와 시므리처럼 7일만에 왕과 왕조가 교체되는 사례도 벌어졌다.

실제로 이 '총애'가 정말 객관적인 능력에 기반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많은 경우에는 그저 왕의 개인적인 호오, 혹은 모친에 대한 총애가 그대로 자녀에게 내리물림되는 식으로 형성되며, 그 호오가 능력에 기반했다는 보장은 없다. 일례로 중국사에 손꼽는 명군인 영락제는 차남인 주고후가 무재가 출중하고 정난의 변 당시 군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총애하며 태자 책봉도 고려했으나, 정작 그 주고후는 난폭하고 안하무인인 성정과 행실로 군주감으로는 완전 꽝인 인물이었으며 결국 영락제 사후 조카 선덕제의 치세에 기껏 반란을 일으켜놓고는 성 밑 지하통로로 도망치는 추태나 보이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연왕 쾌 또한 요순을 본받는다는 명목으로 연왕 자지에게 선양했는데 그것도 제대로 된 기준을 재고 한게 아니라 신하 녹모수가 넣어준 바람에 넘어가 그런 것이다(...) 당연하지만 연왕 쾌는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이 문제의 진짜 끝판왕은 바로 수양제. 그가 적장자인 형 양용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철저한 기만의 연속이었다. 양용도 용렬한 인물이긴 하나 그저 적당히 아버지가 쌓아놓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후대를 고생시킬 수준에 불과(?)한 데 반해, 수양제는 바로 선대가 쌓아올린 중국 역사에 손꼽힐 전성기를 바로 자신의 대에 작살내버리고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적장자 계승 원칙을 무너뜨리고 '능력과 인품'에 집착한 결과가 도리어 파멸을 불러온 셈이다.

한국사에서 외가의 후광으로 세자가 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이방석의 경우도 공식 사서야 승자의 기록이니 그렇다쳐도 민간에서도 긍정적인 기록은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혹은 그냥 총애도 아니고 모친와 외가의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승계원칙을 어그러트리는 지경에 이르면 그냥 빼도박도 못하는 내란 테크다.[58]

게다가 이렇게 후처의 소생이 총애를 받아 후계자로 교체된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므로 정통성 부재+어린 나이+능력(정치력) 부족의 3단 콤보를 맞이하게 된다. 극단적인 예로 선조(조선)가 정말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해버렸다면, 영창대군은 고작 만 2세에 즉위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쪽은 외가가 별달리 세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 인목왕후는 조선 역사에 손꼽히는 눈새(...)라 답이 없다.[59]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전근대 전제군주정 특성상 왕의 과중한 업무와 비과학적인 건강관리(식습관, 운동, 위생 등)까지 더해지면 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국왕은 정말 타고난 건강 체질이 아니고서야 높은 확률로 다시 어린 후계자만 달랑 남기고 요절하거나 아예 후사 자체를 못 남겨버리는 불상사까지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론 이미 승계율이 개판난 마당에 그 어린 후계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훤한 일이다.[60]

즉 불합리해보여도 안 따르면 나라 꼴이 더 개판치는 원인이 된다.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페르난도 7세가 자기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살리카 법을 없애서 딸인 이사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그의 동생인 카를로스가 살리카 법을 따라야 한다며 자신을 '카를로스 5세'라고 칭하며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킨 바 있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랬으며 심지어 그 이후에도 스페인 내전 시기까지도 '자칭' 카를로스 5세의 후손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 카를리스타'들이 활동했다.

광해군의 경우는 분명 가장 똑똑하고 신료들의 지지를 받는 아들을 세자로 세웠음에도 계속되는 정통성 시비 속에 아예 흑화해버려(...) 결국 조선사에 손꼽히는 폭군으로 박제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계승 방식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혈연에 의한 계승일 경우 계승 법칙에 따라 후계자가 미리 정해진 셈이므로 아주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시켜 자라서 적어도 폭정이나 실정을 일으키게 할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다.[61] 조선의 경우 원자/원손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살인적인 교육과정을 시작해서 그냥 몸에 배이게 만들었을 정도다.

실제로 명나라 4대 암군 중 마지막 인물인 천계제는 할아버지인 만력제가 아버지인 태창제와 손자인 자신에게 무관심한데다 아버지인 태창제가 고작 즉위한지 한달만에 승하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없이 황제가 되었고 워낙 무관심하게 자란 바람에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아 즉위 당시 15세임에도 불구하고 문맹이라서 정사를 모두 총애하는 환관 위충현에게 맡기고 놀아제꼈다. 조선도 마찬가지라서 이런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채 덜컥 왕위에 오른 중종이나 인조, 순조[62]는 전대 군주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본인들도 제대로 된 정치적 경륜이 없는 상태로 국정을 이끌다보니 그야말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미성년 시기에 어떠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했음에도 단 2개월간의 세자 시절을 거치고 즉위해 아무런 문제 없이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던 세종이 정말 특이한 케이스다.[63]

이런 적법한 법칙을 따르지 않을시의 문제는 왕정 국가 뿐 아니라 공화정 국가에도 맞아떨어져, 적법한 절차가 없다면 지도자가 물러나거나 죽자마자 정치투쟁이나 쿠데타가 일어나고, 누군가 절차를 무시하고 지도자가 되면 그 다음은 연달은 쿠데타와 정치투쟁의 연속이다.

당장에 미국이 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는 드물게도 비교적 내적 문제 없이 국가가 발전한 것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민주주의에 기초한 선거로 4년 임기를 두 번만 하고 깨끗이 물러나 자연히 후임자들도 적당히 하고 물러나는 전통이 마련되어[64]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까지 보통은 4년 임기를 한 번 혹은 두 번만 하는 게 국룰이었고 그나마 4선까지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당연히 워싱턴처럼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4선을 한 것이다. 그나마도 사후에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4년 중임제를 헌법으로 못박아버렸다. 이후로 80년 동안 잘 유지되다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한 도널드 트럼프가 지지자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결국 당선자인 바이든이 취임했다.[65]

이렇게 미국도 초대 대통령의 선례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시련이 있었던 만큼 그보다 못한, 그러니까 초대 대통령부터가 독재를 하거나 잘 가다가 쿠데타가 성공해버린 나라는 더 막장이라서[66] 그나마 나라가 잘 나갈 때는 정치도 조금 안정되어 있어도 나라가 잘 안 나갈 때는 이 문제가 어김없이 터진다.

즉 공화정 국가의 경우 대체로 선거에 따른 지도자 선출은 왕위 계승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정통성을 세워주는 절차이며 때문에 웬만한 독재 국가도 선거 자체를 없애는 경우는 에리트레아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드물다. 중국이나 북한도 명목상의 선거는 존재한다.

5. 현존하는 왕실의 왕위 계승 법칙

6. 왕실의 왕위 계승 법칙

7. 귀족 작위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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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귀족 작위는 원칙적으로 살리카법이 적용되지만 연합왕국 수립 이후 생성된 작위는 특별한 경우, 예를 들면 작위를 받은 사람이 딸만 있어 살리카 법을 적용하면 100% 대가 끊어질 상황이 예상되면 국왕의 허가(칙허장)를 얻어 여성이 계승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작위를 수여받을 때 미리 결정을 해 둬야 하고, 1대에 한해서만 허용된다 (딸→외손자는 가능하지만 딸→외손녀는 불가능). 연합왕국 성립 이전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작위는 백작 남작 급에서 아들 우선 상속법인 것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는데, 작위 상속이 영지 상속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국회에서 스페인처럼 귀족 작위 모두를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바꾸려는 법안이 제출되었긴 하지만 몇 년째 계류 중이다.[76]

8. 기타



[1] 왕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 경우가 많은 동아시아와 중근동에 비해 봉건제적 성향이 강했던 유럽에서는 예법이나 규범 측면에서 왕과 영주귀족 사이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실제 권력에서도 왕 못지 않은 대귀족이 드물지 않았고. [2] 적통인지 서통인지, 왕자인지 왕녀인지 등 [3] 미시경제학에서의 사전편찬식 선호체계나, 올림픽에서 메달 갯수로 순위를 매길 때 은메달 이하의 갯수에 상관없이 일단 금메달 갯수로 줄을 세우고 나서, 금메달 갯수가 동률일 경우 은메달 갯수로 줄을 세우고 보는 것과 비슷하다. [4] 서유럽 문화권에서는 왕가 밑의 일반 귀족 가문도 왕가와 연이 하나도 없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시대의 유력 성관·가문들도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n대조 할머니 중에 이씨 왕족 출신이 하나도 없는 집안이 거의 없다. [5] 반면 부르고뉴 공국은 원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왕자로서 분봉받았던 'appanage'로서 내지 번국이었다가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본국 및 왕실 본가가 혼란해지자 독자노선을 타기 시작하는데, 왕실의 분가 주제에 잉글랜드하고 붙어먹지를 않나(...) 또 왕실 본가의 허락 없이 저지대 지역과 독자적으로 정략결혼을 했는데 얼마 후 그 쪽에서 남계가 끊기자 동군연합의 형식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부르고뉴국으로 진화했었다. 여기도 그리 오래지 않아 용담공 샤를이 죽어 남계가 단절되고 마리 드 부르고뉴만 남으면서 결혼을 통해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조로 흡수되는 유사한 형태로 끝났지만. [6] 예컨대 왕실 본가와는 아예 태조 이성계 전에 갈라졌다던 경우. 이 경우는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여 시조 이한으로부터 태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인 목조 이안사 이전에 갈라진 계통을 말한다. 아니면 왕마다 왕자를 제법 많이 두었던 조선 전기에 서자 중에서도 후순위였던 왕자의 후손이라던가, 억울하게 역모 사건에 얽혀서 처형당한 왕자의 후손이라던가 등. 즉 '방계 남성 왕족이 직계 여성 왕족과 결혼하여 실질적인 계승범위 안으로 들어간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례이다. [7] 이미 귀족 작위의 경우엔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바뀐지 오래되었고 왕위만 아들 우선 상속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펠리페 6세의 자녀들은 딸만 둘이기에 성급히 개정할 필요가 없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8] 사실 이런 예는 유럽사에서는 그다지 특이한 사례는 아니라서 베네치아 도제도 지금의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달마티아 공국의 공작을 겸했다.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를 통해 명목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을 자처했다. 근데 결국 신하가 주군에게 하극상을 일으켰다. [9] 실제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을 법한 후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딸의 경우 외국 왕실 후손과 결혼시키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수녀원으로 보내서 수도자가 되도록 하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물론 유력한 수도회에서 수녀원장 같은 자리를 하면서 부귀영화가 보장되긴 했지만 합법적으로 결혼을 하는 건 금지된 셈이다. [10] 실제로 백년 전쟁 초기의 프랑스 대귀족과 영주들은 발루아든 플랜테저넷이든 다 싫어했지만, 외국계인 플랜테저넷을 더 혐오하여 필리프 발루아의 계승을 받아들였다. [11] 서자중자설 기준. 다시 말해서 서자란 말이 원래는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는 말이 아니라 장남을 제외한 다른 모든 (뭇이란 표현의 용례가 한정적이고 잘 안 쓰여서 최근에는 '여러 서'로 바뀐 것 같은데, 庶자의 대표 훈이 예전에는 '뭇 서'였다.) 아들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관점에 따를 경우에 그러하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예송논쟁 등에 있어서 상당히 논란거리가 됐던 사안이다. [12] 일례로 후한의 12대 황제인 영제는 선대 황제인 환제의 오촌조카로, 환제의 동생 발해왕 유회와 그의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환제 사후 양자로 입적되어 제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직후에도 생모인 동태후가 아닌 양모인 환제의 정실 두태후 임조칭제하였다. [13] 명나라 홍무제- 건문제- 영락제 관계. 거기에 2남·3남의 반발도 문제가 된다. 이 둘 입장에서는 제일 큰형의 아들한테 밀리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넷째동생한테까지 계승권이 밀린다는 걸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출처1] : 반고 저,「영행전」, 『 한서』8 [출처2] : 유의경 저,「아량 雅量」,『 세설신어 世說新語』) [16] 포르투갈 독립 전쟁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이 케이스는 전쟁으로 얻은 것이다. [17] 다만 광해군의 왕세자 지위를 심각하게 침해한 것은 영창대군이 아니라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왕권은 심각하게 낮아졌고 그 대부분은 본인의 탓이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자신의 아들이나 세자로 보지 않고 자신의 경쟁자로 보았고 이 때문에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창대군이 적자라고는 하나 광해군도 이미 왕세자가 된 시점에서는 왕후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로 꿇린다고 할 수는 없고 나이로 따지면 이미 30대가 다 된 광해군이 강보에 싸인 아기인 영창대군에게 밀릴 일은 없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정말로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왕권에 심각한 문제가 되어서라기보다는 선조의 지독한 견제에 학을 뗀 광해군이 PTSD로 지레 겁을 먹고 영창대군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차라리 높았을 것이다. [18] 때문에 선조, 철종, 고종 등은 선왕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으니 부자 상속 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선조는 선왕이던 명종에게 적자가 남지 않아 대안으로 자신의 서형제 중 덕흥군 이초의 3남 하성군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승계시켰다. 형들과 입궁해서 총명하게 답변했다는 일화( 선조 문서 참조)도 있지만, 덕흥군이 주색잡기에 몰두하다 사망하고 선조의 생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명종 승하 전 이미 사망한 상태라 국정에 간섭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도 한 몫 했다. [19] 고종황제도 원래는 철종의 17촌인데 익종(효장세자)의 비였던 신정왕후 조씨(조대비)가 그를 양자로 삼아 철종의 양자가 아니라 조카로 뒤를 이었다. 입양 관계 때문에 촌수가 좀 복잡한데, 이렇게 순서가 꼬이는 건 철종이 전임자 헌종보다 항렬이 한 항렬 높았고 고종의 경우 전전임자 헌종과 항렬이 같아서 당시 생존했던 조대비의 남편(익종: 효명세자)와 한 항렬이 아래였기 때문이다. 연이어 고종은 알려진 바대로 철종, 헌종과 혈통과 거리가 있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사도세자(장조)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남연군은 인평대군(인조의 적3남)의 6대손이었다) [20] 물론 송효종 같은 예외도 있다. 계승 과정에서 종실, 또는 왕실의 발언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일도 많았다. [21] 즉 유교를 국시로 삼은 나라에서 유교적 종법제를 거스른다는 것은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은 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헌정질서에 따른 대통령 선거와 당선과정 없이 전임대통령이 마음대로 후임대통령을 선출해 당선시키는 부정선거를 한다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문제이다. [22] 이는 위에 언급한 쟁국본 문제 때문이었다. 만약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책봉을 공식 인정할 경우, 번국인 조선의 왕위 계승에도 차남의 승계를 인정했으니 명나라 황실에서도 맏아들이 아닌 삼남 주상순으로의 계승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적장자 계승을 주장하는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 명분 문제 때문이라도 광해군의 책봉을 반대해야 했던 것.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조선에선 왕으로 등극하지만 명에서는 책봉을 미루었고, 광해군은 책봉받기 전에는 '조선국 권서국사'(혹은 권지조선국사)라는 요상한 타이틀로 외교문서를 타이핑해야 했다. 총리서리와 비슷한 개념. 물론 광해군의 경우 모든 면에서 이복동생 영창대군보다 명분상 앞섰고, 명나라도 인정했었지만. 자세한 것은 영창대군 문서 참조. [23] 가문에서 힘이 강해진 지손이 힘이 약한 적손을 누르고 지위를 빼앗음. 4남 영락제의, 장손 건문제에 대한 정난의 변, 헌덕왕 애장왕에 대한 쿠데타, 숙종(고려) 헌종(고려)에 대한 (사실상의) 쿠데타, 차남의 후손인 곡옥 계열 진무공의, 대종인 진후민에 대한 쿠데타 등 사례는 많고 많다. [24] 서양의 살리카법조차 숙부에 의한 계승 인정한다일 뿐이지, 엄연히 적장자-적장손 법칙이 최우선이다. 즉, 세조는 정상적인 왕조 국가의 계승 법칙을 아예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25] 철종이 왕위 계승할 때도 장유유서라서 숙부가 조카에게 절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왕족이 부족했던 관계로 역상속이 이루어졌다. 인조 뒤의 효종, 현종은 아들을 달랑 하나만 두었고, 영조는 아들 둘 중에 하나는 요절(정조의 족보상 양아버지인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이다. 정조조에 진종(眞宗)으로 추숭된다.)하고 남은 아들은 사도세자뿐인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장성한 아들은 순조 달랑 하나 남긴 데다 순조도 효명세자 1명, 효명세자도 헌종 하나 남기고 요절, 사도세자의 서자와 그 후손들은 역모로 처형당하는 바람에 직계가 철종밖에 안 남아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종에게는 친형이 있었으나 장남으로서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어야 했기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철종을 비롯한 은언군(철종의 조부, 정조의 이복동생)의 자손들을 제외하고 나면 가장 가까운 왕족은 효종의 형제들인 소현세자(...) 및 인평대군의 후손들이라 촌수가 굉장히 멀었다. [26] 인조는 반정이라는 예외적인 사례, 태종 정종이 적자가 없음을 명분으로 동생을 아들로 삼아 세자로 책봉되었고, 물론 정종이 바지사장이라는 사정이 있다. 적자가 없으면 한 항렬 아래에서 들여야지. 세종대왕은 양녕대군이 방탕하다 하여 동생인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교체, 세조는 불법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기에 사육신의 일이 일어났고, 공신들에게도 떳떳하지는 못하므로 술자리에서 잡는 척 할지언정 실제로는 무한 비호를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이는 예종의 요절- 성종의 껄쩍지근한 계승- 연산군의 폭정- 중종반정과 시너지를 이루면서 중종~명종 대의 왕권의 약화에 기여했고 그게 발현된 모습이 우리가 잘 아는 여인천하이다. 또한 후대의 유학자들도 못마땅히 여겨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세조의 장남의 차남인 성종이, 장남의 장남 즉 장손 월산대군과, 차남(이지만 어쨌든 이었던 예종)의 (사실상)외동아들 제안대군 모두를 제친 이유는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한명회 빨이다. [27] 다만 태종은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으니 세종, 세조, 인조와는 결이 다르다. [2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자란 왕들이 계승한 것치고는 명나라의 왕권 자체는 안정된 편이었다. 인과관계는 의심스럽지만 오히려 천계제의 동생인 숭정제가 형의 아들을 제치고 즉위했지만 오히려 명이 멸망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9] 그러나 시영의 아들은 또 송태조 조광윤에게 양위해서 왕조의 대가 끊어진다. 대신 시영의 후손들은 송대 왕조 존속 내내 예우받았다. 포청천에도 등장함. [30] 이때는 조선으로부터 임진왜란 중 강항 등에 의해 퇴계의 학문이 전해진 터라 일본에서도 성리학이 어느 정도 막부에 받아들여진 상태였다. [31] 대표적으로 당의 현무문의 변, 명의 정난의 변, 고려 태조~광종 시절, 조선의 제1차 왕자의 난 등이 있다. [32] 특히 일본 황실은 만세일계라 하여 여계 계승을 철저하게 막았기에 사위 계승 또한 막힐 수밖에 없었다. 사위 계승 또한 결국에는 일종의 여계 계승이라 할 수 있으니. [33] 이는 살리카법을 계승법으로 사용한 독일계 국가들이 보통 귀천상혼에 엄격한 반면, 타 유럽 국가들은 귀천상혼에 상대적으로 조금 더 느슨한 것에 기인한다. [34] 가령 1952년에 그리스 왕국이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있는 계승권자가 두 명밖에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살리카법을 따르던 기존의 계승법을 이 방식으로 바꾸었다. [35] 정작 전통을 중시하고 가부장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은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의 전환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36] 가령 a는 개국군주의 첫째아들인 A의 아들이고 b는 개국군주의 둘째아들인 B의 아들이라고 치자, 보통은 a가 앞이지만 b가 연장자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도 조선같이 종법질서가 정해진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명확한 기준이 있지만 형제상속제에서는 없다. [37] 중동의 유목민들은 가문의 소속감과 연대가 대단히 강해서 사우드 가의 일원이면 대접을 받는다. 우리 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중동 왕자가 이런 사우드 가문의 남계 일원들. [38] 이 경우의 실사례로 진성여왕이 존재한다. [39] 다만 어디까지나 고려 전기 왕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아서 형제 간 계승이 이루어졌을 뿐 법제적으로는 부자 상속이 원칙이었다. 당장 훈요 10조에서도 장자 계승이 원칙임을 못 박아두고 있으며 실제로도 태조 → 혜종부터 시작해 광종 → 경종, 현종 → 덕종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에는 여지 없이 부자 상속이 이루어졌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이 수많은 형제승계의 와중에 단 한 번도 황태제가 공식적으로 책봉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위의 헌종 사례는 헌종이 제1형 당뇨로 의심될 정도로 병약했다는 뒷사정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40]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연단위로 시나리오를 넘겨보면 이 당시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고증이 완벽한 것은 아니고 게임 시스템의 한계도 있지만 어지간한 책보다 직관적이다. [41] 이 경우 보통 얼마 못 가는데, 왕위를 차지한 계통이 자신의 계통으로만 이어지게 하려 획책하기도 하고 특정 왕이 너무 오래 집권하면 다른 계통이 불만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앞서 남북조시대 직전의 일본이 천황 가문이 두 계통으로 분열하여 교대로 계승했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고묘 덴노의 교토를 수도로 한 북조와 고다이고 덴노의 요시노를 수도로 한 남조로 나뉘며 완전히 갈라져 남북조 시대가 열리고 60년 후 남조가 항복하여 봉합되는데 처음에 북조는 남조, 북조 돌아가며 하자는 조건을 내세웠지만 일단 남조가 항복한 후에는 입 싹 씻었다. 그도 그럴게 남조가 항복한 것도 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 [42] 엄밀히 말해 술탄은 아니다. 술탄이라는 칭호는 3대 군주 무라드 1세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43] 옆 씨족에 고기를 팔려고 가져가봤자 "우리도 방금 가축 왕창 잡았어요" 할 것이고, 당시 기준으로 머나먼 정주제국까지 고기 팔러 갈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지독히 춥고 건조한 초원지대의 겨울은 식량을 보존하기에 아주 유리했다는 것. 버르츠와 같은 말린 고기가 유목민의 전투식량, 보존식량을 넘어 사실상 생활필수품 중 하나인 것이 이 때문이다. 한번 잡을 때 잔뜩 잡았던 고기를 바싹 말려 보관해서 상시 식량으로 사용한 것이다. [44] 칭기즈 칸은 생애의 전반부 절반 이상을 몽골을 통일하기 위해 보냈고, 외부 정복에 나선 시기는 인생 후반부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45] 다만 도르곤은 모친이 적복진이라 누르하치의 적자였고 반대로 홍타이지는 나이는 많았어도 서자였다. 그리고 도르곤에게도 도도라는 동복동생이 있었으므로 말자상속과는 큰 연관이 없는 편이다. 반대로 홍타이지 사후 칸이 된 순치제는 적자이긴 했으나 이 때는 장성한 도르곤이나 이복형이자 서장자인 호우거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 때는 뒤로 밀렸다. 그렇지만 내란의 위기 때문에 다른 실력자들이 모여서 협의한 결과 순치제는 칸이 될 수 있었다. [46] 황태자는 효성인황후 허셔리씨의 아들인 2남 윤잉이었으나 적장자 전통이 익숙하지 않아서 다른 황자들이 그를 시기했고 황장자당, 황태자당, 황4자(옹정제)당, 황8자당으로 나뉘어 다투니 윤잉은 점점 일에 소홀해지다가 비뚤어진 뒤 폐위되어 연금된다. 서장자 윤제는 윤잉을 저주하다 걸려 같이 연금당했고 다른 황자들과 대다수 대신의 지지를 얻은 8황자 염친왕 윤사 vs 13,16,17 황자와 소수의 대신들의 지지를 얻은 4황자 옹친왕 윤진이 대립했다. [47] 기록에 따른다면 건륭이 영기에게 황위 제안을 했으나, 영기 본인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건륭제는 생전에 자신의 아들 5황자 영기를 기억하기를 "군주의 별이 타고났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당시 건륭이 다음 황위를 영기에게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48] 건륭제에겐 요절한 자식들과 양자로 보낸 자식들을 제외하면 8남인 영성과 11남 영성, 15남 영염, 17남 영린이 있었는데 8남 영성은 일처리를 못하고, 17남 영린은 술과 여자에 빠져살고 폭행을 일삼아서 둘은 포기하고 11남 영성과 15남 영염을 화석친왕에 책봉해서 일을 시켜봤는데 11남 영성이 문에 치우쳐 있어서 15남 영염이 후계자가 된다. [49] 이 때문에 조지 1세는 사실 왕위 계승 서열이 50위가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으나 상위 서열자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기에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50] 다만, 펠리페 5세는 즉위 당시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51] XX에는 국가명이 들어가고, 권지(權知)는 '임시직'이라는 의미이다. 임시로 나라의 통치를 맡긴 사람이라는 뜻. 당연하지만 조공책봉관계에서 명나라라고 해서 조선국왕이 그들의 책봉을 못받았다고 해서 무작정 역적으로 몰아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권지국사 자리를 인정한 것은 조공책봉관계하에서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자임을 인정하나 두고보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52] 대표적으로 태조와 광해군이 오랫동안 권지국사란 이름으로 왕 역할을 했다. [53]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현 국왕인 음스와티 3세는 선왕인 소부자 2세가 69세에 얻은 자식이다. [54] 교통 및 통신수단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인데, 근대적인 감각으로 대중의 의사&능력&모든 것을 고려해서 뽑을 경우, 국가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내외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일일히 파발이나 사신을 파견하여 국가 지도자로의 정통성과 능력을 인정받는 정말 정신나가버릴 법한 난이도가 되어버린다. 이게 그나마 도시국가 수준이라면 모를까 제국 수준이면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하다. 로마조차도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 공화정 체제였음에도 영토가 늘어난 뒤에는 공화정을 포기하고 제정으로 전환했다. [55] 이런 이유로 현대 민주주의의 투표를 제도화된 내전이라 칭하는 정치학자들도 있다. [56] 이와 같은 현대의 예시는 독재국가들, 명확한 승계원칙이 없다보니 그나마 집권세력이 정국을 꽉 잡고 있다면 그래도 그 집권세력 내의 파벌다툼으로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나 내전이 벌어지기 쉽다. 그러다 보니 세습되는 독재자가 생각보다 많은 것도. 독재에 협력하는 엘리트들이 정치적 변동으로부터 제 목숨과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정치적 안정이 가장 보장된 방법이 세습이기 때문이다. [57]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을 제시한 플라톤 역시도 국가의 중책을 맡을 사람은 오랜기간에 걸쳐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가 주장하는 바를 다 지켜가며 육성하면 50세는 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10년 내로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높은 고령이었다. [58] 안원왕대에는 아예 태자 자리를 두고 평양 한복판에서 두 왕비의 세력이 대놓고 내전을 벌였고, 기록상 패배한 쪽에서만 2천명이 죽는 대참사로 종결되었다. 안 그래도 안원왕 대부터 슬슬 고구려의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어도 그래도 안원왕 대에는 어느정도 유지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고구려의 국력은 눈에 띄게 추락한다. 양원왕 대에 장수왕이 차지했던 한강 유역을 상실하기 때문. [59] 뭐 유럽은 유복자왕도 있긴 했다. 그러나 유럽권은 태아에게도 명백히 계승권을 주었고 어쨌거나 독일권에서는 살리카법이라고 남계 남자에게만 계승권을 주었기에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는 정당하게 왕위에 오른 것이다. [60] 단적인 예로 예종(조선)의 경우 형인 덕종(조선)의 사망 후 찬탈자 아버지로부터 적장손 조카를 제치고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와 똑같은 논리로 어린 친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다. [61] 이는 전근대나 현대에나 이점이 있는데 바로 한 사람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전근대에는 모든 이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베풀기 어려웠는데 왕이면 아무래도 일반 백성 A보다는 자식교육에 투자할 여유가 있으니 그래도 투자 대비 성과를 거두는 건 백성 A보다야 왕자 A가 더 높았을 것이다. [62] 이쪽은 아버지 정조가 차일피일 세자 책봉을 미루다가 정말 죽기 직전에서야 세자로 앉히고 몇달만에 덜컥 사망해버린 케이스. [63] 물론 온전히 스스로의 힘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고 상왕으로 눌러앉은 아버지 이방원의 가혹한 숙청과 사전작업의 덕을 보긴 했지만, 그런 전대의 유산을 기껏 물려받아서 발전은 고사하고 현상유지도 못하는 암군들은 한둘이 아니고 세종이 이룬 업적들은 전대의 유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충녕대군 시절에는 책벌레일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인 태종을 닮은 날카로운 정치적 식견으로 처신해 결국 세자 자리를 따내는 등, 이미 제왕학을 독학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64] 물론 3선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재선 후 물러났다가 도전한 사람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해보기도 전애 죽거나 실패하는 사람이 대부분. [65] 문제는 이 폭동으로 인해 미국의 국론이 크게 갈렸었고 여전히 트럼프를 따르는 일명 대깨트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즉 트럼프의 행패가 미국을 분열시킨 셈. 결국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의 전현직 대통령 간의 리턴매치가 생사되었는데, 이 폭동의 여파로 국론 자체가 아예 분열되어 각 진영의 지지자들이 역대급으로 충돌하고, 후보 당사자들도 역대급으로 충돌하고, 이 과정에서 중도층이 "대선이 80 먹은 노인네들 싸움이 돼버렸다"라고 어느 쪽에도 지지를 하지 않으면서 중도층 지지율도 역대급으로 빠지는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 되어버렸다. [66] 예시로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부터 독재를 하니 박정희, 전두환 같은 쿠데타 일으켜서 독재자 된 대통령들이 나왔고 그 결과 45년 이후 87년까지 1년 정도 유지된 제2공화국 빼면 모두 독재체제였다. [67] 다만 태국의 경우 지명제의 성격도 일부 가지고 있는데, 국왕은 헌법 및 왕실법에 따라 모든 왕족 남성 중에서 자의적으로 아무나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으며, 국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로 왕위가 공석이 된 상황에서만 아들 우선 상속법에 따라 왕위가 계승된다. 그렇지만 국왕이 직계자손을 놔두고 방계 왕족을 후계자로 지명한다면 (자기 자손들이 전부 다 개막장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런게 아닌 이상)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애초에 자기 직계자손을 놔두고 방계 왕족이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라는 왕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왕은 관례적으로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68] 이쪽은 특이한 점이 상술했듯이 다른 왕실들은 계승법을 맏이 계승으로 바꾸면서도 법이 개정되기 전에 태어난 공주들의 계승서열을 올리지는 않았는데 스웨덴의 경우 강경한 국회의 입장을 통해(국왕은 이 계승법을 본인의 손주 세대부터 적용하기를 원했지만 스웨덴 국회가 이를 반대할 경우 왕실을 아예 폐지시키겠다고 압박하면서 소급적용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미 태어난 공주의 계승서열을 올리면서 왕실의 후계자가 왕세자에서 왕세녀로 바뀌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A] 스페인 우르헬 대주교(임명)와 프랑스 대통령(투표)이 공동 군주. [70] 교황을 군주로 보면 콘클라베가 군주 선출 투표가 된다. [71] 실질적으로는 각 주의 술탄들이 돌아가며 군주를 맡는다. [A] [73] 일부 독일 영방 국가들은 준살리카법 [74] 1960년 이후 적법한 계승권을 둘러싸고 카스트로 계통과 칼라브리아 계통으로 나뉘었는데, 당주에게 두 딸만 있는 카스트로 계통은 2016년에 절대장자상속법으로 바꾸었다. 칼라브리아 계통 당주 페드로는 7남매를 두어 다산해서 아들이 많아 준살리카법을 그대로 유지중. [75] 러시아의 귀족들 역시도 자국의 계승방식이 너무 후지다고 한탄한 바 있다. 다만 이랬던 덕분에 러시아에서는 여제들이 많이 나왔다. [76] 상술한 것처럼 상속법 개정 시에는 순위가 밀리는 가문원들이 반발할 게 뻔하며, 이로 인해서 불필요하게 재산을 떼어줘야 하는 경우가 많다. 왕실과 달리 세습 부동산으로 부를 유지하는 일반 귀족들의 경우 재산이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서 당사자들간 합의가 되어야 하는데 당연히 쉽지 않다. 물론 영국은 장남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가족들에게 한 푼도 안 돌아가는 건 아니고, 상속자가 명목상 재산 전체를 소유하긴 하지만 신탁 형태로 가문원들에게 연금처럼 일정 금전을 지급해준다. [77]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78] 표트르 3세 예카테리나 2세 또는 메리나 왕국의 왕위계승 사례, 월남 리 왕조의 리 소황 남편에게 양위한 사례처럼 쿠데타나 실권자의 타의에 의해 부부상속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다. 스웨덴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이 남편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에게 양위한 사례를 제외하면, 당사자 중 적어도 한쪽은 원하지 않거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속. [79] 공식 사인은 급성 뇌수막염이지만 암살당했다는 말이 많다. 에이즈 설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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