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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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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전연 추존 황제
모용외 | 慕容廆
출생 269년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33년 6월 4일 (향년 64세)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4대 군주
285년 ~ 333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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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외(廆)
부친 모용섭귀
형제자매 5남 중 2남
배우자 부인 단씨
자녀 10남 1녀
혁락괴(弈洛瑰), 약락외(若洛廆)
작호 요동군공(遼東郡公)
묘호 고조(高祖)
시호 양공(襄公)
→ 무선왕(武宣王)
→ 무선황제(武宣皇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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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한국에서의 인지도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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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휘는 외(廆)로, 본명은 혁락괴(弈洛瑰) 혹은 약락외(若洛廆)였다. 선비족 모용부의 제4대 대인이었다.

역사적으로 모용선비의 부흥기를 가져온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가 모용부를 통치할 시기 모용외는 중원이 혼란스러워진걸 눈치채고 서진이 북방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에 모용부를 급속히 성장시켰다. 이후 그의 아들 모용황이 아버지가 닦은 기틀을 통해 모용선비 최초의 왕조인 전연을 건국해 5호 16국시대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한동안 관동, 요서 및 요동 일대를 아우르는 강대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때문에 전연 최초의 황제인 모용준과 함께[2] 이들 또한 암묵적으로 황제나 그 이상의 영웅으로 추존되는 경향이 강하다.

모용외는 어려서부터 미남이었고, 몸집이 우람했다고 한다. 용맹하고 호전적인 정복군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중국의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학식도 뛰어났다. 심지어 말년에 들어서는 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몸소 글로 정리하여 집필할 정도로 학구적인 면모를 지녔다. 내정에도 힘을 써서 세력을 일으킨 후에는 전란을 피해 동쪽으로 피난해온 한족의 인구를 수용하고 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했다. 또한 중국의 사상과 문화 및 관직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토지 개간과 농업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태시 5년(269년), 선비족 모용부의 제3대 대인(大人) 모용섭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강 4년(283년), 모용섭귀가 사망하자 모용섭귀의 동생인 모용내가 그 자리를 찬탈했다. 그리고 자객을 보내 조카인 모용외를 죽이려하니, 모용외는 요동으로 도망가 그곳에 살던 서욱(徐郁)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서욱은 자신의 집에 뒷방에 모용외를 숨겨주었고, 이윽고 그를 추격해오던 자객들이 들이닥쳐 서욱의 집을 수색했지만 찾지 못해 그냥 떠남으로써 모용외는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태강 6년(285년), 국인( 귀족)들이 모용내를 죽이고 모용외를 옹립했다.

당초 모용부는 모용섭귀 대에 우문선비와 세력을 다투었기에, 모용외는 장차 아버지의 원한을 풀고자 서진 조정에 표를 올려 우문부 정벌을 허락해달라 청했지만 무제 사마염은 이를 불허하였다. 분노한 모용외는 요서를 침구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무제는 유주(幽州)의 군사를 보내 모용외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모용외는 도리어 비여(肥如)에서 토벌군을 대파해버리고 노략질을 멈추지 않았다.
태강 6년(285년) 말, 동쪽의 예맥계 국가인 부여를 공격했다. 부여왕 의려는 대책없이 공격당하자 자살했고, 의려의 아들 의라를 포함한 부여의 왕족 자제들은 동쪽으로 도망쳐 옥저로 피신했으며, 모용외는 그 도성을 함락시킨 후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이때 의라가 서진의 동이교위 하감(何龕)에게 구원을 청하니, 하감은 독호 가침(賈沈)을 보내 의라를 도왔다. 이에 모용외도 장수 손정(孫丁)에게 기병을 주어 서진군을 요격하게 했으나, 역으로 손정이 습격당해 전사했다. 이로써 부여는 재건될 수 있었으나, 모용외는 이후에도 번번이 부여를 침범하여 부여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하북 지방에 노예로 팔았다. 보다못한 무제는 국가의 돈으로 노예가 된 부여의 백성들을 모두 사서 다시 본국으로 돌려 보내고, 부여인들을 노예로 매매하는 것을 아예 금지하였다.

태강 10년(289년) 4월, 모용외는 서진과의 대립 과정에서 힘이 부치자
“나는 선공 이래 대대로 중국을 받들었으며 또한 화예( 중화 오랑캐)가 서로 다스림이 다르고 강약이 실로 차이나니 어찌 진나라와 더불어 다투겠는가? 어찌 불화하여 내 백성들을 해롭게 하겠는가!”
라며 서진에 사신을 보내 항복했다. 무제는 모용외의 항복 소식에 기뻐하며 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으로 삼았다. 이때 모용외가 서진 동이교위부의 하감을 찾아갔는데 하감이 무장을 한 채 그를 맞이하자 그도 군복을 입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모용외는
“주인이 예의로써 대하지 않는데 손님 또한 어찌 예의를 차리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 뻘줌해진 하감은 모용외에게 경탄했다.

당시 선비족인 우문부와 단부는 모용부가 날로 성장하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자주 군사를 보내 모용부를 침략했다. 하지만 모용외가 오히려 스스로를 낮추고 후한 선물을 보내오니, 우문부와 단부는 경계를 점차 풀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단부의 대인 단계(段階)는 자신의 딸을 모용외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원강 3년(293년),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그 군세가 매우 강하여 고구려 제14대 왕인 봉상왕마저 도읍을 떠나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모용외는 달아난 봉상왕을 추격하여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신성에서 북부 소형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던 고노자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봉상왕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가 봉상왕의 행렬을 추격해오던 모용선비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했다. 결국 모용외는 고노자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2.2. 팔왕의 난

원강 4년(294년), 요동군 북부 외진 곳에서 청산(靑山)으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다시 이주하여 극성(棘城)에 자리를 잡고, 내정을 개혁해 농사와 누에치기를 보급함과 동시에 서진의 법제를 도입하는 등 국가의 체계를 정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원강 6년(296년), 모용외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제13대 서천왕의 능[3]을 도굴했다. 그러자 봉상왕이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의 태수에 봉했는데, 고노자가 신성 태수가 된 이후로 모용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했다.

영강 원년(301년), 서진의 일대( 유주)에서 물난리가 나자 모용외가 식량을 보급하여 이를 구제했다. 이에 서진 측에서 관복을 하사하며 사의를 표했다.

영녕 원년(302년), 서진에서 팔왕의 난이 일어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우문부의 대인 우문막규(宇文莫圭)는 모용부의 힘이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동생 우문굴운(宇文屈雲)을 보내 모용부를 치게 하고, 장수 우문소노연(宇文素怒延)으로 하여금 별동대로 모용부를 따르던 부락을 경략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직접 나아가 두 갈래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니, 패전을 수치스럽게 여긴 우문소노연은 우문부로 돌아가 100,000 병력을 얻어서 다시 모용부를 공격해 극성을 포위하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병력을 본 극성의 모용부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이때 모용외가 이렇게 말했다.
“소노연의 우문군이 비록 , 개미떼처럼 많이 모였으나 군에 법제가 없고 이미 우리의 계책속으로 떨어졌도다. 제군은 다만 힘껏 싸우면 될 뿐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는 무장하여 직접 성밖으로 달려나가 우문소노연을 대파하고, 달아나는 우문부의 패잔병들을 100여 리에 걸쳐 추적해 10,000여 명을 참획했다.(극성 전투)

극성 전투 이후로 본래 우문부를 섬기던 요동의 맹휘(孟暉)는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용부에 귀순하였고, 모용외는 그를 건위장군으로 삼았다. 또, 재주와 성품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모여구(慕輿句)와 모여하(慕輿河)를 영입하여, 성실하고 신중한 모여구는 부고(府庫)를 관리케 하고, 명민하고 꼼꼼한 모여하는 송사를 담당케 하였다. 이로써 창고의 장부가 누락되는 일이 없었고, 소송도 공정하게 이루어져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2.3. 영가의 난

304년에 남 흉노족의 수령인 유연이 자립해 호한을 세우고, 311년에는 그의 아들 유총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서진에서는 많은 유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동북쪽의 모용부로 귀부했다. 모용외는 서진에서 귀부하는 한족 유민들을 거부하지 않고 모용부를 성장시킬 인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세자 모용황을 서진에 입조시켜 선진 학문을 배우게 했고, 서진에서 배우고 온 모용황은 부친인 모용외에게 서진의 학문을 가르쳤다. 모용부는 서진의 문물을 수입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영가 원년(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고, 탁발부 탁발의려와 교류하여 서로 우호를 맺었다.

영가 3년(309년) 12월, 서진의 동이교위 이진(李臻)이 요동(遼東)태수 방본(龐本)에게 살해당하자, 요동군에 거주하던 선비족 소희련(素喜連)과 목환진(木丸津)이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거병해 여러 현들을 함락시키고, 수년에 걸쳐 약탈을 자행하였다. 주와 군에서는 종종 병력을 보내 토벌을 시도했지만, 토벌군이 번번이 패하기만 하니, 동이교위 봉석(封釋)은 해당 사건의 원흉인 방본을 처형하고, 난동을 피우는 선비족 부락과 화친을 청했으나 소희련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가 5년(311년) 12월, 모용한이 모용외에게 나아가 말했다.
"예로부터 제후들은 임금을 향한 충성을 내세워 백성의 마음을 얻은 후에 업(業)을 성사시켰습니다. 지금 소희련과 목환진은 관군을 전패시키고 백성을 도륙하고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저 어리석은 이들은 밖으로는 방본을 명분으로 하였으나, 안으로는 사실 도적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봉 사군께서 방본을 주살하고 화해를 청하였음에도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요동이 함락된 지 2주가 지났고, 중원의 병란으로 주의 관군이 번번이 패하니,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의(義)를 다할 때입니다. 선우께서는 의당 구벌(九伐)을 명백히 하여 위태로운 백성을 구출하고, 소희련, 목환진의 악행을 헤아려 의병으로 그들을 벌하십시오. 위로는 요(遼) 지방을 부흥시키고, 아래로는 두 선비족 부를 병탄하여 충의를 본조(本朝)에 행한다면, 그 이익은 모두 우리나라에게로 귀속될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의 시작점이 되어 훗날 제후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모용외가 크게 웃으며
"아직 애송이라 생각했건만 어느새 그런 지혜를 익히고 있었느냐."
라 하고, 그의 말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해 모용한을 선봉으로 세워 소희련과 목환진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소희련과 목환진을 사로잡아 참수한 뒤, 선비족의 두 부의 3,000여 호를 그대로 모용부로 흡수하였다.

영가 7년(313년), 서진의 회제 사마치가 유총에 의해 살해되고, 장안(長安)에서 황제로 즉위한 민제 사마업이 모용부로 사자를 보내 진군대장군으로 삼고, 창려•요동2국공에 봉하였다.

영가 7년(313년) 4월, 서진의 사공 왕준이 군대를 보내 역수(易水)에 주둔시키고, 단부 단질육권을 불러 함께 석륵을 토벌하자 하였는데, 단질육권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분노한 왕준은 탁발부 탁발의로와 모용부의 모용외에게 폐백을 선물하면서 단질육권 토벌을 청하였고, 탁발부와 모용부는 모두 이 요청을 받아들여 각각 탁발육수와 모용한을 보내 단부를 쳤다. 모용한이 도하(徒河)와 신성(新城)을 공격해 빼앗고 양락(陽樂)에 이르렀을 때, 탁발육수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하로 돌아가 청산에 누벽을 쌓았다.

당시 유주에서 할거하던 왕준에게 실망한 많은 유민 무리가 동쪽으로 이동해 모용부로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이들을 모두 위무하고, 쓸만한 인재는 등용하면서 배억, 양탐, 황홍, 노창을 참모로 삼고, 유수, 방선(逄羨), 서방건(西方虔), 송석(宋奭), 봉추, 배개를 고굉(股肱)으로 삼았으며, 송해, 황보급, 황보진, 무개(繆愷), 유빈(劉斌), 봉혁, 봉유(封裕)로 하여금 기밀을 관장케 하였다. 낙랑군 대방군을 점거한 채 고구려의 미천왕과 대립하던 장통(張統) 또한 요동 출신의 왕준(王雋)의 설득에 넘어가 모용부로 귀부하자, 모용외는 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 왕준을 참군으로 삼았다.

건흥 2년(314년) 3월, 전조의 장수 석륵이 유주의 군벌 왕준을 토벌해 그 세력을 멸하였다. 이에 왕준을 섬기던 주좌거(朱左車), 공찬(孔纂), 호모익(胡母翼) 등과 하북의 유민 수십만 호가 창려로 도망쳐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다. 모용외는 유민 무리를 출신지 별로 분할하여, 기주 출신은 기양군(冀陽郡), 예주 출신은 성주군(成周郡), 청주 출신은 영구군(營丘郡), 병주 출신은 당국군(唐國郡)에 각각 배치해 교치군현을 실시하였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양주(揚州)에서 승제하여 진왕(晉王)에 즉위하고, 사신을 보내 모용외를 가절, 산기상시, 도독요좌잡이유민제군사(都督遼左雜夷流民諸軍事), 용양장군, 대선우로 삼으면서 창려공(昌黎公)에 봉하였다. 그러나 모용외는 사마예를 무시하며 조서를 받들지 않으려 하니, 정로장군 노창이 모용외에게 나아가 유세하였다.
"지금 낙양과 장안 두 수도가 무너지고, 천자께서 몽진하시어 낭야왕이 강동(江東)에서 승제하였으니, 실로 뭇 사람들의 목숨이 그에게 달려있는 셈입니다. 명공(明公)께서는 해삭(海朔)에 웅거하면서 한 방면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여러 부락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숫자만을 믿고 거병하여 도화(道化)를 따르지 않음은 명공의 관직이 왕명(王命)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 또한 강성하다가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의당 낭야왕에게 사자를 파견해 대통(大統)을 잇도록 권하십시오. 그런 후에 황제의 명령에 의거하여 죄인들을 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모용외는 이를 옳게 여기고, 장사 왕제(王濟)를 동진에 사자로 보내 진왕 사마예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게 하였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원제 사마예가 황위에 올랐을 때, 동진에서 모용부로 알자 도요(陶遼)를 파견해 예전에 내렸던 직책을 확실히 하였다. 모용외는 원제가 내린 모든 관직을 받들었지만 창려공 작위만은 굳게 사양하였다. 그리고 유수를 장사로 삼고, 유상(劉翔)을 주부로 삼아 부조(府朝)를 정비케 하여 의례와 법률을 제정하였다.

대흥 2년(319년) 2월, 평주자사 최비는 왕준이나 단부에 의탁했던 유민들이 자신의 휘하로 오지 않고 모두 모용부로 흘러들어가자 이를 질투하여 고구려, 우문부, 단부와 손을 잡고 모용부를 분할하려고 했다. 고구려의 미천왕과 우문부 및 단부가 손을 잡고 모용부를 공격하여 수도 극성까지 포위하자, 모용외는 우문부의 진영으로 사자를 파견해 술과 쇠고기를 바치고 위무하면서 큰 소리로 "최비의 사자가 저번에 왔었다."라 떠들었다. 이에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과 모용외와 한 편인 줄로 알고 퇴각하였다. 우문부의 대인 우문실독관
"비록 두 나라가 돌아갔으나 우리만이라도 남아 마땅히 단독으로 그 국가를 겸병하리라! 다른 나라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그러고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40리에 걸쳐 진영을 늘어세우고 극성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하니, 극성 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 위용에 크게 동요하였다.모용외 역시 혼자서 우문부에게 맞서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 도하에 주둔하고 있던 서장자 모용한에게 서신을 보내 청하였다. 그러나 모용한이 사자를 보내 모용외가 나가서 싸울 때 자신이 밖에서 우문부의 뒤를 기습하겠다 답하니, 모용외는 순간 모용한을 의심했으나, 한수(韓壽)의 간언을 듣고 이내 의심을 풀었다.

우문실독관은 모용한이 도하에 주둔해있는 것을 알고 나중에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별동대를 기병 수천 기를 꾸려 도하를 습격케 하였다. 하지만 우문부의 기병대는 모용한의 계책에 걸려들어 모두 사로잡혔고, 모용한은 승기를 이용해 모용외에게 사신을 보내 지금 극성에 나가서 싸울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배억과 모용황에게 정예병을 이끌게 하여 선봉에 세우고, 자신은 많은 무리를 통솔하여 그 뒤를 이었다. 이윽고 모용외가 극성을 나와 우문부의 진영을 습격하니, 모용외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던 우문실독관은 전군을 내보내 싸우게 하였다. 그때 모용한이 기병 1,000여 기를 거느리고 우문부 진영의 후방으로 접근해 이곳저곳에 불을 놓았고, 우문부의 군사들은 불길을 보고 당황하다가 이내 대패하여 우문실독관은 목숨만 구한 채 단기로 겨우 도망쳤다. 모용외는 우문부의 병력을 모두 포로로 사로잡고, 우문부 진영에서 전국옥새의 인끈 세 가닥을 얻었다.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최비는 조카 최도(崔燾)를 보내 모용외의 승전을 축하하는 척하였는데, 마침 모용부를 침공했던 3국에서도 사신을 보내와 최비가 꾸민 일임을 모두 일러바쳤다. 모용외는 군사를 벌여놓고 최도를 맞이하면서 말했다.
“너희 숙부가 나를 멸하라며 세 나라를 교사해놓고는 이제와서 어찌 축하하면서 사기를 치려 드느냐?”
결국 최도는 너무 두려워 모든 것을 자백하였고, 모용외는 최도를 돌려보내면서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
라고 최비에게 경고하게 하면서 최도가 돌아갈 때 따로 군대를 보내 최도의 뒤를 따라가게 하니, 이 소식을 들은 최비는 최도를 만나기도 전에 가족들과 요동성을 버리고 수십 기를 대동하여 고구려로 도망갔다. 이에 남은 최비의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고, 모용외는 요동성을 아들인 정로장군 모용인에게 통치를 맡겼다. 그리고 송해를 동진에 사자로 보내 요동 평정을 보고하고, 극성 전투에서 노획한 옥새의 인끈 3개를 전달하였다.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간 후, 미천왕은 장수 여노자를 보내 우하성(于河城)을 점령하였으나, 모용외가 장통을 파견해 여노자와 그 무리 1,000여 호를 사로잡았다. 이때 최비를 따라 고구려로 도망치는 데 실패한 최도, 고첨, 한항 등도 붙잡혀 극성으로 옮겨졌고, 모용외는 이들을 빈객으로 예우하였다. 전조의 청주자사 조억에게 패하여 세력을 잃은 국팽(鞠彭)과 정림(鄭林)도 이 시기에 요동에 도착해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2.4. 말기

대흥 3년(320년) 3월, 고구려의 미천왕이 자주 요동을 쳐들어오자,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미천왕이 맹약을 청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거두어 복귀하였다. 이때 사자로 갔던 배억과 송해가 동진에서 보낸 사자와 함께 극성으로 돌아왔고, 모용외는 안북장군, 평주자사에 임명되었다.

대흥 3년(320년) 12월, 고구려가 화친을 깨고 침공하였으나, 모용인이 그들을 대파하여 이후로 더이상 침범하지 않았다.

대흥 4년(321년) 12월, 동진에서 다시 알자를 파견해 모용외를 지절, 도독유평2주동이제군사(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공(遼東公)에 봉하였다. 식읍은 10,000 호에 달했고, 대선우 직책은 이전과 같게 하였으며, 인수를 하사하면서 승제하고 관속을 두는 것을 허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관료들을 재배치1하여 배억과 유수는 장사, 배개는 사마, 한수는 별가, 양탐은 군자좨주, 최도는 주부, 황홍과 정림은 참군으로 각각 삼았다. 또, 모용황을 세자로 세우고, 동횡(東橫)을 설치해 유학자로 명망높은 유찬을 동횡좨주로 영입하여 세자 모용황과 여러 귀족들을 교육하게 하였다. 모용인과 모용한도 각자 부임지에서 백성과 이민족을 위무하며 치적을 거두니, 모용한이 으뜸이었고 모용인은 그에 버금갔다.

영창 원년(322년) 12월, 단부의 단말배의 세력이 아직 방비가 되어있지 않아 모용외가 세자 모용황을 보내 단부를 습격했다. 모용황은 단부의 땅인 영지에 침입해 명마와 보물을 약탈해왔다.

태녕 원년(323년) 4월, 후조 갈족 군주인 석륵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모용외는 거절하고 사신을 붙잡아 동진 건업으로 보냈다.

태녕 3년(325년) 2월, 후조의 왕 석륵이 우문부의 대인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에게 관직과 작위를 하사하고, 모용부를 습격케 하였다. 모용외는 세자 모용황에게 단부와 탁발부 군사를 배속시킨 뒤, 요동상 배억을 우익으로 삼고, 모용인을 좌익으로 삼아 이를 영격케 하였다. 우문걸득귀는 요수(澆水)를 낀 채로 모용황의 진격을 가로막으면서 조카 우문실발웅(宇文悉拔雄)을 따로 파견해 모용인을 막게 하였다. 모용인이 우문실발웅 참수하여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그대로 요수에서 우문걸득귀와 싸우던 모용황과 합류해 우문걸득귀마저 대파하였다. 우문걸득귀는 전장에서 이탈해 도망침으로써 자신의 군사들을 버렸고, 모용황과 모용인은 우문부의 국성(國城) 점거한 후 경기병을 추격대로 보내 우문걸득귀의 뒤를 쫓게 하였다. 그러나 우문걸득귀는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라, 추격대는 300리 가량 달리다가 우문부의 보물들과 가축 백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때 수만 명의 우문부 백성들도 모용부로 귀부하였다고 한다.

태녕 3년(325년) 11월, 단발파 사후 단부의 대인에 오른 단아(段牙)가 모용외와 화친하여 도읍을 옮기려 하였는데, 단료가 반란을 일으켜 단아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하였다.

함화 6년(331년) 겨울, 모용외가 송해 등의 권유를 받고 연왕 작위 요구에 반대하던 한항을 좌천시켰다. 그리고 동진의 태위 도간에게 동이교위 봉추를 파견해 북벌을 부추기는 동시에 자신의 관작을 대장군, 연왕(燕王)으로 승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간은 그건 조정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동진 조정에 건의하였으나, 끝내 해당 안건은 1년이 지나도록 의결되지 않았다.

함화 8년(333년) 5월 6일[4], 모용외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은 청산에 매장되었다. 향년 65세. 모용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5]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현인, 군자는 국가의 기초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가색[6]은 나라의 근본이니 (중요하게 다루어) 긴급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색편녕[7]은 덕을 몹시 어지럽히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유교에 대한 견해를 담은 수천 자로 된 《가령》(家令)을 저작했다.

동진의 성제 사마연은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추증해주고, 시호를 '양공(襄公)'이라 하였다. 훗날 손자인 모용준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 혹은 무선황제로 추증했다.

3. 한국에서의 인지도

역사상 최초로 한민족이 세운 나라를 침략하여 한민족 vs 북방 유목민족 간 대립구도라는 스타트를 끊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고대사에서 부여를 대대적으로 말아먹고 고구려와 충돌한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즉 선비족 부여 침략을 시작으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0여 년이 넘는 한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질긴 악연이 이 사람부터 시작되었다.[8] 최근에는 대중매체에도 꽤 등장해서 < 근초고왕>, < 광개토태왕>등의 사극에서 전연 후연이 각각 조연으로 등장했다.

또한 김진명의 소설 《 고구려》에서 모용외가 주인공 미천왕의 라이벌로 등장하여 인지도가 꽤 상승했다. 그러나, 《가령》이라는 유학서를 저작했다는 모용외의 지식인 포스를 싸그리 날리고 완벽한 야만족의 우두머리로 연출하고 있다.[9] 게다가 미천왕과의 삼각관계에서 주인공 보정에 걸려 시궁창... 대신 아들 모용황이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 고사유에게 철저히 복수해버리지만, 결국 손자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러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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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 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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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자인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이 추존한 것이다. [2] 모용외때는 아직 왕조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모용황은 칭왕만 했을 뿐 칭제까진 가지 않았다. [3] 고구려의 서천원에 있었다고 한다. [4] 양력으로 계산할 시 6월 4일. [5] 獄, 형벌 옥사 [6] 稼穡, 파종 수확= 농사 [7] 酒色便佞, , 여자 및 좋은 말로 아첨떠는 것 [8] 어디까지나 기록상 최초의 북방 민족과 한민족 간의 충돌이다. 그 이전 고조선 유목민족과의 충돌이 있었는지는 사료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흉노 한무제의 침략 이전에는 동맹관계였던 것 같은데 그 이전 고조선이 동호나 흉노 등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현재로썬 알 길이 없다. [9] 우문선비를 몰살시킨다든가 심심해서 낙랑군을 털어버리고 못생긴 여자를 구해오지 못한 사람들을 던져버리며, 툭하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등 개념이란 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