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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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fff> 무평광공(武平匡公) 封奕 | 봉혁 |
|
시호 | 광(匡) |
작위 | 무평후(武平侯) → 무평공(武平公) |
성 | 봉(封) |
휘 | 혁(奕) |
자 | 자전(子專) |
생몰 | ? ~ 365년 5월 15일 |
출신 | 발해군(渤海郡) 수현(蓚縣) |
부친 | 봉전(封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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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인물. 서진의 동이교위 봉석(封釋)의 손자. 진위장군 봉전의 아들. 무선황제 모용외부터 헌무황제 모용위 시기까지 무려 4대에 걸쳐 모용부를 섬겼다.
2. 생애
영가 5년(311년) 12월, 동이교위 봉석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서로 신뢰관계를 맺고 있던 모용부의 대인 모용외에게 아직 어린 자신의 손자를 부탁하였다. 이후 봉석이 사망하니, 모용외는 봉혁을 불러 대화를 나눠보고는"뛰어난 선비로다!"
라 감탄하며 그를 소도독(小都督)으로 삼아 작은 고을을 감독케 하고, 그의 아버지 봉전을 참군으로 삼았다.건흥 원년(313년) 4월, 모용외가 귀순한 유민들 중 인재를 골라 재주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이때 봉혁은 송해, 황보급, 황보진, 무개(繆愷), 유빈(劉斌), 봉유(封裕)와 더불어 문장에 재주가 있어 기밀 사항을 권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군자좨주로 옮겨져 20년 동안 모용외로부터 군사와 국가의 중요 정책을 위임받아 처리하였다.
함화 8년(333년) 11월, 모용외 사후 그 세자인 모용황이 요동공에 올랐는데, 친동생인 모용인이 반란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평곽(平郭)에서 거병하였다. 모용황은 요동군 전체가 모용인에게 넘어가기 전에 봉혁을 파견해 요동을 위무케 하고, 현도태수 고후를 광무장군으로 삼아 5,000여 군사를 주고, 건무장군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영원장군 모용한(慕容汗), 사마 동수와 함께 평곽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고후의 토벌군이 문성(汶城) 북쪽에서 모용인에게 대패하고, 그 틈을 타 전(前) 대사농 손기(孫機)와 양평현령 왕영(王永)이 요동성을 들어 모용인에게 호응하니, 봉혁은 하는 수 없이 요동성에서 탈출한 영원장군 모용한(慕容汗)만 데리고 극성(棘城)으로 귀환하였다.
함화 9년(334년) 정월, 백랑(白狼)으로 출격하여 모용부에 복종하지 않던 선비족 목제(木堤)를 공격해 격파하고 목제를 참수하였다.
함화 9년(334년) 2월, 단부의 대인 단료가 동생 단난(段蘭)과 모용한(翰)을 보내 유성(柳城)을 공격케 하였으나 오랜 기간 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모용황은 유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봉혁과 영원장군 모용한(汗)을 보내면서 모용한에게 적의 기세가 높으니 함부로 덤비지 말고 만전을 기하라 당부하였다. 이는 모용황이 용맹하면서도 성급한 성격이었던 모용한(汗)이 일을 망칠까 걱정하여 특별히 당부한 것이었는데, 모용한(汗)은 적을 만나자마자 이를 무시한 채 선봉대의 기병 1,000여 기만 거느리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였다. 봉혁은 모용한(汗)을 말렸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모용한(汗)은 우미곡(牛尾谷)에서 단난에게 패하여 병력 절반 가량을 잃었다. 다행히 봉혁이 미리 진영을 정비하여 제때 모용한(汗)을 구원한 덕에 전멸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함강 원년(335년) 정월, 모용황이 좌, 우사마 직책을 설치하여 한교(韓矯)를 좌사마로 삼고, 봉혁을 우사마로 삼았다. 이후 봉혁은 우문부의 섭야간(渉夜干)을 습격해 격파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해 돌아왔다. 섭야간은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혼수(渾水)에서 봉혁을 따라잡아 공격했지만 또 패하였다.
함강 2년(336년) 6월, 단료가 다시 단난에게 수만 병력을 주어 곡수정(曲水亭)에 주둔시키고, 또다시 유성을 공략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우문부의 대인 우문일두귀도 안진(安晉)을 공격해 단부에게 호응하니, 모용황은 친히 50,000 군사를 거느리고 유성으로 향하였다. 이에 두려워진 단난이 군대를 이끌고 단부로 돌아가자, 우문일두귀 또한 치중을 전부 버리고 회군하다가 봉혁이 이끄는 경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봉혁은 우문일두귀가 치중을 버린 모두 회수하느라 20일이 지나서야 귀환할 수 있었다.
모용황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두 오랑캐가 부끄럽게도 아무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다시 이를 것이 분명하다. 마땅히 유성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그들을 기다림이 좋겠다."
이에 봉혁은 모용황의 명을 받들어 마두산(馬兜山)에 매복하였다. 과연 모용황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단료가 기병 수천 기를 거느리고 노략질하자, 봉혁은 나아가 단료를 대파하고 그 장수 영백보(榮伯保)를 참살하였다. 봉혁은 이어서 우문부 소속의 부(部)도 침공하여 승리하였고, 모용황은 그 공적을 인정하여 좌장사로 승진시켰다.함강 3년(337년) 9월, 봉혁 등의 대신들이 모용황에게 연왕(燕王)에 오를 것을 권하니, 모용황은 연왕에 올라 봉혁을 국상(國相)으로 삼고 무평후(武平侯)에 봉하였다.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전연 정벌을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전연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두려워하였고, 석호가 전연의 여러 군에 사자를 보내 회유하자 내사와 태수들이 앞다투어 투항하여 36개의 군이 한꺼번에 후조로 넘어갔다. 이윽고 후조군이 수도인 극성을 압박하니, 연왕 모용황은 봉혁을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에 봉혁이 말했다.
"석호는 심히 흉포하고 잔학하여 사람이나 신령 할 것 없이 모두 고통받고 있으므로, 그에게 재앙과 패망이 들이닥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비록 지금 정세가 이미 기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수비에 비하면 공격하는 측이 훨씬 어려워, 그들의 병사와 말이 강해도 우환이 되기는 힘든 법입니다. 적군은 며칠만 지나도 반드시 틈을 보일 것이니, 저희는 그저 굳건히 지키고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봉혁의 말을 들은 모용황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투항하자 권유하는 신하들을 물리쳤다. 후조군은 극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성벽을 넘어가려 했지만, 전연의 장수
모여근이 밤낮으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병들을 베면서 굳게 지켰다. 결국 공성을 시작한지 열흘이 넘어갈 때 후조군은 지쳐서 후퇴하였는데, 연왕 모용황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들
모용각로 하여금 기병 2,000기로 그 뒤를 치게 하여 후조군을 대파하였다.영화 4년(348년) 11월, 연왕 모용황 사후 모용준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자, 봉혁은 오재장군에 임명되었다.
영화 5년(349년) 5월, 후조가 무제 석호의 사망으로 내분이 일어나니, 도하(徒河)에 주둔해 후조의 침략에 대비하던 평적장군 모용패는 연왕 모용준에게 중원을 정벌할 것을 유세하였다. 확신이 들지 않았던 연왕 모용준이 봉혁을 불러 이 일에 대해 의논하자, 봉혁이 말했다.
"무릇 용병에서 적이 강할 때 지(智)를 쓰고, 적이 약할 때 세(勢)를 써야 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대(大)가 소(小)를 삼키는 것은 늑대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과 같고, 혼란을 다스리는 것은 낮의 태양으로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역대 대왕 모두 덕과 인자함을 쌓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한 군대를 길러왔으나, 흉역한 석호는 죽어서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그 자손들은 나라를 두고 골육상쟁하고 있습니다. 또, 중원의 백성들은 진흙에 빠져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 도탄에서 벗아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거병하셔서 먼저 남쪽으로 나아가 계성(薊城)을 취하시고, 그 다음 목표를 업도(鄴都)로 세워 그 위덕은 널리 빛내면서 유민들을 위무하신다면, 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대왕을 영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흉악한 무리는 대왕의 깃발만 보아도 얼음조각처럼 뿔뿔이 흩어질 것이니, 어찌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봉혁의 대답을 들은 연왕 모용준은 크게 웃으며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심하여 군대를 정비하였다.영화 7년(351년) 4월, 발해 사람 방약(逄約)이 후조가 혼란한 틈을 타 수천 호의 백성을 이끌고 염민이 세운 염위로 귀순하여 발해태수에 임명받았다. 봉혁은 연왕 모용준의 명령을 받고, 군대를 거느리고 방약의 보루로 나아가 방약에게 사람을 보내 동향 사람끼리 이야기나 나누자며 독대를 청하였다. 평소 봉혁을 존경하던 방약은 즉시 보루의 문 밖으로 나가서 주위의 기병들을 모두 물리고, 단기로 봉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봉혁이 주제를 바꿔 방약에게 항복하라 유세하자, 방약은 한숨을 쉬고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그때 봉혁으로부터 미리 지시를 받았던 급사 장안(張安)이 신호를 받고, 돌연 방약에게로 달려가 그의 말고삐를 낚아챈 뒤 그대로 봉혁의 진영으로 끌고 들어가버렸다. 방약을 자신의 진영으로 납치한 봉혁은 자리에 앉아 방약에게 말했다.
"자네가 스스로 결단하지 않았기에, 내가 대신 결단을 내려준 것일 뿐, 결코 자네를 사로잡아 공을 세울 생각따윈 없네. 자네를 안전히 확보해야 백성들도 안심하지 않겠는가."
방약은 하는 수 없이 전연에 항복하였고, 모용준은 방약을 참군사로 삼았다. 이후 방약은 봉혁에게 낚였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방조(逄釣)로 개명하였다.영화 8년(352년) 4월, 보국장군 모용각과 함께 염민을 토벌하기 위해 안희(安喜)로 진군하였다. 염민이 상산(常山)으로 이동하자 전연군을 그 뒤를 쫓았고, 마침내 염대(廉臺)에서 염민을 따라잡아 염위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로잡힌 염민과 염위의 대장군 동윤(董閏), 거기장군 장온(張溫)을 사로잡아 계(薊)로 압송하였다.
영화 8년(352년) 8월, 보국장군 모용각, 보의장군 양무와 더불어 노구(魯口)에서 안국왕(安國王)을 자칭하며 할거하던 왕오(王午)를 토벌하였다. 왕오가 염대 전투 이후 자신에게로 도망쳐왔던 염민의 아들 염조(冉操)를 바치면서 용서를 구하니, 전연군은 인근 논밭의 벼만 약탈한 뒤 돌아갔다.
원새 원년(352년) 11월, 경소제 모용준이 제위에 올라 백관을 설치하자, 봉혁은 태위에 올라 중서감을 겸하였고, 아울러 작위도 무평공(武平公)으로 진봉되었다.
광수 2년(358년) 12월, 하북 대부분을 장악하여 동진과 국경을 맞닿게 되니, 경소제 모용준은 전진과 동진을 정벌하고자 각지에 사신을 파견해 징병을 독촉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의 군과 현이 심히 고통받게 되자, 봉혁이 걱정하여 경소제 모용준에게 간했다.
"앞으로 군대를 부릴 시기는 그리 촉박한 것도 아니므로 함부로 사신을 파견해 여러 군들을 혹사시켜서는 아니 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부역과 징집 문제는 어차피 주와 군의 임무이니, 각 지방으로 감독 나간 백관들을 속히 귀환시키소서."
경소제 모용준이 봉혁의 말에 따랐다.건희 5년(364년) 8월, 업성으로 천도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전연의 종묘와 사직은 모두 옛 도읍인 용성(龍城)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헌무제 모용위는 군신들을 모아 의논한 끝에 덕과 신용이 있는 대신이 종묘와 사직을 옳겨오는 중임을 맡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봉혁과 시중 모여근이 그 임무를 맡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봉혁과 모여근은 용성에서 종묘사직을 옮겨 업으로 모셨다.
건희 6년(365년) 4월 9일[1],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광(匡)'.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