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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6:11:10

배억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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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1. 개요

裴嶷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문기(文冀). 사주(司州)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출신. 서진의 사예교위 배창(裴昶)의 아들. 한족이나 선비족인 모용외의 참모로서 활약했다.

2. 생애

청렴하고 올바른 성정과 재간을 지니고 있었으며, 풍채가 좋고 행동거지가 씩씩하여 서진 조정에 중서시랑으로 임관하였다가 누차 승진하여 급사황문시랑, 형양(滎陽)태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영가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크게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큰형 배무(裴武)가 현도(玄菟)태수를 지내고 있었으므로 배억은 같은 평주(平州)인 창려(昌黎)태수를 자청하여 난을 피했다.

배억이 창려로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 배무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서진 조정에서 배억을 중앙으로 소환하니, 배억은 배무의 아들 배개와 함께 배무의 관을 가지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선비족 단부는 요서(遼西)를, 모용부는 요동(遼東)을 장악하면서 각기 세력을 거느리고 할거하였는데, 배억이 요동으로 향하려 하자 배가가 반대하며 말했다.
"고향은 북쪽인데 어찌 남쪽으로 향합니까! 그리고 설령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 타향에 머물게 되더라도, 단씨는 강성하고 모용씨는 약한데 어찌 반드시 그 요동으로 나아가려 합니까!"
배억이 답했다.
"중원은 상란을 겪고 있어 지금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또, 고향까지의 길이 요원한데 어찌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겠으며 또, 그곳까지 얼마나 걸릴지 그 세월을 기약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지금 발 디딜 땅이라도 찾아야 할 때에 어찌 우리가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너는 단부의 사람들이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선비들을 예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모용공(慕容公: 모용외)은 인(仁)을 닦고 의(義)를 행하며 백왕(伯王)의 뜻을 품고 있는데다, 그 나라는 풍족하고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다. 지금 그에게로 가면 공명을 세울 수도 있음은 물론이요, 종족을 능히 비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더이상 쓸데없는 의심을 품지 말라!"
그러자 배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배억의 의견에 따랐다. 배억과 배개가 요동에 오자, 모용외는 크게 기뻐하며 예우하였다.

건흥 원년(313년) 4월, 모용외는 중원의 난을 피해 귀의해온 한족들을 전부 맞아들여 배억, 양탐(陽眈), 황홍(黃泓), 노창(魯昌)을 자신의 모사로 삼았다. 당시 강남으로 피난갈 수 없었던 한족 유민들은 모용부와 단부 중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였는데, 배억이 이들을 이끌어 모용부로 끌어들이니 모용외는 매우 흡족해 하였다.

대흥 원년(318년) 3월, 배억이 모용외에게 말했다.
"진 왕실은 쇠퇴하여 강표(江表)로 쫓겨났고, 그 위세와 덕망은 먼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원의 혼란은 명공(明公)이 아니면 능히 진압할 인물이 없으니, 지금 각 부의 군사를 정비하여 완우한 패거리들을 점차 정리해나가야 합니다. 이들을 병합해 영토를 확장한다면 서쪽으로 뻗어나갈 때에 발판이 될 것입니다."
모용외도 이를 심히 옳게 여겨, 배억을 장사로 삼고 군국(軍國)의 일에 관한 모의를 위임하였다. 이로써 모용부는 근처의 약하고 작은 부들을 하나둘 흡수하면서 점차 세력을 불렸다.

대흥 2년(319년) 12월, 평주자사 최비(崔毖)의 계략으로 단부, 고구려, 우문부가 연합하여 모용부의 도읍인 극성(棘城)을 침공하였다. 이때 모용외가 우문부의 군영으로 쇠고기와 술을 보내니, 단부와 고구려의 군대는 우문부가 배신한 것이라 알고 모두 돌아갔다. 그러나 우문부의 대인 우문실독관은 혼자서라도 극성을 떨어뜨리고 말겠다며 수십만 군대를 거느린 채 물러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극성 내외로 크게 동요하자, 모용외는 배억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배억이 답했다.
"우문실독관은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나, 그의 군대는 지휘 체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으니, 만약 정예병을 이끌고 그 틈을 파고 든다면 반드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모용외는 배억과 자신의 아들 모용황에게 정예병을 주어 선봉에 서게 하고, 친히 대군을 이끌며 그 뒤를 이었다.

우문실독관은 모용외가 농성만 할 것이라 생각해 습격에 전혀 대비치 않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온다는 소식에 놀라 갑작스럽게 모든 무리를 내보내 싸우게 하였다. 배억과 모용황의 선봉대가 우문부의 군사와 맞닥들일 즈음에 극성 밖에서 기병 1,000여 기의 별동대를 이끌던 모용외의 서자 모용한이 그 틈을 파고 들어가 우문실독관 군영 곳곳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화공으로 큰 혼란에 빠진 우문부의 군사들이 당황해 도망치면서 대패하였고, 우문실독관은 홀로 겨우 목숨만 구하여 도망쳤다. 모용외는 우문부의 군사들을 대부분 사로잡고 우문부 대대로 전해지던 가보인 황제의 옥새에 달려있던 끈 3개를 얻었다. 이후 모용외는 배억을 사자로 동진에 보내 이번 승리를 보고하게 하고, 아울러 옥새의 끈 3개를 헌납하게 하였다.

대흥 3년(320년) 3월, 배억이 동진에 도착해 보고를 마치자, 원제 사마예는 배억에게 동진에 남아 자신을 섬길 것을 청하며 말했다.
"경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의 명신이었으니, 마땅히 이곳 강동에 남도록 하라. 짐이 용양장군[1]에게 별도로 조서를 내려 경의 가족들도 강동으로 송환케 하겠다."
이에 배억이 답했다.
"신은 젊어서부터 국가의 은혜를 입고 조정을 드나들었으나, 우연히 일이 생겨 외진 땅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서야 다시 은혜를 입어 조정에 복귀할 기회를 얻고,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은 것은 신에게 있어서 크나큰 행복입니다. 하오나 옛 수도가 윤몰되고 산릉이 천훼(穿毀)당하여 여러 명신과 숙장들이 곤욕을 치르는 와중에도, 용양장군만은 외진 곳에 있으면서 온 마음으로 왕실에 충성을 다하니 그 강개함은 천지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용양장군께서는 중원을 평정한 후에 황제의 승여를 영접하기 위하여 오늘 이곳 만리 먼 곳까지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신이 이곳에 남는다면 그는 분명 벽루한 곳에 있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무시당한 것이라 생각해 그 의로운 마음을 해치고 말 것입니다. 소신이 나라를 잊어야 한다는 점이 심히 애석하나 국가를 위해 돌아가 반명(返命)하려 합니다."
원제 사마예는 배억의 말을 납득하고, 그를 요동으로 귀환시킴과 동시에 조서를 내려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 평주자사로 삼고 모용외의 식읍을 2,000호 늘렸다.

대흥 4년(321년) 12월, 동진 조정에서 알자를 파견해 모용외를 요동공(遼東公)에 봉하고, 인수를 내려 봉국에 태수와 재상을 두게 하였다. 모용외는 관료들을 갖추면서 배억을 다시 장사로 임명했다가,
"배 장사가 조정 내에서 제일 명성이 중한데 이처럼 내 휘하로 들어왔으니 어찌 하늘 내린 자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 칭찬하며 요동상(遼東相)으로 삼았다.

태녕 3년(325년) 2월, 후조의 석륵이 우문부의 대인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에게 관직을 내리고 모용부를 습격케 하자, 모용외는 세자 모용황을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이때 모용황은 배억을 우부도독으로 삼아 탁발부 단부의 군사들을 이끌게 하여 우익을 맡기고, 정로장군 모용인을 좌부도독으로 삼아 좌익을 통솔케 하였다. 모용황은 우문걸득귀를 격파하고, 우문부의 영역 안으로 300리 정도 진입했다가 진귀한 보물과 가축 100만 마리를 약탈한 뒤 돌아왔다. 이후 배억은 낙랑(樂浪)태수로 부임하였고 그 뒤의 행적은 알 수 없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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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동진에서 내린 모용외의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