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7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f>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
유연 · 유화 | 유총 | 유총 | 유총 · 유찬 | |
<rowcolor=#fff>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 |
유요 | 유요 | 유요 |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 |
<rowcolor=#fff>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석륵 | 석륵 | |
<rowcolor=#fff>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 |
석륵 | 석홍 | 석호 | 석호 | |
<rowcolor=#fff>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 |
석호 | 석세 · 석준 · 석감(鑒) | 석민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모용외 | 모용황 | |
<rowcolor=#fff>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 |
모용황 | 모용준 | 모용준 | 모용위 | |
<rowcolor=#fff> 29권 -2l 「전연록칠(前燕錄七)」
|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 |
모용위 |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 |
부홍 | 부건 | 부생 | 부견 | |
<rowcolor=#fff>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 |
부견 | 부견 | 부비 | 부등 | |
<rowcolor=#fff>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모용수 | 모용수 | |
<rowcolor=#fff>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 |
모용수 |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
<rowcolor=#fff>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 |
모용운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 |
요익중 | 요양 | 요장 | 요흥 | |
<rowcolor=#fff>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 |
요흥 | 요흥 | 요홍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모용덕 | 모용초 | |
<rowcolor=#fff>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 66권 「하록일(夏錄一)」 | 67권 「하록이(夏錄二)」 | 68권 「하록삼(夏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혁련발발 | 혁련창 | 혁련정 | |
<rowcolor=#fff> 69권 「하록사(夏錄四)」 |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장궤 | 장실 | 장준 | |
<rowcolor=#fff>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 76권 「촉록일(蜀錄一)」 | |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 장현정 · 장천석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특 | |
<rowcolor=#fff> 77권 「촉록이(蜀錄二)」 | 78권 「촉록삼(蜀錄三)」 | 79권 「촉록사(蜀錄四)」 | 80권 「촉록오(蜀錄五)」 | |
이류 ·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 |
여광 | 여소 · 여찬 | 여륭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 |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걸복모말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
<rowcolor=#fff>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 |
독발녹단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고 | 이흠 | |
<rowcolor=#fff>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저거몽손 | 저거무건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풍발 | 풍홍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
1. 개요
전연(前燕)의 명장[1] 겸 명재상.전연의 제1대 황제인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4남이자 제2대 황제인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동생이었다.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출신이었으며, 자는 현공(玄恭)이었다.
5호 16국시대 초기 제일의 인물로까지 평가받는다.
2. 생애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어릴 때부터 형 모용준과 함께 부친인 모용황의 원정에 참여했다. 갈족 석씨의 후조(後趙)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요동 정벌에 나서 예맥계 부여와 고구려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 뒤 중산(中山)을 공격해 한족 왕조인 염위(冉魏)의 황제 염민(冉閔)을 생포했다. 모용각은 염민의 군사는 가볍고 빠르며 병력이 적은 까닭에 결사적으로 대항할 것이라 예상하고 겹겹이 포위한 채 지치기를 기다린 후 결국 그들을 몰살한다. 이후 단부선비를 멸망시키고, 하남(河南)을 침공한 뒤 여호(呂護)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다. 그 뒤 구도 낙양을 차지하여 하북과 하남 모두를 평정하고, 전연을 중원으로 이끌었다.348년 부황 모용황(慕容皝)이 붕어하고, 맏형인 모용준(慕容儁)이 제위에 오르자 태원왕(太原王)으로 봉해졌으며, 360년에 열조 경소제 모용준이 붕어하자, 황제가 되기를 거부하고 모용준의 아들이자 본인의 조카인 모용위(慕容暐)를 옹립하고 보필했다. 이후 자신을 모함한 모여근이 주살당하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국정을 주도했으며, 임종 직전인 367년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세상을 떠났다.
모용각이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충분히 제위를 찬탈할 기회와 힘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어린 조카인 모용위를 보필하여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당장 그가 상대했던 동진(東晉)의 명장이자 권신이었던 환온(桓溫)이나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堅)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실력만 있으면 황제를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는게 우스운 시대에 모용각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환온과 부견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내로라하는 명장들로 모용각은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며 훌륭하게 나라를 지켜냈다. 결국, 그가 죽고 나서야 부견이 한족 출신인 왕맹(王猛)을 앞세워 370년에 전연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3. 평가
若王猛之治國,苻堅之管仲也;慕容玄恭之輔少主,慕容暐之霍光也;劉裕之平逆亂,司馬德宗之曹操也。
왕맹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부견의 관중이라 할 수 있다. 모용현공이 어린 주군을 보좌한 것은 모용위의 곽광이라 할 수 있다. 유유가 역란을 평정한 것은 사마덕종의 조조라 할 수 있다.
《 위서》권35 <최호 열전>
왕맹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부견의 관중이라 할 수 있다. 모용현공이 어린 주군을 보좌한 것은 모용위의 곽광이라 할 수 있다. 유유가 역란을 평정한 것은 사마덕종의 조조라 할 수 있다.
《 위서》권35 <최호 열전>
4. 여담
[1]
사서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무패의 명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