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f>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
유연 · 유화 | 유총 | 유총 | 유총 · 유찬 | |
<rowcolor=#fff>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 |
유요 | 유요 | 유요 |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 |
<rowcolor=#fff>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석륵 | 석륵 | |
<rowcolor=#fff>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 |
석륵 | 석홍 | 석호 | 석호 | |
<rowcolor=#fff>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 |
석호 | 석세 · 석준 · 석감(鑒) | 석민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모용외 | 모용황 | |
<rowcolor=#fff>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 |
모용황 | 모용준 | 모용준 | 모용위 | |
<rowcolor=#fff> 29권 -2l 「전연록칠(前燕錄七)」
|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 |
모용위 |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 |
부홍 | 부건 | 부생 | 부견 | |
<rowcolor=#fff>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 |
부견 | 부견 | 부비 | 부등 | |
<rowcolor=#fff>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모용수 | 모용수 | |
<rowcolor=#fff>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 |
모용수 |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
<rowcolor=#fff>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 |
모용운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 |
요익중 | 요양 | 요장 | 요흥 | |
<rowcolor=#fff>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 |
요흥 | 요흥 | 요홍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모용덕 | 모용초 | |
<rowcolor=#fff>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 66권 「하록일(夏錄一)」 | 67권 「하록이(夏錄二)」 | 68권 「하록삼(夏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혁련발발 | 혁련창 | 혁련정 | |
<rowcolor=#fff> 69권 「하록사(夏錄四)」 |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장궤 | 장실 | 장준 | |
<rowcolor=#fff>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 76권 「촉록일(蜀錄一)」 | |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 장현정 · 장천석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특 | |
<rowcolor=#fff> 77권 「촉록이(蜀錄二)」 | 78권 「촉록삼(蜀錄三)」 | 79권 「촉록사(蜀錄四)」 | 80권 「촉록오(蜀錄五)」 | |
이류 ·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 |
여광 | 여소 · 여찬 | 여륭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 |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걸복모말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
<rowcolor=#fff>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 |
독발녹단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고 | 이흠 | |
<rowcolor=#fff>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저거몽손 | 저거무건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rowcolor=#fff>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풍발 | 풍홍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
1. 개요
趙染(? ~ 314)
서진 및 전조의 인물. 자는 문한(文瀚). 옹주 경조군 신풍현 출신. 명나라 시기 야사집인 《속삼국연의》는 조통의 아들이라 하지만 본적부터 다르고 근거도 없다.
2. 생애
영가 5년(311년) 7월, 남양왕 사마모의 아문장을 지내던 조염은 명을 받고 포판(蒲阪)을 수비하였다. 조염은 사마모에게 빙익(馮翊)태수 자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심히 원망하며 무리를 거느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한나라의 소무제 유총은 조염을 평서장군으로 삼고 신풍(新豐)을 지키게 하였다.가평 원년(311년) 8월, 소무제 유총은 조염과 안서장군 유아(劉雅)에게 20,000명의 기병을 주어 장안을 공격케 하고, 하내왕 유찬과 시안왕 유요에게 많은 군사를 주어 그 뒤를 받치게 하였다. 조염의 군대는 동관(潼關)에서 사마모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장수 여의(呂毅)를 패사시킨 후 하규(下邽)까지 진격하자, 양주독호 북궁순이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장안에서 나와 조염에게 항복하였다. 사마모는 다시 장수 순우정(淳于定)을 보내 조염을 공격해보았지만, 또 패하여 창고의 군량은 소진되었고 병졸들은 모두 흩어졌다. 조염이 마침내 장안성을 포위하니, 사마모는 군사좨주 위보(韋補)의 조언에 따라 장안성을 들어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장안성을 접수한 조염은 투항한 사마모를 후방에 있는 하내왕 유찬에게 넘겼는데, 유찬은 군중에서 사마모를 곧바로 처형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10월, 유찬이 사마모를 살해했다는 소식 듣고 안정(安定)으로 도망쳤던 빙익태수 삭침(索綝)과 안이호군 국윤 등이 안정태수 가필과 진 황실 부흥을 모의하고, 군대 50,000명을 일으켜 장안으로 향하였다. 당시 한나라에 아직 투항하지 않던 옹주(雍州)자사 국특(麴特), 신평(新平)태수 축회(竺恢), 부풍(扶風)태수 양종(梁綜) 등도 가필이 거병했다는 소식에 덩달아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니 그 무리가 도합 100,000명에 달하였다. 신풍에 주둔하고 있던 하내왕 유찬은 유아와 조염을 파견해 신평의 축회부터 공격하게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때 삭침이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고, 조염과 유아는 삭침과 100여 차례 싸웠으나 끝내 패퇴하였다.
가평 3년(313년) 4월, 중산왕 유요가 평서장군 조염, 사예교위 교지명과 함께 장안성으로 진공하자, 진나라의 옹주자사 국윤도 장안에서 나와 황백성(黃白城)에 주둔하여 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에 유요는 군대를 포판에 주둔시키고 국윤의 진군과 더불어 여러 번 전투를 벌였다.
가평 3년(313년) 10월, 국윤은 유요, 조염과 수 차례 격돌하였으나 번번이 격파당해 황백성에서 간신히 농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제 사마업이 삭침을 정동대장군 삼아 군사를 보내 황백성을 구원케 하니, 그 틈을 노린 유요가 조염에게 기병 5,000명을 주어 장안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조염이 밤에 기병대를 이끌고 장안을 급습하여 장안의 외성(外城)을 점거하자, 민제 사마업은 사안루(射雁樓)로 피신하였다. 조염은 해가 뜰 때까지 장안성의 용미(龍尾)와 여러 군영들을 불태워 없애고, 1,000여 명을 죽인 뒤, 소요원(逍遙園)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이후 아성(阿城)의 장수 국감(麴鑒)이 5,000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을 구원한다는 소식에, 조염은 철수하여 유요의 군영으로 복귀했다. 국감은 조염을 추격했다가 영무(零武)에서 마중나온 유요의 반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가평 3년(313년) 11월, 국윤의 기습으로 인해 교지명이 전사하고, 유요와 조염은 대패하여 수도 평양(平陽)으로 돌아갔다.
가평 4년(314년) 6월, 중산왕 유요가 위예(渭汭)에 주둔하고, 조염은 신풍에 주둔하여 다시 장안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태위 삭침이 나와서 먼저 조염을 치니, 조염은 이전의 국윤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던 것을 생각하며 삭침을 가벼이 여겼다. 그때 장사 노휘(魯徽)가 간했다.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싸우기 마련인데 하물며 국가면 어떻겠습니까."
조염이 코웃음치며 답했다."삭침과 같은 소인배가 어찌 내 검과 말굽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이른 아침에 정예 기병 수백 기만 이끌고 삭침의 군대와 싸우러 가면서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아침밥은 삭침을 사로잡은 후에 먹겠다!"
이후 성문을 열고 나와, 신풍성 서쪽에서 삭침과 교전하였으나 패하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삭침에게 패하고 망신을 당한 조염은 몹시 후회하며
"내가 노휘의 말을 듣지 않아 패하고 말았으니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는가!"
라 하고는 부끄러움에 노휘를 붙잡아 처형할 것을 지시했다. 이윽고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 노휘가 조염에게 말했다."장군은 너그럽지 못하고 우직하여 간언을 무시했다가 패한 것일진대, 간언을 올린 충량한 이마저 주살한다면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세상으로 대하시렵니까.
원소가 전에 그렇게 하였고, 이제 장군이 그 뒤를 좇고 있으니 패망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사마님(당시 중산왕 유요의 직책)을 다시 뵈올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나, 만약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나는 마땅히 황천으로 가서
전풍에게 호소하여 장군이 침상에서 편히 죽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을 향해 소리치길"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죽겠다!"
라 하였다.[1]노휘를 처형한 조염은 장수 은개(殷凱)와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장안으로 진격하였고, 도중에 빙익에서 요격하러 나온 국윤의 군대도 격파하였다. 국윤이 일단 군사를 거두어 물러났다가 밤에 은개의 진영을 야습하여 은개를 죽이니, 유요는 잠시 장안 공략을 멈추고 하내(河內)로 방향을 틀어 하내군의 회현(懷縣)을 포위하였다. 회현을 지키던 하내태수 곽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식이 떨어져 하내군을 포기하고, 신정(新鄭)으로 달아나 형양태수 이구에게 의탁하였다. 유요는 주인 잃은 하내를 손쉽게 장악한 후, 다시 포판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조염을 보내 장안 공략을 재개하게 하였다.
가평 4년(314년) 가을, 조염이 북지군(北地郡)을 공격하자, 국윤은 청백성(青白城)으로 들어가 농성하면서 조염의 진군을 막았다. 성을 한창 공격하던 조염은 어느 날 밤에 노기를 가득 띄운 노휘의 혼령이 쏜 화살에 맞는 악몽을 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조염은 전투를 지휘하던 중 적군 중노병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니, 한나라 군대는 청백성 공성을 중지하고 퇴각하였다.
[1]
당시 대사마·중산왕 유요의 진영이 조염의 진영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훗날 노휘의 죽음을 전해들은 유요는 "조염은 작은 웅덩이와도 같아 한 자의 잉어조차 품지 못했구나."라 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