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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5:22:51

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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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남문선왕(汝南文宣王)
원열 | 元悅
출생 494년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533년 2월 7일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북위 여남왕(汝南王)
503년 7월 10일 ~ 528년 5월
남량 위왕(魏王)
530년 7월 23일 ~ 532년 1월 25일
북위 여남왕(汝南王)
532년 1월 25일 ~ 533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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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하남 원씨
열(悅)
선례(宣禮)
부모 부황 고조 효문제
모후 부인 나씨(羅氏)
형제자매 7남 7녀 중 6남
왕비 여씨(閭氏)
아들 원영(元潁)
종교 불교
작호 여남왕(汝南王) → 위왕(魏王)
→ 여남왕(汝南王)
시호 문선왕(文宣王)
연호 경흥(更興, 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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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북위 시기
3.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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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북위의 황자. 제7대 고조 효문제의 6남. 양무제 소연에 의해 괴뢰 황제로 책봉될 뻔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무산되어 정식 황제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2. 생애

2.1. 북위 시기

경명 4년(503년) 6월 1일[1], 선무제 원각이 원열을 여남왕(汝南王)에 봉하였다.

원열은 불경(佛經)과 서사(書史)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성격이 비상식적이고 행동이 엉뚱하여 예측하기 어려웠다. 원열의 왕비 여씨(閭氏)는 동해공(東海公)의 딸로, 그녀는 아들을 낳았음에도 원열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때 도술의 일종인 좌도(左道)에 능하기로 유명한 최연하(崔延夏)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원열과 교류하며 선약(仙藥)과 송술(松術)[2]을 함께 복용하였다. 원열은 자주 최연하와 함께 나가서 산에서 지초(芝草)를 채집하고, 낙양성 밖 천민들이 머무는 곳에서 숙박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각은 점점 더 심해져, 나중에는 술과 고기, 쌀밥을 완전히 끊고 오직 보리밥만 먹었으며, 여성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남색(男色)을 즐기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원열은 왕비와 첩들에게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심지어 그들을 종처럼 매질하기까지 하였다.

원열이 밖으로 나돌며 지내는 동안, 그의 왕비 여씨는 집을 나가 별채에 머물렀다. 이를 알게 된 영태후 호씨는 관원들에게 조사를 명하였고, 왕비 여씨는 조사받기 위해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여씨는 병이 들어 침상에 누워 있다가 부름을 받고 왔는데, 원열의 매질로 인해 생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상처를 본 영태후는 원열이 왕비를 매질한 사건을 문제 삼아 모든 친왕(親王)과 삼번왕(三蕃王)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 정비(正妃)가 병을 100일 이상 앓게 될 경우, 반드시 조정에 보고해야 한다.
* 만약 위 명령을 어기거나 조사 결과 매질을 행한 것이 밝혀질 경우, 즉시 작위를 박탈하고 봉국을 폐지한다.

희평 2년(517년) 4월 18일[3], 조정에서 원열을 중서감(中書監)•의동삼사(儀同三司)로 삼았다.

희평 2년(517년) 7월 16일[4], 원열이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면직당했다. 그는 왕위는 유지한 채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희평 3년(518년) 정월 29일[5], 원열이 복직되어 특진(特進)•의동삼사를 지냈다.

신귀 3년(520년) 7월, 원차가 청하왕 원역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하자, 원열은 전혀 원망하거나 한탄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원차를 위해 상락주(桑落酒)를 준비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 하며 온갖 아첨을 다하였다. 원차는 크게 기뻐하며 원열을 시중(侍中)•태위(太尉)로 임명하였다. 원열은 태위로 임명된 날, 원역의 아들 원단을 불러 그의 아버지 가 사용하던 의복과 장신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원단이 이를 즉시 만족스럽게 제공하지 못하자, 원열은 원단을 소환하여 100대의 매질을 가하였다.이때 원단은 아직 아버지를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움막에서 지내며 슬픔으로 몸과 기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폭력적인 매질이 가해져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에 원열을 섬겼던 전(前) 여남국의 낭중령 양고(陽固)가 상소를 올려 간언하였다.
"엎드려 듣건대, 전하께서 작은 노여움으로 인해 과도한 형벌을 내리셨다 합니다. 이는 엄한 훈계는 남았으나, 자애와 은혜는 부족한 것입니다. 지금 주상께서 어리고 미숙하여, 재보(宰輔)들이 국정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마치 얼음 위를 걷고 서리 위를 밟는 듯 위태로운 상황이라, 신중히 노력해도 온전히 이루기 어려운 형편인데, 하물며 규범에 맞지 않은 행동을 자의적으로 행하며 복록을 온전히 유지하려 한다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예전에 공수(龔遂)는 나라를 떠났으면서도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고, 위맹(韋孟)은 조정을 떠나 있으면서도 본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신이 아뢰는 바는 조정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감히 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열은 이 글을 읽고 크게 분노하였지만, 그 나름의 죄책감을 느꼈는지, 나중에 원단을 찾아가 "아아(阿兒)"라고 부르며 직접 손으로 어루만지고 달래기도 하였다.

정광 4년(523년) 9월, 효명제가 조서를 내려 원열이 문하성(門下省)에 들어가도록 하였고, 승상 원옹과 함께 상서성(尚書省)의 문서를 검토하고 결재를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정광 4년(523년) 12월, 효명제가 원열을 태보(太保)•사주목(司州牧)으로 삼았다. 사주목에 임명된 원열은 자신의 통치를 엄하게 하기 위해 주(州)의 관청 문에 큰 방아를 걸어두고, 도둑질을 한 자는 즉시 손을 베어내겠다고 선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원열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처벌로 인해 일시적으로라도 도둑질과 같은 범죄는 줄어들었다.

효창 2년(526년) 정월 12일[6], 원열이 다시 태위를 겸하였다.

원열은 구념(丘念)이라는 측근을 총애하여, 늘 가까이 두고 함께 지내며 일상을 함께하였다. 주(州)의 관리를 임명할 때에도 원열은 자주 구념의 의견에 의존하여, 많은 인사가 구념에 의해 결정되었다. 구념은 원열의 저택에 자주 머물렀으며, 때때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어사중위 역도원(酈道元)이 비밀리에 조사하여 알게 되었고, 구념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에 원열은 영태후에게 아뢰어 구념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태후의 명으로 구념은 사면되었다. 그러나 역도원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구념을 처형하였고, 이를 계기로 원열까지 탄핵하려 하였다. 이 무렵, 옹주(雍州) 자사 소보인의 반란 정황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기에, 원열 등은 조정에 건의하여 역도원을 관우대사(關右大使)로 파견보내게 하였고, 역도원은 원열의 계획대로 소보인에게 살해당했다.

건의 원년(528년) 4월, 이주영이 하음의 변(河陰之變)을 일으키자, 자신도 휘말릴까 두려워한 원열은 남조의 소량으로 망명하여 무제 소연에게 의탁하였다.

대통 원년(529년) 정월 12일[7], 원열이 무제에게 본국인 위나라로 돌아가길 청하니, 무제가 이를 허하였다.

중대통 2년(530년) 6월 13일[8], 무제가 원열을 위왕(魏王)에 봉하고, 북쪽으로 돌려보내 훗날 북위의 정권을 맡게하여 양나라의 괴뢰국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3일 뒤에, 무제는 북위에서 상서좌복야를 지내다가 양나라로 항복한 장수 범준(范遵)을 사주목으로 임명하고, 원열을 따라 북쪽으로 출정하여 북위를 침공하도록 하였다.

중대통 2년(530년) 11월, 북위의 동서주(東徐州) 자사 곡사춘(斛斯椿)은 평소 이주영에게 의지하여 그의 세력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주영이 효장제에 의해 목숨을 잃자 불안에 떨며 자신의 처지를 염려하였다. 이때 과거 북위의 여남왕이었던 원열이 자신의 관할 지역 경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곡사춘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주(州)를 버리고 원열에게 귀부하였다. 원열은 이에 곡사춘을 시중•대장군(大將軍)•사공(司空)•대행대전구도독(大行台前驅都督)으로 임명하고, 영구군공(靈丘郡公)에 봉하였다. 이후 원열은 연호를 '경흥(更興)'으로 개원하고, 본격적으로 침공할 준비를 하였으나, 이주조가 이미 낙양(洛陽)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대업이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원열은 남쪽으로 다시 돌아갔고, 선봉장인 곡사춘은 이주조에게 도망쳐 다시 북위에 항복하면서 무산되었다.

중대통 4년(532년) 정월 3일[9], 무제가 원열을 낙양으로 돌려보내고, 평북장군 설법호(薛法護)에게 그를 낙양까지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이리하여 원열은 다시 수년만에 북위로 귀환하였다. 당시 이주씨의 반란을 진압한 고환은 원열이 효문제의 아들이므로 황위를 계승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 그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원열이 북위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경솔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으며 계속해서 죄를 짓자, 결국 그의 황위 계승을 중단하였다.

태창 원년(532년) 11월 19일[10], 고환에 의해 옹립된 황제 효무제 원수가 원열을 시중•대사마(大司馬)•개부(開府)로 삼았다. 그러나 효무제는 원열이 신분이 높고 자신보다 정통성이 있는 황족이었기 때문에 내심 두려워하며 경계하였다.

영희 원년(532년) 12월 28일[11], 효무제가 원열을 살해하였다.[12] 원열은 사후 가황월(假黃鉞)•태사(太師)•사주목•대사마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선왕(文宣王)'이라 하였다.

3. 참고 항목



[1] 계미년 기미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6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 10일이다. [2] 솔방울로 만든 단약의 일종. 도교에 따르면 복용하여 장수할 수 있다고 한다. [3] 정유년 을사월 무신일. 음력으로는 4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23일이다. [4] 정유년 무신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7월 16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18일이다. [5] 무술년 갑인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1월 29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24일이다. [6] 병오년 경인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1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9일이다. [7] 기유년 병인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1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5일이다. [8] 경술년 계미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6월 13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 23일이다. [9] 임자년 임인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1월 3일이고, 양력으로는 1월 25일이다. [10] 임자년 임자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11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31일이다. [11] 임자년 계축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532년 12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533년 2월 7일이다. [12] 청나라 말기의 경학가 왕선겸(王先謙)은 자신의 저서 《위서교감기(魏書校勘記)》에서 "《위서》의 해당 열전(列傳)에서는 원열이 단순히 "졸(卒)"한 것으로만 서술되어 있어, 마치 자연사한 것처럼 보이게 되어 당시의 실제 사건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는 편찬 과정에서 생략 또는 축약으로 인해 원열이 안 좋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흐려진 결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원열은 효무제의 경계와 의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죽음은 단순한 졸(卒)이 아니라 정치적 살해였음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라며 열전의 내용을 교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