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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옥새의 명문 상상도. 전국시대 서체 중 과두체를 고증했다. 원 말기 도종의의 저서인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에 실린 상상도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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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옥새( 傳 國 玉 璽)는 중화제국 사이에서 국가와 왕조를 이어 전승되어 온 옥새를 말한다. 전국새(傳國璽)라고도 한다.[1] 조칙 등 명령문서에 실질적으로 날인하는 인장이라기보다는 천자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이해하면 된다.[2]'전국(傳國)', 곧 '나라에서 나라를 이어 내려온 (옥새)'라는 이름답게 각 왕조들은 선양을 받든 찬탈을 하든 간에 가장 먼저 이 전국옥새부터 챙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구정과 함께 천자의 양대 상징이자 중국 역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 황실은 한고조 유방이 아직 나라를 세우지 못하였을 때 차고 다니다가 백제(白帝)의 아들이라는 흰 뱀을 죽였다는 참사검(斬蛇劍), 그리고 진왕 자영이 바쳤다는 전국옥새를 신물로 여겨 귀중하게 보관했다고 전한다. 또한 한문 고서에서는 참사검과 전국옥새를 아울러 일컫는 검새(劍璽), 또는 새검(璽劍)이란 어휘가 황제의 통치권을 가리키는 관용어로 쓰였다. 가령 삼국지연의에도 20대 제갈량을 새파란 애송이라고 관우와 장비가 무시하는 상황에서 조조군이 들이닥쳐 군령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 이때 군사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판단한 제갈량이 유비에게 청해 유비의 검새를 받자 그제서야 관우와 장비 둘이 유비의 전권을 부여받은 제걀랑을 마지 못해 따르는 장면이 나온다.[3][4]
2. 역사
2.1. 전설의 시작
《 한비자》 화씨(和氏)편에 의하면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옥장인이었던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얻은 희귀한 보석 화씨지벽에서 기원한다. 변화는 봉황이 내려앉는 형산에서 옥 원석을 채취해 초여왕(厲王) 분모(蚡冒)에게 바쳤다. 여왕은 옥공을 불러 옥을 감식하게 했으나, 그냥 돌덩이라고 하자 화가 난 여왕은 변화의 왼쪽 다리를 잘라 버렸다.여왕이 죽고 초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변화는 다시 그 옥을 헌상했다. 그러나 감정 결과는 이번에도 그냥 돌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고 화가 난 무왕은 변화의 오른쪽 다리마저 잘라 버렸다. 무왕이 죽고 초문왕(文王)이 뒤를 이었는데 옥 원석을 들고 통곡하는 변화의 사연을 알게 된 문왕은 사람을 시켜 다듬으니 진귀한 옥이 되었다. 문왕은 변화에게 보상으로 큰 상을 내리고 여생을 편안히 살게 해줬으며 그 옥을 '변화의 옥'이라는 뜻으로 '화씨지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5]
이 화씨지벽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친 뒤 결국 조(趙)나라 혜문왕에게 넘어갔는데 진(秦)나라 소양왕이 이를 얻으려고 성 열다섯 개와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인상여와 염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진시황이 조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이를 얻게 되었는데, 조나라에서 가장 먼저 챙겨온 물건이 바로 화씨지벽이었다고 한다.
2.2. 진나라
화씨지벽을 얻은 진시황은 재상 이사에게 명하여 통일 제국의 옥새를 만들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옥새에 새긴 문구는 受命於天, 旣壽永昌[6]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는 이사가 지은 문구로 추정된다.[7]화씨벽 자체가 희귀한 물건인데다가 신통한 능력을 지녔는데, 이것으로 옥새를 만들어서인지 전설에 의하면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진시황이 동정호를 순시하던 중에 호수에 광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고 하자 급히 호수에 전국옥새를 던졌더니 곧 광풍이 멎고 파도가 잠잠해져 사방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8년 뒤에 진시황의 신하가 화음을 지나던 중 어떤 이가 신하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서는 전국옥새를 바치면서 " 용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원래 주인께 옥새를 돌려드린다."고 말하여 옥새를 바쳤다고 한다. 진시황은 그 '원래 주인'을 자신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설이야 차치하고서라도 전설적인 보석으로 옥새를 만들게 한 일화는 진시황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의 '벽' |
2.3. 한나라
이후 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호해가 조고에게 피살당한 뒤 조고가 잠시 옥새를 가지고 있었다. 진나라가 망하자, 진시황의 손자 자영이 옥새를 목에 걸고 진나라 수도 함양 근처까지 진격해 온 한고조 유방에게 나아가 이 옥새를 바쳤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함양에 항우가 입성했을 때 자영은 죽임을 당했다. 옥새를 바친다는 것은 유방을 황제로 인정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이 소식을 들은 항우가 격분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어쨌든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를 세우면서 전국옥새는 한나라의 국새가 되었다. 그런데 전한 말기에 왕망이 한나라를 집어삼키려 할 때 이 옥새를 강탈했다. 왕망이 옥새를 강탈하고자 하여 심복 왕심 등을 보내 재촉하자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왕씨는 분노하여 옥새를 그들에게 집어던졌는데, 이 때문에 옥새의 모퉁이가 깨져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원후 왕씨는 비록 왕망의 친척으로서 그가 권력을 잡는 것을 도와주었지만, 그렇다고 한나라가 멸망하기를 바라진 않았기에 끝까지 옥새를 내놓지 않고 저항했다가 저런 일이 벌어졌다.[9]
경시제 유현이 보낸 왕헌의 군대에게 왕망이 피살된 후 옥새는 왕헌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경시제의 차지가 되었다. 이 다음 적미군이 장안에 쳐들어오자 그들이 옹립한 허수아비 황제 유분자가 이를 차지했으나, 이후 광무제 유수가 의양에서 적미를 격파하고 다시 이 옥새를 되찾았다. 광무제는 후한을 건국한 다음 금으로 옥새의 깨진 모퉁이를 때웠다고 한다. 바로 아래 삼국연의(1994)의 모조품에 재현된 옥새의 금으로 보수된 모퉁이는 광무제가 보수하였다는 기록을 반영한 것이다.
2.4. 삼국시대
후한 말기에 옥새는 다시 파란을 겪었는데, 반동탁연합군이 낙양으로 쳐들어오자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를 빙자해 도망가면서 낙양에 불을 질러 낙양이 폐허가 되었을 때 사라졌다.[10] 그러다가 반동탁연합군이 동탁이 버린 낙양을 점거하면서 분실된 옥새가 발견되었는데, 기록에 따라 이를 발견한 주체가 다르다. 오서와 산양공제기에 따르면 원술이, 후한서 원술 열전에 따르면 손견이 이를 발견하여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삼국지연의도 손견이 가져갔다는 설을 따른다. 계속해서 후한서에 따르면, 손견이 옥새를 가지고 돌아간 후 손책이 그 뒤를 잇자 원술은 손견의 부인 무열황후 오씨에게서 옥새를 뺏는다.[11]원술은 옥새를 바탕으로 칭제를 하였다. 그러나 주변 제후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상황이 위급해지자 원술은 원소에게 전국옥새를 보내 구원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조가 그 길을 막아버리고 원술을 죽여 그 세력이 흩어지게 된다. 원술에게 납치됐던 서구는 이 때 옥새를 손에 넣어 한나라 조정에 바치고 위위, 태상이 된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면서 전국옥새는 그대로 조위(曹魏)의 국새가 되었다.
참고로 상술했듯 전한이 멸망할 당시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원씨가 자신의 조카인 왕망이 한의 제위를 찬탈하는 것에 분노해 집어던진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후한이 멸망할 때도 마지막 황제인 헌제의 황후이자 조조의 딸이며 조비의 누이이기도 한 헌목황후 조씨 역시 자기의 오빠와 친척들이 헌제를 겁박하자 이에 분노하여 원후 왕씨와 똑같이 옥새를 집어던졌다. 역사가 기묘하게 반복된 사례. 삼국지연의의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옥새가 헌제(를 조종하는 조조)의 손에 들어간 이후 거의 처음으로, 그리고 작중 마지막으로 옥새가 언급된 부분이다.
이후 조위가 서진에 의해 265년 멸망하면서 전국옥새는 서진의 국새가 되었다. 참으로 기묘한 사실은, 후한의 권력자로서 구석을 받고 왕위에 올라 서서히 대를 이어 후한의 실권을 빼앗고 제위를 찬탈하며 전국옥새를 손에 넣은 조씨 들이, 자신들이 했던 똑같은 방식 그대로 조위의 권력자로서 구석을 받고 왕위에 올라 서서히 대를 이어 조위의 실권을 빼앗고 제위를 찬탈한 사마씨들에게 전국옥새를 빼앗겼단 사실이다. 전한과 왕망, 후한과 조조와 조비 부자, 그리고 진의 사마씨들을 생각해보면 역사가 그대로 재방송하듯 재현된 기묘한 일이었다.
2.5. 남북조시대 ~ 수당시대
서진이 전조 유총에 의하여 망한 다음에는 그에게 넘어갔다가 후조 석륵, 그리고 염위 염민을 거쳤다. 염민의 아들 염지는 이를 동진에게 넘겨서 다시 사마씨가 전국옥새를 되찾았다. 이후에는 남조에 대대로 계승되어 동진 - 유송 - 남제 - 양나라를 거쳤다. 양나라 때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사방이 혼란스러운 와중 시중이 옥새를 지닌 채 북조인 북제로 달아나 북제가 옥새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가 옥새를 차지하였다. 북주를 멸한 수나라가 옥새를 차지하였으나 다시 당나라가 옥새를 차지하였다.2.6. 오대십국시대
당나라가 몇백 년간 가지고 있었으나 10세기 후량의 주전충에게 망한 뒤 후량을 멸한 후당의 장종 이존욱이 가지고 있다가 명종 이사원, 민제 이종후를 거쳐 후당의 마지막 황제였던 말제 이종가까지 이어졌다. 그는 937년 내분으로 후진 태조 석경당이 요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수도 낙양에 쳐들어왔을 때 현무루에 불을 질러 그의 일가가 분신 자살할 때 전국옥새를 품에 안고 있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전국옥새에 대한 기록은 끊기고 만다.[12]낙양에 입성한 요 태종은 즉시 전국 옥새의 소재를 찾았으나, 그 행방이 묘연했다. 이에 당황한 요 태종은 군을 동원해 이종가가 최후를 맞이한 현무루의 폐허와 낙양 황궁 전체를 수색했지만, 옥새는 나오지 않았다. 연운 16주만이 아니라 중국 전체를 통치할 야망을 품고 있던 요 태종은 후진을 괴뢰국으로 두고 전국 옥새를 손아귀에 넣어 중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후진의 석경당을 시켜 새로운 옥새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받는 것으로서 정통성을 얻으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다만, 이때 석경당에게 받은 옥새는 요가 송과 분쟁을 벌일 때에 왕조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후일 천조제가 금 태조에게 항복할 때, 금 왕조에 넘어갔다.
이후 여러 차례 전국 옥새를 찾았다는 사람이 나왔으나 전부 진품이 아니라고 판정되었다.
2.7. 송나라
오대십국 당시 전국옥새는 이미 실종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후 세워진 송나라의 태조(조광윤)과 태종(조광의)은 자체 옥새를 새겼다.남송이 애산 전투에서 패망하던 날 송 왕조 최후의 재상이 송의 마지막 황제를 안고 바다에 투신할 때에 함께 갖고 갔다고 알려져 있다.[13] 그보다 앞서 임안부가 몽골군에 함락될 때 송 공종의 태황태후 사씨(謝氏)가 감찰어사 양응규(楊應奎)를 보내 항복할 때 바친 '전국새인'이 있었는데, 이건 과거 송 태조, 송 태종이 스스로 제작한 전국옥새의 대체품이었다. 그외 송사에는 송철종 때인 1096년에도 전국옥새가 발견되어 연호를 바꾸는 등의 행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후대에는 이 역시 가짜라고 본다.
2.8. 명나라
명사의 지(志) 44권에 따르면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홍무 원년(1368)에 어느 백성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아름다운 옥을 바쳤기에 이를 옥새로 만들었는데 진시황이 남전에서 캔 옥, 혹은 화씨지벽으로 전국옥새를 만들었다던 고사를 따른 듯하다.홍치 13년(1500). 전국옥새를 서안에 거주하던 한 군인이 발견했다는 보고를 섬서도어사 웅충(熊翀)이 올렸다. 그러나 당시의 예부상서 부한(傅瀚)은 이를 위조된 물건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전국옥새의 신빙성 그 자체와 정당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생각건대, 도장(璽)의 쓰임은 문서를 식별하고 위조를 방지하는 것이지, 보물로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시황이 남전(藍田)에서 옥을 얻어 도장을 새긴 이래, 한나라 이후로 이것이 전하여 쓰였습니다. 이로부터 꾀와 힘으로 (전국새를) 다투어 취하고는 말하길, 이 도장을 얻으면 곧 천명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도장이 없으면 몹시 부끄러워하며 천명이 떠나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은 천명은 덕으로 받는 것이지, 도장으로 그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전국새를 구해도 못 얻자, 스스로 새겨 위조함으로써 애써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혹시 이를 얻으면 진나라 옥새라며 떠들어대며, 임금과 신하가 기쁜 낯빛을 하고, 거듭 잔치를 벌이고, 두루 제사를 지냄으로써 천하에 과시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 년 동안 웃음을 살 일입니다.
여러 성왕이 서로 잇고 조상의 가르침에 따른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옛 도장 없이도 천명을 받고 장수번창하는 복을 여전히 성대하게 내려받았습니다. 황상께서는 큰 덕을 무성히 내리비추고, 천명을 게을리하시지 않고, 성스러움이 지극하시어 만복에 이르고, 종사가 존안합니다. 참으로 도장으로부터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을 기다리시지 않아도 족합니다.
부한이 보기에 정권의 정당성을 보다 더 안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은 전국옥새 따위가 아니라 현 왕조의 선례와 도덕성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부한은 이 사안을 조용히 덮자고 주장하였다.이들이 알지 못한 것은 천명은 덕으로 받는 것이지, 도장으로 그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전국새를 구해도 못 얻자, 스스로 새겨 위조함으로써 애써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혹시 이를 얻으면 진나라 옥새라며 떠들어대며, 임금과 신하가 기쁜 낯빛을 하고, 거듭 잔치를 벌이고, 두루 제사를 지냄으로써 천하에 과시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 년 동안 웃음을 살 일입니다.
여러 성왕이 서로 잇고 조상의 가르침에 따른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옛 도장 없이도 천명을 받고 장수번창하는 복을 여전히 성대하게 내려받았습니다. 황상께서는 큰 덕을 무성히 내리비추고, 천명을 게을리하시지 않고, 성스러움이 지극하시어 만복에 이르고, 종사가 존안합니다. 참으로 도장으로부터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을 기다리시지 않아도 족합니다.
미천한 자들은 지금 이
섬서 지방에서 나온 옥새를 곧 하늘이 내린 신부(神符)라고 여기어 번갈아 바치며 아첨한 것입니다. 대개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스스로 알지 못하였을 뿐이니, 지금은 내탕고(內府)에 보관하여 한가할 때의 구경거리 삼음으로써, 성덕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으시옵소서. 신 등의 가장 지극한 바람이옵나이다.
황제는 부한의 제안을 따랐다. 옥새를 찾은 군인은 적당한 보상을 받았고, 웅충의 관직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14]명나라 시기에 나온 이 전국옥새 소동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즉 명청시대에 이르면 중국 조정을 이끄는 이들도 이러한 전국옥새가 지닌 서상을 통치의 정당성으로 삼을 필요가 없으며 이런 전국옥새 류의 서상보다 왕조의 업적에서 정통성이 나온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부한 자신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겠지만, 정당성을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의 정치에서 찾자는 얘기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었다. 이뿐 아니라 당대 중국을 이끌던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이미 16세기에 전국옥새라는 물건이 실은 여러 왕조들을 거치며 윤색되고 부풀려진 전설임을 인식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이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수용될 정도가 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물론 옥새의 기나긴 역사와 전설의 후광이 워낙 대단했기에 그걸 이용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음도 알 수 있다.
2.9. 그후
그 외 원세조도 1294년에 전국옥새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924년 북경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펑위샹은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나라 소조정을 해체하고 선통제를 자금성에서 축출하였다. 이때 섭정내각은 청실이 전국옥새를 숨겼다고 믿고 순순히 내놓으라고 위협했지만, 당연히 청실은 전국옥새는 청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에 잃어버려서 자신들은 모른다고 해명했다. 이에 섭정내각 측은 더 이상 전국옥새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청실의 사유재산을 압수하였다.
1951년에는 중화민국의 외교관 차오수밍(曹樹銘)이 뉴욕 맨해튼에서 미국인에게 전국옥새를 샀다며 각국에 홍보한 적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국공내전 패배 이후 중화민국의 중국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중화민국 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여겨진다.
3. 서구학자들의 전국옥새 허위설
Rogers가 The Chronicle of
Fu Chien[15]을 번역하면서 4세기 옥새의 행방에 대한 생각을 적어두었다. 여기서 그는 찬양으로 범벅된 중국 기록에 너무 의존한다며 자신은 이 옥새에 관련한 어떠한 기록도 믿지 않는다고 적었다.
(중략)
Rogers는 또한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이 모든 것은 전한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광무제의 농간이라는 의견도 언급했으며 사실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주장이다. 왕태후 열전에 적힌, 왕태후로부터 옥새를 빼앗으려 했다는 왕망의 행동은 광무제의 입맛에 딱 맞는 프로파간다의 성질이 있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
(중략)
Rogers는 또한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이 모든 것은 전한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광무제의 농간이라는 의견도 언급했으며 사실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주장이다. 왕태후 열전에 적힌, 왕태후로부터 옥새를 빼앗으려 했다는 왕망의 행동은 광무제의 입맛에 딱 맞는 프로파간다의 성질이 있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
호주의 중국사학자인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다른 서양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빌어 전국옥새 자체는 사실 광무제가 만든 것이고 진시황이 만든 전국옥새라는 물건은 사실은 그 실체가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크레스피그니는 서양에서 후한사의 권위자이다.
'전국옥새'라는 물건이 실은 후대인들이 정통성을 얻는 서상(瑞祥: 상서로운 조짐)의 도구로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의견이 예전부터 있었다. 사기 같은 전한대의 기록에서 진시황의 아들 자영이 한고조 유방에게 옥새(玉璽)를 바쳤다던가 하는 내용은 있지만, 그것이 대대로 보관되었다거나 왕권의 상징물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국새'란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후한대에 쓰인 한서이다. 여기서 한전국새(漢傳國璽)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진왕 자영에게 받은 이래로 대대로 한나라 한실에서 물려온 옥새라는 것, 그리고 왕망이 넘겨줄 것을 요구할 만큼 어떤 상징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한서에서는 전국새가 최종적으로 광무제에게 넘어갔다고 묘사된다. 전국새를 경시제 유현이 획득하였고, 이후 적미군의 유분자가 얻었으며, 마침내 광무제가 받았다고 언급하는 것이다.
전국옥새를 특별한 보물로 묘사하는 기록은 서경잡기(西京雜記)이다. 전국옥새와 한 세트처럼 묘사되는 참사검(斬蛇劍)[16]이 아무리 봐도 일개 정장 출신이었던 한 고조가 거병 때부터 지녔다는 검치곤 너무나도 화려하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전국옥새 역시 참사검과 세트로 만들어진 물건일 가능성이 있다. 서경잡기는 전한말에 집필되었으나 동진 갈홍 시대에 '재편집'되었다고 하므로, 기록이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전국옥새의 소지자가 정통 왕조를 계승한다는 개념과 이른바 전국옥새라고 광무제가 주장한 (금으로 일부를 때운) 실물 후한옥새는 후한이 들어서면서 광무제가 처음 만든 것이고, 후대 왕조들 역시 이 개념을 이용했으며, 나중에는 옥새 자체의 신성성에 대한 전설을 만들었으리라는 것이다. #
또한 신성하고 상서로운 물건이라는 전국옥새 개념은 후한 이후엔 애초에 후한옥새를 가지지 못한 유비의 촉과 손권의 오에서 먼저 나타나고, 서진 멸망 이전 북쪽 위진에서는 이런 전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도 후대에 이들 왕조에서 전국옥새라는 상서로운 물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거리가 된다. #
크레스피그니는 이후 왕조들에서 묘사하는 전국옥새의 문구가 제각각이라고 설명한다.
위소의 오서에 따르면 손견이 찾은 옥새에 적혀있던 것은 "受命于天 旣壽永昌"인데 우희의 지림에 따르면 "受命于天 旣壽且康"이라 적혀있어야 하니 맨 마지막 두 글자가 永昌인지 且康인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위소는 옥새가 적국인 서진에 있을 때인 273년에 오나라에서 죽었고, 우희는 4세기 초반기의 동진에 살았는데 이때 옥새는 북쪽 어딘가에 있었다. 따라서 두 학자 모두 실제 옥새를 못 보고 이 내용을 기록한 것이며 뭐가 맞는지 파악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북조의) 5세기 학자
최호는 저서에서 한서에 "昊天之命 皇帝壽昌"이라고 적혔다고 기록했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한서에 이런 문구는 없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
크레스피그니의 학설에 의하면 실상 후대 왕조들에서도 전국옥새가 하나만 있었다고 보기엔 그리 묘사가 일관적이지 않다고 한다. 이는 애초에 후한시기에 만들어진 전국옥새라는 개념을 후대 왕조들이 이어받긴 했어도, 그 원형격인 후한옥새의 행방은 서진 멸망 후 영 불분명했고 때문에 각 왕조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전국옥새상(像), 전국옥새 실물들을 만들어냈다는 설명이다.
4. 대원전국옥새(大元傳國玉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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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대원전국옥새(大元傳國玉璽)의 모습[17]. |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화 왕조를 자처하기 시작하면서 쿠빌라이 칸(원 세조)이 붕어하자 승상 바린 바얀은 전국옥새 및 여러 대체품들을 참고하여 새로 도장을 팠고, 이것이 대원전국옥새의 시작이 되었다.
원명교체기에 명군은 북벌을 했고, 주원장은 원나라가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대도( 베이징)를 함락시키면 옥새부터 챙기라"고 장수들에게 명령했으나, 원 순제는 잊지 않고 대원전국옥새를 가지고 북으로 달아났다.
이 옥새는 나중에 원이 북쪽으로 쫓겨 가면서 쭉 옥새로 쓰다가 후금(아이신)이 차하르부 몽골을 점령했을 때에 홍타이지가 에제[18]로부터 넘겨받았고, 이를 근거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으며, 홍타이지 이후 역대 청의 황제들은 자신을 만주의 한이자 동시에 몽골의 대칸이라고 자처했다.
청 왕조 멸망 이후에는 중국을 할거하던 여러 군벌들이 서로 옥새를 가져가기 위해 각축을 벌였고[19] 중국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으나 국공내전으로 장제스가 대만으로 후퇴하면서 주요 유물들을 대만으로 이송할 때 같이 가져가면서 현재는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5. 창작물
주로 진나라에서 만들어져 한나라를 거쳐 가며 그 이야기가 정립된 만큼, 한나라와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이나 창작물에 많이 등장한다. 특히 전국옥새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나 그로 인한 다툼이 주가 되는 편.영상에 등장할 때는 일반적인 도장보다 훨씬 큰 커다란 돌덩이 모양새로 등장하며, 왕망이 찬탈하던 당시의 일화를 반영하여 한 쪽 모퉁이가 부서져 이를 금으로 떼워 보수한 것을 고증한다.
또한 최근의 현대 매체로 올수록 전국옥새가 지니는 전통적인 의미보단, 실질적인 가치나 권력, 힘 등에 주목하는 현대의 세태나 분위기를 반영하여 "막강한 정통성을 지닌 권위와 권력의 상징" 보다는 "이런 도장보단 실질적인 힘과 이데올로기와 권위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상술한 최근의 전국옥새와 관련된 연구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5.1. 84부작 삼국지
5.2.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여기에선 전국옥새가 2개로 등장한다. 하나는 손견-손책-원술을 거쳐서 다시 조조의 손으로 들어온 잘 알려진 옥새고, 다른 하나는 양양의 한 어부가 우연히 건져서 유비에게 바친 옥새다. 유비의 옥새는 과거 한나라 황실이 어지러울 때 잃어버린 옥새로, 조조의 옥새는 이후에 새로 만든 것이란 설정이다. 전국옥새가 2개란 설정은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 처음 등장한다.5.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의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매력을 100으로 만들어주는, 혹은 세력의 명성을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2에서는 신용도를 올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만큼 신용도를 100으로 만들어주는 옥새가 아이템 중 가장 효율이 높기에 이걸 얻기 위해 낙양을 함락했다가 다시 후퇴해서 다른 세력에게 일부러 넘겨주고 다시 침공하는 노가다 플레이가 이어지기도 했다. 삼국지 9에서는 화씨벽과 전국옥새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삼국지 시리즈에서 옥새가 남전옥으로 만들어졌다는 전승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도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조조전에선 무조건 회심공격으로 바꿔주는데, 회심공격 100% 방어인 황금갑옷과는 극상성. 다행히 원판 적 중에서는 원담만 착용하고 있다. 삼국지 13에서는 전국옥새는 이벤트에서만 등장[20]하고 보물로는 등장하지 않으며, 화씨지벽은 3600원짜리 보물로 등장하지만 다른 옥 계열[21]처럼 속성 레벨업을 해 주는 기능은 없다. 그냥 보물.5.4. 신삼국
드라마 삼국에선 6화에서 동탁의 장안 천도 후 낙양성 폐허에서 손견이 발견하는 것으로 등장한다.손견이 옥새를 얻고 야망을 불태우자, 손책과 황개를 비롯한 장수들은 축하를 하지만 이것에 대해 어린 손권은 이걸 만든 진시황은 2대밖에 못갔다는 식의 말을 하며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데 낙양에서 연합군 해산 이후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따로 만난 조조도 소문이 정말이라면 그건 지금 가지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돌멩이이며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을거라는 우려의 말을 하였고, 이는 손견의 죽음의 복선이 된다. 낙양의 첩보원으로부터 손견이 옥새를 획득했다는 정보를 얻은 원소와 원술은 옥새를 손에 얻기 위해 미리 군사들을 매복하고 손견이 작별 인사를 하러 들어온 순간 매복한 군사들을 불러 손견에게 연합군의 맹주로서 옥새를 맡아 놓는다란 명분으로 내놓을 것을 주장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를 예상해 수하들을 매복했던 손견에게 역으로 위협당해 그 자리에서 얻는건 포기한다. 결국 원소와 원술은 평소 손견과 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유표를 시켜 손견을 뒤통수 쳐서[22] 죽임으로서 손권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23]
이후 손책이 갖고 있다가 주유의 권고로 원술에게 넘어가는 건 연의와 동일하며, 원술은 손책에게 정보, 황개, 한당, 조무 네 장수를 내준다.[24] 이후 이걸 갖고 나이 든 책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변 부하들의 추대에 중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지만, 주변 제후들의 비웃음만 사고 황명을 띄고 쳐들어온 유비에게 털린다. 원술의 자살 후 유비는 5만 군사를 가지고 서주를 먹고 옥새에 주령, 노초를 붙여 조조에게 보낸다. 그리고 이 희대의 통수를 당한 조조는 두통으로 기절한다.
재미있게도 삼국을 세운 조조와 유비, 손견을 제외한 손씨 일가들은 의외로 전국옥새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다못해 아예 돌덩이라고 지칭할 정도다. 손견이 전국옥새 일로 다투고 떠나려 할때 손권이 손견에게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고 지적한 것은 앞서서 설명했고, 조조는 "만약 자네가 그 옥새를 가지고 있다면 그 돌덩이는 자네에게 화가 될 것이네."라고 우려를 표했으며 유비는 옥새를 끌어 안고 죽은 원술을 바라보면서 "이 전국옥새란 돌덩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인가?"라고 씁쓸한 말을 남긴다. 주유도 원술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손책에게, "사내라면 칼을 들어야지. 그깟 돌덩이를 갖고 뭐하겠나?"라고 한다. 나중에 유비에게 달랑 전국옥새만 반환받은 조조가 "내가 이딴 돌덩이를 받아서 뭐에 쓰겠냐?"는 식으로 화를 낸 것을 볼 때 이 작품에서는 '전국옥새라는 것은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품 후반부를 보면 화흠이 헌제를 협박할 때 조휴가 부보랑 조필을 죽인 내용이 나오는데, 조필을 죽이고 뺏은 옥새가 이전에 나오던 전국옥새가 아니라 다른 엉뚱한 도장이 나와서 김이 좀 샌다. 그러나, 애초에 현대 사학자들이 고증한 바와 같이 전국옥새라는 게 실은 별 거 아닌 물건임을 지속적으로 나타난 본작이니 만큼 애초에 전국옥새라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의도된 연출일 가능성도 있다.
이 옥새의 모양이 허니브레드와 닮다보니 일부 삼국의 마니아들은 허니브레드 옥새라고 부르며 각종 드립과 짤방을 생성했다. 거기다 하필이면 삼국지 연의에서 원술=꿀물 이미지가 박히는 바람에 '꿀'물과 '허니'브레드를 이용한 옥새 드립은 더욱 더 흥했다.
5.5. 초한지: 영웅의 부활
진왕 자영이 유방할 때 항복할 때 전국옥새를 바치는 장면과 홍문연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전국옥새를 주는 장면이 묘사된다.5.6. 대군사 사마의
삼국시대를 다룬 창작물이니만큼 역시 등장한다.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을 때 유협이 조비에게 옥새를 쥐어주면서 나온다. 자세히 보면 한 귀퉁이를 금으로 때운 것 역시 재현되어 있다.다만 주인공인 사마의와 그 일가는 조위 내부의 사람들이고, 이미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지 오래인 조조와 주변인물들은 옥새가 있든 말든 이미 실질적인 차기 권력자는 조씨 일가라 보기에 전국옥새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실제로 등장하는 장면 역시 저게 전부다.
조조가 실권을 쥔 후한 황실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 역시 이미 사마의 등 주인공의 활약하는 시점에선 과거의 일이고, 이 작품은 극의 전개를 위해 유비마저 공기가 된 작품이라 동탁 시절부터 손견 부자, 원술, 유비를 거쳐 돌아오는 내역은 아예 빠졌다.[25]
5.7. SD건담 삼국전
SD건담 삼국전에서는 황금색의 용 머리를 하고 있으며 이 옥새를 숙주 삼아 사후(사신)의 계승자들한테 반응하여 사후의 진정한 힘을 해방시킨 모습인 신의 전차이자 천옥의 갑옷 천옥개를 소환하는 아이템으로 나온다. 보면 역대 삼국지 창작물의 전국옥새 중 비중이 가장 높았다. 악역 캐릭터가 쓸 경우는 천옥개 소환 대신 일시적으로 자신의 파워업을 이루나 대신 영혼을 빼앗기는 리스크가 있다. 또한 코믹스판에서만 나오고 애니판에는 나오지 못한 어둠의 힘의 원천인 검은색의 암흑옥새들(다해서 세개가 있는데 곽가 버사고, 가후 아슈타론, 방통 야크트도가가 각각 갖고 있다.)의 본체이자 근원인 암흑옥새 사이코 건담[26]이 존재한다. 사마염이 옥새상 앞에서 암흑의 기운을 느끼자 암흑옥새 사이코 건담이 나오려고 했고 어둠의 기운으로 인해 조비, 기가국의 신료들이 죽거나 좀비화되었다.[27] 이후 오장원에서 암흑옥새 사이코 건담, 사마사 페넬로페, 사마소 크시, 사마염 자쿠2는 사마의 사자비에 의해 치우 노이에 질에게 제물로 바쳐져 치우의 세뇌를 당한 다음, 강제로 치우의 몸에 빙의 및 흡수를 당하고, 그렇게 그 4명을 제물로 삼아 본인의 육체와 힘의 일부이자 하나로 만든 치우는 전신합신 치우 건담으로 각성하여 부활한다.5.8. 토탈 워: 삼국
삼탈워에서는 손견이 들고 시작하는 유니크 장신구로 등장한다. 장착한 캐릭터의 권위 스탯을 대폭 증가시켜주는 것 뿐만 아니라 아이템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도 장착한 캐릭터가 속한 세력의 위신을 올려준다.[28] 가장자리가 깨져서 금으로 때운 것까지 고증되어 있다.
손견 트레일러에서는 낙양의 폐허에서 손견이 옥새를 발견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배신당한 천하 트레일러에서는 손책이 옥새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등장했다.
손견 사후 캠페인에서는 보통 원술이 장착하고 나온다. 원래 권위가 주 스탯인 지휘관인데 옥새까지 들고 있으면 원술이 지휘하는 부대는 사기가 굉장히 높아진다.
5.9. 매직 더 개더링
삼국지 컨셉의 Portal Three Kingdoms에서 Imperial Seal이라는 이름의 카드로 구현되었다. 성능은 흡혈귀 가정교사의 집중마법 버전. 원본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각 포맷에서 금지/제한이라 빈티지와 커맨더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며, Portal Three Kingdoms가 물량이 적다보니까 이 카드의 시세 또한 안드로메다.5.10. 대항해시대 온라인
5성 보물 유형 발견물로 구현되었다. 전국옥새를 발견하려면 먼저 다음 발견물을 찾아야 한다. 괄호는 퀘스트를 받는 항구.- 자치통감: 탐색 3, 고고학 5, 중국어 1 (한양)
- 원융: 탐색 11, 고고학 13, 자물쇠 따기 11 (자카르타)
- 제갈궁노: 탐색 11, 고고학 13, 자물쇠 따기 11 (자카르타)[29]
- 앵가석: 탐색 5, 고고학 7, 중국어 (리마)
- 대남 지도: 탐색 10, 보물 감정 12, 자물쇠 따기 10 (자카르타)
- 칠색시지미타테하 나비: 생태 조사 5, 생물학 7, 스페인어 (산토도밍고)
- 매머리잉꼬: 생태 조사 5, 생물학 5 (개척지 서고 지도)
- 오색청해 잉꼬: 생태 조사 5, 생물학 5 (베네치아 서고 지도)
- 은청색 금강앵무: 생태 조사 5, 생물학 7, 마야어 (산토도밍고)
- 금강앵무: 생태 조사 8, 생물학 10, 스페인어 (리스본, 암스테르담, 제노바)
- 보라빛 금강앵무: 생태 조사 8, 생물학 10, 스페인어 (포르토벨로)
- 키리프스모르포: 생태 조사 9, 생물학 11, 마야어 (산토도밍고)
- 임페리얼호랑나비: 생태 조사 12, 생물학 15, 생존 5 (알렉산드리아)
전국옥새를 찾는 첫 번째 연퀘는 선행 발견물을 모두 찾으면 중국어만 필요하며, 탐색 11/고고학 13/자물쇠 따기 11을 요구하는 '가족' 퀘스트를 완료한 뒤 보물 감정 13을 대신 요구하는[30]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 퀘스트를 진행한 뒤 중경 남서쪽 필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항온에서 왕망은 효원황후가 던진 옥새를 쓰지 않고 새로 옥새를 만들었으며, 기존 옥새는 다른 사람이 금으로 깨진 부분을 때운 뒤 금을 옥새 전체에 씌웠다는 설정이다.
6. 외부 링크
전국옥새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7. 관련 문서
- 구정(九鼎)
- 국새 황제지보 - 대한제국의 옥새로, 6.25 전쟁으로 분실되고 재발견된 2013년까지 63년 동안 전국옥새처럼 환상의 존재였다.
- 삼종신기
- 천사옥대
- 천자
- 화씨지벽
- 황제
- 성 이슈트반 왕관
- 운명의 돌
- 다고베르의 옥좌 (Dagobert's throne) - 7~9세기에 만들어진 프랑스의 옥좌로 프랑크 왕국을 거쳐 나폴레옹 시기까지 옥좌로 쓰였다.
[1]
한국사에는 이와 비슷하게 왕조에서 왕조로 이어지는 천명을 상징한 물건으로
천사옥대라는 허리띠가 있었다.
[2]
실제로 사용하는 인장으로는 천자 3새, 황제 3새라는 옥새 6과가 있어서 사무 목적에 맞추어 6과 중 하나를 날인하였다고 한다.
[3]
일본 황실에서도
삼종신기 중 검과 곡옥을 검새(劍璽)라 칭하는데, 이 개념이 일본까지 넘어왔음을 알 수 있다.
[4]
한편 전국새와 한 세트로 취급받던 고조 유방의 참사검/또는 적소검(赤霄劍)은 한 황실의 가보로서 보관되다가
진서
장화전에 따르면
서진시대에 무고(武庫) 화재로
왕망의 옻칠한 수급과
공자의 신발 등과 함께 소실되었다.
[5]
한비자의 저자
한비는 이 이야기에서 자신을 화씨지벽으로 비유하며 세상에 쓰이기를 기원한 것으로, 이러한 뜻을
간파한 시황제는 그를 등용하였다.
[6]
수명어천, 기수영창: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리라.
[7]
그 외에 다른 설로는 수천지명황제수창(受天之命皇帝壽昌,하늘의 명을 받았으니 황제는 장수하고 창성하리라)라고 썼다고도 한다.
#
[8]
예로부터 질이 좋은 옥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9]
하술하지만 공교롭게도 이후 왕망을 물리치고 세워진
후한이 멸망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10]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탁이 집권하기 전에 재임한 황제인 영제가 옥새를 분실했다.
[11]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의견에 따르면 "도자기 만드는 관청(甄官)의 우물에서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 반면 손견이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기회나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참십자가의 조각이나
롱기누스의 창과는 다르게 이런 물품은 명인이 아니고서야 못 만드는 물품이었다. 손견, 혹은 더 가능성이 높은 원술이 이런 물건을 미리 준비해서 낙양에서 발견한 척 쌩쇼를 했다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이런 물품을 준비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며 중간에 계획이 들통나거나 잘못될 가능성은 너무 컸고 그 경우 겪어야 할 창피함은 너무나도 컸다. 그렇다면 그냥 손견이 옥새를 찾았거나 아니면 숨겨진 위치를 아는 사람이 손견한테 넘겼다고 보는 게 받아들이기 쉬운 편이다."라고 한다. 즉 전국옥새가 우물속에 잠겨서 상서로운 빛을 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것. 애초에 전국옥새 개념은 후대 사학자들에게는 전설로 취급받다보니 그냥 크레스피그니의 의견처럼 후한 황제가 쓰던 도장이 어쩌다 손견에게 들어왔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12]
이존욱이 자살하면서 전국옥새를 산산조각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13]
독일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소설가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이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4]
명실록 홍치 13년(1500) 7월 24일 3번째 기사
#
[15]
'Fu Chien'은
전진(前秦) 황제 '
부견(苻堅)'의 휘를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으로 쓴 것이다.
[16]
한고조 유방이 거병할때 차고 다니다가 진나라를 상징하는 백제(白帝)의 흰 뱀을 죽였다는 전설적인 검이다.
[17]
몽골 제국 원 왕조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진나라 전국옥새 이후 만들어진 옥새 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이다. 무려 700년 이상 된 유물로 대만 정부도 지금까지 딱 한 번만 공개했고, 이후로는 공개하지 않고 대만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
[18]
린단 쿠툭투 칸의 아들로 북원 나아가 몽골 최후의 대칸이다.
[19]
핍궁사건에서 펑위샹은 전국옥새를 내놓으라고 선통제를 으르면서도 어째 대원전국옥새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족 왕조인 진나라의 '진품'이 아니라 몽골족 왕조인 원나라의 '모조품'이라서 별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것일까,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일까.
[20]
"사라졌던 옥새가 낙양에서 발견되어 ○○(그 시점에서 낙양을 차지하고 있는 군주)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란 메시지가 뜨고 그걸로 끝이다.
[21]
청옥은 수영, 홍옥은 공성 등...
[22]
유표는 우리가 좀 많이 사이가 좋진 않았어도 원가놈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손견에게 싸우는 척 하면 적당한 때에 보내주겠다 하고 원술에겐 거짓으로 손견의 저항이 심해 놓치고 말았다며 보고하고 대신 손견에게서 다시는 형주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지만, 손견군이 함선으로 이동하던 도중 기습을 한다.
[23]
정작 손견은 기습을 당하기 전 배에서 이동하는 도중 유표의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고 사람을 다시 보았다면서 서로간의 다툼으로 인해 강제로 억류한 재산들을 호의의 표시로 다시 되돌려주려고 마음 먹었을정도로 유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24]
정사나 연의에선 조무는 이미 죽었지만 여기선 사수관 전투가 삭제되었기에 등장한다. 다만 이후엔 단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25]
애초에 유비의 직접 등장 조차 극 초반 말고는 없고 손견 부자나 원술 등 사마의 이전 세대의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26]
평상시에는 거대한 검은 용의 옥새 안에 잠들어 있지만 봉인이 해제되면 안에서 사이코 건담이 나온다.
[27]
여기서 정욱 와이즈와라비가 죽고 강유는 상국으로 도주한다.
[28]
위신 +25. 이거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 하나짜리 세력이 황제나 왕을 자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음 세력 등급을 더 빠르게 해금할 수 있고 휘하 장수들의 만족도 관리가 한층 수월해지기 때문에 매우 유용한 아이템 중 하나.
[29]
원융 선행 발견물.
[30]
탐색 및 자따는 수치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