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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

홍덕영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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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월드컵 주전 수문장
홍덕영
(1954, 스위스)
오연교
(1986,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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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i13849438484.jpg
이름 홍덕영
洪德泳 | Hong Deok-Young
출생 1926년 5월 5일
함경남도 함흥시
사망 2005년 9월 13일 (향년 79세)
직업 축구 선수 ( 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선수 조선방직 축구단 (1951~1955)
감독 고려대학교 축구부 (1959~1962)
서울은행 축구단 (1969~1976)
대한민국 대표팀 (1970~1971)
행정가 대한축구협회 (1985~1986 / 부회장)
국가대표 25경기 ( 대한민국 / 1947~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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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력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

1. 개요2. 생애3. 그 후4. 플레이 스타일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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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광복 후 한국 축구의 1세대로 활약한 원로이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한국의 국제 경기 첫 승에 일조했다. 1954 FIFA 월드컵에서는 2경기 16실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2] 대표팀 내에서 가장 활약한 선수로 인정받았다.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김용식, 이회택, 차범근과 함께 선수로서 헌액된 4인 중 한 명이다.

2. 생애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8.15 광복 후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으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조선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당시 조선의 주전 골키퍼는 따로 있었는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대신 뛴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그냥 구경만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주전 골키퍼로 발탁되는 바람에 굉장히 무섭고 떨렸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1라운드였던 16강전에서 멕시코와 맞붙었는데, 결과는 한국이 5:3으로 승리했다. 멕시코 입장에선 상당한 코리아 쇼크라고 볼 수 있겠다. 독립한 지 3년도 안 된 나라의 축구 국가대표가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에게 승리했으니 엄청난 국위선양을 한 셈이다.[3]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얼떨결에 골문을 지키게 된 홍덕영 골키퍼는 한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

그러나 8강전에서 스웨덴0:12로 대패하면서 그의 첫 국제대회는 막을 내렸다.[4] 이 대패 기록은 [age(1948-01-01)]년이 지난 현재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실점 및 최다 스코어 차 패배 기록인데, 참고로 이 시기의 스웨덴은 '그레노리 트리오'가 이끄는 황금세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한국전에서 기록한 전체 슈팅은 무려 48개로, 홍덕영 골키퍼는 수많은 슈팅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12골이나 내주었다.[6][7] 이후 대승을 거두고 4강에 진출한 스웨덴 황금 세대는 자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한다.

2.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954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일본과 맞붙었는데, 당시에는 8.15 광복 직후였고 당연하게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매우 커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놈들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을 두 눈 뜨고 못 본다"라고 하며 일본대표팀의 입국을 매우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분위기는 몹시 살벌하여, 소문이 퍼지자 입국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2경기 모두 원정 경기로 치르기로 했다.

그렇게 치러진 최초의 한일전의 결과는 한국의 5:1 대승. 전반전에 일본에게 선제골을 내주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한국 대표팀 선수들을 조롱했으나 선수들은 이에 주눅들지 않고 내리 5골을 꽂아 넣으며 역전승, 일본을 떡실신시켜 버린다. 홍덕영 골키퍼는 당시 우리보다 축구 인프라가 훨씬 발달되어 있던 일본을 상대로 한국 응원단도 없는 원정 경기에서 90분 내내 1실점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 주면서 최후방을 든든하게 지키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원정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한국은 일본을 꺾고 월드컵 본선(16개국)[8]에 진출한다.

이후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9] 아시안 게임을 치르고 다음 달에 있을 대망의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508290348_01.jpg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경기 전 축구화를 수선하는 모습
그러나 처음으로 해외에 가게된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항공편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당시에 비행기를 타려면 20여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월드컵에 불참하게 될 위기를 겪었다. 남은 비행기 표도 얼마 없어서 선수들은 표를 모으는데 최선을 다했고 잉글랜드 출신 신혼부부가 티켓 두 장을 양보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10] 다행히 선수단은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했지만 46시간의 비행 이후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는 1차전 경기로부터 겨우 10시간 전이었고 선수들은 현지 환경이나 시차에 대한 적응조차 못한채 최악의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치러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니폼 제작업소가 선수들 유니폼의 등번호를 넣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걸 뒤늦게 확인한 선수들은 그 부족한 휴식 시간을 또 쪼개어 대회 관계자로부터 천으로 된 숫자를 구하고 유니폼에 박는 수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급하게 치르게 된 16강 조별리그 1차전의 상대는 하필 당대를 넘어 역대 최고의 축구 팀 중 하나로 평가를 받는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였다. 1952년 올림픽 축구의 챔피언이자 1954년 월드컵 전까지 28경기 무패행진 중이었으며 특히 바로 직전 평가전에서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7:1 대승을 거둔 우승후보 0순위 팀이었다. 그 선수진은 페렌츠 푸스카스, 산도르 코츠시스, 히데그쿠티 난도르, 요세프 보직 등 올림픽에서 만난 스웨덴의 그레노리 트리오를 능가하는 네임드들이 주를 이루었다.

결국 헝가리전의 결과는 0:9 패배였다. 후반전 도중에 무려 4명의 선수들이 탈진하거나 쥐가 나서 쓰러지는 바람에 고작 7명이 경기를 마무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1] 당시 홍덕영 골키퍼는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들을 일방적으로 받는 대단한 투혼을 보였기에,[12]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그의 활약에 감동하여 사인을 받아 가거나 한국 대표팀 숙소에 선물을 놔두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당장 한국을 9:0 이라는 무지막지한 점수차로 꺾은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가 '아시아의 듣보잡 팀, 그것도 전쟁이 끝난지 1년밖에 안된 나라의 팀을 상대로 고작 9골을 넣은 거냐!'라며 욕을 먹었을 정도다.

이후 2차전 터키전에서도 0:7로 패배하며 조기에 짐을 싸 귀국하게 되었다. 사실 터키는 당시 한국이 꼭 그렇게 크게 질 상대가 아니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1961년에 가진 터키 원정 친선경기에서도 0:1로 패배했던 것이나 같은 조에 편성된 서독이 헝가리에게 3:8로 패배했는데 터키가 그런 서독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패배한 것으로 봐도 당시 한국이 터키에게 이렇게 크게 질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지적응훈련은 커녕 경기에 지각할 정도로 늦게 온 데다가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에서 세계 최강 헝가리까지 무리하게 상대한 한국의 상황이라면 이해 못 할 결과는 아니다.

3. 그 후

1957년에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으로서 10여년 간 활동했다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자신이 선수로서 활약했던 고려대 감독을 맡아 활약했고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은행의 감독직을 맡아 활약했다. 1985년부터 이듬해인 1986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말년엔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발가락 절단 수술까지 하는 고생을 하다가 병세 악화로 2005년 9월 13일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그래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노환임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 신화를 달성하는 맹활약을 들으면서 "후배들이 원을 풀어줘 고맙다."라는 말을 남겼고, 세상을 떠난 해인 2005년에는 스위스 월드컵 당시 감독이었던 김용식 감독, 후배들인 이회택, 차범근, 공로 부문의 김화집,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7인 중 한 명으로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으니, 이렇게나마 오랫동안 응어리진 월드컵에서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그에게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반사신경을 바탕으로 슈퍼세이브를 기록하던 전형적인 선방형 골키퍼다. 그 외에 페널티 킥 선방도 꽤 잘하는 편이다. 단점은 키가 작아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것인데[13] 그래도 기막힌 위치 선정으로 단점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5. 기타

정치 경제학자인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이 그의 차남이다.[14] 2022년 1월 방영된 SBS 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의 이야기를 다룬 '출격 1954 -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편의 주인공 '홍덕영 씨'의 아들로 나와 아버지를 회고하는 증언자로 등장했다.

6. 관련 문서



[1] 고려대학교. [2] 안타깝게도 이는 역대 월드컵 한 대회 최다 실점 기록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것도 단 두 경기로... 그러나 이렇게 대량실점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며, 단순히 이 기록만을 보고 홍덕영의 실력을 평가할 수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3] 다만, 북중미 강호이긴 했으나 멕시코는 그 당시 월드컵에 나오면 그야말로 동네북 신세였다. 1930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13위 꼴찌였고, 당시 1948 런던 올림픽 이후로도 연이어 꼴찌 신세였다가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겨우 비겨 승점 1점을 얻었다. 월드컵 2라운드를 넘어선 게 한국과 마찬가지로 1970 멕시코 월드컵 때였다. 그리고 올림픽에서는 멕시코가 이상하게도 한국을 단 1번도 못 이기고 있다. 멕시코가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사상 첫 남자축구 동메달을 받을 때조차도 한국에게 0-0으로 비겼고, 한국과 올림픽팀 성적은 1948년 이후로 1승 4무 3패로 압도적으로 밀려있다. 그나마 가장 최근 경기였던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6:3으로 승리했다. [4] 저 당시 스웨덴도 "저런 나라한테 고작 12골밖에 못넣었냐"(...)고 욕을 먹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메이저 대회에서 자책골을 넣거나 PK 실축하는 선수들은 어김없이 살해 협박을 받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중남미 지역 국가인 멕시코는 과연 어땠을지... [5] 군나르 그렌, 군나르 르달, 닐스 드홀름. 특히 노르달과 리드홀름은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명문 클럽인 AC 밀란의 역대 베스트 11을 선정할 때도 자주 언급되는 선수들이다. [6] 이 기록은 2005년 인터뷰에서 홍덕영 선수가 직접 밝힌 기록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효 슈팅으로 와전되어 보도되고 있다. 만약 유효 슈팅이라면 수비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단 한 경기에서 무려 36개의 유효 슛을 막았다는 주장인데, 이는 골키퍼의 상징인 레프 야신도 소환할 수 있는 기록이라 상식적으로 전체 슈팅일 가능성이 높다. [7] 한국 축구 최악의 경기라 평가받는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기록이 슈팅 27개, 유효 슈팅 17개로 김병지가 이 경기에서 5실점이나 하고도 팬들에게 그의 인생 경기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홍덕영은 이에 2배 가까운 슈팅 수를 맞이한 것이다. [8] 객관상으로 대한민국의 첫 16강 기록은 이 대회이나, 당시는 월드컵 16개국 본선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였으며, 당시 피파는 1938 월드컵에서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무혈 입성 참패 탈락과 더불어 아시아 축구의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1938년 인도네시아의 15개국 본선(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 무혈입성 출전이 유일했고, 1950년 인도가 자격을 얻었으나 불참했던 만큼 실력의 가늠이 어려웠을 것이다.)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 없이 아시아끼리만 지역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대만은 기권하고 한국은 일본하고만 1차전, 2차전까지만해서 이기고 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고,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별다른 경쟁 없이 16개국 본선에 진출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54월드컵에서 한국이 헝가리에게 0:9, 튀르키예에게 0:7 참패를 당하며 탈락하자 피파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그 후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 아시아는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을 치러야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바뀌었고, 그 후 한국도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부터 24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었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24개국 본선부터 16강이 2라운드로 바뀌었다. [9] 과거의 아시아 축구에 대해서 동남아시아가 지금과 달리 잘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에도 상대 전적이나 대회 성적을 볼 때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한 수 아래였고 정말 상대하기 어려웠던 국가는 이스라엘, 중화민국, 버마로 추려진다. 즉,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선 버마가 해당된다. 1954년 아시안 게임 결승은 중화민국에게 패배했다. [10] 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우여곡절은 이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1] 당시 축구 규정은 골키퍼 외에 선수를 교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수 교체 제도는 그로부터 16년 뒤에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이탈리아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던 마지막 월드컵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과의 16강 조별리그 경기를 치르던 도중 선수 1명이 부상을 당해 10명으로 치러야 하는 악조건까지 겹친 끝에 결국 북한의 박두익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패배하여 8강 진출 실패를(9등 탈락) 겪기도 했다. [12] 특히 푸스카스의 슈팅 파워가 크게 충격적이었는지 2005년 인터뷰에서도 푸스카스의 슛이 골대를 맞을 때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가 있은 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평생을 기억한 것이다. [13] 신장이 170cm를 조금 넘는데 사실 당시 한국인 기준으로는 상당한 장신이었다. [14] 홍덕영 옹의 부고 당시 선친을 회고하는 인터뷰이로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