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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7:14:47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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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상진 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4년 12월 7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농소면 지당리
(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1] 지당마을)
사망 1921년 8월 11일 (향년 36세)
경상북도 대구부 대구형무소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마을 등운산
본관 밀양 박씨[2]
자 / 호 기백(璣伯) / 고헌(固軒)
부모 아버지 박시규(생부)·박시룡(양부)
학력 양정의숙 전문부 ( 법학· 경제학 / 졸업)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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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김좌진, 홍범도, 김원봉, 박용만, 김홍일, 지청천, 이범석, 양세봉 등과 함께 무장독립투쟁의 대표적 인물 중 1명으로 꼽힌다. 잊혀진 영웅!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KBS 역사스페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84년( 고종 21) 12월 7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농소면 지당리(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지당마을)[3]에서 아버지 간운(磵雲) 박시규(朴時奎, 1861 ~ 1928. 2. 25)[4]와 어머니 여주 이씨(1856 ~ 1918. 12. 12)[5]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운담(雲潭) 박시룡(朴時龍, 1852 ~ 1930. 10. 15)[6] 입양되었다. 그의 조부 송은(松隱) 박용복(朴容復, 1824 ~ 1884. 1. 12)[7]은 1870년(고종 7) 식년시 진사시에 3등 88위로 입격하였던 인물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5년 일제 명성황후 시해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8]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 의식을 키웠다. 1906년 양정의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법률학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신돌석(申乭石)과 의형제를 맺었다.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거부하고 부임치 않았다. 1912년 대구 김덕기(金德基), 전주의 오혁태(吳赫泰)와 함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9]를 설립해 곡물상을 가장하여 독립투사들의 연락처로 삼고 군자금 마련에 주력하였고 1914년 부진한 대구 포목상을 정리하고, 허위의 아들인 허학 등 일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가입하였다. 1915년 1월 유림들을 규합해 대구 비슬산에 있는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으며 7월에는 1913년에 이미 조직되었던 채기중 등의 '풍기광복단'의 채기중(蔡基中)과 합작하여 1915년 7월 '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으로 활약했다.[10]

대한 광복회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아라사(俄羅斯, 지금의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 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민주 공화제의 근대국가 수립)을 기한다

이를 보면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 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최후의 복적(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임을 알 수 있다. 대한광복회는 일제 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개 항목을 시달하였다.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가 선임되었다가 그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남도 일대, 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 경성, 삼척, 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국외에도 조직망을 설치하여 주진수, 손일민, 우재룡 등은 북만주 길림 지방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 또는 신흥무관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1916년 전라남도 벌교 부호 서도현, 1917년 11월 경상북도 칠곡 부호 장승원(張承遠), 1918년 1월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등 요구한 의연금을 내지 않는 친일 지주나 관리들을 처단하였다.대한광복회는 박용하를 처단한 장두환이 체포됨에 따라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고,박상진은 안동에서 국외로 탈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주 녹동 고향집으로 돌아가다가 1918년 2월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 교수대에서 순국했다.[11] 한편 만주로 망명한 부사령 김좌진이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

파일:1000036755.jpg
대구형무소에서 촬영된 머그샷

박상진 일대기 박상진 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고된 시기였던 1910년대 무장독립운동에서 활약했지만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묘소도 국립현충원이 아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에 있으며 외아들을 비롯한 가족들도 가난하게 살았다. 기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01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이 재조명되면서 교과서 등에서 무조건 언급되는 인물이 되었다.

3. 여담



[1] 인근의 정자동·신현동·당사동·어물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2]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19세 진(鎭) 항렬. [3] 생가가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 복원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박상진의 업적과 생애를 소개하는 자료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인근 택지지구에는 원래 "제2송정초등학교"와 "송정중학교"가 개교될 예정이었으나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각각 고헌초등학교, 고헌중학교로 바꾸었고 고헌초는 2019년, 고헌중은 2020년 개교했다. 인근의 북울산역 옆에는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도 있다. 생가와 인접한 북울산역의 역명 뒤에 (박상진)을 병기하기로 확정되었다. [4] 자는 성장(聖章). 1885년(고종 22) 식년시 문과에 을과 4위로 급제하여 정3품 승정원 승지(承旨)를 지냈다. [5] 이민구(李敏久)의 딸이다. [6] 초명 박시익(朴時翼), 자는 심가(深可). 1890년(고종 27) 별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 정5품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7] 자는 여옥(汝玉). [8]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 작전의 선봉대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는 등 정미의병으로도 활약하다가 결국 체포되어서 서대문형무소 사형 제1호가 되었으며 그 유해를 박상진이 거뒀다. [9] 상덕태상회 는박상진과 김덕기, 오혁태 세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0] 부사령으로 활동하던 이진룡이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김좌진을 임명하였다. [11] 순국하기 전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나,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과 녹수가 비웃는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