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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1967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파일:1px 투명.svg 제10대 국회
원내 구성
''' 1979.3.17. ~ 198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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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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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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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신민당 자진해산
신한당 민주당
보수당
(개별 합류)
신민당
(개별 합류)[1]
재창당 신민당[2] 국민당
(윤보선계)
자유당 민주통일당
(반 유진산계)
한국독립당 통일사회당
(개별 합류)
민주당 민주한국당
(해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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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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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
(해산 이후)
민주통일당
(개별 합류)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신민당
공식명칭 <colbgcolor=#fff,#1F2023>신민당 (新民黨, New Democratic Party)
창당 1967년 2월 7일[3]
1차 해산 1969년 9월 8일 자진해산
통합 정당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 1967년 2월 7일 신설합당)
재창당 1969년 9월 22일 재등록
2차 해산 1980년 10월 27일 5.17 내란으로 인한 해산
통합 정당
[[자유당|]]
( 1970년 1월 24일 흡수합당)



( 1970년 1월 25일 흡수합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3 (도화동)
의석 수
61석 / 231석
당 색
붉은색 (#DC352A)
당기 파일:신민당 1967년 당기.svg

1. 개요2. 정강·정책
2.1. 창당선언문2.2. 정강·정책
3. 역사
3.1. 1969년 자진해산3.2. 진산 파동3.3. 1973년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분당
4. 당 지도부
4.1. 총재 및 대표4.2. 원내총무4.3. 사무총장
5. 역대 선거결과
5.1. 역대 대선5.2. 역대 총선5.3. 역대 재·보선
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jsdj.png 파일:ysch.png
신민당을 대표하던 인물들. (왼쪽부터) 유진산,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대한민국 민주당계 정당.

1967년 민중당 신한당의 통합으로 창당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역대 정당 중 가장 많은 당이 합당에 참여했다. 이후 1980년까지 존속하여 1960~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이승만 정부의 여당인 자유당의 라이벌이 민주당이었다면, 박정희 정부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라이벌로 보통 이 당이 꼽힌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의원이 야당 대통령 후보의 조건과 자격에 관해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면서 다른 후보자들인 김대중, 이철승 의원과 함께 일약 정치권의 세대교체의 주류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 정당들과 더불어서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초기정당이자 보수의 뿌리였던 재건된 자유당과 재건된 한국독립당까지 흡수하면서 민주공화당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야당으로 떠올랐다. 당명 변경이나 이합집산(재창당, 분당, 합당 등) 없이 존속한 기간은 역대 민주당계 정당 중 최장기였으며, 이 때문에 민주화 운동 역사에서 '단일 야당'의 이미지가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4]

창당 당시 건물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30번지에 있던 구 민정당 당사를 썼다가[5] 1979년 5월부터 마포구 도화동 175-1로 옮겼다. 해산 후 마포당사 건물은 서울시에 매각돼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으로 임대되었다가 2002년에 철거되어 2005년부터 SK HUB Green이 들어서 있다.

당지부 건물 중에는 경북도당만이 현존한다.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348( 남산동)에 있으며 현재는 '사단법인 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에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2017년에는 '대구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후 소식은 딱히 없다. #

2. 정강·정책

창당 시기의 신민당 정강과 정책에서 특징적인 것은, 유진오가 만들고 김대중이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만 해도 사민주의 색채가 나는 대중경제론이 정강·정책에 들어간 것이다. 또한 반공주의는 남아있었으나[6] 과거 1950~60년대 냉전 반공주의는 전면에서 사라졌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2.1. 창당선언문

끊임없는 재야정당간의 분열과 불을 뿜는 불신상극은 이 나라를 또다시 정치부재의 절망에 몰아넣고 말았다. 이때에 즈음하여 절박한 조국의 비상한 운명을 타개하고 온 겨레에 소생의 희망을 주는 단 하나의 길은 오직 난립된 재야정당들이 구원을 씻고 무조건 통합하는 길밖에 없다.

이 엄숙한 시점에서 신성한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 우리 60명은 무거운 사명을 자각하고 한결같이 떨리는 마음으로 지금 동서고금에도 없는 한국정당사의 기적을 이룩하였으니 그는 바로 신민당 창당이다.

신민당은 이 나라 자유민주세력의 총집결체다. 참된 민주신념과 민족정기에 서린 구국이념을 바탕으로 반일· 반공· 반독재 투쟁의 피어린 전통을 자랑하는 민중·신한 양당의 합당을 핵심으로 하고 모든 재야 민주세력이 총집결한 범국민적 정당이다.

신민당은 바로 온 국민의 희망이요 의욕이요 염원을 상징하는 국민의 정당이다. 그뿐이랴. 신민당은 이 나라의 반민주적인 군정 횡포를 종식시키고 무자비한 수탈 행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여야할 자위정당이다.

모든 군정의 때를 벗고 자애와 성실과 정직이 통하는 진정한 민주사회로 반정하는 정권교체를 이룩하여야할 수임정당이다.

또한 신민당은 이 나라를 국제적 경제침략에서 보호하고 자유민주 기본체제에서 전진적 자세로 발전 보완하며 뒤떨어진 경제적 후진성을 시급히 만회하고 민족자립 경제를 목표하는 전진 정당이다.

또한 신민당은 과거의 수구적 인습과 무원칙한 파쟁을 지양하고 건설적이며 합리적 대안과 창의에 찬 청사진을 갖고 생산과 분배를 동시에 중요시하는 정책 정당이다. 끝으로 전국민의 열화 같은 성원으로 탄생한 우리 신민당은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어 정책 좌표를 설정하고 추호도 배반함이 없이 호흡과 생활을 국민과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아낌없는 애호 있기를 바란다.

2.2. 정강·정책

1.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기초위에서 모든 독재를 배제하고 제도와 기구를 쇄신하여 민주국가의 완성을 기한다.
2. 사회전의에 입각한 대중경제를 지향하여 독점을 방지하고 자유와 계획을 조정함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기한다.
3. 국민 누구나의 생존을 보장하며 그 노력에 따라 적정한 보수가 분배되는 사회제도의 확립을 기한다.
4.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고 전통에 입각한 신문화창조를 선도하여 새로운 민족정신의 진작을 기한다.
5.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하며 자주역량의 배양으로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민주적 평화통일을 기한다.
1장 국토통일의 방침
민족주체성에 입각하여 평화와 자유안에서 통일의 실현을 원칙적으로 하며 이에 상응하는 실력통일의 배양을 주장한다.
2장 정치
①민주정치질서의확립=의회기능의회복, 공명선거실시의 보장, 정치보복의배격 (가)대통령의 권한축소와 국회및 국무원의권한증대 (나)군의 정치적엄정중립조항명시등을위해 헌법조항을 정정.
②민주사법질서의 확립
③민주행정질서의 확립
3장 경제
①경제개발과 대중경제를 지향하고 소득의 공정분배, 주식의 대중화, 물가의안정을 추구한다.
②조세정책개혁
③건전재정의 확립과 금융의 민주화
④농촌정책의 혁신=이동곡가제실시, 농협의 민주화 ,식량유통구조의 개선
⑤외화도입과 무역정책=수원태세의 확립과 차관건설의 재검토
4&5장 사회·문교
①사회보험제를 점차로실시하고 국토개발사업등으로 실업자단기대량흡수정책추진
②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포함하는 9년제의 의무교육제와 한글전용
6장 국방
군의정치적중립, 국민조직반대(예비군무장반대)
7장 외교
①외교=경제외교에 있어서 편중외교지양
②대일외교=국교정상화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않으나 한·일불평등조약 수정추진

3. 역사

1963년 박정희 정권 수립 이후, 한국사의 굵직굵직한 민주화운동 뒤켠에서 관조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제도정치 내 야당 인사들이 뭉쳐서 만든 정당이다.

당시 여당은 민주공화당이었고, 야권은 민정당, 민주당, 자유민주당, 국민의당 등등 다양한 당들이 난입하면서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민정당[7] 자유민주당을 흡수했고, 민주당[8] 국민의당을 흡수했다. 그리고 나서 두 당의 대단결이 이루어지고 민중당이 탄생하였다. 이후 민중당에서 분리된 신한당이 다시 합류하게 되어 야권 대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신민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셀로?

신민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가 끝날 때까지 제도 정치권 하에서 박정희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 기성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정치권 밖에서의 일에는 무관심했고, 사회적 변혁의 이슈가 급부상할 때 이슈에 '숟가락을 놓는' 행동도 자주 보였다. 이러한 행태 때문에 소위 말하는 혁신계[9]나 재야/운동권[10]으로부터는 '너네도 어차피 똑같은 기성 정치인이니까'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아주 상징적인 예로, 김수영 시인 같은 사람들은 장면 같은 사람들을 1960년대 내내 깠는데 그의 시 김일성 만세에 보면 아주 극단적으로 나와 있다(...).

여담이지만 이 시절이나 지금이나 야권 정치인이라도 기성 정치인들의 한계는 언제나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1960~70년대 내내 재야의 사회운동가/활동가/민주화운동가/학생운동권은 사회변혁의 최전선에 나서서 극렬히 싸웠고 또 목숨을 잃기까지 했지만, 보수야당 정치인들은 뒤켠에 앉아서 사태를 관조했다. 사실 기성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제2공화국 당시의 관료주의적 폐단과 순진함을 그대로 가진 이들이었기에,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정권 획득 말고는 별 생각이 없는 정치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당시 신문에는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당에서 결정한 것만 찬성한다는 '거수기 국회의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여야 할 것 없이 어디나 적용되는 행태였다. 동시에 당시 재야에서는 훗날 1980년대 한국 사회 구성체 논쟁의 씨앗이 되는 '매판자본 비판'이라든가 '봉건적 잔재 논쟁'같은 것이 왕왕 논의되고 있었는데, 기성 정치권에서는 정치 구조나 사회 구조에 대한 논쟁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당시 신민당을 무늬만 다를 뿐, 형태는 똑같은 보수정당으로 평가하기도 한다.[11]

하지만 1970년을 전후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로 40대 기수론을 타고 기성정치권의 새바람으로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의 급부상이었다. 이들은 전에 없던 공개경선의 방식으로 대통령 후보의 자리를 두고 맞붙으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아주 근소한 표차로 낙선하게 되자[12]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의 대항마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성립 후,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고, 김영삼은 가택연금과 동시에 정치활동 탄압을 받게 된다. 신민당은 장외집회, 국회내 의회투쟁, 해외 언론을 통한 언론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1976년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 계파간 갈등이 격렬한 수준에 이르러, 구습 정치의 오랜 추태로 평가되는 "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일명 각목대회)이 일어나기도 한다.

1978년에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보다 득표율을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고[13], 박정희 정권에 타협하는 이철승이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대여 강경투쟁 노선을 띄는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1979년 8월 11일, 회사 측의 폐업조치에 대항하여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신민당사를 40시간 동안 점거하여 정치투쟁을 벌였고, 김영삼은 이들을 고무했다. 이에 경찰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강경진압 지침에 따라 무리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민당 사람들, 취재기자,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었고 노조위원 김경숙이 사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항목은 YH 사건 참조. 당시 신민당 내부에서의 평소 이철승의 지지율이 김영삼보다는 월등하게 높았는데도 김영삼이 당선된 데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의혹이 있다면서 조일환을 포함한 신민당 의원 3명이 김영삼 총재직 정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고, 9월 7일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감정이 격화된 김영삼은 9월 16일, NYT와의 회견에서 미국에게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참조. 이에 대한 반발로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하였다.

10.26 사건이 발생한 이후 신민당은 민주공화당과 최규하 이후의 정치질서에 대하여 기본적인 합의를 얻어내었으나 12.12 사태로 전두환을 위시로 한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1980년 상반기까지 나타났던 서울의 봄 등 민주화의 열망은 5.17 내란으로 좌절되었으며, 정치계에서도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이 동시에 해산되는 헌정 초유의 사변이 일어난다.

3.1. 1969년 자진해산

1980년에 강제해산당하기 전에, 1969년에 자진해산했던 역사가 있다.[14]

1969년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 추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헌법개정안 가결정족수는 117명인데 집권당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은 109명뿐. 게다가 공화당 내에도 김종필을 비롯한 개헌반대파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돈과 권력을 동원해서 집권당내 반대파와 야당 국회의원들을 포섭하는 정치공작을 진행한 끝에, 기어이 총 121명의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제출하였다.[15] 문제는 신민당 국회의원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3명이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에 넘어가서 동참했다는 것이다.

이에 신민당은 3명을 변절자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제제와 개헌저지 투쟁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당이 해산하거나 의원 개인이 탈당하면 자동으로 국회의원 직위가 상실되는 제도였다.[16] 그러나 당에 의해서 제명이 되는 경우에는 또 의원직이 유지되었다.[17] 따라서 단순히 당에서 제명처리해 버리면 이들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개헌안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즉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신민당 국회의원 47인 중에서 개헌파 3인을 제외한 나머지 44명을 제명하였다. 그리고 개헌파 3인만 남은 신민당을 자진 해산해 버렸다. 당을 자진 해산해 버렸으니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3명은 자동으로 의원직 상실.

그리고 제명 혹은 합당의 경우 의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한 정당법 관련 조항에 따라 무소속이 된 나머지 44명의 의원들은 원내교섭단체 "신민회"를 구성한 뒤 다시 창당 수순을 밟아 당을 재건하였다. 그야말로 힘에서 밀리고, 머리숫자에 밀리는 야당이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서 벌인 해프닝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은 결국 통과된다.

한편, 이 당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 있었다.

3.2. 진산 파동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수 유진산의 행보와 관련된 사건이다. 해당 항목 참조.

3.3. 1973년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분당

유진산의 지도노선에 김홍일, 양일동 등이 반발하여 1973년 김홍일, 양일동 등을 포함한 일부가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4. 당 지도부

4.1. 총재 및 대표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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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유진오
제5대
유진산
권한대행·제6대
김홍일
제7대
유진산
권한대행
정일형
제8대
유진산
권한대행
김의택
제9대
김영삼
권한대행
이충환
제10대
이철승
제11대
김영삼
직무대행
정운갑
제11대(복귀)
김영삼
권한대행
이민우
}}}}}}}}}}}}
<rowcolor=#fff> 대수 직함 이름 임기 비고
초대 대표 유진오 1967년 2월 7일 ~ 1968년 5월 20일
제2대 총재 1968년 5월 20일 ~ 1969년 5월 21일
제3대 1969년 5월 21일 ~ 1969년 9월 7일 당 자진해산
제4대 1969년 9월 20일 ~ 1970년 1월 26일 뇌졸중으로 사임
제5대 대표 유진산 1970년 1월 26일 ~ 1971년 5월 8일 진산 파동으로 사임
권한대행 김홍일 1971년 5월 8일 ~ 1971년 7월 21일
제6대 1971년 7월 21일 ~ 1972년 9월 26일
제7대 유진산 1972년 9월 26일 ~ 1973년 1월 23일 유신 후 사임
권한대행 총재 정일형 1973년 1월 23일~ 1973년 5월 7일
제8대 유진산 1973년 5월 7일 ~ 1974년 4월 28일 서거
권한대행 김의택 1974년 4월 28일 ~ 1974년 8월 22일
제9대 김영삼 1974년 8월 22일 ~ 1976년 5월 25일
권한대행 이충환 1976년 6월 12일 ~ 1976년 9월 15일 전당대회 연기로 인한 권한대행
제10대 대표 이철승 1976년 9월 15일 ~ 1979년 5월 30일
제11대 총재 김영삼 1979년 5월 30일 ~ 1979년 9월 8일 총재단 직무정지
직무대행 정운갑 1979년 9월 8일 ~ 1979년 12월 12일
복귀 김영삼 1979년 12월 12일 ~ 1980년 8월 13일 신군부에 의한 정계은퇴
권한대행 이민우 1980년 8월 13일 ~ 1980년 10월 27일 5공화국 헌법부칙에 따라 해산

4.2. 원내총무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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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영삼
제2대
정성태
제3대
김영삼
제4대
정해영
제5대
김재광
제6대
이민우
제7대
김형일
제8대
김은하
제9대
송원영
제10대
황낙주
}}}}}}}}}}}}

4.3. 사무총장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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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고흥문
제3대
김형일
제4대
신도환
제5대
유치송
제6대
이기택
제7대
박한상
}}}}}}}}}}}} ||

5. 역대 선거결과

5.1. 역대 대선

연도 선거 종류 후보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윤보선 4,526,541 40.93% 낙선 (2위)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5,395,900 45.25%

5.2. 역대 총선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비례대표 정원 당선 비율 비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 28/131 17/44 45/175 25.71%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 65/153 24/51 89/204 43.63% 역대 최다의석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 52/146 0/73 52/219 23.74%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 61/154 0/77 61/231 26.41%

5.3. 역대 재·보선

연도 선거 종류 정원 당선 비율 비고
1968년 9·24 재·보선 1/3 33.3%
1969년 2·28 재·보선 0/1 0%
8·14 재·보선 1/1 100%
12·5 재·보선 0/1 0%
1970년 5·22 재·보선 0/1 0%
1971년 12·14 재·보선 0/1 0%
1977년 6·10 재·보선 0/1 0%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민주당계 정당
제1공화국 ~ 제4공화국
(1948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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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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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창당 [2] 10월 유신으로 정당활동이 잠시 멈추기도 하였다. [3] 중앙선관위 등록은 1967년 2월 11일 [4] 사실 위에서 보듯 도중에 자진해산 후 재등록한 전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 한 정당으로 존속한 것으로 기억한다. [5] 옛 이문당-서울시 인민위원회 건물로, 화신백화점 건물을 만든 박길룡의 작품이다. 1979년 9월에 철거돼 광장이 조성됐으며, 현재 인사동관광안내소 근방으로 보인다. [6] 재미있는건 창당선언문에 대놓고 반일 노선도 천명한다. [7] 민주당 구파에 속했다. 대표적으로 윤보선. [8] 민주당 신파에 속했다. [9]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남한에 잔존했던 사회주의를 비롯한 좌파 세력. 대부분 지하조직으로 활동을 했고 이들은 1970년대 유신 정권 하에서 대부분 소멸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김철 통일사회당 정도인데 김철도 사실상 195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혁신계로 취급하기 조금 애매한 감이 있다. [10] 1950년대 이승만 독재를 거치고 4.19 혁명의 세례를 받은 우파 계열 민주화 운동 세력. [11] 사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이전까지의 민주당계 정당은 보수정당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 및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정당들은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의 전신이기도 하다. [12] 사실 7대 대선에서 박정희-김대중의 표차는 약 8%, 95만표로 실질적인 양자 구도 선거였음을 감안하면 근소한 격차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당 선거에서 박정희측이 표 확보를 위해 당시 국가 예산의 1/7에 달하는 700억원의 거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무지막지한 금품이 살포된 것에 비하면 표 차이가 예상보다 적었기에 그러한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 것이다. 심지어 한때 박정희의 심복이던 김형욱이 1977년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라 증언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선거 이전에는 신민당 대선 후보로 김대중, 김영삼(+이철승) 등 40대의 소장파가 언급되는 것에 박정희 자신조차 '저런 풋내기와 내가 대결해야 하느냐'고 불쾌감을 드러내며 상대로 유진산을 원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풋내기에게 잘못하면 질 수도 있는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으니 더욱 충격적인 상황이었던 것. [13] 다만 중선거구제 버프로 민주공화당이 7석 차로 1당을 유지하고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총합으로는 여전히 야당을 압도했다. [14] 그래서 기록 상으로는 신민당이 1967년 신민당과 1969년 신민당으로 나뉘어져 있다. 참조 [15] 민주공화당 109명 108명, 정우회 12명 중 11명, 그리고 신민당 47명 중 3명. [16] 헌법 제6호 제38조: 국회의원은 임기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정당이 해산된 때에는 그 자격이 상실된다. 지금은 당이 스스로 자진 해산하거나, 당적이탈(탈당)해도 국회의원 직위는 유지된다. 선거를 앞두고 맨날 당을 만들고 부수고 하는게 이때문에 가능. 단, 지금도 비례대표는 탈당하면 잃는다. [17] 탈당시 의원직을 잃게 되는 지금의 비례대표 역시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국회의원들이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이다. [18] 독립운동가이자 오성장군으로 유명한 그 김홍일 맞다. [19] 독립운동가이자 잡지 사상계로 유명했던 그 장준하 맞다. 다만 장준하는 신민당 내에서 비주류였던데다가 1971년쯤에 해당의원으로 찍혀버린 탓에 도중에 탈당을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