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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총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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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428A0><colcolor=#fff> 삼성 제2대 총수 이건희 李健熙|Lee Kun-h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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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2년 1월 9일 | ||
경상북도
대구부 견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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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0년 10월 25일 (향년 78세)[2] |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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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경주 이씨 (慶州 李氏)[3] | ||
학력 |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상학 / 중퇴) 와세다대학 상학부 (상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 경영학 / M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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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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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428A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이병철, 어머니 박두을 | |
빙부모 | 장인어른 홍진기 | ||
형제자매 |
누나
이인희, 이숙희, 이순희 형 이맹희, 이창희 여동생 이명희 이복누나 이덕희 이복남동생 이태휘 이복여동생 이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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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홍라희 | ||
자녀 |
장남
이재용 장녀 이부진 차녀 이서현 삼녀 이윤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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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손 |
이지호(2000년 12월 15일생)[4] 이원주(2004년 3월 27일생)[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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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 |
임동현(2007년생)[6] 김지이(2001년생)[7] 김지수(2003년생)[8] 김지후(2006년생)[9] 김성준(2007년생)[10] |
||
경력 |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1966 ~ 1979) 중앙일보· 동양방송 부회장 (1979 ~ 1980) 삼성그룹 부회장 (1979) 중앙일보 이사 (1980)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1982 ~ 1997)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1982 ~ 1996)[명예회장] 삼성그룹 회장 (1987 ~ 200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1996 ~ 2017)[명예위원]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2011 ~ 2018) 삼성전자 회장 (2010 ~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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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대통령 표창 (1974) 체육포장 (1982) 체육훈장 맹호장 (1984) 체육훈장 청룡장 (1986) 대통령 표창 (1990)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훈장 (1991) 한국경영학회 제정 경영자 대상 (1993) 문화부장관 감사패 (1993) 한국무역학회 무역인 대상 (1994) KMA 한국능률협회 최고의 경영자상 (1996)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감사패 (2002)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4) 홍콩 디자인센터 홍콩 산업기술통상부 디자인경영자상 (2004) 밴플리트 상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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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원불교[13] | ||
신체 | 신장 164cm | 체중 90kg | 혈액형 AB형 | ||
병역 | 불명[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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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큐 인사이트 - "이건희, 거인의 유산" |
대한민국의 기업인. 생전 삼성 제2대 총수 겸 삼성전자 회장을 역임했다. 생전에 대한민국 최고 갑부였던 인물로 잘 알려졌으며 세계 부자 순위 66위였다. 사망 직전 보유 재산은 약 23조 7,100억 원(198억 달러)이다.[15]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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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 CJ그룹의 첫째 형 이맹희, 새한그룹의 둘째 형 이창희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였으며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이 되었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주창하며 이후 자신의 모토로 삼아왔으며, 그가 삼성을 이끌던 바로 이 시기에 삼성전자는 구 미와 일본 유수의 굴지의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올라섰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함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양대 주역이며, 삼성그룹의 제2의 창업주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1987년 취임당시 삼성그룹의 연매출은 10조원이 안 됐지만 그가 취임하고 30년간 경영하면서 삼성그룹의 연매출은 약 400조원으로 무려 40배 가까이 늘어났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미친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확실성이 큰 사업 분야이다. 그런 분야에서 미국, 일본 등지에서 중소 제조업체 취급 당하던 삼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니 경영 실적만 두고 보면 중앙집권적 오너 경영의 이상적인 사례였다고 볼만하다. 최근에는 LG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의도치 않게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2008년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으로 드러난 비자금과 세금포탈 사건으로 인해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2010년에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2014년 5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이후로는 사실상 코마상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로 직함만 유지했으며, 그의 장남 이재용이 이건희를 대신하여 사실상 삼성 총수 역할을 수행했다. 6년 5개월의 투병 끝에 2020년 10월 25일 결국 사망했다. 삼성전자 회장 자리는 그가 사망한 후 2년간 공석이였다가 이재용이 2022년 10월 27일에 승진하면서 정식으로 회장 직위를 승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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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학창 시절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이때도 형과 자취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모두 함께 모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16]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는지 이건희의 성격 또한 내성적이 되어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 지낼 때 괄괄했던 대학생 형들이 아버지의 일본인 부인과 육탄전으로 싸울 때, 초등학생이었던 이건희는 아직 어리고 무서워서 그 싸움을 피했다고 한다.[17]그러다가 6.25 전쟁 시기인 고학년 때 다시 귀국해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그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딱히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고교 시절에는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의 동창 홍사덕이[18] 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덕분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다라는 등 1950년대에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매우 앞선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심지어 1965년,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가 개통되었을 때 다들 이거 어떠냐고 할 때 친구들에게 "제2한강교는 통일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할 다리인데 다리 경간을 좀 더 넓혀도 되었을 것이다."는 말까지 했었다고 한다.[19]
이때도 이건희는 딱히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말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또 이 시절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라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
2.2. 대학 시절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商學科)[20]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제일 상학부(第一商学部)에 진학해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했다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한 행보에는 마찬가지로 와세다를 수료[21]한 고 이병철 회장의 뜻이 담겨있었다. 삼성 이건희 선대회장은 '서울대를 못 가면 일본으로 대학가라'라는 아버지 삼성 이병철 창립회장의 의중 때문에 일본 유명 사학인 와세다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한 것이다. 훗날 이건희 부자(父子)는 와세다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22] 이것은 후에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회장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면서 가문의 희망이 이루어졌다.이건희 회장은 1942년 대한민국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삼남으로 태어나 1965년 와세다대학 제1상학부를 졸업하였다. 1966년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후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고 , 1987년 회장에 취임하여 지금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삼성그룹은 전자, 중화학, 금융, 상사,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건희 회장은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한한다는 강한 사명감 아래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삼성사회봉사단」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전개해 왔다. 2010년 본 대학은 세계적인 기업인이자 한일 우호관계 증진에 크게 기여한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여 그간의 업적을 칭송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은 따뜻한 관심과 기부를 통하여 본 대학의 교육 및 연구 역량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본 대학은 이건희 회장의 공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와세다대학 교빈」의 칭호를 수여함과 동시에 본 도서관에 「이건희 기념」이라는 이름을 새겨 그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2014년 9월
와 세 다 대 학[23] # #
2014년 9월
와 세 다 대 학[23] # #
젊을 때는 술도 안 했다고 한다. 권근술 전 사장 말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서는 하긴 하지만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와인은 좋아한다는데 정작 와인 얘기를 하자 무관심했다는 소리도 있다.
다나카 아이지 와세다대 총장은 동문인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한일 교류'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다나카 총장은 "이 회장은 경제·기술·과학 등에서 한일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삼성을 세계 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고 와세다대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와세다대에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다나카 총장은 설명했다. 이 회장은 1965년 와세다대 상(商)학부를 졸업했고 2010년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는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난 사실과 그의 경력·업적,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사진 등을 학교 홈페이지에 게재하며 '추모의 뜻'을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동문인 이 회장이 뛰어난 경영자로 활약·공헌하고 한일 우호 증진에 힘쓴 점은 와세다대에 큰 자부심'이라고 적었다. 다나카 총장은 "2014년 이 회장이 정치경제학부 건물을 짓는 데 기부했다"며 "그 건물 도서실에는 이 회장 이름이 붙어 있다"고 소개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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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기타
자동차 매니아인 그는 유학생 시절 중고차를 사서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4,200달러에 중고차를 사서 3~4달쯤 타고 다니며 분해해 본 뒤 수리해서 판매한 결과 7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유학 시절 동안 중고차 6대를 수리해서 팔았다.이 시절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단 삼성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전역을 하신 분이십니다."이다. 다만 이건희가 현역병 출신이 아니라 방위병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이건희가 방위병으로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보통 라이벌 대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인생 낭비가 되는 군복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게 낫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긴 하다.
2.4. 삼성의 회장이 되기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교 MBA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6년 10월 중앙일보·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25]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이병철의 장남도 아니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삼성을 물려받은 것이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서는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1969년 말 이건희의 형들인 이맹희와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했던 사건, 일명 왕자의 난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탓이 크다. 똑같이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현대에서는 정주영의 사망 직전(2000년), 즉 정주영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에서 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바람에 아들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해서 현대그룹이 분열된 것이지만, 삼성가에서의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반란을 진압할 힘과 권위가 있었을 때[26] 벌어졌고, 그 결과 이맹희와 이창희가 완전히 진압당해 내쳐졌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마지막엔 배다른 형제 이태휘와도 경쟁하기도 했다.[27]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건희 본인이 나름 능력을 보여준 덕도 있다.
사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TBC)이 전두환에 의해 KBS에 강제 통폐합되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28]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였다.[29] 그러나 처음에는 적자 상태였으며 초라하게 삼성전자에 흡수되었다. 이병철은 NEC에게 삼성 반도체에 대한 개선을 자문하나 거절 당하였고, 기술협력 요청마저 NEC가 거절하자, 대체 반도체가 뭐길래 NEC가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도쿄선언으로 반도체 투자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 이 과정에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건희에게 자연히 힘이 쏠리게 된다. 또한 삼성전자 내부의 반도체 반대론자들도 이병철에 의해 모두 정리되었다. 이병철 생전에는 삼성전자는 반도체 투자와 일본이 벌인 치킨게임으로 흔들렸지만,[30] 이병철이 사망할 즈음인 1987년 말부터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고, 1988년 반도체 사업부가 3200억 흑자를 내면서 내외부에선 도박으로만 보였던 이병철-이건희 두 부자의 반도체에 대한 집착은 놀라운 혜안으로 드러났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아버지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 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이 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2.5. 회장으로의 활동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 中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 中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회장 취임사 # 中
회장 취임사 # 中
회장이 된 뒤 이듬해이자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서 받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93년 6월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하였다.[31] 현재의 삼성 로고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안일한 직원들을 꾸짖기 위해 불량 핸드폰 15만 대를 구미공장에서 불태워 버린 애니콜 화형식은 전설로 전해질 정도. # 이기태 사장이라는 최고의 실무진이 애니콜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낸 것은 그의 역량과 이건희라는 비전가의 결단, 추진력이 어우러진 결과였으며 한 마디로 (긍정적인 의미의) 그 회장의 그 사장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세계 경제를 선도하던 일본 대기업들을 네이티브 수준의 일본어로 적극 인재를 유치하거나 면담하는 등 방법으로 2000년대까지 계속해서 벤치마킹 했다.
“여러 면에서 매우 뛰어난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일본어를 너무 잘해서 놀랐습니다.
와세다대에서 공부한 건 알고 있었지만 마치
일본 사람처럼 일본어를 구사했습니다.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도 와세다에서 공부했지요.
이재용 회장은 제 후배(
게이오대)이기도 하고요. 이건희 회장은 제가 만나본 경영인 중에서 가장 강한 아우라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말씀이 많거나 무슨 말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압도됐다고 할까요.”
신동아 기사 - 반도체 전문가 오야마 사토시 인터뷰
그는 이러한 '신경영'을 통해 임원진들과 반대까지 물리치며[32] 극단적인 질적 개혁을 골자로 한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고 이 승부수를 통해 결국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후쿠다 고문에게는 매우 두둑히 챙겨줬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들을 다 제치게 도와줬다면서 욕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신동아 기사 - 반도체 전문가 오야마 사토시 인터뷰
질적 개혁이 뭐 그리 대단한 비전에 의한 것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 한국 대기업들 중에서는 이 정도의 경각심을 가진 곳이 거의 없었고, 당장 내수 매출이 잘 나오고 하니 해외 일류 기업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더라도 괜찮다는 인식이 팽배했다.[33] 결국 LG전자는 이 때 삼성처럼 하지 못해 결국 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 라이징'의 저자인 기자 제프리 케인도 삼성이 오너 세습 경영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 오너의 신화를 흐릴 필요는 없다며 '이건희 회장은 냉전 이후의 시장 변화에 대해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경영자였으며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글로벌 삼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디자인 혁명 역시 질적 혁신과 함께 글로벌 삼성을 만든 두 축 중 하나이다. 그는 '미래에는 핸드폰들 성능이 다 비슷비슷하게 좋아질 것이다'는 주장을 하며 그 때 가서 승패를 가릴 요소는 디자인이라 단정, 1990년대에는 삼성의 '디자인 혁신'을 지휘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선언한, 이른바 '밀라노 혁명'인데, 이건희는 여기서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고객들이 제품에 마음을 뺏기는데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그 짧은 순간을 사로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
그룹 회의에서 심심하면 위기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바뀔지 모르니 걱정,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했다고 하며 이렇게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게 여러 CEO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삼성의 성장 비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텔의 前 CEO도 일본 업체에게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추월당한 다음엔 맨날 위기론에 빠져 있었다고. 다만 항상 그러는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쯤엔 중국이 우릴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고, 일본은 힘이 빠졌다는 뉘앙스로 낙관론을 내놓기도 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이 '위기 위기 위기'를 반복하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가 있다. 삼성사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선언, 애니콜 화형식으로 신삼성이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하나, 당시 일본인 상무였던 요시카와 료조의 눈에는 이건희가 아무리 위기를 부르짖고 품질경영을 강조해도 임직원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잘 나가는데 도련님이 귀찮게 하네 수준의 반응이었다고. 그러나 IMF 외환위기와 함께 삼성에게 정말 위기가 다가오자 이건희의 위기 강조는 일종의 예언적 통찰력으로 받아들여졌고 삼성에서 비로소 그가 강조한 질적 혁신이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답게 경영 방식 또한 철두철미하고 세세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삼성그룹 법무팀에서 일했던 김용철이 쓴 책인 <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지시사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와 관련된 수많은 저서 중에는 제3자인 작가가 쓴 평전인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미지와 다른 그의 삶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흥미 위주라면 깊이는 없지만 이지성 작가의 '스물일곱 이건희처럼'도 킬링타임용으로는 괜찮다. 학술적으로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저술한 '이건희 경영학 | 삼성웨이'가 가장 깊이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만, 관리의 삼성이라는 면에서 '자율경영'이 안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신경영만 봐도 당시 선언의 상징적 조치로 받아들여진 7-4제(7시 출근, 4시 퇴근)는 1990년대 후반에 벌써 사라졌다. 또 신경영 당시 이건희는 직원들에게 "회장이 잘못하거나 틀렸으면 '그게 아니라 이겁니다'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 사장, 비서실장이 회장한테 지적을 안 하는데 어떻게 과장, 부장이 이사, 상무한테 지적하느냐. 이것부터 고쳐라"고 강도 높게 주문했지만, 이 역시 사라졌다.
2.6. 와병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로 심장기능이 돌아온 후 삼성그룹 산하인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됐다. 스텐트 시술을 받고 나서 VIP 병실에 입원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계속 입원해있었다. 덕분에 주기적으로 그의 사망설이 돌았다. 참고로 삼성병원 x층에 이건희 전용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층이 있다고 한다.투병생활 1년차 조금 넘어서서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파동이 일어났고 3차 감염자 태풍의 눈으로 삼성서울병원이 주목받는 와중에도 계속 자리를 지켰다. 병원 측에서도 이건희의 병실 이동 계획은 없고 입원 수술 상황 역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건희가 입원한 이후부터 삼성 경영권은 이미 이재용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2015년 5월에는 삼성문화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직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34]
관련 기사.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활치료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구단에서 뛰고 있는 야구 선수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한다.
2016년 6월 30일경 이건희가 사망했고 오후 3시에 발표한다는 루머가 돌아 삼성 주가가 폭등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으나 삼성은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이 사망설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일베저장소가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보도가 났었지만 후에 오보로 밝혀졌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는 관세음보살상 중앙에 이건희 앞으로 건강 발원을 빌며 가장 큰 초가 하나 공양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아들 이재용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8월 1일, 한겨레는 그룹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가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양호하다. 건강한 상태다"고 밝혔다. 또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가기도 한다"는 말을 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017년 8월 2일, 이재용이 재판 도중 언급하였는데, 표현이 눈에 띈다.
이재용은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라고 말했다가 다급히 "회장님이 건재하실 때부터"라고 말을
정정했다.
박근혜에게 자신이, '
홍석현이 이건희의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를 했다고 설명하는 도중에 나온 표현으로 당시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2017년 11월 6일, 2년만에 TV조선 종합뉴스 9에서 이건희의 근황을 취재한 영상이 보도되었다. 이건희가 영화를 보면서 간호사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건희가 보고 있던 영화는 목소리의 형태였다. 링크
2.7. 사망
2020년 10월 25일 3시 59분, 재활에 힘을 쏟았지만 지속된 건강 악화(급성 심근경색)로 인해 2014년부터 6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며, 삼성 사장단의 조문은 26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부인 홍라희와 장남 이재용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 18, 19호에 마련되었다. 일반인의 조문은 받지 않는다. 또한 유족 측에서는 빈소 사진을 찍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35]
생전에 삼성 일가가 대대로 원불교 집안이고, 특히 2011년 뉴욕주에 있는 원 다르마 센터를 짓기 위해 부지, 건축비 전액 120억 원을 기부하는 등 원불교에 많은 지원을 해주면서 중덕(重德)이라는 법명과 중산(重山)이라는 법호를 수여했다. 이로 인해 원불교 장의위원회에서는 공덕을 기리며 원불교 서울교구청 원불교 한강교당에 별도의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천도재 및 추도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는데, 추도식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11월 8일에 열렸다.
28일 오전에 영결식과 발인이 엄수되었고, 아버지 이병철 때처럼 장례가 끝난 후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부지 내에 속한 선영(선산)에 안장될 것으로 보였지만 이병철의 조부모 등을 모신 수원 가족 선영에 안장되었다.
# #
발인식이 끝난 후 운구 버스에 탑승할 때 이재용은 내내 굳은 표정이었고, 이부진은 중간중간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영결식 참석을 위해 차에서 내릴 때는 휘청이는 이부진의 한쪽 팔을 홍라희가 잠시 부축하기도 했다. #
이건희의 직접적인 사인은 신부전증인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는 고령에 긴 투병 생활을 해왔던 이건희의 신장 기능이 나빠지면서 회복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추측)
삼성전자의 경쟁사이자 협력사이기도 한 Apple CEO 팀 쿡이 추모의 뜻으로 한국식 근조 화환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는 이재용이 2011년 스티브 잡스의 사망 당시 추도식에 참석한 것에 대한 답례의 표시라고 한다. #
2.7.1. 기증
2021년 4월 28일, 삼성은 상속세 납부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건희 회장의 유지에 따라 미술품 기증 및 어린이 의료 지원 등 사회 환원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사회 환원 계획에 따라 몇 만 점에 달하는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36] 소아암·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지원 용도로 3,000억원이 기부된다. # 새로운 기증관 후보는 서울 송현동과 용산 두 곳이 후보로 정해졌다. # 결국 송현동으로 결정되고 2023년 예타도 통과해, 2028년 완공 예정이다. ※3. 경력 및 약력
- 2012. 6.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 2011. 10.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 2010. 3.[37] ~ 2020. 10. 삼성전자 회장
- 2010. 2.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2005.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 1998. 8.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 1998. 4. ~ 2008. 4.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 1996. 7. ~ 2008. 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1993. 3.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1989.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 1987. 11. ~ 2018. 5.[38] 삼성그룹 총수
- 1987. 11.[39] ~ 2008. 4.[40] 삼성그룹 회장
- 1987. 2.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 1982. ~ 1993. 2.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 1982. 3. ~ 1997. 3.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 1981. 2.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 1980. 중앙일보 이사
- 1979. 2. ~ 1987. 11. 삼성그룹 부회장
- 1979. 2. 삼성물산 부회장
- 1966. 10. 중앙일보· 동양방송 입사
4. 명예 학위
5.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삼성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어록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사 1:12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사 1:12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 인재들이 그리고 인재들이 모인 기업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해 오대양 육대주로 활동무대를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한다.
1988년 창립 50주년 기념식 中
1988년 창립 50주년 기념식 中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라.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회사에서만 할 필요 없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는가?
불량은 암이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이고, 3만 명이 만들고 6천 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다.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임원들에게.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회사에서만 할 필요 없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는가?
불량은 암이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이고, 3만 명이 만들고 6천 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다.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임원들에게.
바뀌고 싶은 사람만 바뀌어. 많이 바뀔 사람은 많이 바뀌어, 많이 기여해. 적게밖에 못 바뀔 사람은 적게
바뀌어서 적게 기여해. 그러나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말라 이거야.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경영자는 또한 적어도 4, 5년 후의 일에 대해서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1994년 6월 집무실에서
1994년 6월 집무실에서
경영자는 알아야 하고 행동해야 하며 시킬 줄 알아야 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사람과 일을 평가할 줄도 아는 종합 예술가로서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1995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미래 국제포럼에서
1995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미래 국제포럼에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41]
1995년 4월 베이징 특파원들과 간담회 中
1995년 4월 베이징 특파원들과 간담회 中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쓰십시오. 고객이 두렵지 않습니까? 반드시 한 명당 한 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1995년 애니콜 품질 향상을 강조하면서
1995년 애니콜 품질 향상을 강조하면서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 中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 中
인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2003년 5월 사장단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서.
2003년 5월 사장단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서.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두 나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2007년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 中
2007년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 中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에는 큰 혼란을 맞을 것이다.
2007년 3월
2007년 3월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기회를 놓치고 나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잘해서 만회하겠습니다'는 소용없다. 아무리 잘해서 만회가 되더라도 그건 당연한 것이지. 만회가 아니라 기회 손실이다.
2010년 3월 경영 복귀 선언
기회를 놓치고 나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잘해서 만회하겠습니다'는 소용없다. 아무리 잘해서 만회가 되더라도 그건 당연한 것이지. 만회가 아니라 기회 손실이다.
2010년 3월 경영 복귀 선언
삼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기꺼이 협력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2011년 1월 신년사 中
2011년 1월 신년사 中
여성 인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면 회사와 나라의 손해다.
2012년 여성 승진자 오찬 中
2012년 여성 승진자 오찬 中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 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 中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 中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2014년 1월 신년사 中
2014년 1월 신년사 中
큰 형님이셨는데, 마음이 아프다.
2018년 김종필 국무총리 서거 소식을 들은 후.
2018년 김종필 국무총리 서거 소식을 들은 후.
7. 별명
7.1. 쁘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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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거니를 그린 작품[43] |
7.2. 시츄건희
유난히 강아지를 좋아하고 이 회장의 외모도 견종(犬種) 시츄를 닮기도 해서 생긴 별명이다. 이렇듯 재계에서 소문난 애견가인지라 부하 직원에게 각 계열사 사장 중 누가 보신탕을 먹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는데, 부하 직원이 이유를 묻자 보신탕을 먹는 사장들에게 개를 키워보게끔 강아지를 한 마리씩 선물하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질 정도다.
8.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이건희/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9. 여담
- 4대 그룹 대기업 회장이기에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이명박 대통령 등과 차담을 나눌 수 있었다.
- 생전에 기관지가 많이 약해 림프암 수술에[44] 6년간 심근경색 투병을 했었다. 그래서 집 내부에 따로 공기청정 시스템이 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전기료를 가장 많이 낸 사람이기도 했다.
- 아버지로서 이재용을 엄격하게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홍라희는 말로 훈계를 했지만 이건희는 빠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재용의 소심한 성격이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 이건희가 가장 아꼈던 자녀는 바로 막내딸 이윤형이었다. 늦둥이로 얻은 딸이었다보니 이건희가 금지옥엽으로 여기며 키웠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2005년, 이윤형이 미국 유학 도중 자살하면서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 부산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사립학교를 나왔을 것 같은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초중고 모두 국립학교를 졸업하였다.[45] 1970년대 평준화 이전의 지역 명문고들은 국공립이 최우선이었고 사립이 후순위였다.
- 아들인 이재용은 재벌 개그를 담당하고 있고, 이건희는 재벌 총수가 주는 이미지와는 다른 귀여운 외모로 한때 쁘띠 거니로 알려졌었다. 이 별명을 본떠 이건희의 여러 가지 모습을 모아놓은 '쁘띠거니' 시리즈가 한때 유행했었다. XX에 상황에 어울리는 말을 넣어놓고 'XX거니'라는 제목을 달아놓는 형식. 예시.
-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부 소속이었다. 럭비도 좋아했고 승마도 즐겨했던 모양이다. 이를 바탕으로 레슬링협회장[46]과 승마협회장을 맡았다. 2008년 특검 수사 때는 수사관들에게 승마의 장점에 대해 줄줄이 설명하면서 아예 직접 배워보라고까지 권했었다.
- KBO 리그 창립 초창기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삼성 라이온즈 초대 구단주[47]로 야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구단 경영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때 롯데 자이언츠에 패한 뒤로는 직관은 안 간다고 한다.[48]
- 재벌 중에서도 소문난 애견인으로 유명한데, 한남동 자택에서도 포메라니안, 요크셔테리어, 치와와를 포함한 여러 마리의 반려견을 키웠으며 특히 '벤지'라는 이름의 포메라니안을 무척 아껴서 이 개가 16세의 나이로 노령으로 사망하자 충남대에 연구비를 지원하여 이 개를 체세포 복제하기도 했다. 삼성화재의 맹인안내견 육성 사업을 통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안내견 육성을 지원하고 있으며, 에버랜드를 통해 진돗개라는 견종을 국제적으로 알린 것도 삼성인데 이러한 사업에 이 회장의 반려견 사랑이 반영되었다는 평가다. 또한 갤럭시 휴대폰의 테스트 모드중 하나인 *#0*#에 사진이 숨겨져 있다. 센서 버튼을 누른 후 이미지 테스트를 누르면 나온다.
- 반려견 사랑과 함께 부하 직원을 직접 문책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알려주는 성품이 반영된 일화가 있는데, 어느날 모 임원을 불러 "우리 사장단 중에서 혹시 개고기 보신탕을 먹는 사장이 있는지 조사해달라"고 하자 해당 임원이 "명단이 제출되면 문책하실 생각이시냐"고 물었다. 이에 이 회장은 "아니, 강아지를 한 마리씩 선물하겠다"고 했다고. 관련 기사 강아지를 직접 키워보면 보신탕을 먹는 일을 안할 것이라 생각하여 완곡하게 알려준 것이다. 실제로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국제 행사 때 한국인이 개를 먹는다는 외국의 인식 때문에 평가절하당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 일본에서 산 유년 시절에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가정교사의 특별 교육만 받아 평범한 친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건희는 거의 하루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고 한다. 이것은 이건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같은 영화를 수차례 관람하면서 각각 주연, 조연,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이는 회장이 된 후 다각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49] 그가 처음으로 입사했던 동양방송의 운영이나 안목에도 이러한 유년시절의 취향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
자동차 애호가로도 유명해 자동차 수집과 운전도 좋아했다. 가끔은 에버랜드 서킷을 전세 내고 레이서에게 교습 받아가며 드라이빙을 배웠다고 한다.
1982년에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정도. 세계 최고가 차량인 페라리 250 GTO[50] 를 포함한 클래식 카들은 물론 고급
세단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슈퍼카 매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2015년 조사 결과 26억원짜리
부가티 베이론 16.4 포함 총 12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고, 차량 가격을 다 합치면 총 477억 원에 달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단 한대 있는
부가티 EB 110도 소유 중이었다.[51] 그런데, 이게 1억 원 이상 차량만 조사한 거라서 1억 원 이하의
저렴한차량은 누락되었다는 게 함정이다. 관련기사
- 상당한 오디오광으로도 유명했다. 일본의 고급 오디오 회사인 럭스만을 인수했다 되팔기도 했고, 마크 레빈슨·헤일즈 스피커와 손을 잡고 엠퍼러라는 하이엔드 오디오를 출시했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정리했다. 와병하는 동안 삼성이 하만을 인수하면서 하이엔드 오디오에 재진입하였다.
- 카메라도 좋아해서 돈이 되지 않아도 카메라 사업에 꾸준히 투자를 하기도 했다.
- 에피소드로 외제차를 구매하다 영업사원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포르쉐를 구입하려 매장을 방문한 이건희가 포르쉐를 총 6대 고르고 계약 사인을 하고 가는데 신입 직원이 몰라보고 계약금을 달라며 발목을 붙잡은 일이 있었다. 이에 이건희는 지갑 가져와라 하면서 3억을 즉납했다는 일화도 있다. 벤틀리 매장서는 벤틀리를 고르는데 역시나 이건희를 몰라본 직원이 차를 리스로 하면 좋다는 조언을 해주고 직원은 신원조회를 위해 이건희의 정보를 삼성캐피탈에 의뢰했다는 웃긴 이야기도 있다. # #[52]
- 위와는 반대로 기겁할 만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삼성 종로 대리점 점장이 삼성본관 지하에 전자제품 매장을 만들었을 때 자기 고향 사람을 인맥으로 꽂아뒀는데 이건희 회장이 제품을 구경할 겸 그곳에 갔다가 전자제품을 작동해 봤는데 제대로 작동되는 게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직원에게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는데 직원은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퉁명스럽게 나오고, 이건희는 기막혀서 물건이 고장났냐고 물어봤지만 직원은 당신이 월급 주는 사람이냐며 뭐 그리 참견하는 게 많냐고 했다. 당연히 극대노한 이건희는 그 매장을 바로 철수시켜 버렸고 그 직원도 바로 짤려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53]
-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던 습관이 있었는지 경영권을 이어받은 후에는 회사일 외에 대중 매체나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주로 한남동 자택에서 집무를 보며 은둔과 칩거 등을 반복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건희의 비서팀장을 지냈던 기외호 전 코리아 헤럴드 사장에 따르면 항상 오후 5시 무렵이 되면 이건희로 부터 집에 들르라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남동 집으로 찾아가면 자신을 방안에 앉혀 놓고 게토레이를 마셔가며 수많은 질의와 업무지시 그리고 삼성전자 와 소니 얘기 부터 정치 이야기,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등을 몇시간동안 풀어놓는다는 것. 또 국제적 기업의 회장답게(?) 3~4개월간 미국, 중국, 유럽 등으로 국외 출장도 잦았으며, 암 투병 경험에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데다 폐까지 좋지 않아 요양 겸 하와이, 타이완 같은 곳으로도 오래 나갔다.
- 기외호는 이건희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며 위의 일화를 포함하여 그의 괴짜같은 면모를 여러차례 접할 수 있었는데 하루는 이건희가 "비서팀장은 내 가면만 써도 누가 회장인줄 모를 정도로 나와 생각과 행동이 똑같아야 된다. 그래야 제대로 보필할 거 아닌가, 내가 집에서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아는가? 나 없을 때 우리 집에 가서 침실도 보라"는 말을 하여 기외호는 ‘그렇게 할 정도로 보필에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만 알고 넘겼다. 근데 시간이 지나서 이건희가 정말로 "가 봤느냐"고 묻더란다. 그제서야 그게 농담이 아니었구나 싶었던 기외호는 이건희의 한남동 집으로 달려가 침실을 둘러보는데 책장은 물론이고 방 여기저기에 엄청나게 많은 책과 비디오 테이프, dvd등이 쌓여 있는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한창 집을 둘러보고 있던 기외호에게 이건희가 전화를 하여 "어떠냐"하고 느낌을 물어보길래 기외호가 "너무 어지러워서 우선 정리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이건희는 "절대 손도 대면 안 된다. 내 나름대로 다 정리해놓고 있는 거라 남이 건드리면 내가 못 찾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 옛부터 국내 대기업 총수들은 대외적으로 모습을 노출하는 경우가 적다. 연예인처럼 언론지상에 자주 오르내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54] 언론 접촉도 신문 매체의 경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자주 하였으나, 그 후에는 거의 없다. 2003년 동아일보에서 질문지를 기자가 미리 보내면 비서와 함께 구술을 통해 답변하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다만, 뉴스에는 이따금씩 나온다. 본사 사옥으로 출근할 때나 해외로 출국할 때, 생일 파티나 만찬 같은 각종 모임이 있으면 행사장 앞에서 기자들 모아 놓고 스탠딩 인터뷰 잠깐 하는 정도다.[55]
- 막내 딸 이윤형이 2005년 미국에서 자살했다. 처음엔 교통사고라고 했지만 뉴욕시경의 발표에선 맨해튼 숙소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나오지 않았지만 뉴욕에 유학간 이윤형이 그곳에서 남자친구와 사귀었고[56]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주지 않아서 자살한 거라는 추측만 있다. 딸이 사망했지만 이건희는 뉴욕을 방문하지 않았고, 언니들인 이부진과 이서현이 와서 시신을 수습해 갔다고 한다. 관련 자료. 그녀가 보유한 삼성 주식은 사후 장학재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과는 선대째부터 내려져 오는 인연으로 10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경영 멘토로도 매우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김승연이 중대한 경영상 결정 사항이 있으면 이건희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57] 반대로 당시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이었던 이재용을 김승연에게 보내 경영 수업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58] 또한 이건희 본인이 별장으로 놀러 갔을때 한화 이글스가 전지훈련을 오자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승지원으로 김승연을 불러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덕분에 자식들도 나이차가 있음에도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병상에 누워 지내기 직전인 2014년엔 삼성그룹의 위기를 언급 하면서 삼성이 변해야 한다는 언급과 함께, 한화도 변화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하며, 삼성그룹과 한화그룹의 빅딜 기반을 설계 했다고 한다.[59] 이건희가 사망하자 이튿날 바로 조문하여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나누었으며, 언론에 "형님처럼 모시던 분"이라며 "가장 슬픈 날이다"라고 애통해하기도 했다.
- 국내 재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과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니만큼 재벌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이건희 손자에게도 공짜로 급식을 줘야 하느냐?" 등이 있다.
- 사후 이건희가 생전에 남겼다고 추정되는 편지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본인이 작성한 것인지 확인된 바가 없는 루머이므로 이 점을 유의하는 것이 좋다. 편지가 널리 확산되자 삼성 측에서 공식적으로 해당 편지는 1년 전부터 인터넷에 떠돌던 내용이라면서 부인했다. 기사
- 그의 사망 전에 그의 사망과 이재용의 승계에 대한 꿈을 미리 꾼 지식iN 이용자가 있다. 네이버 지식iN 질문 정작 질문 작성자는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하다. 다만, 이건희는 투병한지 오래 되었고 한때 사망설까지 퍼질 만큼 건강이 좋지 못한 게 세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딱히 예지몽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 라면을 비롯한 면류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던 날 저녁식사 메뉴도 국수였다. 이건희는 평소 당뇨가 심한데도 식단조절을 하지 않아 이재용 부회장의 걱정이 커던 듯 하다. # 더불어 상당한 대식가였는데 98년 어느날 밤 늦게 이건희의 자택에 초대받았던 최규선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이건희는 자동차 사업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의 투자문제 등을 이야기하며 옆에 놓여있던 케이크 한판을 다 먹었다고 한다.
- 보수 진영일각에서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으로 띄어지는 군사정권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나 #, ## 정작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고 # #, 노태우 정권때는 자동차 산업 진출을 노려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압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
- 인생사에서 21세기 현 시대의 비중이 큰만큼 역사 속의 인물 같은 느낌은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삼성그룹을 이어받은 창업주 이병철의 메인 후계자이자 아직 군사 정부가 종식되지 않았던 1980년대에 그룹을 물려받은만큼 매체에서의 등장도 있다. 2005년 MBC 드라마 제 5공화국 33부 국제그룹 해체 1편 앞부분의 재판 장면에서 잠시 나오는데 배우 최재형이 연기하였고,[60]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이건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 국철규가 나오는데 젊은 시절의 국철규는 배우 손지창이, 중년의 국철규는 배우 임채무가 이건희 회장을 연기하였다.
10. 참고 자료
-
다큐인사이트: 이건희, 거인의 유산 (2020.10.29. KBS1)
[1]
지금의
인교동 오토바이골목에 '호암 이병철 고택'이자 이건희의 생가가 있다.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보니, 본인의 고향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
# 그러나 태생만 이곳이지, 의령에서 자랐던 탓에 사실상 의령 출신이고 한때는 네이버 프로필에 출생지가 '경상남도 의령'으로 나와 있었다.
[2]
정확한 사망 시각은 오전 3시 59분이며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의 후유증인
신부전이다.
#
[3]
판전공파(判典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 중시조 40세 ○희(○熙), ○형(○炯) 항렬. 판전공파는 파조(派祖) 이강(李
)이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 즉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역임하였기에 줄여서 판전공(判典公)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의미상 판사공(判事公)으로 해야 옳다는 의견도 있다. 전객시는 예빈성(禮賓省)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하던 관청이다. 전객시의 장(長)은 정3품 판사로 하였다. 사정(司正)은 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7품 관직이다.
[4]
이재용의
장남. 이건희의 첫 손주이자
장손이기도 하다.
[5]
이재용의
장녀.
[6]
이부진의
장남.
[7]
이서현의
장녀.
[8]
이서현의
차녀.
[9]
이서현의
3녀.
[10]
이서현의
장남.
[명예회장]
[명예위원]
2017년 8월 11일
IOC 집행위원회는 이건희의 가족에게서 더는 이건희를 IOC 위원으로 간주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2017년 9월 16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131차 IOC 총회에서 10년간 국제 스포츠계에 기여한 공을 감안하여 IOC 명예위원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IOC 위원은 유승민 선수위원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2명이며, 지금까지 추대된 IOC 명예위원은 42명이다.
[13]
원기 73년(1988년) 1월 입교.
원남교당 소속. 법명은 이중덕(李重德), 법호는 중산(重山)이다.
[14]
한때 예비역 육군 병장으로 알려졌으나
병역면제설과
방위병설,
현역병설이 모두 있다. 삼성그룹의 공식 입장은
육군 현역이라는 것이다.
[15]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20조 이상을 가졌던 사람이다.
[16]
이 시기 부모 이병철 - 박두을 부부의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았다.
[17]
이 싸움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는데, 이병철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끔 일본인 작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던 이맹희에게 죽일 기세로
골프클럽을 휘둘렀으며, 이후 영영 부자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18]
이건희와 홍사덕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 건희, 사덕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최규선에 따르면 이건희는 홍사덕을 가리켜 본인의
죽마고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19]
훗날 양화대교는 교각 사이로 화물선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각의 중간을 없애고 대형 아치교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 중간의 교각 간격을 넓힌 후에도
이 다리 밑으로 화물선이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20]
연희전문 상과가 모태이며 차후
경영학과와
경제학과로 분리. 일본에선 현재도 경영학부 대신 상학부가 있는 경우가 많다. 경제학이 경제 현상의 이론적 해석을 다루고, 경영/상학은 경제이론의 토대 위에 생산, 유통, 소비 등 경제활동을 다룬다. 한편 경영학이 조직의 운영/관리를 다루는 반면 상학은 유통/교통/무역/금융/보험/회계 등 경제적 사업체에 의한 상업행위 전반을 다룬다.
[21]
수료. 졸업은 하지 않고 도중 귀국. 따라서 이건희의 아버지 이병철도 와세다
출신은 맞지만 졸업은 아니었다. 다만 훗날 와세다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아서 졸업생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22]
명예(Honorary)지만 이것도 정말 받기 힘들다.
[23]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건물 한 층 전체 철 재질 안내문의 상단에 이건희기념도서관 Lee Kun-Hee Commemorative Library이라고 적혀있으며
일본어,
한국어,
영어로 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24]
실제로 이건희 선대회장은 애교심이 강해서 와세다 도서관에 30억원 이상을 기부했으며, 와세다 한국교우회에는 2003년부터 10억원, 11억원 등 큰 액수의 기부를 계속했다. 생전 2020년까지 크고 작은 기부는 계속되었다.
#
[25]
다른 계열사도 아니고 하필 왜 언론사에 입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당시 삼성그룹은 지금과 같은 글로벌 수출기업이 아닌 내수기업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고 삼성의 언론사업은 삼성 제품들을 홍보하는 매체로서 중요성이 컸었다. 또한 당시 한국의 작은 경제규모에 비해 신문사업 방송사업은 꽤 덩치가 큰 분야였다.
이병철은 언론(방송, 신문, 잡지, 출판) 사업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고, 외국 특히 일본의 언론 재벌들이 사회적 영향력과 존경을 누리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아끼는 3남 이건희를 언론사에 입사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글로벌 삼성의 핵심 주력 계열사가 되는
삼성전자는 이건희가 삼성그룹에 입사하고 3년 후에야 창사되었다.
[26]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18년이 지난 1987년에 사망한다.
[27]
제프리 케인의 삼성 라이징에 따르면 이병철이 실제로 이태휘를 후계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가 미국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잠시 의료용 마약에 중독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태휘와 경쟁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28]
드라마에 대한 이건희의 통찰력을 드러낸 일화를 소개하자면 자사 소속 중견 배우였던
강부자,
이순재,
여운계 등의 급여 지급과 대우에 신경 쓸 것을 드라마 제작진들에게 주문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주연은 얼굴 반반하고 적당히 연기하면 되지만, 극을 살리는 건 조연이니까 잘 챙겨줘야 한다." 그 덕에
언론통폐합 이전의 TV 3사 드라마 중에서는 TBC 작품의 인지도와 시청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29]
1974년 12월
[30]
이 당시 누적 적자가 수천억에 달하면서도 추가 투자 결정하자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이병철에게 반대 의견이 빗발쳤으나 그는 '내한테는 돈냄새가 난다'면서 쿨하게 무시했다고 한다.
[31]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 또는 '신경영 선언'
[32]
당시 삼성의 2인자나 다름없었던 이수빈 현 삼성경제연구소 회장마저 그의 극단적인 질적 개혁안에 반대하다가 이건희가 화가 나 티스푼을 테이블 위로 던진, 일명 티스푼 사건도 이 때였다. 물론 화난다고 스푼을 던진게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개혁이 험난했으며 이건희가 생전 회사 내에서 신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한 것이 괜히 형성된게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33]
심지어 상당한 질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난 1990년대에서도 선진국에서는 삼성을 'Sam-Suck'이라 부르며 2류 기업 취급하는 분위기가 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한거다.
[34]
계열사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재단인 데다가, 이 재단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어서 재계에서는 사실상 삼성을 승계했다고 판단한다.
[35]
그런데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이 빈소 사진을 찍어 SNS에 공개하는 바람에 비판을 받았다.
[36]
워낙 값어치가 있는데다가 규모 또한 어마어마해 가치가 2 ~ 3조원 내지는 10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37]
24일 경영 복귀 발표
[38]
1일 공정위에서 동일인을 이재용 부회장으로 변경
[39]
취임은 12월 1일
[40]
22일 회장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 경영쇄신안 발표, 7월 1일 공식 퇴진
[41]
원래는 "첨단 산업인 반도체 공장 건설에도 도장 1천 개가 필요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무분별한 기업 규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좌우를 막론한 수많은 칼럼니스트가 제 입맛에 맞게 가져다 쓰기 시작하면서 오용된 말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말을 들은 김영삼 대통령은 격노하였고 이건희는 일본으로 반도피성 체류를 떠나게 된다. 한국에 남은 삼성 임원들도 김영삼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YS 방미 당시 500만 달러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 비용을 기부하고, 파격적인 중소기업 상생 방안을 발표하는 등 YS 정부에게 기었다.
김종인은 이 발언을 민간 경제권력이 정치 권력을 넘어서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함축한 발언이며, 더 나아가서 이젠 더 이상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자신감 혹은 오만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42]
#
[43]
토모 타바타(tomo tabata) 작품.
[44]
이 때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 및 치료를 반복했는데, 이건희 회장의 치료를 주도한 사람이 한국 의사인 종양내과 홍완기 박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했다. 1984년에 스카우팅된 이후 MD 앤더슨 암센터에서도 종양내과 부문 책임교수까지 올랐고, 폐암, 두경부암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2019년 별세. 그 외에도 전 국립암센터 원장이었던 이진수 박사도 이 당시에 같이 MD 앤더슨에서 근무했으며, 근무 당시에도 이건희 회장의 치료를 홍완기 박사랑 같이 맡았다.
[45]
물론 국립 초등학교는 공립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사립학교에 준할 만큼 교육의 질이 매우 좋다. 단지 학비가 무료일 뿐이다. 중/고등학교는 일반적인 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으며, 사립학교도 뺑뺑이 돌려서 배치되는 곳은 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다. 공립학교 출신의 정치인, 기업인들도 많은 것을 보면 무조건 사립학교를 갈 것이라는 것도 선입견이긴 하다.
[46]
레슬링협회장,
대한체육회
이사를 거쳐
1996년
IOC 위원에 당선되었다.
[47]
나중에는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등 그의 경영 참모들이 구단주 역할을 대리했다.
[48]
그가 야구장에 갈 때마다 라이온즈가 패하는 징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때도 처음에는 자택에서 TV로 중계를 보다가 삼성이 리드를 잡자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는데 하필 야구장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순간
장효조의 결정적 수비 실책(일명 '만세 사건')이 터지면서 경기가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유두열의 역전 홈런과
최동원의 역투로 팀이 준우승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다. 이후 단 한 번도 야구장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라이온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상당했다. 대조적으로 아들
이재용은 야구장에 갈 때마다 승리하는 이른바 '재용불패' 징크스가 유명했다.
[49]
2014년 병환으로 쓰러져 있을 때에는 병원 측에서 의식이 깨어나도록 그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틀어줬는데 자주 보던
스타워즈 시리즈와
삼성 라이온즈 경기 등을 보여줬다고 한다.
[50]
22번 차량이다. 1996년에 구매했다가 2007년에 익명의 영국인 수집가에게 매각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해당 구매자는 바로 다음해에 이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다.
[51]
다만 후에 반납했다는 말을 보아 아직까지 소유 중인듯 하다.
[52]
근데 계약금은 구매자가 돈이 있냐 없냐를 떠나서 앞으로 구매절차에 대한 담보적 성격이기 때문에 받는 게 옳다. 예를 들면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차를 구매하기로 해서 영업사원이 이런저런 절차를 다 거쳐놨는데 갑자기 안 산다고 하면 영업사원 입장에서는 손해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 손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 받아 두는 것이다. 상대가 돈이 아무리 많든 말든 이 경우에는 별 관계가 없다.
[53]
위의 경우는 이건희를 못 알아보긴 했어도 엄연히 절차대로 한 것이지만 이건 이건희가 아닌 일반 손님에게 했어도 바로 짤릴 만한, 그야말로 짤리고 싶어 안달난 수준의 행동이었다.
[54]
다만 최근에는
SK그룹의
최태원이나
현대자동차그룹의
정의선처럼 대기업 총수들 중에도 언론이나 외부매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도 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건희와 비슷한 세대의 기업인들 중에도
김우중이나
정몽준처럼 언론 노출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도 있긴 하다. 다만 이건희의 경우 본인의 성격보다는 지병의 영향으로 언론노출을 꺼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55]
삼성그룹에서 오랫동안 홍보를 담당해왔던 이순동에 따르면 사실 이건희는 기자들을 만나는걸 꽤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희가 기자를 앉혀놓고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몇시간을 이야기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발언이 나올지 모르니 홍보팀이나 비서실에서 이에 대해 우려하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장시간의 인터뷰를 자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56]
장녀
이부진의 남편 임우재도 오랜 세월 동안 삼성물산 사원 출신으로 삼성그룹 봉사활동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혼 뒤 본인 스스로 삼성에스원 소속의 경호원이었으며 경호를 하다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가게 됐었다고 진상을 밝힌 바 있다.
[57]
대한생명 인수에 나서기 전 김승연이 이건희를 찾아와서 "형님! 금융 사업의 노하우를 전수해주시면 형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잘 해보겠습니다"라고 조언을 구했다. 이후 이건희는 김승연에게 많은 조언을 전했고 결국 생명보험사 인수에 성공해
한화생명을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키우게 된다.
[58]
반대로 김승연 회장이 어린 나이로 회장직에 급작스레 올랐을땐 이병철 회장이 김승연 회장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59]
이후엔 자손들인 이재용과 김동관이 서로 성사 시켰고, 서로에 대한 그간의 믿음 덕분에 기업 실사도 생략했다고 한다.
[60]
짧게 잠시 나오며, 싱크로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영웅시대의 임채무 못지 않은 이건희 느낌을 잘 살려냈다. 조용한 카리스마로 법정 분위기를 휘어잡아가는 것도 이건희와 비슷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