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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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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서울특별시장
임흥순
任興淳 | Lim Heung-soon
파일:external/rokps.or.kr/215.jpg
일치(一痴)
본관 풍천 임씨[1]
출생 1895년 12월 9일
한성부 한성군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71년 12월 14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6-9번지 자택
재임기간 제9대 서울특별시장
1959년 6월 12일 ~ 1960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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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e1932><colcolor=#ffffff> 학력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2, 3
약력 대한금융조합연합회 감사
성동구동회 연합회장
민의원 국방위원장
자유당 총무부장
자유당 중앙집행위원회간사장
자유당 중앙상임위원회의장
제9대 서울특별시장
}}}}}}}}}
1. 개요2. 생애
2.1. 광복 이전2.2. 광복 이후
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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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9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2. 생애

2.1. 광복 이전

1895년 12월 9일 한성부 한성군(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임창재(任昌宰, 1860 ~ 1919. 2. 25.)와 어머니 광주 이씨(1861 ~ 1929. 4. 19.)[2]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5대조 임후상(任厚常, 1755 ~ 1833. 3. 27.)은 1786년( 정조 10) 식년 진사시에 3등 61위로 입격하고 1792년(정조 16) 식년 문과에 갑과 2위, 즉 아원(亞元)으로 급제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호조 참의(參議) 등을 역임했고, 증조부 임하준(任夏準, 1816 ~ 1892. 5. 5)은 1885년( 고종 22)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3품), 1887년(고종 24)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 정3품), 1888년(고종 25)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등을 역임했다. 조부 임택호(任澤鎬, 1839 ~ 1895. 1. 25)[3]는 1867년(고종 4) 식년 진사시에 2등 17위로 입격한 뒤 고원군수(高原郡守)에 재직 중이던 1885년(고종 22) 증광 문과에 병과 35위로 급제해 1890년(고종 27) 병조 참지(參知, 정3품), 1894년 청주목사(淸州牧使, 정3품) 등에 올랐다. 아버지 임창재는 1880년(고종 17) 증광 진사시에 3등 10위로 입격해 1904년(고종 41) 장기군수(長鬐郡守), 1907년(순종 1) 연일군수(延日郡守) 등을 역임했다.

임흥순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해 체포되었으나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곧 출옥했다. 1921년 4월 주식회사 '서울사(社)' 상무취체역, 동아신탁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했다.

1924년 6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합작해 반일운동 및 사회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조직된 동민회(同民會)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에 가담하게 되었고, 1929년 11월 경성부 부협의회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9월 경성부 동구방호단 제1분단장으로서 단원들로부터 수합한 놋그릇 686개를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헌납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부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그해 10월부터 평의원으로 재임했다. 1941년 12월에는 성동주민 군용기 헌납기성회를 조직해 이사에 취임했고, 성동구 주민들을 대상으로 군용기 헌납운동을 전개했다.

2.2. 광복 이후

8.15 광복 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간사, 성북구 동연합회 회장 등으로 일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5월 10일 부통령 이시영이 사표를 내자 "중대한 일임으로 이승만과 이시영을 국회로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자"라고 말하였다. 동년 9월 29일 6.25 전쟁으로 인한 서울의 실정을 보고하였다.[4]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때,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1953년에는 2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전시에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서 상당히 많은 일을 하였는데 국방위원회의 법안들을 본회의로 회부시키는건 기본이고 전쟁 현장에 가서 직접 여러일을 수행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6년 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자유당 총무부장, 중앙집행위원회 간사장,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등을 거쳤다. 한편 국회에서는 국방위원회에 속해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유성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9년 6월 12일부터 1960년 4월 30일까지 관선 제9대 서울특별시장 역임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 청계천 지하에 배수로를 매설하고, 용산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現 의정부시)를 연결하는 순환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또한 1960 AFC 아시안컵 대한민국을 대비해 효창운동장에 축구장을 신설했고, 서울특별시 관내에 4개 보건소 청사를 새로 짓는 한편, 공중변소, 공동우물, 공중목욕탕 등을 증설했다.

4.19 혁명 이후 정계를 잠시 은퇴했다. 같은 해 3.15 부정선거,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고, 1961년 8월 25일 혁명재판 제1심판부에서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21일 형면제를 받고 석방되었다.

1965년 재보궐선거 당시 재건 자유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중당 김상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1971년 12월 14일 오후 5시 40분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6-9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을)

14,250표 (41.98%) 당선 (1위)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갑)

[[무소속(정치)|
무소속
]]
12,072표 (55.50%) 재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갑)

[[자유당(1951년)|]]
12,453표 (29.53%) 낙선 (2위)
1965 1965년 재보궐선거 (서울 서대문구 갑)
[[자유당|]]
9,103표 (29.72%) 낙선 (2위)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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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애공파(竹崖公派) 28세 순(淳) 항렬. [2] 이용근(李容根, 1824 ~ ?)의 딸이다. 이용근은 1855년(철종 6) 식년 진사시에 2등 12위로 입격했다. [3] 초명 임규호(任奎鎬). 청하현감(淸河縣監) 재직 중이던 1880년(고종 17) 8월 28일 임택호(任澤鎬)로 개명했다. [4] 서울의 구호대상 문제와 의약품 문제를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