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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부장관 (1948~1998) | |||||
<nopad> 이승만 정부 | ||||||
초대 윤치영 |
제2대 신성모 |
제3대 김효석 |
제4대 백성욱 |
제5대 조병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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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이승만 정부 | ||||||
제6대 이순용 |
제7대 장석윤 |
제8대 이범석 |
제9대 김태선 |
제10대 진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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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이승만 정부 | ||||||
제11대 백한성 |
제12대 김형근 |
제13대 이익흥 |
제14대 장경근 |
제15대 이근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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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
제16대 민병기 |
제17대 김일환 |
제18대 최인규 |
제19대 홍진기 |
제20대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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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장면 내각 | ||||||
제21대 홍익표 |
제22대 이상철 |
제23대 현석호 |
제24대 신현돈 |
제25대 조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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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장도영 내각 | <nopad> 김현철 내각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26대 한신 |
제27대 박경원 |
제28대 엄민영 |
제29대 양찬우 |
제30대 엄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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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박정희 정부 | ||||||
제31대 이호 |
제32대 박경원 |
제33대 오치성 |
제34대 김현옥 |
제35대 홍성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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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36대 박경원 |
제37대 김치열 |
제38대 구자춘 |
제39대 김종환 |
제40대 서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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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전두환 정부 | ||||||
제41대 노태우 |
제42대 주영복 |
제43대 정석모 |
제44대 김종호 |
제45대 정호용 |
||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
제46대 고건 |
제47대 정관용 |
제48·49대 이상희 |
제50대 이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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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 ||||||
제51대 이한동 |
제52대 김태호 |
제53대 안응모 |
제54대 이상연 |
제55대 이동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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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 <nopad> 문민정부 | |||||
제56대 백광현 |
제57대 이해구 |
제58대 최형우 |
제59대 김용태 |
제60대 김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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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문민정부 | 1998년 총무처와 정무장관(제1실)과 통합 | |||||
제61대 서정화 |
제62대 강운태 |
제63대 조해녕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행정자치부장관 (1998~2008) | ||
<nopad> 국민의 정부 | ||||||
초대 김정길 |
제2대 김기재 |
제3대 최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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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국민의 정부 | <nopad> 참여정부 | |||||
제4대 이근식 |
제5대 김두관 |
제6대 허성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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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참여정부 | ||||||
제7대 오영교 |
제8대 이용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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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장관 (2008~2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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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이달곤 |
제3대 맹형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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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행정부장관 (2013~2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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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자치부장관 (2014~2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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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종섭 |
제2대 홍윤식 |
제3대 김부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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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장관 (2017~현재) | ||||||
<nopad> 문재인 정부 | ||||||
초대 김부겸 |
제2대 진영 |
제3대 전해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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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윤석열 정부 | ||||||
제4대 이상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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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내무부장 | }}}}}}}}}}}} |
역임한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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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출생 | 1903년 5월 18일[1] | ||
함경남도 고원군 | |||
사망 | 1977년 1월 7일 (향년 73세) | ||
서울특별시 성동구 한양대학교 부속병원 | |||
재임기간 | 제2대 내무부 치안국장 | ||
1950년 4월 24일 ~ 1950년 6월 17일 | |||
제4대 내무부 치안국장 | |||
1950년 7월 17일 ~ 1951년 6월 18일 | |||
제5대 서울특별시장 | |||
1951년 6월 27일 ~ 1952년 7월 23일 | |||
제9대 내무부 장관 | |||
1952년 7월 24일 ~ 1952년 8월 29일 | |||
제6대 서울특별시장 | |||
1952년 8월 29일 ~ 1956년 7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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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학력 |
숭실전문학교 (졸업) 노스웨스턴 대학교 (영문학 / 학사) 일리노이 웨슬리언 대학교 (범죄학·사회학 / 학사) 보스턴 대학교 (신문학 / 석사) |
|
경력 |
경무부 수사국 부국장 경무부 수사국장 수도경찰청장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장 내무부 치안국장 제5대 서울특별시장 제9대 내무부장관 제6대 서울특별시장 재향경우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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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2. 생애
1903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과(학사 과정)를 수료했으며, 일리노이의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범죄학 및 사회학(학사 과정)을 전공한 뒤에 보스턴 대학교의 대학원에서[2] 신문학(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국내로 귀국하였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복역하였다.8.15 광복 후 미군정청의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3] 1949년 서울특별시청의 경찰국장을 재임하면서[4]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체포를 방해한 덕택에 1950년 내무부 치안국장(1950년대~1960년대의 이사관급 경찰총수)으로 승진했으며,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국민보도연맹에 깊이 관여했다.
1951년 6월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고, 서울특별시청의 도시계획과장(장훈)이 착수한 초보적인 도시계획을 서둘러 실행했으며,[5] 1952년 7월 이범석 장관의 후임으로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 달 만에 경질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정부의 선거 개입 여론이 나오자 재빨리 손을 쓴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곧이어 서울특별시장에 다시 임명되어 1956년 7월까지 근무하였다. 1953년 치안국장 재직 시 자유수호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미국자유훈장을 수여받았다. #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귀속재산을 부정하게 불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그해 9월 석방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재향경우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1월 7일에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고혈압으로 인해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기타
이환경 작가의 무풍지대, 야인시대에서는 동대문상인연합회 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4. 관련 문서
[1]
음력
1903년
4월 22일
[2]
워낙 오래 전인 1937년경의 일인데다 당시
BU와
BC를 구분 않고 '보스톤대'라고 지칭하던 시절이라 BU인지 BC인지 정확한 검증은 어렵다. 다만 개신교 계열의 미션스쿨을 다닌 점에서 카톨릭 계열인 BC보다는 개신교 계열인 BU 쪽일 것이다. 사실
이필립의 예에서 보듯, BU와 BC의 혼동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3]
조선총독부의
경찰문관으로 일했다고 잘못 적어놓은 책이나 글도 많이 있었다. 광복 이후 오랜 미국 체류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향 덕분에 미군정이 경찰공무원으로 채용한 것이다.
[4]
지금의
지방경찰청(
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은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
도지사/
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
국장/내무부
차관→
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
[5]
이미 쓰러진
시체와
가로수를 모두 치우고,
세종로의
너비를 100
미터로 넓히고,
서울시민회관의 건설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