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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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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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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김용식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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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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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7대 체신부장관
이응준[1]
李應俊 | Lee Eung-jo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General_Lee_Eung-jun_1948.jpg
출생 1890년 8월 12일
평안남도 안주군
(現 평안남도 안주시)
사망 1985년 7월 8일 (향년 94세)
서울특별시
본관 수안 이씨
추연(秋硏), 추정(秋汀)
재임기간 초대 육군총참모장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5월 8일
제7대 체신부장관
1955년 9월 16일 ~ 1958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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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이정수
배우자 이정희
자녀 슬하 2남 3녀
친인척 장인 이갑
장조부 이응호
맏사위 이형근
외손자 이현
학력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육군무관학교 (졸업)
종교 유교 ( 성리학) 개신교
약력 제7대 체신부장관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훈 태극무공훈장 (1954)
무공포장 (1956)
보국훈장 통일장 (1971)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5)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14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1955년 9월 18일
최종 계급 대좌 (일본제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모슬포 제1훈련소장[2]
주요 보직 육군 제3보병사단장
육군대학총장
육군총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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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데이트 강간 논란4. 여담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대한민국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병 구완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일본군 고급장교로서 친일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중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응준의 1년 후배인 김석원의 경우와도 매우 비슷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890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이정수(李正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6년 상경하였다. 고향선배이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노백린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로 하였고 육군무관학교에 1908년 편입하였다. 또한, 노백린의 소개로 이응준과 동향인 이갑을 만나 그의 집에서 지내면서 육군무관학교 편입 이전 보성전문학교 1학년을 1기로 다녔다. 1908년에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남은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하였고 순종황제의 명령하에 1909년 9월 3일 일본 동경 소재 일본 육군 유년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으로 일본 유학을 허가받아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 임관하였다. 이응준은 32등으로 졸업하였으며 이는 홍사익(26등)을 이은 최고 등수였다. 그의 다른 동기들은 대한제국 김기원 장교의 남동생 김준원, 유승렬, 작가 염상섭의 친형 염창섭, 조철호, 신태영, 박승훈 등이 있다.[3]

임관 직후 제1사단 제3연대에 배속받은 뒤, 치바 보병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으면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8년 8월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일본이 가담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된 일본 파견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통해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파악하고 대민 정탐 활동 업무를 담당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청천, 김경천 등과 일본군을 벗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합의하고 망명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최성수에게 권총을 빌려주었다가 최성수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헌병대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고, 그를 아끼던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배려로 풀려났지만 대신에 망명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20년 이응준이 최성수에게 권총을 제공한 사건에 연루되긴 했으나 단순 도난 사건으로 처리되어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4] 이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이 때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 혹은 무기를 제공하더라도, 제공받은 이가 체포될 시 제공자까지 연루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로 절도 혹은 강도로 입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5]

어쨌든 이응준은 우쓰노미야 대장에게 칭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그는 일본 육사 동기인 신태영과 함께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1925년 11월 곽송령( 궈쑹링)사건이 발생하자 펑톈에서 현지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1928년 장제스의 북벌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제남 사건을 일으켰을 때 펑톈에 파견되었다. 펑톈에서 장쭤린 폭살 사건이 일어나자 현장으로 출동하여 경비를 섰다. 1933년 일본군 육군 소좌로서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으로, 1934년 8월에는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일본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6]

1936년 중좌로 진급했고 이듬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주로 병참 업무와 징집 업무에 종사했다. 산둥성에서는 직접 팔로군과 싸웠고 남원 전투, 석가장(스자좡) 전투, 산서성(산시선) 전투에도 참전했다.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 건설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계몽시키는 업무에 종사했고 그 후 임분 전투와 산시성 일대를 장악하는 전투에도 종군했다. 1939년 1월 훈3등 서보장을 받는다.

1941년 대좌로 진급했고 학병 홍보 등을 했다. 홍보의 내용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동이었다. 이응준은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인력 동원에 앞장섰다.[7]

동 시기에 민족운동가 등과 교류한 것으로 그의 회고록에 적혀있으나 실제 사실유무는 알 수 없다.[8]

이런 여러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에 포함시키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았다.
애국지사 이갑의 지원으로 학교를 다녔고, 그 인연으로 사위가 되었으며, 그에 대한 존경심과 동질감을 가졌다. 그런 성향으로 인해 1919년 김광서, 지석규 등과 함께 모의했으나 탈출하지 않았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었다. 직업군인이기 때문에 일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같은 육사 출신이면서 대륙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후배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합리화될 수 없다.

여기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 관념이 결여'라는 구절은 일제에 충성한 대부분의 조선인 일본군에게도 통용된다.

2.2.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원산항 수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의 대다수 장교들처럼 근신하던 중[9][10] 미군정의 호출을 받게 된다. 이는 범 일본군 출신 중에서 가장 최선임이면서 고급 장교(대좌)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내 일본군 장교 중 최고위급은 이응준과 1년 후배인 김석원이었다. 동기인 신태영은 중좌.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정에 출두해서도 " 해방되는 날까지 일군에 있었던 사람일 뿐 아니라 영어도 제대로 못하니 지금 정세가 전혀 달라진 신국면 제일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더욱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 아고우 대령이 " 일본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한 분이 어째서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못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말에 군사고문직을 주위와 고심 끝에 수용했다 한다.

그가 챔프니 대령과 뱀부 계획을 세우면서[11]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는데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국부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국부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이때 이응준은 "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달라"고 말하며 광복군 출신의 유동열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1946년 9월 유동열은 '미군정 과도정부 남조선 통위부 부장(현 국방부장관격)'으로 위촉하였다. 그렇게 광복군 출신들도 하나둘씩 입대하기 시작하였다.[12]

미군정의 의지로 1946년 6월 대령으로 특별임관하고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원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 초대 육군 총사령관으로 송호성이 부임하였으나 국군조직법에 따라 총참모장제가 도입되면서 그가 초대 육군 총참모장이 된 것이다. 참고로 송호성의 경우 6.25 전쟁 발발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서 현재 육군의 역사 속에서 지워져 있는 상태다. 만약 송호성이 북에 부역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켰다면 초대 육군참모총장 소급은 이응준이 아니라 송호성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

이응준은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으로 초대 총참모장에서 물러난 이후 3사단장, 5사단장, 미아리전선전투사령관, 전남지구전투사령관 등을 지냈으나 이범석의 후임인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불화로 군문을 떠났다. 이후 1952년에 육군대학총장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13] 3년 후인 1955년에 동계급으로 예편했는데 나이 60살이 넘은 상태였다. 그 후 체신부장관과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다 1985년 7월 8일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데이트 강간 논란

소위 시절이었던 1915년 7월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 중이던 작가 김명순(1896∼1951)을 데이트 강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사실 1915년에 벌어진 한 사건이 발단이다. 서울에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 도쿄의 국정여학교에 다니던 김명순이 같은 조선인이었던 이응준(1891~1985)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응준이 데이트 도중 김명순을 강간했다."고 못박기도 한다[14] 이후 김명순은 '부정한 여자'라는 비난을 들으며 소설가 김동인, 어린이날로 유명한 방정환 등의 문인들에게 공격당했으며 기구한 삶을 살다가 1951년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

4. 여담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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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개명 당시 썼던 이름은 가야마 다케토시(香山武俊, がやまだけとし) [2] 대령, 소장때 역임했던 육군참모총장 보단 중장때 역임한 훈련소장 직위가 최종보직에 합당하다. [3] 당시 일본군이 될 수 있는 조선인은 왕공족이거나 한일강제병합 당시에 협조했던 대한제국군 장교들, 그리고 합병 당시에 사관생도였던 일부 인원만이 가능했다. 26기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김경천, 지청천, 홍사익이 있다. [4] 일본군에서 권총은 개인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이유는 일본군이 장교에게 권총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 일본 장교들은 사비로 권총을 마련해 들고 다녔고, 권총이 싼 것도 아니다 보니 장교단 내에서 봉급이 낮은 하급 장교들의 경우 소지한 권총의 모델만 봐도 집안 사정을 대강 알 수 있었다고... [5] 친일인명사전 역시 정부 공인기록은 아니므로 회고록이나 민간단체의 기록이나 각자의 생각을 서술하는 점은 같다. [6] 서보장은 '국가 및 지방 자치 단체의 공무 또는 공공적인 업무에 다년간 종사하고 공로를 쌓아 성적을 올린 자'에게 수여한다. [7] 학병 홍보의 경우 계속 사양하다가 부민관에서 김석원과 참석했고, 여기서 문제성 있는 발언을 했다. [8] 회고록에 따르면 유진산, 장택상 등과 교류하며 "일본이 이대로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고 한다. [9] 대다수의 편견이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이 광복 후 전면에 나섰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는 대부분 만주군 출신, 만주군-일본군, 학병 출신들이 그러했고 오히려 일본육사 출신들은 소수인 데다 광복 후 대부분 근신했다. 강문봉, 박정희, 정일권 등은 만군-일본육사 계열이다. [10] 이응준과 동기이자 후임 총장인 신태영이나 그의 아들 신응균, 1년 후배인 김석원, 이종찬 등도 자숙하다가 이승만, 이범석 등의 강권으로 늦게 군에 입대한 경우이다. [11] 뱀부 계획은 각 도 별로 1개 중대를 배치한 뒤 병력을 모아 도마다 1개 연대 수준을 만들고 합계 2만 5천 명 남짓한 육상병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12]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통위부장 선정에 대한 의뢰를 미군으로부터 받고 후보로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3인을 꼽았으며, 이 중 최선임격인 유동열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한다. [13] 백선엽의 회고록을 보면 백선엽이 중장계급으로 갓 육참총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당시 모슬포 훈련소는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아 인격적으로 원숙한 사람이 훈련소장으로 부임해야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며,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응준을 찾아가 훈련소장으로 부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응준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노골이나마 헌신해야겠지."라고 하였고, 백 장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훈련소장 부임과 함께 중장진급을 상신하여 진급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14] 김경애 논문 ‘성폭력 피해자:생존자로서의 근대 최초 여성작가 김명순’, 이준식 논문 ‘일제강점기 치정사건의 사회사’ 등. 중앙선데이 기사 참조 [15] ' 내선일체를 주장하지만 실제의 차별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중략) 똑같이 의무를 다하고 나서도 차별이 계속될 경우에는 제군의 선두에서 항쟁할 생각이 있다'라는 내용. [16] 회고록에 보면 그는 별다른 전선 경험이 없었지만 일본인 사령관으로부터 배려를 많이 받는 모습이 보인다. 1년 후배 김석원과는 대조적으로 김석원도 그의 회고록에 이응준의 이런 부분에 대해 동일한 언급을 하고 있다. [17]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내용 인용. [18] 초창기 일본 군부에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막부 말기-메이지 시대의 유신지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19] 자서전 362page [20] 김홍일의 오산학교 후배이자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전제현 예비역 소장 증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 「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 2014.6.9. [21] 친일인명사전은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의 광영이며 명예"라고 한 이응준의 글을 근거로 이응준이 '일본군 장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한편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군인이 되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선동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