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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1:02:21

서상호(1888)

파일:서상호(1888).jpg

徐相灝
1888년 7월 25일 ~ 1964년 12월 20일 (향년 76세)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5.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대구(大丘)[1], 호는 죽사(竹史).

서상환 법무부장관은 그의 4촌 동생이며,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의 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 5. 13 ~ 1959. 2. 18.) 준장과 서정화 내무부장관, 서정신(徐廷信, 1940. 8. 8 ~ 2016. 3. 14) 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 3형제와 서정귀 전 국회의원은 6촌 재종손자(再從孫子)이다.

2. 생애

1888년 7월 25일 경상도 고성도호부 춘원면 면량리(현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에서 천석꾼이던 아버지 서희순(徐禧淳, 1852. 7. 4 ~ 1927. 3. 10)[2]과 어머니 함안 조씨(1854 ~ 1915. 7. 24) 사이의 1남 4녀 중 외아들 태어났다. 12살 때 결혼하고 통영군 통영면 명정리(현 통영시 명정동)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6세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고 고향 통영군의 의성학교(義成學校)에서 3년 간 일본어를 배웠다. 의성학교 졸업 후 1908년 4촌 동생 서상환과 함께 상경하여 봉명학원(鳳鳴學院)에 입학했다. 봉명학원 2학년 때인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왔다가, 그해 겨울 아버지의 돈궤짝을 털어 몰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서상환과 함께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들의 가출로 병을 얻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혼자 귀국한 그는 통영군 통영면 길야정(현 통영시 항남동)에서 곡물상 및 정미소 등을 경영했으며, 통영공립보통학교의 학무위원으로 있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가 창설되자, 당시 곡물 거래처였던 대궁상회(大弓商會) 대표 서상일을 통해 윤상태(尹相泰)와 최준(崔浚) 등을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서상환과 함께 4만원을 출자하고 자신의 정미소를 통영군 연락 거점으로 활용했다.

1918년에는 통영공립보통학교 부속 야학교를 개설하고 상임 간사를 지내면서 친척[3] 및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러 자제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일본적십자사 유효특별사원으로 활동했으며, 통영공립보통학교 교외 대운동장 설비를 위해 700원을 기부하고, 통영면사무소 신축비 100원, 통영경찰서 구내 상무회도장(尙武會道場) 건축비, 통영공립보통학교 여자부 건물 건축비, 교육표본 구입비, 통영항 관리비용 등을 기부했고, 1918년에 쌀값 인상에 즈음하여 통영세민구제회(統營細民求濟會)가 설립되자 위원이 되어 구제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또 곡물상으로서 백미를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하는 등 지역 사회 및 교육 사업 전반에 관심을 가졌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서상호는 그해 3월 8일 통영면 북신리(현 통영시 북신동)에 있던 송정택(宋正宅)의 사랑방에서 진평헌(陳平軒), 양재원(梁在元), 권남선, 김형기(金炯綺), 배익조(裵益祚) 등 17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모여, 3월 13일 통영읍내 장날을 기해 남망산공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그는 양재원 등 4명과 함께 남망산의 광부 450명과 도산면 거주 광부 170명을 인솔하기로 했는데, 같은 달 10일 새벽 강세제 허장완, 이학이(李學伊) 등이 통영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 선언서 1,200매를 등사한 뒤 훔친 등사판을 다시 갖다 놓으려다 현장에서 모두 검거되면서 만세운동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

그러다가 그해 6월경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실체가 발각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서상환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그해 7월 통영전기주식회사(統營電氣株式會社) 감사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 뒤 1919년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고등법원에 이송되었으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면소 방면되었다.

1921년 4월 17일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 재단법인 기성위원회(期成委員會)[4]를 조직하여 기성위원에 취임하였다. 이때 서상호는 20만원을 기부하였다.

그해 7월에는 서상환, 송정택, 진평헌 등 당시 만세운동 결의자들을 중심으로 통영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박봉삼을 선출했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실제 내용과 다른 엉뚱한 주제를 내세워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으나, 그럼에도 강연회가 해산되거나 연사가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2년에는 극심한 수재를 입은 황해도 지방 주민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통영청년단은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또한 같은 해 경상남도 마산부 원정(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있던 주식회사 원동무역(元東貿易)에 감사에 취임하였으며, 1923년에는 이사에 취임했다.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시대일보사를 창립하자, 전무이사 취임했다.

1925년에는 경남은행(慶南銀行)[5] 상무이사 취임했고, 이어 전무취체역을 역임했다. 1928년 경남은행이 대구은행(大邱銀行)[6]과 통합되어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 되자,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1933년 2월 여운형이 창간한 조선중앙일보 전무이사로 취임하여 다시 언론계에 뛰어들었으며, 1937년에는 주식회사 대동상사(大東商事)에 전무이사 취임했다. 1942년에는 천석꾼 김덕보가 사망하자, 상속자인 김재율을 설득해 기부금을 내도록 권유하여 통영공립중학교 설립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통영읍 봉평리(현 통영시 봉평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1946년 10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김재학(金載學) 후보와 접전 끝에 단 63표(0.15%) 차이로 밀려 낙선하였다.[7]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이번에는 무소속 김재학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에서는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으며, 1952년 내각책임제 개헌 때 찬성표를 던졌다. 이때 통영군 통영읍 일원을 충무시로 승격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으나, 결국 1953년 거제도 거제군으로 분리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국민당 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시에서 참의원으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64년 12월 20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심장마비 별세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남 통영 갑

[[무소속(정치)|
무소속
]]
17,351표 (43.36%) 낙선 (2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4,398표 (32.05%) 당선 (1위)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265표 (2.92%) 낙선 (7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참의원 - - 낙선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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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무 최원봉 사망 (1950.11.10.)
* 함안 양우정 사퇴 (1954.4.3.)
* 부산 병 김칠성 납북
* 창녕 신용훈 납북
* 하동 이상경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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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1]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4세 상(相) 항렬. [2] 자는 덕보(德甫). [3]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한 4촌 동생 서상환,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5촌 당질(堂姪) 서병두(徐炳斗, 1899. 8. 10 ~ 1961. 2. 9),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은행 통영지점에 근무 중이던 5촌 당질 서병찬(徐丙纘, 1902. 2. 23 ~ ?),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5촌 당질 서병문(徐丙文, 1902. 7. 30 ~ ?)과 서삼용(徐三用),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이순상(李順相) 등이 당시 서상호의 학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거나 이미 받았던 친척들이다. [4] 당시 위원장은 김기태(金琪邰)였고 서상호 외에 고원훈, 이승우(李升雨) 등이 위원에 취임하였다. [5] BNK경남은행과는 이름만 같을 뿐 관련이 없다. [6] 마찬가지로 1967년 개업한 대구은행과는 이름만 같을 뿐 관련이 없다. [7] 이때 서상호 후보 측에서는 당선된 김재학 측에 불법 투표의 문제가 있다며 부정선거임을 중앙선거위원회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