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1b> 알렉산더 보빈 Alexander Vovin Александр Вовин[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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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산더 블라디미로비치 보빈 Alexander Vladimirovich Vovin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Вовин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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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1년 1월 27일 |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2] | |
사망 | 2022년 4월 8일 (향년 61세)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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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구조 언어학·응용언어학부 / 석사)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역사적 일본어언어학·일본 근대문학 / 박사) |
직업 | 언어학자 |
경력 |
미시간 대학교 일본어 조교수 마이애미 대학교 조교수 하와이 대학교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
가족 | 배우자[3], 슬하 2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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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태생의 미국 언어학자.생전 일본어와 한국어 연구의 권위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어가 부여어족의 직계 후예라는 학설의 강력한 근거를 제시, 논증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으로 건너가 있던) 고일본어족 화자들이 남하하는 부여어족 화자들에게 밀려나 일본에서만 살아남게 되었다는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 생애
소련 레닌그라드(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출생했다. 가정이 다국어 가정인데, 외할아버지는 독일어, 이디시어,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어머니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이중 언어를 구사했다. 어렸을때 영어, 프랑스어 및 고전 그리스어를 배웠고,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마스터했다. 처음에는 레닌그라드 대학교(現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페르시아어·아랍어학부에 입학 할 계획이었지만, 유대인 출신이어서 입학 할 수 없었다.[4] 하지만 수석 정신과 의사인 외삼촌의 도움으로 구조 응용 언어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198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구조언어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87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하마마츠 추나곤 모노가타리에 대한 연구로, 고대 일본 문학 및 일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199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동양학 연구소에서 재직하였다.
199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1994년까지 미시간 대학교에서 재직하다가, 이후에 마이애미 대학교로 이직하여 1년간 재직하였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는 하와이 대학교에서 재직하였고, 그동안 일본의 국제 일본학 센터와 독일의 보훔 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2022년까지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동년 4월 8일에 암으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3. 인물
생전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매우 잘하는 편이었다. 보빈 본인의 말로는, 자신의 제1연구 대상이 일본어였던 데다가, 일본에서 상당히 오래 활동한 경력 덕에 한국어보다 일본어 실력이 좀 더 좋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국어 역시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보빈이 간혹 한국어로 쓴 글들이 있는데, 읽어 봐도 외국인이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전형적인 논문형 어휘와 구조로 수준도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한국의 주류 국어학계, 사학계 등에 대해 꽤나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 경향 때문인데, 상기한 한반도 남부 토착언어가 일본어족이었을 것이라는 그의 학설과 달리, 한국 학자들은 한국사에서 다루는 모든 고대 국가 및 세력의 언어를 한국어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민족주의적인 정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반도 일본어설을 언급할 때에도 반드시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설명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다.[5]
그의 식견을 판단하려면 되도록 최신 논문까지 읽고 판단해야 한다. 한 예로 국내에서 보빈이 알음알음 주목받는 게 고대 한국어에 대한 연구 때문인데, 많은 경우 그의 논문은 특히 201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모음추이 가설을 채택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2020년대에 나온 그의 논문에서는 더 이상 모음추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실제로 고대 한국어의 /r/과 /l/ 음소에 대해 재고찰한 2020년의 논문에서는 한 각주에서 자신이 더는 한국어의 모음추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주류 언어학계에서도 한국어 역사상 유의미한 모음추이는 없었다고 보는 게 중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특정 연도의 그의 논문을 읽고 그 내용을 맹신하지 말고 언제나 그게 하나의 '학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보빈처럼 여타 학자들이 쉽사리 급진적으로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을 파고드는 학자들일수록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같은 주제, 같은 논거라도 그때그때 수시로 학설이 뒤바뀐다. 최근 특정 연도에 보빈이 낸 어떤 논문이 여러분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지라도 2~3년 안에 보빈 스스로 자신의 기존 주장을 수정한 논문을 제출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이는 언어학계의 거성인 노엄 촘스키도 전성기 때 밥 먹듯이 하던 스킬이다.
이런 행보는 문제가 아니다. 해당 학계의 권위자로 꼽힌 학자들은 다들 이런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언어학 이외의 분야를 보면 그레고어 멘델은 점진론적 진화론자였지만, 자신의 발견이 점진론과 상반된다는 결과에도 숨기지 않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한때는 전자기파의 매질 역할을 하는 에테르의 존재를 긍정하는 듯했다가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전해듣고 바로 자기 주장을 철회했고, 스티븐 호킹도 블랙홀에 대한 관점을 수도 없이 수정한 바 있다.
4. 언어학자로서의 업적
4.1. 고대 한일 양국의 언어 연구
자세한 내용은 반도 일본어설 문서 참고하십시오.고대 한국 남부를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의 야요이인은 계통이 같은 언어(고일본어)를 사용하였으나 Peninsular Japonic 한반도 중남부의 고일본어족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북쪽에서부터 남하한 어족(현대의 한국어로 계승된 부여어족으로 추정)에게 흡수 및 소멸, 추방되어 한반도에서 거의 사라졌고,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어족은 일본열도에만 남아 오늘날 일본어가 되었고 북쪽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어족의 직계 후예는 현대 한국어라는 학설을 발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대표적인 논문 '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가 번역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탄탄한 이론적 무장과 왕성한 활동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을 다룬 학설 중 지지를 많이 받는다.
주된 근거는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기재된 한반도 중남부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일본어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일반명사나 지명을 근거로 거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44권에는 加羅語謂門爲梁云라고 하여 가야에서는 梁(들보 량)을 문(門)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梁의 발음은 돌(twol)이었고 한국어에서 문을 돌로 발음하는 사례로는 울돌목, 돌쩌귀 등을 들 수 있다. 이 주장이 옳다면 일본어 토(と, to)보다도 훨씬 정확한 발음을 현재까지 사용하는 셈이다.
이들 외국 학자들이 대부분 전공이 일본어이고 한국어는 곁가지로 같이 연구하는 정도에 그치다 보니 한국어에는 전문성이 조금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울돌목, 돌쩌귀 등 돌이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일본어의 흔적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게다가 보빈은 한국어를 그저 피상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이다.
문(門)의 고유어라는 '오래' 역시 '돌'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한국어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발음이다. 그보다는 고대 일본어에서 문을 뜻하는 토(と, to)와 유사하기 때문에 가야 토착어와 일본어 간 관계는 가야 토착어와 한국어간 관계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이다.
가야도 여타 한국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한국어족 계열 언어의 사용자들에게 정복되었다고 본다. 다만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이룩되지 않고, 정복이 어려운 복잡한 지형 사이사이에 소국들이 난립한 데다가, 일본어족 사용자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있었던 듯한 한반도 최남단에 있었으니 토착적 요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에 동일한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키기에 한국인 입장에서 껄끄러울 수 있다. 해당 학설의 대표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임나일본부설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논문에서는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일본의 역대 덴노들 중의 몇몇 사람들이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라는 주장도 한 적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혐한 극우들이 벌이는 역사왜곡의 단골 주제인 진구황후의 정체도 고대 일본을 다스리던 한국계 왕조 소속이었다고 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극우들이 알렉산더 보빈의 논문을 읽어봤다면 뒷목 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요약하면 한반도 중남부에는 원래 고일본어 화자들이 주로 살았다. 이 언어가 오늘날의 일본어로까지 이어지기에 '고일본어'로 부를 따름이다. 즉 원래의 일본어족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생겼지만, 야요이 시대 무렵, 그러니까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걸쳐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들이 오늘날의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오늘날 간토 지방의 이서 지역을 모두 일본어 사용지대로 바꾸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이후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 그룹은 (대략) 기원전 7-6세기부터 만주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밀려난다. 이들은 부여어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로 추정한다. 그래서 보빈 교수는 고일본어 화자들이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갔거나 또는 언어적으로 한국어에 완전히 병합당했고. 현대 한국어는 남하한 부여어족의 직계 후예라고 주장한다.
한국학자 중에서 서울대 명예교수 김방한이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 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다고 주장했다. 김방한은 '원시 한반도어'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진 못했다. 니브흐어와 유관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한 정도. 원시 한반도어는 알렉산더 보빈의 말마따나 한반도 중남부에서 쓰이던 일본어족의 조상언어일 수도 있고, 고립어나 주변의 현존하는 다른 어족의 언어, 또는 소멸한 미지의 어족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원시 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여 오늘날의 한국어의 전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은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 한반도어라고 하였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주장이 달라 김방한의 학설은 한반도의 토착 언어가 일본어족에 속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하지만 한반도에 이질적인 언어집단 두 개가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평가받는다.
4.2. 고대 한국어 연구
우선 고구려어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보면, 고구려어로 된 여러 지명과 인명, 관직명 등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현대 한국어와의 친연성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있다. 보빈이 조사한 고구려어 고유명사들이나 조사 등에서 한국어 어휘와 유사한 것이 대거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유명사는 다른 언어의 어휘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반드시 순수 고구려어 어휘라고 단정짓기는 애매하지만, 조사나 서술어 부분은 물론이고 문장 형식까지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고구려어가 한국어와 친연 관계일 가능성이 커졌다.반대로 가야어와 신라어의 어휘들은 일본어 어휘와 비슷한 것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보빈은 초기 가야어와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는 임나일본부설과는 관련이 없고, 일본어족의 고대 언어를 사용한 민족들이 한반도 중남부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현대 일본어의 조상어가 된 고대 일본어와 완전히 같은 언어는 아니었고 친척관계에 해당하며 따라서 차이도 있었다.
초기 신라어는 이 일본어족의 고대 언어를 사용한 민족들이 고대 한국어를 사용하던 만주, 요서지방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한국계 종족들에게 정복당한 후 동화되어 형성된 언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결정적인 근거가 없고 일부 주장에 허점이 있어서 아직 정설로 확고하게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가령 보빈은 탐라라는 국명이 일본어인 타(田)+무라(村) 혹은 타미(民)+무라(村)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는데, 무라(村)와 연관성이 있다는 부분은 나름 확고한 근거가 있는 주장이지만[6] 앞부분이 타(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탐(耽)의 당시 한자음이 /*tom/이었음을 간과한 것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동일한 정치체의 연장선인데 그 사건을 계기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바뀌었다는 가정은 역사학적으로도 무리한 추론이다.[7][8]
물론 신라가 건국될 당시에, 그 지역에 살았던 반도 일본어 화자들이 이미 고대 한국어 화자들에게 동화된 지 오래인 상태였다고 하면, 보빈의 주장과 배치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어족 단위로 언어가 변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반도 일본어같은 일본어족 계통 어휘의 흔적이 남은 이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러면 보빈의 당초 예상보다도 한국어의 확산이 매우 일찍 일어났다는 뜻이 된다.[9]
4.3. 향가 연구
향가의 해독에도 손을 댄 바 있는데, 이에 관한 유명한 연구로 초창기 향가의 일종인 서동요가 실제로는 신라 가요가 아닌 백제 가요일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있다. 참고로 현재 백제 가요임이 확실히 밝혀진 유일한 고대가요가 바로 정읍사다. 그가 근거로 내세운 것으로 신라어 고유명사의 표기에 쓰이는 한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백제어의 음운 표기에 쓰이는 한자가 주로 발견된다는 점이 있다.하지만 이후 현존하는 서동요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지어진 향가이기 때문에 다소 특이점이 있다는 게 밝혀져 남풍현 교수의 이론대로 서동요, 처용가, 풍요를 고려시대 향가로 분류하게 되었다. 보빈 교수 또한 최근에 출간한 논문을 보면 역시 이 가설을 포기한 듯하다. 보빈 교수는 논문 양이 워낙 많고 본인이 주장을 많이 바꾸었기 때문에 최신 논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재 교수가 출토한 백제 목간을 보면 백제어의 표기법 자체가 서동요의 훈주음종(訓主音從) 표기와 완전히 다르다.
4.4. 고대 일본어 연구
전술한 고대 일본어에서의 고대 한국어의 영향에 대한 연구 성과도 있지만, 그가 고대 일본어에 대해 내놓은 연구 결과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일본 고전 문학에 대한 것이다. 그에게 박사 학위를 안겨준 하마마츠 추나곤 모노가타리의 해독이 대표적이다. 다른 일본 고전들을 해독하는 연구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보이며 고전 일문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꼽혔다. 2020년부터는 만요슈를 영어로 번역하는 연구에 매진했지만, 2022년 보빈이 사망하여 완역되지 못했다.4.5. 일본어족 발원지 연구
Out of Southern China? (2014년)Names of Large Exotic Animals and the Urheimat of Japonic (2021년)[10]
후술한 반도 일본어설 문단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보빈은 일본어족의 발원지가 남중국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고대 일본 사회는 동북아보다는 동남아와 유관해 보인다. 고대 일본은 한국, 중국이나 동북아 유목민들과는 달리 하 늘 신이 아닌 태양신을 숭배했으며,[11] 일찍이 벼농사를 짓고 거처를 건축할때 말뚝 기초를 지었다.
- 고대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남중국의 그것과 유관해 보인다. 요동-한반도 일대의 벼농사 문화가 야요이 시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은 입증되었다. 보빈은 이 벼농사 문화가 양쯔강 일대에서 발원, 산동을 통해 요동-한반도로 넘어왔다고 본다.[12] 선사시대 중국에선 양쯔강 일대에선 벼를, 황하 일대에선 조 및 기장을 지었다.
- 재구성된 일본조어[13]에 크라다이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발 차용어로 보이는 어휘가 있다. 남중국이라는 위치 비정을 뒷받침하는 언어학적 근거. 해당 어휘는 링크된 논문에 기재되어 있으니 참고.
- 《방언》에 기록된 초나라 및 제나라 어휘에 일본어족 계열의 낱말이 있다. 일본조어가 남중국(초나라 일대)에서 굳이 산동(제나라 일대)를 통해 요동-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해당 어휘는 역시 논문에 기재되어 있다. 다만 초나라 어휘는 크라다이어족 계열로 보는 학자들도 많으며, 보빈도 이 점을 인정한다. 또한 대안 가설로는 몽몐어족설 역시 유력하다.
일본어족이 요하 및 한반도 일대에서 발원했다는 마르티너 로베이츠 등의 트랜스유라시아어족설과는 대척점에 있다. 그렇지만 본인도 확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단순 가설이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5. 기타
5.1. 특이사항
알렉산더 보빈은 1994, 95, 97, 99, 2000, 01년에 6차례 연구논문을 내며 알타이어족의 지지자였지만, 2001년 교토의 국제 일본학 센터에서 교환교수로 재직(2001-2002년, 2008년)하는 시기부터 알타이어족설의 비판자로 전향하고 한반도 중남부가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01년에도 Japanese, Korean and Tungusic. Evidence for genetic relationship from verbal morphology 라는 저작물을 내놓으며 한국어, 일본어가 퉁구스계통어와 언어형태적 유사하다는 저작물을 내놓았지만, 교토의 국제 일본학 센터에 재직하면서부터 알타이어족의 비판자로 전향한 것에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볼 때 순수한 학문적 결과물이 아니라는 비판도 존재했다.하지만 이 시기는 이미 알타이어족 가설이 주류 언어학계에서도 빠르게 지지를 잃어가던 상황이므로, 보빈이 일본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에 확증편향이 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상술했듯이, 반도 일본어설에는 일본의 우익들이 동조하지 않을 내용이 수두룩하고, 가설 자체가 주류 학계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확증편향이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14].
한국 관련 연구자 가운데 동명이인이 있다. 고려대학교에 과거 출강한 것은 별개의 인물로 생존해 있다.
5.2. 반도 일본어설에 대해
보빈 스스로도 한국어보단 일본어 전공이라고 말하며 일본의 지원을 받아, 학설 이름에 "반도 일본어"란 단어를 붙인 점에서 논란이 다소 있다. 아직 일본이란 나라에 흡수되기 전의 언어인데, '일본'이란 단어를 반드시 써야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게르만족이 쓰던 언어를 게르만어라고 부르지 굳이 독일이라고 후대에 확립된 개념으로 단정지어 서술하지 않는 사례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비판한 것인데, 반도 일본어는 상대 일본어와 매우 가까웠던 언어로 추정되므로 일본어라는 표현을 붙여도 이상할 것도 없는데다, 무엇보다도 일본어라는 명칭을 피하려고 해도 딱히 붙일 명칭이 없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15]만일 고일본어라는 명칭을 피한답시고 고대 한반도어, 가야어, 삼한어하는 식의 명칭을 붙였다간,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더더욱 사단이 났을 터다. 이 중 그나마 가장 유력한 대안은 '고대 한반도어'인데, 독일의 프로이센 왕국과는 전혀 무관한 사어(死語)인 발트어족 '고대 프로이센어'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16] 국가나 민족보다는 지역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는데, 현재 세계 학계의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영어로 이걸 번역하려고 했다간 Old Korean Peninsular language같은 편의성이 심히 떨어지는 용어가 나올 것이고, 그렇다고 고대 프로이센어처럼 Old Korean이라고 하기엔 이미 고대 한국어가 차지했다. 따라서 결국 Peninsular Japonic이야말로 현재로서는 가장 실용적인 명칭이다.
게다가 반도 일본어설의 영어 명칭은 Peninsular Japonic인데, Japonic은 ' 일본어족의'라는 뜻이라서 언어학적인 의미가 강한 중립적인 표현이다. 알렉산더 보빈이 민족주의적인 논란이 일어날 만한 여지를 최대한 피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보빈이 일본으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고 보빈을 혐한 일뽕으로 매도함은 억지이다. 반도 일본어설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하는데서 출발하여 전개한 학설이다. 그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면 반도 일본어 화자들이 현대 일본의 직접적인 전신인 야마토 왕권과 무관하다는 전제를 깔았을 리가 없다.
애초에 일본의 극우들이 실존인물이라고 그렇게도 우겨대는 진구 황후를 보고,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인 군주라고 하는 사람이니, 만일 보빈이 진짜 일뽕이라고 가정하면 자민당과 극우들은 여지껏 자기들 주장에 헤드샷날리는 사람을 밀어주는 자폭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비판 측에서 서술한 게르만과 독일에 빗댄 비유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한국어에서 게르만과 독일이 확연히 다르니까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영어에서 게르만족과 현대의 독일인은 둘 다 German이다.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그리스어도 마찬가지. 언어에 따라서 중립성이 달라 보인다는 것. 반대로 영어에서의 Japonic(일본어족)과 Japanese(일본어)는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이고, 이건 오히려 Peninsular Japonic을 '반도 일본어족'이 아닌 '반도 일본어'라고 잘못 번역한 한국이 받아야 할 비판이다.
이런 점을 떠나서 '반도 일본어'라는 번역은 원래 학설의 논점을 놓쳤다고 할 수도 있는데, 보빈이 주장한 것은 Peninsular Japonic languages의 존재로, 일본어족 이내에 '열도 일본어파(일본어 + 류큐어파)'와 '반도 일본어파(가야어, 진한어 등)'를 따로 분류했다. 즉 '반도 일본어'라는 하나의 언어가 있었다는 주장이 전혀 아니다. 또한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일본어와 반도 일본어파 언어들은 계통적으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Japonic이라는 용어는 일본어와 류큐어를 일본어족으로 규정하기 위해 만든 단어이고, 보빈이 본 가설을 내놓기 한참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만약 백보 양보해서 일본어족 자체를 게르만어족 같은 '중립적'인 이름으로 바꿔봤자 왜어족, 야마토어족, 야요이어족 같은 일본 느낌이 나는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 보빈은 억울할 만하다. 보빈의 가설이 설명한 과정은 언어학적 세계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아주 대단히 특수하다고 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켈트어파도 중부유럽에서 발생하고 브리튼 제도를 걸쳐 아일랜드로 넘어가서 한동안 주류 어군으로 자리잡았지만, 정작 대륙에서의 켈트어군은 일찍이 소멸되었고 도서지역 켈트어군(Insular Celtic)만 살아남아 그 명맥을 이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어족도 켈트어파랑 비슷한 루트를 탔다는 주장이다.
- 켈트어파 역사: 대륙에서 발생 후 영불 해협을 지나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로 전파되고, 막상 대륙에서는 남부에서 치고 올라온 라틴어에 밀려 기층언어만 남기고 흡수소멸됨.
- 반도 일본어설에 따른 일본어족의 역사 재구성: 대륙에서 발생 후[17], 한반도 중남부를 지나 일본 열도로 전파되고, 반도에서는 북부에서 내려온 부여어족에 밀려 기층언어만 남기고 흡수소멸됨.
프랑스도 옛날에 대륙 켈트어군에 속한 갈리아어를 썼었고 이제는 흡수소멸된 언어의 흔적이, 아직까지 규명된 바로는 반도 일본어설의 그 고대어가 현대 한국어에 미친 영향보다도 현대 프랑스어에 더 짙게 남아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아일랜드가 프랑스를 정복했다거나, 프랑스가 아일랜드에 우월하다거나 하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자. 근거가 빈약하다는 비판은 타당하나 이런저런 요소를 감안해봤을 때 임나일본부설은 별로 끼어들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5.3. 자료 인용의 문제
보빈은 주로 일본서기 등 일본 측 사료 위주로 한반도의 지명과 엇비슷한 연계성을 일치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서기와의 교차검증을 위한 한국 측 사료 참고가 미비하다는 비판이 있다.이런 비판이 틀린 건 아니나, 현재 한국 측의 사료는 참고할 수 있는 것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장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되는 사료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부터가 신라가 멸망한 지 근 100년에서 200년은 족히 된 시기에 집필된 책이다. 그 이상 올라가는 문증가능한 사료가 많이 없는 관계로, 사라진 고대 한국어를 재구하려면 그만큼 사료가 풍부한 고대 일본어로 된 기록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5.4. 한국사 관련 지식에 대해
보빈은 뛰어난 언어학자였고 한국어에 대한 지식은 풍부했으나, 언어학 연구를 보충해 줄 수 있었던 한국사 (특히 고대사)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경우가 가끔 있었다.- 2013년 논문 From Koguryo to T'amna에서 《양서》의 「號所治城曰固麻 ((백제의) 도읍을 고마(固麻)라고 한다)」라는 구절을 두고 백제어로 '고마(固麻)'가 말 그대로 '수도'를 뜻한다고 해석하여, 상대 일본어 ka-kom- ('둘러싸다')와 연결지은 적이 있다. 문제는 한국 고대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챘겠으나, 《양서》가 다룬 양나라 시기에 백제의 수도는 웅진, 즉 고마나루였다. 즉 단순히 웅진의 훈독을 음차한 것일 확률이 높은데도 이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는 점은 문제다.[18]
- 같은 논문에서 《위지》 30권에 나오는 「國有故城名濊城 (그 나라 ( 부여에 '예성'이라는 오래된 성이 있다))」를 두고 '예성(濊城)'이 곧 '오래된 성'을 뜻한다고 추측, '예(濊)'가 '옛'의 음차라고 보았다. 문제는 보빈이 언급하지 않은 바로 다음 구절인데, 바로 「蓋本濊貊之地 (본래 예맥의 땅이다)」라는 내용이다. 예맥 중에서도 예(濊)인은 부여사에서 매우 중요한 종족이다. '예성(濊城)'이 '오래된 성'을 뜻할 수도 있으나 단지 예인의 이름을 따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물론 '고마'건에 비해 이건 보빈이 틀렸다고 단정짓기 쉽지는 않지만, 역시 예인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 2007년 논문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에서도 《위지》 30권을 인용하여, 신라에서 낙랑군 사람들을 '(우리 중에) 남은 이들'이란 뜻인 '아잔(阿殘)'이라고 불렀다는 점을 언급한다. 보빈은 '아잔(阿殘)'은 사실 '아저씨', '아줌마' 등의 동계어를 음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으나, '한반도 서북부의 중국 군현은 훨씬 남쪽의 진한 영역까지 닿지 않았으므로, 낙랑의 중국인들이 진한인의 '남은 세력'일 리가 없다'고 언급하며 진한인들이 낙랑인을 '아잔(阿殘)'이라고 칭한 것은 단지 강대국인 중국과의 연관성을 날조하려는 시도였을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이 주장은 취지부터가 틀렸는데, 낙랑 시대의 고분 등을 보면 중국 왕조의 지배하에도 조선인 인구가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사로국은 실제로 고조선 유민이 세운 것이다.
[1]
'알렉산드르'로 읽는다.
[2]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3]
러시아인 첫번째 배우자와 이혼하고 2000년에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 첫번째 배우자 사이에서 아들 1명이 태어났다.
[4]
딱히 인종차별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이
아랍인과 같은
셈족 계통이라서 언어,문화적으로 매우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게
양민학살을 유발할까 봐 대학 측이 우려한 듯 하다. 무엇보다
근현대에 폭발한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악연을 생각하면 아랍권, 이슬람권 유학생들과의 갈등이 우려되기도 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이 무렵(1980년 전후)에는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의 친소 정책으로 아랍인 유학생들이 소련에 많이 와 있었다.
[5]
학자들 역시 학자 이전에 국민이기 때문에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그의 논리면 한일 양국 더 나아가 전세계 다수의 문제기도 하다만. 또 그런 관점이 아닌 진짜 학문적 관점에서 갑론을박, 정반합하는 경우도 있다.
[6]
자세한 사항은
탐라 문서 참조.
[7]
이에 대해서는 보빈의 주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반박이라 보는 의견이 있는데, 보빈은 신라의 언어 교체 기점을 삼국통일로 비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6-7세기에 쓰인
향가는 확실히 일본어족 언어가 아닌 한국어로 작성되었으므로, 이 시기에 한반도 동남부의 일본어족 기층어는 이미 특정 시골에서만 사용되는 소수 언어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라고 했다.
227쪽# 물론 6-7세기라는 시간대가 삼국통일과 얼추 일치하긴 하지만, 보빈이 굳이 6-7세기를 채택한 이유는 3세기
위서에 한국어스러운 신라어 어휘보다 일본어스러운 어휘가 더 많이 기록된 후, 6-7세기에
향가와
양서에 신라의 한국어 어휘가 대거 기록되기 전까지 기록에 큰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인들이 남하해서 신라에 한국어를 전파했다는 식의 이상한 주장이 아니라, 신라 초기부터 한국어 화자와 반도 일본어족 화자가 공존했으며 점차 한국어가 우세해졌다는 말이다.
[8]
2007년에 내놓은 신라어에 대한 논문에서는 아예 신라의 언어 교체 시기를 3-7세기라고 길게 잡기도 했다.
# 또한 해당 논문에서는 신라어가 대체한 일본어족 언어를 "진한어(Cin-Han language)"라고 따로 분류했는데, 2014년에는 "일본어족 신라어(Sillan Japonic)"라고 명명했다.
# 즉 사로국의 진한 평정을 경주분지에 정착한 고조선계 한국어 사용자 세력이 인근의 반도 일본어 사용 지역을 정복해 한국어를 퍼트리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보빈의 논문처럼 영남지역 언어 변화 시기를 늦게 잡더라도 고고학과 크게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더라도, 딱히 경주분지 지역에 '고조선 계통의 한국어 사용자 세력'과 '일본어족 세력'이 서로 확연히 구별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근거는 없고, 그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정복'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오히려 기원전후 경주지역 초기철기시대 목관묘사회는 그와 같은 지배-피지배 구조가 확연히 드러날만큼 문화양상이 이질적이지 않다.
[9]
사실
원삼국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 경에
고조선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상당한 영토를 상실한 것을 계기로, 적지않은 수의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된 정황이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다만 이 사건이
고대 한국어의 확산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이다.
[10]
여담으로 이 논문의 초록에서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알타이 제어설에 대한 결정타(nail in the coffin)일 것"이라며 알타이 제어설을 디스한다.
[11]
다만 부여, 고구려, 신라 등에서도 태양을 숭배하긴 했기 때문에 허점이 있다. 즉 일본만의 풍습은 아니라는 것.
[12]
벼농사 중에서도
논을 짓는 형태는 양쯔강 하류에서 처음 개발되었다.
[13]
일본어족 언어의 첫 형태. 즉 류큐어파와 일본어의 공동 조상이자, 반도 일본어설을 인정한다면 반도 일본어파와 열도 일본어파의 공동 조상.
[14]
동료평가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가설이 주류 학계의 지지를 받기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상당 수준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담보되어야만 가능한 얘기다.
[15]
간혹 이 학설이 맞다면 반도 일본어가 현대 일본어보다 앞섰으므로 명칭의 순서가 역전되었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이것은 언어분류학에선 너무나도 흔한 현상이다. 편의상 현존하는 언어의 명칭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논리라면 '한국어'라는 명칭도 '현대 고조선어' 등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부 인위적으로 붙인 이름들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맞거나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반도 일본어라는 명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
[16]
또다른 예로는 그리스계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사용된 '고대 마케도니아어'가 있다. 이 역시 슬라브계 언어인 현대의
마케도니아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17]
여기서 다시 논란이 생기는데, 보빈은
일본어족의 발원지가
중국 중남부였을 가능성을 제안했으나, 2021년에 다국적 연구진들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어족의 기원지는
요동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한일 양국의 고고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그 발원지는
한반도 중남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18]
여담으로 곰(고마)은 일본어로 くま(쿠마)라고 하며 이 단어도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