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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4:27:26

국화와 칼

<colbgcolor=#605B44,#DDDDDD><colcolor=#E89149>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Patterns of Japanese Culture
파일:국화와 칼 표지.jpg
장르 역사, 인문학
작가 루스 베네딕트
번역가 김윤식, 오인석[1]
출판사 파일:미국 국기.svg 휴튼 미플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을유문화사
발매일 1946년
쪽수 324 pp
ISBN 412839

1. 개요2. 저술 배경3. 판본4. 내용
4.1. 전쟁 중의 일본인4.2. 천황4.3.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4.4. 죄의 문화와 수치의 문화
5. 평가
5.1. 비판5.2. 주의 사항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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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1887~1948)가 1946년에 지은 일본학 연구 도서.

일본학의 개념서로도 일컬어지며 일본학을 전공한다면 필수로 읽어보는 책으로 꼽힌다. 책 내용 자체에는 다소의 비판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사상적, 인류학적 배경지식을 쌓기에는 유용하여 현재까지도 고전으로서 널리 읽히고 있다.

제목의 뜻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꽃인 국화(菊花)와 그 반대로 일본인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칼(刀)에서 따왔다. 또한 국화는 일본 황실의 상징으로, 천황을 일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기에 제목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칼은 사무라이 정신을 부르짖으며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카타나를 휘두르게 된 호전적인 성품이 있다는 이중성을 비유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의 (일본 바깥 기준으로) 기묘한 문화 체계를 저자의 전문적인 분석과 해부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 책을 통해 전통적인 일본의 관습이나 사회 체계부터 시작해 일본인들의 외적인 행동, 기본적인 사고방식, 생활 예절 및 풍습, 메이지 유신, 패전 후의 일본인 등을 다각도에 걸쳐 세세하게 나누고 심층적으로 연구하였다.

2. 저술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인 1944년 미국 정부는 "그간 우리가 주적인 일본 제국에 대해 너무 무지했으며, 이 전쟁이 끝나더라도 일본을 비롯한 동양 전반에 대해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전시에 일본이 보인 언동들은 미국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2] 심지어는 순순히 항복한 이유조차 의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 위촉으로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 분석을 목적으로 저술을 의뢰하였으며, 일본의 패전 1년 후인 1946년 미국에서 공식 발간 되었다.

주로 일본과 일본인은 물론 일본 문화와 풍습 등을 다루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해부적인 내용으로 저술해 나갔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전시 일본인들이 벌였던 여러 행동, 이를테면 카미카제 자살 특공, 할복 자살 방식의 집단 옥쇄, 반자이 어택 등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여겼다. 2차 대전의 서부전선 독소전쟁도 만만치 않게 지옥도였다곤 하지만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자 미국 수뇌부가 당황한 것이다.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이 그나마 말이나 정서가 통하던 독일군, 이탈리아군들과 달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군들의 정신 구조를 파악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그 이후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단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었고, 전시 및 전후에도 딱히 방문할 수 없어 외적으로 습득한 지식으로만 일본을 바라보고 책을 집필했다. 저술 도중에 직접 방문할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지만, "전시 상태라 방문할 수 없었다"고 베네딕트는 책에 밝히고 있다.

미국이 유독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과 달리 일본 군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딱히 일본만이 별종이었다기보다는 애초에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미국과 비슷한 문화권[3]이지만 일본은 전혀 다른 문화권인 점이 컸다.[4] 물론 나치 독일하의 독일인들이나 일본 제국하의 일본인들이나 둘 다 광기에 차 있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극한의 전쟁 상황 속에서는 평범하고 겁에 질린 인간으로 돌아간 독일 군인들과 달리 끝까지 악에 받쳐 싸우던 일본군들이 더 충격이 컸을 것이다.

또한 서양 국가들과는 달리 일본과는 소위 ' 귀축영미'들과 커다란 갈등의 소지가 없었다는 점도 미국 입장에선 중대한 의문점이었다. 독일을 예로 들자면, 독일 민족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수백 년 넘게 부대끼며 살아왔고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갈등과 평화를 반복해 왔다. 당장 2차 대전 이전에 한 차례의 대전을 심하게 겪은 바 있었고, 당시의 전쟁 피해자들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독일 군인은 수없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인 또는 집시들에 대한 분노, 슬라브 민족과의 오랜 갈등, 1차 대전 당시의 영국, 프랑스, 미국과의 악연 등을 생각하면 히틀러를 비롯한 극우 나치 세력들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세뇌시켰을 때 그것이 군인 개개인의 사상과 전투 태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독일군은 처절하게 싸우긴 해도 일단 수틀리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며 항복했다.

반면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비록 개화기에 서양 열강들에게 이런저런 불평등 조약을 맺고 약간의 '괴롭힘'을 당했다곤 하나, 그 시기가 길진 않았으며 민족 전체의 불만으로 쌓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다이쇼 시대 일본은 '제국'을 건설하여 당당히 열강으로 취급받았고 한반도와 만주를 획득하면서 승승장구해 나가고 있었다. 그 전까지 일본은 서양 열강과 총력전을 벌이긴커녕 큰 갈등을 빚은 적도 없었고 하다못해 '반미 시위' 같은 비정상적인 국민감정이 표출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일본을 단시간에 그렇게 만들었는지, 국화를 들고 서양인을 환대하던 온건한 일본인은 어디 가고 '귀축영미'라면 을 들고 반자이 돌격을 해서라도 막으려 드는 악귀들로 변하였는지 미국은 알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3. 판본

대한민국에서는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한국어로 번역, 발행하였는데 작가 사후 저작권이 만료되어 다른 여러 출판사에서도 번역 출간 되었다.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박규태[5] 번역본은 영어식 표현을 단어 단위로 직역해 놓아 번역의 질이 좋지 않다. 각자 판단할 수 있도록 일부 문장을 비교해 둔다.

4. 내용

4.1. 전쟁 중의 일본인

루스 베네딕트는 서양의 전통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일본의 관례에 주목한다. 우선 전쟁의 명분부터가 하술할 각자의 알맞은 위치를 역설한 것으로서, ' 추축국의 침공'을 명분 삼은 미국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작가 본인의 말을 빌려서,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참된 사명은 황도(皇道)를 사해(四海)에 널리 홍포하고 선양하는 데 있다. 힘의 부족은 우리가 개의할 바가 아니다. 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국화와 칼,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 대장의 팸플릿 <전 일본 민족에게 호소함> 중에서
또한 작가는 일본군의 큰 특징으로 알려진 정신력에 관하여 논한다. 일본군이 전쟁 중 외쳐대던 '정신력이 물질력을 이긴다!'라는 주장은 흔히 '가난한 나라의 핑계' 내지는 '속고 있는 국민의 망상'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기이한 습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금제와 훈련에 의해 일본인의 심중에 각인된 것이다. 물론 그들도 전쟁 준비를 위한 물자 증산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병기들은 옛 무사도의 상징이 검이었던 것과 같이 일본의 정신력에 대한 상징일 뿐이었다.

4.2. 천황

작가 루스 베네딕트는 책 전반에 걸쳐 일본인의 천황 숭배를 설명한다. 독일 아돌프 히틀러 우상화 등 다른 서양 국가들의 세뇌와는 다른 일본의 천황 숭배의 특수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미국을 어리둥절하게 한 일본 항복의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군부는 전쟁 중에 갖가지 것에 천황을 들먹이면서 병사들을 선동하여 전쟁을 주도했지만, 천황에 대한 순종은 역으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도 했다. 일본군 포로들은 천황의 명령이라면 가장 호전적인 그 관동군이라도 항전을 그만두고 전후 재건을 위한 포기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전쟁은 쇼와 천황이 군부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항복을 선언하자 별 탈 없이 끝났다. 미국은 천황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였기에, 이전까지 1억 옥쇄를 부르짖던 일본이 갑작스레 항복하고 순응한 것에 당황하였던 것이다.

많은 미국인 학자들(물론 2차 대전 당시의 학자들)은 "천황이 일본에서 갖는 존경과 권위는, 모두 최근에 들어서 조작된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천황의 신성성을 맹렬히 공격하고 전후 그를 강경하게 처리한다면 일본인의 전의는 쉽게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을 알고 지내던 '현명한' 미국인들은 "천황을 모욕하는 것만큼 일본인을 노엽게 하고 전의를 선동하는 것이 없다"라며 반박했다. 이들은 일본의 천황 숭배는 모든 파시즘적 악과 결부된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 숭배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군이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6] 중 열렬한 군국주의자들은 (다들 알다시피) 자기 신념의 원천을 천황에 두었지만, 이는 반전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부류들은 " 폐하는 평화를 애호하시며, 항상 자유주의자셨고, 전쟁에 반대하셨지만 단지 군부에게 속으셨다."라거나 "폐하는 만주사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고 병사들의 열악한 실태를 모르신다."라며 군국주의 침략 전쟁과 황실 숭배가 무관함을 단언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를 배신한 장교들과 공직자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전쟁의 책임을 히틀러에게 돌린 독일군 포로들의 진술과는 전혀 달랐다.
천황이 없는 일본은 진정한 일본이 아니다.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이며, 국민 종교 생활의 중심이다. 천황은 초종교적 대상이다.
국민은 천황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패전하더라도 책임은 내각과 군 지휘관이 져야 하며,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
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10명이면 10명 다 천황을 계속 숭배할 것이다.
국화와 칼, 일본군 포로들의 천황에 대한 견해

포로들은 거의 모두 천황을 비방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는 미국에 협력하여 대일본 선전 방송을 맡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7] 그러면서 무능한 간부들과 배신자, 도망자들에게는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포로가 아니라 본토의 일본이라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 제한에 대한 비판과 내각, 대본영, 상관에 대한 비판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8] 당시 일본인들이 계층 의식에 얽매여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결여돼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군대의 명예와 화족의 권위에 대한 선전·교육도 남부럽지 않게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다.

4.3.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각국이 알맞은 위치를 갖는 것, 만민이 안전과 평화 속에 살기 위한 과업은 가장 위대한 대업이다. 이것은 역사상 실현된 적이 없었다. 이런 목적의 달성은 아직도 요원하다.
국화와 칼, <1940년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체결한 3국 동맹 관련 조서>
대일본 제국 정부, 독일국 정부 및 이탈리아국 정부는 전 세계 국가들이 '각자의 자리\'를 획득하는 것이 항구적인 평화의 필수 조건임을 인정함에 따라 대동아 및 유럽지역에서 각 지역 해당 민족 간의 공존, 공영의 열매를 따지기에 충분한 신질서를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을 근본의(根本義) 없이 우호 지역에서 이 취지에 부합하는 노력에 대해 상호 제의하고 협력하기로 결의했으며, (후략)
大日本帝国政府、独逸国政府及び伊太利国政府は万邦をして各其の所を得しむるを以て恒久平和の先決要件なりと認めたるに依り大東亜および欧州の地域に於て各其の地域における当該民族の共存共栄の実をあぐるに足るべき新秩序を建設しかつこれを維持せんことを根本義となし右地域においてこの趣旨に拠れる努力に付き相互に提携しかつ協力することに決意せり、(後略)
1940년 9월 28일, 삼국 동맹 조약 체결에 대한 일본 외무성 발표 원본
동아시아의 안정을 보장하고 세계 평화를 도모함으로써 모든 국가가 세계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불변의 정책이다.
It is the immutable policy of the Japanese Government to insure the stability of East Asia and to promote world peace and thereby to enable all nations to find each its proper place in the world.
태평양 전쟁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
루스 베네딕트는 책에서 "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 원인을 서양과 일본이 각자 달리 보았다"고 분석했으며, 일본 입장에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중요시했던 가치인 '각자의 자리(各其の所)'를 찾는 것에서 유발했음을 꼽았다. 베네딕트는 일본의 이러한 행위를 분석하면서, 일본은 국가 내부는 신분제를 통해 다시 말해, 평민-사무라이-귀족-쇼군-덴노로 이어지는 '자리'의 확립을 통해 궁극적으로 일본인이 가장 중요시하는 '와()'를 실현하고자 했음을 언급했다. 따라서 서양의 봉건제나 중국의 관료제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도 적었다.

일본의 계급 신분제는 계층의 이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한 항구적인 지위나 다름없었다. 관직의 인사 이동, 봉토의 이동에 따라 얼마든지 위, 아래가 뒤바뀔 수 있거나 다른 상사를 모실 수 있었던 관료제 혹은 서양 봉건제와 달리 일본의 봉건제는 주군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는 형태였고, 이는 일본인에게 있어서 '자리'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영구적인 신분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게 베네딕트의 분석이다. 그리고 "모든 일본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때 비로소 '와(和)'가 실현된다고 보는 것이 일본의 기초 사상"이라는 말 또한 덧붙였다.

베네딕트는 천황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상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천황은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로 전락하지만, 밑의 사람이 이 '자리'를 침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막부 쇼군 제도는 이 자리를 지키면서, 현실적인 권력 구조를 개편하기 위한 일본만의 방침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일본은 기존 동양의 조공-책봉 체계 아래에서는 절대 넘볼 수 없는 중화의 질서에 순응하였지만, 개화기 이후 기존 자신이 머물던 세계의 질서가 개편되자 '일본'이 '신질서'에 걸맞은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한 것이 바로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이라고 보았다.
일본은 그들의 형이며, 그들은 일본의 아우이다. 이 사실을 점령 지역의 주민에게 철저히 인지시켜야 한다. 주민을 지나치게 배려하면, 그들이 일본의 친절에 편승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통치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국화와 칼, 일본의 식민 통치 방침을 인용하면서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에 먼저 편승한 일본은 아시아에서 '형'의 대접을 받고자 했다는 게 베네딕트의 주장이다. 일본 입장에서 '자리'란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필사적으로 그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일제의 식민 통치가 다른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아래의 식민지와 성격이 달랐던 것은 일본 스스로가 식민지 지배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이러한 사상에 기초한 것이 더 크다고 베네딕트는 보았다.

4.4. 죄의 문화와 수치의 문화

기독교적 구미 문화는 '죄의 문화'이며, 일본의 문화는 '수치의 문화'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서구의 문화를 '죄의 문화', 일본 문화를 '수치([ruby(恥, ruby=(はじ)], Haji)의 문화'로 구분했다.

서양 문명 가운데 기독교는 선악의 잣대였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십계명에 도둑질은 죄라고 규정되어 있다. 도둑질했을 경우 죄를 지으면 양심의 소리, 즉 죄의식에 시달리는 게 일반적이다. 가톨릭에는 고해성사란 게 있다. 사제를 통해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 선악의 기준은 타인(他人)의 눈이다. 보편적인 원칙, 즉 상식이라는 사회 규범이 작동하지만 선악의 잣대는 다른 사람의 평판이 절대적이다. 수치 문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일본인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목이 행동의 기준이 되며, 일본인에게 '수치를 모르는 이(恥知らず)'와 '의리를 모르는 이'라는 말은 심각한 수준의 욕이다.

이렇듯 일본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평가한다. '수치를 모르는 이(恥知らず)'로 낙인찍히면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규범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서로 감시하는 관계의 문화가 일본 스타일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죄만 아니면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주의적 인간을 만들어낸다. 베네딕트는 이를 두고 "서양인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을 개성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인들에겐 수치를 모르는 인간에 불과하다"라 평가했다.

5. 평가

이 책의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일본을 직접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다. 대신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나 일본에 대해 정보통을 갖고 있다는 미국인들의 증언과 일화, 문헌 조사 등을 토대로 책을 저술했으며, 일본을 직접 방문해서 일본의 내막을 알지는 못 했다. 나쁘게 말하면 주변인들에게 들은 카더라 모음집이라고 말할 수 도 있다. 시대적 한계와 간접 체험으로만 이루어진 조사 방법으로 인해 현대에는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 문화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5.1. 비판

물론 다음과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9] 우선 역사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는데 에도 시대 메이지 시대에 통용되었지만 쇼와 시대에는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았던 가치관이나 규범이 많은데, 국화와 칼은 이를 고려하지 않으며 예를 들어 기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 메이지 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언급이 없다.

직업, 신분, 세대에 상관없이 일본인들을 모두 동질적인 존재로 엮어 일반화하는 부분이 많다. 밥 먹고 잠자는 습관같이 개인의 다양한 습관일 수도 있는 것들을 함부로 일반화하여 결국 서양인과 다른 '이상한' 일본인을 강조하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즉, 전형적인 '외집단 동질성 편향'을 범하고 있다는 것. 사실 <국화와 칼>은 별다른 통계 수치를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사례'들만 열거하는 식으로 일본인을 해설하고 있다. 이러한 베네딕트의 방식대로면 미국인은 전부 총기를 좋아하고 진취적이고 개척자 정신을 품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한국인은 음주가무를 즐기고 컴퓨터 게임을 잘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민족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게 단순히 술자리 가십거리에 그친다면 모르겠지만, 이 책은 정식으로 일본학 이론을 펼치고 있는 학문서라는 점이 문제다.

일본인의 사고관을 정립하여 해설하고자 했다면 보다 구체적인 통계 자료를 곁들일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집단 문화와 가부장적 제도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데, 이를 공신력있게 설명하고자 했다면, 일본 내부에서 지역별, 연령대별로 발생하는 '가부장적 행위'의 발생 통계는 얼마나 되는지, 일본인 여성의 진학 비율이나 학업 성취도 등은 서양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일본 도시 지역과 농촌 간의 유의미한 문화 차이가 있는지 등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국화와 칼>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저술되었기 때문에 이런 통계를 내거나 조사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베네딕트도 완전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는 당대 통념으로 이야기되던 내용을 한데 모아 묶은 것에 가깝다. 이후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이 재건되고 본격적으로 '일본학'이라는 학문이 정립되면서 <국화와 칼>을 토대로 하여 실제 그 사실을 통계적으로 검증해 나간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국화와 칼> 자체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면서 책 내용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 그 후속 연구와 통계 자료를 병행하여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5.2. 주의 사항

책 자체가 이제는 구식이라는 지적도 있다. 비판이라고도 보기 뭐한 게, 일단 <국화와 칼>은 저술된 지 [age(1946-01-01)]년이나 된 책이고, 쇼와 시대와 일제 군부 통치 시기를 관통하던 시기에 저술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한마디로 당시엔 맞는 책이지만, 책이 쓰여진 지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일본과 일본인들이 변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 미국을 통한 해외 세계의 질서와 사회 법칙이 받아들여지면서, 점차 일본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각자의 알맞은 자리를 찾으려는 습성은 남아있지만 상당 부분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루스 베네딕트가 바라보던 2차 대전기의 일본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자국민조차 비국민 취급을 하고 군부에 의한 강압과 독재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인'과 레이와 시대의 '일본인'은 또 다르며,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유지되는 점도 있겠지만 달라진 점 또한 분명 존재한다. 그게 없다면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세대 갈등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10]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당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과 사상을 이해하고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나 교차 검증 하는 용도로 쓰는 게 좋다는 주장도 있다.

6. 여담

이원복이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현대문명진단에 '고전 만해(漫解)' 시리즈 중 2번째로 이 <국화와 칼>이 다루어지기도 했으며, 단행본으로 이 책을 다룬 학습 만화로는 예림당 Why? 인문고전 시리즈가 있다.

SBS에서 1995년 광복절 50주년 기념 특집 방영된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 책과 관련이 있다. 링크

제목인 <국화와 칼>은 '대립 관계'를 통해 일본인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국화'는 일본식 정원으로 나타나는 일본인만의 특유한 특성을 나타낸다. 일본인들은 소나무를 분재하듯이 인위적으로 정원에 있는 식물을 '알맞는 위치에' 정확히 두어 꾸미는 것을 선호한다. 국화도 마찬가지로 한잎 한잎 정돈하고 철사로 고정하여 올바른 위치에 고정시킨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일본인 특유의 틀에 박힌 사회적 질서('온', '기리', '하치') 속에서 행동 양식을 정해왔다.

다음으로 '칼'은 일본인 자신의 내면을 상징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칼집에 있는 칼은 녹슬지 않고 항상 반짝여야 하므로 본인(칼)은 항상 반짝이게 갈고 닦아야 하며, 만약 '몸(칼)에서 나온 녹'이 있다면 본인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녹슬지 않은 칼은 자신의 행동(실패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은 일본인의 암묵적인 사회적 규율을 설명하는 수단일 뿐이다.


[1] 최초로 국내 발간된 을유문화사 기준. [2] 일본군들은 항복을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일단 투항을 하면 이름과 소속, 계급을 넘어서 군사 기밀까지 말하거나 심지어 협력까지 했다. [3] 서구, 기독교 문화권 [4] 동방, 한자 문화권. [5] 종교학 전공자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도쿄대학 종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에도 막부 말기의 신종교 운동에 관한 내용이며, 일본의 종교와 사상 분야에서 국내 최고 전문가 반열에 있는데 2017년 신토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주는 <신도와 일본인>이라는 명저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있다. [6] 일본의 무항복주의 정책에 따라, 일본군은 서양 병사들과 달리 적군의 심문에 대한 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전의가 없어서 투항한 것이 아닌, 극심한 부상이나 혼수상태에 의하여 타의로써 사로잡힌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의견은 당대 일본군 전체의 보편적인 의견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7] 포로들의 수많은 진술서 중 천황에 비판적인 건은 단 3통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통은 "천황은 의지가 약할 뿐"이라며 사실상 변호했고, 1통은 "지금의 천황이 폐위되고 황태자가 즉위할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만약 천황제 자체가 폐지된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애매한 답변이었고, 나머지 1통만이 천황제의 폐지를 직접적으로 주장했다. [8] 1944년 7월 게재된 대정익찬회와 전 국회의원·기자들의 좌담회에서 "전시의 폭압적인 체제 때문에 국민들이 위축되어 봉건 시대의 겁쟁이들로 돌아갔다"는 둥 지배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9] 출처: 정현숙, 일본 사회문화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10] 일본은 전후 극심한 세대 갈등을 겪었으며, 이를 상징하는 단어로 신인류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