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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어 항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어 항목[2]
신라어(新羅語)는 한반도의 고대 왕국들 중 하나인 신라에서 사용한 언어를 일컫는다.
2. 관련 연구
일반적으로 신라어는 최근에는 여러 반론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현대 한국어의 직계 조상격인 언어라고 추정되며, 실질적으로 계통이 파악된 어휘 역시 다수 발견되었다.그 예를 들면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에서 이미 고려, 조선시대에 일상적으로 사용된 이두 문법이 자유롭게 쓰이고 있어 신라인들이 6세기 이전부터 ‘동사의 활용’을 자유자재로 표기할 정도로 신라어 표기법을 발달시켰음이 드러났다. 월성 해자 목간의 이두 자료 예를 들어 월성해자 목간에서 발견된 백견(白遣)이라는 이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경칭(敬稱) 동사로 ‘사뢰-’라고 훈독되는데 기존에는 원왕생가( 삼국유사)와 불국사 석가탑 〈무구정광탑중수기〉(1024년), 〈서석탑중수형지기〉(1038년)에 가서야 나오던 글자이다. 또한 신라식으로 읽으면 '(하)겨다', 현대국어로 ‘하였다'라는 뜻인 위재지(爲在之)/교재지(敎在之)라는 글자도 가장 오랜 기록으로 발견되었다. #, ##
신라의 지방 통제력[3]은 물론 동시대 기준으로도 매우 고도로 행정이 발달한 수백년 후의 조선에는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오히려 공민왕 이전의 고려보다는 짜임새가 있었다. 가령 삼국사기 직관지 외관조에는 통일신라가 전국 주군현에 파견한 관리 숫자가 하나하나 적혀 있는데,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 숫자는 고려 대부분 기간보다 오히려 통일신라가 더 많았다. 통일신라나 조선이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과 달리 고려는 고려 말 이전까지는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현지 지방세력이 자치하는 속현이 많았기도 하다.[4] 즉 후삼국시대를 태조 왕건이 호족의 대표로서 호족 연합체를 꾸려 타개한 탓에 고려초 지방 장악력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서도 상당히 약화된 것이다. 물론 이 설을 따른다 해도 로마사나 일본사도 그렇듯 시대가 흐를수록 중앙집권이 항상 꾸준히 강화되는 것만은 아니므로 특이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에는 황해도 일대가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있다. 나당전쟁 당시 당나라와의 관계 탓에 신라는 나당전쟁으로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뒤에도 굳이 황해도 지역까지 옛 백제 지역처럼 무력으로 찍어눌러서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려 하지 않았었다. 그 탓에 평안남도는 아예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5],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그 이전에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들 영토들은 특정 국가들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야인들의 영토였었다. 때문에 고려 초기보다도 강했다는 신라의 중앙통제력은 적어도 옛 고구려 유민들이 정체성을 유지하고 반쯤 자치적으로 살던 패서 일대와 옛 고구려, 발해 지역들에서는 굉장히 제한적으로만 영향을 미쳤다.[6] 그나마 신라령이었던 황해도는 헌덕왕 때까지도 재령강 이동까지만 편재를 완료했을 뿐, 끝내 황해도 서쪽 절반에는 외사정을 파견하거나 군부대를 설치해서 지배력만 유지했을 뿐 군현을 설치하진 못하였다.[7]
그러므로 황해도 일대 호족들은 옛 백제 유민들보다는 어느 정도[8] 독자적인 문화를 보전하고 유지해왔으리라는 추측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바로 이 지역이 후삼국시대를 거친 뒤 한반도의 새로운 중심 지역으로 떠오르게 되니,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시대 이후인 고려시대의 패서호족, 즉 고구려계 호족들이 쓰던 고구려계 언어( 고구려어)로 보는 의견 또한 일리가 없다곤 할 수 없게 된다. [9]
또한 언어와 정체성을 바꾼다는 건 단순히 중앙통제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흡수한 다른 나라 유민들의 정서에 호소하는가 그렇지 못한가에도 크게 갈리므로 피지배층들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결코 지배층으로는 진입할 수가 없는 체제이던 신라에 동화되는 것에 어려움이 따랐을 수도 있다.
국내의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는 과거에는 신라어가 삼국통일 이후 중세 한국어로 이어져 현재 한국어의 근간이라는 설이 정설이었다. 지금도 기본적으로는 이 쪽이다. # 그러다 최근 들어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반론이 등장하였다. 첫째는 고구려어 계통이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애초에 고대 삼국의 언어는 그 차이가 적었을 것이라고, 즉 어디가 근간인가를 따지는 논쟁 자체의 의미를 축소하는 주장이다. 신라어 근간설을 비판하는 진영에서 주류는 급진적 입장인 전자보단 신라어 근간설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고 유보적으로 보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는 후자에 가깝다.[10] 전자 입장은 일부 학자나 알렉산더 보빈 등 몇몇 외국 학자가 주장했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최초 중앙어는 고려가 수도로 정하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라고 추정하였으니[11] 중앙어가 지방으로까지 완전히 퍼진 시점은 고려 건국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알렉산더 보빈 교수는 관련 논문들에서 한국어족을 부여어족( 고구려어)의 직계 후예로 보았다.[12]
물론 백제 지역은 이야기가 다르다. 옛 백제 지역처럼 무력으로 찍어눌러서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려 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한 자료인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쪽의 언어가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고대 로마 같은 경우 옛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자치력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적어도 로마시의 라틴어 외의 다른 지방 라틴어들은 거의 없어졌거나 있어도 사투리 취급 받을 정도로 로마시에서 쓰는 라틴어와 대단히 가까워진 바 있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모압어, 암몬어, 에돔어 또한 대단히 가까운 친척 언어인 아람어가 워낙에 앗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 등지에서 세력을 얻게 되는 바람에 언어 세계는 거의 아람어로 통일되어버린 예가 있다. 이를 고려해보면 적어도 서라벌에서 주로 쓰였던 언어가 통일신라기 내내 지배층들 언어였기에, 서라벌에서 쓰는 언어를 상당부분 따라갔을 개연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앞서 말했듯 신라어의 강한 영향을 배제하긴 어렵다. 아무리 개성과 황해도를 포괄하는 패서 지역이 고려의 중심지로 떠오른다지만 패서를 제외한 임진강 이남, 즉 현재의 남한 지역이 고려의 3/4이었고 인구로 보면 당연히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 및 신라계 호족들도 나말여초를 거치며 고려 지배층에 골고루 편입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 초중기까지 창작된 향가 해석을 통해 통일신라의 언어가 고려/조선의 중세 한국어와 같은 계통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고구려어의 역할만 강조하는 건 상당히 급진적인 가설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이미 고고학적으로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인의 직접 이주로 말미암아 여러 말단취락에도 신라, 백제, 고구려의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는 정황이 나타난다. 개성과 인접한 파주, 포천 등 경기북부 일대에도 이미 대략 6세기 경 무렵의 신라시대 주거지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13] 임진강을 경계로 바로 그 코 앞에 붙어있는 개성이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물질문화상으로는 이미 경기북부지역까지 신라 문화의 유입과 융합이 광범위하게 확인되는데, 이미 통일 직후 얼마 안 돼 신라의 행정영역에 포함된 개성이 유독 독자성을 유지하여 신라와 무관한 고구려어를 보존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반도 일본어설 주장 때문에 간혹 신라어를 반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우선 신라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문헌근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으며 반도 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 일본서기1》, 《 일본서기2》,[14] 《 일본후기》, 《 입당구법순례행기1》, 《 입당구법순례행기2》
사실 보빈 교수의 반도 일본어설 또한 신라 향가나 목간 등이 한국어계가 확실하다며 신라어 자체는 한국어계라고 주장한다. 즉 반도 일본어설의 요지는 신라어가 한국어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대체된 마한 지역과는 달리 진한 및 변한 지역에서는 반도 일본어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남아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진한 중 신라가 한국계라는 점과 삼국시대 중후기 이후 삼국의 언어가 한국계 언어로 일원화되었다는 점에 상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보빈의 학설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다른 근거를 들고와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더불어 아래 문단에 있는 것처럼 중세 한국어와 연결되는 요소를 실제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근거가 된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직접적인 신라어 사료는 중대 이후의 것이 많지만 신라는 삼한시절 사로국부터 후대의 통일신라까지 단절이나 별다른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이므로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어렵다.
현대 국가적 특성을 고대 국가에 투영한 신라어, 고구려어, 백제어라는 개념이 과연 적절한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여러 사서와 제한적으로 남은 사서와 목간 등을 통해 혹시 잔존했을지 모르는 반도 일본어를 제한 삼국의 언어가 매우 동질적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나고 삼국시대 내내 수시로 바뀌는 국경 상황에 맞추어 그 지역의 언어가 격변했을리도 만무하기에 삼국의 언어를 삼분법적으로 나누기는 다소 어렵다. 어쩌면 삼국의 언어라는 분절적인 용례보다는 방언연속체가 삼국시대의 언어상을 설명하는데 더욱 적합할 지도 모른다.
3. 상세
고구려, 백제에 비해 그나마 자료가 많이 남은 고대 언어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여러 고유명사, 향가 등 문학, 당대 자료인 금석문,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신라어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언어를 구체적으로 고찰해내기에는 자료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신라는 약 천 년이나 역사가 지속됐고 중간에 삼국통일전쟁 등의 격변을 많이 겪었기에 전기와 후기의 언어도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까지 밝혀내기에는 현재로서는 어려운 상태다. 신라어 연구는 주로 중세 한국어와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를 중심으로 시작해 차츰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영역을 넓혀 최종적으로 676년 삼국통일을 이룬 후, 약 200여 년간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면서 한국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만이 한국어의 기반이 되었으며 고구려, 백제 계통의 언어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려 이후로는 한반도 중부지방의 언어가 1000년이 넘게 한반도의 중심언어가 되어왔으므로 고구려, 백제 접경지역의 방언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다만, 이러한 주장들은 남북대립에 의한 정치적 의도의 영향을 깊게 받기도 했기 때문에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오직 순수한 학문적 연구성과에 의해 사실이 밝혀지는 게 가장 타당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고대 한국어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연구가 힘들다.[15] 그나마 목간자료가 발굴되어서 당대의 신라어 문법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목간이라고 해도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계점이 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16]이 지금의 경상도 지역인 점과 연결시켜 일부 창작물에서는 신라어를 현대 경상도 사투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대 경상도 사투리는 현대 한국어로,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신라어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굳이 사투리로 따지자면 고려 시대의 중세 경상도 지역 사투리가 신라어와 아주 비슷했을 것이다.
신라어 인명들은 우리말로 풀이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붉(밝)은누리’[17],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처(毗處, 빛)’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관료들의 이름도 황종(荒宗)을 ‘ 거칠부(居漆夫)'[18], 태종(苔宗)을 ‘ 이사부(異斯夫)', 세종(世宗)을 ‘ 노리부(弩里夫)', 염독(厭獨)[19][20]을 ‘ 이차돈(異次頓)’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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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어에서 처음 문증되는 대표적인 어휘 '뿔'. |
지금 현재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어원 또한 신라 대대의 수도였던 금성이 위치한, ' 서라벌(徐羅伐)'이란 단어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변형하여 마침내 서울이라는 어휘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신빙성이 있는 편이다.[21] '서라벌'의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서라벌이 '금성(金城)'이라고도 불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해당 명칭이 '쇠(金)'+'벌(野)'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어원도 서라벌, 사로국 등 'ㅅㄹ' 계통의 이름이 어원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와 '서울'이라는 두 단어가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 어원인 셈이기도 하다.[22]
또한 신라 지명에는 ‘伐’ 또는 ‘火(블)’을 가진 것이 많은데 이것은 후기 백제어 지명의 ‘夫里(부리)’에 대응되는 것으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국어의 ‘셔ᄫᅳᆯ(서울, 京)’, ‘ᄀᆞᄫᆞᆯ(고을, 郡)’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대 국어의 "벌판" 또한 이 단어의 명맥을 이어오는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고유명사의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신라 말엽에 김대문(金大問)이 어원을 제시한 것이 《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있다.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에 관한 것인데, 이로 보아 그때에도 이 단어들의 어원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차차웅'은 무당, '이사금'은 잇금, '마립'은 말뚝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였는데, 이 모두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23][24]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 其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
그곳 말로 성(城)은 ‘건모라(健牟羅)’[25]라고 하고, 읍(邑)의 안쪽은 ‘탁평(啄評)’, 바깥쪽은 ‘읍륵(邑勒)’이라고 하는데 역시 중국말로 군현(郡縣)이다. …관(冠)은 ‘유자례(遺子禮)’, 속옷[襦]은 ‘울해(尉解)’[26], 바지[袴]는 ‘가반(柯半)’[27], 신[靴]은 ‘세(洗)’[28]라 한다.
《 양서》 〈신라전(新羅傳)〉 中
기타 자료로는 중국의
양서 신라전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역시 양서에서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을 거쳐서 (중국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언어가 같거나, 또는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29]그곳 말로 성(城)은 ‘건모라(健牟羅)’[25]라고 하고, 읍(邑)의 안쪽은 ‘탁평(啄評)’, 바깥쪽은 ‘읍륵(邑勒)’이라고 하는데 역시 중국말로 군현(郡縣)이다. …관(冠)은 ‘유자례(遺子禮)’, 속옷[襦]은 ‘울해(尉解)’[26], 바지[袴]는 ‘가반(柯半)’[27], 신[靴]은 ‘세(洗)’[28]라 한다.
《 양서》 〈신라전(新羅傳)〉 中
그리고 《 일본서기》에 뜻을 알 수 없는 신라어 단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彦)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테히코(手彦)는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30](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19 〈 긴메이 덴노〉 562년 7월 中
일본서기의 기록을 정리하자면 왜군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군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고,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구수니자리'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일 테니 아쉬운 심정을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는 없다.[31][32][33]《일본서기》 권 제19 〈 긴메이 덴노〉 562년 7월 中
3.1. 신라어의 음운체계
신라어의 음운체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는 매우 빈약하여 그 자음체계와 모음체계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말하기 어렵다. 우선 자음체계를 보면 파열음(破裂音)과 파찰음(破擦音)에는 평음(平音)과 유기음(有氣音)의 두 계열은 있었으나, 된소리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은 주로 우리나라 한자음의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이다.추가로 신라어의 모음체계에서는 중세 한국어의 7단모음(單母音) 즉 ‘·, ㅡ, ㅣ, ㅗ, ㅏ, ㅜ, ㅓ’에 대응되는 모음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몇몇 학자들은 신라어에 ‘ㅣ’가 둘이 있었을 가능성(*i와 *○)을 추구(追究)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여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론을 말하기가 이른 처지에 있다. 당시 한자음만 놓고 본다면, 신라인들은 운모 -au와 -uo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음이 여러 고유명사 음차를 통해 확인되며, 이기문의 모음추이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은 이를 ㅗ로 보고 있다.[34]
성조 구분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신라인들 본인은 잘 의식하지 못하고 이를 통해 단어를 변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당시 문헌을 상고해보면 신라인 목간 기록자들이 신라어를 한자로 음차할 때 대부분 평성/입성인 글자만 골라 사용했다는 점[35]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3.2. 신라어의 문법
자세한 내용은 신라어/문법 문서 참고하십시오.4. 부여 계통 언어와의 관계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신라는)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새겨 (남과) 약속을 했다. (중국과 통하기 위하여) 언어는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한다.[36]
《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中 신라
( 신라는)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새겨 (남과) 약속을 했다. (중국과 통하기 위하여) 언어는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한다.[36]
《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中 신라
《남사》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서에서는 신라어가 고구려어, 백제어 등 부여 계통 언어와 유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도 세 언어는 같은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데, 바로 아래와 같은 공통된 특징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유사성으로는 각국의 관등 및 인명에서 유난히 자주 나타나는 '지', '보', '마' 계열의 존칭 접미사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와 어지지(於只支),[37] 백제의 ' 건길지(鞬吉支)', 그리고 신라의 ' 알지(閼智)', ' 세리지(世里智)' 및 ' 거칠부지(居七夫智)'에서는 공통적으로 접미사 '-지'가 등장하고 있다. 가야의 ' 좌지(坐知)', ' 김탈지(脫知)', ' 도설지(導設智)' 또한 이에 해당한다.
병마를 맡은 관직인 대보(大輔), 우보(左輔), 좌보(左輔)는 백제와 고구려에서 최고위 벼슬이기도 했다. 이 '보(輔)'는 나중에 '부(夫)'로 변형되어 '중외대부(中畏大夫)'를 비롯한 관직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 명림답부(明臨答夫)', 신라의 ' 이사부(異斯夫)'와 ' 거칠부(居柒夫)' 등의 인명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어휘는 현대 한국어에서도 '뚱보', '울보', '먹보', '느림보' 등에서 접미사로 남아있다.
十二年春正月戊子朔 天皇御大極殿受朝賀 渤海郡使新羅學語等同亦在列 但奉翳美人更着袍袴
12년(740) 봄 정월 무자년 초하루, 천황이 대극전(大極殿)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받았다. 발해(渤海)의 사신과 신라학어(新羅學語)[38] 등이 행렬에 함께 서 있었다. 다만 깃일산을 받드는 미인은 다시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740년 1월 1일 기사
동북아역사재단 소속 사학자 고광의는 이 대목을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증거로 보며, 신라학어를 함께 앉힌 이유는 일본 조정과 발해 사신 사이의 통역을 신라학어에게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발해어와 신라어 화자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다만 일본의 학자 유자와 타다유키의 반론에 따르면, 신라학어가 초대되는 일은 평소에도 많았고 정식 통역을 맡은 신라역어가 언급되지 않거나 신라학어가 통역을 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그 자체로 증거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12년(740) 봄 정월 무자년 초하루, 천황이 대극전(大極殿)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받았다. 발해(渤海)의 사신과 신라학어(新羅學語)[38] 등이 행렬에 함께 서 있었다. 다만 깃일산을 받드는 미인은 다시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740년 1월 1일 기사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라어를 부여 계통 언어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39]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서 삼국시대 후반 신라어가 고구려어, 백제어와 같은 계통인 것 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걸 간과한 주장이다. 심지어 일본서기에서 '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록들을 보면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한(韓)어' 계통의 언어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40] 반면 일본서기 비다쓰 덴노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역관을 따로 두었을 정도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하며 자국의 언어와는 따로 구분했다.[41]
그리고 백제어의 계통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르다는 서울대 언어학과 이기문 교수의 주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중반부터 지배층과 피지배층에서 서로 언어가 통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 없이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들도 백제 왕을 모두 코니키시( 건길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기문 교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다. 무엇보다 최근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의 '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서 백제 지역의 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와 언어가 통한다는 기록(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 한 예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이 있다고 한다.[42][43][44]
그러나 이에 대해 재반론을 하자면 광개토대왕비문에서 한/예인들과 고구려맥인들의 의사소통이 문제가 없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한/예들이 고구려의 묘지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모를까봐 고구려 사람들을 더했다는 말이 나올 뿐이다. 게다가 백제 지배층이 예인이라는 것도 확실치 않다. 예인이라고 정확하게 불렸던 경우는 옥저, 동예 지역 사람들 뿐이고 막상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양맥으로 불렸다. 한성백제 시절 동예지역 예인들이 백제로 편입했으나 그들은 피지배계층이였을 것이다. 애초에 고구려가 아무리 백제를 밟았어도 귀족 등 지배계층한테 묘지관리를 시킨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백제가 이중언어체계가 맞다면 백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류와 언어가 같을테고 남쪽 마한계 백제인들은 신라어와 같은 한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당장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 남부의 한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백제의 언어가 '부여어'와 '마한어'로 나뉘어 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록이라 백제가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는 이기문 교수의 주장이 틀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애초에 고고학적인 면에서 마한계와 상이한 형태를 가진 부여계 집단이 백제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도리어 현재 존재하는 사료들은 부여와 비슷하게 예맥계 집단인 고조선이 마한계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근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서는 신라의 건국 세력이 예맥 계통인 고조선의 유민들이며, 이들이 진한 6촌을 형성했다고 분명히 나오는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에 서술된 진언(진한어)의 언어 계통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중국어 계통이 아닌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분명히 나온다.
또한 후기 백제인들은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45]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46].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 님’이 됐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현대 한국어의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47])
하지만 '니리므'가 어느 계통의 단어인지 지배층만이 사용하던 단어인지 아니면 피지배층만이 사용하던 단어인지 그것도 아니면 백제인들 모두가 사용하던 단어인지 아직 불명이고 무엇보다 모든 백제인들이 왕을 '니리므'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을 때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그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을 호칭하던 기존의 단어가 '백제 후기'에 와서 다른 단어로 바뀌었을 뿐인 것이다.) 4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들(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이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결론적으로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같은 언어계통이고 신라어는 그런 백제어와 또 같은 언어계통이므로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가 모두 같은 언어계통이라는 사실을 추정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기록이 무려 천년 뒤의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후에 삼국사기 편찬 당시 무려 천 년 전에 축성된 풍납토성의 발견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상황이므로 단순히 천 년 뒤에 편찬되었으니 신뢰할 수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저 확증없는 추측성 주장일 뿐이다.[48][49] 또한 서울대 언어학과 출신이며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관시킨 이기문 교수의 제자인 이승재 교수 또한 저서 '목간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에서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언어 표기 체계의 차이를 정리했다.[50]
일단 위의 주장들은 모두 아직까지는 가설의 영역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또 최근 국내외 언어학계의 관련 연구를 통해 고구려어, 백제어 등 부여어족에 해당하는 언어들이 신라어족-한국어족과 사실상 같은 계통 언어의 방언(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모두 고대 한국어의 방언에 속한다는 주장)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2010년대로 들어 백제어에서 한국어 계통의 수사가 발견된 현재, 국내외 언어학계에서 백제어는 사실상 한국어족으로 잠정 결론났다.
현재 국내외에서 동북공정, 만선사관의 영향이 있는 중국, 일본을 빼면 부여어족을 일본어족으로 보는 학설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일단 중국 사서와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 고대 중국과 일본의 사서들에서는 부여어족이 퉁구스어족이나 일본어족과는 언어가 유사하더라도 언어 계통 자체는 달랐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에, 둘과 같은 계통으로 연결되긴 어려워 보인다.[51] 그렇더라도 사료들에서 남은 약간의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 어휘들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고대 삼한 언어들의 거의 전부인 형편이라 연구를 하고 싶어도 남은 언어적 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수사라고 알려진 단어조차도 확실하지 않고 아마도 그러리라 추정한 결과일 뿐이다.
5. 자료
신라시대에 향찰로 쓰여진 향가들이 대표적인 신라어 자료이다. 이외에도 신라의 인명, 지명, 관명 등의 표기는 《 삼국사기》, 《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외의 사적(史籍)에서 역사서에 나타난 지명과 인명, 여러 금석문에서 이두, 향찰, 구결, 서기체와 같은 한자로 표기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5.1. 신라어의 어휘
자세한 내용은 고대 한국어/어휘 문서 참고하십시오.다만 해당 문서의 내용은 신라어 뿐만 아니라 고구려어와 백제어 및 후대의 초기 고려어 자료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출처가 표기된 각주를 펼쳐 정말 신라어 자료에서 문증되는 어휘가 맞는지 확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1]
위키란 단어는 이때 없었으므로, 누리(세상)로 대체.
[2]
신라가
가야를 완전히 흡수함에 따라 가야어 또한 자연스럽게 신라어에 흡수되게 되었다.
[3]
민정문서에서 보듯이 섬세하였다.
[4]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2002, p. 83
[5]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
[6]
동북아역사재단 발간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변경기구 패강진 편 참고.
[7]
신라가 패서에 26개 군현을 설치 완료한 시기는 헌덕왕 시기(강봉용,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라는 연구가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과거의 연구로서, 현재는 신라가 헌덕왕 때까지도 재령강 이동 지역에 14개 군현을 설치한 것에 그쳤고,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까지 편재를 완료해서 직접 지배를 관철한 건 태봉이었음이 규명되어 있다.(전덕재,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2016년)(전덕재, 태봉의 지방제도에 대한 고찰, 2022년 발간 경주문화원 발간 경주문화 제27호)
[8]
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독자적이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황해도 일대는 엄연히 간접이었을 망정 지배력이 확고히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감사관에 해당할 외사정이 무슨 일이 있으면 파견되었고, 역시 군부대들도 요소요소에는 설치되었는데 사실 고구려도 평양 천도 이전까진 그런 식으로 옛 낙랑군을 간접 지배했고, 백제 또한 전남 서부 일대를 이러한 방식으로 간접 지배했었다.
[9]
하지만 이 역시 따지고보면 문제가 있는데, 애당초 고려의 중심지인
개성 지역은 통일신라 성립 직후인 7세기 후반(694년) 이미 신라의 행정영역으로 편입되어 오랫동안 신라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다. 또한 개성지역은 대체로 성덕왕 이후의 황해도 개척과는 별도로 다루어지며, 왕건일가 역시 궁에에게 귀부한 이후 지척에 있던 인근 지역을 새롭게 정복해야 했을만큼 황해도 일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나중에 고려 개국 이후 평양지역을 다소 중시하면서 우대받던 서경 세력들 일부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는 할 수 있다.
[10]
한국어의 계통과 형성에 관한 서술 내용의 통시적 검토 : 중등학교 '국어', '문법' 교과서를 중심으로, 2003. 청람어문교육.
[11]
"중부방언은 기원적으로 고려가 왕도(王都)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형성된 중심으로 하여 중앙어(中央語)에 소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앙어는 조선이 왕도를 개성과 동일한 방언권에 있는 현 서울로 옮김으로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앙어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의 말은 곧 표준어의 중추를 이루므로 중부방언은 말을 바꾸면 표준어의 특징을 다른 방법보다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방언이라 할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12]
'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
Peninsular Japonic'
[13]
황보경, 서울․경기지역 신라 주거지와 건물지 고찰.
[14]
참고로 신라가 일본에 '
인질'을 보냈다는 구절은 일본서기에서 원래 외국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인질을 보냈다고 서술하는 게 일본서기의 일관적인(...) 서술 방식이므로 그러려니 하자. 사신이 일본에 갔던 건 일본서기 기록대로 사실이지만 그게 인질은 아니었다는 건 한국, 중국 사료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일본서기 항목 참조.
[15]
이러한 자료 및 연구의 미비는 국어 연구가 정치권 및 각종 유사과학의 입김을 받기 쉽게 만드는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이다.
[16]
참고로 신라의 서울 '셔라벌(徐羅伐)'이 음운변화를 거쳐 현대어의 '
서울'이 되었다.
[17]
혁거세의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가 원래 그의 이름을 발음대로 음차한 표기이다.
[18]
'荒'은 거칠다는 뜻으로 '거칠부'의 '거칠'에 대응되는 것이다.
[19]
삼국유사 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염촉(厭髑)은 '이차(異次)'나 '이처(伊處)'라 하니 이는 우리말의 다름이다. 번역하면 '염(厭)'이 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쓴 것이니 곧 조사(助辭)이다."
[20]
'염(厭)'은 '싫어하다'라는 뜻의 한자인데 이를 통해 그것에 대응되는 당대 고유어 표현은 ‘이차(異次)’나 ‘이처(伊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어에서 '싫어하다'는 표현은 '잋다'임을 재구해 볼 수 있다. 이는 중세국어에서 '피곤하다'는 뜻인 "잋다"와 일맥상통한다.
[21]
참고로 '서라벌'은 비슷한 음가의 고유어를 한자의 소리를 빌려 표기한 것이기에 실제 발음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으며, 같은 어원으로 추정되는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 따위의 다른 표기들도 기록에서 많이 등장한다.
[22]
로마의 경우가 있듯, 수도명과 국명이 동일한 사례는 꽤 많다. 현대에도
과테말라,
멕시코,
쿠웨이트,
파나마 등 그러한 나라가 꽤 있다.
[23]
'이사금(尼師今)'에서의 '금(今)'은 신라어에서 통치자, 즉
왕을 가리킨 단어로 추측되며, 이는
중세 한국어의 ‘님금(
임금, 主君)’에도 남아있다. 고대 일본어의 'kimi(君)'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도 존재한다. '마립(麻立)'은 그 어원이 확실하지 않다.
[24]
'차차웅'이 실제로 '무당'을 뜻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차차웅'의 동계어로 추정되는 '스승'은 평북 및 함경 방언에서 '무당'을 의미한다.
#
[25]
"큰 마을"을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라"의 경우 일본어 "무라"와의 연관성 또한 제기된다. 한국어 '마을'의 중세 형태인 'ᄆᆞᅀᆞᆶ'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마을'과의 관련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26]
尉의 당시 한자음은 '욷'에 가까웠는데, 이를 감안하면 옷을 뜻하는 중세 한국어 '우틔'와 연관지을 수 있다. 현대 방언에도 '우틔' 또는 '우티'의 형태로 남아있는 단어다.
[27]
남자의 여름 홑바지를 뜻하는
고의의 조상격 단어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가배(珂背)', 조선 초에는 'ᄀᆞ외'였다.
[28]
세(洗)가 선(先)의 오기로 볼 시 현대 국어의 "신"과 발음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29]
다만 백제가 중국과 신라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만큼 중국어와 신라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이 정황상 매우 높기도 하다.
[30]
일본어 음독은 クスニジリ(쿠스니지리).
[31]
일각에서는 신라 장수가 피곤한 나머지 "궂은 일이구나"이라고 말하였고, 신라어를 모르는 왜장이 이를 '구수니자리'로 들은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 그러나 당시에도 '궂은 일'이라는 표현이 쓰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뿐더러,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궂-'의 말음 /ㅈ/이 /ㅅ/으로 바뀌고 '일'의 말음 /ㄹ/이 탈락된 원인을 명확히 규명해낼 수 없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한 주장은 아니다.
[32]
일단 '궂다'는 중세 한국어에서 확인되지만 신라어 등 고대 한국어에서는 기록된 바가 없다.
# 'ㅈ'이 'ㅅ'으로 변형된 것은 백제어 '건길지'가 일본에서 '고니키시'로 음차된 바에서 알 수 있듯 선례가 있긴 하다. 하지만 'ㄹ'의 탈락은 오리무중.
[33]
끝의 -ziri 부분을 현대어에서 의지를 표현하는 -으리로 보아 미래지향적인 다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종결어미 '-리' 앞에 '지'가 붙은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추측에 그칠 뿐이다. 즉, 현재까지 '구수니자리'의 정체에 대한 확실한 가설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4]
예컨대,
아도를 음차할 때 뒤의 '도'는 道(중고한어 재구음 dau)로도 음차되고 度(중고 중국어 재구음 duo)로도 음차되었다.
[35]
권인한(2016)
[36]
위 문장을 해석할 때 많은 논란이 생기곤 하는데, 바로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소통할 수 있었던 대상이 대체 어느 나라냐는 것이다. 일단 본 문서에서는 통역이 필요했던 대상이 중국이었을 거라는 설을 채택하고 있다. 앞에서 고구려를 언급하는 문장과 뒤에서 언어는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한다는 문장은 서로 연결되는 문장이 아니라고 보는 것. 이는 중국어 위키문헌에서 제공하는
원문에 임의로 표시된 중국식 온점(。)과 반점(,)에 입각하여 해석한 것이다. 물론 사서가 편찬되었을 당시에는 문장부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확실한 사항은 아니다.
[37]
을지문덕의 '지'가 존칭 접미사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38]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신라에서 파견된 유학생을 뜻한다.
[39]
이는 한민족은 항상 북방민족과 중국대륙의 지배만 받고 살아온 열등한 민족이라는
식민사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한 백제, 만주계열 북방민족에게 지배자적인 위치로 있었던 고구려가 열등하고 타율적인 한국인의 조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신라 조차도 당나라의 계림도독부를 축출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과 힘을 합쳐 당나라를 타도한 것을 보면 신라 역시 당대 최강국인 당나라와 싸울 정도로 국력이 나름 상당했고 중국에게 맞서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
민달 12년(
583년)조의 기록에서
백제어를 '한어(韓語)'라 칭하고 '카라 사히즈리(カラサヒヅリ)'라는 주석을 달았음이 드러난다.
#
#
[41]
민달 4년(
575년) 4월 6일
백제에 길사역어언(吉士譯語彦; 키시노워사히코)을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역어(譯語)는 통역관을 뜻한다.
#
[42]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
[43]
다음의
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44]
그러나 기존까지는 고구려인을 수묘인으로 사용하다가 고구려인이 피폐해질 것을 염려한
광개토대왕이 한예인을 수묘인으로 삼으라고 유언을 남겼고
장수왕은 한예인만으로 수묘인을 충당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구려, 한, 예인 각각 1/3 비율로 수묘인을 충당한 것(이성시, 박경희 옮김,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17)은 꼭 고구려인과 한예인이 문화적, 언어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건 한예인은 피정복민이고 그들의 문화적, 언어적 성격이 얼마나 이질적이건 간에 고구려의 행정력 내지는 무력이 그들의 이질성을 강제로 고구려 사회에서 존재하게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이질적이건간에 상관없이 그들은 수묘인으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45]
주의할 점은, 백제어 연구가 대단히 미진하기 때문에 전기어휘, 후기어휘 운운할 정도의 연구성과가 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46]
백제어 문서에 의하면, 전기 백제어 건길지에 대비한 표현인데, 정작 건길지(코니키시)는 백제 멸망 후에도 사용된 용례가 있다. 애초에 (전기든 후기든) 백제어 연구 자체가 부족한 실정이라 "분명하다"는 식의 단언을 내리기 어렵다.
[47]
단, 동일 출처인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의 왕칭으로 "니림"(主)을 언급하고 있다.
백제어 문서의 "니리무는 니림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따를 경우, "니림"은 백제어 "니리므"와 별개의 가야어로 볼 수 있고, 삼한/삼국의 언어가 대체로 비슷하다는 가정을 더할 경우, 니리므와 니림은 마한/변한간 방언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님의 어원은 전기 후기 백제어 운운 할 필요 없이 그냥 삼한 땅에서 사용되던 고대 한국어족 공통 어근(지역별 억양/발음차 존재)에서 출발한 것으로 상정될 수 있다.
[48]
삼국사기 문서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당시에도 옛 부터 이어져온 여러 역사서를 인용하여 정리한 역사서이다. 즉, 인용된 역사서는 삼국시대 당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49]
이런 식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옛 역사서 대부분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50]
https://www.yna.co.kr/view/AKR20171011173300005
[51]
고구려어와 일본어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