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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0:47:59

문민통제

문민 통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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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의장대를 사열하는 카르메 차콘 스페인 국방장관[1]
군 문민통제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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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ven when there is a necessity of military power, within the land,...a wise and prudent people will always have a watchful & jealous eye over it.
비록 이 땅에, 군사력이 필요할 때라도,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들은 항상 조심스럽고 질책하는 눈으로 군대를 대할 것이다.
새뮤얼 애덤스, Signer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68년
We don't make policy here, gentlemen. Elected officials, civilians, do that. We are the instruments of that policy.
제군, 우리는 정책을 만들려고 여기 모인게 아니다. 그런 건 선출된 공무원들, 그러니까 민간인들이 하는 거야. 우리는 그 정책의 도구다.
영화 탑건에서 마이크 멧캘프(콜사인 Viper) 탑건 스쿨 지휘관의 훈시 中[2]
문민통제(, Civil control of the military)는 시민, 정치 지도자 혹은 정치 권력이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주의 혹은 독트린을 뜻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 과정에 군인의 개입을 배제하고 민간인( 문민)이 국군의 통수권을 가진다는 원칙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원칙이다. 문민지배, 또는 문민우위(Civilian supremacy over the military)라고도 한다.

2. 설명

문민통제의 원칙 하에서는 국민, 실질적으로는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 통수권을 가진 채 군을 통솔하고, 군은 이에 복종한다. 이를 통해 안보를 다른 곳이 아닌 국가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민통제의 목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가 정착된 대부분의 국가의 군 수뇌부에는 '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이 없다. 현대 군대의 제복군인 최선임자는 합동참모의장과 각 군의 참모총장인데, 이 직책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사령관이 아니라 ' 참모들의 수장'일 뿐이다. 즉, 그저 문민 국가원수에게 군사학적 식견으로 조언하는 위치에 불과하며, 일선의 군 부대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들을 움직일 권한이 없다. 그래서 군대의 요구 정도는 비군인 출신 국방부장관 선에서도 거부하거나 억누를 수 있다.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부장관이 당시 미군 합참의장의 승인까지 통과한 노스우즈 작전을 거부한 것이 그 사례다.

"문민통제를 적용하더라도 민간인 국가원수의 군통수권은 선언적인 것일 뿐이고, 실제 군사행동 실무는 군인들이 맡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각 군이 수립하고 실시하는 세부 전략, 작전, 전술 그리고 이에 따른 군사행동 하나하나까지 민간 국가원수가 지시하는 것인가?" 등의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문민통제 원칙은 명목상의 원칙이 아니라, 군사 행동의 모든 차원에서 실제로 그렇게 적용된다. 다시 말해 일선 군인들이 실행하는 모든 개별적인 작전 전술 행동들은 궁극적으로는 전부 문민 국가원수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기사를 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5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선언한 데 대해 이례적으로 북한 지도부를 겨냥한 한미 연합 탄도 미사일 사격 훈련을 지시하는 등 강도 높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전날(4일) 문 대통령의 지시에 이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의로 한미 미사일 부대는 5일 북한의 ICBM 시험 발사에 대응해 동해안에서 한미 연합 무력시위를 실시했다.
▶ 文대통령, 이례적 미사일 발사로 北에 '레드라인' 경고 (뉴시스 2017년 7월 5일) 링크
문재인 대통령은 가나해역에서 피납된 마린711호 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게 청해부대를 피납 해역으로 급파하여 피납된 우리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1일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밝혔다. 이어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참은 동일 오전 9시 오만 살랄라항 앞바다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문무대왕함을 피납 해역으로 이동하도록 긴급지시했다"며 "문무대왕함은 현재 탄자니아 인근 해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4월 16일경 사고 해역에 도착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 가나해역서 우리 선원 피랍에 문재인 대통령 ‘문무대왕함’ 출동 긴급지시 (쿠키뉴스 2018년 4월 1일) 링크

문민 국가원수(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가 특정한 군사행동을 '명령'하고 그에 따라 군사행동이 실시되는 사례들이다. 위의 사례에서 한미 연합 미사일 발사 훈련은 군에서 사전에 준비한 계획을 대통령이 승인한 것이 아니라, 돌발사태(북한의 도발)에 대응하여 국가원수가 직접 명령한 것이다. 또한 청해부대의 가나 해역 출동도 문민 국가원수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사항이다. 심지어 이때는 사안의 긴급성을 고려하여 국방부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이 곧바로 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3]

정보 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최전선에서 이뤄지는 특정 작전의 진행 자체를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후방에 있는 문민 국가원수가 실시간으로 통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 사살( 넵튠 스피어 작전)이나 알 바그다디 제거 같은 매우 중요한 작전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실시간으로 작전 현장을 지도한다.

"그런데 군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 하는 문민 관료, 문민 국가원수가 군사행동에 대해서 알기는 아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전근대 시절이야 국가원수나 왕이 친정을 나서는 일이 잦았지만, 군사 관료 시스템이 급격하게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에 들어서는 굳이 친정까지 나설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군사조직이나, 군령권, 국방 정책이 행정을 통해 돌아가는데, 그런 행정은 행정부가 하는 수많은 공행정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문민 관료는 이걸 아주 전문적으로 잘 한다.

3. 필요성

전쟁은 또다른 기타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이다.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에서
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
전쟁!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이다.
조르주 클레망소

군대는 상명하복을 기본 원칙으로 깔고 들어가는 조직이자 다른 조직과는 달리 외부와의 교류가 그다지 많지도 않은 닫힌 사회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4] 이런 점 때문에 군대는 자신의 '효율성'과 '보안'을 위해 외부인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내부자는 군법과 계급에 의해 억눌리는 경향이 있어서, 태생적으로 자기 조직에 대한 투명하고 객관적인 인사 처리와 여러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문민통제가 약화되어 자체적으로 군대가 돌아갈 경우 필연적으로 파벌에 따라 정책과 인사가 좌우되고, 자연스레 여러 라인 간의 대립이 심화된다. 그 결과 정치질만 잘할 뿐 군인으로선 부적격한 무능한 장교들이 요직에 앉게 되어 극심한 전투력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결국 군 조직의 사유화가 이뤄져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무력 기반, 실질적 사병 조직이 된다면 그 본연의 목적인 국가안보 기능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또한 마오쩌둥이 "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했듯, 군(軍)은 무력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강력한 권력의 근원이라, 애초부터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변모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런 군은 정부를 실질적으로 능가하는 위상을 갖게 되며, 여차하면 기존 정부를 무력으로 뒤엎고 통치권을 찬탈해 군사독재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한 군부는 한 국가에서 가장 큰 물리력을 보유한 폭력 전문가(Specialists on violence)로 구성된 정치 세력이 되므로, 권력 유지를 위해 어떠한 정치 세력과의 협력과 공조도 필요가 없어진다. 따라서 나라 전체를 병영국가로 만들어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다른 국가의 안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문민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군부는 개인의 인권, 사회의 공동가치,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는 악의 근원으로 전락해, 군인 자신의 패전과 죽음을 넘어 국가나 민족의 멸망까지도 불러올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군의 권력이 비대해 문민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 제2차 세계 대전 일본 제국은 끝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도 문민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호전적인 군부를 통제하지 못해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한편 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군 통수권은 민간 정부가 쥐고 있는 것이 효율적이다. 국가 간 전략적 우위를 잡기 위한 정치·외교적인 능력이나 전쟁을 이끌어 갈 물자 생산과 인력 확충을 위한 내정에는 민간 정부가 더 능숙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론전, 사이버전이 육해공과 더불어 전장의 한 축으로 격상된 오늘날에는 민간 정부의 중요성이 과거보다 더욱 커졌다. 민간 정부가 군이 맡기 힘든 여론전, 외교전에서 효과적으로 싸워야 하고, 여론전을 군사 작전과 적절히 조합하여 군사적 승리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민간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군부와 다른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문민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군사독재 국가는 전쟁수행능력 자체도 무능하고 저질인 경우가 대다수인데, 가장 큰 이유는 군사독재 독재자가 집권했던 방식에 대해서 강박증을 느껴 친위대만 정예 병력으로 굴리고, 행정력이 가장 늦게 닿는 국경에는 미약한 병력을 배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위에서도 말했던 파벌, 부패, 사병화 등까지 겹치면 문민통제가 잘 되는 국가에 비해 작전수행능력이 훨씬 떨어지게 되어 국가안보 기능을 크게 상실하고 만다.

3.1. 역사적 사료

과거 정치인이 군인을 겸하는 사회였던 고대 로마조차도 공화정이 잘 굴러가던 시절에도 엄연히 순수 군인으로서 최고위직은 1개 군단( 레기온)[5]만을 지휘하는 군단장이었고 이를 초과하여 복수의 군단을 지휘통제하는 이른바 ' 장군'이 되려면 민간 관직인 한해 2명씩 선출되는 집정관이나 8명 선출되는 법무관의 직위를 가져야만 했다. 대규모 전쟁으로 사령관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터져도 법무관이나 집정관을 경험한 정치인에게 '전직 집정관/법무관' 지위를 주어 편법적으로 군단 지휘권을 줬을 정도로 군 통제에 엄격했다. 현대로 따지면 '의원장성제'를 도입한 것과 같은 격인데 소위 임관자는 대령까지만 진급하며 준장부터는 국민투표로 선출되는 형식이 이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대한민국도 쿠테타 경험이 있어서 장군, 제독의 인사는 정치권이 직접 관여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설립한 후 본국 이탈리아에서의 유일한 무력집단인 프라이토리아니를 창설했지만, 그 본인도 '통제 받지 않은 군'이 얼마나 위험한지 내전들을 통해 알고 있었던 바, 가급적이면 원로원이 반대하기 어려운 판을 짜놓고, 프라이토리아니는 은근한 위협으로만 써먹었을 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하지 못하게 조정해놓았다. 하지만 후임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프라이토리아니를 통해 정치에 개입하는 선례를 만들어버렸고,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그 자체로 정치 집단이 되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하기 전까지 아주 화려한 황제 교체 신공을 선보인다.

개항 이전의 일본의 경우,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이들도 서서히 문관이 되어갔다. 특히, 평화가 지속되었던 에도 시대에는 성내에서 칼을 함부로 뽑아 휘두르면 가족들까지 연좌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으므로 칼 휘두르는 법도 제대로 모르거나 손잡이만 칼집에 끼워 패용하는 사무라이도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제국주의 시대 문민통제를 받지 않는 군이 폭주하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가 독일 제국이며, 정확하게 그 테크를 밟아나가다가 제대로 멸망한 사례로 일본 제국도 있다. 오늘날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육군대신/해군대신은 현역 장성들만 맡을 수 있다는 제도(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악용해서 민간인 출신 총리들을 맘대로 가지고 놀았고[6] 엄청난 군비 확장과 대외 전쟁을 벌여 수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문민통제가 강력하기에 정보공개 차원에서 국방부 방위성 사이트에 무기 획득 계획 등을 면밀하게 공개하며, 인사 문제도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것은 미군/인사명령이나 방위성/인사발령 항목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며, F-35처럼 대량의 공개된 정보 때문에 도리어 문제가 된 사례까지 존재한다. 영미권 정치학 도서에서는 '군대는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힘인 동시에 여차하면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할 위험성이 있는 잠재적인 사고뭉치'라는 뉘앙스를 전제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국방장관을 여전히 현역 군인이 맡는 나라들이 존재한다. 이 나라들은 대부분 치안이 불안정하거나, 보수적인 나라이거나, 독재국가, 공산권 국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지리아, 도미니카 공화국, 라이베리아,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몽골, 멕시코[7], 미얀마[8], 바레인, 베네수엘라, 베트남, 북한[9],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이란[10], 이집트[11], 인도네시아, 중국[12], 중앙아프리카, 타지키스탄, 태국, 투르크메니스탄, 튀르키예, 캄보디아, 키르기스스탄, 필리핀이 현재 현역 군인이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있다. 한 때 한국도 건군기부터 휴전 이전까지는 현역 군인이 국방장관을 맡았었다. 러시아는 문민이었다가 장성이었다가 왔다갔다 한다.

반대로 국가원수 정부수반이 직접 국방장관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케이스이다. 그레나다(총리), 리비아(총리), 말라위(대통령), 모리셔스(총리), 브루나이(국왕), 세이셸(대통령), 스리랑카(대통령), 알제리(대통령)에서 국가원수 혹은 정부수반이 국방장관까지 겸직하고 있다.

4. 역사

과거에는 황제 귀족 등의 정치인 군인을 겸임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이 시점에서조차도 군인=전사들이 정치인을 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업이 순수하게 유목과 수렵에 달려 있던 지역이었다면 모를까, 농경사회가 되면서 단순히 무력만으론 사회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당대 지도자들은 비록 군인을 겸임했어도 철학적 & 도덕적 & 종교적 권위에 따라서 국가를 운영했고, 단순히 자신들의 변덕스러운 무력에 의지해 권력을 주장하는 자들을 '야만인'라는 식으로 경원시 했다. 결국 고대시기엔 종교지도자나 학자계층을 통 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다가 기술이 발달하고 각 분야가 고도화되면서 직업군인의 분리 필요성이 급증하게 되었다.

영미권에선 민주주의의 원칙하에서 국민의 대표인 정치인이 군부를 통제하는 것을 말하는 의미가 강해지기도 한다. 영국에선 국회와 왕의 싸움, 올리버 크롬웰 독재 등으로 상비군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군사정책이 내각으로 넘어오고 인사권 등은 국왕에게 남았다. 그러나 19세기를 거치면서 군 인사권도 정치인들에 의한 통제로 넘어오게 된다. 미국의 경우엔 국가 창립 시기부터 강력한 상비군을 만들지 않았고 통수권은 민간 정치인에게 위임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때문에 선거에 의해 선출된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지도했으며 장군들은 대통령의 참모였다. 다만 해외에서 전투를 치르는 파병 미군의 경우엔 본국의 통제를 무시한 사례가 꽤 있다. 물론 그러던 이들은 대부분 훅 갔다. 예로는 더글러스 맥아더[13], 가깝게는 스탠리 매크리스털이 있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 환관을 감국으로 사용하여 오늘날의 문민통제와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송나라에서 문관을 군관보다 우위에 놓은 것도 문민통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 시기의 파견의원이나 공산권 국가의 정치장교 역시 극단적인 문민통제의 예로 들 수 있다. 쿠데타를 염려하여 군을 철저하게 제어한 것인데, 이렇게 까지 극단적으로 가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송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경우에도, 과거 고려의 경우 송의 제도를 따라 무신은 정3품 상장군까지만 승진할 수 있도록 하고,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문관인 정2품 평장사를 상원수로 임명하여 총사령관직을 맡겨 무신의 최고위인 상장군이 부원수로서 상원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당장 귀주대첩 강감찬과 여진정벌의 윤관 모두 문관 출신이다. 흔히 무신정변이 그로 인한 무신 홀대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좀 더 복잡한 뒷사정이 있어서 문민통제 기반의 문무 군형이 인종 대부터 이리저리 뒤흔들리면서 혼란이 쌓인 결과에 가까웠다고 한다. 무신이 대놓고 모욕을 당한 건 그 혼란에 당겨진 트리거 같은 사건이었다.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라 4군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역시 문신이었고, 현대의 국방부 장관직에 해당하는 병조판서 역시 문신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무신으로서의 최고위직은 육군의 순변사(정2품)와 수군의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었다. 하지만 고려와 달리 품계 자체는 문/무신이 동일하게 받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만 해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재직시절에 품계는 판서와 동일한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으며, 전사 이후에는 영의정과 동일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추서받았다. 또한 도체찰사, 체찰사라는 관직이 있어 왕의 명을 받아서 할당된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여 다스렸고, 정승, 즉 문신 최고위직이 겸임했다.

현재도 일부 국가는 문민 장성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문민 장성은 군 복무를 한 적이 없는 관료가 장성급 장교로 임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로 대장 등의 최상위 계급으로 임관해서 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국방부장관 같은 직책에 부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경우 세르게이 쇼이구가 문민 장성 출신이며, 국가인민군의 경우도 법적으로 국방장관을 현역 육군 대장(동독군 유일의 대장 보직)이 맡게 되어 있어 초대 국방장관인 빌리 슈토프가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 육군에 징집돼 하사까지밖에 진급하지 못하고 전후 문민 관료로만 근무하다 한번에 육군 대장으로 임관해 재직한 사례가 있다.[14]

5. 각국의 사례

5.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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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미국

미국 건국부터 문민통제를 했고 굉장히 중요시한다. 조지 워싱턴이 자신을 왕으로 앉히겠다는 군인들의 쿠데타 음모 소식을 듣고 '의회와 군대가 대립하는 비극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선 안 된다'라고 한 건 미군 내에서 유명한 일화이다. 전간기에는 문민통제를 제대로 못 했다가 보너스 군대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진압 작전 당시 문민통제를 어기고 강경진압으로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힌 더글러스 맥아더는 국방부와 의회에 깨진 뒤 필리핀으로 쫓겨났고 대공황으로 비틀거리던 후버 정권은 결정타를 맞고 다음 대선에서 루스벨트와 민주당에게 참패를 당하는 등 거대한 정치적 여파도 발생했다. 그 때문에 국방장관에 군인 출신이 앉으려면 전역 후 7년이 지나야(규정 개전 전에는 10년) 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현역 장성 출신 국방장관은 조지 C. 마셜 원수와 제임스 매티스, 로이드 오스틴 대장 밖에 없다. 1947년 이전엔 미국 국방부처럼 통합된 개념이 아니라 육군부, 해군부 등에 육군장관, 해군장관 등이 따로 있었으며 1947년에서야 국방부가 생겼고 국방장관도 생겼다. 과거 미국 법률은 10년간 현역 군인이 아니었던 자만을 국방장관과 3군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하는데[15] 3대 국방장관인 조지 C. 마셜 육군 원수[16] 국무장관을 거쳤던 경험과 당시 국방부가 '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된 해군과 공군의 집안싸움, 소련의 핵개발, 한국 전쟁 발발 등 심하게 몸살을 앓던 시기라서 특례로 인정되었다. 마셜 이후엔 장성 출신이 국방장관이 된 케이스는 제임스 매티스, 로이드 오스틴 대장 외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출신들이 장관에 임명된 경우는 많은데, 이들은 위관에서 영관급 장교 선에서 군생활을 마친 이들이 대부분이며 급기야 척 헤이글의 경우는 육군 사병 출신으로서 국방장관까지 오르는 초유의 기록이 나왔다.

현재까지 미 국방장관의, 최종 신분 기준 인원 수는 다음과 같다.

현역이 아닌 예비군 신분으로 있다가 퇴역하고 국방장관이 되는 것은 가능하다.[17] 오늘날에는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의 인상이 짙은 도널드 럼즈펠드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젊은시절인 1975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역대 최연소 국방장관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한 럼즈펠드는 해군 항공대 예비군 조종장교로서 빠른 진급을 하여 대령까지 올랐는데, 어차피 예비역 자원들은 대다수가 필요시 잠시 소집하고 도로 소집 해제하는 식으로 운용되어 현역보다 군 핵심 요직을 맡지도 못하고 군대 물도 대부분 빠져 있으니 예비군들까지 이걸로 구속시키는 건 맞지 않다. 진급에 제약이 있어 예비역 신분으론 대령까지밖에 올라갈 수 없는데, 미군 규모상 대령이 문민통제를 흔들 정도의 직책을 맡을 가능성은 없다. 또한 육해공 3군장관이 공석이 될 경우 그 직무대행을 3군부 차장이 아닌 각군 참모총장이 맡는 것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가 테일후크 스캔들 당시 해군참모총장 프랭크 켈소 제독으로, 테일후크 스캔들 당시 해군장관이 잇따라 경질되면서 하도 인물이 없다보니 잠깐 동안 해군장관 직무대행을 하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시절 국방장관으로 지명된 로버트 맥나마라 또한 예비역 공군 중령 출신인데 사실상 비전투자원인 분석자원으로 분류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8] 어쨋든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아주 힘든 맥나마라도 국방장관으로 등용이 되었다. 국방장관으로 취임하기 직전의 직업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경영자였다. 그리고 맥나마라 국방장관 시절에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과 같은 매우 굵직한 냉전 전쟁이 치러진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쟁 참전은 막지 못했지만, 맥나마라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몇 안 되는 비둘기파로 케네디를 지원해서 3차 대전 발발 위기를 넘겼고, 그 이전부터 노스우즈 작전으로 대표되는 전쟁광 군부의 광기를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특히 후자는 문민통제가 왜 필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맥나마라는 이후 세계은행의 초대 총재로 간다.

미국의 문민통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군 최선임인 합참의장이나 각 군 최선임인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주방위군총감 등에게 군령권이나 군정권이 없다는 것에 알 수 있다. 한국에선 각 군 참모총장이 갖는 군정권을 문민인 각 군장관이 지니며 합참의장이 지닌 군령권은 문민인 국방장관이 갖고 있다. 통합군사령관이 작전권을 갖고는 있지만 군 전체가 아닌 지역별로 구성된 통합군의 작전권이며 통합군의 특성상 육해공 별로 하위 지휘관을 따로 두게 된다. 통합군사령관은 이를 조율해야 한다. 이런 복잡화된 구조와 문민들이 상위를 차지하는 조직 구성 덕분에 미국은 정치장교 없이도 군을 통제하고 있다. 또한 별을 많이 단 장군들은 미 의회 군사위원회에 뺀질나게 불려가서 검증을 받는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가 무리하게 출석했다가 도중에 실신한 사례가 있었을 정도다.

빡빡하다 싶을 정도로 문민통제가 이뤄지고 군인들의 의견 국회 백악관까지 반영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군인들의 불만이 있기도 하다. 스탠리 매크리스털 ISAF 사령관은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문민 출신 정책입안자를 모욕하는 발언을 해 경질되었다. 오바마 까기 좋아하는 공화당에서도 일절 실드쳐주지 않았고 매크리스털 장군도 본인이 선을 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깨끗하게 물러났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는 선출직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문민통제 조건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가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장교 출신이 아닌 역대 대통령은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이렇게 4명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육군(아이젠하워, 레이건)이나 해군(존 F. 케네디, 지미 카터 등), 혹은 주방위군 공군 장교(조지 워커 부시)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현역 군인으로서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되더라도 임기 시작 전까지는 퇴역을 해야 한다. 역사상 한번 뿐인 사례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종신계급인 육군원수로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8년 임기 동안에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수행했으며, 군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처럼 군에 필요한 정책을 수행하면서도 국방 예산의 필요 없는 증대는 최대한 억제했다. 그리고 퇴임 후에 원수 계급을 회복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중엔 이러한 문민통제가 다소 느슨해졌다. 정치적으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반트럼프적 행보를 보인 반면, 군부는 트럼프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보여왔는데, 이러한 배경이 영향에 미쳤는지 트럼프 정부의 인선에서 대규모의 군부 출신 인사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정작 트럼프 본인은 베트남 전쟁 병역기피자임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점. 특히 2016년 12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2013년에 퇴역하여 퇴역후 만 3년밖에 되지 않은 제임스 매티스 예비역 해병대 대장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했음을 선언하며, 1950년 이래로 67년만에 군부출신 국방장관 임명을 예고했다.[19] 게다가 역시 퇴역 해병대 대장인 존 F. 켈리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퇴역 육군중장인 마이클 플린[20]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을 감안하면 트럼프 정권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후 2018년 12월 대통령과의 관계악화로 인해 제임스 매티스는 사임했다. 민간 출신의 인물인 마크 에스퍼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트럼프의 재선 실패 이후 해임되었다. 조 바이든이 국방장관으로 지명한 로이드 오스틴 역시 당시 퇴역한 지 4년이 조금 지난 상태였고 제임스 매티스 때와 같이 상원의 특별 허가를 받은 후 인준되었다.

5.3. 일본

문민통제를 지키지 못해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지 못했던 국가 중의 하나다. 일본 제국 시절의 일본군 메이지 유신 당시 잘나가던 프로이센 왕국을 본받았는데, 프로이센은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군대는 정치로부터 간섭받지 말아야 한다는 군의 정치불개입 원칙을 고수했으며 군대는 오로지 프로이센 국왕(독일 황제)에만 충성하는 존재였다. 일본군에도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일본군은 천황이 통수하고 천황에 충성하는, 소위 ' 황군'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군 장성들이 현실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고, 반대로 육군성 해군성의 대신(장관)은 현역 육군/해군이어야 했으며 내각은 군 업무 일체에 관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나 독일 제국과는 달리 일본의 천황은 현실 정치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래서 현실에서는 오히려 무력을 쥔 군부가 내각 말을 듣지 않고 내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당시 일본은 국무대신의 일원인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에 오로지 육군/ 해군만이 임명될 수 있으므로, 군부는 내각이 마음에 안 들면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임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내각을 흔들 수 있었다. 오히려 1930년대에는 현직 육군 대장이 육군대신과 내무대신[21], 총리대신까지 싹 쓸어먹는 막장의 최종테크를 탔고 태평양 전쟁 패전 전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육군성, 해군성은 형식적으로라도 총리대신 밑에 있기라도 했지, 해군군령부와 육군참모본부는 아예 천황 산하로 독립되어 있어 내각에서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일본 천황은 보통 그렇게 적극적으로 통치하지도 않았기에 사실상 지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민간인 국무대신들은 아무것도 못한채 육군대신, 해군대신이 이들을 잘 어르고 달래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전후 도조 히데키도 이러한 구조 때문에 설령 처칠, 루즈벨트 같이 강력한 지도자가 일본 제국에 있어서도 군부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할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군대를 신성화하여 군대가 사회 전반을 이끌게 되는 일본식 군부 통치 시스템이 군국주의의 근원 중 하나가 되어 특히 큰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군부 통치는 결과적으로 전체주의가 일본의 무사도( 사무라이)와 결합하여 군국주의로 바뀌는 결과를 만들었다. 1930년대 일본은 철저한 병영 사회였고, 군대는 신성화되었으며 민간이 군대를 따라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흘러갔다. 그 결과는 군대를 신성화하여 군대가 사회 전반을 이끌게 되는 일본식 군부 통치 시스템의 성립이었다. 이리하여 문민 내각이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해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불러왔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의 구 일본군 독일 제국군과 함께 문민통제를 제대로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줬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는 일본의 역대 방위청 장관 및 2007년 방위성 승격 후의 역대 방위대신 11명 중 10명은[22] 모두 민간인 신분인 현직 중의원 국회의원이다. 노다 내각 때 방위대신 모리모토 사토시가 3등공좌(공군 소령) 출신이긴 한데 전역한지 30년이 넘은 후였다. 방위청 장관 때 2등육위(육군 중위) 출신인 나카타니 겐이 방위청 장관을 맡은 적이 있긴 한데 전역 후 10년이 지난 후였다.[23] 일본에선 이 정도로 군대 물 뺀 인물들이 될 때도 문민통제 위반 아니냐며 반발이 일어났다.

내각제 특성상, 다른 정부 부처와 마찬가지로 방위성의 최상부는 의원들이 맡게 된다. 방위대신, 방위부대신, 대신정무관 2인 등 방위성 최상부는 중의원 의원들이 겸직하며 실무를 맡는 사무차관은 방위성 출신 승진자가 맡는데 사무차관이 통합막료장과 동급이다. 즉 제복군인 최선임이 방위성에서 서열상 다섯번째나 여섯번째가 된다.[24] 하지만 2015년 이 원칙도 무효화될 위기에 처했다. 야마구치대의 코케츠 아츠시(纐纈厚) 교수는 <도쿄신문>에 “문민 통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할 무서운 개악”이라며 “역사의 교훈을 모두 부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사 방위성에서 방위대신이 각 막료장들을 지휘할 때 관방장과 국장이 보좌하도록 되어 있어 문관우위였는데 이를 문관과 무관이 대등하도록 바꾸고 특히 부대운용에서 본래 방위성 운용기획국이 맡던 것을 통합막료장이 직접 하도록 바꾼다는 게 골자다.

미국식 문민통제를 따라[25] 유지되던 문민 우위가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 결국 6월 10일,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방위성설치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26] 이후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대신은 극우 헤이트스피치, 자위대의 정치개입 및 파병 자위대의 PKO 일지 은폐 등 문제가 될 만한 발언과 행적을 보여 문민통제 약화의 대표적 실패사례로 꼽히게 되었다.

결국 2017년 8월에 제12대 방위대신이었던 오노데라 이쓰노리로 교체했다.

위와같은 사례에도 불구,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 일본의 문민통제는 비교적 잘 지켜지는 편에 속한다. 몇몇 사례에서 무관의 목소리가 좀 커진 건 사실이나, 현대 일본에서 한 나라를 자위대가 좌지우지하거나 조직 운영에 있어 문관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놀거나 하는 식의 구 일본 군부처럼 구는 것은 정부 구조상 불가능에 가깝다.

5.4. 스페인

스페인군 또한 역사적으로 문민통제가 안되고 쿠데타를 밥먹듯이 해왔던 군대로 악명이 높았다. 카르메 차콘의 국방장관 임명 또한 제2공화국 시절 집권 여당이었으며, 프랑코 시절 대표적인 반정부 야권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노동당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정권 시절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스페인 정부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여당과 필연적으로 사이가 험악할 수 밖에 없었던 군부를 사파테로 정부가 추진했던 동성결혼 합법화, 대마초 비범죄화, ETA와의 평화 협정, 스페인 내전 과거사 정리를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 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 길들이려고 했던 일환이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부터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라 하여 정부에 불만을 가진 군인들이 공개적으로 (...) 우리 쿠데타 한다 발표부터 먼저하고 정부를 뒤엎어버리는 요상한 형태의 쿠데타가 아예 하나의 정치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 프랑코 이전부터 1932년에도 공화국 정부에 대한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그 스페인 제2공화국 자체도 자유주의자, 공화파 군인들의 쿠데타로 성립된 정부고, 그 이전 부르봉 왕정 마지막은 왕실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정치를 하다 실각당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였고, 또 그 이전 스페인 제1공화국도 쿠데타로 시작해 쿠데타로 끝났고, 또 그 이전 1854년 레오폴도 오도넬과 발도메로 에스파르테로의 쿠데타에 끝이 없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터진 쿠데타는 1981년의 23-F 사건으로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 불만을 가진 군부 강경파들이 국회를 점거했으나 실패한 이후 아직까지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재발한 적은 없다.[27] 그러나 2017년을 뜨겁게 달군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대해서 예전부터 공공연하게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협박성 발언을 쏟아 내는 등 아직까지도 유럽연합 국가 치고 프랑코 시절의 정치성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고 있다.

5.5. 중남미

스페인 군부의 엘리트주의적, 권위주의적 정치성은 또 라틴아메리카의 군인들이 아주 잘 물려받아 중남미 또한 문민통제란 개념이 죽으러 가는 곳으로 악명 높다. 중남미권은 당장 독립 투쟁을 주도한 세력들이 시몬 볼리바르 호세 데 산 마르틴 같은 지도자들이 죄다 군인 출신이라 처음부터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호르헤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의 군부 독재자들에게 지긋지긋하게 시달린 아르헨티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같은 군부 독재자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바 있는 칠레 등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꺼리는 편이다.

쿠바의 경우에는 애매하다. 쿠바 역시 명색이 공산주의 국가여서 정치장교 제도를 통해 군부를 통제했지만, 동시에 다른 중남미권 국가처럼 피델/라울 카스트로 형제 본인들이 게릴라 군인 출신이어서 군부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통일연구원의 쿠바 정치 제도에 대한 분석 중 일부.

남미는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정치적 위기가 군부의 정치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지내고 있다. #

5.6. 중화민국/ 대만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나라의 근본 자체가 군인의 집권에서 시작되었다보니 군대의 권위가 굉장히 강한 체제였다.

일단 대만 정착 이후에는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문민통제가 강해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군인 출신 정치인인 장제스가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군부를 완벽히 장악했기에 쿠데타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장제스의 권력이 아들 장징궈에게 세습이 되었을때도 군부에 대한 장악력은 매우 확고하였다. 그리고 당시 군부는 총통 말만 잘 들었을 뿐 민간 정치인의 말은 잘 듣지 않아서[28] 문민통제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역설적으로 장징궈가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한 탓에 그가 점진적 민주화를 시작할 때 별 잡음 없이 흘러가는데 기여하기는 했다.

리덩후이 총통 재임 기간 중에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각종 군대 관련 법률이 수정되어 군의 정치 중립이 확고해지고 문민통제 원칙도 확고하게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화가 이뤄진 대만에서는 현직 중장이 국방차관을 맡는 일이 종종 있고 대장 출신이 전역하고 바로 국방장관이 되는 일이 빈번하다. 2013년 8월 8일~2015년 1월 30일 대만 제30대 국방부장을 역임한 옌밍(嚴明)은 취임 하루 전까지 제22대 대만 참모총장( 합참의장)이었고(2013년 1월 16일~2013년 8월 7일) 그전엔 대만 제 4대 공군 사령관이었다(2010년 1월~2013년 1월 15일). 거기다 옌밍이 국방부장으로 취임한 이후 참모총장으로 지명된 가오광치(高廣圻)는 아예 옌밍 퇴임 이후 국방부장으로 취임했다. 다만 차이잉원 취임 이후 새로 임명된 펑스콴은 2006년에 제대 후 10년 후인 2016년에 국방장관이 된 사례라 조금 다르다.

5.7. 싱가포르

싱가포르군의 경우에는 문민통제가 굉장히 잘 되는 편이다. 싱가포르 초대 국방장관인 고켕쉬(Goh Keng Swee, 吳慶瑞)는 싱가포르 의용군 부사관 출신이나 일제가 싱가포르를 침략하던 시절에 잠시 복무한 것이며 1943년 전역한 뒤 1965년에 국방장관이 됐으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국방장관을 지낸 티오치히안(Teo Chee Hean, 張志賢)은 싱가포르 해군 제독으로 소장 출신이긴 하나 1992년에 전역한 뒤 정치인 생활을 거치고 11년이나 민간인 생활을 한 뒤에 취임했다. 그 외의 국방장관은 정치인 출신이다.

5.8.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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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Wiederbewaffnung steht für einen komplizierten Weg in der Geschichte der Bundesrepublik, schließlich ging es darum, an die Vergangenheit von vor 1945 anzuknüpfen und zugleich eine neue Richtung hin zu demokratisch-freiheitlichen Werten einzuschlagen. Die Aufstellung von Streitkräften war in dieser Form nicht ohne Risiken, da man 1955 oder 1960 nicht voraussehen konnte, dass eine dezidierte Reformpolitik nach 1969 tatsächlich eingeleitet werden würde. Ohne diese Reformen ist das Profil der Bundeswehr und der Bundesrepublik heute nicht zu denken.

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에서 재무장은 복잡한 길이다. 이는 결국 1945년 이전의 과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가치로의 새로운 지향점을 설정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방식으로의 건군은 위험이 없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955년이나 1960년 당시에는 1969년 이후의 철저한 개혁 정책이 실제로 단행될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이 없었다면 연방군과 독일연방공화국의 성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독일 정치학자 데틀레프 발트(Detlef Bald). #
1. 자유로운 인격체(Freier Mensch)
2. 투입 준비된 군인(Vollwertiger Soldat)
3. 책임감 있는 시민(Guter Staatsbürger)

독일군 미군 대한민국 국군의 절충형이다. 각 군은 참모총장이 지휘하고 그 위로 합참의장이 있다. 이런 점은 대한민국 국군과 비슷하다. 다만 이들은 각 군 참모총장의 계급 중장이며 대장은 합참의장 혼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방장관민간인으로만 임명하며 군복무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임명된다. 이런 점은 미군과 비슷하다. 그리고 군 통수권은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국방장관에게 있다. 전시가 되어야 군통수권이 총리에게 이양된다. 최근 국방장관으로 부임해 있는 크리스티네 람브레히트는 군 복무를 1초도 한 적이 없으며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이 되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문민통제와 경험을 중요시해서 국방장관을 타부서의 장관을 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 임명한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국방장관에 으로 재임했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맨 처음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을 역임한 뒤 그 다음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고, 그 두 번의 장관 경력을 바탕으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사실상 방치에 가까운 독일 연방군의 상태와 독일 국방부의 여러 트롤링이 드러나면서, 문민통제가 중요한 건 맞다지만, 군대의 조직 운용에 대한 이해도가 아예 없는 사람들을 국방장관에 앉히는 게 맞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29]

하지만 2차대전까지의 독일은 일본군처럼 군국주의가 만연했던 나라였으며, 특히 1차대전 때는 문민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패망까지 이어진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군대에게 신성성을 부여하고 사회 전반을 이끌게 하는 특유의 군부 통치 시스템이 군국주의의 근원 중 하나가 되어 문제를 일으켰다면,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정치와 군대의 분리 및 상호 불가침을 추구해 온 국가적 전통의 영향이 컸다. 물론 이는 군이 최고 통수권자(황제, 대통령)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반대로 군부가 민간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기에 현대 민주국가의 문민통제와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이런 시스템은 결국 군부가 민간 정치인의 외교적 노력을 무시하게 만들어 제1차 세계 대전 확전의 계기가 되었고, 1차대전 도중에는 제국군의 참모총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실권을 쥐고 빌헬름 2세까지 뒷방 늙은이로 밀어버리고는 군사독재를 행했다.

패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군의 독자성'은 유지되었다. 대놓고 공화국을 부정하는 군인들도 많았고, 공화국의 민간 정치인들은 군을 통솔할 수 없었다. 공화국을 위협하는 극좌와 극우의 봉기가 잇따를 때 공화국의 정치인들은 군에 진압을 명령하는 게 아니라 진압을 부탁해야 했다. 힌덴부르크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되면서 군부가 공화국에 대드는 사태는 잦아들었지만, 대공황이 찾아오자 힌덴부르크와 함께 공화국을 대놓고 부정하는 히틀러와 나치당을 지원하여 집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나치 독일이 군사독재 국가였다거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문민통제를 받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히틀러는 1차 대전 당시에는 상병, 독일 제국 붕괴 이후에는 하사로 복무하다 전역한 일개 사병 출신의 선출직 문관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모든 작전을 나치당을 통해 총괄했고, 독일 국방군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거기에 히틀러는 독일 육군의 배신을 두려워해 친위대를 만들고, 총통 본인이 문관 신분으로 육군총사령관을 겸직케 했다. 즉 독일 국방군은 철저히 문민통제를 받았으며 2차 대전기를 포함해 단 한 번도 국정을 주도하거나 그 핵심이 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방군 무오설 같은 말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5.9. 이집트

파키스탄군, 미얀마군과 마찬가지로 군부가 비대해지면서 문민통제가 유명무실해진 나라이다. 그중에서도 미얀마군과 함께 군부가 비대해진 최악의 경우로 꼽힌다.

이집트군 인사를 자체적으로 하는 것은 물론 예산마저도 비공개로 운영하여 거의 완전히 민간 정부에서 독립되어 있다. 군 장성들은 군 유지 자금 확보를 명분으로 각종 사업 시설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그 내역이 비공개이다. 군의 지배 하에 있는 경제가 이집트 경제의 약 40%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무슨 맘루크 또한 이 구조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아주 편한 구조이다.[30] 이집트군 1952년 7월 23일 가말 압델 나세르 안와르 사다트등을 위시한 젊은 장교들의 군부 내 사조직인 자유장교단이 무함마드 나기브와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실권을 잡고, 1953년 6월 18일 이집트 왕국을 철폐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1956년 6월 23일 가말 압델 나세르 무함마드 나기브를 대통령직에서 쫒아내고 대통령직에 오른 다음 2011년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가말 압델 나세르, 안와르 사다트는 죽을때까지 형식적인 직선투표로 종신집권을 했고 호스니 무바라크역시 권력을 승계받아서 3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하면서 이집트군은 사실상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 장기집권하던 호스니 무바라크 민주화 시위로 물러났지만 이집트 국민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닌 이슬람 원리주의자였던 무함마드 무르시를 선택했고 그의 샤리아 폭정을 보다못한 군부가 고작 2년 만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다시 군부독재가 들어섰다.

5.10. 인도

인도군도 예상 외로 문민통제가 잘 되는 편이다. 다른 많은 수의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인도는 독립 후에 군사 쿠데타를 겪지 않았다.[31] 이는 영국정부의 노력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설립이후에 군통수권을 인도정부에게 이양한것도 그렇고 이양 할 당시에 인도 식민지군의 규모를 축소시켜 놓고 이양했다. 즉 영국 입장에선 단물 빼먹고 나갈 심산으로 그런 거였지만 이게 오히려 인도군 자체의 예산이나 전력을 약화시켜놓았을 뿐더러 정부수립 이후 군이 창설된지라 권력구조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끔 바뀐 탓에 쿠데타를 일으키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렸다.

인도의 독립은 알제리 대한민국처럼 식민지 체제에서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영국 식민당국과의 협의와 제도적인 규범 내에서 독립을 맞이해서 제도적인 단절을 겪지 않았다. 물론 인도인들의 독립 투쟁은 격렬했지만, 독립 이전부터 인도 제국의 인도인 정치엘리트들은 선거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제한적으로나마 참여하면서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의 정치엘리트들은 독립 이후의 국가를 구성하고 국가발전의 지향점과 전략을 설정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7년 8월 15일에 독립을 하고 인도국민회의 자와할랄 네루가 주도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간 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군부에 의해 정치체제가 위협받는 상황을 막아내는 것을 주요한 국정 과제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인도국민회의정부는 인도 제국군 시절부터 이어지던 직업적 전문인으로서의 군인들로 조직된 모병제 군대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무력을 동원한 반란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군인들이 문화적·언어적·종교적·지역적 동질성을 가진 집단으로 묶이지 않도록 해 내는 것과, 군의 정치개입과 사회적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하게 하는 것, 장교들의 처우를 상류층보다는 중산층 집단에 가깝도록 강등시키는 것 등등이었다. 독립 이후 인도에서는 군 고위 장교의 공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이 금기시되었고, 군총사령관직이 철폐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다양한 특수부대와 준군사조직이 군이나 국방부 소속이 아닌 조직으로 신설되고 유지되었으며, 수도방위를 맡는 별도의 군사조직이 구성되어 수도 주변에 배치되었다.

또한 같은 인도 제국의 구성원이었던 미얀마와[32] 비교해 보면 정부수립 및 군 창설을 주도하던 아웅산이 미얀마 독립 이전에 암살당하는 바람에 혼란한 정국 속에 군이 폭주하면서 개막장이 되었지만 인도는 자와할랄 네루라는 군, 경, 민간을 아울러 인도인들 정서에 맞는 구심점이 살아있는 덕도 있었다.[33] 이웃한 파키스탄이 무하지르와 군대의 담합으로 총리를 결정하면서 제 임기를 다 채운 총리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문민통제는 인도 정국을 크게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인도 방산업계와 유착한 정계 때문에 무기도입이 지지부진해서 군부가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5.11. 이스라엘

이스라엘 건국이래로 군부의 힘이 매우 강력해 질 수 밖에 없을 만큼 호전적인 안보 환경을 겪었음에도 건국이래 단 한 번의 쿠데타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문민통제가 인근 중동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잘 지켜지는 편이다. 다만 이츠하크 라빈, 아리엘 샤론, 모세 다얀과 같이 이스라엘군 장성출신들이 전역하자마자 바로 정계에 입문하여 장관등 고위직으로 정계에 몸을 담는 경우는 당히 많다. 2006년 5월 4일에 내각 개편과 함께 오랜만에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이 나왔다. 예전에는 과학기술과 국민경제에 모두 정통한 군수공업 전문가로서 잔뼈가 굵은 건국영웅 출신 민간인 국회의원들( 다비드 벤구리온, 핀하스 라본, 레비 에쉬콜, 메나헴 베긴, 시몬 페레스, 모셰 아렌스)들이 건국영웅 출신 퇴역 군장성들( 모셰 다얀, 아리엘 샤론, 이츠하크 라빈)과 함께 국방장관 겸 부총리로서 맹활약했지만, 反이스라엘 세력들을 토벌하는 제한전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화급한 작전의 지휘를 위해서 부득이하게 군장성들을 퇴역과 동시에 국방장관으로 승진시켰는데, 에후드 올메르트 국무총리가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밀어붙여 노동운동가 출신의 군수공업 전문가로서 아미르 페레츠( 이스라엘 노동당의 당수)를 기용했다. 페레츠는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직무에 서툴렀기 때문에 에후드 바라크(퇴역 군장성 출신 국무총리)로 교체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모셰 아얄론(퇴역 군장성 출신 국회의원)의 퇴임과 함께 군수공업 전문가로서 경험이 있는 민간인 국회의원들( 베냐민 네타냐후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나프탈리 베네트)로 민간인 국방장관 체제가 계속되었다.

5.12. 튀르키예

튀르키예는 국부인 케말 파샤부터가 오스만 제국 최고 장성들 중의 하나이면서 사실상 튀르키예 독립군의 실세였고, 오스만 황실을 몰아내고 외세에 맞서기 위해 군에 힘을 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이후에도 강력한 권력을 쥐고 숱하게 세속주의 회복을 명분으로 민간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행한 뒤 군부에 친화적인 민간 정치인들로 정부를 꾸리고 복귀하는 행태를 반복했는데, 1960년 5월 27일의 쿠데타 1980년 9월 12일의 쿠데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사실상 튀르키예가 군부 독재 국가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2000년대 이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국민의 지지를 업은 뒤, 사실여부를 가리지 않고 군부인사를 체포, 투옥하기 시작했으며, 2016년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한 것을 계기로 군부를 완전히 숙청하고 문민통제를 완성했지만 이 과정에서 튀르키예의 세속주의 및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5.13. 태국

태국군은 아예 이 방면의 레전드. 태국 국민들은 아예 반쯤 해탈한 심정으로 쿠데타는 태국의 전통이라고(...) 자조할 정도다. 다만 군부도 국왕 앞에서는 힘을 못 쓰기에, 쿠데타는 국왕의 승인 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국왕이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어야한다. 실제로 국왕의 제지에 의해 쿠데타가 좌절된 적이 몇 번 있으며, 쿠데타의 목표도 국왕이나 왕조 교체가 아닌 국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무능한 현 총리대신과 내각의 퇴출을 명분으로 세워 진행한다. 그리고 국왕은 아예 쿠데타의 대상 외인데, 태국에서는 국왕의 위상이 대단하기에 왕조교체, 역성혁명 등 왕궁에서 총질이라도 했다간 즉시 국민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국민들은 군부는 욕하면서도 왕은 정말이지 맹목적으로 따르는 수준이라,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 북한 김일성 우상화와 비교했을 정도다. 이쯤 되면 사실상 전제통제라고 봐야다.

그러나 정치력이 대왕급인 라마 9세가 승하하고, 와치랄롱꼰이 왕위에 오르자 우려했던 대로 개인 처신을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34]

그나마 세타 타위신 내각 하에서 첫 민간출신 국방장관이 나왔다.

5.14. 미얀마

문민통제 없는 민주주의의 위태로움을 극명히 보여 주는 사례로, 군 통수권자가 대통령이나 총리도 아닌 제복군인 최선임자인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인[35]데다가[36], 현역 대장이 국방장관을 맡는다. 현재 기준으로는 옆 나라 태국이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폭주하고 있으며, 2016년 정권교체로 54년만에 민주화에 성공했음에도 수십 년간 이어진 군부독재의 영향으로 정계 전반에 군부의 영향력이 강했고, 심지어 쿠데타가 헌법에 군부의 권리로 못박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군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군부독재 국가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었다.[37]

2021년 미얀마 쿠데타도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용납되지 못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보유한 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이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및 경제 발전이 저해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서는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반군을 막기 위해 대량의 징병이 필요한데, 애초에 군을 특권계급처럼 운영한 결과, 징병할 만한 자원이 없어지고[38], 일반 시민들을 징집하자니 총을 든 시민들이 오히려 총부리를 겨눌까봐 징집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반군들에게 역공당해 여러 영토를 상실하며 그와중에 시민들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등 추태만 보이고 있다.

5.15. 남베트남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군대인 베트남 공화국군은 문민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응오딘지엠 대통령 국방장관을 겸임하면서 군부에 대해서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정부의 실정과 베트남 공화국내부의 혼란등이 이어지면서 겨우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으며, 1960년 11월 10일 1962년 2월 27일에는 응오딘지엠을 실각시키기 위한 쿠데타시도가 있었다. 결국 1963년 11월 2일 즈엉반민의 주도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뉴와 살해당하면서 폭발하고 만다. 이후 베트남 공화국은 연이은 1966년 6월까지 5번 더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군사정권이 자주 교체되었으며 이러한 기조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장성 출신이자 당시 군사정권수장이었던 응우옌반티에우 1967년 9월 3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1967년 10월 31일에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일단락 되었으나, 여전히 사회적인 혼란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베트남 공화국 1975년 4월 30일에 패망한다.

5.16. 파키스탄

이집트, 미얀마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나라이다. 특정 민족이 군부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고 장교들의 사회적 지위를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을 억제하면서 문민통제를 완벽히 확립한 인도군과 다르게, 파키스탄 이슬람 이념에 의해서 급조된 국가로서 현대적인 국가를 갖추어 나갈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인도와 다르게 의원내각제의 문민정부가 다민족국가로서의 혼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리고 건국 이후로 잔존하고 청산되어 본 적이 없는 봉건적 기득권세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기존의 지주이자 봉건 영주들이 현대의 자본가이자 장교로 세력을 유지해 오면서 다양한 형태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가 군부의 사회적 위치가 공고해지는 하나의 원인이다.

이러한 혼란과 사회적인 권력의 공백으로 결국 1958년 10월 27일에 육군 총사령관 아유브 칸의 주도로 쿠데타가 일어나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아유브 칸 야히아 칸의 치세를 지나서 1971년 12월 20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패전의 여파로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주도하여 1973년 8월 14일 헌법을 제정하여 의원내각제국가로서 최고위 장성의 인사권 통제, 3군 참모총장의 직위 강등, 강력한 여타 준군사조직 구성을 통한 군부 견제, 다양한 종족집단 출신들의 균형 있는 모병등으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으나, 독단적인 정권 운영에 대한 지지율의 하락으로 1977년 7월 5일 육군참모총장 무함마드 지아울하크의 주도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 1979년 4월 4일에 군사정권에 의해서 처형당한다. 이후 정권을 잡은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1978년 9월 16일부터 육군참모총장 대통령직, 계엄사령관직을 겸임하면서 파키스탄 이슬람 근본주의의 수렁으로 몰고갔으나, 비행기 사고 무함마드 지아울하크가 사망한 뒤, 1988년의 총선을 통해서 문민정부의 의원내각제가 들어섰으나, 군부는 정치권의 분열과 이슬람 근본주의이념, 인도와의 카슈미르분상황을 활용하여 문민정부와 대등한 위치에서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후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나와즈 샤리프총리가 2/3 과반의석을 가진 정권을 구성하면서 파루크 레가리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파키스탄 육군 육군참모총장 제항기르 카라마트을 해임하는 등 군부의 인사에 개입하면서 문민통제를 확립하려 했으나, 1999년 10월 12일 육군참모총장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주도하는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이후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국내외 군정 해제 요구로 2008년 8월 16일에 실각하고 다시 의원내각제의 문민정부체제로 돌아온다.

그러나 파키스탄 사회에서 군부의 사회적인 위치는 매우 공고하다. 복지재단을 통한 경영권 장악 하에 농장과 학교나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은행과 보험사 방송국까지 아우르는 경제활동을 군부가 수행하고 있고 사용료 징수사업이나 쇼핑센터나 주유소 운영 등은 군부가 직접 통제하고 있는 구조인데, 이는 퇴역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경제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상황은 군부가 정책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동기를 강화시키고 있다. 또한 군부가 이러한 기득권의 일부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보통 사람이 군 장교가 되어 기득권층에 진입하는 일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특정한 집단과 족벌의 관계 안에서 군의 모병과 승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국가 엘리트 집단이 군부와 공생관계를 구축하게 되면서 군부에 도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세력이 형성되기 어렵게 되었으며, 여전히 파키스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은 정부수반인 파키스탄 총리가 아니라 파키스탄 육군 육군참모총장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6. 공산권 국가와 문민통제

일단 공산권 국가는 행정조직, 군부 위에 공산당이라는 절대 권력이 있어 군대가 당군의 형태로 당에 완전히 복속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 당수가 군 통수권을 쥐고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 이 당수는 명목상 민간인이니 문민통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민주 국가의 문민통제와는 다른 맥락에서 논해야 할 것이다.

한편 공산권 국가는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내무부 같은 행정 조직들로 부대들을 이관시켜 정규군 외에도 다양한 준군사조직을 만드는데, 이들은 형식적으로 민간 조직이지만 사실상 군대나 마찬가지고 정규군과 동일한 계급 체계까지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유럽에서는 동구권의 준군사 조직을 군부의 일부로 본다. 물론 정규군과 다른 별개의 지휘권을 가진 조직이지만 군사조직의 일부로서 분류되며 각국의 군대 문서에도 정규군과 준군사조직의 군대를 함께 서술해 놓고 있다.

한때 공산 국가였던 러시아도 그 영향인지 정규군보다 준군사조직에 더 많은 고위 장성들이 있으며 대통령인 푸틴도 KGB 중령 출신으로 한국 기준으로 엄연한 문민이다. 이처럼 공산권의 상황을 민주 국가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보기는 쉽지 않다.

6.1. 냉전기

소련을 비롯한 냉전기 기준 제2세계의 안정된 공산주의 국가들은 군부의 세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지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 8월 쿠데타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사건이므로 제외.) 물론 소말리아 시아드 바레 에티오피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처럼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를 채택한 후진국들은 자본주의를 채택한 다른 후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쿠데타가 빈발했지만, 이건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좌익성향이라서 이후 공산주의를 표방한 경우라서 상황이 달랐다.

동독의 경우 독일 재통일이라는 격변 와중에도 동독 군부는 지나쳐 보일 만큼 안정적이었는데, 오히려 사건 초기 격심해지던 동독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에 동독 정부가 군 투입을 고려했다가 "인민군이 어떻게 인민을 공격하나"는 동독군 장병들의 반발에 군 투입을 포기했을 정도. [39]

동독 군부는 동독 시민들의 통일 시위와 민간 정부의 통일 절차 진행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동독군이 공식 해체되는 그날까지도 반발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근무했다. 동독 외에도 동유럽 혁명 당시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각 국가의 정규군 역시 시민들의 혁명에 관여하지 않았고 혁명 이후 순순히 민주 정부의 통제를 받아들였다. 예외라면 국가 자체가 공중분해가 되어버린 유고슬라비아와, 차별을 참지 못하고 정규군이 아예 시민들의 편이 되어버린 루마니아 정도다. 또한 민간인이라고 볼 수 있는 정치위원( 정치장교)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순수 직업 군인이 국가원수 직에 오른 사례도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미국은 문민통제가 확고하다고 볼 수 있지만 출신 성분으로 따지자면 트루먼부터 지미 카터까지 무려 7명 연속으로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을 배출했던 반면, 역대 소련 서기장( 최고지도자)은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까지 전원이 쌩 민간인 내지는 이 정치위원 출신이다.[40] 2차 대전 직후 대원수 직함을 얻은 스탈린도 군인이 통치자가 된 게 아니고 통치자가 군 계급을 받은 거라 결국은 민간인이다. 이러한 공산주의 특유의 문민통제는 역시 정치장교 제도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소련뿐 아니라 정치장교 제도가 존재하는 체제가 안정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모두 나타나는 특성이다.[41]

6.2. 중국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은 현직 인민해방군 상장 국방장관을 맡는다... 그치만 당이 군을 확실하게 집어잡는다는 점에서 문민통제가 이뤄진다고 말하려면 할 수 있긴 하다.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을 확실히 통제한다. 정치장교의 파워 덕분.

6.3. 북한

북한군 보위부, 군, 정치장교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국가원수까지 모두가 제복군인이다. 선군정치 따위를 내세운 이상 문민통제와는 극과 극으로 멀어진 것 같지만, 여느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자신들의 정권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시민들에 의한 정권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따라 철저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아직 한 번도 군사쿠데타를 겪은 적이 없으며[42],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도 정황상 쿠데타가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럼 선군정치는 뭐냐고 물을 수가 있겠으나, 일단 선군정치를 내세운 김정일 자체가 군대도 안 간 생판 민간인이라 군부에서 인기가 없었고[43], 선군정치는 문민 독재자인 김정일이 독단적으로 병영국가로 만들어버린 매우 특이한 경우이며, 선군정치 기간에도 조선인민군은 군 인사권과 검열권을 쥐고있는 총정치국 아래에서 찍소리도 못 냈는데, 그 총정치국도 조선로동당의 일개 부서였을 뿐이다. 즉, 수령독재의 방법으로 군정을 쓴 것일 뿐이지 수령독재가 군정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선군정치도 엄밀히 보면 심하게 변형된 문민통제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를 폐지하며 선군정치를 버리고 선당정치를 주장하자 군부도 아무 군말 없이 이행하는 것을 볼 때, 문민통제가 생각보다 훨씬 잘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선군정치를 거치며 군조직의 영향력이 매우 커져버린 탓에 병영국가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군조직의 힘이 매우 세고, 보유한 인력과 자본도 많다 보니, 국가 주요사업에 군조직이 동원되지 않는 경우가 더 드물다. 특히 토목건축이나 광업 분야에서 청년돌격대가 동원되며, 남한으로 치자면 사실상 한국토지주택공사, 국가철도공단, 한국도로공사, 한국전력공사, 한국수자원공사 같은 공기업은 물론 민간 기업의 역할까지도 군이 하고 있는 지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 스페인 최초 여성 국방장관으로 바르셀로나 대학교, 킹스턴 대학교, 라발 대학교에서 공부한 법학박사 출신으로 이전에는 주택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국방장관을 맡았다. 국방장관이라는 중책을 수행하면서 임신한 상태로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 파병한 스페인군을 방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무사히 출산도 하였다. 2017년 4월 9일, 지병이었던 심장 질환으로 향년 46세에 사망하였다. [2] 여기에서 policy는 맥락상 정책이라기보다는 행정상의 기준/원칙을 뜻한다. 에이스 양성이 목표인 훈련기관이니만큼 시시콜콜 기준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전적 훈련으로 우열을 가르겠다는 것. 그러나 policy를 정치학/ 행정학에서 논하는 정책으로 해석하면, "군인은 시민으로부터 선출되는 문민관료의 도구"라는 문민통제의 핵심과 그 의미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마지막 문장은 명백히 문민통제를 의미하므로 전반적으로는 둘 모두를 뜻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사실 엄밀히 말하면 국방부 역시 라인(Line)이 아니라 스태프(Staff)이다. [4] 그냥 "애당초 문민통제가 필요 없는 '민주적이며 열린' 군 조직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라는 반문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외부요인에 의해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번번이 혼란에 빠지며, 훈련과 명령에 대한 책임소재조차 불분명하고, 누구든 군사기밀 유출을 일으킬 수 있는 무력한 반푼이 무력집단 = 속칭 오합지졸이 되어버린다. 군 내부 감찰단 등을 통해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개선할 수 있어도 제대로 된 군사조직에선 상명하복과 폐쇄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순 없는 셈. [5] 약 5000~6000명 [6] 2차 대전 이전의 일본 총리가 다른 대신( 장관)들과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가 내각을 구성해 천황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한 부서의 대신(= 장관)이 사퇴하게 되고, 이 빈자리를 메울 수 없으면 그 총리의 내각은 총사퇴해야한다. 헌데 육군성/ 해군성(= 국방부)의 장관이 총리의 뜻에 반하는 의미에서 사퇴했는데, 에 따라 육해군대신은 현역 군인만 맡을 수 있다면 군이 한통속으로 짜고 아무도 대신직을 맡지 않아 총리와 내각을 뒤집어 엎을 수 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육해군대신은 물론 총리까지 군 출신 인사가 채우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일본은 군국주의의 파멸가도를 달렸다. [7] 육군과 공군을 통솔하는 국방장관과 해군만 통솔하는 해군장관이 따로 있다. [8] 여기는 애초에 통수권자부터가 국가원수도, 정부수반도 아닌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이다. 즉, 문민통제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 [9] 중국처럼 중앙군사위원회를 두고 있고 위원장도 최고지도자이지만 그 최고지도자가 대원수라는 군사 계급을 지니고 있기에 문민통제라 보기 어렵다. [10] 이 동네도 미얀마군 마냥 국방장관 총참모장보다 계급이 낮다. 통수권자는 이란의 국가원수인 라흐바르이기 하지만 문민통제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보긴 힘들다. [11] 무바라크 대통령 사임 이후로 국가비상사태 시에만 결성되는 이집트군 최고평의회가 군 권력을 이양받았다. 현직 대통령부터가 5성 장군 출신이라 체감이 안 되겠지만 이집트 경제에 40%나 되는 분량을 차지하는 독립체제나 다름없는 조직이다. [12] 국방장관이 현역 군인이긴 하지만 이 국방장관이 예하로 들어가 있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이 중국 국가주석이다. 공산국가에서는 당군 체제가 곧 문민통제이기 때문에 중국이 문민통제가 안 되는 국가라고 단언할 수 없다. [13] 맥아더가 몰락한 이유로 중공군의 참전을 무시하는 등의 심각한 군사적 실책을 꼽기 쉬운데, 실제로는 유엔군 사령관이라는 군인으로서 민간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문민통제에 위협을 가한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오죽하면 맥아더 때문에 당시 미국의 군부와 민간 정부의 관계는 역사상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이다. [14] 이후 2~3대 국방장관은 육군 상장들을 진급시켜 임명, 마지막 4대 장관인 테오도어 호프만 제독의 경우 육군으로의 전군을 하느니 장관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해 서기장 에곤 크렌츠가 진급하지 않고 해군 상장 계급으로 장관직에 재직 가능토록 특례를 인정해 주어 임명했다. [15] 면제 조항은 적용받기 위해서는 상·하원의 면제 동의와 별도의 상원 인준 절차를 밟아야 한다. [16] 5성 장군이다. 전시에만 생기는 계급이며 보직 없이 은퇴하더라도 전역 혹은 퇴역하는 것이 아닌 종신 계급이다. [17] 미국의 예비역은 퇴역한 민간인과는 다른, 한국으로 치면 상근예비역 성격도 있는 신분이다. [18] 맥나마라는 2차대전 때문에 군인이 되었고, 보급과 병참 관리에서 활약해서 훈장까지 받는다. [19]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제임스 매티스 자신의 국방, 안보에 대한 견해는 트럼프나 트럼프 행정부 주류보다 더 온건한 편이다. [20] 미국 공화당 성향의 사람 같지만 정작 소속 정당 미국 민주당이다. [21] 전쟁 이전 내무성은 휘하에 경찰을 두고 있고 내무대신의 내각 서열도 높기 때문에 군을 제외한 민간 중앙성청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이었다. 이 내무대신을 육군 장성이 가져간다는 건 권력 장악의 수준을 넘어 독재나 다름없는 짓이다. [22] 2007년에 방위청 장관(청장)에서 대신( 장관)급으로 승격. 단 방위청 시절에도 방위청 장관은 다른 부처 대신과 동급으로 중의원 현직 국회의원이 맡았다. [23] 1985년에 제대하고 2001년에 방위청장관 취임. 그는 2014년에 다시 방위대신으로 취임했다. [24] 한국군은 두 번째, 미군은 다섯 번째이다. [25] 제복군인에서 합참의장을 제외하면 모두 5대 차관보다 아래이며, 국방부장관, 육군청장, 해군청장, 공군청장이 모두 제복군인보다 우위. [26] 日 ‘군사대국’에 또 한 걸음…무기전담조직 신설, 자위대 ‘문민’ 통제 폐기 [27] 이후 1997년까지 3번의 쿠데타 모의가 있었으나 당연히 실현되지 못했다. [28] 가령 1982년 당시 군인들은 예산을 결정하는 입법원 위원들에게 공공연히 국방예산을 깎지 말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29] 당장 문민통제를 그렇게 중요시하는 미국의 국방장관은 보통 위관급 장교의 군 경력에, 주요 방산업체의 CEO 등을 역임한 사람이 많다. 최소한 군대라는 조직의 생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민간기업의 경영 효율성을 더한다는 개념이다. [30] 이집트군의 폐쇄성은 절대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닌 게, 군이 독립되어 가지는 이권이 워낙 어마무시하다보니 가만히 있어도 돈과 권력이 차고넘치는데 굳이 위험한 쿠데타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즉 굳이 군이 쿠데타로 정치에 개입안해도 사실상 경제력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비선실세가 되어버릴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만 이집트군 쿠데타를 일으킨 적은 막강한 권력에 비해 2번 밖에 없다. 물론 문민통제가 강력해서가 아니라 1952년이래로 군부가 모든 정권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자주 일으킬 필요가 없어서였다.(...) 이후 국민들의 직선으로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문민정권은 군부 쿠데타로 축출당한다. [31] 옆나라인 파키스탄은 쿠데타가 자주 일어난거와는 반대. 당장 한국만 해도 5.16군사정변,12.12사태를 겪었으며 중국(중공+대만)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일본도 제국 시절에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고 전후인 1961년 삼무 사건, 1970년에 미시마 유키오가 쿠데타를 일으킬려고 했다.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 사후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났고 캄보디아 역시 론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서 공화정으로 갔으며 태국은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고 필리핀은 민주화 후인 198~90년대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다. [32] 1885년부터 1937년까지 인도 제국의 한 주였다. [33] 1984년 당시 전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가 같은 해에 있었던 황금사원의 시크교도 반란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죽은 적이 있긴 하다. 대신에 여기는 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개 경호원의 개인적인 종교적 원한인지라... [34] 그 이전 라마9세를 포함한 태국의 국왕들은 정치적 카리스마나 개인의 역량이 대단했기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나도 군부가 함부로 왕을 몰아내거나 감히 건드릴수가 없을정도였으나 지금 현 국왕의 상태를 보면(...) 국민들도 왕실의 개혁을 요구할정도로 국왕보기가 우상숭배 수준에서 일반 사람 보기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35] 계급은 원수. [36] 즉 정부가 군대를 전혀 통제할수 없다는 것이다. 말이 정부군이지 미얀마군의 실상은 군벌, 반정부 무장단체인 셈이다. [37] 애초에 민주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때부터 국방장관을 군부에서 임명하겠다고 선언한 데다가, 의회 내 일정 수의 의석을 군부에서 점유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화는 3분의 1 정도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38] 즉, 장교나, 사병의 자손이 씨가 말라서 [39] 다만 이러한 분위기가 유지될수 있던것은 당시 동독 지도부가 호네커를 비롯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강경파가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것이 있으며, 설령 인민군으로 진압하지 않아도 과거 헝가리 봉기 프라하의 봄처럼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통해 진압할수 있었다. 당시 동독 주둔 총사령관인 보리스 스트네코프는 강경한 매파였으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여 내정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동독 정부가 요청하면 소련군이 출동하여 진압할수 있었지만, 호네커가 실각되고 온건파인 에곤 크렌츠가 집권하면서 이러한 시도는 실행되지 않았다. [40] 예외적으로 유리 안드로포프는 대조국전쟁기 파르티잔으로 나치와 싸웠고 이후 KGB의 주석으로서 장성까지 올랐다. [41] 북한도 이 점에서는 정치장교 제도의 덕을 보았다. 하지만 그 후 선군정치로 나서면서 그냥 군사국가화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민통제가 안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선군정치는 군대가 비대해져 문민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김정일 본인이 의도한 것으로 김정일 사후에 김정은이 다시 선당정치로 선회하자 내부적으로 큰 잡음 없이 선회된 것을 보면 북한 내부의 문민통제(엄밀히 말하면 김씨일가에 의한 통제지만)은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군대는 꽉 잡고 있으면서 따지고 보면 신분 자체로는 민간에 더 가까운 당이 김씨 삼대 돼지들이 벗어내는 내외부적 여건으로 인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나라 전체를 병영국가로 만들어버린 그 자체로서 정치 체제 사상 상당히 특이한 경우다. 선군정치를 하게 된 이유는, 고난의 행군으로 정권이 흔들리자 고삐를 쥔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42] 시도는 있었으나 발각되었다 [43] 김정일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부를 꽉 잡아서가 아니라, 혁명원로들의 환심을 샀기 때문이다. [44] 아버지와 달리 군대는 아무도 모르게 갔다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