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생 김상진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거하여 할복 자살한 사건. 이후 벌어진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2. 사건과 영향
김상진 열사 |
그는 「양심선언문」[1]을 낭독한 뒤 가지고 있던 과도를 꺼내 할복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수원도립병원으로 옮겨져 두 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이튿날인 4월 12일 오전 8시 55분 즈음 25살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1달 후인 5월 22일에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가운데 1천여 명이 '김상진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후 긴급조치 9호의 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로 인해 한심석 서울대학교 총장이 사임하고 박현식 치안본부장, 서울남부경찰서장이 경질되었으며 29명의 학생이 구속되었는데 이를 오둘둘 사건이라고 한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가졌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사저에 모여들어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는데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다.
그가 죽은 뒤 5년이 지나고 유신정권이 무너진 1980년 4월 11일에야 서울대학교 농대 교정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질 수 있었다.
3. 원문
3.1. 양심선언 전문
양심선언문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은 반응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 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세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 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1975. 4. 11
서울농대 축산과 4년
김상진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은 반응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 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세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 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1975. 4. 11
서울농대 축산과 4년
김상진
3.2.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도 지극히 미약한 인간이지만 진실로 국가를 사랑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걱정하는 한 국민의 충성된 마음에서 탄원하옵니다. 각하께서는 1971년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모든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 노리는 북괴가 이러한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다시 6.25 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지난 5~6년간에 걸친 안보위기 속에서 우리 국민은 무척이나 허덕여왔고 매년 가중되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불신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읍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워나갈 수 있는 길은 올바른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 이룩된 국론통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풍토 이것이 곧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5.16 직후에 발표하신 혁명공약에서 민정이양을 선포하셨을 때, 우리 국민은 정의로운 혁명가에게 갈채를 보냈고, 3선에 출마하셨을 때 우리 국민의 얼굴은 어두웠으며, 유신헌법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의 눈동자는 가득 차 감히 입을 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아끼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국민이 판단할 때 행하여가는 방법이 그릇되었다면 그것은 한 지도자의 아집과 독선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고 그로써 빚어지는 갈등은 사회를 끝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게 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건대 지극히 제한된 자유 속에서 을 감추며 그것을 인내로 이겨나가는 습성을 익혀왔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조그만 자유나마 감사하며 일제강점기, 6.25 당시와 비교하여 획득해야 할 자유를 포기해버리는 피압박민족의 설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인내를, 그 무언의 호소를 각하께서는 소리 없는 지지로 착각하셨고 14년의 권위를 유지해온 힘이 되신 것입니다. 획득해야 할 자유에도 한계가 있지만 제한해야 할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압력에 끌려 투표장으로 가는 국민의 발걸음에서 과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사회는 어둠의 짙은 그림자로 뒤덮이고 학원은 병들어 교수는 학생에게 양심과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아직도 계속되는 학원사태가 일부 몰지각한 학생의 선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하께서는 아직도 현사회의 각 분야에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고 과감히 투쟁의 대열에 서서 소리높이 외쳐대는 절규가 일부 분수를 모르는 사회인사의 망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패와 부조리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래도 순수한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양심적인 입장에서 반항이나마 할 수 있는 곳이 대학입니다. 대학은 사회와 국가가 해결해야 하는 근본문제를 알고 있으며, 그러기에 현실의 제 문제에 민감히 반응하여 자신의 양심에 의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해 나갑니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을 애국 애족적 견지에서 받아들여 만족해할 수 있는, 즉 대학인이 가지는 국가의 비전에 대한 사명의식에 기인하는 부담 없는 순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학생들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고 왜 그들의 순수한 애국에 외면만 하는 겁니까? 이렇게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행동하는 저도 시국을 판단할 줄 모르는 몰지각한 학생일까요? 저는 저의 생명을 그렇게 값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몰지각한 행동으로 생명을 버릴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또 죽음 앞에 선 인간이 하고자 하는 말에는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선 보다 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통령 각하
위대한 지도자는 또 민족의 영도자는 국민의 열망과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으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강요와 복종으로 점철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민심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각하 혼자만이 이 시국과 이 나라를 이끌어갈 유일한 존재이며, 이 조국의 안녕과 민족번영을 위해 각하만이 중차대한 사명을,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오류를 버리시지 못하는 겁니까? 우리 국민은 누구나 밝고 밝은 내일의 비전을 갈망하고 우리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읍니다.
왜 우리 사회의 이유있는 저항을 각하의 독선 속에 파묻어버리시려는 것입니까?
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 국민은 3.1 운동의 숭고한 애국 애족 정신을 이어받아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항거하며 어떤 희생도 불굴의 의지로 대항해 나갈 줄 아는 슬기와 용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느껴야 할 기본적 양심이 무엇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가 무엇이며 민족이 획득해야 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우리 국민은 알고 있읍니다.
대통령 각하
위대한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는 영광의 퇴진을 위한 숭고한 결단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진정한 안보는 국민총화에서 비롯되고 국민총화는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 불신과 압박이 없을 때야 비로소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불신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 개인에게 이유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을 뜻한단 말입니까?
각하의 숭고한 결단 하나로 사회의 안녕을 가져오고 학원의 평화가 유지되며 진실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 민족에게 국민총화의 계기가 마련되며 단결된 힘으로 뭉친 안보태세의 만전이 기해지리라 믿는 바입니다.
길이 민족의 가슴 속에서 각하가 이룩해놓은 업적과 더불어 참된 지도자로 새겨질 것이며 욕망을 초월한 초인간적인 슬기를 역사는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잘못 인식한 위정자는 산 경험이 말해주듯이 언젠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 하나의 오점을 남긴 채 불명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저 민족의 들리지 않는 피맺힌 절규가 무엇을 뜻하며 간절한 무언의 호소가 무엇을 바라는가를 왜 각하는 모르시는 것입니까?
죽음으로 바라옵나니,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옵나니, 국민된 양심으로서 진실로 진실로 엎드려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주시길 바라옵니다.
이 땅의 영원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길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압력에도 끝없는 투쟁을 계속하여 싸워 이겨나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각하의 안녕과 건강을 축원합니다.
1975년 4월 10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
김상진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도 지극히 미약한 인간이지만 진실로 국가를 사랑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걱정하는 한 국민의 충성된 마음에서 탄원하옵니다. 각하께서는 1971년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모든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 노리는 북괴가 이러한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다시 6.25 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지난 5~6년간에 걸친 안보위기 속에서 우리 국민은 무척이나 허덕여왔고 매년 가중되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불신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읍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워나갈 수 있는 길은 올바른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 이룩된 국론통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풍토 이것이 곧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5.16 직후에 발표하신 혁명공약에서 민정이양을 선포하셨을 때, 우리 국민은 정의로운 혁명가에게 갈채를 보냈고, 3선에 출마하셨을 때 우리 국민의 얼굴은 어두웠으며, 유신헌법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의 눈동자는 가득 차 감히 입을 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아끼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국민이 판단할 때 행하여가는 방법이 그릇되었다면 그것은 한 지도자의 아집과 독선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고 그로써 빚어지는 갈등은 사회를 끝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게 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건대 지극히 제한된 자유 속에서 을 감추며 그것을 인내로 이겨나가는 습성을 익혀왔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조그만 자유나마 감사하며 일제강점기, 6.25 당시와 비교하여 획득해야 할 자유를 포기해버리는 피압박민족의 설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인내를, 그 무언의 호소를 각하께서는 소리 없는 지지로 착각하셨고 14년의 권위를 유지해온 힘이 되신 것입니다. 획득해야 할 자유에도 한계가 있지만 제한해야 할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압력에 끌려 투표장으로 가는 국민의 발걸음에서 과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사회는 어둠의 짙은 그림자로 뒤덮이고 학원은 병들어 교수는 학생에게 양심과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아직도 계속되는 학원사태가 일부 몰지각한 학생의 선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하께서는 아직도 현사회의 각 분야에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고 과감히 투쟁의 대열에 서서 소리높이 외쳐대는 절규가 일부 분수를 모르는 사회인사의 망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패와 부조리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래도 순수한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양심적인 입장에서 반항이나마 할 수 있는 곳이 대학입니다. 대학은 사회와 국가가 해결해야 하는 근본문제를 알고 있으며, 그러기에 현실의 제 문제에 민감히 반응하여 자신의 양심에 의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해 나갑니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을 애국 애족적 견지에서 받아들여 만족해할 수 있는, 즉 대학인이 가지는 국가의 비전에 대한 사명의식에 기인하는 부담 없는 순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학생들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고 왜 그들의 순수한 애국에 외면만 하는 겁니까? 이렇게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행동하는 저도 시국을 판단할 줄 모르는 몰지각한 학생일까요? 저는 저의 생명을 그렇게 값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몰지각한 행동으로 생명을 버릴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또 죽음 앞에 선 인간이 하고자 하는 말에는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선 보다 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통령 각하
위대한 지도자는 또 민족의 영도자는 국민의 열망과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으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강요와 복종으로 점철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민심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각하 혼자만이 이 시국과 이 나라를 이끌어갈 유일한 존재이며, 이 조국의 안녕과 민족번영을 위해 각하만이 중차대한 사명을,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오류를 버리시지 못하는 겁니까? 우리 국민은 누구나 밝고 밝은 내일의 비전을 갈망하고 우리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읍니다.
왜 우리 사회의 이유있는 저항을 각하의 독선 속에 파묻어버리시려는 것입니까?
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 국민은 3.1 운동의 숭고한 애국 애족 정신을 이어받아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항거하며 어떤 희생도 불굴의 의지로 대항해 나갈 줄 아는 슬기와 용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느껴야 할 기본적 양심이 무엇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가 무엇이며 민족이 획득해야 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우리 국민은 알고 있읍니다.
대통령 각하
위대한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는 영광의 퇴진을 위한 숭고한 결단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진정한 안보는 국민총화에서 비롯되고 국민총화는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 불신과 압박이 없을 때야 비로소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불신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 개인에게 이유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을 뜻한단 말입니까?
각하의 숭고한 결단 하나로 사회의 안녕을 가져오고 학원의 평화가 유지되며 진실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 민족에게 국민총화의 계기가 마련되며 단결된 힘으로 뭉친 안보태세의 만전이 기해지리라 믿는 바입니다.
길이 민족의 가슴 속에서 각하가 이룩해놓은 업적과 더불어 참된 지도자로 새겨질 것이며 욕망을 초월한 초인간적인 슬기를 역사는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잘못 인식한 위정자는 산 경험이 말해주듯이 언젠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 하나의 오점을 남긴 채 불명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저 민족의 들리지 않는 피맺힌 절규가 무엇을 뜻하며 간절한 무언의 호소가 무엇을 바라는가를 왜 각하는 모르시는 것입니까?
죽음으로 바라옵나니,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옵나니, 국민된 양심으로서 진실로 진실로 엎드려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주시길 바라옵니다.
이 땅의 영원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길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압력에도 끝없는 투쟁을 계속하여 싸워 이겨나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각하의 안녕과 건강을 축원합니다.
1975년 4월 10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
김상진
4. 둘러보기
[1]
이 글은 할복 이전에 그가 작성한 것이었다. 김상진은 이 외에도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써서 박정희의 퇴진을 정중하게 요구하기도 했다으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두 문건을 낭독하여 녹음한 뒤 그 테이프를
기독교방송국에 보냈다.
양심선언 육성녹음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