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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5:17:53

전태일

파일:무궁화장 약장.png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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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전태일
全泰壹|Jeon Tae-il
파일:797F4Xo.jpg
출생 1948년 9월 28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사망 1970년 11월 13일 (향년 22세)[1]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성모병원
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본관 정선 전씨
직업 재단사, 노동운동가
수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2020년 추서)
종교 개신교 ( 기독교대한감리회)[2]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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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학력 <colbgcolor=#fff,#1f2023>남대문국민학교[3] (전학)
청옥고등공민학교[4] (중퇴)
사인 분신자살
가족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
남동생 전태삼[5]
여동생 전순옥, 전태리[6]
인척 제수 윤매실
큰 매제 크리스토퍼 조엘
작은 매제 임삼진
조카 전여진, 전동준, 전동명[7]
외조카 임지안, 임건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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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영향4. 어록 및 저술 기록
4.1. 어록4.2.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4.3. 근로감독관에게 보내는 편지4.4. 수기
5. 대중매체에서6. 여담7. 참조 링크8. 관련 단체 및 건축물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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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전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태우면서 외쳤던 말
대한민국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 1960년대 후반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에 취직하고 1970년부터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력했다. 노동환경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박정희 정부와 자본기업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다가 시위 현장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면서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여 2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흔히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열사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노동 운동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처럼 전태일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전태일 열사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현재 수준보다 대우를 받지 못하거나 대우받는 시기가 매우 늦어졌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에게 처한 열악한 현실에 대해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계층, 대학생들, 당사자 집단인 노동자 계층이 그의 죽음으로 각성의 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어머니 이소선 열사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평생을 노동자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운동가가 되었고 '노동운동의 대모()' 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그는 노동열사로 추서되었으며,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에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48년 9월 28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고운 심성과 다정다감한 성격,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산으로 이사갔다가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 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밥을 못 먹는 일은 일상이었고 이는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 보조로 취직했다. 이후 빠른 일처리와 뛰어난 실력으로 직장에서 큰 인정을 받고 빠른 시간 내에 시다에서 재단사로 승진하면서 다른 재단사 친구들과 힘을 모아 자신만의 가게를 창업하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한 명이 심하게 기침하다가 각혈()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녀를 병원에 보내기 위해 도움을 청하고려 했으나 알리지 말라고 애원[9]하는 여공의 모습과 얼마 뒤 병에 걸린 여공이 해고된 걸 보게 되었다. 이후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10], 박봉[11], 산재임에도 일방적으로 부당해고 당하는 현실, 질병( 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조 여공들을 돕는 것은 물론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훗날의 YH 사건에서 보듯이 당시 여공들은 제대로 된 대우는커녕 공순이 아니면 일련번호로 불릴 정도로 비참한 신세였지만 그런 시대에서마저도 전태일은 여공들에게 자신의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고 도시락도 사주는 등 여공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꼈으며, 주변 증언에 따르면 전태일은 근로 기준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모범 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 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 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등 당시로선 선구적인 안목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이라는 노동 조건에 대한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법률 내용을 독학하려고 하였으나 근로기준법 전문에 한자가 많아 내용을 도통 알 수 없어 "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텐데..." 라며 한탄[12]했다고 한다.[13][14]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면서 읽었는데 말이 해설서지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 때문에 국민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게는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던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 든 대학생을 자주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를 꼬박 새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15]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 공장주들에게 밉보여 직장에서 해고된 후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지냈고 그의 일화를 그린 전기만화 태일이에 따르면 평화시장에서 일을 못 하게 되자 구로공단에서 잠시 일했다는 언급도 있다.

1970년 재단사로 취직되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에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 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증언에 의하면 전태일 일행이 찾아가자 "알았으니 며칠만 기다려라"라고 해서 며칠 뒤에 다시 갔더니 "감사가 끝났으니 이제는 알아서 해라 이 빨갱이 새끼들아"라는 폭언이 담긴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전태일은 깊은 좌절과 비애를 느끼고 더욱 강력한 행동을 보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전태일은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 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16]"고 계획했다.

이후 10월 24일에 동료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게 되지만 그마저도 오후 1시에 사전에 경비원의 신고로 정보를 입수하여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청계천 앞에서 세상 사람 누구도 지키지 않는법이 무슨소용 있냐며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그저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한다. 결국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 전에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짓밟혔다. 좌절한 전태일은 삼동회 회원들이 경찰, 패거리들과 치고받으며 시위를 벌이는 동안 전태일은 평화시장 남쪽 계단으로 향했고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의 제지로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평화시장으로 향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17]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꺼질 때까지 저 말을 되풀이하면서 평화시장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주위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급하게 불을 끄면서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 데다[18] 병원 측에서도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19] 기본적인 응급 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치료를 받고 싶으면 근로 감독관에게 보증을 받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20] 결국 그는 명동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병상에서 곁에 있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라는 당부를 남겼으며,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그래!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라고 맹세했다고 한다.[21] 그렇게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에 향년 22세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유언은 "배가 고프다." 였는데 전태일은 1970년 11월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고 2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공복 상태였다고 한다.

3. 영향

1963년 사이공에서 불교 승려 틱꽝득의 자살은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하게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국의 노동 활동하는 사람들의 반독재운동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한국의 민중봉기 p.248

전태일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노동운동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

특히 그동안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장시간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현실이 한국 사회에서 조명받게 되었고 정치적 의미에서의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 지식인들은 이때부터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1980년대의 한국에는 대학생이 21세기보다 훨씬 수도 적고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22]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 취업자[23]'로 호도하기도 하였다.

또 노동자들 스스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1970년대에 청계피복노조 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1970년대에 세워진 민주 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 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파일:ZAYfggg.jpg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죽어가는 아들과 한 약속이다.

이소선 여사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아들 전태일 열사가 못다 이룬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이뤄달라고 부탁하자 반드시 이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아들의 죽음과 맞바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평생동안 노동운동에 투신하였고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은 아들 전태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들, 딸들의 말을 지켜주기 위한 어머니의 삶으로 바뀌었고, 노동 운동으로 여러 번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처럼 이소선 여사의 삶은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로서 이소선은 ' 청계천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전설이 되었으며 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 등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 유가족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랜 기간 활동했고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의식 불명에 빠졌다가 2011년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말년의 삶을 다룬 영화로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가 있다(아래의 영화 '어머니'와는 다른 작품). 태준식은 노동 운동 영상 제작 그룹인 '노동자뉴스제작단'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쌍용자동차 공장 점거 파업과 이후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당신과 나의 전쟁' 등이 대표작이다. 그의 동생들도 노동운동가[24]로 여러 고초를 겪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도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여사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가 되었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어 19대 국회의원직을 역임했으며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의 29번, 15번째 주자로 연설했다. 남동생 전태삼도 형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가로 활동한다.

전태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모란묘지공원에 있는데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묘지도 근처에 있다. 모란묘지공원에는 문익환, 조영래, 박종철(가묘) 등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운동가들의 묘지들이 모여 있다.

2020년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로 각종 단체, 정부, 미디어 등에서 그의 삶과 노동 운동을 재조명했고 그의 정신을 기리면서 2020년 11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는 노동계 최초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4. 어록 및 저술 기록

4.1. 어록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분신 당시 외친 말
내가 5분 있다 죽을지 10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어머니는 나와 약속을 해주셔야 합니다. 내 목숨 하나를 바쳐서 (어두운 노동인권계에) 작은 창구멍을 하나 만들 테니, 그 구멍을 보고 노동자와 학생들이 막 소리지르며 달려갈 때, 그들과 함께 가장 앞에서 소리쳐 주십시오.
꼬꼬무에서 전태일 일화가 방영될 당시, 이소선 여사의 인터뷰 자료에서 발췌된 전태일이 이소선 여사에게 남긴 당부. 상술한 것처럼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당부를 듣고 "그래! 내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너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마!"라고 맹세했으며,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평생을 노동운동에 바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노동운동의 대모'라 불리게 된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 일기 中...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깎아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려야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인 유서[25][26]
파일:전태일_유서.jpg
이외에 모범업체 설립 계획서나 두 자본가 대화나 친구인 원섭에게 보낸 편지 같은 저술을 했다.

4.2.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파일:external/image.fmkorea.com/c6947e83f197cd96f43ada9662ce4c1f.jpg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27]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28]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모든 남기신 일리의 일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알고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우리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29]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읍니다.[30]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31]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 할 수 없읍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읍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읍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읍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읍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읍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노동환경이 한국보다도 열악하다고 지적받는 중국도 996 문화라고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주6일 근무가 많이 자리잡혀 있는데 중국의 노동자들은 이조차도 과하다고 여겨서 탕핑족이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선진국의 노동환경을 보면 996조차 과한 게 맞고 하다못해 자유방임경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920년대 미국의 철강 노동자들도 일 12시간 근무였는데 동시기 포드사의 헨리 포드는 이마저도 과하다고 여겼고 내수 시장 확대를 앞장서서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일 8시간 근무를 택함과 동시에 임금 인상과 의료 지원 등의 복지를 추가로 제공했다.

여튼 요점은 전태일이 주장한 그대로 이 요구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도 아닌 죽지 않을 정도의 요구이며, 기업주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이 맞다. 물론 내수 시장보다는 수출 시장이 주된 활로였던 당시 경제사정상 최대한 노동자에 들이는 비용을 낮게 유지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지만 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을 하지 않고서는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다. 포드가 반세기 전에 실시한 경영 방침에서 보듯 기업주의 입장에서도 장기적인 내수 시장을 창출하려면 언젠간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은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노동자 처우 개선이 제대로 되지 않는 국가들치고 (자원부국이 아닌 이상) 선진국에 도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32]

4.3. 근로감독관에게 보내는 편지

근로감독관님께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이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잘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 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만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4.4. 수기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1969년 겨울의 일기 中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1969년 12월 31일 수기에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삼각산에서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년 12월 31일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1970년 초의 소설작품 초고에서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지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1969년 9월의 수기에서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5.1.1. 어머니

전태일기념관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한국민주통일연합(약칭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33]에서 제작한 영화. 1978년 개봉한 작품으로 당시 열악한 한국의 노동 환경을 해외에 알리고 민주주의 회복을 세계에 호소하는 영화로 알려졌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들이 몰래몰래 복사한 비디오 테이프로 돌려봤다 한다. 전태일 열사에 관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5.1.2.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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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만화 / 애니메이션

5.2.1. 태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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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에서 연재한 동명의 만화[34]를 원작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다.

5.3. 도서

파일:전태일 평전.jpg }}} ||
2020년 50주년 개정판[35]
* 전태일 평전 - 장기표 씨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저자인 인권 변호사 조영래가 정리, 집필한 것. 1978년 일본에서 초판이 나왔고 1983년 돌베개에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이란 제목으로 저자명 없이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라는 명의로 한국에 출판되으며 1991년 1차 개정판에 와서야 저자 이름을 밝힌 책을 출판했다. 참고로 저자인 조영래는 1990년 12월 12일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자세한 사항은 조영래 항목 참조. 전태일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알기 위해서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으로 조영래 변호사의 압도적인 필력 덕분에 훌륭한 평전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태일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이름이 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36] 그러나 이 책이 검찰 판례상 이적표현물 탓에[37] 이를 소지한 노동자나 학생들이 수도 없이 잡혀갔으며 21세기에 들어선 2013년에도 이마트 같은 기업에서는 전태일 평전을 불온도서로 취급하고 있다. 향후 해제될지는 아직 불명.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의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파일:전태일 실록.jpg }}} ||

5.4. 드라마

5.5. 다큐멘터리

}}} ||
}}} ||
2020년 11월 13일 방영분[41]. 전태일 열사의 일생과 죽음, 그리고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개신교적 관점에서 조명한 다큐멘터리이다. 실제로 전태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도 잠시 한 적이 있다. 종교적인 내용이 있어 비종교인이 다소 거리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42]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한 개신교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나왔다[43].

5.6. 음악극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태일(음악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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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기타

6. 여담

}}} ||
지금도 가슴 속에 파고드는 소리
전태일 동지의 외치던 소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
외치던 그 거리에 젊은 가 흐른다
내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 어디에
다시는 없어야 할 쓰라린 비극 ||

7. 참조 링크

8. 관련 단체 및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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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대 노총( 한국· 민주)이 주관하는 전국노동자대회나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주관하는 민중총궐기 집회가 매년 11월 13일을 즈음해서 열리는데 이는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아버지로 꼽히는 전태일 열사의 기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랫부분의 여담 문단 참조. [2] 기독교대한감리회 갈릴리교회(당시 이름은 창현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상당히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한다. [3] 現 남대문초등학교. [4] 대구명덕초등학교. [5] 전두환의 장례식에 찾아와 전두환의 잘못된 역사를 국민들이 잊지 말라고 말했다. #, 2023년 11월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 [6] 개명 전 이름 전순덕 [7] 남동생 전태삼의 자녀들. [8] 작은 여동생 전순덕의 자녀들. 둘째 임건우는 본래 지 돌림의 임지강이었으나 개명하였다. [9] 당시 평화시장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푼돈에도 일하려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노동자들은 마치 부품처럼 즉시 대체가 가능했다. 정부, 경찰, 노동청은 당시 박정희 정부 아래에서 국가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친 기업정책을 하던 도중이었다. 그렇게 이런 극악의 노동 환경을 모두 묵인했기 때문에 산업재해 인정이나 퇴직금 따위는 꿈도 못 꿀 시기였고 덕분에 사장 입장에서는 직원이 아픈 경우 미국처럼 '너 해고'하면 그만이었다. 즉 일방적으로 해고당하지 않고 계속 일을 하기 위해서 병을 숨기려고 한 것이었다. [10] 당시 평화시장의 구조는 맨 위에 옷감 등 재료를 쌓아 두고 2층은 공장, 1층에서는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는 구조였다. 공장 내부는 고작 백열등 몇 개에 의존할 만큼 컴컴했고 환풍기가 전혀 없어서 두 시간만 일해도 눈썹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을 정도로 옷감 먼지가 잔뜩 날렸으며 공장 내부에는 합성섬유의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한정된 공간에 더 많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단층을 복층으로 개조했고 그 결과 2평 공간에서 13명꼴, 7평 공간에서 30명꼴의 인원이 모여서 일을 했다. 근무 시간은 명확히 규정이 없어서 약 14시간 혹은 그 이상 일했고 휴일은 한 달에 약 이틀이었다. [11] 견습공인 ‘시다’는 임금이 교통비에 그칠 정도의 액수였고 이것으로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의류 판매 비수기에 미싱사가 임금을 받지 못하면 시다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결국 1년 12개월간 그 푼돈이라도 받는 달이 7~8개월이었다. [12] 훗날 장기표 김문수 등 서울대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이 사망한 후 그의 모친 이소선을 찾아오자 "아이고 우리 태일이가 그래 서울대 댕기는 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캤는데 이제사 찾아왔나."하고 오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3] 1970년대에는 21세기와는 달리 대학 진학률이 10%여서 당시에 대학생은 엘리트 취급받기도 했다. [14] 현재는 법률 전문을 한글로 열람 가능하다.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근로기준법 항목이 있다. 다만, 그래봤자 예나 지금이나 법률 용어라는 것이 학식이 깊지 않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온전히 알아듣기는 힘들다. 어차피 한자로 된 법률 용어를 한글로 소리만 받아적어 봤자 의미는 여전히 한자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15] 근로기준법 같은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일만 한 자신들을 바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16] 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3페이지 [17] 이 모습을 코앞에서 본 친구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아서 꼬꼬무에 출연해서 지금까지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인터뷰 도중 감정이 북받쳐 잠시 인터뷰를 중단하고 자리를 뜨기도 했다. [18] 이 때문에 당시 그를 진단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19] 전태일이 맞아야할 약물 주사의 비용이 1만 5천원, 2대면 3만원인데 전태일이 받던 연봉인 2만원보다 더 많은 고가였고 전태일의 집안은 빈곤층이라서 비싼 주사 비용을 댈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20] 후에 모 대학의 한 교수가 술회하기를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한국의 사회상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돈이 없어도 전국민 의료보험이 있기 때문에 일단 치료부터 하고 그 치료비를 나중에 청구하지만 전태일이 숨을 거두었던 1970년의 한국은 국가 예산의 절반을 미국의 원조로 채워지던 때에서 벗어나고 비로소 세금으로 국가 예산을 꾸려가기 시작한 때라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이전이었으며 공무원, 군인 등 극히 일부에만 의료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응급환자도 안 받아 주어 죽었다. 보이스피싱 전화가 와서 '당신 자식이 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누워있으니 수술비하게 돈을 부쳐달라'는 젊은 세대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21세기에도 장년층, 노년층에게 잘 통하는 이유가 있다. 돈을 싸들고 오지 않거나 돈이 없어 보이면(지불능력이 안 되면) 치료를 해 주지 않았고 그런 사례를 들은 장년층들은 돈을 보내지 않으면 자식이 죽을까 겁부터 먹기 때문이다. [21] 이소선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전태일은 "내가 5분 있다 죽을지 10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까 나와 약속을 해달라. 내 목숨 하나 바쳐서 (어두운 노동인권계에) 작은 창구멍을 내놓을 테니, 노동자와 학생들이 그 구멍을 보고 막 소리를 지르며 달려갈 때, 가장 앞에서 그들과 함께 소리를 질러달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가 "그래! 내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너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라고 약속하자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고 하는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언인 "배가 고프다."를 남기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2] 이러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YH 사건, 부마민주항쟁, 인천 5.3 운동,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보답받게 되었다. [23] 기업 측에서 아예 이런 대학생들의 취업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위장 취업을 해야 했다. [24] 친동생 전태삼도 어머니와 같이 노동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갔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어머니가 노동 운동에 투신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면서 고생을 했다. 전태삼이 밝힌 바로는 전태일에게는 본인 말고도 6.25 전쟁 때 태어난 남동생이 1명 더 있기는 했는데 아기 때 죽어서 2남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25]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2004, 303~304쪽 [26] 이 유서는 광주문화방송에서 제작한 5.18 38주년 다큐멘터리에서 그 동창들 중 한 명인 전원섭에게 48년 만에 전해지게 되었다. [27] 당시에는 대통령이 조선시대 국왕과 같은 지위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식 용어인 옥체라는 말이 쓰였다. [28] '저희들의'라는 의미의 낱말로 추정된다. [29] 지금의 도봉구. 당시는 쌍문동 일대가 도봉구로 분구되기 전이었으며 당시의 서울은 참고로 이런 형태였다. [30] 탄원서 작성 당시의 문법으로는 "읍니다"가 맞는 표현이었다. "습니다"로 문법이 개정된 것은 1989년의 일이다. [31] 실제 평화시장의 주소지는 중구 을지로6가다. 평화시장은 설립 이래 한 번도 주소가 동대문구에 속한 적이 없지만 동대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 때문에 동대문구 평화시장이라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32]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일종의 대체역사적 성격으로 이 탄원서를 박정희가 직접 받아보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전태일의 탄원서를 이후락이 대신 필독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비통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비극이야, 정말 비극이야.. 날 얼마나 원망을 했겠어..." 라고 자책하면서 곧 평화시장을 비롯한 모든 기업체에 근로기준법 위반 사태의 유무를 파악하기 위해 강력하게 수사할 것을 지시한다. [33] 1978년 6월 19일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 판결 당시 이적단체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불법이다. 정작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은 2011년 판결에서 조작사건으로 판명되었지만 한민통의 이적단체 지정은 해제되지 않고 있다. [34] 전태일평전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았다. 권수는 전태일평전과 마찬가지로 전 5권 완결. [35] 50주년 개정판은 편집을 통해 가독성을 높이고 주석과 연표를 보강했다. [36] 노무현도 1985년에 전태일 평전을 읽기 전에는 전태일을 몰랐다고 한다. [37] 조영래는 자유민주주의자로 좌파 성향이 아니었으며 서울올림픽을 긍정하고 사회주의를 부정했다. [38] 영웅시대라는 드라마 자체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극중 주요인물들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그리기 위해 그들의 흠결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39] 결국 이러한 업보가 쌓이고 쌓인 박정희는 9년 뒤 10.26 사건으로 천수조차 누리지 못하고 비명횡사하고 만다. [40] 중간에 한 편 띄워서 방송한 이유는 김영삼 대통령 서거로 특집 방송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41] 마침 전태일 열사 서거 50주기였다. [42] 실제로 전태일 열사의 사후 장례식 집전 요청을 거부한 교회 이야기도 나온다. [43] 대표적으로 강원용 목사가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연설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연설은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설교 방식을 빌려 기독교방송을 통해 방송됐다고 한다. [44] 방송 후반부에서 위에 기술된 전태일의 유서를 읽던 이야기 친구들 중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 정문성이 도중에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5] 예를 들어 2014년 11월 13일이 목요일이기 때문에 2014년 노대회는 11월 8일 토요일에 전야제, 11월 9일 일요일에 본대회가 열렸다. [46]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엮으려는 생각은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라고 주장했으며 적어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이뤄지는 것은 최소한의 대우는커녕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단 적어도 인간이 인간다운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것은 공산주의는커녕 자유론자의 대표인 에덤 스미스부터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