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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6:57:38

원충연 반혁명 사건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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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정사상 쿠데타· 반란 (시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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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암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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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계획4. 결과5. 후일담6. 미디어

1. 개요

1965년 5월 실행 직전에 들켜서 미수에 그친 군 일각의 쿠데타 계획. 주모자 원충연 대령의 이름을 따 당시 5.16 군사혁명에 반하였다는 이유로 원충연 반혁명 사건이라고 불린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도 몇 차례의 쿠데타 음모가 군정에 의해 발각 혹은 조작된 적은 있지만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정이양되어 대한민국 제3공화국이 출범한 후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군정 시절의 쿠데타 음모들이 대부분 조작 의혹이 짙은 데 비해 이 사건은 주모자인 원충연 본인이 순순히 인정한 실체가 있다.( 1981년 3월 4일 원충연의 중앙일보 인터뷰)

2. 원인

1965년 당시 정부와 군 수사당국은 가담자들이 하나같이 진급이 되지 않아 불만이 많았고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했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 3공화국 박정희 정부 입장에서 이 사건은 사회혼란 해소와 국가 근대화라는 정당한 명분을 지닌 5.16 군사혁명에 대조하여 아무런 명분도 없이 쿠데타 가담자 개개인의 사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사실 진급불만 문제가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당장 주모자인 원충연은 1961년부터 계속 대령에 머물러 있었고 당시 보도된 핵심 가담자 대다수가 중령 혹은 대령이었으며 대다수는 장성으로의 진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진급은 아무래도 5.16 가담자들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는데 주모자 원충연은 군사혁명위원회 공보실장 출신이었음에도 비교적 조기에 혁명 수뇌부에서 이탈하여 계속 진급이 막히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원충연은 재판을 통해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군이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은 민정이양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한 민정이양은 결국 혁명 당사자인 박정희 본인이 출마하여 당선되었기 때문에 절대 민정이양이라고 볼 수 없으며 이에 자신이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 박정희 군사정부를 타도한 후 최대 3개월 안에 민주선거를 실시해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폐기하겠다고 주장한 것도 핵심적인 명분이다. 당시는 독립한 지 20년 정도밖에 안 지났기에 반일 감정이 남녀노소, 지역, 종교, 정치적 이념 등을 떠나 매우 드셌으며 심지어 군부에도 한일협정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는 장성들이 있었다. 쿠데타 동지를 규합하고 쿠데타에 대한 국민 지지를 받기 위해 한일협정 반대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었다.

3. 계획

핵심 가담자들은 다음과 같다.[1]
당시 핵심 가담자로 지목되어 구속된 인물 중 실전부대를 지휘하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제2군단 작전참모 문원석 대령과 같은 군단 포병사령관 박인도 대령 정도이며 기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는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장 김문한 중령이 있었다.

문제는 정작 수도 서울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5.16은 수색의 제30보병사단, 부평의 제33예비사단, 김포의 해병대 제1임시해병여단 등 쿠데타군이 동원한 병력 다수가 서울 인근에 주둔해 있었지만 원충연과 그 동조자들이 확보한 병력은 사실상 2군단 내 일부 부대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2군단의 주둔지는 춘천 등 강원도 일대로 서울과 거리가 멀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충연은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제8보병사단을 동원하고자 했고 동조자 안중광을 통해 8사단장 장경석 및 예하 부대원들의 포섭을 시도했다. 2020년 장경석의 인터뷰에 따르면 안중광이 자기를 찾아와 가담을 요청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2020년 6월 3일 아주경제 장경석 장군 인터뷰 그러나 방첩부서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을 다 알고 있었고 반란 음모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까지 억울하게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원충연은 8사단 및 기타 확보한 병력으로 서울을 들이치고 대통령과 행정부서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5.16 군사정변을 성공시킨 수뇌부가 역쿠데타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다는 것이고 당연히 이들은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서는 것은 작전참모부 상황실장이라는 실동원병력은 없지만 유사시 상급자들을 대신하여 주요 부대에 대한 동원 및 투입을 결정하고 정보를 전파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동조자인 김문한 중령이 있었다는 것. 김문한은 쿠데타 발동과 함께 여러 역정보를 퍼트리고 정보를 통제하여 진압군의 활동을 차단할 예정이었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거사일로 삼은 것은 1965년 5월 16일로 박정희의 방미일이었다. 국가원수의 부재를 틈탄다는 전형적인 쿠데타 계획이라는 말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방미를 위해 대통령이 수도 서울을 떠나 김포공항으로 향하여 수경사 등 정부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대통령을 납치하려 했다는 말도 있다. 이때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전임자 존 F. 케네디와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파병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방미를 위한 기체가 없었던 한국에 자신의 전용기까지 보내줄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두 차례 방미했을 적에 케네디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던 박정희는 민선으로 정식 선출된 대통령 자격으로서는 첫 방미였는데 존슨도 자신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매우 들떠 있었으니 쿠데타군 입장에선 충분히 기회였을 것이다.

4. 결과

이 쿠데타 계획은 비교적 일찍부터 방첩부서에 노출되었다. 베트남에 비전투임무로 파병을 갔다가 돌아와 수도사단 기갑대대장을 맡고 있었던 이상열(갑종1기) 중령과 원충연이 접촉한 것이다. 누가 먼저 접촉했는지는 모르지만 원충연 입장에선 수도사단의 전차대대라는 핵심 전력의 지휘관이니 포섭을 시도해 볼 만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원충연의 동조자 중 한국군 기갑병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육군본부 전사과장 이성재 대령(육사10기)이 있었으니 기갑학교 경력이 있는 이상열과 연을 트긴 쉬웠을 것이다.

결국 원충연과 이상열은 서울의 한 여관방에서 몰래 만나 의기투합했는데 이상열이 불안감을 느낀 건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는지 몰라도 이상열은 대화한 내용을 모두 녹음한 다음 이를 육군 방첩대장이던 윤필용에게 제출했다. 당연히 방첩부서는 뒤집혀져서 극비리에 주요 가담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5월 초 방첩대는 기습적으로 원충연과 그 동조자들을 일거에 검거했다.

이후 방첩대와 사법당국은 불고지죄와 자금제공 등의 혐의를 들어 추가로 군 장교 일부와 행정부 관료 등 민간인, 심지어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형일까지 체포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절반 이상이 무죄로 풀려났고[2] 원충연, 박인도가 사형, 이인수 무기징역, 김문한 징역 15년, 안중광 징역 8년, 이덕주 징역 5년 등을 선고받았고 문원석은 선고유예, 이성재나 장경석, 김형석 등은 최종적으로 불기소처분되었는데 불기소처분을 받은 군 인사들은 대부분 강제예편당했다.

5. 후일담

원충연·박인도엔 사형. 1965년 12월 23일 중앙일보

주모자 원충연은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복역 중 1981년 출범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는 지난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격하를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차원으로 보인다. 원충연은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2004년 생을 마감했다.

밀고자 이상열은 그 대가로 1966년 대령, 1967년 준장, 1969년에는 소장으로 고속 진급하는 출세 코스를 탔으며 1970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했다가 1971년 예편 후 아예 외교관으로 전업한다. 그는 이후에도 한국 현대사의 격동에 또 다시 이름을 올렸는데 프랑스 공사로 재직 중이던 1979년 김형욱 실종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6년 사망했고 죽을 때까지 원충연 사건이나 김형욱 사건에 대한 증언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 안치용 기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상열의 외교관 전업에 대해 국내에 남아 있을 경우 원충연 사건 가담자들 혹은 그 후손들에 의한 보복을 우려하여 국내를 떠나 외교관 생활을 한 것이라고 추정했다.[3] 다만 이 내용이 나오는 부분이 원충연 사건을 전담하는 파트가 아니고 차지철의 동생 차상철이 미국에서 살해당한 사건에 결부되어 과거 군사정권 시절 인물들의 다수가 정권이 바뀐 후 미국 등으로 망명성 이민을 떠난 것을 이야기하며 곁다리로 언급한 정도다. 실제 이상열은 외교관 생활 중에도 중간에 중앙정보부에 기용되어 국내 복귀도 했고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살았다.

윤필용은 전격적으로 이 사건을 수사 및 해결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는데 이후 1.21 사태로 경질되어 잠시 부침을 겪고 나서 재기하였으나 윤필용 사건으로 몰락했다.

원충연의 사후 그의 아들은 아버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명백히 쿠데타가 맞다고 보아서 1심에서 사형이 징역 17년으로, 2심에서 다시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을 뿐이고 대법원은 2020년 6월 30일 징역 15년의 원심을 최종 확정지었다. # 원충연의 복역기간이 1965년 5월 7일 체포 이후 특사로 석방된 1981년 3월 3일까지로 15년 살짝 넘으니 실제 복역기간에 맞추어 형량이 선고된 셈.

그 밖의 주요 가담자들도 길게는 15년에서 짧게는 5년 남짓한 징역 생활을 하고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는 아무래도 반란군 출신이니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대상이 되긴 했지만 유신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실종되고 의문사당하던 걸 생각하면 정권 초기에 대놓고 반란을 모의하다 붙잡힌 결과로는 생각보다 평온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주요 가담자 중 무죄를 선고받은 문원석 대령은 이후 금융기업에 취직하여 활동했다. #

6. 미디어

명백한 군사 쿠데타 음모임에도 다뤄진 적이 없다. 3공화국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물이 많지 않고, 3공화국 시절에는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많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 채 밀고로 일망타진된 사건까지 조명할 여유는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배우 윤순홍이 원충연 역을 맡았지만 원충연의 쿠데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5.16 직후 군사혁명위원회 공보실장으로서 등장하는 장면밖에 없다.


[1] 당시 구속 및 불구속 송치된 관련자 명단을 보려면 1965년 5월 25일 동아일보 기사를 참조할 것. [2] 이때 원충연의 남동생 원갑연(元甲淵, 1924.1.11. ~ ) 대령 또한 쿠데타 음모를 미리 신고하지 않았다며 불고지죄(不告知罪)로 기소되었다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3] 안치용, 시크릿 오브 코리아(타커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