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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7:42:46

통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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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 제1-3기
1963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 파독 근로자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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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호 555호 556호
해양조사연보 통일벼 유물 전기로
1. 개요2. 배경3. 문제점4. 정부 정책5. 결과6. 쇠퇴7. 아프리카에서의 부활8. 여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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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개발된 품종. '통일벼'라고도 한다.

식량난 및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하라고 박정희 대통령 농촌진흥청에 지시를 내렸고, '잘 자라는 을 만들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러, 서울대학교의 생물학자 허문회 교수의 주도로 홍성호 연구사[1], 김광호 연구사, 박순직 연구사[2] 3명의 밤낮 없는 연구와 노동을 통해 인디카종(장립종) 쌀과 자포니카종(단립종) 쌀을 교배해서 새로이 만들어냈다.

2. 배경


지금도 세계적으로는 식량사정이 좋지 못한 나라들이 많지만, 1960년대 당시 대한민국 보릿고개와 춘궁기라는 소리가 남아있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나빴다. 1961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세계 100위에 불과했다. 당시 유엔 회원국은 104개 국뿐이었고, GDP 통계가 잡히는 국가는 116개국 밖에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하지 않았음을 고려했을 때,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순위였던 것이다.[3] #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걸 저소득층도 아닌 일반 서민조차 상상하지도 못하던 가난한 나라였고, '하루 두 끼만 배불리 먹어도 소원이 없겠다'던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매일매일 먹는 하루 세 끼라는 개념이 1960년대 당시에는 부자의 상징이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매년 3%씩 크게 늘어나는 데 반해 주식인 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쌀 부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따라서 '잘 자라는 쌀을 만들면 된다.'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어서 신품종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는데, 중앙정보부 이집트에서[4] 나다(Nahada)라는 볍씨를 비공식적으로(…) 가져와 농촌진흥청에 건네주었다. 이때 이집트는 종자 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개입해서 종자를 ' 밀수' 했다.[5] 1965년 시험 재배한 결과, 기존의 보다 30% 이상이나 수확량이 많아서 '기적의 볍씨'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신을 제2의 문익점이라고 으쓱이며 다녔다고.[6] 박정희 대통령은 이 볍씨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자신의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희농(熙農) 1호'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이라는 곡물 성장에 필요한 환경 통제가 가능한 장소에서 키웠을 때는 저런 결과가 나왔지만, 막상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되고 나니 씨받이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희농 1호는 근본적으로 '열대 지방에 맞는 자포니카형'[7] 품종이었으므로, 선선한 가을이 있는 한국의 기후와는 잘 맞을 리가 없었다.

결국 필리핀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휩쓴 녹색혁명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본부를 둔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IRRI) 에서 개발한 다수확 품종으로 이름난 필리핀의 '기적의 쌀' IR-8을 들여와 성숙이 빠른 홋카이도 품종 '유까라' 그리고 대만 품종인 '대중재래 1호'를 인공적으로 교배해 이를 6대에 걸쳐 검토를 거친 결과 그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품종을 선별해 낸 결과, 1970년대초 통일벼 계통의 신품종 육성에 성공하여 미곡증산의 커다란 실적을 올렸다.

이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사실 일본에서도 과거 개발하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실패하고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대학교 교수 허문회는 이때 일본에서 나온 논문들을 구해다가 읽어보고 연구한 끝에 IR667[8]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다.

통일벼의 개발은 학문적으로도 세계 육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본 농학자들이 1920년대에 벼를 인디카 자포니카라는 2갈래로 분류한 이래, 두 아종(亞種)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은 농학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IRRI에서 개발한 키 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을 대한민국에 도입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허문회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우선 교배한 뒤 그것을 다시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안정된 품종을 만드는 전략을 시도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해 얻은 종자는 마치 노새와 같이 씨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중 일부 불임이 아닌 종자를 다시 인디카와 교배하여 번식력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66년 봄에는 IRRI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 허문회가 IRRI에서 난쟁이 자포니카를 교배하고자 했을 때에도 연구소의 일본인 동료들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문회는 포기하지 않고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교배 조합을 시험한 결과 전 세계의 벼 육종가들이 경악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렇게 수백 가지의 교배 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줄기의 길이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의 유전 연구에 이정표를 세웠다. 어떻게든 생산량 좋은 쌀을 만들고자 했던 열정이 여러 의외의 성과들을 많이 발굴해낸 것.

농촌진흥청장에 취임한 김인환은 허문회가 개발한 품종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1970년 말에는 유망 개체들이 엄선되어 통일이라는 품종명을 받고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부터 전국의 농가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신품종 재배를 촉진시키기 위해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쌀을 수매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통일벼는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들과 비교할 때 평균 30% 이상 높은 수확량을 올려 당국자들을 들뜨게 했다. 특히, 박정희는 '통일벼가 찰기가 없어 인기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무기명으로 이루어진 국무위원 시식회에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적고 맛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서둘러 보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통일벼는 1973년부터 재배 면적을 급속도로 늘려 나갔다.

1970년대 중반에는 통일벼는 물론 통일벼를 바탕으로 그 형질을 개량한 후계 품종들이 여럿 선을 보였다. 밥맛을 개선한 품종인 “유신”[9]을 비롯해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밀양23호”[10] 등이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 맞춰 개발되어 1977년 무렵이면 전국 의 대부분이 통일형 품종으로 채워지기에 이르렀다. 1977년에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통일벼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던 이유 중에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경제 성장 경쟁에서도 승리했던 것도 있었다. 1970년대 김일성은 자신을 '농업의 최고사령관'이라 자칭하며 '농업대'를 창시하는 등 품종 개발에 매진했고, 북한 인민들에게 "쌀이 곧 공산주의"라며 "매끼니 밥상에 이밥에 고깃국을 올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에 세계의 여러 품종을 밀반입해 북한의 고급인력을 투입해 연구하였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고,[11] 옥수수로 벼를 대신해보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시험 재배의 연구 결과는 좋았으나, 집단농장의 특성상 수확물을 농부 개인이 가질 수 없다는 체제의 한계 때문에 실패를 거듭했다'는 회고도 있다. #

3. 문제점

이렇게 만들어진 통일미는 모양새와 성질은 친숙한 모습이지만 생산량은 당시 '녹색혁명'을 주도했던 종이 교배된 만큼 상당히 높았다. 실제로 지금껏 재배하던 쌀을 모두 통일미로 바꾸니 생산량은 무려 40%나 늘어났기에, 전후 대한민국의 식량난을 해결해준 고마운 품종이었다.

하지만 인디카종(이른바 안남미)의 특성이 섞여 있는 탓에 미질(米質)에 문제가 있었다. 바로 맛이 거의 인디카종이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주로 즐겨먹는 자포니카종의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흔한 일반미 아키바레(秋晴, 추청벼)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 나서 당시 농촌에서는 “ 보리밥 맛이 통일쌀보다 낫다.” 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통일벼의 인기는 저조했다.[12][13]

그래서 농민들은 통일벼의 도입 당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농민들의 통일벼 외면에는 이런 점 외에도 여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 전국으로 확대 보급한 통일벼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에서는 심각한 실패를 기록한 데다, 오랫동안 속고만 살아온 농민들이 정부 정책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원래 새 품종을 보급하기까지에는 최소한 8세대(8년)를 지켜보고 이후 15년까지 결점을 보완하는 연구가 필요한데 통일벼는 이와 같은 충분한 사전 검토와 적응력 검토가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맛뿐만 아니라 통일벼가 지닌 단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통일벼는 아무리 한국 온대기후에서 클 수 있게 개량했다지만 여전히 냉해에 약한 편이라 물못자리가 아니라 비닐터널이 필요해 자재비가 그만큼 상승했고, 생육기간이 긴 만생종인 특성상 일찍 심어야 하기 때문에 보리 이모작도 거의 불가능했으며,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서 당시 농민 기준으로 농한기의 부수입원이었던 가마니 새끼줄을 꼴 수도 없었다. 이는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 리 씨'에도 나와 있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농촌 지도소 강사들이 그들에게 백일기도를 드린다 해도 신품종으로 바꿀 사람은 대농 몇 사람에 불과하리라고 그는 믿었다.
리가 알기에도 그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관리자들에게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속아 살아왔으므로, 이제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 거였다. 낮은 정치, 높은 행정, 도시 경제가 속이고, 심지어는 가장 정직해야 할 학교 교육마저도 그들을 속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모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시세가 수시로 변하는 쌀을 얻어 썼으므로, 갚을 때에도 현물로 갚아야만 유리한 거였다. 얻어 쓴 쌀은 계 쌀과 마찬가지로 진작 품질 좋기로 이름난 아키바레 쌀이었다. 따라서 같은 품질의 쌀로 갚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농민들이 통일 계통의 벼를 꺼리는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면역성이 약해 병충해가 빈발하는 것도 큰 흠이었지만,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 가마니나 새끼를 꼬지 못하므로 고공품 생산에 의한 농한기의 유일한 부수입이 없어지던 것이다.
소가 싫어하니 여물로도 쓸 수 없고, 천상 군불 때어 재나 받든가 그냥 퇴비감으로 쌓아두고 썩히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녹색혁명 유전자라 불리는 'sd1 유전자'는 키를 작게 만들며 분얼의 수를 증가시켜 함께 이삭의 수를 증가시켰다. sd1 유전자를 벼 육종에 이용하기 전까지 재배하던 벼 품종들은 큰 단점이 있었다. 생산량의 증가를 위해 비료를 주면 줄기가 과도하게 길어져 이삭이 익어감과 동시에 쓰러져 버리거나, 약한 태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논바닥에 쳐박혀 버리는 것이었다. [14] 통일벼가 당시 품종들에 비해 3~40% 이상의 수확량 증가를 달성한 것은 sd1이 유도하는 단간[15] 특성이 크게 작용을 했다. 키가 작으니 당연히 줄기도 짧아서, 짚풀로 생필품을 만들던 당시에는 적지 않은 단점이었다.

실제로 1971년 벼가 붉게 말라 죽는 적고 현상, 1972년 한해, 수해, 냉해, 1974년 벼의 줄기와 잎이 갑자기 말라 죽는 입고병과 냉해, 1975년은 잎이 시들어 말라 죽는 급성 위조병과 벼멸구 창궐등 매년 닥쳐오는 재해 앞에서 통일벼 불가론이 제기 되었고 농림부에서조차 일관되게 통일벼 재배를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4. 정부 정책

결국 아직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일차적 목표는 맛이 없더라도 충분히 먹이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질보다 양, 오로지 증산이 우선순위였던 박정희 정부에게 '미질'과 '농민들의 고충'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통일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갈등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래도 초기엔 각종 홍보와 선전으로 통일벼 키우기를 장려했지만, 통일벼 자체가 가진 문제로 큰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농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작전상황실까지 마련해 놓고 이른바 '통일벼 행정'을 실시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졌고, 각 마을 회관에는 증산 목표량이 큼지막하게 나붙었다. 심지어 책임생산제를 시행해, 마을 회관 벽에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린 벽보가 붙여지기까지 했다.[16]

1973년부터는 다수확농가에 대한 시상이 실시되어, 쌀의 계약증산제도를 시행해 목표를 달성한 마을에 대해서는 30만 원부터 1백만 원까지[17] 시상금을 주는 등 상금을 걸고 군과 면에서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통일벼 행정도 강화하여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해 들판에서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논쟁과 몸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면장이 직접 모판을 갈아엎거나, 볍씨 담근 통에 약을 쳐서 싹이 안 나게 하거나 이미 심어놓은 다른 벼를 뽑아버리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소설가 이문구의 작품 관촌수필에도 묘사가 나오며, 당대 농업에 종사했거나 관련된 사람들의 입에서 통일벼는 거의 무조건 나오는 편이다. 당시 상황은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농업 자체가 국가 주요산업이다 보니 농진청직원이 방문하면 이장부터 군수까지 다나와 인사하고 쌀 증산표를 보여주면서 굽신굽신했다고 하며, 공무원이 농민과 드잡이는 기본이고 주먹질까지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담배와 함께 갑질이 유명했던 것이 통일벼다.

이 때문에 재래종 볍씨가 담긴 독을 안방에 앉히고 볍씨를 틔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심지어 담당 공무원들이 강력한 상부지시를 따르기 위해 재배면적확보에 집착하다 보니 신품종 종자를 외상으로 공급해 수확기에 풍작을 이루지 못한 경우 종자대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는 등 통일벼 보급을 둘러싸고 심한 홍역을 앓았다.

이런 행정의 기억 때문에, 정부미[18]는 맛없다, 정부에서 보급하는 종자는 맛없는 품종이다, 맛있는 건 경기도에 보급하고 영호남에는 맛없는 걸 보급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에서 종자를 직접 들여다 자기 논에 파종하는 농민들이 있었다. 후자에 대해서 농진청은 억울해했는데, 외국 품종을 들여오더라도 가장 먼저 수원의 시험장에서 재배하면서 대한민국 환경에 맞게 개량해 종자를 양산해야 했고, 그런 다음에 남부지방의 기후에 맞게 개량한 품종을 해당 지역에서 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 문단이 사실 그대로라고 하면,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영호남 농민들이 불평하는것도 당연한 일이다. 전라도, 경상도만 합해도 전체 쌀 생산량의 50%가 넘으며 # 충청남도까지 포함하면 77%를 넘는다. 그런데 굳이 중부지방에 맞게 종자를 개량하느라 시일을 날려야 할 이유가 없고, 일본에서 잘 짓고 있는 쌀 품종 받아다 쓰면 남부지방일수록 기후가 적합하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수확이 가능하니까, 굳이 우선적으로 중부지방에 맞게 종자를 개량할 명분이 없다. 이 문제는 아마 농촌진흥청의 수원시험장이 일제강점기 설립된 이래 내려온 관성으로 추정된다. 2014년 농촌진흥청은 수원을 떠나 전주로 이전했으므로, 이것도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5. 결과

급속도로 이루어진 정부의 정책 때문에 농촌에선 심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통일벼는 대한민국의 국토에 적합했고 결과적으로 전국토에 심었기 때문에 증산에는 대성공했다. 통일계 품종벼는 단위 면적당 쌀 수량성에서 다른 품종을 압도했고,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던 자포니카 계통의 '진흥'에 비해 30% 이상 많았다.

1974년 쌀 생산 3,000만 석을 돌파하고 1976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급에 성공했다. 수확량은 3,621만 석이었다.[19] 자급 달성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박정희 대통령은 이 해 11월 쌀 소비 억제 정책의 일환이었던 혼분식 장려 운동의 키워드와 다름 없었던 '무미일'을 폐지했다. 1970년 초반 300kg에 머물렀던 10a당 벼 평균 수량이 1976년에는 10a당 433kg에 이르렀고, 이후로도 풍년은 계속돼 1977년엔 10a당 벼 평균 수량이 500kg에 육박하며 쌀 생산량이 4천만 석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는 종전의 세계 최고 기록인 일본의 447kg 보다 47kg이나 더 많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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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은 이 해 12월 4천만 석 돌파 기념탑을 세웠고, 농촌진흥청을 방문해서는 쌀 자급 달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박정희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쌀 수확량이 치솟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인도네시아에 쌀 7만톤을 대여해 주었고,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 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다.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 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보릿고개 혼분식 장려 운동, 무미일,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해 놓고, 가장 먼저 그동안 한이 맺혀 있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데 소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맛을 따질 겨를도 없이 뭐든 먹어야 하는 시대였기에 통일미는 꾸준하게 재배되었다.

6. 쇠퇴

그러나 성공을 거듭하던 통일벼에게도 벼 품종으로서의 생명력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도열병에 속수무책이었던 '노풍벼' 사태가 발생했다. 도열병은 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병으로, 통일벼가 등장하기 전에도 한반도에서 이미 존재하던 병이었다. 통일벼는 기존의 한반도 재배 벼와 품종이 달라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도열병에 대해 비교적 강한 저항력을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도열병 균주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통일벼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1978년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도열병에 걸리면, 해당 논의 벼는 모두 생장이 저하되고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들며 품질이 떨어진다. 또한, 병은 바람, 물, 농기구 등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에, 한 지역 내 다른 논으로 쉽게 전파된다. 그러나 도열병은 특정 품종에만 영향을 미치는 특성이 있어, 다른 유전자 구조를 가진 품종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당시 통일벼가 이 논에도 통일벼, 저 논에도 통일벼, 옆 마을에도 통일벼, 전 국토에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이 빠르게 퍼지면서 많은 지역에서 동시에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주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정부는 이후 수십 가지의 품종을 지역별로 적당히 나누어 심도록 계도한다. 한 품종이 망하더라도 나머지 품종들은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여 나라 전체의 농사가 망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979년에는 호우와 홍수 및 태풍의 피해를 입었고, 앞서 문제점에서 언급하다시피 통일벼는 냉해에 상당히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1980년 최악의 냉해[20]로 통일벼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980년은 쌀 생산량이 30% 감소한 역대 최악의 흉년이었다.[21] 결국 1981년 통일벼 강제 정책이 폐기되었고 식량난이 대강 해결된 1980년대 후반때가 되자 맛이 없어서 통일미는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이에따라 벼 품종 개량의 우선순위도 다수확보다는 품질 향상으로 차츰 바뀌게 되었고, 개량된 자포니카 양질 품종인 '동진벼', '화성벼' 등의 39개 품종이 개발 및 보급되었다.

또한, 쌀 농사는 1977년 풍년 이후 1980년에는 냉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어 쌀이 남아돌자 쌀 증산이 아닌 감산 요구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을 끝으로 통일미의 정부 수매도 종료되었다. 통일벼 강제정책이 폐기되자 통일벼는 1984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통일계 품종 연구도 10a당 수확량이 605kg을 기록한 '용주'를 끝으로 연구가 중단돼 1992년 대한민국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 재배되지 않고 있다. 대신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 같은 곳에서 '서산벼' 등의 이름으로 종자를 따로 보관은 하고있다.

식량안보목적의 다수확 품종 자체의 연구는 통일벼를 심지 않게 된 뒤로도 계속됐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주식에서 쌀 비율이 줄어들면서, 쌀 자급은 했는데 식량수입 의존도가 오히려 올라가게 된다. 2000년대부터 태국 요리, 베트남 요리 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인디카쌀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지만, 어차피 의무수입 물량으로 커버 가능한 정도고 통일벼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이 목적으로 통일벼를 찾지는 않는다.

7. 아프리카에서의 부활


대한민국에서 맛도 좋으면서 생산량도 많은 품종이 속속 개발되면서 통일벼는 그 설 자리를 완전히 잃었는데 최근 아프리카의 공적개발원조, 즉 ODA 대상이 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마다가스카르 혁명으로 잃어버린 민심을 달래기 위해 2012년에 포스코의 지원으로 마다가스카르에 시험 재배를 했는데, 생산량이 기존에 쓰던 종자보다 더 많고, 통일미의 단점인 냉해가 존재할 수 없는 따뜻한 기후, 인디카 계통이 그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등[22] 생각보다 성과가 좋아 시험 재배 이후 종자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이 이후 농촌진흥청에서 '한-아프리카 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KAFACI, Korea-Africa Food and Agriculture Cooperation Initiative)[23]를 구성해 말라위, 말리 등에도 통일벼를 개량한 3개 품종이 등록되고 아프리카에도 국가품종시험 대상으로 확산되는 중. #
통일미는 냉해에 약하고 인디카 종의 특징인 '찰기 없고 특유의 향'이 나서 대한민국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냉해 걱정이 없고(오히려 가뭄과 고열이 문제다.) 인디카 품종 쌀을 선호하기 때문에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장점인 생산량만 유지되어 아프리카 고유종보다 2~4배 더 생산되고 가뭄과 병충해에도 강해서 주목받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K-라이스벨트 사업이라고 부르는데 가나, 감비아, 기니, 세네갈, 우간다, 카메룬, 케냐, 기니비사우 등 8개국[24]에 통일미를 아프리카 현지에 맞게 다시 개량한 ISRIZ-6, ISRIZ-7 등의 종자와 농기계, 비료, 농약, 저장시설, 관개시설 등을 지원하고 관리인을 파견하여 농법도 가르친다. 이미 2024년 3월부터 6개국이 시범 사업에 들어갔으며 시범 사업 과정에서 현지 품종, 농법보다 2~4배 더 많은 수확량을 거뒀다. #1, #2

이 나라들은 사업 참여에 매우 적극적인 편이다. 주식이 쌀이라 예전의 한국처럼 1인당 쌀 소비량 75kg가량으로 상당히 높으나 자급률은 55% 정도로 나머지 45%는 수입에 의존한다. 그런데 최근 세계 쌀 가격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쌀 수입 물가가 비싸지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의 재정 부담은 심화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 나라들은 대부분 1년에 2,3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토질과 기후는 좋은 데 농법[25], 종자[26], 관개시설이 문제되어 1년에 1모작도 겨우 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나서서 종합적으로 정리해 준다고 하니 적극적이게 될 수 밖에 없다.[27]

참고로 위와 같은 사업은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변모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기여하고 특히 심각한 아프리카의 식량 문제 해결에 일조하는 것' #이 목적이지만 대한민국 중소기업들이 해당 국가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수출에도 도움이 되는 사업이다. 사업이 완료되고 난 뒤 이미 수 년 간 한국산 종자와 농법에 맞춰서 한국산 비료, 농약, 농기계를 쓰던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비료, 농약, 농기계를 들여오기보다는 기존에 쓰던 한국산을 쓰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공식 사업 계획도 장기적으로 한국산 중고 농기계를 수출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8. 여담

9. 관련 문서


[1] 전 중앙종묘(주) 대표이사 사장 [2]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교수 [3] 몇 년~10여 년 후에 독립하게 되는 식민지 경제를 개별국으로 따로 나누었다면 100위를 한참 넘었을 것이다. [4] 이집트에서도 쌀을 먹는다. 쿠샤리 참조. [5] 사실 중정만 이랬던 것이 아니고 세계 각국 정보기관들은 이런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의 모사드고(이쪽은 종자 빼돌리기보다는 주로 기술을 유출시킨다.), 북한 노동당 3X호실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사실 이런 식으로 좋은 벼 종자를 대량재배하여 수확량을 늘리려는 정부 차원의 정책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문종 때 이징석이 50일 만에 수확이 가능한 벼를 보고하며, 백성들이 잘 쓰지 않아 종자가 적으니 나라 차원에서 보급에 나서자는 주장을 했고 문종도 이를 받아들였다. 세조 때에는 노삼이라는 사람이 당도종이라는 품종을 중국에서 들여와 세조에게 바쳤는데 이는 바닷가 근처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품종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 뒤 얘기는 없으므로 통일벼처럼 실패한 모양이다. [7] 이집트산이라고 꼭 인디카는 아니다. [8] 국제미작연구소의 667번째 개발품종이라는 의미, 정식 이름은 IRR667-98-1-2 [9] 기존 통일벼보다 수확량이 13%나 많고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이모작이 가능한 품종이었다. [10] 밀양23호는 훗날 아프리카 세네갈에 도입되어 '이스리(ISRIZ)-6'가 된다. [11] 당연히 통일미도 밀반입되어 시험 재배되었고, 아래 문제점 문단에 언급된 냉해에 약하다는 점 때문에 북한에서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12] 품질 자체가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한국인들이 먹어오던 자포니카 쌀의 맛과는 상당히 달라서 이질적이었을 뿐이다. 볶음밥이나 카레밥에는 통일미의 맛이 매우 잘 어울리는 편이다. 즉 한국인의 밥 취식 방식이나 식습관에 낯설고 맞지 않았을 뿐이다. [13]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꾸준히 재배되던 재래벼들을 대신해 일본벼들을 도입하기 이전까지 한반도 벼는 인디카형, 열대자포니카형, 온대자포니카형, 심지어는 인도의 향미 바스마티와 같은 아로마틱형까지 다양했다. # 마디로, 아프리카벼 빼고 다 도입을 해 본 것. 다만, 한국 전통 쌀 조리법이 전부 자포니카 기준이었고 인디카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보면 그 당시에도 대다수의 벼 품종은 자포니카였을 것이다. [14] sd1 유전자를 품종 육성에 도입하기 이전에는 장마가 지나가면 사람이 논을 돌아다니며 쓰러진 벼들을 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15] 短稈, 짧은 볏짚 [16] 박정희 시기 성공한 정책들은 절대다수가 보통의 시장경제의 발상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이런 정책들의 원조는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 소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고, 이걸 만주국 만철조사부에 소속된 공산주의-사회주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만주국에 맞게 최적화해서 만주국의 공업화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런 통제경제체제는 전후 한국 일본의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7] 참고로 1973년 기준으로 30만 원 정도면 직급이나 지역, 직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년치 봉급 되는 금액이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통계청 화폐가치 계산기 홈페이지 기준으로 1973년 30만~100만 원을 2024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58만 원에서 1,860만 원까지다. [18] 정부미란 단어가 초기에는 통일미를 뜻했다. [19] 쌀은 1석에 144kg이며, 톤으로 환산하면 521만 4천톤으로 2024년 쌀 생산량인 358만 5천톤에 비해 1.45배 이상의 결과 # [20] 그리고 이 냉해는 3년간이나 이어졌다. [21] 어느 정도였냐면 대한민국이 농림부를 세운 1949년 이후 지금까지도 이정도의 생산량이 한꺼번에 감소한 해는 없었다. [22] 마다가스카르의 주 민족은 가까운 아프리카계 민족들이 아닌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을 건너 도래한 민족들이다. 사실, 마다가스카르만 이런 게 아니라 아프리카의 적지 않은 수가 인디카나 아프리카쌀을 주로 먹는고 세계적으로도 쌀은 인디카가 주류다.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주로 소비되는 자포니카가 오히려 마이너한 것. [23] KAFACI 회원국 : 대한민국, 앙골라,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가나, 가봉, 케냐, 말라위, 모로코, 나이지리아, 세네갈, 수단, 튀니지, 우간다, 짐바브웨, 코모로, 르완다, 잠비아 = 도합 20개국(대한민국 + 아프리카 19개국). 가입 가능한 국가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창립국으로서 가입. [24] 추가로 2개국이 MOU 협약 단계에 있다. [25] 논이 아니라 밭에 직접 씨를 뿌리는 직파법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26] 전술했듯 개량이 부족해서 생산량이 적다 [27] 1960년대 대한민국에 해외 선진국에서 신동진쌀도 개발해주고 비료, 농기계도 지원해주고 심지어 관개시설도 지어준다고 생각해보자. 당연히 적극적이게 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그 쌀이 입맛에 맞다. [28] 비단 농업 정책만이 아니라 비날론, 류경호텔 등 같은 시기에 내놓은 실패한 정책들은 전부 적당히 했으면 대박은 아니어도 쪽박은 안 차는 소소한 성공이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최고 지도자의 억지 때문에 대실패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일맥상통한다. [29] 실제로 이 목적으로 간첩을 보냈다가 붙잡힌 것이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 통일미는 한때 전국에 쫙 깔렸던 데다가, 농촌 지역에서 상당 기간 애물단지 취급되다 보니 종자를 훔쳐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남한보다 위도가 더 높아서 평균적으로 더 춥기 때문에, 통일미의 단점인 냉해에 약하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하여 기르기 힘들었다고 추정된다. [30] 비교적 최근인 2021년 5월에 노환으로 사망하고 현지에서 대대적으로 언론을 타면서 한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31] 사실 1970~80년대에도 적당히 돈 좀 있다던 사람들이나 칼로스를 사다 먹었지, 진짜 부유층들은 아키바레(추청)만 찾아먹거나, 일본에서 알음알음 들여온 고시히카리 혹은 그에 뒤지지 않던 사사니시키 쌀만 찾아 먹었다. 결국 한국인의 입맛에는 이래저래 단립종이 맞는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