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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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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 1세 칼만 이슈트반 2세 벨러 2세
게저 2세 이슈트반 3세 라슬로 2세 이슈트반 4세
이슈트반 3세 벨러 3세 임레 라슬로 3세
언드라시 2세 벨러 4세 이슈트반 5세 라슬로 4세
아르파드 왕조 프르셰미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앙주 왕조
언드라시 3세 벤첼 오토 1세·벨러 5세 카로이 1세
앙주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
러요시 1세 마리어 1세 카로이 2세 지그몬드
합스부르크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후녀디 왕조
얼베르트 울라슬로 1세 라슬로 5세 마차시 1세
야기에우워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울라슬로 2세 러요시 2세 페르디난드 1세 믹셔
합스부르크 왕조
루돌프 1세 마차시 2세 페르디난드 2세 페르디난드 3세
페르디난드 4세 리포트 1세 요제프 1세 카로이 3세
합스부르크 왕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마리어 2세 요제프 2세 리포트 2세 페렌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페르디난드 5세 페렌츠 요제프 1세 카로이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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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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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0년 8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 쇤브룬 궁전
사망 1916년 11월 21일 (향년 86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쇤브룬 궁전
재위기간 오스트리아 황제
1848년 12월 2일 ~ 1867년 5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1867년 5월 29일 ~ 1916년 11월 21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1848년 12월 2일 ~ 1866년 10월 12일
독일 연방 의장
1850년 5월 1일 ~ 1866년 8월 24일
서명 파일:프란츠 요제프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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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751><colcolor=#fff> 가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이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
(Franz Joseph Karl)
아버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어머니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형제자매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안나, 루트비히 빅토어
배우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1854년 결혼 / 1898년 사망)
자녀 장녀 조피, 차녀 기젤라, 장남 루돌프, 삼녀 마리 발레리
종교 가톨릭
신체 키 171cm[1] }}}}}}}}}
파일:카이저의초상.jpg
공식 어진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칭호4. 생애
4.1. 즉위 배경4.2. 재위 초기4.3. 재위 초반의 외교적 실책과 고립4.4. 이중제국 성립4.5. 외교 관계 회복4.6. 7월 위기 제1차 세계 대전4.7. 사망
5. 평가
5.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5.2. 정치의 전반적 스타일5.3. 군사적 평가와 내부 문제5.4. 경제적 평가5.5. 외교적 평가5.6. 가족과 후계자들에 대한 평가5.7. 총평
6. 가족 관계
6.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6.2. 가계도
6.2.1. 조상6.2.2. 자녀
7. 애첩
7.1. 카타리나 슈라트
8. 최측근9. 대중매체10. 기타11. 관련 항목

[clearfix]

1. 개요

Viribus Unitis[단결] Virtutis Confido[미덕]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3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

1866년 호엔촐레른 왕가에 주도권을 뺏길 때까지 범독일권 군주국들의 수장 격인 독일 연방 의장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범독일권의 수장을 역임한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2세의 친 손자이자 바이에른 왕국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자, 프랑스 제국 나폴레옹 2세, 포르투갈 왕국 마리아 2세,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2세와 그 동생인 오톤, 스웨덴의 왕비 요세피나, 작센의 국왕 알베르트 게오르크와 모두 사촌간이다.[4]

2. 언어별 표기

독일어 Franz Joseph I. (프란츠 요제프 1세)
헝가리어 I. Ferenc József (페렌츠 요제프 1세)
체코어 František Josef I. (프란티셰크 요제프 1세)
슬로바키아어 František Jozef I. (프란티셰크 요제프 1세)
폴란드어 Franciszek Józef I (프란치셰크 유제프 1세)
우크라이나어 Франц Йосиф I (프란츠 요시프 1세)
루마니아어 Francisc Iosif I (프란치스크 이오시프 1세)
세르비아어 Франц Јозеф I (프란츠 요제프 1세)
크로아티아어 Franjo Josip I. (프라뇨 요시프 1세)
슬로베니아어 Franc Jožef I. (프란츠 요제프 1세)
이탈리아어 Francesco Giuseppe I (프란체스코 주세페 1세)

3. 칭호

<colbgcolor=#FFF><colcolor=#000> 파일:프란츠 요제프 1세의 문장.svg
문장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달마티아의 왕,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왕,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왕,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의 대공, 로트링겐의 공작, 잘츠부르크의 공작,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 케른텐의 공작, 카르니올라의 공작, 부코비나의 공작, 지벤뷔어겐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의 공작,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오시비엥침, 자토르 테셴,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 티롤의 후백작, 키부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의 후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라우지츠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트, 코토르, 빈트마쉬의 영주, 독일 연방의 의장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

Sein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apostolische Majestät, Franz Joseph I., durch die Gnade Gottes Kaiser von Österreich, König von Ungarn, Böhmen, König von Lombardei und Venedig, vo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und Illyrien; König von Jerusalem usw., Erzherzog von Österreich; Großherzog der Toskana und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von Salzburg, der Steiermark, Kärnten, Krain und der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schlesien und Niederschlesien, von Modena, Parma, Piacenza und Guastalla, von Auschwitz, Zator und Teschen, Friaul, Dubrovnik und Zadar ;. Fürstlicher Graf von Habsburg und Tirol, von Kyburg, Görz und Gradisca; Prinz von Trient und Brixen; Markgraf der Ober- und Niederlausitz sowie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usw .; Herr von Triest, von Kotor und über den Windmarsch; Präsident des Deutschen Bundes.

이후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롬바르디아를 잃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베네치아까지 잃으며 독일 연방에서 쫓겨난 뒤 1867년 대타협으로 이중제국 창설을 통해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사도왕,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지벤뷔어겐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오시비엥침, 자토르 테셴, 프리울리, 라구사 및 차라의 공작, 합스부르크 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라우지츠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트, 코토르, 빈트마쉬의 영주, 세르비아의 군주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

Sein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apostolische Majestät Franz Joseph I. durch die Gnade Gottes, des Kaisers von Österreich; Apostolischer König von Ungarn, König von Böhme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Illyrien; König von Jerusalem usw .; Erzherzog von Österreich; Großherzog der Toskana,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Salzburg, Steiermark, Kärnten, Krain,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schlesien und Niederschlesien, Modena, Parma, Piacenza, Guastalla, Oswiecin, Zator, Cieszyn, Friaul, Ragusa, Zara; Fürstlicher Graf von Habsburg, Tirol, Kyburg, Görz, Gradisca; Prinz von Trient, Brixen; Markgraf der Ober- und Niederlausitz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usw .; Herr von Triest, von Kotor und über den Windmarsch; Großer Woiwode der Woiwodschaft Serbien usw. usw.

4. 생애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아버지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은 황제.

4.1. 즉위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z_Joseph_of_Austria_young.jpg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인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었고 정신적 성불구자[5]였기 때문에 바로 아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과 그의 장남 프란츠 요제프가 이미 일찌감치 추정상속자로 취급받았고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이 장남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문제가 되는 점은 이 때 프란츠 요제프에 가르쳤던 제왕학이라는 것이 마치 자유주의가 신의 질서를 쳐부수는 악의 축이라는 식의 철저한 왕권신수설적인 교육이었다는 점인데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 왕정이 당연하던 시절이면 몰라도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이 점차 입헌군주화 되어가는 19세기 중반에 이런 제왕학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1848년 전 유럽을 뒤흔든 1848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3월 혁명으로 크나큰 진통을 맛보았는데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와 수상인 메테르니히는 강경 진압을 요구했으나 상황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고 결국 메테르니히는 제국 의회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책임을 지고 수상직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가야 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실과 제국 정부가 혁명 세력의 요구 중 수용할만한 조건들은 협상을 통해 수용한다고 했으나 시위대가 차마 다 해산하지도 않았는데 제국 정부는 수용한다던 조건들을 잘 지키지 않거나 지키더라도 아주 소극적이고 느릿하게 지키는 탓에 같은 해 8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헝가리에서도 코슈트 러요시를 지도자로 삼은 헝가리인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헝가리의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군 후사르 기병대를 앞세운 독립군에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니콜라이 1세 러시아 제국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다.

결국 2차 혁명까지 촉발시키게 만든 책임으로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으나 이미 1차 혁명 때 메테르니히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바 있었던지라 비록 정신질환으로 인해 실권 없는 허수아비 군주이긴 했어도 어쨋든 명목상 국가원수였기 때문에 2차 혁명에서는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가 책임지고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48년 혁명으로 인해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자 본래 순서대로라면 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이 제위 계승 순위에 따라 황제로 즉위해야 했다. 그러나 프란츠 카를 대공도 페르디난트 1세와 달리 가임능력에만 문제가 없었을 뿐 페르디난트 1세와 마찬가지로 정신지체 증상이 형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심한 것은 똑같았다. 마리아 안나 황후 조피 대공비는 이 점을 문제 삼아 장남에게 제위를 양보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프란츠 카를 대공이 수락하면서 장남이 불과 18세의 나이에 1848년 12월 2일 프란츠 요제프란 이름으로 즉위했다.

4.2. 재위 초기

1850년, 러시아 제국이 팍팍 밀어준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과 담판을 지어 올뮈츠 협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인, 한창 국력과 영토와 기술력 등에서 폭풍적인 성장을 보여 기세등등하던 프로이센에 일대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지 검열과 경찰국가 체제를 동원한 강력한 신(新) 절대주의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문제는 이게 이 시절 기준으로도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발상이었다는 점이다. 이게 왜 뒤떨어진 발상이냐면 과거 프랑스에서 샤를 10세가 이런 짓을 했다가 프란츠 요제프가 태어난 해인 1830년 7월 혁명으로 인해 퇴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주의 통치 와중인 1853년에는 헝가리인 독립운동가가 황제 암살을 시도해 길을 걷던 황제를 덮쳐 칼로 찔렀다. 위병들이 빨리 달려왔기에 살았지만, 자칫했으면 아들이 그대로 사망할 뻔한 것[6]에 충격을 받아 빨리 후손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계략으로 이듬해인 1854년 이종사촌 누이인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 가문 엘리자베트(애칭 시시)와 결혼했다. 원래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애칭 네네)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네와의 첫 선을 보는 자리에서 헬레네 옆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뿅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도록 했다. 이 결혼이 엘리자베트와 프란츠 요재프 모두에게 비극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7]

4.3. 재위 초반의 외교적 실책과 고립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은 황제가 수행할 중요 지상과제로 외교와 국방을 고려해 1860년 준입헌군주제,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과 동시에 완전한 입헌군주제가 된 상태에서도 입헌군주로서 개입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설 정도로 외교 문제에 많이 간섭했다.

하지만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일어났던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영국과 프랑스 제2제국의 개입으로 반환한 도나우 공국[8]을 점령하며 러시아에게 빅엿을 먹였다. 이 행동은 1848년 헝가리 혁명 때 약 16만의 대군을 보내 혁명을 진압하도록 도와준 러시아 제국에 대한 배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분노했고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1세가 죽을 때 임종과 장례식에 그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얌체짓에 영국과 프랑스까지 등을 돌려 크림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당했다. 그야말로 가치가 하나 없는 희대의 병크였던 셈이다. 프로이센과는 올뮈츠 협약으로 냉전에 들어갔고, 이탈리아 반도는 원래부터 반(反) 오스트리아 지역이였던지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비스마르크 주도 하에 3제동맹을 체결하여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어느 정도 외교관계가 회복되기 전까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1859년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군비를 증강해 도발해오자 재상 카밀로 카보우르가 원하던 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때려버리는 대실수를 했다. 그 결과 마젠타 전투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했고[9] 1866년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패배해 베네토 지역까지 상실하며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해(1866) 통일 독일 문제의 주도권 쟁탈전이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7주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배제당했다. 이 때 빌헬름 1세 헬무트 폰 몰트케 등 프로이센 장군들은 오스트리아 땅을 갈라먹기를 원했지만[10] 프랑스 하나만 왕따시키고 나머지 전 유럽을 반불 감정을 중심으로 화합시키려던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이를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위기를 모면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영토[11]를 그나마 보전할 수 있었다.[12]

4.4. 이중제국 성립

1866년의 잇따른 실패로 말미암아 1867년, 헝가리인과 타협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연방 구성국이던 헝가리 왕국을 별도의 내각과 별도의 의회를 갖춘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위치로 승격시킨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제국을 개편했다.[13] 하지만 대타협 이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제적 통치로 일관하며 이 체제까지만 인정하고 이 이상의 개혁을 전면 거부했다.

1867년 이중제국 체제의 선택은 헝가리인들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업적이지만 그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이 헝가리인들에 그랬던 것처럼 자국 치하의 타민족과 소수민족들, 특히 슬로바키아인을 탄압했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마냥 긍정적인 업적으로만 보기 힘들며 다민족 제국을 표방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임에도 황제 자신도 인정할 정도로 제국 차원에서 대놓고 슬라브족에 대한 차별 정책을 자행했고 러시아 제국과 다시 대립하게 만든 발칸 반도로의 동진 정책 등이 공교롭게도 그의 사후, 제국 해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과실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4.5. 외교 관계 회복

그러나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장관이자 성 이슈트반 왕관령 초대 총리 언드라시 줄러의 활약으로, 앞서 말했듯이 악연이 있던 러시아에게는 그 바로 밑에 있던 보스니아를 병합함으로서 다시 한번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고, 7주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던 독일 제국과 강력한 동맹[14]을 맺는 성공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세속 군주로서 콘클라베에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였다. 교황 레오 13세 선종 후 열린 1903년 콘클라베에서 전임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인 마리아노 람폴라(1843~1913) 추기경의 선출이 유력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라쿠프 대구장 얀 푸치나(1842~1911) 추기경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결국 그 해에 선출된 교황은 보수 성향의 비오 10세였다. 비오 10세는 프란츠 요제프의 지지로 선출되었으나 교황 선출을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자일 뿐인 세속 군주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봤는지[15] 선출 다음해인 1904년, 세속 군주의 거부권을 박탈해 추기경이 아닌 인물의 간섭을 차단했다. 그리고 교황 자리를 놓친 람폴라 추기경에게는 배려 차원에서 성무회의 의장직을 제수했다.

재위 초반에 보여준 외교적 실책을 감안하면 재위 중반부에 보여준 이러한 외교적 성과 또한 황제 자신의 능력이라 보기는 어렵고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를 왕따시키고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이 화합하기를 바랬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던 빌헬름 1세와 주변국들의 군주들을 설득한 덕에 재위 초반에 프란츠 요제프가 외교적 실책을 저질렀음에도 중반기에 상당수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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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와 악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왼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빌헬름 황태손[16],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조카손자 카를 1세, 조카증손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4.6. 7월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조카가 살해당하자, 이를 핑계로 세르비아를 손보기 위해 군사행동에 나섰다.[17]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발생한 이중제국군의 전쟁 범죄에도 그의 책임이 있다.

다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세르비아랑 전쟁할 생각은 있었지만 세계대전 급으로 전쟁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당대 유럽 모든 나라들의 군주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힌 데다 전쟁을 원하던 측근들에 의해 오해가 계속해서 생성되어 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외무부 장관인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와 육군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가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는 이들을 지지하였다. 각각 정부, 군부, 외교 수반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었기에 황제는 그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황제가 처음에 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쟁이 변화를 가져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제국의 안정을 해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황제의 판단은 옳았고, 제국 내에 소속되어 외교권-국방권이 없는 헝가리 왕국 총리 티서 이슈트반도 전쟁이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했다. 제국 내에서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권력을 동등하게 나눈 상황은 헝가리 인구의 숫자로만 정당화할 수 없는 문제로서 제국의 제도가 정확히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야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슬라브족에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제국에서 삼중제국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국 내부의 슬라브인들이 기여하여 전쟁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삼중제국이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국내에서 슬라브족이 받는 차별을 몸소 경험하고 슬라브족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슬라브족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삼중제국을 여러 차례 제안하기도 한 상태였다.

세르비아에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신중함으로 제어되었다. 그 신중함은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의 침착함과 티서의 당파성에 기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에게 티서와 협의하기 전에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고, 티서는 베르히톨트에게 황제가 시간을 갖고 헝가리가 제기한 반대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독단적으로 신속하게 행동하려는 욕구가 좌절된 베르히톨트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지원한다는 확답을 구함으로써 러시아의 호전적인 전쟁 계획으로 초래된 위기에서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지는 않을까라는 황제의 걱정을 덜어주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독일의 지지를 확인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결국 베르히톨트가 내민 동원명령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고 이는 대전쟁의 마지막 도미노를 무너뜨리게 된다.

4.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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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인 1916년 11월 21일 68년간 제국을 짊어졌던 86살의 노황제는 쇤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에 있는 황실묘지(Kaisergruft)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석관 양옆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와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잠들어 있다.



20세기 초까지 재위하였기에 합스부르크 황제의 장례식 장면이 처음이자 마지막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18]

5. 평가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서 68년 동안 통치를 하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집무를 보거나 종이를 이면지로 쓰는 등 근면성실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아내, 아들, 딸, 동생, 조카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동정론을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암군에 가까운 인물이다.

5.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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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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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감사(Kaisers Dank)》 종군 화가인 루트비히 코흐의 1915년 작품이다. 제국의 신민들과 군인들이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우러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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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가족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19]처럼 6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매일 새벽 5시에 어김 없이 일어나서 10시간 이상 집무하는 등 근면성실한 국정 수행과 엄격함, 그리고 가족사의 수많은 비극으로 인해 생전과 사망 이후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두려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백발의 노황제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 당대 남자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수염과 구레나룻을 모방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간 시절에도 시내 곳곳과 가장 호화로운 호텔인 자허 호텔[20]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제국 호텔에는 아직까지도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제정 붕괴 이후에 들어선 공화정 정부가 어떻게든 황실의 흔적을 지우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불이익과 제한 조건을 늘린 방침을 시행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황제의 죽음과 제정 폐지로부터 100년이 넘은 현재도 황제의 존재감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체코에서조차도 그의 카리스마는 좋게 평가되었는지 프란츠 요제프 카이저라는 통조림 브랜드가 있을 정도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당대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과 후대 영국 엘리자베스 2세처럼 존재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으레 그렇듯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프란츠 요제프'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상태였고 프란츠 요제프가 죽자마자 제국은 정체성을 잃고 급속도로 약화되어 뿔뿔이 해체되는 결과를 맞이했다.[21] 그나마 같이 언급된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는 한참 선대 때부터 영국에 정착된 입헌군주제 시스템을 철저히 따르며 본연의 공무 활동에 집중했고 그래서 둘의 죽음으로 영국 정부와 영국 사회가 잠깐 충격을 받긴 했어도 국가 시스템이 무난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사실 본인 사후 카리스마의 부재와 관련된 문제는 후대인 카를 1세 명군스러운 행적과 별개로 프란츠 요제프에 비해 좀 부족했던 감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후대의 카리스마를 양성하는 것 역시 후계자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본인에게 돌아가던 이 카리스마를 재위 초중반이면 몰라도 재위 말기에는 본인 사후의 후대를 위해 어느 정도 구축을 시켜두고 갔어야 했는데 재위 기간 내내 민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끝없는 권력욕으로 황위 계승자에게 조금의 권력이나 발언권도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다 혼자 짊어지고 간 탓에 이조차도 결론적으로는 비판을 받는다.

5.2. 정치의 전반적 스타일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는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전제적 통치로만 일관했다. 어릴 때부터 자유주의가 신의 질서를 쳐부수는 악의 축이라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 어머니 조피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으며 이를 평생 고수한 것. 또한 성격도 문제가 많았는데 어머니 앞에서는 줏대조차 없이 어머니에 휘둘릴 대로 휘둘렸음에도 어머니 외의 사람들에는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성격이 심하여 타인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고 모든 일을 독선적으로 처리하여 가만히 있어도 대충 잘 되었을 일을 제대로 망쳤다.

메테르니히와 조피 대공비의 이런 교육 방식을 그대로 주입받고 이 신념대로 한평생을 살았다 보니 1860년 준입헌군주제, 1867년 입헌군주제로 형식적으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한평생 전제 군주로서 전제 권력을 행사하길 원했다.

물론 빌헬름 2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같이 말이 입헌군주제지 군주의 권한이 입헌군주제 치고는 꽤나 강한 나라도 있으나 이들 역시 합법적인 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행사하고자 했지[22] 프란츠 요제프처럼 대놓고 전제군주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프란츠 요제프가 이렇게 된 원인은 교육 방식도 있지만 역사상의 사례만 봐도 증조고모할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 전체의 트라우마, 할아버지 대에 말이 같은 황제지 합스부르크 왕가 입장에서 사실상 프랑스 혁명 세력과 거의 다를 것 없어 보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털린 것에 대한 트라우마, 거기다 본인이 직접 경험했던 1848년 혁명 당시의 폭력 시위와 무력 진압 등에 대한 트라우마가 혁명 세력은 물론이고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들을 전부 적이라고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한 듯 하다.

5.3. 군사적 평가와 내부 문제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해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났던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허약한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무관심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연이어 대패했다. 심지어 그 피에몬테군- 이탈리아 왕국군은 당시에도 졸전 기록으로 유명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제국이 헝가리를 제압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헝가리인 귀족들과 대타협을 하여 이중제국을 성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키우라는 군사력은 키우지 않고 전제적 통치를 고수하고 헝가리 외에도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던 타 소수민족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하여 그들의 반발을 크게 샀다. 특히나 제국의 중공업을 담당하여 경제 분야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한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로슬라브주의에 입각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자치를 누리기 위해 스스로 입지를 다졌고 수시로 빈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는 청원을 보냈으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에 묵살로 일관했고 권익 보장의 ㄱ 자만 꺼내는 자들 또한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철저히 감시하고 뿌리뽑으려 시도했다. 슬라브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장하여 이들의 분리독립을 막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삼중제국 개편 요구 내지 소수민족의 권익 증진 보장 요구 또한 몰상식한 짓거리로 취급하며 무시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좌절한 체코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이 임박하자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를 필두로 헝가리인 압제에서 고통받던 슬로바키아인과 손잡고 독립을 선언했다.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이 들어선 루마니아인 세르비아 공국이 들어선 세르비아인 헝가리인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에 합류했다.

5.4. 경제적 평가

또한 그는 경제 발전과 산업발전에도 무관심하여 경제까지도 성과가 하나도 없었다. 동시대의 프로이센 왕국과 그 후신인 독일 제국이 산업화를 이룩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한 반면[23],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산업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관령, 이스트리아 반도 정도였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되어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계에서 손 꼽히는 산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함선이나 소총과 같은 무기들도 수준급으로 만들었지만, 이런 산업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모라바 등 현대 체코에 집중되었을 뿐 제국 동남부는 매우 낙후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의 부국강병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문화적 발전과는 반대로 제국 내에서 매우 가난한 지역이이어서 오죽하면 지역민들조차도 굶주림이 가득한 땅으로 평가했을 정도였다. 1890년대부터는 트란스라이타니아 헝가리 평원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졌지만, 이것만으로 오스트리아가 다른 열강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며 보헤미아 왕관령 체코슬로바키아(現 체코 슬로바키아)로 독립하고,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세르비아로 합류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는 등 경제적으로 알짜였던 지역들이 뿔뿔이 독립하거나 다른 나라로 편입되면서 전쟁 후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거기다 전쟁으로 인한 국토 상당부분의 파괴, 전쟁 이후 생제르맹 조약으로 인해 승전국들에 지급해야 하는 막대한 배상금 등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경제 상황은 완전 파탄을 맞았고 이는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대독일주의의 득세로 이어진다.

5.5. 외교적 평가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는 데 도와줬던 러시아 제국을 크림전쟁 때 통수 쳐서 외교관계가 악화된 것을 비스마르크가 유럽 국가들 간의 친선을 위해 겨우겨우 관계를 개선시켜 줬더니 보스니아 합병 문제로 삼제 동맹을 깨뜨려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다시 파탄내는 우를 범했다.[24]

그리고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된 후에는 능동적인 외교는커녕 독일에 과잉 의존했으며, 빌헬름 2세가 1890~1900년대에 독일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행동을 종종 했음에도 이를 방관하기만 했다.[25] 그는 오로지 자기권력 지키기에만 집중했으며,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던 제위 계승자인 조카를 홀대하며 멀리하는 등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실책들을 저질렀다.

5.6. 가족과 후계자들에 대한 평가

잘 알려져 있듯 프란츠 요제프는 가족으로서도 완전 낙제점인 인물이었다.

황후인 엘리자베트만을 한평생 사랑했다지만, 정작 엘리자베트에겐 그런 사랑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그저 변명 정도로만 치부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엘리자베트가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에 받았던, 당대 기준으로도 너무 심했던 시집살이에 대해 황제 본인이 황후에게 어머니가 우리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참으라는 무책임한 반응을 보여 왔기 때문에 황후는 황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외아들이자 황태자인 루돌프에게는 낙제점 그 자체로, 어머니이자 루돌프의 할머니인 조피 대공비가 루돌프를 7살 때부터 권총소리에 깨게 한다거나 맨발로 눈밭을 행군하게 시킨다거나 냉수 샤워 등의 가혹한 양육 방식을 감행했음에도 "좀 심했다." 정도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엘리자베트 황후의 요구로 조피 대공비에게서 루돌프 황태자를 떼어놓으려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오로지 그 뿐이었고 그 이상은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 루돌프가 서른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다 싶을 정도.

루돌프 황태자 사후 차기 황위계승권자가 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도 좋은 큰아버지가 아니었고 공적인 면에서도 좋은 상사가 전혀 아니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살아있을 적에는 안중에도 없었다가 루돌프 황태자가 죽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에 관심을 가져 그에게 동등 결혼으로 인정받을만한 신분의 여자와 결혼하라고 강요했고 그럼에도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의견을 꺾지 않고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동등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조피 여백작과 결혼을 감행하자 태어난 자식들을 귀천상혼 소생 자녀라는 이유로 계승권과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했다. 당연히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와 결혼식조차도 차기 황위 계승권자의 결혼식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스템이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이 시스템대로 처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때부터 차기 황위 계승권자이자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루돌프 황태자처럼 미운털이 박힌 건지 아주 사소한 건으로도 트집 잡으려고 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내놓는 정책들은 어떤 것이든 사사건건 반대만 했고 기회를 노려 아예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계승권마저 박탈하고자 했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망하자 일설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죽어서 근심거리를 좀 덜어서 후련하다."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진짜 인간성 자체를 의심해볼 법 하다. 조피 역시 황족보다 격이 떨어지는 백작 신분이라는 이유로 모든 공식석상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켰고 황실 공식 무도회에서도 프란츠 페르디난트 바로 옆이 아닌 아주 먼 자리에 배석하게끔 하였다. 그나마 조피가 공식석상에서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때가 하필 그날이었고, 죽고 나서도 황족보다 격이 낮은 백작가의 영애라는 이유로 조피의 관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관보다 좀 더 낮은 위치에 있었다.[26] 한편 황실은 한 술 더 떠서 조피의 관 위에는 시녀[27]를 상징하는 흰 장갑을 놓으려 하였으나 황제 본인이 그것만큼은 막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이자 본인의 조카손주들에게도 냉혹한 것은 마찬가지라서 사라예보 사건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가 죽자 한 푼도 없이 빈털터리 상태로 황궁에서 내쫓으려다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계모이자 황제 본인에게는 제수가 되는 마리아 테레자와 그녀의 두 딸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 황제에게 직접 따진 끝에 작은 성이나마 여러 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집이라서 팔아야지만 당장 먹고 살 것을 해결하는 돈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조카손주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사후 황위계승자가 된 카를 1세는 큰아버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달리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부르봉파르마의 지타 공주와 결혼하자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며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결혼식과는 달리 결혼식에 직접 참석했다. 그 후 태어난 조카증손자 오토가 태어나자 그 고령의 몸으로도 놀아주며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카를 1세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오토 프란츠 대공도 형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달리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군말없이 동등결혼인 작센 공주와 결혼했으니 그렇게 프란츠 요제프가 보기에 "정상적으로" 결혼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를 1세를 더 마음에 들어하게 된 것이다.

손녀 엘리자베트 마리조차도 처음에는 예뻐했지만 자라면서 본인의 시대착오적이고 전제적인 사상을 자꾸 강요를 시켰고 엘리자베트 마리가 루돌프와 비슷하게 진보적 성향을 보인데다 동등결혼으로 인정받기는 해도 격이 좀 낮은 상대인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과 연애결혼을 하자 "어쩜 그렇게 니 애비랑 쏙 닮아가냐"고 역정을 냈을 정도. 진짜 성향 뿐만 아니라 사생활도 아버지 루돌프 황태자를 닮아가는지 꼴통 중의 꼴통이던 황제에게 제대로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은 건지 황제가 죽자마자 남편과 별거하고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그렇게도 싫어하던 사민당원과[28] 대놓고 바람을 피워 어머니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의 뒷목을 제대로 잡게 만들었고 "붉은 황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그것도 황제 사후 타락하게 된 원인을 생전의 황제가 가장 크게 제공한 건 사실이긴 하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가족 모두에게 시종일관 강압적이었던 데다 생전의 루돌프 황태자가 좋은 아버지였는지는 몰라도 할아버지 때문에 불과 5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니까.

5.7. 총평

정리하면 헝가리[29], 샤르데냐, 프로이센과 3번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헝가리 진압을 도와줬던 우방이던 러시아 제국의 뒤통수를 치고, 산업혁명의 시대에 산업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겪으면서도 군사력을 강화하지 읺았고, 이는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이 패전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86세로 장수하고 재위기간이 68년이나 되어 매우 오래 살고 오래 재위했던 것도 의도치 않은 실책이 되었다. 그의 실책을 알면서도 그의 사실상 전제권력 때문에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던 것. 특히 프란츠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황위 계승자인 아들 루돌프와 조카 페르디난트에게 끝까지 권력을 양보하지 않다 보니 황자나 황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갈등이 더욱 심했다.

6. 가족 관계

6.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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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으로는 매우 불행했다. 당대 유럽 군주들은 숱한 염문을 뿌리며 추문을 달고 살았던 것과는 달리 프란츠 요제프는 그런 면에서는 깨끗했던 축에 속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초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가정은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도 모자랄 만큼 막장 드라마로 굴러갔다. 얼마나 드라마 같은 인생이면 이 사람 본인도 아니고 집안 가족들 이야기로만 뮤지컬이 두 편이나 나왔을 정도이다. 딸, 아들, 동생, 사촌, 아내, 조카들 등등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 하지만 장수한 덕분에 그는 온갖 못 볼 꼴까지 다 보게 되었다.[30] 오죽했으면 '황제가 혁명 때 사형시킨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였다.[31]

황제의 가족 관계는 정말로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어머니 조피는 너무 어렵게 얻은 장남을 구세주 마냥 떠받들면서도 무섭게 다그치며 혹독하게 길렀다. 그 영향으로 젊은 시절부터 프란츠 요제프는 남들에게는 심각하게 권위적이고 꼰대였지만, 정작 여장부인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기세에 눌려 지냈고 결혼 후에는 아내 엘리자베트와 조피 사이의 갈등이 더해졌다. 자유롭고 발랄한 가풍의 바이에른에서 자란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호프부르크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가 약혼 직후 시어머니 조피에게서 가장 처음 받은 건 예물이나 편지 같은 게 아니라 6페이지에 걸친 궁중예법이었다. 결혼 후에도 조피는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간섭했고, 첫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자기 이름을 따다 붙이고 손녀를 아예 자신의 거처에 데려가서 직접 키웠다.[32] 때문에 고부 간에 아이들의 양육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엘리자베트가 데려간 헝가리에서 첫 딸이 죽는 바람에 조피 대공비가 이긴 모양이 되었다. 결국 엘리자베트는 둘째딸 기젤라와 기다리던 황태자 루돌프를 둘 다 시어머니에게 넘기고 양육에서 손을 뗐다. 엘리자베트는 아이들이 자기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 것에 큰 상처를 받고, 시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그녀의 거처에 있는 자식들을 보러가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 중독자인 프란츠 요제프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아내의 부탁으로 어머니에게 자식들을 돌려주라고 부탁했지만, 조피는 손녀들을 데려가면 자기가 궁을 나간다고 위협해 황제가 말도 못 꺼내게 했다. 엘리자베트는 입으로는 자신을 사랑한다지만 실제론 이도 저도 못해주는 남편을 원망했고, 결국 현실에서 도피해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며 여기저기로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아내의 행동으로 크게 상처받았지만 그녀를 차마 비난하지 못했다.

황제의 자식들 역시 불행했다. 아버지는 일만 하느라 제대로 만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일년에 한 두번 얼굴이나 보는 정도, 할머니 조피는 본인 주장으로는 손주들을 사랑하고 아꼈다지만 황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우선해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지만 막내딸 마리 발레리(애칭 마리, 혹은 발레리)만은 예외였다. 엘리자베트는 직접 기르게 된 마리 발레리에겐 자기 손으로 못 키웠던 위의 세 아이 몫까지 몰아주며 편애했지만, 대신 발레리는 늘 도피성 여행이나 해대는 엘리자베트에게 끌려다니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했고 어머니의 우울증을 달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발레리는 '엄마가 나 때문에 못 죽고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느꼈다고 하며[33] 엘리자베트는 정작 그렇게 아끼는 발레리가 결혼해서 낳은 외손주들한테는 아예 무심했다고 하니 엘리자베트 역시 정상은 아니다. 특히 루돌프 황태자는 차기 황제라는 이유로 도가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을 받아서 군사교관에게 7세부터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겨울 새벽 눈 속을 행진시킨다든지, 냉수목욕이라든지, 숲 속에 혼자 내버려두고 온다든지. 심지어 루돌프를 깨울 때는 옆에서 권총을 쏴서 그 소리로 일어나게 했다고 한다.[34]

이것이 황제의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나이에 받았던 것들로, 황태자인 루돌프는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며 양친을 원망하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자랐다. 프란츠 요제프도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해 부자 관계도 막장이었다. 이처럼 황제의 가정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같은 비극이 따로 없지만 이것도 근본적, 전체적으로 제일 큰 책임자는 황제 자신이었다. 자세한 건 루돌프 황태자 참고.

21세기 들어 아내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한다. 엘리자베트는 딸 둘을 낳은 뒤에야 후계자가 될 루돌프를 낳았고 프란츠 요제프는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아들을 더 낳으려 했으나, 아이들과 교육권을 모두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빼앗기고 인내심과 분노가 극에 달한 엘리자베트는 더 이상 임신하지 않겠다고 사실상의 파업을 선언하며 그 직후부터 궁정을 떠나 여행하며 살았다. 그리고 10여 년 후 막내를 낳고 본격적으로 유랑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엘리자베트가 다른 여자와 관계하여 사생아를 낳은 프란츠 요제프를 전보다도 더 경멸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1889년에는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했고, 1898년에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에게 암살당했다.[35][36] 아내의 죽음을 들은 장소는 엘리자베트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집무실 책상 위였다. 그녀를 일생 고독하게 했던 그 책상에서 부관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잠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후 한 말은 "짐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짐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였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된 것은 돌봐주지 못한 아들의 사후 자책하며 늘 상복만 입고 다닐 정도로 우울하게 살던 아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비극을 겪으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의무감으로 사망할 때까지 제국을 위해 일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이 있다며 부득부득 일어나고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는 묘사도 있을 정도다. 그 스스로도 당대에 조신에게 "나는 운이 없는 놈이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제국을 떠받치기에 68년이나 매진한 스스로에게 남긴 자조였을지도.

출판된 참고할 만한 자료로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와 <석양녘의 왈츠>가 읽을 만하다.

6.1.1. 첫째 남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1832~1867)은 루돌프 황태자 탄생 전까지 황제의 후계자 격인 인물이었다. 1853년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황제 습격 당시 황제가 암살되었다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위는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승계되었을 것이다.

루돌프 황태자 탄생 이후 제위에서 멀어진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1864년에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멕시코에서 반 프랑스 저항군이 들고 일어나 1867년에 막시밀리안을 붙잡아 총살해 버렸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참패해 엉망진창인 상태라 동생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일로 유럽의 왕실들을 돌아다니며 남편의 구명 활동를 벌이던 막시밀리안의 아내 샤를로트는 그만 미쳐버렸고, 오빠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유폐되었다. 샤를로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지만 그는 그분의 무사생환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황제의 어머니로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조피 대공비도 차남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 사건 이후로 정치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했다. 정치 활동 그만뒀을 뿐 손자인 루돌프 황태자와 손녀 기젤라의 양육만큼은 멈추지 않아서 루돌프의 지옥길은 여전했다.

6.1.2. 아들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프란츠 요제프 1세 부부의 유일한 적장자였던 루돌프 황태자는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어머니 아래서 외롭게 자랐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였고 제국의 황제로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또한 루돌프는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자유분방하고 예민한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당대 가장 보수적이었던 합스부르크 황실 예법을 갑갑해했고 황실 내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오스트리아는 조부 대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면 황제의 특허가 없는 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도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었지만 루돌프는 개방적이고 소탈해서 궁정을 어지럽히는 문제아로 찍혀있었기 때문.

이후 루돌프 황태자는 레오폴드 2세의 딸로 벨기에의 공주인 스테파니 정략결혼했지만[37] 처음부터 사랑없는 결혼이었고 둘은 성격도 달랐다. 외향적인 스테파니는 내성적이고 우울증을 앓는 루돌프를 나약하다며 들볶고, 루돌프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스테파니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의 바르던 두 사람의 사이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가 태어난 후 급격히 멀어져 루돌프는 외도를 일삼고 딸도 거의 찾지 않았다. 게다가 스테파니가 병을 앓은 후 출산이 불가능해지자[38] 부부 사이는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에 루돌프 황태자는 외사촌 라리쉬 백작부인(1858~1940)[39]에게 소개받은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 폰 베체라'와 사귀게 되었고, 독단으로 교황에게 스테파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은 당연히 대경실색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이 사태를 알렸다. 애초에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이 루돌프 황태자의 이런 요청을 허가해줄 턱이 없었고[40][41] 왕가의 일이면 더 안 해준다. 이에 극대노한 아버지에게 루돌프는 제대로 찍혀버렸다. 프란츠 요제프는 즉시 루돌프에게 마리와 결별하라 강요하고 신임 대사를 환영하는 접견식에서는 경의를 표하러 나온 아들에게 등을 돌려 외면하면서 모두의 앞에서 빅엿을 먹이고는 또 따로 불러 " 너 같은 놈은 보기도 싫으니 당장 정부랑 결별하고 가정에 충실하라!"며 크게 화를 냈다. 루돌프 황태자는 이 공개적인 창피와 심한 질책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1889년 1월 30일에 마리 폰 베체라와 함께 메이얼링으로 가서 자살한다. 이를 통칭 마이어링 사건'이라고 부른다.[42]

그러나 정확하게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카를 1세의 아내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어렸을 적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가 "시신의 총상 주변에 화상이 없었다.[43] 따라서 암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타살설을 지지하는 증언들도 꽤 있다. 진보적인 루돌프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파 세력, 혹은 황실을 증오하던 공산주의자가 메이얼링의 별장에 침입해 두 사람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암살설 같은 타살설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 중에는 루돌프의 장례가 교황의 인가를 받은 가톨릭식 장례 미사로 치러졌다는 점을 든다. 당시 가톨릭 교회법은 자살한 사람에 대한 장례 미사를 불허했는데 루돌프도 처음에는 교황이 장례 미사를 거부했지만 후에 입장을 바꿔 장례 미사를 했다. 이에 대해 황제가 교황에게 아들이 반 황실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교황이 인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제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비밀이 알려진 순간 일어날 제국 내의 혼란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이러한 루돌프 황태자의 최후는 순수한 처녀와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마리는 루돌프보다 무려 약 13살 연하인 어린 소녀였고 루돌프는 아무리 애정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자살할 당시 루돌프의 나이는 만 30세였고, 마리의 나이는 겨우 만 17세. 거기다 이들이 만났을 때는 더 어렸다. 실제로 루돌프는 외도가 잦았기 때문에 마리 베체라 뿐 아니라 창부 출신의 미치 카스파(Mizzi Kaspar, 1864년 ~ 1907년) 등 많은 정부가 있었다. 처음 루돌프가 동반 자살하자고 꼬셨던 사람도 미치 카스파였는데 그녀가 거절하자 그 다음 순위(?)인 마리를 꼬드겨 동반자살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찌질남과 중2병의 불륜 막장극이지만, 정황상 후대인들은 그냥 낭만적인 비극으로 보게 되면서 마이어링 사건은 2차 저작물로까지 만들어졌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라는 책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일루셔니스트》란 영화도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었고[44], 루돌프에 대한 뮤지컬도 2012년 말, 2014년말 한국에서 공연했었다.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는 제임스 모리어티가 개입한 사건 중 하나로 등장한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기사가 나온다.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일대기를 다룬《 엘리자벳》에서도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사건을 마이어링 왈츠라는 춤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6.1.2.1. 손녀 엘리자베트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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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둘째 남동생 카를 루트비히

루돌프 사망 후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가 후계자가 되었지만 그는 1896년 형보다 먼저 사망했다.

6.1.4.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세 번째 후계자로 선택된 황제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년 ~ 1914년)는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45]와 함께 1914년 6월말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차 갔다가 가브릴로 프린치프 (1894년 ~ 1918년)[46]의 피격을 받아 죽고 만다.[47]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6.1.5. 종손 카를 1세

네 번째 황태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48](1887년 ~ 1922년)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종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를 1세는 즉위 후 딱 2년 만에[4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몰락하고 만다.

카를 1세는 일반적인 "망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상 제국의 해체를 막기는 힘들었다. 제국 해체 이후 몇 년 뒤에 사망한다. 자세한 내용은 카를 1세 항목을 참고.

6.2. 가계도

※ 비극적으로 사망한 인물은 ☆ 처리.

6.2.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란츠 요제프 1세
(Kaiser Franz Josephs I.)
<colbgcolor=#fff3e4,#331c00>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Erzherzog Franz Karl von Österreich)
<colbgcolor=#ffffe4,#323300> 프란츠 2세
(Kaiser Franz II.)
레오폴트 2세
(Kaiser Leopold II.)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ía Luisa de España)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Maria Teresa di Borbone-Due Sicilie)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delle Due Sicilie)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Karolina von Österreich)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zessin Sophie Friederike von Bayern)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König Maximilian I. Joseph)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Pfalzgraf Friedrich Michael von Pfalz-Birkenfeld)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Pfalzgräfin Maria Franziska von Pfalz-Sulzbach)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zessin Karoline von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Erbprinz Karl Ludwig von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zessin Amalie von Hessen-Darmstadt)

6.2.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오스트리아의 조피 여대공
(Erzherzogin Sophie von Österreich)
1855년 3월 5일 1857년 5월 29일
2녀 바이에른의 왕자비 기젤라
(Gisela, Prinzessin von Bayern)
1856년 7월 12일 1932년 7월 27일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
슬하 2남 2녀[51]
1남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Kronprinz von Österreich)
1858년 8월 21일 1889년 1월 30일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슬하 1녀[52]
3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잘바토어 대공비 마리 발레리
(Marie Valerie, Erzherzogin Franz Salvator von Österreich)
1868년 4월 22일 1924년 9월 6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잘파토어 대공[53]
슬하 4남 6녀

7. 애첩

7.1. 카타리나 슈라트

파일:Katharina Schratt.jpg
카타리나 슈라트 (Katharina Schratt)
1853년 9월 11일 ~ 1940년 4월 17일 (향년 86세)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사적으로 위로가 되어준 사람은 정부(情婦)인 카타리나 슈라트라는 여배우였다. 대외적으로 내연녀로 알려져 있지만 황제와의 관계는 애인이라기보다, 그가 생애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인간적인 감정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 같았다고 한다. 황제를 만나면 정치, 사회 등의 분야에 대해 대화하고 조언하는 등 황후가 하지 않는 일을 어느 정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흠이 있다면 도박 중독자라 종종 심한 도박빚을 지곤 했는데, 황제는 카타리나와의 의리를 생각해 갚아주긴 했지만 대신 온갖 잔소리와 훈계를 퍼부었다. 슈라트는 그렇게 욕 먹어가면서도 계속 도박에 빠져 황제에게 갚아달라고 편지하면 또 욕 먹는 패턴 반복이었는데, 정작 아내 엘리자베트가 온갖 뻘짓과 사치에 낭비하는 돈은 군말도 않고 갚아주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카타리나 슈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의로 들인 정부가 아니라 정실인 엘리자베트 황후가 남편을 자신에게서 떼어 내려고 자발적으로 소개해준 여자다. 비로소 뜻대로 됐다고 여긴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어려워하는 슈라트에게 늘 여행만 다니는 자기 대신 황제 곁에서 돌봐주는 것을 고마워했다. 직접 슈라트를 초대해 황제와 셋이서 노닥거리거나 외국에서도 친절한 편지나 선물 같은 것들을 보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슈라트도 엘리자베트 황후에게 거의 팬이나 다름없는 열렬한 충성을 바치며 따랐기에 두 사람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황제의 정실 황후와 정부였음에도 카타리나가 엘리자베트를 숭배하다시피 따른 건 그녀가 일반적인 황후답지 않게, 일개 여배우이자 정부에 불과한 자신에게 친절한 조언과 감사도 잊지 않고 해외 여행 중에 사온 후한 선물들까지 내주는 파격적인 배려와 쿨한 태도가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54][55]

이 기묘한 조합을 강제로 구경해야하는 자식들과 귀족들은 그야말로 못볼 꼴 취급이었지만 이는 빈 궁정 여자들을 혐오했던 시씨가 일부러 귀족을 배제해 평민 여자를 고른 것이다. 자신에게 기어오르거나 귀족들과 붙어서 황제를 좌우할 가능성이 있는 여자들은 빼고 황제가 호감을 갖고 있던 소탈한 평민 유부녀를 찍고 소개시켜줬다고. 무엇보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전부터 슈라트를 몰래 좋아하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슈라트한테 넋빠진 황제를 보고 눈치를 깐 엘리자베트는 그녀를 낙점하고 공식적으로 둘을 붙여놓았다. 이것은 비록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더이상 같이 살기 싫은 남자를 위한 엘리자베트의 배려아닌 배려였다. 의무에 지쳐서 자신의 내조를 원하는 나이들고 힘들어하는 남편이 불편하고 돌봐주기 싫으니 대신해줄 여자를 골라야했고 이왕이면 남편이 반한 여자를 고용하다시피하고 도망간 것.[56] 그러나 슈라트에 대한 엘리자베트의 감정은 호감, 동정, 약간의 멸시, 질투 등이 섞인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나르시시즘이 유별난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숭배하는 슈라트를 무한 신뢰하고 외국에서도 선물에 다정한 편지와 배려를 보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슈라트가 맥주통 몸매 주제에 코르셋으로 무장했다는 등, 외모 비하를 하고 슈라트에게 빠진 남편도 '그의 대머리는 석양에 빛나리'(.....)라는 등의 문구로 외모를 강조해 결국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슈라트 모두 깠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어쨌든 카타리나는 배우 경험으로 다져진 황제의 정부에 걸맞은 뛰어난 지성과 교양, 황제와 황후와도 단순한 상사를 떠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다 갖춘 상대였다. 덕분에 카타리나는 열에 아홉은 비참하게 궁 밖으로 쫓겨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는 식의 비극으로 끝나는 유럽 왕실의 로얄 미스트리스와 달리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카타리나 슈라트와의 관계는 매우 플라토닉했기에 슈라트는 귀족 유부남(...)과 놀아나고 있었고, 프란츠는 그녀의 집을 방문해도 친구들처럼 허물 없이 담소를 나눈 정도였다고 한다. 슈라트는 밤 늦게까지 무대에서 공연한 후에도 깔끔하게 단장하고 직접 만든 소박한 요리나 디저트 등을 내오며 황제와 식사자리에서 평범한 부부처럼 수다 떨고 입씨름을 하면서도 정치적 간섭 같은 건 일절 하지 않았다. 보통 왕이나 황제의 정부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어떻게든 사익을 뜯어내기 위해 부정부패를 벌이다가 만인의 증오를 받아 왕이나 황제의 사후 내쳐지기 마련인데 카타리나 슈라트는 사익을 챙기긴 커녕 정치에도 확실히 선을 긋고, 프란츠 요제프를 워낙 살뜰히 모신 덕분인지 그가 서거하자 후임인 카를 1세가 직접 불러들여 정중하게 프란츠 요제프의 시신으로 인도해줬고 카타리나는 황제의 시신에 작별 인사도 하고 카를에게도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평생 카타리나를 싫어했던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막내딸 마리 발레리 여대공은 이 때도 카타리나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 이후 카타리나 슈라트는 빈 근교에 있는 히칭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다 1940년에 향년 86세로 프란츠 요제프와 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사후 수많은 언론사와 출판사가 카타리나에게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 인터뷰를 따려고 하거나 회고록 계약을 제시했지만 일절 거절했고, 이후에도 카타리나는 황제나 황후와의 관계나 뒷얘기를 팔아 이득을 보려하지 않는 품위 있는 태도로 칭송 받으며 별다른 발언이나 눈에 띄는 정치적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가장 정치적인 행동으로는 안슐루스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집의 창문을 가리고 바깥을 보지 않고 사실상의 문전박대를 한 정도이다.

그 외에 엘리자베트 황후가 암살로 사망하자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재혼 후보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황제의 제수이자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도 있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본인이 고령인데다 루돌프 황태자가 죽어서 황통이 직계가 아닌 방계로 넘어갈 판이었다 해도 마리아 테레사가 이 무렵 이미 43세라 재혼한다고 해도 아이를 가지기 매우 어려운 나이인데다 한때 제수였던 관계로 거절했고 죽어서도 엘리자베트 황후만을 보고 살았던 건지 엘리자베트 황후와의 결혼생활에 본인 나름대로 염증을 느껴서인지 마리아 테레사 뿐만 아니라 재혼 자체를 거부했다.

8. 최측근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는 수많은 측근 인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중에서 에두아르트 폰 파어, 아르투어 폰 볼프라스,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가 대표적인 3인방으로 꼽힌다. 이 3인방은 각각 황제 재위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 30년, 28년, 25년 동안 황제를 보좌하며 그 누구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황제의 일상에서부터 군사, 외교에 이르기까지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며 다른 조언자들을 압도하는 최측근 실력자 그룹을 형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8.1. 에두아르트 폰 파어 백작

에두아르트 폰 파어는 1887년부터 황제의 사망 시점인 1916년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일등 부관(Generaladjutant)을 지냈다. 그는 황제를 일상적으로 시종하며 그의 신변을 보좌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엘리자베트 황후 암살, 대공 암살 등 주요 사건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등 황제의 일상사 곳곳에 깊이 관여했다.

8.2. 아르투어 폰 볼프라스 남작

아르투어 폰 볼프라스는 1889년부터 1917년까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군사 사무국(Militärkanzlei) 수장이자 일등 부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황제의 군사 분야 최측근으로서 군 고위직 인사에도 관여하는 등 황제의 군사적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8.3.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백작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는 1881년부터 1906년까지 25년간 제국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군사 정책을 주도했다. 그는 프로이센식 군 개혁을 단행하고 참모본부의 위상을 높이는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현대화에 큰 공헌을 세웠다. 그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부황제(Vizekaiser)"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9. 대중매체

10. 기타

파일:나폴레옹 2세, 프란츠 요제프 1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jpg * 어렸을 때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와 만난 적이 있다. 상단의 초상화에서는 나폴레옹 2세가 어린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안고 있다. 참고로 나폴레옹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와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이 친남매이니 두 사람은 사촌 지간이다.
파일:Kaiser_Franz_Joseph_I._and_Otto_(15.09.1914).jpg * 반대로 죽음을 앞둔 1914년에는 2살이었던 황태손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오토 대공 역시 장수했고, 2011년에 사망했다. 사진조차 없던 절대왕정 초상화 시대에 태어난 사람과 스마트폰 시대에 노년기를 보낸 사람이 한 사진에서 같이 찍힌 것이다.
파일:빈_두정갑.png *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수교 당시 조선 군주인 고종에게 선물받은 조선식 두정갑 세트를 한 벌 소유했다. 일명 빈 두정갑. 해당 갑주는 현재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보존 및 전시 중이다. 국외 소재 조선 갑옷 유물 중 반출 경로가 명확한 유일한 유물이며, 보존 상태 또한 최상급이다. 거기다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며 주고 받은 선물이었기에 그 역사적 가치 또한 막대하다. 이 갑주는 지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3월까지 국내로 잠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11. 관련 항목



[1] 174cm의 빌헬름 2세와 같이 선 사진을 보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좀 더 작다. 사진을 찍을 당시 80대였으니 젊었을 때는 171cm보다는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내의 키는 173cm로 프란츠 요제프보다 더 크다. [단결] With united forces. [미덕] My trust in virtue. [4] 사실 600년 가량 중부유럽을 통치해 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상을 감안하면 친인척들이 유럽 주요국들의 군주인 것은 당연한 것이긴 하다. [5] 성교를 할 때면 간질 발작이 일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평생 동정이었고 당대 유럽 왕실에서 흔하디 흔하게 있던 사생아조차도 하나 없었다. [6] 이때 암살에 성공했으면 루돌프 황태자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 황위는 그대로 큰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에 넘어간다. 막시밀리안 또한 수은으로 매독 치료를 받았던지라 불임이 되었기에 황통이 작은동생 카를 루트비히와 그 후손들에 넘어가는 것은 변함없다. [7] 한편 원래 결혼 예정자였던 헬레네는 투른탁시스의 막시밀리안 안톤(1831~1867)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으나 남편과 장남이 요절하여 자신보다 먼저 떠난 비극을 맛보아야 했고 1890년 56세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암살당한 엘리자베트보다도 단명했다. 어머니보다도 일찍 죽은 것은 덤. [8]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인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크림 전쟁 시기까지도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다. [9] 그나마 상당한 희생자(7,000명 이상)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피에몬테를 배신 때리고 빌라프란카에서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덕분에 베네치아 일대인 베네토 지역은 간수했다. 하지만 7년 뒤… [10] 빌헬름 1세는 최소 보헤미아 왕국은 가져와야 한다 생각했다. [11]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포어아를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티롤, 크라인, 퀴스텐란트(연해지대),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부코비나, 달마티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디나.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한다. [12] 이 시절 독일인들의 오스트리아 편입 야욕은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 패망 이후 나치 독일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으로 실행되었다. 현재는 나치가 패망하여 병합은 없던 일이 되었고 병합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되기는 했지만... 어쨋든 신성 로마 제국 해체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분리된 후 독일은 언제나 오스트리아를 자국에 편입하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독일의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프란츠 요제프 입장에선 크나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13] 그 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하고 있었다. 대타협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일 뿐이던 헝가리 왕국을 제국에서 분리한 뒤 헝가리를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파트너로 인정한 것이지 합스부르크 황제가 새롭게 헝가리의 사도왕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 [14] 대(對) 러시아 방위 동맹 [15] 거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신인 신성 로마 제국 초중반이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교황 다음가는 지위가 있었겠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황제가 교황과 가톨릭에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약해져 왔다. [16] 제정이 유지되었다면 빌헬름 2세, 빌헬름 황태자(빌헬름 3세)에 이어 빌헬름 4세가 되었겠지만 제정이 폐지된 것과 별개로 귀천상혼으로 인해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1940년에 할아버지(1941)와 아버지(1951)보다 먼저 사망했다. 가문에서 대대로 쓰던 "빌헬름"이란 이름을 물려준 것에서 장남에 장손으로서 빌헬름 황태손에 대한 기대감은 컸었다. [17]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이 대전쟁 첫 전투였으니 당시 이중제국의 지리멸렬함을 엿볼 수 있다. [18] 전임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는 1890년대 영상기술이 개발되기 전인 1875년에 숨졌고 후임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최후의 황제인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패전으로 모든 지위를 잃고 국외망명 후 사망하였기에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던 공화국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철저하게 배척했던지라 황제 장례 자체가 아예 치러지지 않았다. [19] 재위: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 63년 216일. [20] 초콜릿 케이크 자허토르테를 개발한 그곳이다. [21] 역사에서 이렇게 한 개인의 지도력과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체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단적인 예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남슬라브 지역을 흡수한 유고슬라비아 티토 사후 티토만큼의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이렇다 할 후계자가 없어서 그대로 해체일로를 걸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트리아마냥 유고슬라비아 구성국 중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세르비아가 해체를 막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는 추태를 부린 것은 덤. [22] 실제로 루덴도르프와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이에 끌려다니긴 했다. 무솔리니를 직접 임명한 것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인지라 완전히 끌려다녔다고 보기엔 어렵다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든 그는 무솔리니를 종용하긴 했어도 프란츠 요제프 마냥 대놓고 총리와 정치인들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23] 심지어 1880~90년대 독일 제국의 생산력은 산업 혁명의 종주국인 영국과 강대국 프랑스를 뛰어넘을 정도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10년대에는 총생산량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달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이긴 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여태껏 넓혀 온 식민지 빨로 겨우 이겼다는 평까지 있을 정도. [24] 이때 독일 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선택은 이상하게도 근시안적이었다. [25]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 동맹국이자 독일 제국에 비해 국력과 기술력, 병력이 한없이 약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26] 본래는 매장도 따로 하려하였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 대공비가 결사반대하여 합장될 수 있었다. [27] 실제로 근대까지만 해도 백작 신분의 여성들은 황족들의 시녀를 하기도 했다. [28] 하물며 지금도 사민당이 오스트리아의 최대 좌파 정당인데, 나아가 이때는 사민당이 공화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대놓고 추구하는 급진좌파 성향이었다. [29] 1848~49년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이조차 러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겨우 된 것인데다 1867년 대타협 자체가 결과적으로 보면 오스트리아의 패배라고 보는 것이 맞다. [30] 비슷하게 오래 재위한 루이 14세도 당대 기준으로 너무 오래 살아서 말년에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와 왕세손 프티 도팽 루이, 왕세증손 부르타뉴 공작 루이를 잃었고 막내손자 샤를도 잃었다. 다만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한 막내손자 샤를을 제외하고는 전부 당대에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잘못된 치료 때문에 건강했음에도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던 것이긴 하다. [31]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다룬 드라마 '시시'(Sisi)에서 이 장면이 나온다. [32] 합스부르크 황실과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조피 대공비 입장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엘리자베트에게 가혹한 시어머니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가정사에까지 어머니한테 휘둘리고 산 프란츠 요제프 역시 좋은 남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이러니한 건 조피도 젊었을 땐 엘리자베트처럼 당찬 성격에 총명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정신박약아였던 프란츠 카를과 사랑없는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조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외롭게 지냈던 나폴레옹 2세와 가깝게 지냈지만, 나폴레옹 2세 사후 더 이상 마음 기댈 곳이 없어지자 마음을 닫고 흑화해 버렸다. [33] 아이 입장에서 이런 생각이 들게끔 하는 상황은 절대로 좋지 못하다. 엘리자베트는 10여년 간 죽고 싶을 정도의 지옥 같았던 시집살이를 겪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 헌신을 해줄 만큼 해줬다며 남은 생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기에 시어머니에 뺏긴 기젤라와 루돌프는 물론이고 직접 키운 마리 발레리에 대해서도 본인의 애완용 정도로만 생각하고 마리 발레리를 "제대로" 키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그럴 의지도 아예 없었다. 적어도 루돌프가 어렀을 적엔 그가 너무 어린 나이에도 너무 가혹한 훈련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남편과 시어머니에 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지만. [34]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친할머니 자격으로 차기 황제의 교육을 빌미로 몰인정한 짓을 한 셈. 엘리자베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루돌프 황태자는 저렇게 어린 시절부터 훈육을 빙자한 학대를 당하며 일찍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에게 교관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꾸라고 협박해 교관을 바꾸게 한 것. 사실 귀족이고 황족이고 채찍으로 두들겨 맞고 걸음마 떼라며 목줄 채워 일으키는 등이 당시의 양육법이었다. 그래도 루돌프만큼 그렇게 심하게 학대식으로 하진 않았고 루돌프보다 덜하긴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도 그랬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그렇게 자랐다. 프란츠 요제프와 빌헬름 2세는 의외로 마음에 들었는지 프란츠 요제프는 아들에게도 자신보다 더한 방식으로 양육했고 빌헬름 2세는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따라 군사 퍼레이드와 군사적 취미를 즐겼다. [35] 루케니는 체포되고 나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스위스는 사형이 폐지된 터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0년 후 교도소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36] 번외로 6촌 동생이자[59] 5촌 조카사위인[60] 움베르토 1세도 그로부터 2년 뒤인 1900년에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가에타노 브레시의 손에 암살당한다. 이탈리아 역시 사형이 폐지된 터라 이 브레시도 루케니처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37] 풀네임은 스테파니 클로틸드 루이즈 헤르미네 마리 샤를로트(Stéphanie Clotilde Louise Herminie Marie Charlotte).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트보다 못할뿐 미녀였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미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엘리자베트 황후가 며느리인 스테파니를 싫어했던 이유가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 루돌프 역시 스테파니가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며 탐탁지 않았지만 그동안 여러 지체높은 가톨릭 왕가와의 혼담을 내친 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38] 사실 이 병이 황실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여성편력으로 풀던 루돌프가 스테파니에게까지 옮긴 성병이라는 얘기도 있다. [39] 루돌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의 오빠 루트비히 빌헬름(1831~1920) 귀천상혼하여 낳은 딸. [40] 예외적으로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허나 혼인무효의 기본 조건은 결혼 당사자들이 부부관계를 맺지 않은 순결 상태를 인정받아야 가능한 것인데 루돌프와 스테파니는 이 무렵 결혼한지 6년 가량이나 되었고 이미 딸도 있었으므로 혼인무효가 성립될 수가 없었다. 그것 외에도 혼인무효가 성립되는 사례가 있긴 하나 인정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황족이라면 더더욱 인정을 잘 안해준다. 현대에는 가톨릭이라도 이혼을 인정해 주는 추세이긴 하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 혼인성사 참조. [41] 영국 헨리 8세도 교황이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을 무효화해주지 않자 빡쳐서 가톨릭을 버리고 성공회를 만든 뒤 앤 불린과 재혼했다. [42] 당연히 루돌프와 베체라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한 라리쉬 백작부인도 황후의 분노를 사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쫒겨나고, 오랫동안 남이었던 남편에게도 이혼당했으며 말년에는 고모 엘리자베트 황후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황실 이야기를 팔며 빈곤하게 살다가 1940년에 사망했다. 베체라가 황태자에게 접근하게 도운 것, 루돌프에게서 돈을 받으며 둘 사이를 몰래 중개하던 것까지 들통나면서 황후는 극대노해 조카를 궁에서 추방해버렸고, 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라리쉬는 이름조차 불러선 안될 자가 되었다. [43]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면 총 내부의 가스가 터져나오면서 총상 주변에 총구 모양의 화상이 남게 된다. 화상이 없다는 것은 멀리서 쐈다는 뜻이다. [44]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많은 내용이 사실과 정말 많이 다르다. 이 영화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현실 역사와는 무관한 패러럴 월드로 보는 것이 맞다. 여기선 약혼녀를 죽인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약혼녀는 주인공 마술사에게 뺏긴다. 덤으로 천하의 개쌍놈으로 모는데 그 약혼녀도 일조했다. [45] 조피는 왕녀가 아니라 한낱(?) 백작의 딸이었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계승권이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조피와 그녀의 자식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쌍하게 여긴 것인지 이들의 결혼과 함께 조피에게 호엔베르크 공작 작위를 주고 그 후손들이 계승하게 했다. [46]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 조직원으로 수감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공범 중 한 명은 잡혀서 16년 동안 복역하다 나와 1990년 93살로 죽었다. [47] 귀천상혼 문제로 조피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사라예보에서의 행사는 공식 행사이긴 해도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아닌 군 사령관으로서 참석한 행사였기에 아내도 동석할 수 있었다. 기필코 아내를 공식석상에 동행시키려는 페르디난트의 꼼수였으나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던 셈. 페르디난트가 필사적으로 남긴 유언은 "조피! 죽지 마시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였다고 한다.[61] [48]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남동생인 오토 프란츠 대공의 장남. [49] 1916년 11월 말에 즉위해 1918년 11월 퇴위 [50] 살해당하거나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헝 제국이 몰락하고 폐위된 데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헝가리 왕위 복위도 실패하자 실의에 빠져 병고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51] 바이에른의 게오르크 왕자 [52]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 [53] 토스카나 대공국 레오폴도 2세의 손자이자 양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도 2세의 외손자이다. [54] 유럽에서 군주의 정부 역을 맡는 여자는 대개 왕실의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자 감정 쓰레기통, 궁중 욕받이나 다름없었으며 어느 순간 군주의 관심을 벗어나면 한없이 무력해지는 힘 없는 존재이다. 자신을 한사코 질투하거나 물고 늘어지지 않고 묵묵히 넘어간 것만으로 대단히 감사할 일인데 카타리나가 보기에는 흔쾌히 자발적인 환대와 호혜도 전해주는 엘리자베트는 단순히 복종이 아니라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55] 적어도 애첩 문제와 그에 관한 뒷처리만큼은 엘리자베트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더 깔끔하고 현명했다. 두 사람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생팬 마리 폰 베체라를 애첩으로 삼아 사촌인 라리쉬 백작 부인까지 끌어들여, 불륜 행각을 벌이고 본래 아내인 스테파니 황태자비와 혼인무효화를 하겠다니 뭐니 온갖 추문을 일으키다가 동반자살하기까지 했다. [56] 그래도 엘리자베트는 아무나 애첩으로 고르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고 매우 세심하게 신경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내막이 있었다고 해도 로얄 미스트리스를 향한 세간의 평판과 취급이 얼마나 처참하고 나빴는지를 고려하면, 엘리자베트의 대우가 당대 황후 치고는 굉장히 너그럽다 못해 파격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57] 스포일러 시씨가 초반에 만났던 수수께끼의 육군 장교 '리샤르트'의 진짜 정체였다! 여기서는 실제와는 달리 적극적이고 좋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리고 비극으로 얼룩져 버린 실제 가정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게 프란츠 황제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58] 당시 동맹국 수장들끼리는 서로 자기 군대의 명예 원수직 호칭을 수여하였다. 그 외에도 일부 왕족들 역시 동맹국의 명예 장성 계급을 받기도 했다.


[59]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 이탈리아 왕국 움베르토 1세의 어머니 아델하이트가 친사촌 관계다. [60] 움베르토 1세의 장모 제노바 공작부인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종사촌이다. [61] 하지만 조피는 이미 페르디난트보다 먼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