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츠 선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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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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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98d4><colcolor=#fff> 이름 |
막시밀리안 마리아 미하엘 요한 밥티스트 프란츠 데 파울라 요제프 카스파어 이그나치우스 네포무크 (Maximilian Maria Michael Johann Baptist Franz de Paula Joseph Kaspar Ignatius Nepomuk) |
출생 | 1756년 5월 27일 |
신성 로마 제국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국 슈베칭겐 | |
사망 | 1825년 10월 13일 (향년 69세) |
독일 연방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재위 | 팔츠-바이에른의 선제후 |
1799년 2월 16일 ~ 1806년 1월 1일 | |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 |
1806년 1월 1일 ~ 1825년 10월 13일 | |
배우자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1785년 결혼 / 1796년 사망) |
바덴의 카롤리네 (1797년 결혼) | |
자녀 | 루트비히 1세,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카를 테오도어,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아말리, 조피, 마리아 안나, 루도비카, 막시밀리아나 |
아버지 |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
어머니 |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
형제 | 카를 2세 아우구스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아말리, 마리아 아나 |
종교 | 로마 가톨릭 |
서명 |
|
[clearfix]
1. 개요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선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와 구분하기 위해 Maximilian I. Joseph라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이에른을 크게 중흥시킨 군주다.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전쟁기의 혼란의 와중에서 시의적절하게 처신하며 바이에른의 국력을 강화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바이에른은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은 세 번째 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1]
2. 생애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77년부터 프랑스 왕국군의 장교로 복무하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망명했다.[2]1795년 형 카를 2세 아우구스트가 죽으면서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작위를 승계하였고, 1799년 후사가 없던 카를 테오도어의 뒤를 이어 팔츠-바이에른 선제후로 즉위했다.[3] 그가 선제후로 즉위하기 전 바이에른은 반프랑스 동맹에 가입해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전유럽을 휩쓸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하자 여기에 숟가락을 얹으면서 오스트리아령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 레겐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으로 손쉽게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전에 기여한 공으로 바이에른은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막시밀리안 1세는 1806년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재빨리 반프랑스 동맹에 가세했다. 덕분에 빈 회의에서 바이에른은 티롤을 제외한 나폴레옹 전쟁기에 획득한 영토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4] 빈 체제가 들어서면서 보수주의가 유럽을 휩쓸었지만, 시대 흐름을 읽는 눈이 탁월했던 막시밀리안 1세는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했다.
3. 기타
- 바이에른 선제후로 즉위하기 전 무너진 유리제조업자의 집의 잔해에서 친히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한 소년을 구출한 적이 있다. 그 소년이 고아이면서 어린 나이에 가혹한 노동으로 혹사를 당해왔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한 나머지 직접 숙식과 교육비를 지원해주다가, 성인이 되자 바이에른 왕립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이 소년이 바로 햇빛의 연속 스펙트럼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검은 선인 프라운호퍼 선을 발견한 물리학자인 요제프 프라운호퍼다.[5]
-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인이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외조부이다.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녀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으므로, 현 스웨덴 왕실에도 그의 혈통이 이어져 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colbgcolor=#fff3e4,#331c00>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ederick Michael,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
<colbgcolor=#ffffe4,#323300>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
|
팔츠츠바이뷔르켄비르켄펠트 궁정백 크리스티안 2세 (Christian II,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Birkenfe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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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폴슈타인의 카타리나 아가테 여백작 (Countess Katharina Agathe of Rappoltste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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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우자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Caroline of Nassau-Saarbrück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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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우자르브뤼켄 백작 루트비히 크래프트 (Ludwig Kraft, Count of Nassau-Saarbrück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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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로헤의 필리피네 헨리에테 (Philippine Henriette of Hohenlo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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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Franziska of Sulzb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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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줄츠바흐의 공세자 요제프 카를 (Count Palatine Joseph Karl, Hereditary Prince of Sulzb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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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줄츠바흐 궁정백 테오도어 유스티스 (Theodore Eustace, Count Palatine of Sulzb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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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로텐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레 공녀 (Princess Maria Eleonore of Hesse-Ro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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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노이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조피 여백작 (Countess Palatine Elisabeth Auguste Sofie of Neu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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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3세 필리프 (Karl III. Philipp) |
|||
류드비카 카롤리나 라드빌라이테 (Liudvika Karolina Radvilaitė) |
4.2. 아내
첫번째 아내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 1765년 4월 14일 ~ 1796년 3월 30일) |
두번째 아내
바덴의 카롤리네 ( 1776년 7월 13일 ~ 1841년 11월 13일)[7] |
4.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Augusta Wilhelmine of Hesse-Darmstadt) |
||||
1남 |
루트비히 1세 (Ludwig I) |
1786년 8월 25일 | 1868년 2월 29일 |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 슬하 4남 5녀[8] |
1녀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아우구스테 (Augusta, Duchess of Leuchtenberg) |
1788년 6월 21일 | 1851년 5월 13일 |
외젠 드 보아르네 슬하 2남 5녀[9] |
2녀 |
오스트리아의 황후 카롤리네 (Caroline, Empress of Austria) |
1792년 2월 8일 | 1873년 2월 9일 |
|
프란츠 1세 | ||||
2남 |
카를 테오도어 왕자 (Prince Karl Theodor) |
1795년 7월 7일 | 1875년 8월 16일 |
마리 안-소피 페틴 슬하 3녀 |
바덴의 카롤리네 (Caroline of Baden) |
||||
3녀 |
프로이센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Elisabeth Ludovika, Queen of Prussia) |
1801년 11월 13일 | 1873년 12월 14일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4녀 |
작센의 왕비 아말리 (Amalia, Queen of Saxony) |
1801년 11월 13일 | 1877년 11월 8일 |
요한 슬하 3남 6녀[10] |
5녀 |
오스트리아의 조피 대공비 (Archduchess Sophie of Austria) |
1805년 1월 27일 | 1872년 5월 28일 |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슬하 4남 1녀[11] |
6녀 |
작센의 왕비 마리아 안나 (Maria Anna, Queen of Saxony) |
1805년 1월 27일 | 1877년 9월 13일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12] |
7녀 |
바이에른 공작부인 루도비카 (Ludovika, Duchess in Bavaria) |
1808년 8월 30일 | 1892년 1월 25일 |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슬하 5남 5녀[13] |
8녀 |
막시밀리아나 공주 (Princess Maximiliana) |
1810년 7월 21일 | 1821년 2월 4일 |
[1]
물론 이 전부터 바이에른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선 굉장히 강성한 국가였으나 이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을 이룬 적이 있고 황제 공위시 북독일에서
섭정 자격을 보유한 전통의 라이벌
작센 선제후국,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던
하노버 선제후국이 있었기에 완벽하게 세 번째라고 말하기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2]
고향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은 이미 프랑스군에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3]
1777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대가 완전히 끊기면서 팔츠계를 중심으로 재통합되었지만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와 바이에른 한쪽의 대가 끊겨 다른쪽이 상속받을 경우
황제선거에서의 선거권을 1표로 제한하였고, 카를 테오도어도 1778년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만하임에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
뮌헨으로 옮겨가면서
루트비히 4세 이래로 뮌헨이 다시
비텔스바흐 가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4]
티롤은 안드레아스 호퍼(Andreas Hofer 1767~1810)를 위시한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하는 주민들이 많아 바이에른은 티롤 점령 내내 농민 게릴라군에게 휘둘렸고 결국 빈 회의에서 반프랑스 동맹을 주도한 오스트리아에게 반환했다.
[5]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의 2014년판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참고로 프라운호퍼는 어릴 적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고작 39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가 연구하고 있던 광학 이론은
바이에른 왕국의 군사기밀이었던지라, 그의 구술을 왕립 조폐국장이 받아적어서 작성된 유언장도 기밀문서로 지정된 바 있다. 때문에 프라운호퍼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발견한 이론들이 기밀로 지정되면서 다른 과학자들과의 정보 공유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과학의 발전을 위해 모든 학술 논문은 오픈소스로 공개되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6]
아들
루트비히 1세와 며느리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연 축제가 옥토버페스트의 시초다. 정작 그 아들은 불륜으로 평판을 깎아먹고
1848년 혁명으로 양위했다.
[7]
공교롭게도 카롤리네는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전처 아우구스테 빌헬미네의 사촌 언니인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의 차녀이다.
[8]
막시밀리안 2세,
오톤 1세,
알렉산드라 공주 등
[9]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요세피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
브라질의 황후 아멜리아 등
[10]
알베르트,
게오르크, 사보이아제노바 공작부인 엘리사베타(
이탈리아 왕국 국왕
움베르토 1세의 숙모이자 장모)등
[11]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대공 등
[12]
위에 나온 아말리의 남편
요한의 형이다. 즉,
겹사돈.
[13]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자 헝가리의 왕비 엘리자베트,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비 마리아 소피아 등
[분류:바이에른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