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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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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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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재 선발3. 조직 중재자4. 법제 정비5. 군사 성과
5.1. 팔진도 정리
5.1.1. 전승
5.2. 수읽기와 심리전을 바탕으로 한 회전, 야전, 퇴각전의 대가5.3. 군사 사상5.4. 무기 개발
6. 외교7. 이민족 연계8. 생산력 회복과 발전
8.1. 농업 발전8.2. 비단 산업 발전8.3. 염업 발전8.4. 광업 발전
9. 화폐 정비10. 한중 개발11. 반란 진압과 통치력 확보12. 남중 개발13. 제갈량의 도보(圖譜)14. 발명품과 이용품15. 총평16. 여담1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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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량의 업적을 다루는 항목이다.

사실 제갈량은 소설 삼국지, 특히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듯이 기략을 꾸며내는 군사적인 천재라기 보다는 정치의 천재였다.[1] 픽션보다 현실이 더 대단한 사람인 사례로, 형주를 잃고 이릉대전 이후 거의 망국의 길로 접어든 촉한을 5년 안에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늘려 북벌이 가능하게 한, 행정과 정치의 초인이라 봐도 좋다.

지금 보면 당연하다 할 만한 업적이지만 제갈량이 살았던 시기는 지금보다 1,700년도 전의 시기이다. 사실 제갈량이 현실에서 이룬 업적은 오버 테크놀로지에 가까운 것으로, 연의에서 묘사된 군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 한 번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대부분을 잃고, 쫄딱 망한 나라를 단 5년 만에 부강한 부자나라로 만들어 건국 당시 국력 경제력이 열 배 이상 차이나는 위나라를 따라잡고 북벌을 시작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천재성을 쥐어짜 극한까지 펼쳐낸 천하의 기재임은 연의 소설이나 실제 역사에서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인재 선발

건국군주 유비가 붕어하고 유선이 제위에 오른 이후 제갈량이 가장 먼저 손을 댄 작업은 인재들을 선발하여 요직에 채용하는 것이었다. 이릉대전을 전후로 하여 다수의 장수와 참모들이 사망하거나 자리를 비운 탓에 유능한 관료들을 충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2] 이릉에서 살아 돌아온 오반, 진식, 상총, 요화 등을 기용하고 비시 진밀처럼 불상사에 휘말려 물러났던 인재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면면들이 제갈량의 보좌관으로 발탁되었다. 그외 제갈량은 223년부터 225년까지 수많은 재야의 인재들을 촉한 조정에 초빙하기 위해 몸소 그들을 초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릉군 출신의 선비 장완은 본래 벼슬길이 순탄치 못했다. 광도현(廣都縣)​의 장으로 일할 때 일부 업무를 태만히 하고 술에 취해 지내다가 유비의 감찰에 걸려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잠재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고 있었는지 제갈량은 유비에게 변호를 아끼지 않았고, 이제 자신이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되자 특별히 장완을 불러 동조연(東曺椽)​에 임명하고 다시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장완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있고 또 형주 손권에게 넘어갈 당시 항복한 반준(潘濬)​의 사촌지간[3]이라는 점도 감안하여 요직에 오르는 것을 사양했지만,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권유한 끝에 그의 최측근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끝내는 그의 정치적 후계자의 지위에 어울리는 걸출한 정치가로 성장했다.

촉군 성도현 출신 선비 장예는 남중 반란 때 익주 태수로 반역 수령에게 붙잡혀 손권에 바쳐졌다. 그 후 수년 동안 제갈량의 마음속에는 이 사람이 있었는데, 등지가 동오의 사신으로 간 동안 제갈량의 부탁대로 그의 석방도 요구하였다. 마침 양국이 새로이 외교관계가 성립하자 손권이 등지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지만 손권은 곧 장예가 박식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호랑이를 풀어 산으로 돌아간 꼴이 된 것을 몹시 후회하여, 즉시 사람을 보내 쫓아가게 하였는데, 장예는 이미 황급히 촉으로 돌아갔다. 장예가 돌아오자 제갈량은 즉시 승상부의 중책을 맡겼고 촉한의 유능한 관리가 되었다.

장완과 장예 외에도 비의, 동윤, 여예, 등지, 마충, 장억 등 뛰어난 인재들이 합류하면서 조정은 조금씩이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내정계 인재들은 모두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 제갈량의 심복 내지 후계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성도 남쪽에 높은 대를 쌓아 각지의 선비들을 초청했고[4], 몸소 익주 출신의 선비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등용했다. 제갈량의 영향과 용인 아래에서 그의 뒤를 잇는 촉한의 군신들은 청렴하고 검소하게 지냈다. 그의 뒤를 이은 비의 강유 모두 검소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전에 이엄보다 관위가 낮았던 양홍 이엄과 동급 인사로 발탁한 바가 있었고, 뒷날에는 양홍보다 관위가 낮았던 하지를 양홍과 동급 인사로 발탁하여 서쪽 익주 사람들에게 인재를 잘 쓴다는 찬탄을 받았다. 1차 북벌 당시 왕평의 훌륭한 뒤처리 및 사후조치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위나라 항장 출신의 강유, 왕평 등도 중용했고 실적의 입증을 중시했다. 당시 제갈량이 인재의 천거를 승상부 관리들의 최우선 책무로 여겼음은 다음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나라에 충성하면서도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는 사람을 추천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 없다. 사람을 추천하는 데는 각기 그가 숭상하는 자를 추천하려 애쓰는데, 지금 요연(姚掾​)[5]이 추천하는 사람들에는 강(剛)한 사람과 유(柔)한 사람이 함께 있어 문무 관리들을 널리 채용할 수 있으니, 박학하고 우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여러 연​(掾)​들은 각기 이를 본받고 희망에 부응하라.

또한 제갈량은 새로운 인재들을 선발하는 것 못잖게 기존의 인재들을 분발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젊을 적 친구 서서와 유비 생전에 온갖 노고를 다한 동화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에게 간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을 것을 공언했으니, 실질적으로 행정의 통수를 맡고 있는 입장으로서 언로가 막히거나 본인의 독주가 조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선발 기준과는 영 동떨어진 위연이나 양의능력은 있으되 인격은 수준 이하인 인물들이 버젓이 승상부의 문무 최고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제갈량 개인의 기준에 따라 유비 생전부터 요직에 있던 인재들을 내치는 것이 정치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갈량 자신이 그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음은 제갈량의 저술인《논제자(論諸子)》의 내용이다.
노자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는 못했다. 소진 장의는 언변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는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 것에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는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 것에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는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은 몰랐다. 왕가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본문만 놓고 보면 마치 옛 사람들의 단점과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나, 요점은 그 다음 구절이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제갈량이 오히려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점보다 장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장완, 비의, 동윤, 강유처럼 능력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모두 훌륭한 인재들을 더 중시하고자 했겠지만, 사람이 어느 면에서나 완벽하기를 바라기란 무리인 만큼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사람이라 해도 가능한 한 중용하고자 했다. 물론 마속이나 이엄처럼 만회를 요구할 수 없을 만큼 큰 실책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제갈량은 그 자신도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이렇게 파촉 지역의 재능 있는 인재들은 앞다투어 나라를 위해 힘썼다.

3. 조직 중재자

이 해, 선주(先主)[6]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봐서 뜻을 이해할 수 있지만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듣는데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선주가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라 하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장비와 마초는 직접 봤으니 이해하겠지만 관우는 못봤으니 이번 인사가 충분히 파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런 미묘한 교통상황을 상사에게 짚어줄 수 있는 중간자가 있다면 조직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이런 일화는 또 있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들었지만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니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높은 호승심을 알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孟起)[7]는 문무를 겸비하고 용맹함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경포, 팽월과 같은 무리입니다. 응당 익덕(益德)[8]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함과 출중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고대 영웅들 급으로 맞춰 어마어마하게 치켜세워줌으로써 마초의 체면을 살림과 동시에 그보다도 관우 당신이 더 대단하다는 말로써 마무리. 물어보는 사람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편지에서 언급된 당사자에게 내용이 알려져도 최대한 기분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답변인지. 조직 내 분란이 없으려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아는 사람의 답변이 아닐지.
장비는 일찍이 유파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유파가 말을 섞지 않아 매우 분노했다. 제갈량은 유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경모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문무를 결집하여 대사를 정하려고 하십니다. 그대는 비록 고상한 천성을 갖고 있지만, 굽히려는 뜻이 적습니다.​

라고 하자, 유파는,

대장부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응당 사해의 영웅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어찌 무사와 함께 말을 하겠습니까?

라고 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말했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자초는 그것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북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땅을 이용하는 것인가. 어찌 혼자 일을 이루려고 하는가?

제갈량 역시 말했다.

장막 속에서 계책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제가 자초와 비교하면 한참 멀었습니다! 만약 북채와 북을 잡고 군문에 서서 병사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용기를 내게 하려면 마땅히 저 사람과 의논해야 합니다.

문전박대당한 장비의 심정을 헤아려줌과 동시에 개판인 유파의 성격상 장점을 부각하여 주군이 용서하고 쓰게 하는 화술이 아닐 수 없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장비, 싸가지 없는 유파, 주군 유비 세 명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발품 팔았을 제갈량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 유파가 장비를 박대한 건은 장비 본인은 물론 유파도 굳이 동네방네 떠들 필요 없는 굉장히 사적인 일이었을텐데도 제갈량은 그 정보를 또 집어내서 유비한테 늘어놓았다.​

제갈량 임관 전후로 유비군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는 인재가 확실히 늘어났다는 부분인데, 이것은 제갈량의 소통가 능력이 발휘되어 인재 간 윤활유 역할을 했기에 인재들이 유비를 위해 모여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량의 자발적 개고생 일 중독 라이프는 유비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걸지도.

4. 법제 정비

내정건설은 유능한 인재를 필요로 하는 것 말고도 완벽한 법체계를 필요로 한다. 대표적인 것이 촉과(蜀科)를 제정한 것이다.[9] 촉과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제갈량 사후 상파라는 말단 관리의 일화를 보면, 군 단위의 횡령 사건을 2년에 걸쳐 수사했고, 무죄가 드러나자 관련 인물들을 방면하고 승진시켰다고 한다.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던 위나 오에 비하면 체계적인 재판 수사가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제갈량은 내분이나 정쟁의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하라는 일 제대로 안 하고+ 구석 타령하며 역적질 사주하고+황제에게 거짓말하고+정권 최고 책임자에게 개긴 인물을 사형시키지 않고 유배에서 끝낸 건 동시대에 촉한밖에 없다. 심지어 아들은 연좌도 안 걸리고 중랑장으로 계속 복무했다. 그 후 제갈량은 이엄의 아들 이풍에게 편지를 썼고, 제갈량은 이엄이 귀양가게 된 이유를 간곡히 설명하면서 이풍이 이엄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깨닫도록 아버지를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 이런 풍조는 유비 시절부터 있었는데 위에 투항한 황권의 식솔들을 유비가 살려준 것이 그 예시로, 실제로 이 때 살아남은 황권의 차남 황숭 제갈첨과 함께 촉한 마지막 저항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함부로 사면하는 것을 꺼렸다. 이는 선제였던 유비부터가 그랬던 사항으로 제갈량은 "사면에 인색하다는 글에 대해 답함."이라는 글에서 일찍이 "선제께서 진원방, 정강성과 교류하면서 매번 (그들이) 가르침을 주어 치란의 도를 모두 언급했지만 사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라고 했던 것을 인용하여 유경승 유계옥 부자처럼 매년 사면해선 안된다고 봤다. 당태종 이세민은 이런 제갈량의 법 적용을 긍정적으로 보아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사면하지 않아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했다.

제갈량은 법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처벌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친한 자나 귀한 자도 있었고 공신도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든지 형벌을 범하면 제갈량은 일률적으로 엄하게 처리하고, 결코 편파적이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제1차 북벌 실패 당시에는 전쟁 패배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관직을 강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갈량이 법치로 다스린 촉한에서는 단순히 가혹한 형벌을 쓰는 게 아니라 교화에 바탕을 둔 인간적인 배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로서 "상벌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다." 건위(犍爲) 사람 이흥은 "(제갈량의 형법 집행이)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답다."고 찬탄하는 동시에 "제갈량은 관중 안영에 그치지 않고, 고요 이윤에 비견된다."고 극찬했다.

제갈량의 법치에는 권선징악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위로는 군주와 신하가, 아래로는 백성들이, 그에게 위세가 있고 엄숙하면서도 후덕하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진심으로 탄복했다. 백성들의 말에는 원한이 없고, 마음에는 복종이 있으며, 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형벌을 가해도 미워하지 않고, 주살해도 분노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선진(先秦) 법가의 실천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제갈량의 법치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화를 먼저하고, 법치는 그 후이며, 법 집행을 엄격히 하고, 공정하게 신용을 지킨다." 이는 공자가 송사를 처리하여 형벌을 부과하는 것보다 교화를 앞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법이라고 본 것과 동일한 선상이다.

5. 군사 성과

5.1. 팔진도 정리

지세가 험하고 말이 귀한 촉한은 위와 달리 기병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대부분이 보병이었는데, 보병이 기병보다 많이 불리한 것은 전장의 상식. 따라서 촉한은 팔랑크스처럼 대(對) 기마 부대에 특화된 군 진영을 갖추거나, 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전략전술이 필요했다.

제갈량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팔진도를 개량해서 정립했는데, 현대까지 내려오는 가장 유명한 팔진도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가적인 함정 같은 것으로 묘사했지만 이건 후대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고, 원래는 군의 포진법과 운용법을 말한다. 당대 지중해 문명의 팔랑크스 레기온 같은 군 포진과 후대 원앙진 같은 운용법을 함께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제갈량은 그 팔진을 잘 이용하고 그것이 특기였다. 오늘날까지 제갈량 팔진도는 제갈량 고유의 전술로 지칭되기에 이른다.

참고로 제갈량이 팔진을 만들고 잘 썼다는 근거는《제갈량전》에서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기록,《옥해》에도 "그가 팔진법으로 군사를 조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서진의 진남장군 유홍이 건위(犍爲)[10] 사람 이흥을 시켜 쓰게 한 글에서는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도가 손자, 오자의 병법에도 없는 것이라 극찬하며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팔진도를 만들었다."고 했으며,《수경주》에는 "제갈량이 팔진으로 군사를 이끌었다."고 쓰여 있고,《원화군현지》,《원반구역지》등에도 "제갈량이 팔진을 잘 썼다."는 내용이 있다.

이 전투 진영은 당대 중국에서 최적화된 진영으로 촉한의 군대 통제 및 운용은 팔진도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실제로 제갈량이 정립한 군사 제도는 매우 우수해서 사마소 촉한을 멸망시킨 뒤 가장 먼저 제갈량의 군사 제도를 배워오게 했다고 하며, 서진의 명장 마륭도 팔진도를 활용해서 강력한 선비족 수장인 독발수기능을 대파하고 사로잡아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 전법은 마차를 대(對) 기병 방책으로 앞세우고 뒤에서 노병이 적을 쏜다던가, 노병과 궁병을 잘 배치하고 보병으로 적을 끌어들여 십자포화 형식으로 사격한다던가 하는,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있는 기본 대형이나 상황의 전술이라는 의견이 있다.

송사》지(志)에 따르면 당나라의 명장 이정은 이 팔진법을 개량해서 최강의 대(對) 기병 진법인 육화진을 개발하게 된다. 남송의 무신 악비가 등장하기 전까지 실전에서 활용되었을 정도로 중국에서 애용되었으며 과장은 있겠지만 한참 뒤인 송대에 이르기까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당 태종 이세민도 신하들과 군사를 논하며 제갈량의 이름을 거론했다고 한다.

진형 구축에서도 효능이 좋아서 속전속결 전문가였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진형을 보고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전문 무관인 사마의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제갈량의 군사적 식견은 높았던 것이다.

5.1.1. 전승

승상 제갈량이 부릉의 힘센 병졸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그대의 팔진(八陣)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11]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제갈량전 추석 촉기, 유홍이 이흥을 시켜 쓰게 한 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이나 그에 쓰였던 원융(元戎)이 이전에 없던 독창적인 것이며 제갈량이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당대의 인식을 반영한다.
마륭은 표지를 세워놓고 4균(鈞)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36균[12]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렀다. 아침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총 3,500명이 모집되었는데 마륭은 이를 보고 말했다.[13]
"충분하다."
진서 마륭열전
마륭이 서쪽으로 온수(溫水)를 건너자 오랑캐 수기능 등이 만[14]을 헤아리는 무리로 일부는 험지를 타 맢을 막아서고, 일부는 복병을 두어 뒤를 끊었다. 마륭은 팔진도(八陣圖)에 의거하여 편상거(偏箱車)[15]를 만들었고, 넓은 땅에서는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좁은 길에서는 법칙대로 목실(木屋)을 수레 위에 올렸다.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니 궁시가 그곳까지 미치고 쏜 화살이 보기 좋게 명중하여 활시위의 소리에 응하듯이 적이 넘어졌다, 기책을 간간이 발하니 적이 나와 대적할 뜻을 잃었다.[16]
진서 마륭열전, 중국 사서들은 수많은 전쟁을 기록하고 있으나 특정한 진법으로 작전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법을 처음 만들었다는 황제(黃帝)의 탁록(涿鹿) 전쟁이나 팔진도로 명성을 날린 제갈량의 전쟁 기록에도 무슨 진법으로 싸웠다는 내용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진법이 군사적 기밀사항이라 사관들이 인지할 수 없었던데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진서에서 마륭이 팔진도에 따라 싸웠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팔진도의 위력이 서진은 물론 (진서가 편찬된) 당대(唐代)에까지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이 기록을 통하여 서기 234년에 제갈량이 죽은 뒤 45년이 지났는데도 서진에서는 제갈량이나 그의 팔진도 전법을 연구하고 활용했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당대 팔진도는 이전의 병법에 없는 제갈량만의 독특한 병법으로 여겨졌다. 손오의 병법에도 없는게 제갈량의 팔진도라고 한 진남장군 유홍과 제갈량의 팔진도를 완벽히 습득한 진협, 팔진도를 실제 사용한 마륭은 완전히 동시대 사람이다.
제갈량은 기발한 착안을 하여 연노 목우유마를 제작하였고, 병법을 추리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주석한 것을 보면 제갈량이 만든 연노는 원융(元戎)이라 불렀는데 철(鐵)로 화살을 만들었고 길이는 여덟 치였다. 연노 하나는 동시에 10개의 화살을 발사하였다.
학경 속후한서, 먼저, 편상거에는 숫자를 제시하지 않았어도 쇠뇌와 활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쇠뇌는 편상거에 고정시키고 활은 군사들이 휴대하였다. 먼 거리에 있는 적은 쇠뇌로 사살하고 중․근거리에 있는 적은 활로 쏘았으며 백병전에는 창이나 칼과 같은 병장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제갈량은 한 번에 10대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쇠뇌를 개발했는데 그 쇠뇌에 사용하는 화살은 길이가 여덟치(약 24cm)이고 화살 자체가 철로 만들어져 중량감이 상당했기에 적에게 타격을 주기 쉬움을 알수 있다. 일반 화살들의 길이가 2자 6치(약 79cm)에서 3자(약 90cm)인 점을 감안하면 철시(鐵矢)는 매우 짧아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위력을 발휘한 조선의 편전(片箭)[17]과 유사한 점이다.
제갈량의 팔진은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촉의 10만 군대로는 대다수가 기병(騎兵)으로 편성된 위의 30만 상비군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궁노부대(弓弩部隊)를 대량으로 양성했다. 이 궁노부대는 제갈량이 창안한 약 6미터 길이의 목병륜(木柄輪)과 7.5미터 길이의 죽병륜(竹柄輪)을 장비하여 거마(拒馬)와 녹각(鹿角) 같은 장애물을 곁들여 이용하면서 적의 기병이 600미터 정도 접근해 왔을 때부터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군(遊兵) 24개 부대를 별도로 배치하여 궁노의 공격에 붕괴된 적군을 주살하였다.
전소림(田昭林, 중국학자), 제갈량의 팔진도(諸葛亮的八陣圖) 군사역사연구 제2기(軍史歷史硏究 第二期) 1999, p.124
3만의 적은 병력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를 정벌하려면 어때한 전략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은 정병(正兵)으로 공략하려고 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장군이 지난 번 돌궐을 평정할 때에는 기병(奇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정병을 사용하려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갈량 남만을 정벌하여 그 군주인 맹획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을 때 바로 정병을 사용한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진(晋)나라의 마륭 양주 강족을 토벌할 때에도 (제갈량의) 팔진도에 의하여 편상거(偏箱車)를 활용하였는데, 지세가 광활하고 평평하면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만들어 적의 진공에 대비하였고, 도로가 협착하면 수레 위에 판자 지붕을 만들어 덮고 적과 싸우면서 진군을 계속한 바 있소. 그러니 정병은 옛날의 명장들도 중요시하였던 것이기는 하오.

이정이 말하였다.

지난 번 신이 돌궐을 토벌할 때에 서쪽으로 몇 천리를 진격하였습니다. 그 때 만일 정병을 쓰지 말았다면 어찌 그렇게 멀리까지 원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녹각거(鹿角車)와 편상거(偏箱車)는 전투에 매우 중요합니다. 군사들의 전투력을 절약할 수 있는가 하면, 전진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전진하면서 대오를 정돈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교대로 상황에 따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마륭은 ( 제갈량의) 옛 전법을 깊게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위공문대
의당 근처의 주(州)에서 무예에 뛰어나고 용감한 4만 명과 경사의 2만 명을 징발해, 6만 명을 모아 무사로 삼고, 후원 내에 정북대장군부(征北大將軍府)를 세워,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도량과 식견이 있는 이를 선발해 담당하게 하고, 아래로는 관속을 둬서, 3군(軍으)로 나눠, 2만 명은 오로지 궁술을 익히고, 2만 명은 오로지 창과 방패를 익히고, 2만 명은 오로지 말을 타고 삭을 씀을 익혀야 합니다. 전장을 세워, 10일에 한 번 연습하며,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을 채용해, 평지에서 적을 막는 방식으로 삼아, 그들이 병기의 적합함을 깨닫고, 정기(旌旗)의 규칙을 알아보게 하며, 기계가 정교하고 견고하면, 필시 적을 막는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서(魏書) 열전(列傳) 54권, 고려(高閭)전
진법은 희녕[18] 2년 11월, 조설(趙禼)이 제갈량의 팔진법을 조사하여 구하고(講求) 변경의 장수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관리의 임기응변(應變)으로 삼았다. 곽규와 조설에게 공동으로 조서를 내려 조사하여 구하게 하니(講求) 지형을 보고 헤아려 정히 진도를 임금에게 아룄다.
송사(宋史) 지(志) 195권, 병9
황제(黃帝)가 처음 팔진법(八陣法)을 설치해, 탁록에서 치우(蚩尤)를 물리쳤다. 제갈량(諸葛亮)이 팔진도(八陣圖)를 어복(魚復) 모래펄 위에 만드니, 돌을 쌓아 8 행(行) 이었다. 진晉의 환온(桓溫)이 이를 보고는 이르길 : "상산사세(常山蛇勢)[19]로다."[20] 이가 바로 구군진법(九軍陣法)이다. 수(隋)때 이르러 한금호(韓擒虎)가 그 법에 정통하여, 그의 생질 이정(李靖) 에게 전수했다. 이정은 당시 오래도록 어지러워서, 무관 중 통달하여 훤히 아는 이가 자못 많았기에, 육화진(六花陣)을 만들어서 구군의 진법을 변경하여, 세상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게 했다. 대저 팔진이 바로 구군으로, 구군은 방진(方陣)이다. 육화진이 바로 칠군(七軍)으로, 칠군은 원진(圓陣)이다.[21]
송사(宋史) 지(志) 195권, 병9
팔진도는 연병, 행군, 작전, 숙영 및 각종 병종 간의 밀접한 배합에 관한 진법이다. 그 기본 진형은 종횡으로 각각 8행으로, 이 때문에 팔진(八陣)이라 한다. 그러나 기미의 변화에 따라 많은 진법이 파생되어 나오니, 후세의 부회는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명협
이에 앞서 진협은 문제(文帝)에게 기대를 받았는데 유달리 재능이 탁월하여 군령을 명확히 이해하였다. 문제가 진왕(晉王)이 되자 군대를 관리하는 일을 믿고 맡겼다가 촉한을 멸망시킨 후에는 제갈량의 진법과 그것을 운용하는방법, 갑을교표치(甲乙校摽幟)로 지휘하는 요령 등을 진협에게 주라는 영을 내렸다. 진협은 그에 대한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숙달했다. 드디어 진협은 궁궐 안의 군대를 관리하는 전중전병중랑장(殿中典兵中郞將)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무제(武帝, 265-290)가 출입할 때마다 백수번(白獸幡)을 들고 어가의 좌우에서 의장대들을 지휘했는데 진협이 지휘하는 부대는 진형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기강이 매우 삼엄하였다.
진서 직관지, 위 내용은 진협이 제갈량의 진법을 학습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진협의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본 사마소는 평소 그를 총애하다가 촉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촉에서 입수한 제갈량의 진법을 진협에게 주어 배우게 하였다. 이때 진협이 공부한 제갈량의 진법은, 포진 방법과 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응용술(圍陣用兵倚伏之法) 및 깃발로 각급부대의 지휘관들을 지휘하는 방법(甲乙校摽幟) 등이라고 하였다. 사마소에게 제갈량의 진법을 받은 진협은 모든 것을 다 암기하고 숙달하였다. 이후 진협은 궁궐 의장대를 지휘하는 장군이 되었다가 사마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 원제(元帝)로부터 제위를 찬탈해 황제가 되자 출입할 때마다 승여(乗輿)[22]의 좌우에서 백수번을 잡고 의장대들을 지휘하였다. 그는 제갈량의 용병법에 따라 지휘하였기에 의장대의 진열은 매우 정 렬되어 있고 엄숙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과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통하여 제갈량이 혁신한 팔진법의 일면을 탐색해 볼 수 있다.
태강(太康, 280-289) 말에 무제가 꿩 사냥에 나가자 진협은 이때도 도수사자(都水使者)가 되어 따라 나갔다. 거가(車駕)를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각자 사냥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사냥을 끝내기 위해 분산된 거가들을 소집했으나 시간이 지나도록 모여들지 않았다. 그러자 무제는 진협에게 군사들을 집합시키라고 하명하였다. 이에 진협이 백수번을 들어 흔들자 잠깐 사이에 집합이 완료되었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진협의 통솔력을 칭찬했고 진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이 글을 통하여 제갈량의 팔진도는 일사불란하면서 신속 정확한 통신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제의 사냥에 따라 나간 군사들은 황제와 고관들의 사냥을 돕기 위해 각처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볼 때는 통제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군사들을 집합시키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이 생각되었지만 진협이 백수번을 한 번 흔들자 그 신호를 본 군사들은 잠깐 사이에 집합되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진협의 지휘통솔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로써 제갈량의 진법은 부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였고, 그 조직을 지휘하는 체계 역시 주도면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협은 왜 백수번을 갖고 다녔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다음과 같은 문헌들에서 풀어 볼 수 있다.
제갈량과 사마의가 전쟁을 하게 되자 사마의는 무장을 갖추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해 제갈량의 동태를 살펴보게 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 온 사람이 보고 하길 "제갈량은 간소한 수레를 타고 칡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삼군을 지휘하는데 군사들은 그 백우선의 신호에 따라 진격하거나 정지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 보고를 들은 사마의가 탄식하면서 "명사(名士)로다"라고 말하였다.
송나라 증조(曽慥)가 편찬한 유설(類說), 위 글은 촉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출정한 사마의가 첩자를 보내 제갈량의 움직임을 탐지한 내용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 제갈량이 어떤 모습으로 전장지휘를 했는가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첫째는 일국의 승상인 그가 타고 다닌 수레는 보통 사람들이 타는 장식없는 수레였고, 머리에 쓴 것은 가난한 선비들이 쓴 갈건(葛巾)[23]이었다. 이로써 그가 어느 정도 검소하였는가를 알게 한다. 둘째는 백우선을 갖고 군사들을 지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우선은 흰 깃털로 만든 부채이다. 이것은 멋을 내기 위한 사치품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흰색은 불빛이 없는 야간에도 잘 보이기 때문에 주야 겸용하기 위해 선택했던 지휘기구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검소하고 단아한 제갈량의 모습을 전해들은 사마의는 제갈량을 ‘명사(名士)’라고 했는데 이 말 속에는 그가 가볍게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란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위 글을 통하여 진협의 백수번은 진법을 운용하기 위한 도구란 것을 알게 한다. 다만 백우선 대신 흰 색 깃발을 사용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동진의 지인소설 어림, 송나라 정대창(程大昌)이 지은 연번로(演繁露), 왕응린(王應麟)이 쓴 옥해(玉海), 명나라 조학전(曹學佺)이 지은 촉중광기(蜀中廣記) 등 여러 문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나라 때는 오직 진협과 마륭이 제갈량의 옛 진법 한 두가지를 사용했을 뿐이다. 마륭은 3,000명을 모병하여 서량을 평정해 그의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나, 진협에 대한 일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교표치(校標幟) 라는 군대의 한 가지 기물만 사용했을 뿐인데도 여러 차례 혼란을 수습하였다. 부대 간에 다툼이 일어나 도성의 궁궐이 포위당하는 위협을 받았으나 백비번(白飛幡)을 한 번 휘저으니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풀고 싸우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가 휘(麾)의 신호를 가지고 효력을 본 것이 여러 차례나 되는데, 누가 옛날의 진법을 일러 후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군정(軍政)은 일상생활이나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24]
진협과 마륭의 일은 후대에서도 관심사가 되었다. 한 예로 송나라는 황제까지 나서서 진법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했던 시기가 있었는데[25], 이 때도 진협과 마륭의 고사는 비중있게 다루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위 글은 진부량(陳傅良)이 쓴 역대병제(歴代兵制)에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는 '옛날에 사용했던 진법은 지나간 유물이 아니라 후대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법과 같은 군사 분야의 제도들은 군대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이나 국가의 통치수단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같은 시기의 장여우(章如愚)가 편찬한 군서고색(羣書考索)[26]과 왕응린(王應麟)이 쓴 옥해(玉海)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고로 송나라 시절은 송사 예문지에 남아있는 제갈량집 14권과 제갈량행병법(諸葛亮行兵法) 5권, 무후팔진도(武侯八陣圖) 1권 등이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는 등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 현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시기였다.[27]

《진서》< 마륭열전>에 따르면 마륭은 팔진도를 이용하여 독발수기능을 토벌했는데 불과 3,5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적군을 토벌했다고 한다.

이는 무경칠서 중 하나인 당태종 이위공문대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이 책 자체는 당태종 이정이 실제 말한 것이 아닌 위서이다. 그러나 사고전서 총목제요에 따르면 비록 책은 위서이나 옛 이정과 당태종(貞觀)의 유사(遺事)를 따라 당나라 말기, 송나라 초기의 선비가 지은 책이었고 정원(鄭援)의 정관쇄언(井觀瑣言)에서는 학식과 모략이 있는자가 지었다고 일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제갈량과 마륭이 사용했던 팔진도의 녹각거와 편상거가 당나라 말기 ~ 송나라 초기 이 시대에도 전해지고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또 이위공문대뿐만 아니라 송사 지(志) 195권에도 희녕 2년(1069년) 11월 당시 송나라 변방의 장수들에게 제갈량의 팔진법을 연구하여 가르치고 희녕 8년(1075년) 2월 당시 황제인 신종이 신하 장성일(張誠一)과 이헌(李憲)과 함께 이정이 제갈량의 병법인 팔진을 이어 육화진을 만들었다고 말하는게 나온다. 참고로 이위공문대 무경칠서로 국가에 의해 퍼진 것은 희녕(1068년 ~ 1077년) 다음 연호인 원풍(1078년 ~ 1085년) 연간인 원풍 7년(1084년) 8월로 즉, 이위공문대가 유명해지기 이전부터 제갈량의 팔진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육화진은 팔진을 바탕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28]

이것은 제갈량 사후 그의 전략 • 전술을 사마씨가 연구하고 전승한 결과인 듯 싶다. 일례로 사마의가 죽은 제갈량의 진채를 둘러보고 그를 기재(奇才)라 칭찬한 것도 그렇고, 사마소와 사마염이 근위대장 진협을 시켜 제갈량의 진법을 훈련시키게 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서진에서 군부 내지 국가 단위로 제갈량 (또는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은 적국의 최고 군사령관이었음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29] 또, 송사 지 195권에 따르면 당나라의 명장 이정은 제갈량의 팔진법[30]을 바탕으로 육화진을 만들었고 송신종 때는 송나라 변경의 장수들이 팔진법을 배워 임기응변으로 삼았다고 하니 이로서 제갈량의 팔진도는 촉한 시기부터 서진을 거쳐 ~ 왕조에 이르기까지 유전되고 발전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위공문대》와《 진서》< 마륭열전>[31]에 따르면 팔진도는 편상거로 운영하고 넓은 땅에선 녹각거를 운영하며 좁은 땅에선 규범대로 수레 위에 목실[32]을 올리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고 한다. 편상거는 제갈팔진도 중 치중차에 가죽을 덧씌워 공방일체로 쓴 거몽 진법을 응용한 듯 싶다. 또 마륭이 4균(鈞)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9석(石)의 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렀다는 부분이 있고 이는 제갈량이 연노를 만들어 힘센 병졸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는 기록과 매우 유사한데, 이에 따르면 팔진도는 투사 무기를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5.2. 수읽기와 심리전을 바탕으로 한 회전, 야전, 퇴각전의 대가

다섯 번의 북벌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군사 능력이 평가절하 당하는 면이 있지만 그는 회전 야전에서 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제갈량의 북벌 당시 사마의[33], 장합, 곽회, 비요 등은 모두 제갈량을 상대로 한 야전에서 패배했으며[34] 장합은 아예 목문에서 전사했다. 그나마 진창에서 20일 농성 학소가 제갈량에게 한 방 먹였다고 할 만한 유일한 사례였다.[35][36] 제갈량이 군사 지휘관으로서도 매우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전체적인 수싸움이 특기고 적군으로 두면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아군의 수를 보고 예측하여 군대를 미리 빼버리고 포진으로 숨통을 조여 오는 타입에다가, 소모전을 강요하려 해도 불리한 전투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지선점을 게을리하느냐? 그것도 아니라서 요지는 미리 선점해서 방어에 충실했다. 물론 가정 전투 같이 휘하 장수가 말을 안 들어서 실패한 경우는 있다 적으로 상대한다 치면 진가가 나오며 깨부수기 힘든 타입이다. 그와 맞상대했던 사마의가 그의 포진을 보고 천하의 기재라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연의에서도 화공이 워낙 인상적이라 잊기 쉽지만, 제갈량이 매우 즐겨 쓴 전술이 거짓 퇴각이다. 상대에게 심리적 빈틈을 만들어 아군이 유리한 상황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단번에 깨뜨리곤 했다. 공성지계의 고사가 있듯이 제갈량은 상대의 심리를 읽고 함정을 파는 기만전술에 매우 능하였다. 퇴각 연기에서 단번에 공세로 바꾸는 전술을 자주 썼다는 것은 그가 부대 배치와 기동, 공격 시점을 포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그의 용병에서 뛰어난 점 중에 하나는 퇴각전이다. 별동대 괴멸, 군량 부족 등으로 퇴각할 때마다 신속 정확하게 철수했는데, 일반적으로 퇴각을 할 때 도망치는 쪽이 불리하지만 제갈량의 경우에는 추격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뿐더러, 공격하는 입장에서 퇴각하는 제갈량군을 섣부르게 추격했다가는 역공에 걸려 대패를 당하곤 한다. 왕쌍 장합이 대표적인 예시.[37]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상대의 심리를 읽고 이후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하는 제갈량 특유의 강점이다.

그 때문에 추풍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자 사마의는 한군을 쫓아가는데, 갑자기 한군이 반격할 것 같은 스탠스를 취하자 장합 꼴 나기 싫어서 추격을 도중에 멈췄다. 나중에 그것이 허세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조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 가짜를 보고 도주했다는 것은 오장원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후대에 유명해진 것이다.

5.3. 군사 사상

현재 남아있는 제갈량집에 병요 한 편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제갈량의 군사 사상이 어떤지 엿볼 수 있다. 이곳저곳에서 모은 것들이긴 하지만, 남은 분량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때 그리 핵심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갈량은 군대의 군기에 굉장히 중점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군기가 선 군대는 장군이 무능하여도 패하지 않고 군기가 서지 않은 군대는 좋은 장수로도 이길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군기를 우위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군기는 아마도 군의 령이 바로 선 정도, 사기 혹은 전투력 그 자체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특히 장군의 지휘보다 군기의 정도를 우위에 두는 점은 제갈량의 독특한 시선이다.

그가 군사를 다루고 군대를 통솔할 때 "대오가 질서정연하고 상벌이 엄숙하고 밝았다."라고 한다. 이런 엄격한 군시와 고양된 사기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며,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훈련의 결과다. 제갈량은 엄격하고 공정한 군의 기율만이 부대의 작전 능력을 높일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갈량은 1차 북벌이 끝나고 군사와 장수를 줄이고, 벌(罰)을 분명히 하고 과오를 반성하여, 장래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헤아리려 하였고,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비록 군사가 많다한들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했다. 이에 작은 공로를 살피며 장렬함을 선별하고, 허물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실수한 바를 천하에 포고하고,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무예를 강습하며 뒷날을 도모하니, 병사들은 간결하게 정련되고 백성들은 그 패배를 잊을 수 있었다. 즉, 촉군을 정예한 강군으로 육성했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5차 북벌 때 엄격한 기율로 인해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진나라 사람인 원준은 제갈량의 촉군이 계속 전투할 수 있었던 비결로 "제갈량의 법령이 밝았고, 상벌이 믿음을 주었으며, 사졸이 명을 바쳐 험난함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계속해서 싸울수 있었다."라고 했다. 원준의 저서《원자》에 따르면 제갈량이 평소 군사들의 무장과 무기 상태를 언제나 최고 상태로 유지했고 진채와 병기, 그 밖에 전쟁에서 쓰는 도구도 멋있고 정교하게 꾸몄다고 한다. 병사들의 사기를 최고 상태로 유지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제갈량의 수완과 배려의 일환으로 봄이 옳다.

그리고 군기와 더불어 중시하는 것은 바로 적시였다. 여타 다른 병법가들도 강조한 부분이지만, 군이 시기적절하게 나아갈 때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중요시 하고 있다. 또 정찰 후 전진 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면모 또한 보이고 있다. 마치 실시간 전략 게임에서 정찰 후 맞춰가기만 하면 최소한 쉽게 지지는 않는 것처럼, 신중한 전진이라는 기본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무릇 군대가 행군을 하고 진영을 구축할 때는 먼저 심복[38]이나 향도[39]를 보내 전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했으며 척후를 중시했다. 그는 평소에도 주요 길목에 순찰병을 드나들게 했으며 이렇게 정보를 중시한 덕분에 제갈량은 마치 자국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적국의 산하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마도 제갈량은 이 병요 한 편을 지으면서 복잡한 전술을 말하려는 의도보다는 촉한 군사 전술의 기본 틀을 완성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던 듯하다. 말 그대로 촉한을 위한 FM, 즉 야전교범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개 지휘관의 신출귀몰한 전술능력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강한 군대가 바로 서면 평범한 지휘관도 기본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신중한 군사운용이 거기 뒷받침된다면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강한 군대를 만들고 그 군대를 신중히만 운용한다면 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지휘관의 역량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충성심의 적절한 활용이 지휘관의 역량임을 강조하고, 법에 의한 공명정대한 군무 운영 또한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휘관의 역량은 조직 내에 교만하고, 속임수를 일삼는 이들을 잡아내고 솎아내는 데 있다고 말한다.이들을 잡아내고 바른 인물을 올리는 것이 지휘관의 역량이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장수의 기준을 세웠다.

그는 "고기가 물을 잃으면 죽고, 사람이 충성을 잃으면 흉하게 된다. 훌륭한 장수는 그것을 지킴으로서 뜻을 세우고 이름을 드러낸다."라고 했으며 "훌륭한 장수는 시시각각의 흐름에 대응하기 위하여 허리띠를 풀지 않고 발이 땅을 밟지 않는다."라고 했다.

또한 "귀하게 대우해도 오만하지 않고, 일을 맡겨두어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도와주어도 감추려 하지 않고, 그만두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훌륭한 장수의 움직임은 마치 오염되지 않은 백옥과 같다."고 했으며, 또 "병법에 숙달에 훌륭한 장수는 아깝지 않은것으로 몹시 아까운 것을 기르니 버리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고 하여 군대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하도록 했다.

제갈량은 기본에 충실한 군사 사상을 보여준다. 아버지로서 촉군의 미래를 아끼는 마음이 드러난 것도 같다. 정말로 기본에 충실하는 것만이 승리의 유일한 지름길이라고 제갈량은 말하고 있다. 전쟁은 화려한 전술이 주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땀방울로 이뤄진 경제력, 그것을 독려하는 정치가의 역량,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이뤄진 군대를 기본에 맞게 운용하는 것, 이것이 주라고 제갈량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등애가 촉한으로 쳐들어왔을 당시 군사 경험이 없던 제갈첨을 비롯한 공신 후손들이 싸운 적이 있는데, 첫 실전에서 삼면으로 몰려온 등애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 덕분으로 보인다. 두 번째에는 결국 패배하고 모두 죽었지만.

5.4. 무기 개발

또한 광업의 발전 부분에 나오지만 부연해 보자면 촉에는 철광 또한 풍부했는데, 제갈량은 철광 개발을 독려하고 그 무렵 개발 되던 백련강[40]과 쉬화법 등의 최신 제련 기술을 도입, 갑옷- 투구와 무기류를 개량했다. 촉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이 만든 칼은 쇠구슬을 가득 채운 대나무를 일격에 절단했고, 촉한의 투구는 25석 쇠뇌의 일격을 버텨냈다고 한다. 또한 쇠가시를 많이 만들어서 주요 통로에 뿌려 일종의 지뢰처럼 사용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 사후 그를 추격할 때 병사들에게 밑에 나무를 덧댄 신을 신겨 이를 막으려 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만들게 한 개갑(鎧甲)은 다섯 차례의 단련을 거친 갑편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당시의 갑옷은 명성이 매우 높아 육조시대까지도 정교하고 견고한 갑옷하면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전할 정도였다.[41][42]

춘추전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연노(連弩)를 개량해서 원융노(元戎弩)라고 불리는 십시연노(十矢連弩)를 개발한다. 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인, 한 번에 10발씩 쏘는,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다연장 로켓 같은 무기에 속한다. 군사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팔진도의 운용은 반드시 연노와 배합되었으리라고 한다.

적이 진내로 들어올 경우, 가까우면 단병접전을 벌이지만, 멀면 10발을 한 번에 쏠 수 있는 강력한 연노로 적을 제거했다. 화양국지 유후주지에는 "승상 제갈량이 부릉의 힘센 병졸 3,000명을 뽑아 연노사[43]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1964년, 성도 비현에서 으로 만든 노기(弩機)가 출토되었는데, 그 표면에 3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경요 4년(261년) 2월 30일, 중좌랑 좌전업 유순업, 이(吏) 진침, 공(工) 양안이 만들다. 십석(十石)의 기계로 무게는 3근 12량이다." 제갈량이 죽은지 30여년이 지나 만들어진 이 기계는 제갈량의 유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십석의 기계인데, 지금의 중국 도량형으로 534.6근에 해당된다. 화살을 장전하고 운반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7~8명의 연노사가 있어야 발사가 가능할 것이다. 진나라 사람 이흥은 이를 신노(神弩)라고 불렀으며, 위력이 좋아서 남송의 학자 왕응린(王應麟)은 십시연노를 산을 무너뜨리는 연노, 즉 최산노(摧山弩)라고 불렀다.

여기에 군량 수송 장비인 목우유마를 개발해서 익주 험지의 수송 능력을 강화시켰다. 운송 수단이 부족한 초한쟁패 시절에 파, 촉의 물자를 한중과 관중으로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서 진나라가 천하 통일하던 시절 관중에 모아둔 군량에 의지하던 것과 비교한다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6. 외교

제갈량은 일강이약이라는 전황에서 를 우선적으로 쳐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와 맺은 동맹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물론 손권이 유비 때처럼 언제 뒷통수를 칠지 알 수 없는지라 늘 전전긍긍해야 했다.

형주 공방전에서 서술하듯 손권은 유비 시절 그를 너무 호구로 봤다가 형주 공방전과 이릉대전, 직후 위의 남정에서 나름대로 생고생을 했기 때문에 제갈량 집권기부터는 제대로 된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 실제로 후일 장완 상용급습 작전을 기획하자 오의 대신이 "촉한이 배신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논의했는데, 손권은 자신의 가족을 걸고 촉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제갈량은 오와 맺은 외교를 위해 사신을 보낼 때도 신경을 썼으므로 오에서 찬탄을 들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선정/파견한 등지, 진진, 비의 등은 모두 외교관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등지와 비의는 손권에게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외교 전략문 절맹호의를 작성해 외교의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추구하여, 국교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7. 이민족 연계

제갈량은 유비와 마찬가지로 위와 싸울 때 이민족들과도 충실히 연계를 가졌다. 애당초 융중대에서 서쪽으론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론 이족들을 위무하고라는 정책적 논의를 제시한 적이 있으니 제갈량은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민족들의 융화를 필수적으로 봤다.

남중 정벌 이후에는 남중에 살고 있던 이민족들을 오부영군(五部營軍)이라는 부대로 편제시켜서 왕평 휘하에서 활약시켰다. 이들은 231년 북벌 당시 장합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다.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는 선비족 가비능이 제갈량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훗날 오호십육국시대 오호(五胡)라고 불리는 강족, 저족 같은 기타 이민족과도 우호 관계를 가지면서 연계를 했다. 이민족들은 마초 강유처럼 자신들과 가까운 촉한 군인과의 관계, 위나라 이민족 압제적인 정책,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는 원교근공의 이치, 촉금(蜀錦)[44]을 비롯한 이민족에게 필요한 생필품 교류 같은 이유로 촉한을 도왔다.

이로 인해 제갈량은 당시 운남을 비롯한 서남 소수민족에게 널리 전승되어 숭배되었으며 심지어 지금의 미얀마에도 제갈량 묘가 있다.

8. 생산력 회복과 발전

어떤 의미에서는 제갈량의 정치적 업적을 평가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소가 되는 부분일 것이다.

익주(益州) 파촉(巴蜀) 지역은 험난하고 협소한 지세로 인해 별 특색 없는 벽지로 인식되기 쉽다. 실제로 고대 초한쟁패 시절 겨우(...) 한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온갖 생난리가 벌어졌는데, 진짜 오지는 가보지도 않은 인간들이 한중만 가지고도 이 정도로 생색을 낼 정도면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거기다 초한쟁패 시절에는 파, 촉에서 한중과 관중으로 넘기는 마땅한 운송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관중에서 진이 모아둔 군량과 관중의 자체 생산력만으로 버텨야했다. 다만 한중의 경우에는 명재상 소하 제방을 만드는 등 공을 들였다.

물론 익주가 정말로 사람 사는 곳이 못 되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익주는 토지가 나쁘지 않고, 여러 천연자원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삼성퇴 청동기 문명을 비롯해서 황하 문명(黄河 文明)과 별도의 문명권이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갑골 문자에서 이미 촉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춘추전국시대 당시 강동(楚)와 관중(秦)은 파, 촉과 수백 년 동안 대치했다. 진이 파, 촉을 손에 넣고 도강언을 개척하면서 파, 촉의 생산력은 늘어갔다.

한고조의 최초 영지 중 하나였던 만큼 (漢)이라는 정체성으로 빠르게 흡수될 수 있었지만 본래 황하(黄河) 문명과 별개 문명권 출신이었던 만큼 당시만 하더라도 이민족의 영역이나 다름없던지라 오랫동안 버려진 채 낙후되어 있었다. 천연물자가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당시 기술력으로 많은 생산량을 내기 어려웠고 도강언 같은 수리 시설들도 시대가 지나면서 낡아가며 제대로 쓰기 어려워졌다.

촉이 통치했던 익주는 농업이 가장 발달한 촉군(蜀郡) 지역과 만족이 거주했던 파군(巴郡) 지역의 생산 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한중(漢中)은 땅은 넓었지만 인구가 적었으며, 산간 지역에는 사슴이나 산돼지가 떼를 지어 출몰했다.

사서에 따르면 " 조조 한중을 공격했지만, 장로의 동생 장위가 수비를 튼튼히 하여 함락을 하지 못 했다."고 한다. "군량이 떨어진 조조가 후퇴를 하려고 할 때, 마침 야생 사슴 수 천 마리 때문에 장위의 진영이 무너졌다. 장위의 군사들이 놀라서 도망을 치자 조조는 그 틈을 타서 공격을 퍼부어 장위를 몰아냈다."고 한다. 지금의 운남성 귀주성 지역인 남중(南中) 7개군은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생산력이 가장 낙후되었다.

황건적의 난 호족 세력의 발호, 유장의 실정 등 여러 요소가 겹치면서 익주의 생산력은 많이 저하되었는데, 유비가 유장을 몰아내고 익주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유비는 경제 방면에서 매유 유능한 관료인 유파, 왕련 등을 발탁해 현지 사정을 돌보게 했으며 20여년간 혼란했던 익주의 정치 상황을 안정화시켰다. 제갈량 또한 왕련을 중용하고 그의 보좌에 큰 힘을 얻었다. 물론 왕련의 조력 외에도 제갈량 자신이 따로 구상하고 입안한 경제 정책도 다수 존재한다. 이로써 식량과 생필품의 생산을 국가가 개선토록 하기에 이르렀다.

제갈량 시기 촉의 경제적 번영이 높게 평가되는 것은, 제갈량이 한계까지 촉의 힘을 끌어내서 북벌을 진행했으면서도 그 정도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부국강병의 선순환이란 것은 민심 안정 → 경제적 안정 → 세제 안정 → 국가 재정 안정 → 군비 확충 → 군사력 안정 → 국경 안정 → 민심 안정으로 이어지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순환 사이클이다. 민심이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사이클은 더욱 빠르게 돌아가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것이다. 제갈량의 정책은 이 요체를 꿰뚫었다고 하겠다.

밑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당시 비단 장인들이 모여 살고 생산한 곳을 금리(錦里)라고 불렀으며 비단 관청의 소재지는 바로 금관성(錦官城)이었다. 그리하여 금리, 금관성, 금성(錦城)은 성도[45](成都)의 별명이 되어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전문관직으로 사염교위도 있고, 사금중랑장도 있고, 금관도 있고, 도강언을 관리하는 언관도 있었으니, 제갈량이 파촉 지역의 경제 발전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이로써 제갈량은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루고 촉한 내부를 크게 다스렸다.

제갈량 치하 촉한의 견직업과 야철업 그리고 저염업은 국가의 주도하에 상당히 발전하여 국가 경제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염철 산업과 그 판매는 원래 그만한 자본과 노동력이 있는 지방의 토호와 대상인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산업이다. 이는 제(齊)나라의 재상 관중부터가 시행한 정책으로 스스로가 관중에 빗대어 관중을 본받는 경제 정책을 시행한 제갈량 입장에선 당연히 시행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이 이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한 중앙 정부는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

제갈량은 촉의 재원을 충분히 이용하고 관리하여 생산 품질을 높이면서 중앙의 국고 수입을 높이고자 과감한 조치를 시행했는데, 직물을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고 직접 비단의 품질과 개량을 통해서 촉의 비단인 촉금(蜀錦)을 천하에서 경쟁할 상대가 없는 고급품으로 만들었고 자수(刺繡)를 발전시켰으며 소금과 철을 국영으로 전환하고 이것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을 설치하여 중앙에서 직접 통제했다. 이런 관리와 더불어 이후 남중 정벌로 인한 각종 물품의 유입은 북벌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되었고 북벌을 시행하면서도 촉한의 경제 지표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천연 가스로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하며 사금중랑장(司金中郎將)을 두어 농구기와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염철(鹽鐵)을 정부에서 관리하여 국가적 수요를 만족 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수입도 늘렸다. 또 공명은 이를 이용하여 무기를 개량하였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무기와 단단한 철갑은 촉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공명의 북벌시에 사마의는 촉한의 군사와 대치만 할 뿐 감히 대적하지 않았으며, 촉한의 험준한 지형상 군수 물자 수송이 어려운 것을 알고 공명이 군사를 물리기만을 기다렸다.

제갈량은 단순히 염철의 국가 주도 외에도 소금과 철의 품질을 높여 이익을 증대하고 해당 물품을 구입하는 이들의 만족을 도모했다. 이렇게 해서 촉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입은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렇게 나라의 재정을 강화시킨 것으로 인해 유언 통치 시기부터 나타난 풍조인 촉 지방의 토호, 호족들을 약화시키는 중앙 집권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중앙의 재정 수입이 크게 증가하고 국고도 충실해지니 이는 제갈량이 식민(息民), 즉 백성들의 요역과 세금을 경감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또 유비와 제갈량은 객관을 많이 세우고 역참 제도를 재정비했는데, 이는 촉한의 도로와 운송을 원활케 하여 상공업과 교통 운수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즉, 국가가 직접 상업을 진흥케 하는 방편으로 개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아울러 그것들이 국가 인민의 생계에 중요한 구성 요소로 농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8.1. 농업 발전

제갈량이 가장 중시한 정책 분야는 단연 농업이었다.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가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무농식곡(務農殖穀)[46]이부민재(以阜民財)[47]라는 정책을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제갈량은 촉과(蜀科)라는 법률을 통해 엄정한 사회 기풍을 강조했고, 촉 땅 인사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지 못 하게 해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았고 이로써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였으며 호족 세력이 농민을 침탈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농사 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장려하였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제갈량은 긴급한 상황에서도 '무농식곡(務農殖穀,)' 정책을 계속 집행하는 것과 동시에 폐관식민(閉關息民)[48]이라는 방침을 제출했다. 폐관(閉關)이란 남중(南中)의 반란에 대한 방침을 가리킨 말로서,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잠시 적을 안심시키는 전략을 유지하면서,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동쪽의 손권과의 화친을 더욱 돈독히 하면서, 북쪽으로는 한중이 수비에 주력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제갈량은 모두를 위무하면서 토벌하지 않고(皆撫而不討) 백성들이 편안하고 먹을 것이 충분하게 되면 그런 이후에 이를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民安食足而後用之) 공자는 정치의 근본요체를 식족(食足), 병족(兵足), 득신의(得信義)라고 정의했다. 첫째는 먹고 사는 문제요, 둘째는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치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이 정치의 요체를 알고서 이를 시행한 것이다.

식민(息民)이라는 말은 "백성들의 요역과 세금을 경감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를 통해 국력을 축적한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제갈량의 폐관식민이라는 아이디어는 전체적인 국면을 저울질한 다음 선택한 것이다. 당연히 그가 주장한 폐관은 잠정적인 임기응변이었다. 그는 적을 토벌할 기회를 찾기까지 적절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제시한 정책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토벌 준비를 했다. 그러므로 출병일까지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 제갈량은 4차 북벌 이후 권농강무(勸農講武)[49]하고 목우유마를 만들고 군량미를 운반하여 야곡구에 쌓아놓고 야곡구에 있는 식량 창고인 저각(邸閣)을 수리하였다. 이후 백성들과 군사들을 휴식시켰는데[50], 이로써 3년 후에 사용하였다.(三年而用後之) 이는 제갈량이 남정할 때와 같으니 백성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양곡은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면서 단 하루도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재야의 인사인 두미를 초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잠시 국경을 닫고 농업을 권장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길러 자라게 하고 아울러 갑병을 다스리며 조비의 군대가 피로해질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 토벌한다면, 병사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수고롭지 않게 하고도 천하는 평정될 것입니다.

제갈량은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고 국가는 튼튼한 재정수입이 확보되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엄격한 군사훈련을 통한 강병을 길러 적을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준은 이렇게 말했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이 항상 밭두렁을 일구어 창고에 식량이 가득했고, 무기를 예리하게 갈아 유사시에 대비를 했다. 조회를 할 때는 떠드는 사람이 없었고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 익주에는 아직 진나라 한나라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제갈량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진나라 시대에 세워진 대규모 수리 시설인 도강언(都江堰)​을 보수했고, 서한삼걸 중 하나로 서한의 전설적인 재상 소하가 설치한 산하언(山河堰)​ 또한 개축했으며 이를 전담할 부서까지 따로 설치했다. 양수경의《수경주소》에 의하면 제갈량이 북벌할 때, "이 언(= 도강언)에서 나는 곡식에 의지했다."(諸葛亮北征, 以此堰農本)고 하는데, 제갈량이 기울인 노력을 보면 가히 그렇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익주에는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홍수방지 및 농업용수 공급에 큰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수리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 농업의 관개를 보장,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촉땅은 강이 수량이 많고 들판이 비옥한 데다가 제갈량의 정성스런 관리로 농업 생산량이 매우 높아졌다. 도강언 관개구에 있는 면죽, 광한 일대의 논은 묘(亩)당 30곡(斛) 이상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남중의 영창군 법보산(法寶山) 아래[51] 제갈언(諸葛堰)을 건설하기도 했다.

제갈량의 이런 조치는 훗날 역대 왕조가 답습한 것으로 도강언이 2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도강언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리시설에 대해 이빙은 개척을, 제갈량은 이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도강언을 지을때는 지금의 콘크리트는 없고 대나무를 자루로 하고 조약돌을 넣어 층층이 쌓아서 제방을 만들었다. 이런 건축자재가 큰 홍수를 만나면 제방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관리와 보수가 되지 않은 사회간접자본은 폐해를 부르는 경우도 생긴다. 더군다나 여러 해 동안의 전란으로 인해 도강언은 이미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못했는데 제갈량은 1천 2백명의 수리공정 전담부대를 조직해서 2교대제로 도강언의 상태를 점검하게 하고 준설하게 했다. 또, 성도 서쪽에 9리 가량의 둑을 또 쌓았는데, 이는 성도의 홍수 방위와 저지대의 침수를 막아 도강언의 기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시책이었다. 또 익주에 있을 때 제방을 쌓았는데 '제갈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갈량의 이런 언관(堰官) 제도는 훗날 역대 왕조가 답습한 것으로 도강언이 2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이빙은 창조의 공이 있고, 제갈량은 유지의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중국의 도강언에는 복룡관(伏龍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원래 삼국시기 현지의 유지인 범장생(范長生)을 위해 지은 것이었으나 후에 수리전문가인 이빙(李氷)의 암자로 고쳐지었다. 도강언의 유지 및 보수에 공이 있는 사람들이 동상으로 서 있는데, 제갈량 동상도 서 있다. 그 외 한나라 시대에 설치된 익주의 대소 제방들이 모두 제갈량의 손을 거쳐 수리되었는데, 이는 당연히 곡물 생산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되돌아왔다.

제갈량이 죽은 후, 장완, 비의가 잇따라 집권하고 제갈량의 기정 국책을 계속 집행하면서 내부 안정을 중시하고 섣불리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촉중의 농업생산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촉한 말까지 농업도 근본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

8.2. 비단 산업 발전

농업 외에도 광업과 잠업 또한 발전의 대상이었다. 특히 익주의 특산품인 촉금(蜀錦)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상등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는 촉한의 동맹국인 오나라는 물론 적국 위나라에서조차 값을 쳐 주는 상품이었다고 한다. 촉한의 외교관들에 관한 기록을 보면 으레 촉금이 예물로 사용되곤 했으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제갈량은 금관(錦官)이라는 전문 관청을 설치해 비단 산업을 국가 규모로 확장했으며, 방직 기술의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흥미롭게도, 비단의 유통이 활기를 보이면서 사치 풍조가 성행하는 부작용을 막는 데까지 제갈량의 손이 닿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처첩은 일국 최고 중신의 가족임에도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아무리 제갈량이라도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신하들의 경제생활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았겠지만, 승상이 모범을 보이는데 아무렴 그 부하들이 노골적으로 축재에 손을 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의 치하에서 촉금 생산은 규모와 생산량 면에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삼국 시대 때 제갈량이 촉나라를 다스리자, 잠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촉나라 비단이 일시에 유명해졌다.[52] 서진의 문학가 좌사는《촉도부》에서 촉한 경내에 뽕밭이 있고, 성내 큰 골목집의 기계 소리가 잘 어울리며, 비단집 천호 • 만호, 무늬 장식의 직물들이 서로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촉금은 촉한의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조조 일가의 조손[53] 3대[54]가 촉금을 좋아했고, 서촉에 사람을 보내 몰래 금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위나라는 적대 관계임에도 불구 촉금을 대규모로 수입했고, 이는 촉한에서 막대한 양의 수익 내지 군자금으로 전환되어 위나라에 촉금 팔아 번 돈으로 위나라를 치는게 가능해졌다. 손권은 촉금으로 부하, 대신을 격려하곤 했다. 오나라와의 교역에서도 촉금은 상등품으로 양국의 외교에서 촉금이 예물로 사용되었다.[55] 뿐만 아니라 촉금은 인도, 이란, 중동, 유럽까지 멀리 팔렸다. 촉금의 가치는 채색 무늬 있는 비단이라는 것인데, 원래는 중원에 있는 양읍에서도 비단 생산이 가능했지만, 이쪽에서 생산된 비단은 촉금에 비해 질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시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무늬 없는 견직물만 생산하게 되고, 실질적으로 채색 무늬 있는 비단은 촉 지방이 사실상 독점했다.[56] 장호가 일찍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오나라 비단, 절강의 비단을 가지고 관청으로 와서 사천의 비단과 같이 붉게 물들였다. 뒤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마철이 지나자 오와 절강의 비단은 모두 색이 변했으나, 오직 촉나라 비단만이 예전과 같았다.[57] 이처럼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이러한 중국 촉금의 명성은 후대에도 이어져서 훗날 실크로드 시대 당시 인도, 인도차이나를 경유해서 인도, 동남아, 중근동 오리엔트 왕국과 로마에 수출되었고,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비단을 국산화할 때까지 제국의 상류계층에서 소비되던 채색 비단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시대에 색 무늬 비단이 촉 지역에서 독점적으로 생산되었다는 걸 보면, 대부분의 비단은 촉금으로 봐야 할 것이고 일본에서도 옛 기록을 보면 중국 비단은 촉금이라고 일괄해서 부르기도 한다. 경초 2년인 238년 6월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파견했을 때, 조예는 후한 답례품을 보냈다. 그 품목 가운데 붉은 색 바탕에 쌍룡이 새겨진 비단 4필과 청색 바탕에 붉은 꽃무늬가 새겨진 비단 3필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색 무늬 있는 비단은 촉금이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이 비단 역시 촉금이었다. 촉금은 제갈량이 추진한 수공업 진흥 정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두보가 그의 시《촉상》에서 "승상의 사당을 어디에서 찾을까? 금관성 밖에는 측백나무만 빽빽하네"라고 한 금관성(錦官城)은 두 가지의 함의(含意)[58]가 있다. 즉, 하나는 성도시가지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제갈량이 촉금공업을 일으킨 것을 찬양하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치밀한 필치로 유명한 시성 두보가 하필이면 금관성이라는 3글자를 썼을 리가 없다. 어떤 학자는 두보의 시를 인용하여 금관 제도가 제갈량이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첫째, 뽕나무 재배를 장려했다. 경제의 근본인 농업과 양잠을 중시했다. 익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농작물이 자라기에 적합한 곳이다. 따라서 농업을 위주로 가구당 수입을 올리게 하면, 국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할 수가 있다. 게다가 상품 가치가 뛰어난 비단을 생산하기 위해 양잠을 장려하면 농가 소득을 더욱 올릴 수가 있었다. 양잠의 필수적인 조건은 뽕나무였다.

둘째, 금관조직(錦官組織)을 강화하고 대폭적인 권한 이양을 했다. 촉한의 섬유 산업은 관영과 민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관영은 촉금의 생산, 보관, 유통을 정부에서 파견한 금관이 관할했다. 민영은 유통업자가 운영하는 것과 농민이 부업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금관의 간접 관리를 받았으며, 조세의 형식으로 금관에게 생산 제품 가운데 일부를 바쳤다.

셋째, 방직 기술을 발전시켰다. 삼국시대에 촉금이 중원의 비단 산지를 압도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거니와 《 수서 식화지(隋書 貨殖志)》에 촉나라 사람들의 방직 기술이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또 촉금은 정선된 원사를 사용한다. 선명한 색채는 깊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강물에 염색을 하고 빨았기 때문이다. 촉한의 신하 초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도의 비단은 맑은 강물에 잘 빨았기 때문에 무늬가 선명하다."

아름다운 색상과 촘촘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을 지닌 촉금은 부자들이나 귀족들이 애용하는 진귀한 품목이었다.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강동(江東)에는 비단이 생산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나 오에서는 비단을 구하기 위해 촉과 무역을 했다. 촉은 고가의 진귀한 물자로 무역 수지를 개선할 수가 있었다. 당시의 운송 수단은 주로 수로를 이용했으므로, 성도를 출발하여 지금의 충칭시인 강주(江州)에 이른 후, 삼협을 끼고 동쪽으로 강릉(江陵), 하구(夏口), 건업(建鄴) 등지로 흩어졌다. 그 다음 장강 중류 지방에서 상인들에 의해 다시 중국의 동북방으로 이동했다. 조조도 사람을 촉에 보내 비단을 구해오라고 한 적이 있다.

촉금은 염색 과정에서 흐르는 물에 세척함으로써 그 빛깔을 보다 선명하게 하는 법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을 제갈량이 창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제갈량은 대규모 비단 직조 공단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59] 덕분에 촉 멸망 당시 창고에 각 20만 필이 있었다고 하는데[60], 이를 대체로 금/기/채견[61]으로 분류, 총 60만 필[62], 또는 금/기/채/견으로 보아[63] 80만필까지 보기도 한다.

후의 일이지만 왕조 대에 이르면 1년에 10만 필에 달하는 비단을 조정에 진상할 정도였다. 진상품이 이 정도면 교역량은 말할 것도 없다.《 고우영의 중국 만유기》와《 고우영 십팔사략》에 의하면 성도 사람들은 지금도 비단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서 청두에 있는 실크로드 표지판에 장안에서 7시방향으로 청두까지 실크로드를 연장해서 그려놓았다고. "비단이 없는 실크로드가 말이 되냐?"가 그 이유.

8.3. 염업 발전

다음으로 설명할 정책은 염업, 즉 소금에 관한 정책이다. 촉한이 바다에 면하지 않은 탓에 소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고금을 통틀어 오히려 소금의 생산은 해염(海鹽)보다도 오히려 내륙에서 생산되는 암염(巖鹽)과 염정(鹽井)의 비중이 더 크다. 오히려 반도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암염이 나지 않아 해염 생산이 발달한 한반도가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촉한은 염정을 통해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했으며, 제갈량은 이러한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제갈량은 염정의 개발에 더욱 노력했다. 소금의 생산량을 늘려서 군대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동시에, 인근지역과의 물자교류를 확대했다. 재원이 확대되자 촉한정부는 재정부족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정염은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말을 얻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을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 물자였으므로,[64]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로서 촉한은 국가 단위에서 소금과 철의 정제를 관리함으로써 질과 양을 성장시켰으며 소금 산업의 비약적인 향상을 통해 파촉 지역의 소금은 촉한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큰 명성을 떨쳤다.

촉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갈량은 염부(鹽府)라는 전담 부서를 통해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했다. 유비가 왕련을 통해 신설하고 운영한 이 부서는 제갈량의 대에도 활발하게 운영됐으며 제갈량이 특히 중시한 기관이기도 했다. 임공현의 화정은 원래 불길이 약했지만, 제갈량이 그것을 살펴본 후 불길이 강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화정(火井)이라 불린 천연가스[65]를 통해 염정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에 착안, 분출관의 구경을 조절하고 적절한 화력을 확인하는 등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소금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파촉 지역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우물 소금은 파촉 지역의 가장 주요한 물산 중 하나이다. 동한말 이래, 우물 소금의 생산 관리는 한때 혼란스러웠고, 생산성은 저하되었다. 제갈량은 식염관매정책을 강화하여 염정의 양을 늘리는 한편 생산기술에 대한 개선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우물물은 우물을 파서 지하의 소금물을 길어서 만든다.

전통적인 소금 달임 방법은 이른바 가화로 달여 만들었는데, 제갈량은 우물에서 소금을 끓이는 기술을 대대적으로 개선하여 보급하였다. 화정은 가스정(天然气)으로 사료상 파촉 지역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어 이용한 곳이다. 그때 동안 우물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는데, 제갈량은 화정을 개선해 우물의 소금 끓이는 효율이 높아졌으며, 집불에서 나는 소금의 배 이상을 생산했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는 ‘제갈염정’이라는 시를 짓고, 자신이 주를 달아 14개의 제갈염정(諸葛鹽井)이 산 아래에 있다고 했다. 염정의 이름에 제갈량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염정사업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賦)」에는 집집마다 염정이 있다고 했을 정도로 수많은 염정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 운영하는 염정은 대부분 호족들의 소유였으므로, 일반백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예를 들어서 파군 임공현(臨江縣)은 소금의 산지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감도(監塗)와 광계(廣溪)에 염관을 두고 1개 군을 관장하게 했다.

제갈량은 소금이 백성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가격을 올려서 염세의 수입을 늘일 수는 없었다. 그는 가격은 내리고 품질은 높여서 많은 매상을 올림으로써, 소득도 높이는 방안을 채택했다. 소금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세금 수입도 증가하는 일거양득의 현상. 예를 들어서 파군의 탕계(湯溪)에 있는 염정은 소금의 낱알 하나가 거의 1촌에 해당할 만큼 컸다. 이러한 우수한 품질의 소금은 먼 곳으로 운반을 하기기 쉬웠다. 우수한 품질의 소금이 나오기까지는 염부의 각급 관리들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양질의 소금은 장강을 따라 오나라까지 수출되었다.

촉한의 제염공업은 성도 부근에만 소금생산노동자가 3만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제갈량이 죽고 나서 30년이 지난 263년, 위나라의 장군 등애가 촉을 정벌한 후, 전쟁의 여파로 소금과 철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등애는 농우에서 데리고 온 군사 2만명과 촉병 2만명에게 소금을 굽게 하여 군수물자로 사용했다.

소금과 철을 생산하기 위해 양쪽을 나누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2만명이 소금생산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사영공장의 인력과 파군과 남중에서 소금생산에 종사했던 인원을 포함하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4만 명 이상이 소금생산에 참여했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소금산업을 일으켜 국부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제갈량의 경제사상을 엿볼 수 있는 수치이다.

화정에서 소금을 굽는 방법에 대해서, 삼국시대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던 남조시대 양나라 사람 유소는 임공현(臨邛縣)의 소금생산공장을 둘러보고,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화정의 불을 이용하여 염정에서 떠올린 물을 끓이면, 물 1곡에 4~5두의 소금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불로 끓이면 불과 2~3두의 소금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천연가스로 소금을 구우면 다른 불로 굽는 것보다 2배가 더 많이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화정을 이용하여 소금을 굽게 되면, 다른 불을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 공정, 땔감 등이 절약될 뿐만 아니라 생산효율도 높았다. 따라서 소금과 철로 재정을 튼튼히 하면서,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올리기 위한 제갈량의 고민을 해결해준 것이 화정이었다.

후대의 고증에 따르면, 촉한시대에 공주(邛州) 일대에는 화정이 있는 곳에는 점포가 하나씩 있어서, 대나무 통에 가스를 담아서 운반했다고 한다. 또 다른 문헌에는 제갈량이 임공현(臨邛縣)에서 폭 5장, 깊이 2~3장인 화정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현의 남쪽 1백리 떨어진 곳에서 옛날부터 대나무를 이용하여 불을 붙였다는 말을 듣고 그 불을 열로 이용하여 소금을 굽는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제갈량은 화정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서 염정의 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료에는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항은 분명하다.

촉한이 제염업으로 나라를 일으켰다는 옛사람의 평가가 이상할 리가 없다. 촉한은 위나 오에 비해 영토는 좁고 인구도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은 강대국을 상대로 세력균형을 이루며, 때로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것은 제갈량이 화정을 이용하여 값싸고 품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국고를 부유하게 했던 탓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전략적 감각을 지닌 군사전문가이자 경제전문가이기도 했으며, 특히 중국의 염정사(鹽政史)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제갈량의 이러한 기술은 원시적인 형태의 천연가스 기술로, 역사적으로 천연가스가 주력으로 사용된 것이 근대 이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대에 이런 기술은 오버 테크놀로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천의 염정은 여전히 불의 우물에서 소금을 끓인다. 오늘날 사천에는 고대에 남아 있던 염정 유적이 여전히 많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리는 동안 촉의 소금 우물은 도처에 꽃을 피웠다. 소금은 촉한의 중요한 물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소금세도 촉한의 경제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고, 후세에 제갈량이 이룩한 촉한을 염입국으로 불렀다고 한다. 서진 시기 <촉도부(蜀都賦)​>에서는 집집마다 염정을 갖추고 있다 노래했으며, 진나라 사람 유홍이 이흥에게 쓰게한 《제제갈승상문(祭諸葛丞相文)》에서 제갈량의 네 가지 개발 업적을 들 때 팔진도, 목우유마, 노궁, 화정-염정을 제갈량의 사대발명이라고 말하며 염정을 거론했다.

8.4. 광업 발전

마지막으로 언급할 정책은 광업이다. 고대에는 소금과 견줄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철이었다. 촉한이 소금으로 나라를 세웠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촉한 정권은 철 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왕련은 철의 이익을 다루었고, 무기의 생산에 일가견이 있었던 장예(張裔)를 사금중랑장(司金中郞將)에 임명하여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파촉과 남중에는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임공현 광산에는 관내 돌산이 많았으며, 크기가 마늘만한 철광석이 나왔다. 제련을 하여 물건을 만들면 아주 강한 제품을 생산할 수가 있었다. 광석의 크기가 마늘과 같다는 것은 능철광석(菱鐵礦石)을 가리킨다. 물에 녹여서 주물로 여러 가지의 철기제품을 생산했다.

이러한 철을 ‘유지철(流支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한과 후한으로 이어지는 수 백 년 동안 임공철광에서 상당한 양의 철이 생산되었다. 성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 광산이 있었으므로, 제갈량은 여기에서 축적된 철의 생산에 관한 노하우를 익힐 수가 있었다. 광도현광산 진한시대에 광도와 무양, 남안, 자중, 우비 등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에 풍부한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었으므로 이 산을 대철산(大鐵山)이라 불렀다.

촉한시대에도 이 광산을 계속 개발하여 철을 생산했다. 대등현(臺登縣) 광산은 광석의 질이 좋아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양의 철을 생산했다. 기타 능주 시건현 동남쪽, 숭녕현(崇寧縣) 서쪽, 포정현 등지에 있는 광산에서 철을 생산하여 무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다.

삼국시대 중국의 제철기술은 고도로 발전하였고, 백련강, 관강, 담금질법(쉬화강) 등 새로운 제련기술이 이 시기에 출현하였다. 사서에 따르면 제갈량은 제련에 능한 뛰어난 장인인 포원을 임명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갑옷을 만들게 했다. 기존 갑옷과 남중 지역의 등갑을 결합해 견고하면서도 가벼운 갑옷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전설의 연위갑의 원형이라고 한다. 맑고 시원한 촉강의 물을 이용한 쉬화강은 무기와 갑옷, 농기구를 튼튼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제갈량과 포원이 제작한 칼(刀)은 쇠구슬을 가득 채운 대나무 통을 가볍게 잘라버리는 위력을 발휘하여 신도(神刀) 라고 불렸다. 역시 제갈량과 포원이 쉬화강으로 제작한 철투구는 25석 쇠뇌에 맞아도 뚫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전투용 도끼와 칼, 창 등의 장비 품질 상향을 위해 노력했으며, 제작에 소홀할 경우 직접 문책했다.

야금업은 병기뿐 아니라 농기구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는 철기의 운용과 보급을 촉진했고 때문에 촉한은 병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농기구도 잘 만들었다 한다. 촉한이 생산하는 철기는 농업 생산에 더 많이 쓰였다. 이 재질이 우수한 철제 농기구들은 사용함에 따라 시간을 절약하고 힘을 절약하여 정밀한 경작을 용이하게 하여 촉한의 농업 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염업과 철업은 제갈량의 치하에서 충분히 발전되어 촉한 경제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9. 화폐 정비

광무제가 도입한 오수전은 동탁의 난정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가치를 잃어버리고, 이후 군벌시대에서 화폐를 국가에서 주조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주조한 화폐가 난립하게 되면서 수많은 군벌들이 더더욱 화폐를 막장으로 만든 덕분에 상품경제가 과거의 물물교환으로 퇴보하고야 만다.

이런 때 제갈량은 화폐를 국가 단위에서 주조하여 유통시킴으로써 크기와 가치를 일정화하여 경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화폐를 안정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었던 것은 한대에 화폐 생산을 하는 동의 주요 생산지가 남만에 있었고, 바로 제갈량이 그 남중을 안정화시켰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어려운 점은 관리자가 강력한 통화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각 지역의 인구, 물산, 시장 활성화 상황, 무역 유통 상황 등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야 각 방면의 요소를 종합하여 화폐 발행량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 고액권 화폐의 발행부수는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가 제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백오수전 뒤에 위(爲)라는 글자를 새겨넣어 써서 이 돈이 국가적으로 그 유통능력을 보장하는 액면가액임을 보여주었다.

촉한은 일단 유파의 화폐 발행으로 전시통화를 운용했고, 제갈량은 남중 정벌 후 남중의 구리광산에서 얻은 구리로 일정한 품질의 통화를 발행해 오수전 체제를 재건했다. 크기와 가치가 일정하고 공급도 안정적이어서 형주와 서북 일대에서도 신용되는 통화였다. 이는, 촉한을 중심으로 오와 옹양주가 촉한의 경제권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도 화폐를 발행했지만, 화폐를 발행하는 것과 그 화폐가 생명력을 얻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 당시 촉한의 상업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교빙(交聘)과 호시(互市) 형태의 무역이다. 제갈량은 말과 비단을 손오와의 교빙 예물로 보냈고, 위는 촉한에서 비단을 사들였다. 교빙이든 호시든 각국의 화폐 가치가 달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촉한의 경내에서 이루어진 화폐를 이용한 무역이다.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개월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전시의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화폐의 작용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촉한에선 기존 오수전을 잇는 화폐가 계속해서 주조되었다. 이는 남정으로 양한 때부터 구리를 공급하던 현재의 윈난성 지역을 차지한 이후 더 원활해졌다. 촉한 화폐의 유통, 교환 경제의 활성화는 중원을 오래 능가했다. 성도는 수도가 되었고 상업도 상당히 번창했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고,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 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66] 와 농지로 유명하다. 남중 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고 국가를 부유하게 했다. 그리고 운남성의 무릉에서는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어 등갑옷을 만들 때나 쇠를 주조할 때 연료로 쓰여왔다. 제갈량은 남중을 정벌한 후, 남중의 한층 더 개발 및 그 내륙과의 연계를 촉진하였다. 내항도독들은 농업 생산을 중시하고, 주둔지를 개간하여 치적(政绩)을 쌓았으므로 남중인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제갈량은 이러한 특산품들의 이 점을 이용하여 강한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 이러한 점을 봤을 때, 촉한의 경제력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국방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더하여 새로 주조된 촉한의 화폐는 위나라의 서북 지역, 오나라의 남부 지역에도 통용되어 촉한의 경제권과 연결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67]

10. 한중 개발

군대를 상비하던 한중 땅은 백성들과 군대를 활용해 개간하고 경작하여 식량을 생산했다. 이는 군대에서 필요로 하는 양식을 보충하기 위한 용도로 한중의 둔전책을 썼다는 것이고, 민간에 영향을 적게 주려 했다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건흥 10년인 232년 제갈량은 전쟁을 중단하고 군사들을 휴식하게 하면서 지금의 섬서성 면현인 황사(黃沙)에 둔전을 설치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갈량이 북벌을 할 때 동원했던 총병력이 10여만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경계에 필요한 병력을 제외하고 약 7~8만명이 둔전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한중의 경제회복은 농업에 치중되었기 때문에 역시 수리사업을 전개해야 했다. 한중의 수리사업은 서한의 전설적인 명재상 소하가 만든 산하언(山河堰)을 보수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포하(褒河)의 물을 끌어서 한수(漢水)와 면수(勉水) 사이에 있는 광활한 농토에 물을 대는 것이 이 수리사업의 목적이었다.

제갈량의 증축을 거친 '산하언(山河)' 등은 아직까지 한중 지역에서 관개 면적이 가장 큰 수리공사 시설이다. 중국의 수리학자인 이의정(1882~1938)의 고찰에 의하면, "산하언은 포성현의 밭 8천여 묘, 남정현의 밭 3만 6백여 묘, 취주현 7천여 묘, 총 4만 6천여 묘에 물을 공급했다" 한중시의 6대 명지(名池)는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고고학 조사 통계에 따르면, (한중) 전 구역에 지금까지 이래 70여 곳의 고언이 남아 있으며, 일부 언로는 수리를 거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또한 각 지역은 고대 개발의 수리자원 활용 경험을 계승하고 학습한 데 더해,수리시설을 끊임없이 증수하고 있다. 면현에만 10만 입방미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댐 37개가 추가로 건설되었고, 관개토지는 지금까지 5만여 묘에 이른다.

두 번째는 지금의 섬서성 남정현에 유주언(流珠堰)을 쌓아 부근의 농토에 관개를 하기 위한 물을 저장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한중분지의 고대 농토 수리시설이 지금까지 발생한 실제 효용성과 꾸준한 활용, 제갈량과 함께 그해 한중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권농할 때 농지를 개척하고 수리를 하고 생산을 발전시킨 것을 설명하였다.

그 외에도 제갈량이 보수했거나 쌓은 오문언(五門堰), 양전언(楊塡堰), 등이 있다. 당시 산하언을 비롯해 한중의 수리시절은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제갈량은 한중을 재건하면서 이 제방을 손질했다고 새로 쌓고 증축했다. 한중의 농업이 제자리를 찾은 것은 제갈량의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한중의 경제가 회복되자 인구도 늘어났다. 연희 7년인 244년에 이르면 남녀노소가 들판에 가득 차고 들판에 씨를 뿌렸으며, 새들은 둥지를 틀었고 논밭에는 온갖 곡식이 무성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당시에 한중의 풍요와 번영한 모습은 제갈량의 정책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제갈량은 한중의 우수한 경제 조건을 십분 활용하였고, 그 지역에 알맞게 생산을 발전시키는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취하여, 북벌 군자금이 이로서 해결되었다. 이는 제갈량이 농사를 권하고 군둔경전을 시행한 효과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지 인민이 잘살면 더 많은 인구를 불러와 땅 넓은 한중을 다시 발전시켜, 점차 사람이 많아지고, 식량이 많아지는 선순환에 도달해 백성들을 '안치하고, 즐겁게' 일하게 할 수 있었다.

11. 반란 진압과 통치력 확보

밑에서도 나오지만 제갈량이 남중의 재정비 작업에 착수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현지인과 외지인의 충돌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제갈량집의 '남정교'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제갈량은 옹개와 맹획 등의 반란을 평정한 뒤 남중 지역에 대한 안정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대규모 무력 동원과 살육을 최대한 제한했다.

실제로 제갈량은 한 차례 대규모 난을 평정한 뒤로는 남중 지역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거나 하지 않았고, 마충이나 장억을 비롯하여 해당 지역에 부임한 지방관들 역시 무력보다는 선정으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에 대해 우선 중앙군의 주둔을 최소 규모로 줄인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아무래도 남중의 인력과 생산력을 촉한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반란 진압의 최우선 목표였던 만큼 통치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갈량의 남정 이후에도 남중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반란의 규모도 유비 사후 건흥 연간에 중앙군이 투입되어야 할 정도의 대규모 반란과는 달리 현지 사령관이 진압할 수 있는 수준 정도가 되었다.

그런 만큼 제갈량은 남중을 통치할 행정관료의 인선에 상당한 고심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실적을 세운 사람은 마충 장억 두 사람이다. 이들은 현지의 소요와 분란을 단호하게 제압하면서도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평균 이상의 선정을 펼침으로써 그들의 민심을 휘어잡았다.

마충이 죽자 남중 사람들은 그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장억이 부임지를 떠나 중앙으로 소환되자 그의 수레바퀴를 붙잡고 울며 말리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또한 마충처럼 사후에 사당이 세워지고 제사를 받기도 했다. 이후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나 규모도 소규모에 최소한 옹개 등이 거병하기 이전보다는 훨씬 협력적이었으며 반란의 횟수와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관들의 선정을 통한 현지 민심 장악력은 현지인이나 후대왕조들도 이 지역에서 추앙받고 오래 일한 촉한 남중 지방관들의 후손을 이 지역의 통치자로 추대하거나 임명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예컨데 촉한의 마지막 내항도독 곽익부터가 촉한의 구신이었지만 계속해서 위, 진에 이어 남중을 다스렸고 나중에는 그 손자인 곽표(藿彪)도 진에 이어 이후 익주에 들어선 파저족의 성한 정권 하에서 촉한의 내항도독 격인 영주자사로서 남중을 통치했다. 거기다 마충의 손자인 마의(馬義)도 남중과 관련해서 등장하는데 서기 303년에 서진의 남중 지역인 영주에서 남중의 호족인 모선과 이민족 우릉승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마의를 새로운 영주자사로 추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시 촉한에는 외지 관료들을 선발한 것 외에도 현지 출신 인재들을 중앙의 요직에 임명한 사례도 존재한다. 반란의 수령 맹획은 본래 사형 내지는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으나, 한족과 이족을 가리지 않고 인망이 깊다는 점을 인정받아 촉한의 관료로 등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어사중승의 요직까지 진출하게 됐다. 그 외에도 맹염, 찬습 등 다른 현지의 인재들도 등용되어 촉한의 문무 일선에서 활약했다. 촉한은 이민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서로 동고동락하는 데 성공했다. 남중 토착민들의 지지를 받던 그들이 능력을 인정 받아 중앙 관료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남중에 대한 촉한 정부의 태도가 유연하면서도 친밀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 제갈량은 남중을 정벌한 직후, 해당 지역의 소수 민족들 중 전투에 능하고 사나운 이들을 뽑아 촉군 부대로 편제했다. 오부영군, 또는 오부비군이라 불린 이 부대는 왕평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231년 북벌 때 장합을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남중의 만족 외에도 서쪽의 저/강족, 북방의 선비족 역시 촉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 당시 몇 차례 병력을 파견하여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갈량이 남중 지역에 보인 통치술은 매우 유연하면서도 합리적인 것으로, 그의 사후에도 이족들이 촉한 정권에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는 점에서 효과를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마충과 장억 외에도 제갈량 또한 이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후 그에게 제사를 올리는 부족도 다수 존재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제갈량을 숭상하는 풍조는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남중 지역에 퍼진 제갈량에 대한 미담과 전설이 제갈량 사후에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현대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 운남성에 거주하는 경파족(景頗族)은 여전히 제갈량을 존경하며 신을 모시듯 우러르고 있고, 소수 민족의 명절인 화파절(火把節)과 발수절(泼水节)에까지 제갈량의 고사가 첨언됐을 정도로 이 지역에 대한 제갈량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각종 설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대표적으로 제갈량이 노수의 물결을 잠재웠다는 만두 설화부터 시작해서 제갈량이 판 우물, 제갈량이 세운 영루, 제갈량이 쌓은 성, 제갈량이 만든 화로 따위의 유물과 유적들이 있는데, 남중 사람들이 제갈량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알기에는 넉넉하지 않은가 한다. 삼국지연의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이러한 숭배가 성행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자 백성들은 거리에서, 융이(戎夷)는 들판에서 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진나라 사람 원준은 자신의 저서 <원자>에서 '제갈량 사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제갈량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니,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워하는 듯하다'라는 언급을 남겼다.

12. 남중 개발

제갈량 이족 통치의 성패 여부를 검토할 때 반란이 다시 일어났네 아니네 하는 단순한 주제보다는 선정과 교화의 대상이 된 토착민들이 촉한 정부의 통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또 해당 지역의 경제/문화 수준의 향상이 어느 정도까지 이뤄졌는지 등을 보면서 따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갈량의 남정 이후 촉한시대 남중의 재편된 7군은 지금의 운남성 귀주성에 해당하는 소수민족 거주지역이었다. 이곳은 각종 풍부한 물자가 생산되었으므로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익주 서쪽은 금은보화의 땅으로 거기에서 관직을 한자는 모두 그 부가 10대에 미쳤다라고 할 정도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자라며, 구리, 주석, 황금, 야광주, 호박이 생산되었고, 또한 누에-뽕나무, 면화, 명주, 물들인 비단, 문수 등 비단과 광산물이 풍부했다. 《화양국지 남중지(華陽國志 南中志)》를 근거로 각 지역별 주요 생산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가군(牂牁郡) 평이현(平夷縣) - 벌꿀
건녕군(建寧郡) - 장송(長松), 앵무새, 공작, 소금, 민물고기,
전지현(滇池縣) - 준마
연연현(連然縣) - 소금
목마현(牧麻縣) - 승마(升麻)라는 약초
당랑현(堂螂縣) - 은, , 백동, 구슬, 비취, 공작, 상아, 양잠, 비단
비고현(賁古縣) - 은, 납, , 주석
율고현(律古縣) - 주석, 은
월수군(越巂郡) - 소금, 철,

따라서 남중은 금, 은, 철, 구리, 주석 등의 지하자원과 대나무, 목재, 소금, 옻, 잠사, 비단, 말, , , 상아에서 각종 약재에 이르기까지 진귀한 물품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남정을 평정한 제갈량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금, 은, 단사, 옻, 농우, 전마 등을 전략물자로 규정하고 특별관리에 들어갔다. 나중에 그는 이회를 파견하여 이 지역의 이민족들에게 징세를 하도록 했다. 내항도독이었던 이회는 후에 인품이 공정하고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형벌을 세우고 만(蠻)과 복(濮)을 광범위하게 개척하여 충실하게 남중의 물자를 제공하였고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세금으로 농우, 전마, 금, 은, 무소 등을 바쳤다. 남중은 촉한정부의 재정을 뒷받침하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특히 이 지역은 한나라 시절부터 농사가 보급되기 전에는 가축을 키우던 곳으로 그중에서도 말의 주요 산지로 유명해 삼국시대에도 오나라가 촉한의 말을 수입했고 후일 당송 시절에도 말을 수출한 지역이었으니 북벌에서 조위의 기병대에 맞설 전마(戰馬)의 보급이 촉한의 북벌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더하여 남중 지역에서 행해진 개발로는 행정 구역 정비, 철/구리 광산의 개발, 양잠 산업 장려 등이 추가로 있다. 남중 지역에서 채굴된 대규모의 광물은 곧 촉한 화폐 생산의 원동력이 됐다. 경제/문화 수준이 상당히 낙후된 지역이었던 남중을 크게 개발하고 생산 수준을 높인 이 대규모 사업의 총지휘자가 바로 제갈량이었다고 하니, 이 또한 대대로 명재상으로 칭송을 받았던 제갈량의 돋보이는 치적 중 큰 갈래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제갈량은 이 지역에 농경, 방직, 야철, 제염과 같은 선진생산기술을 전파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수민족들이 산악지대를 떠나 평야지대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서 방목을 했던 소나 말도 농업에 활용되었다. 이에 따라서 남중의 농업생산력은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또 자신의 성씨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 원주민들이 성씨를 알게 되어 남중의 사회생활도 크게 변모했다. 방직기술이 도입된 이후로 남중의 경제도 획기적으로 변모했다.
진녕(晋寧)에는 염천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산악지대에는 엄청난 양의 염수가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제염기술이 없어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또 주제군(朱提郡) 임리현(臨利縣)에는 토염(土鹽)이 많았다. 토염은 흙 속에 염분이 들어 있어서 그 흙을 퍼서 물로 씻으면 염수가 나온다. 그 염수를 끓여서 수분을 증발시키면 양질의 소금이 생산된다. 영창군과 운남군의 청령현(蜻蛉縣)도 소금의 산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당시 이들 지역의 제염기술은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갈량은 남중이 평정된 후 해당 지역의 소금 생산지에 염관을 세워 소금의 체계적인 생산을 장려하였고, 품질과 생산량 양면에서 보다 큰 소득을 거둘 수 있게 했다.
촉의 선진화된 제염기술이 이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생산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예를 들어서, 토염(土鹽)을 생산할 때 굴을 파서 거기에 물을 뭇는 방법을 사용하여 흙 속에 함유된 염분을 희석시킨 후에 끓이게 되면, 공정도 간단하고 생산량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낱알이 굵은 양질의 소금이 생산된다. 제갈량은 소금생산량이 크게 늘어난 지역에 염관을 설치하여 특별관리를 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서 청령현(蜻蛉縣)에 있던 흑염정(黑鹽井)은 생산량뿐만 아니라 우수한 품질로도 유명했다. 이곳의 품질과 생산량이 알려지자 촉인(蜀人)들이 몰려들어 소금산업이 더욱 발전했다. 선진기술의 도입으로 우수한 품질의 소금이 대량으로 생산되자 남중인들의 경제생활과 건강도 눈에 띠게 달라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촉한정부의 재정수입이 대폭 늘어났다.

13. 제갈량의 도보(圖譜)

낙후된 남중지역에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주로 맹세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역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남중에는 무당이 귀신을 섬기는 풍속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서 맹세를 할 경우는 돌을 풀로 묶어서 대신했다. 관리들은 이것을 보고 맹세의 여부를 판단했다.

제갈량은 이러한 실정을 파악하고 주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도보(圖譜)를 제작했다. 사서에 따르면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상거에 따르면 제갈량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도보는 일종의 그림책으로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상당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리기가 어렵다. 당나라대의 장언원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제갈무후의 부자가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경제정책과 이 도보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첫째, 천지와 일월, 군신(君臣), 성부(城府)를 먼저 그렸다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통치질서를 의미한다. 하늘에 해와 달이 하루도 어김없이 운행하는 것처럼 땅에서는 천자가 여러 신하들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린다. 제갈량은 이러한 통치 질서가 불가침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둘째, 신룡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물을 그린 것은, 이족과 한족이 모두 용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목축중심의 이족사회를 농업중심의 사회로 개조하기 위해서였다. 한대에 이족들은 자신들이 용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부족들도 그와 유사한 전설을 지니고 있었고, 한족도 마찬가지로 용을 숭배했다. 따라서 용에 대한 공통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군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하늘이 내려주는 은택을 먹고 산다는 점을 이족들에게 주지시키려고 했다. 농업사회는 식량을 위주로 하고, 목축사회에서는 소나 양을 위주로 한다. 그러므로 소, 말, 낙타, 양과 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시 남중이 아직 농업사회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번영하고 있다.

셋째, 관리들이 덮개를 덮은 수레를 타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모습을 그린 것은, 촉한의 관리들이 이족들을 보살피고 돕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관리와 백성은 부모와 자식과 같은 존재라는 인식을 소수민족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이족들이 양과 술을 가져와 한족의 관리들에게 바치는 그림을 그린 것은 이족들이 촉한정부에 공납을 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바치는 재물은 촉한정부의 주요한 재정수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량이 도보를 그린 것은 간명한 방법으로 한족 봉건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 관념을 남방의 소수민족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이 도보를 남방의 소수민족들이 중시한 것은 우선 제갈량이 그들의 전설인 용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남방의 소수민족들은 노예사회에서 점차 봉건사회로 옮겨가는 단계에 있었으므로, 봉건국가의 윤리도덕과 가치관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은 승상이 친히 그린 그림으로 그들을 교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린 이 도보를 소수민족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집안에 잘 모셔두었기 때문에 진대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도 남방의 각 소수민족들이 제갈량을 칭송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이 된다.

14. 발명품과 이용품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여러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전승에 의하면 여러 가지를 발명하거나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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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대라면 모를까, 옛날에 만들어진 어떤 물건이나 개념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물론 여기엔 제갈량이 실제로 만든 물건들도 있지만 대충 유명한 인물에게 끼워 맞추기 마련이라 픽션인 부분도 많다보면 된다. 다르게 보면 이런 물건들을 발명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이 제갈량의 지성을 높게 보았다고도 볼 수 있다.

15. 총평

제갈량의 정책은 전체적으로 경제 산업 회복과 발전을 주요 과제로 삼는 동시에, 그 이익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남중 반란 진압을 통해 점령지의 행정 체계를 복구하고 현지인과 마찰을 최소화한 점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군사적 이익 이상의 정치적 이익 획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이로운 것은, 이 모든 국가 재건 작업에 제갈량이 소요한 기간이 최대로 잡아도 5년 미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극적인 재건은 제갈량이 결국 병사하는 기폭제가 됐을 것이다. 거의 무너지기 직전 국가를 나라의 재상으로서 솔선수범하며 필사적으로 재건했는데, 건강에 악영향이 안 갈 리가 없다. 게다가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총리와 국방부 장관 역할을 동시 수행했던 지독한 일 중독자였으니...[77]

이릉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탁고를 맡기고 사망한 시기가 223년 4월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뒤인 228년 봄, 제갈량은 이미 대군을 지휘하여 위에 대한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정책이 이미 현실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이릉대전의 피해를 상당 부분 만회했다는 방증이며, 이후에도 촉한의 경제 그래프는 지속적으로 상승세였다. 일례로 위나라의 장군 등애가 세력이 다한 촉한을 멸망시켰던 263년에만 해도 소금과 철의 생산에 종사한 인원이 4만여 명에 달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는데[78], 제갈량 치하의 염철 사업은 그보다 더욱 활발했을 것이며 최소한 뒤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경제적인 번영을 토대로 촉한의 수도인 성도는 정치의 중심이자 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 동쪽으로 장강을 따라 오와 위 양국과 상업적 거래를 활발히 전개했고, 북쪽으로는 한중을 중심으로 서쪽의 여러 이민족들과 활발한 무역을 했다. 또 남쪽으로는 7개 군을 중심으로 멀리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인도와 중동지방으로 촉한의 물자가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성도는 건업과 낙양에 조금도 못지않은 도시로 성장했다. 성도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중동지방의 수많은 장사치들이 몰려와 성시를 이루었고, 온갖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 되었다. 번영한 촉한땅에서 쏟아지는 곡물과 광물, 소금 및 비단 등 물자와 특산품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촉한의 경제발전은 제갈량의 경제정책이 낳은 결과임이 분명하다.

종합하자면, 제갈량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 이익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느냐에 시선을 두고 있었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은 구체적이면서도 큰 실효성을 갖추고 있었다. 본인의 기량을 과신하지 않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했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소다. 제갈량의 지휘 아래 촉한은 불과 5년도 걸리지 않아 강건한 정치 기반을 마련했으니, 이러한 성과를 달성하고 계속 유지한 그의 업적을 관중 소하에 비유한 진수의 평론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제갈량이 더 대단한 것은 자신의 사후를 굉장히 잘 대비했다는 점이다. 일단 내정을 책임질 동윤과 장완이라는 인재를 배치했고, 군부에는 비의와 북벌을 대신할 강유, 촉한의 또 다른 방어선이 될 선비족의 대인 가비능을 동맹으로 삼는 등, 내정과 국경지대를 안정시켰다. 그 덕에 제갈량 사후 이들이 몸을 던지며 촉은 29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의 바람과 달리 동윤과 장완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비의 그리고 동맹인 가비능이 위에게 암살을 당했다. 심지어 제갈량 사후 북벌을 책임지던 강유마저 암군인 유선과 환관 황호 덕분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리하여 황호와 희희낙락한 유선 탓에 촉은 개국한 지 43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제갈량 사후 촉이 29년이나 더 버텼으며, 강대한 위나라를 상대로 장완, 비의, 강유 등 제갈량이 키워낸 인재들이 몇차례나 신승을 거두고 때로는 먼저 쳐들어가기도 하는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전쟁을 10년 이상 해내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도 촉한의 전체적인 국력 자체는 크게 쇠퇴하지 않았고, 위나라와 벌이는 전쟁에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비와 제갈량은 분명 당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영웅이었다. 장장 426년을 버텨온 황가를 복원하고 거기에 건강하고 젊은 피를 수혈한다. 그리하여 중국을 다시금 젊고 강한 나라로 부활시킨다. 그들은 그리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황실과 이어져 있다는 '연결점'을 가지고 있으나 지극히 흔한 혈연이기에 수구 세력과 거리가 멀었던 유비와, 그를 따르던 대표적인 의협이었던 관우 장비. 이렇게 한미한 가문과 변방에서 태어나 오래된 제도에 따르면 절대 그렇게까지 출세할 수 없었을 인재들은 함께 맨바닥에서 떨쳐 일어나 끝내는 각각 일국의 황제, 천하를 뒤흔드는 대군의 지휘관이자 정치가가 되었다.

이렇게 황가와 이어져 있다는, 지극히 희미하게나마 옛 질서와 이어진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섰기에 그 옛 질서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회춘하고자 했던 유비 집단과, 옛 질서와 이어진 한 자신을 정상에 올릴 수 없기에 그 질서를 파괴하고자 한 조조 손권 집단의 대결, 이것이 사실 우리가 아는 ' 삼국지'의 전모다. 이는 의 대결도, 진보 보수의 대결도, 이상 현실의 대결이 아니다. 그들 모두 지배층이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었고, 옛것을 파괴하건, 개혁하건 진보적이었으며, 낡은 중국을 시대에 맞게 재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자들이었고, 그를 위해 황건적처럼 종교나 선동이 아니라, 법과 군사와 국부에 힘을 쏟았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죄없는 백성들을 전란에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악이었으며, 무질서로 상처받고 빈곤해진 백성들에게 각자 나름대로 질서와 안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선이었다. 삼국지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저마다 대의를 내걸고 나선 영웅들의 격돌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영웅들의 대의와 명분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바탕한 것이었지, 절대 일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공허한 의리', '현실을 외면한 이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이기고자 남으로, 그리고 북으로 나아갔다. 융중에서 밭 갈던 젊은 시절, 유비를 만나 천하를 평정하려 대전략을 논하던 선비의 곁에는 이제 주공인 유비도, 그가 이끌던 쟁쟁한 무장들도 없었지만 천하를 그가 생각했던 대로, 유비가 생각했던 대로 평정하기 위해 그리 하였다. 수리 시설을 정비하여 농업을 진흥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견직물을 촉의 특산물로 만들었으며, 소금과 철과 금과 은을 대량으로 캐서 나라를 부유하게 했다. 법을 엄히 적용하고, 철저히 신상필벌에 따라 인재를 씀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수족으로 썼다. 남중 이민족들과 호족들을 평정하고, 그들을 노예가 아닌 평등한 백성이요 인재로 대우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국력을 보충하고, 군수물자와 병력을 충당했다. 신의를 저버리고 끝내 자신의 군주를 죽인 오에게 굴욕을 무릅쓰고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고, 한실 부흥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칭제를 하여 촉한과 대등하고자 하는 오나라에게도 실리를 내세워 동맹을 유지하고 우의를 다졌다. 그리고 그는 북으로 나아갔다. 그의 최종 목표가 장안과 낙양, 즉 전한과 후한의 사백년 황도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장안과 낙양이 무너지는 순간 위의 중심지역이 촉에게 넘어가며, 촉은 중원을 장악하여 '유씨'라는 옛 황실과 맺은 인연말고도, 실력으로 천하의 주인임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그러하기에 장안과 낙양의 낙성, 이것이 촉이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의 첫걸음이자, 북벌을 이끄는 제갈량의 일차적인 최종 목표였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를 이루고자 무턱대고 군대를 장안으로 진격시키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중에서 했던 대로, 관중과 농우의 호족들과 이민족들을 달래고 융화시키며 그들의 병력과 재부를 거두어 관중 동쪽의 위나라 대군과 맞설 힘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양주를 제압하여 서역과 통하는 교역로를 얻어 촉의 가장 유력한 생산품인 비단이 주된 상품이 되는 거대한 무역 통로를 장악, 국부를 증진하고 흉노, 선비, 강, 저와 연결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거나 그들을 촉한에 흡수하여 남중의 서남이들이 그랬듯 촉의 유력한 조아(爪牙)로 삼고, 춘추전국시대 초한전쟁 이래 천하패권을 다툴 때 가장 유명한 지역이었던 관중을 장악했다는 정치적인 무기를 얻어 위와 오에 대하여 촉한의 천하 패자 정통성을 주장한다. 제갈량은 다섯 번을 북으로 나아가는 동안 한시도 이를 잊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북벌은 이기고자 하는 싸움이었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지, 대의와 명분에 매달려 불가능한 이상, 아니 망상을 뒤쫓는 정신병적인 모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 야전으로건 방어전으로건 제갈량은 선전했고, 촉은 그렇게 세력이 빈약했어도 끊임없이 위에 도전했다.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이상의 하늘을 바라본다. 제갈량은 54년의 일생동안 이에 언제나 충실했던 정치가였다. 하늘이 정한 그의 수명이 짧았고, 그의 주군이었던 유비의 거듭된 실패가 겹쳤으며,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천하를 누볐던 조조라는 거인이 만든, 위라는 대적과 좁히기 어려운 큰 격차가 있었으나 그는 놀라우리만치 비상한 수완으로 정치, 외교, 교역, 농정, 법률, 군사 등 나라를 다스릴 때 필요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촉이라는 나라가 국력이 두 배나 되는 오나, 최대 열 배까지 강하다 할 위를 잠깐이나마 능가하게끔 하여 그의 생전은 물론, 그의 사후 30년 이상 촉이 위와 맞서 사투를 벌이게끔 했다. 그러했기에 우방이었던 오나라는 호족 연합 국가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반발하여 제갈량과 그의 후계자인 장완, 비의의 정치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과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기득권 사이의 갈등에 시달려야 했으며, 승자인 위나라와 진나라조차 그 수령이라 할 통일제국의 황제 사마염의 입에서 '제갈공명 같은 인재가 내 곁에 있다면 천하가 오늘과 같았겠는가!'라는 찬탄이 나오게 할 정도로 당대 제국의 통치계급은 제갈량의 정치와 군략에 경도되었고, 비록 그가 경쟁자를 넘어선 적수였어도 숨김없는 찬사를 보냈다.

유비 제갈량 촉한 같은, 한 주의 물자를 모두 끌어모아 전선에 쏟아붓는, 그러면서도 국가, 민간 경제와 사회 질서는 잘 돌아가는 총력전쟁기계 같은 국가는 사실 이 시대에는 좀 오버 테크놀로지 같은 것이다. 이런 체제를 만들고 공세적으로 유효하게 작동시켰다는 것 자체가 행정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나 상당히 흥미로운 성과이다. 하지만 당대의 사회간접자본으로 이를 이루려면 당연히 인재를 갈아넣는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촉한의 수많은 인재들은 과로사로 죽어나갔다. 촉한의 관료 숫자가 인구가 두 배인 동오보다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업적을 통해 제갈량은 사천 지역에서 민심을 매우 깊이 얻었으며, 사천의 많은 주민들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머리에 흰 천을 쓰던 관습이 있었다. 이는 제갈량을 기리는 것으로 그가 사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관습이며, 무려 천 여년에 걸쳐 이어져 내려왔다고 한다.[79]

16. 여담

보통은 제갈량이 그냥 천재라서 저러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만능의 천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갈량이 유비의 탁고대신으로서 이만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유비가 제갈량의 재능이 저 정도로 개화될 지경으로 쥐어짜면서(...) 경험을 쌓게 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1년. 출생.
207년. 삼고초려 후 출사.
208년. 조조의 형주 공격. 강하로 도망. 동오로 가서 손권과 동맹 체결.
209년. 군사중랑장으로 임명. 영릉 장사 계양 세 군을 관할하며 부세를 거둠.
211년. 유비 입촉. 형주를 진수(수비함).
213년. 장비, 조운과 함께 익주를 공격.
214년. 유비 익주목 등극. 군사장군으로 임명.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
218년. 한중공방전. 성도에 머무르며 보급.
219년. 유비 한중왕 등극.
221년. 유비 황제 등극. 승상 녹상서사 사례교위 가절에 임명.
223년. 유비 사망. 탁고를 받음.

현대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충 이렇게 나온다.
-공무원 02년차(28세) : 조직의 명운이 달린 교섭에 대표사절로 나감. 외교 분야 마스터.
-공무원 03년차(29세) : 조직의 수입관리 총괄본부장이 됨. 행정 분야 마스터.
-공무원 05년차(31세) : 기관장이 해외에 출장가자 본사 공동 관리자가 됨. 군사(수비) 분야 마스터.
-공무원 07년차(33세) : 기관장을 도우러 해외로 나감. 군사지휘관이 됨. 군사(공격) 분야 마스터.
-공무원 08년차(34세) : 기관장이 조직 확장 성공. 조직 내 명실상부 넘버 2.
-공무원 15년차(41세) : 국무총리 겸 기재부장관 겸 국방부장관 겸 감사원장 겸 대법원장 기타 등등.

...젊은 시절부터 이렇게 착취를 해댔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더더욱 고생을 해야 했으니 과로사를 안 하고 배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덕에 제갈량이 승상이 된 나이는 겨우 마흔 한 살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일을 맡겨도 제 역할을 잘 해냈고, 유비가 열심히 부려먹은 덕에 만능 관료가 된 것이다. 당대에 이 정도로 만능이었던 자는 조조 정도인데, 조조와 달리 절대적인 충성심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최고의 관료이자 신하였던 것.

제갈량은 촉한이라는 나라를 세운 황제 유비와 같은 카리스마를 갖지는 못했지만 넘쳐나는 재능이 있었고, 유비는 그런 제갈량에게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경험과 권한을 물려주었기에 제갈량이 망해가던 촉한을 수복할 수 있었다.

전한의 개국공신인 한삼걸에 비하자면 장량과 같은 대국적 식견으로 촉이 나아갈 방향성인 천하삼분지계를 만들었고, 소하의 비견되는 정도의 행정 정치력으로 촉을 부흥시킬 수 있었고, 북벌에 나설 때는 한신이 되어 직접 군사를 부리니 제갈량은 가히 만능이었다.

17. 관련 문서


[1] 물론 그의 군재 역시 정치적인 재능보다 빛을 보지 못하여 그렇지 뛰어난 편이다. [2] 이릉대전의 타격은 촉 입장에서 엄청났다. 형주 통치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마량의 죽음이 대표적. [3] 정확히는 장완이 반준의 이종사촌 형이다. [4] 제갈량 평전. [5] 승상부연(丞相府掾​) 요주(姚伷). 칭요주교(稱姚伷交)로 요주를 표창하며 인재 천거의 중요성 강조. [6] 유비. [7] 마초 [8] 장비 [9] 법정, 이엄, 유파, 이적 등도 함께 참여했다. [10] 익주 건위군 [11] 주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 [12] 9석(石)이다. [13] 36균은 약 238kg이고, 4균은 약 26kg. [14] 자치통감에서는 수만 [15] 자치통감에서는 마륭의 팔진도 사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진서를 인용하면서 그가 편상거를 만들었다는 것을 언급해 간접적으로 팔진도를 언급하였다. 편상거는 팔진도에 의거해서 만들어졌으니. 한편, 편상거는 제갈팔진도 중 치중차에 가죽을 덧씌워 공방일체로 쓴 거몽진법을 응용한 듯 싶다. [16] 태평어람에 인용된 왕은의《 진서》에서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마륭을 무위태수로 삼았다. 군으로 갔는데, 악한 오랑캐 굴국수기능 등이 길을 끊고 마륭을 포위했다. 마륭은 팔진도를 만들어, 지형이 광활한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녹각거영으로 병진했고, 좁은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목실을 덮어 나란히 싸우고, 전진했다. 지모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고, 뜻밖에 허를 찔렀으므로, 좁은 도로 측면에 자석을 뿌려서, 적의 갑옷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마륭의 병사들은 소가죽 갑옷을 입어 움직일 수 있으니, 적이 귀신이 되었다."(馬隆為武威太守。之郡,惡虜窟局樹機能等斷道圍隆。隆作八陣圖,地廣則鹿角車營并進,狹則木屋施輪,并戰并前。智謀從橫,出其不意,以磁石累夾道側,賊鎧不得過。隆兵著牛皮鎧得過,賊以為神。)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관찬 진서의 표현대로 팔진도에 의거해 팔진에서 가장 중요한 편상거 진영을 만들었다는 뜻일것이다. 태평어람 <왕은진서>의 다른 구절엔 "마륭은 양주를 공격했는데, 악한 오랑캐가 길을 끊었다. 마륭은 팔진도 거영(車營, 수레진영)을 만들어서 나란히 추격했다, 좁은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목실을 덮고 나란히 전진했다, 지모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고, 뜻밖에 허를 찔렀으므로, 능히 성공했다."(馬隆擊涼州,惡虜斷道。隆作八陣圖車營并追,狹則木屋施輪并前,智謀縱橫,出其不意,故能成功。)라고 나와 있기도 하고. [17] 애기살 [18] 송나라의 제6대 황제인 송신종 때의 연호(1068~1077년). [19] 상산은 수미(首尾)가 상응한다는 전설상의 뱀인 솔연(率然)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손자(孫子)》 〈구지(九地)〉에 “솔연은 상산에서 나는 뱀으로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원하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원하며, 중앙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응원한다.〔率然者, 常山之蛇也. 擊其首則尾至, 擊其尾則首至, 擊其中則首尾俱至.〕”라는 말이 있다.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는 솔연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20] 《진서(晉書)》 권98 〈환온열전(桓溫列傳)〉에 "처음에 제갈량이 어복(魚腹)의 백사장에다 팔진도를 만들 때 돌무더기를 여덟 줄로 쌓았는데, 줄 사이의 거리가 두 발이었다. 환온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상산(常山)의 뱀 형세이다.’라고 하였는데, 문관이나 무관이나 모두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21] 이는 송신종 시기 신종이 신하였던 장성일(張誠一), 이헌(李憲) 등과 팔진의 역사에 대해 논한 기록이다. [22] 임금이 타는 수레 [23] 칡으로 만든 두건 [24] 원문: 陳傅良, 歴代兵制 卷三 (電庫 所收), “三國…晉之世, 惟陳勰․馬隆, 用諸葛亮古陣遺法, 畧試一二. 隆以募兵三千, 克平西凉, 厥功彌著. 勰事雖不槩見, 然,徒校標幟兵之一物耳, 更數大亂京闕圍逼, 而白飛幡一麾, 衆皆解甲不鬪, 麾號數信,收效至此, 孰謂古法之, 不可施於後世, 而軍政之果, 無益於人國也. [25] 송사 195권 [26] 원문: 章如愚, 羣書考索 後集 卷四十九 (電庫 所收), "兵門…晉之世, 惟陳勰․馬隆, 得諸葛亮古陣遺法, 畧試一二. 隆以募兵三千, 平西凉, 厥功彌著. 勰事雖不概見, 然徒校幖幟兵之一物耳. 當凉關, 倉皇之中, 而白虎幡一麾, 衆皆解甲麾弓, 素信收歛, 至此, 孰謂古法, 不可施之後世, 而軍政之無益於國哉.", 내용은 진부량의 역대병제와 거의 같다. [27] 더불어 태평어람 등에 무후병법, 제갈량병요 등이 인용되어 있었고, 왕응린이 쓴 옥해(玉海) 중흥서목(中興書目)에는 량집(亮集) 14권에 비기(碑記)등의 12편이 2권으로 더 편성되어 들어가 있었다. [28] 송나라 시절에는 송태종이 명령한 팔진이 요나라에 밀렸다는 글도 보이나, 이는 전투 마차 수레를 잘 활용하지 못 하고 투사 무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의 일로 보이며 송신종 시절엔 여전히 제갈량의 팔진법이 변방의 장수들에게 가르쳐질 정도로 전술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던 듯 하다. 사실 전투 마차를 이용한 전술은 요나라의 철요(鐵鷂) 같은 중기병인 기사를 상대로 얀 지슈카 같은 명장이 잘 사용하기도 했고,《 위서》에는 북방 민족을 제갈량의 팔진법으로 막자는 얘기도 나온다. 당대가 카타프락트 동아시아에서 처음 사용되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유효한 대책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29] 다만 이는 서진 지배층의 제갈량에 대한 존경의 시각이 가미된 것일수 있다. 촉한이 멸망하기 전에야 제갈량은 적국의 수괴였지만 촉한이 멸망하고 서진이 들어섬에 따라 제갈량이 과거의 존경받을 만한 재상으로 이미지가 바뀐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문집 발행, 제갈량의 진법 강습, 진무제의 "제갈량 만한 신하가 없는가?" 발언, 유홍이 제갈량의 옛 집에 들러 이흥을 시켜 제갈량을 찬미하는 글을 쓴 것, 양호가 제갈량을 악의에 비유하는 것 등 제갈량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는 증거는 충분히 있다. [30] 구군진법이라고도 부른다. [31] 서진 ~ 동진 시대 사람인 왕은의《 진서》에서도 마륭이 팔진도와 수레를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32] 이위공문대에 따르면 판자 지붕 [33] 선제기의 제갈량군 1만 참수 기록, 후방 급습 성과 기록 등은 왜곡이 의심되며, 그 때문에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선제기 기록을 불신하여 아예 싣지 않았다.(물론 사마광이 사마씨의 후손이지만 자치통감을 중립적으로 기록한 인물인 점도 있다.) 여기에 자치통감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벌인 노성 전투에서 제갈량이 승리했다는《한진춘추》의 기록을 더 신뢰하여 기재했다.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군이 사마의를 대파하고, 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철갑옷 5천 벌, 각노(角弩) 3,100 장(張)을 노획했으며,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고 나온다. [34] 노성/기산/상규 등 [35] 그나마도 제갈량이 진창에 시선을 돌리고 무도와 음평을 차지하기 위해서 페이크를 쳤다는 설이 있다. 제갈량의 북벌 문서 참고. [36] 사실 완전히 수비적으로만 가면 수성은 공성보다 몇십 배는 쉬워진다. 수만 vs 1천이라도 굳게 지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염파 우주방어로 임하자 왕흘이 덤비지 못한 이유가 이거다. 위연이 자기 휘하 별도의 전투 병력 5천+군수 물자 담당 병력 5천= 도합 1만 군사로, 못해도 몇 만 명은 지키고 있을 장안을 기습해서 빼앗겠다는 제안이 얼마나 멍청한지 짐작 가능하다. [37] 심지어 장합은 역공의 위험성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결국 당하고 말았다. [38] 지혜와 언변을 갖춘 간첩 [39] 그 마을 사람을 사용하는 것. [40] 두드려서 잡다한 성분을 제거하는 방법 [41] 그외 서진 시대의 주요 갑옷인 통수개(筩袖鎧)도 제갈량의 작품이라고 남사 등에 전해지지만 통수개의 경우엔 후한 시대에 이미 출현했다고 한다. 출처 - 문답으로 엮은 교양 중국사, 상해고적출판사, 박소정편역, 이산 출판(2005) 148~149 [42] 통수개는 삼국시대 (蜀 : 221년 ~ 263년)의 승상이었던 제갈량(諸葛亮)이 발명한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정말로 그가 발명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소매가 붙어 있는 형태의 개갑은 한나라 때 이미 출현하였는데, 이것을 개량하여 완성시킨 인물이 제갈량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제갈량은 촉나라 군대의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신병기를 개발하고 개갑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출처 - 무기와 방어구(중국편), 2009. 2. 11, 시노다 고이치, 신동기 [43] 연노 발사엔 적어도 5~6명 내지 10여명이 있어야 발사가 가능했다. [44] 촉의 비단 [45] 촉한의 수도. [46]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른다. [47]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한다. [48] 문을 닫고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함. [49] 농사를 권하고 무예를 강습함. [50] 식민휴사(息民休士) [51] 오늘날의 운남성 보산시 [52] 예문유취. [53] 조부모와 손자 [54] 조조 조비 조예 [55] 여담으로 오나라는 촉한에서 비단과 소금 뿐만이 아니라 도 수입했다. 제갈각이 "촉한은 오나라의 마굿간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역설적으로 오나라가 촉한의 말 수출에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건흥 원년인 223년 중랑장 등지를 오에 파견하여 촉 • 오 동맹을 복원하려고 할 때, 제갈량은 말 200필과 비단 1천 단을 예물로 보냈다. 또 이듬해 손권이 중랑장 장온을 답례 사절로 파견했을 때, 제갈량은 장온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그 가운데 촉금 5단이 있었는데 그것을 받은 장온이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촉과 오의 국빈들이 오갈 때마다 촉금은 중요한 예물로 사용되었다. [56] 주개검, 사수필기. [57] 출처:《능개재만록(能改齋漫綠)》권 15 [58] 말이나 글 속에 어떠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 [59] 출처는 여명협 교수의《제갈량 평전》 [60] 출처는 왕은의《촉기(蜀記)》 [61] 두껍고 무늬가 없는 여러 가지 고운 빛깔의 비단. [62] 여명협 교수의《제갈량 평전》 [63] 중국어 위키백과, 바이두 백과 [64] 한 왕조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나《 정사 삼국지》< 등애전>에서나 촉한 정벌 이후 관련 계획에서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 [65] 현대에 주력으로 사용되는 그 천연가스가 맞다. [66] 제갈공명이 입촉 후 운남성의 차를 갖고 보이차를 만들어 보급하였단 전설이 내려오고 실제로 차의 재배가 촉한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다. [67] 경제적인 문제로는 촉의 역량이 의심될 여지는 없어보인다. 촉이 발행한 화폐가 옹양주와 형주, 교주 일대까지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화폐가 그렇게 널리 통용되려면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 작용하는 정부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후한말 인플레의 주된 요인이 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구리의 공급 불안 탓이었다고 하는데, 촉은 남중을 정벌한 뒤부터 위에서 말한 화폐를 주조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서진의 실정으로 수나라의 등장 때까지 화폐경제가 다시 망하지만. [68] 모(矛)가 문명 초기부터 존재했던 상형자인 반면 창(槍)은 이후에 만들어진 형성자이기 때문에 외래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가만보면 창 자에는 창의 형상이나 뾰족한 끝날을 나타내는 글자가 없다. 저 글자에 부수가 붙기 전의 것은 무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창고(倉)를 일컫는 글자. [69] 산을 무너뜨리는 쇠뇌 [70] 대만에서는 천등(天灯)이라고 부른다. [71] 정확히는 성도 인근 임공현이라는 곳이다. [72] 《蜀志》曰:臨邛有火井,諸葛亮一窺更盛。 [73] 참고로 축융 중국 신화의 불의 신이다. 그리고 촉 지방은 천연 가스가 나온다. 고대 중국인들이 그 불을 보고 "축융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74] 당시 소금은 귀했다. 특히 내륙 지방에서는 더더욱. [75] 諸葛丞相躬蒞視察,改進技法,『刳斑竹』以導氣,引井火以煮鹽,置鍋灶達數十,更盈利逾萬千。 [76] 후세 사람들에게 노반(魯班)으로 불렸으며, 걸출한 기술로 인해 건축 공장(工匠)의 시조(始祖)로 추앙된다. [77] 무너져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나라의 재건과 하루빨리 북벌이라는 대업을 마쳐야 했기에 휴식과 여유가 없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제갈량의 과도한 업무는 결국 과로 쓰러져 자신을 죽게 만든 원인이 되고 말았다. [78] 등애는 농우의 병사 2만명과 촉에서 항복한 병사 2만명을 촉에 투입하여 소금을 굽고 철을 제련하게 하여 이를 흥하게 한 다음 군대와 농사를 위하여 요긴하게 사용하게 하려 했는데 이는 원래 촉 전역에서 종사하고 있던 민간 노동자들이 그 정도 되었다는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도 "촉에는 염정(鹽井,소금기 있는 우물)이 있고 주제(朱提)에서는 은(銀)이 나오고 엄도(嚴道)와 공도(邛都)에서는 동(銅)이 나오고 무양(武陽), 남안(南安), 임공(臨邛), 면양(沔陽)에서는 모두 철(鐵)이 나와 한(漢) 때에 염관(鹽官)과 철관(鐵官)을 두었었는데 등애가 그 이익을 복구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했다. [79] 소오강호에도 이 풍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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