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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30

유홍(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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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劉弘
(236년 ~ 306년)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화계(和季)로 유정의 아들, 유복의 손자.

2. 생애

예주 패국 상현 사람으로 재간과 모략, 정사의 재능이 있고 어릴 때 사마염과 함께 영안리에 동거하고 같은 해에 공부하는 자리를 함께 했다.

이로 인해 옛 은혜로써 태자문대부에 천거되어 출세했으며, 차례로 승진해 솔경령이 되었고 태재장사로 옮겼으며, 이 때 장화는 그를 무겁게 여겼다. 이에 따라 영삭 장군, 가절, 감유주제군사, 영오환 교위에 임명되고 위엄과 은혜가 있어 도적은 자취를 감추고 유주 북쪽에서 칭찬을 받으면서 그 공적과 인덕이 훌륭해 선성공에 봉해졌고 양호의 참군을 지낸 적도 있다.

303년에 장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지절, 남만 교위, 형주 자사로 옮겨 유홍은 전장군 조양, 평남 장군 양이 등과 함께 완에 주둔했다가 사마흠이 장창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6월에 유홍이 남만 장사 도간을 대도호, 참군 괴긍을 의군 독호, 아문장 피초를 도전수로 삼아 진격해 양양을 점거했으며, 장창이 완을 포위해 조양의 군사를 격파하고 양이를 죽이자 물러나서 양에 주둔했다.

유홍은 도간 등을 파견해 장창을 경릉에서 공격하게 해서 그들을 격파해 평정했으며, 유홍이 물러나 양에 주둔했다가 범양왕 사마효가 장수 교위 유혁을 파견해 형주 자사를 관장하게 했지만 유홍이 도착하자 장혁이 교대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내어 항거했다. 조정으로부터 자사에 임명받은 유홍은 장혁을 토벌해 목을 베었고 형주의 주군의 수재들이 대부분 결원 상태라 조정에 보충하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을 받았으며, 공로, 품덕을 헤아리고 재주에 따라서 책임을 맡겨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공평하고 적당한 조치에 감복했다.

유홍은 오조를 영릉 태수, 피초를 양양 태수로 삼아달라고 청했다. 조정에서는 공은 피초가 세웠으나 명성이 얕아 유홍의 사위인 전 동평 태수 하후척을 양양 태수로 삼으려 하였다. 유홍은 상주하여 친인척을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고, 피초의 공훈을 강조하여 피초를 양양 태수로 삼는 것을 허락받았다. 다만, 오조의 경우 본인이 출사를 거절하여 영릉 태수로 삼지 못 했다. 유홍은 농사, 양잠을 권장하고 형벌을 관대히 하면서 부세를 줄여 공사 간에 재물이 충족하게 되고 백성들은 아끼면서 즐거워했다.

유홍은 어느날 잠을 깼다가 성 위에서 감시 역할하는 자의 고통에 찬 탄식을 듣고 불렀더니 그 사람은 60을 넘어 피로에 수척해지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자 유홍이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감시 역할을 시킨 자를 꾸짖어 처분한 후에 그 사람에게 옷, 모자를 주면서 다른 부서로 옮겼다. 옛 제도에서는 두 산의 골짜기가 있는 큰 못에서 백성들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금지했지만 유홍은 문장을 내려 예기에서는 명산의 큰 못을 봉쇄해서는 안되고 백성과 그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가 몰래 소유해 백성이 은혜를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기에 신속히 이 법을 개정해야 하며, 술 창고에는 신에게 바치는 술, 정사에 호소하는 술, 백성을 위한 술이 있고 동일한 쌀을 사용해도 우열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막걸리를 넣어 3개의 두께를 동일하게 하면 분별이 없게 된다고 했다.

304년에 익주가 혼란해 나상이 별가 이흥을 파견해 양식을 요구하자 유홍의 강기는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어렵고 형주 자체에도 양식이 부족하면서 영릉의 쌀 5천곡을 주고자 했는데, 진남 장군 유홍은 천하가 한 집안이니 서쪽을 돌아보아야 할 근심을 없애야 한다면서 3만 곡의 양식을 보넀다. 이흥이 남아서 그의 참군이 되길 청했지만 그의 수판을 빼앗고 이흥을 나상에게 보내면서 치중 하송에게 건평, 의도, 양양의 군사를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파동에 주둔하게 해 나상을 후방에서 이어주게 했다.

이 시점인 진나라 영흥(永興, 304~305) 중, 유홍은 제갈량의 옛 집터인 융중(隆中)에 도착해 제갈량의 옛 집을 살펴보고 위가 둥근 비석을 세워 공덕을 현창하고, 태부연(太傅掾) 건위(犍爲) 사람 이흥(李興)에 명해 글을 짓게 하기도 했다.[1]

이 무렵, 유민으로 형주에 있는 사람이 10여만 호였고 고향을 떠나서 가난하고 궁핍해 대부분이 도적이 되자 유홍은 그들에게 밭을 지을 땅과 종자를 제공하면서 그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발탁해 그 자질에 따라 임용해서 유민들을 안정시켰다. 이 때 낙관인 총장, 태락, 영인 등에게 유홍이 난을 피해 형주로 오자 어떤 사람이 유홍에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자를 권했지만 유홍은 유표와 두기의 사례를 이야기했다.[2]

유홍은 이에 대해 탄식해 지금 임금은 난에 휘말려 고생하지만 자신은 신하로서 절개를 다할 수 없고 우리 집의 음악하는 사람도 연주하는 것을 못하면서 천자를 맞이하는 음악을 만들겠냐고 했으며, 군현에 명을 내려 그들을 위로하면서 조정의 재가를 기다렸다가 이들을 정중하게 조정으로 돌려보냈다. 조정에서는 장창 평정의 공으로 차남을 현후에 봉하려 했지만 유홍이 이를 사양했으며, 시중, 진남 대장군, 개부 의동삼사에 임명되고 이전에 광한 태수 신염이 유홍에게 합종책, 연횡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장강 유역에서 독립해 할거하라고 권하자 화가 나서 그의 목을 베었다.

사마옹이 장안에서 혜제를 끼고 조칙을 보내 유홍에게 예주 자사 유교의 후방 지원을 하라고 했고 유홍은 유교, 사마월 등에게 편지를 보내 원한을 풀고 군사를 해신시켜 왕실을 함께 보필하고자 했지만 모두 들어주지 않았고 동해 왕 사마월에게도 쌍방이 혐의하는 일을 풀어야 한다고 보냈지만 듣지 않았다. 유홍은 장방이 잔혹하고 포악해 사마옹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 판단하고 사마월이 혜제를 맞이하자 참군 유반을 파견해 도호로 삼고 여러 군사를 통솔하면서 사마월의 통제를 받았는데, 당시에 천하가 동란에 휘말렸어도 형주만은 안전했고 다른 이들은 사마월에게 기울었지만 유홍만은 그에게 기울지 않아 사마월이 유홍에게 앙심을 품었다.

유홍은 도간에 대해 자신이 양호 밑에서 참군을 하던 이야기를 했는데, 양호로부터 그 때 자신의 뒤를 이을만한 재능을 가졌다고 들었다. 유홍은 도간에게 자신을 이을만한 재능을 가질 정도로 극찬했으며, 305년에 진민이 반란을 일으키고 수군 내사 호회가 유홍에게 도간은 큰 군에 있으면서 강한 군사를 통솔해 만약 다른 뜻을 가진다면 형주는 동쪽의 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그러나 유홍은 도간은 충성스럽고 유능한 사람이라 그를 안 지 오래되었고 반드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해서 그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를 듣고 도간이 아들 도홍, 조카 도진을 보내 자신의 의사를 굳게 하자 유홍은 이들을 참군으로 삼았다가 많은 자금을 주고 돌려보냈다.

유홍은 북군 중후 피초, 강하 태수 도간, 무릉 태수 묘광 등을 파견해 하구에 주둔하게 하고 남평 태수인 응첨을 파견해 수군을 감독해서 그들을 이어주게 했으며, 진민이 진회를 보내 무창을 공격하자 도간을 전봉 독호로 삼아 무창을 방어하게 했고 이 때 장광도 진민 토벌에 참여했다. 남양 태수 위전이 공(유홍)은 동해 왕(사마월)과 더불어 하고 있으니 태재(사마옹)의 심복을 베어 향배를 밝혀야 한다고 했는데, 유홍은 재보(사마옹)가 잘못한 일이 장광의 죄가 되겠냐면서 이를 거절하고 표문을 올려 장광의 특수한 공로를 보고하고 진급시켜 발탁해줄 것을 빌자 유홍은 위전으로부터 원망을 받았다.

306년에 거기 장군으로 승진했고 옛 관직은 그대로 있었으며, 천하는 크게 혼란했지만 유홍이 양자강, 한수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져 그의 위신이 남방을 복종해 공을 세우면 다른 사람 덕분으로 여기고 실패하는 일이 생기면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군사를 일으키거나 징발할 때마다 직접 편지를 군의 태수, 봉국의 재상에게 보내 간절한 태도로 규정하고 엄밀하게 말하자 그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감복해 기뻐하면서 다투어 그에게 달려와서 유공(유홍)이 보낸 편지 1장 받는 것이 부종사 10명의 독촉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사마영이 사마월과의 싸움에서 패해 남쪽으로 도주하자 사마영이 성도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유홍이 거부했으며, 이전에 초등이 성한의 파서태수 마탈이 초등의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군사로 복수해주기를 청하자 표문을 올려 초등을 재동내사로 삼아 파촉 지역의 유민들을 모집하게 해 2천명을 얻어 서쪽으로 가서 파군에 이르게 했다.

사마월에게 간 유반이 돌아오자 자사, 교위의 직위를 반납하고 알맞게 소부에 나눠주도록 조정에 글을 올렸지만 조정에 이르기 전에 양양에서 사망했으며, 형주의 남녀는 매우 슬퍼하고 유홍의 죽음을 친한 사람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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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갈량/평가 문서 참고. [2] 옛날 유표는 당시 예약이 붕괴해 두기를 시켜 천자의 음악을 만들었고 음악이 생겨 이를 마당에서 연주하기를 원했지만 두기는 천자를 위해서 음악을 만들었지만 이를 장군의 마당에서 연주하는 일은 장군의 본의는 아닐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