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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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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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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국내편3. 중국편4. 남중편5. 예술편6. 기타7. 관련 문서

1. 소개

이 문서는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는 문서이다.

2. 국내편

3. 중국편

4. 남중편

5. 예술편

6.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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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2] 《初學記》 [3] 《諸葛忠武書 卷8 法檢》 [4] 《新唐書 卷59 藝文志》 [5] 《太平御覽 卷156 註》 [6] 《太平御覽 卷156 吳錄》 [7] 《한서(漢書)》 권40 장량 열전(張良列傳), 《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 [8] 《元和郡縣志 劍閣道》 [9] 《資治通鑑》,《漢丞相諸葛忠武侯傳》 [10]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子部 天文, 算法類 天文》,《日省錄 正祖 19年 3月 16日》 [11] 《小學 嘉言》 [12] 그래서 향을 머금어 품는다는 의미로 상서랑을 회향옥란(懷香屋蘭)이라고도 불렀다고. [13] 다만 똑같이 자가 공명(孔明)인 영천 사람 호소(胡昭, 161-250)에게 보낸 편지인데 후대에 잘못 명명되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태사자에게도 당귀를 보낸 적이 있는 조조인 만큼 제갈량에게도 비슷한 회유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14] 기록에서 제갈량이 서주에서 형주로 이주한 것은 가족 일 때문으로 나오지만, 그 시기에 고향이 지옥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15] 사실 장무 원년은 221년으로 관우가 이미 죽었을 터인데 관우에게도 검을 내렸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다. 아마도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죽은 관우를 추모하기 위해 검을 만들고 관우의 사당이나 그의 유족들에게 전달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16] 위에서 나오듯이 당나라 시인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시이다. [17] 원문은 이곳을 참조. [18] 원문: 永昌城,古哀牢地,在玷蒼山西六日程。西北去廣蕩城六十日程。廣蕩城接吐蕃界。隔候雪山,西邊大洞川,亦有諸葛武侯城。城中有神廟,土俗咸共敬畏,禱祝不闕。蠻夷騎馬,遙望廟即下馬趨走。 [19] 당태종의 연호 [20] 원문: 三國蜀漢丞相諸葛亮南征自越嶲,乃建興三年春至南中,所在戰捷,由是斬雍闓等。雍闓者乃益州郡之耆帥,阻拒漢兵,亮斬之,遂平。時孟獲僭爲蠻王,誘扇諸夷,牂牁、越嶲皆應孟獲。其人素爲夷、漢所服,占據昆明、東川、武定以及烏撒、沾蒙數千里地,其衆數萬,亮經會川,歷三絳、武定也。弄棟姚安也。而抵永昌,斷九隆山脉以歇王氣,遂將孟獲生擒於營,使觀營壘,七縱七擒,以知亮有天威也。回兵白崖,立鐵柱以紀南征,改益州郡曰建寧,以仁果十七世孫張龍佑領之。 [21] 625 ~ 706, 양양 사람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간언을 올린 측천무후를 705년에 정변을 일으켜 퇴위시키고 당나라를 회복했다. [22] 윈난성 추슝(楚雄)이족(彝族)자치주 야오안(姚安)현. 고대엔 야오저우(姚州)라고 불렸으며 '야오저우를 알면 윈난 역사의 절반을 안다'라는 말도 있을 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다. [23] 금(琴)의 줄 짚는 자리를 표시한 것. 금의 '휘'는 소라 또는 조개로 만드는데 모두 13이고, 가운데 제7휘가 가장 크고 가운데 '휘'에서 제1휘와 제13휘 양쪽으로 이를수록 점점 작아진다. [24] 원문은 師徒遠涉,道路甚艱。自及褒斜,幸皆無恙。使還,馳此,不復云云。亮頓首。이다. '군사들이 먼거리를 걸어 도로에서 많은 고생을 한 끝에 포야도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모두 무사합니다. 사신을 보내 날아가듯 빠르게 서신을 보내니, 이외에 운운은 또 없을 것입니다. 량이 돈수합니다.' [25] 예서 이분(二分)과 전서 팔분을 섞어서 만든 서체, 채옹이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