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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平
? ~ 기원전 1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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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말 한초의 모사, 정치가. 공신서열 47번째, 곡역후에 봉해졌으며 식읍 5000호를 하사받았다.2. 생애
양무현(陽武縣) 호유향(戶牖鄕)[1] 출신. 위(魏)나라 사람.2.1. 한향 시절
젊은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고 집은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좋아했다. 진평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았기 때문에, 그의 형 진백은 동생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진백은 똑똑한 동생의 뒷바라지를 꾸준히 하면서 동생을 잘 먹이고 입혔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 중에는 진평의 형수에게 "집도 가난한 주제에 뭘 먹고 이토록 살이 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형 진백은 동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아봤는지, 살림은 본인이 알아서 할 테니 동생에게는 학문에만 열중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 견식을 넓히라고 했다. 만약 이런 진백의 안목이 없었다면 진평은 평범한 농사꾼이 되었거나 백수 한량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평은 용모가 뛰어나고 언변이 화려했다고 한다. 다만 목소리가 특이하여 남자답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젊을 적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여자 관계도 많이 가졌는데, 심지어는 자신의 형수와도 검열삭제를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비록 형수와의 간통 소문이 사기에도 기록되고 후세에도 언급될 정도였지만, 정말 있었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유방 밑에서 진평의 간통설을 주장하며 집요하게 인성 문제를 물고 늘어진 관영과 주발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진평을 헐뜯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들이 유방에게 말할 때에도 본인들이 직접 본걸 말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근거나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신들이 듣기로는 진평이 말입니다, 진평이 그랬다는데요? 라면서 카더라 통신을 출처로 삼는다. 유방은 사실 확인을 위해 위무지라는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문제는 이 위무지라는 사람도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하는 대신 사실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얼버무린 채로 지금 우리는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시기고 당장 이기는 게 우선인 상황인데 이 와중에 능력만 좋으면 됐지 뭘 굳이 인성 문제를 들고 옵니까 그런 건 나중에 따집시다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변호한다. 즉, 진평이 형수와 정말로 사통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위무지처럼 진평의 능력을 인정하고 변호하는 입장에서도 그런 적 없다 라고 확실하게 커버 쳐주지 않고 능력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넘어가자 같은 말을 하니 영 미묘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먼 후세에 조조 조차 능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진평의 간통설을 들고 나온다. 이걸 요약하면 당대나 후대의 진평에 대한 인식은 증거는 없어도 하고도 남을 놈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진평이 형 진백의 집에 눌러 앉고는 돈은 벌지 않고 온종일 책만 읽었기에 형수가 싫어했다고 한다. 진평의 형수는 진평이 밥이나 축낸다고 생각하여 이웃들 앞에서 이딴 시동생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불평하였고, 이를 알게 된 진백은 화를 내며 아내를 쫓아보낸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이 사통하기는커녕 아주 사이가 나빴다고 할 수 있겠다. 이혼 소식을 듣게 된 사람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하다가 "아내가 몰래 동생과 정을 통해서 쫓아낸 모양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을지도 모른다. "백수 동생 뒷바라지한다고 비난하는 아내를 쫓아냈다"라는 걸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진평이 정말로 형의 은혜를 잊고 형수와 사통한 놈팽이었다면, 지역의 유지인 장부가 상식적으로 귀한 자기 딸을 선뜻 내어줄리가 없다. 친족의 여자와 사통한 것은 현대에서도 상종 못할 인간말종인데, 고대 시절에는 당장에 장부가 자기 딸을 꼬시려 한다며 하인들을 시켜 몽둥이 찜질을 하고 마을 밖으로 쫒아내도 문제 없을 일이다.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절충시켜서, 진평에게는 형수가 둘이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이웃들 앞에서 진평의 험담을 한 아내를 쫓아보내고, 진백이 새로운 여인을 맞이하여 두 번째로 결혼을 했다는 가설이다. 진평이 첫번째 형수와는 사이가 나빴지만, 두번째 형수와는 사이가 좋아서 서로 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진백이 재혼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집안이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혼인을 두 번이나 치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어쨌든 진평은 이후로도 계속 백수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찼지만 똑같은 가난뱅이와 결혼하긴 싫었던(...) 진평은 장부라는 부잣집의 여자를 꼬시기 위해 품삯을 받으며 일을 하면서 다가가려 했는데, 어느날 진평을 본 장부가 당당한 풍모와 소문과는 다르게 근면하게 일하는 것에 진평에게 큰 뜻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다. 잘사는 처가 덕분에 대략 가난함에서 탈출한 진평은 그때부터 널리 친구도 사귀면서 지내게 되었다.[2] 한때는 진평이 사는 마을에 사제(社祭,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는데, 진평이 제사에 올린 고기를 나눠주는 재(宰)가 되자, 고기 나누는 것이 매우 공평해졌다. 그러자 진평은 한숨을 쉬며 아, 이 진평을 천하의 재상으로 삼더라도 고기 나누듯 공평할 것인데![3]
2.2. 위나라
진(秦)나라 말에 벌어진 ' 진승·오광의 난'에 동참, 처음에 위나라 공자 위구를 섬겨 큰 계책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의 계책이 백성을 미끼로 하여 장한에게 거짓으로 항복을 하고, 위구는 반대쪽 문으로 도망쳐 자신의 백성 모두가 죽어도 위구를 살리는 계책이어서 위구는 거절하고, 이후 장한에게 항복을 하며 위나라 백성을 모두 살리는 대신 자신을 태워서 죽이라고 하였다. 백성을 죽이고 왕이 사는 길과, 왕이 죽는 것으로 백성을 살리는 길 중에 위구는 후자를 택한 것.2.3. 항우 휘하
홍문연 때 범증이 암살 시도가 계속 실패하자 유방이 취해서 실수를 하도록 계속해서 술을 먹일 때 유방의 술잔에 술을 조금씩만 따르게 하여 그를 도와주었다. 초인목후이관이 무슨 뜻인지 묻는 항우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어 한생이 삶겨죽게 만들기도 했다.그 후로 삼진을 격파한 유방에 넘어간 은(殷)을 다시 꼬드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은왕 사마앙이 유방의 침략에 다시 항복을했고, 기가 막힐 정도의 태세전환에 [4]극대노한 항우가 은나라 정벌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자 자기까지 죽일까봐 겁이 난 진평은 아무래도 전에 유방을 살려준 경력까지 있던 터라 재빨리 도망치고 만다. 마지막 예의였던지 항우가 상으로 줬던 금품은 두고 갔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진평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널 때였다. 사공은 진평의 용모를 보고 분명히 도망치는 장수일 것이며 허리춤에 귀중한 보물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여겨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사공의 낌새를 눈치 챈 진평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배 젓는 것을 도왔다. 사공은 그제서야 진평이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고 죽이려던 생각을 그만 두었다. 진평이 금품을 탐내서 도망길에 가지고 갔다면 사공에게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2.4. 유방에게 귀순
고생 끝에 진평은 팽성을 향해 진군하다가 수무에서 잠시 주둔중이던 유방의 군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인 위무지의 천거로 유방에게 정식으로 발탁되어 모사로 대활약한다. 선비를 얕보았던 유방은 다른 사람들과 한꺼번에 모아놓고 밥만 적당히 대접해준 뒤 끝내려고 했는데,[5] 유방의 속내를 눈치챈 진평이 앞으로 나서서 면담을 나누자 진평이 크게 마음에 든 유방은 진평을 도위에 임명하고 수레에 함께 타도록 하였으며 장수들을 감시하는 호군(護軍)을 맡게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웅성거리면서 "왕께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초나라 도망병에게 함께 수레를 타라 하시고 저희 같은 노장(老將)들을 감독케 하십니까?”라고 따졌지만, 유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진평을 더욱 총애하였다. 운 없게도 전향하자마자 한군이 팽성대전에서 대패를 당해 군대가 사방으로 흩어진 후 다시 합류하였고, 유방은 진평에게 한왕 신과 함께 광무에 주둔하도록 했다. 하지만 주발과 관영 등의 장수들은 다시 한번 진평을 집요하게 비난했다.진평은 허우대는 멀쩡하나 속은 비어 있는 자이옵니다. 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진평은 형수와 사통하였고 위나라를 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쳐 초나라에 붙었다가 초나라에서 뜻대로 되지 않자 한나라에 투항하였사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께서는 진평을 호군으로 삼으셨사옵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진평이 여러 장수들에게서 황금을 받았는데, 많이 준 자에게는 선처하고 적게 준 자는 홀대한다 하옵니다. 진평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간신이오니 왕께서 제대로 살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런 얘기에 과연 유방도 진평을 미심쩍게 여기게 되어, 진평과 진평을 천거한 위무지를 불러서 먼저 형수와의 관계와 뇌물수수를 언급하며 위무지를 꾸짖었다. 그러자 위무지는신이 진평을 천거한 이유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으나 왕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의 행실이옵니다. 행실이 바르다고 하더라도 전투를 승리를 이끌지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사옵니까? 신은 지략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였을 뿐이오니 왕께서는 진평의 계책이 한나라에 이로운가부터 따져 보시기 바라옵니다. 그 다음에 형수와 사통했는지 황금을 받았는지 조사해 보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그러자 유방은 이번엔 “그대는 위왕을 섬기다 다시 초왕을 섬기러 갔으며 다시 나를 섬기고 있다. 신용이 있는 자는 본래 이렇게 여러 마음을 품는 것인가?”라며 진평의 충성심을 거론했는데, 이에 진평이위왕은 신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에 위왕을 떠나 항왕을 섬겼사옵니다. 항왕은 항씨 일가 외에는 사람을 믿지 못해 뛰어난 책사가 있더라도 중용하지 않는 까닭에 초나라를 떠났사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사람을 잘 가려 쓰신다기에 왕께 귀순한 것이옵니다. 그리고 신은 맨 몸으로 온 까닭에 당장 쓸 돈이 없어 장군들이 보내 준 황금을 받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만약 신의 계책에서 쓸만한 것이 있다면 받아들여 주시고, 쓸만한 것이 없다면 사직하게 해 주시옵소서. 황금은 아직 그대로 있으니 잘 봉해서 관청에 보내겠사옵니다.
라고 답하자 유방은 진평에게 사과하면서 많은 상을 내렸다. 진평을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하여 모든 장수들을 감독하게 하니, 감히 불평을 하는 장수가 없었다.대국을 읽고 거국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크고 작은 일의 성사와 추이를 꿰뚫어보는 등 천하의 대전략을 다루었던 장량과는 달리 인물들의 (특히 부정적인) 기질과 성향, 취약점을 간파하고 이들을 뜻대로 조종하거나 스스로를 안전히 지키는 처세술에 능통하였으며 최종적인 단 한번의 승리를 위해 수족은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잔혹한 계책도 사용하는 모략의 천재로[6] 초나라와 한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대전쟁이 끝난 뒤에도 황실과 조정에서 한층 더 날카로워진 모략과 암투로 활약한 인물이다.[7] 그의 특기로 유명하게 알려진 것이 반간계, 즉 이간책이다. 위무지 덕분에 유방의 신뢰를 되찾은 진평은 첫 활약으로 항우 아래에서 충성스러운 건 범증, 종리말, 용저, 주은 등 겨우 몇 뿐이고, 자신이라면 그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며 계획에 착수했다.[8]
진평은 유방에게 공작금으로 황금 수만 근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유방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평에게 황금 4만 근을 내줬고, 진평은 이 돈을 쏟아부어 항우의 인색한 분봉 조치를 건드리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항우를 따라다니며 숱한 공을 세웠는데도 왕으로 봉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장수들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항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고, 은근히 불안해하는 티를 내는 항우의 모습에 측근들이 불편해하고 있을 때, 항우가 소문을 파악하기 위해 사신을 가장하여 한나라 진영에 정탐을 보냈다. 진평은 이를 확인하고 유방에게 ' 미끼를 물었다. 항우가 사신을 보내 그쪽 사정을 탐지하려 하는 것 같으니 양념 잘 타보셈'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으며, 유방은 이를 받아보자 정(鼎)과 태뢰(太牢: 소·양·돼지고기로 만든 성대한 요리)를 준비한 뒤, 사신이 오자…….
"그래, 잘 오셨소. 아보(亞父: 범증)께선 곧 왕이 되신다고?"
"? 누가 그래요?"
"아니 당신들은 아보의 사절이 아니었음?"
"아닌데요? 저희는 초왕의 사자들입니다."
"아니라고? 에이…그럼 할 말이 없지. 여봐라, 저기 정과 차려놓은 음식들을 치워버려라. 다른 요리로 다시 차려 내오너라!"
그러더니 초라한 밥상을 다시 내왔다. 기분도 상했고 뜻밖의 대박도 건졌다 여긴 사신들은 항우에게 돌아가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해올렸고 이는 모두 진평이 노리었던 바 그대로였다."? 누가 그래요?"
"아니 당신들은 아보의 사절이 아니었음?"
"아닌데요? 저희는 초왕의 사자들입니다."
"아니라고? 에이…그럼 할 말이 없지. 여봐라, 저기 정과 차려놓은 음식들을 치워버려라. 다른 요리로 다시 차려 내오너라!"
당대에도 몹시 남자답다고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그릇이 작아 지도자의 깜냥이 아니라는 한신의 평가처럼 진평 또한 항우란 인물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고 그러한 진평의 모략은 날카롭게 적중하여 파고들었다.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범증의 권한을 서서히 거둬들이려고 했다. 범증 또한 홍문연의 일화에서 보여주듯 이런 상황을 참고 넘어갈만큼 유들유들한 인물은 못 되었다. 분을 참지 못한 범증은 그 유명한 걸해골 문장의 사직서를 내고[9] 떠나기를 요구했고, 항우도 굳이 범증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범증은 쓸쓸히 초야로 귀향하던 비탄의 여정 중에 등창이 도져서 분사(憤死)한다.[10]
이간질에 넘어가 스스로의 손으로 범증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이성을 잃은 항우가 전력을 다해 형양성을 공격하자 진평은 야밤을 틈타 유방으로 위장한 기신(紀信)과 갑옷 입은 군사로 꾸민 여자 2천 명으로 만든 여군을 동문으로 내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다. 이에 속은 항우가 방심한 틈을 타 진평은 유방을 모시고 서문으로 빠져나가 관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건 진평이 머리를 피터지게 쓴 것으로 지금 있는 진짜 병력(남자 군인)으로는 내보내봤자 순식간에 몰살당할 것으로 생각해서 일부러 여군으로 만들어 항우 군대의 병력들의 성욕을 자극시켜서 이 여군들을 겁탈하게 만들어 도망갈 시간을 왕창 벌어놓은 것이다.[11] 해하대전 직전에는 종전으로 만족하려는 유방을 장량과 함께 뜯어말려 항우를 완전히 끝장내도록 하기도 했다.[12][13]
2.5. 한 제국
한나라 개국 후 초왕 한신을 사로잡는 지혜를 낸 공으로 호유후(戶牖侯)에 임명된다.[14] 그 후로도 양왕 팽월, 회남왕 영포를 숙청하는 데 꾀를 써 큰 공헌을 한다. 그 덕에 더 풍족한 곡역 지방의 5천호를[15] 식읍으로 받게 된다. 더더욱이 유방의 신임은 극에 달해 진평이 유방을 위해 계략을 6차례 내놓을 때마다 진평의 봉읍 수는 6차례나 증가했다. 조금 과장한 것이겠지만 여후 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봉읍 받은 식읍을 다 합치면 3만 호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장량은 유방이 관중에 입성한 후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건강관리에 주력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꿔 유방의 제일가는 모사로 활약한다.그리고 유방이 흉노 원정 중 묵특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자 역시 그 특유의 기지로 묵특에게 한나라 미녀를 보낸다는 소문을 퍼트려 흉노 왕후의 질투심을 부추긴 뒤 유방을 구출해 낸다.
연나라왕 노관이 모반하여 번쾌가 반란을 진압하러 나갔을 때, 고조의 황후인 여후와 인척관계에 있던 자[16]가 번쾌를 죽이려 모함한 사건이 있었다. 유방은 진평과 주발에게 번쾌를 잡아죽일 것을 명했다. 이 때 진평과 주발은 번쾌가 공도 크고 폐하랑은 동서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홧김에 한 말 같다면서, 시키는 대로 우리가 직접 죽였다간 나중에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상의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장안으로 연행한 후 집행은 유방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진평이 관중으로 돌아가자 유방은 죽어있었고, 국정을 좌우하게 된 여후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고생이 많았다며 진평을 칭찬하고 돌려보냈다. 만약 진평이 번쾌를 죽였다면 여후는 진평을 살려뒀을까? 진평의 융통성과 대세를 보는 안목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번쾌에겐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만 번쾌의 부인인 여수는 오히려 진평이 꾀를 냈기 때문에 번쾌가 붙잡혀서 수모를 당했다면서
그런데 사실 진평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게 혜제가 죽은 후 여후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해 하는 것을 달래는 방편으로 여씨일족을 군부로 들이는 걸 진행했는데 이게 여씨의 전횡의 시작이라고 사마천은 기록했다. 여후의 대숙청을 두려워 했다는데 이때는 여후가 개인적으로 군대를 소유하지도 못했을 때이고,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말년에도 유장이 여씨를 살해해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는 등의 일화를 보면 애초에 이들이 여후를 그렇게까지 두려워한 근거도 잘 알 수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여후가 공신들에게 가혹했다는 것 치곤 여후 대에 피를 본 공신은 정작 흔치 않기 때문에[18] 공신들은 오히려 여후에게 우호적인 지지층이었던 것이 아니었냐는 의견도 있다. 왕릉에겐 유씨 사직을 지키겠다고 말했으나 육가 열전에서 나오는 바로는 진평은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주발과 공모할 생각도 육가가 주선한 뒤에야 떠올린 일일 뿐이다. 당초에 유씨를 위해 뭘 할 생각이 있긴 했을지도 미심쩍긴 하다.
그 일례로, 강직한 성격인 왕릉이 "지하의 선제를 뵙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왜 그대는 여씨를 내치지 않는가?"라고 격분해 따지자, 이 때 진평은 웃으며 "지금 조정에서 직접 간언하는 것은 내가 당신만 못하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도 나만 못하오"라고 그를 달랬다.[19] 하지만 이런 말도 무색하게 정작 여후가 정권을 장악한 후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몸에 화가 미칠까봐 전전긍긍하는 나날이라 울분이 쌓여서 집에만 들어가면 술에 빠져 상념에 젖곤 했는데, 어느날 찾아온 육가가 그 상태를 보고 진평에게 부족한 건 장수의 힘이라는 충고를 해주어 이런저런 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빴던 주발과 극적인 화해를 맺고 기회가 오기만을 노렸다.[20] 그리고 얼마 후 여태후가 사망하자 태위 주발과 공모해 재빨리 그들을 뿌리째 뽑는 비범함을 보였다. 그리고 유방의 넷째 아들인 유항을 문제(文帝)로 옹립한다. 여씨들이 참수당하는 와중에 유독 여수는 맞아 죽었다거나, 죽을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는 등 언급이 잔인한데 아마 위에서 얘기했던 진평과 여수 사이의 원한 때문인 듯하다.
주발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21] 같은 공신인 육가의 중재와 황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의기투합해 여씨천하를 척결한다. 문제는 주발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진평이
주발이 물러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22]
문제가 승상 직위에 있는 주발과 진평에게 각각 나랏일을 물어보았다. 올해의 재판은 몇 건이나 있는가, 나라의 재정 상태는 어떤가 등의 질문에 대해 주발은 당황하며 대답하지 못한 반면, 진평은 담당하는 관리가 따로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면 될 거라고 답했다. 그러자 문제가 물어보았다.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다면 승상인 그대는 무슨 일을 하는가?" 여기에 진평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위로는 황제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오랑캐와 제후를,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맡은 바 직책을 완수시키는 것이 승상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진평에게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궁전에서 나와 주발이 분한 마음에 진평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 그런 명쾌한 답변을 알면서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소!" 진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는 아직도 승상의 임무를 모르셨단 말이오? 가령 폐하께서 장안의 도난 건수를 물어보신다 한들 승상이 그걸 직접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오?"라고 되물었고 주발은 부끄러워하였고,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는 병을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부터 유방을 따른 수하가 아닌, 중간에 편입된 수하이지만 유방에 입맛에 맞는 계책을 펼쳐 여러 공로로 유방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대세를 잘 살피고 한신이나 여씨일족 척결의 예를 보듯이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능력이 뛰어나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처럼 은거한 장량보다 끝까지 남아서 더 많은 활약을 한 진평의 처세술을 더 높게 쳐주는 시각도 있다.
진평은 모략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는 모략을 많이 꾸몄는데 이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만약 내 후손이 제후 자리에서 쫓겨난다면 그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내가 음모를 많이 꾸민 화근 때문이리라"라며 말한 바 있다. 그후 진평의 작위는 아들, 손자 때까지 이어지다가 증손자 진하가 남의 아내를 강탈한 죄로 목이 잘리면서 후국은 폐지되었다. 또 다른 증손인 진장이 무제의 황후 위씨의 형부가 되는 인연으로 가문이 부귀를 누리긴 했지만 끝내 후작의 작위는 찾을 수 없었다고.
3. 평가
- 한삼걸에 진평을 추가해 "한四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23] 전한(西漢)의 건국, 보국과 안정(安定)에 수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24] 결국 계책과 처세술에 매우 능한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 태사공은 진평을 그의 열전인 진승상평세가의 말미에서 이렇게 평하였다.
「승상 진평은 젊었을 때 원래는 황제와 노장의 학설을 즐겨 배웠고, 그가 마을의 제사를 주제하여 도마 위의 고기를 썰어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때 이미 그의 포부는 원대했다. 이윽고 초와 위 두 지방을 오가며 안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고조에게 귀의하여 항상 기묘한 계책을 내어 분규로 인해 생긴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게 했으며, 나라의 걱정거리를 해결했다. 이윽고 여후 시대가 되어 나라에 여러 가지 변고가 많은 중에서 진평은 그 화를 피하고 마침내는 한나라의 사직을 안정시킴으로 해서 영예로운 이름을 지니고 최후를 맞이하고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되었으니 어찌 시작과 끝이 모두 훌륭하다고 할 수 없겠는가? 참으로 어느 누가 진평과 같은 지혜와 계략을 가지고 그와 같은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 훗날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군주인 부견이 진평에 대해 호평한 적이 있다. 평소 그는 능력을 중시했으며, 재위 초기에 신하들과 함께 한고조의 무덤인 패릉을 유람하던 중, 신하들에게 "유방의 일등공신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소하와 조참을 꼽았다. 그러자 부견은 진평이 비록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으나 그 또한 소하와 조참 못지않은 공이 있다며 치켜세웠다.[25]
- 대단히 뛰어난 책사인 것과 별개로 내놓은 계략이 뭔가 웃길 정도로 어이없다는 평을 듣는다. 잔치를 크게 벌이고 항우의 사신을 맞이하면서 마치 그 사신이 범증의 사신인 줄 아는 것처럼 엄청나게 융숭하게 퍼먹이고 자꾸 범증얘기만 했다가 그 사신이 항우의 사신임을 밝히자 줬던 산해진미들을 전부 빼앗고 거의 개밥에 가까울 정도로 초라한 밥을 줬다. 이러면서 "범증님의 사신이 아니라 항우 새끼의 사신이라고? 에이…그럼 할 말이 없지. 여봐라, 저기 정과 차려놓은 음식들을 치워버려라. 다른 요리로 다시 차려 내오너라!"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그 사신이 돌아가서 자신이 당한 그대로 항우에게 보고하자 그 일로 인해 항우는 범증을 실각시키고 추방했다. 이후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계속 패해 형양성까지 도망가서 꼼짝없이 갇히자 기신을 유방의 복장을 입혀 대장으로 삼고 유방에게는 일반 백성 옷을 입힌 다음 여군 2,000명을 편성해 갑옷을 입히고 항우에게 거짓 항복을 시키려고 서문으로 나가게 했고 틈을 타서 유방은 서문으로 재빨리 탈출했다.
4. 창작물에서의 묘사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전형적인 고우영 그림체의 미남으로 뺀질뺀질하게 구는 모습으로 나온다. 유방 앞에서 과거의 비리나 잘못을 추궁당하자 '뭐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 아닙니까?'는 식으로 뺀질거리고, 유방은 진평의 해명에 낄낄거리면서 오히려 진평을 더 총애하게 된다. 거기다 예전 ' 홍문연' 당시 범증이 유방을 흠뻑 취하게 한 뒤 트집을 잡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방의 인품에 호감을 느껴 일부러 유방에게는 술을 조금 따라주고 항우에게는 술을 가득 따라주어 항우가 먼저 취하게 만들어 방해했으며, 한신이 항우를 버리고 유방이 있는 파촉으로 가기 위해서 관문 통행증을 빌리러 오자 순순히 빌려주면서 '먼저 가 있으시오. 나도 언젠가 그대처럼 곧 패공에게 가겠소.'라고 한다.유방에게 망명한 계기도 정사와는 달리 진평이 사서 일을 키운 것으로 나온다. 항우가 보낸 병력이 도착하기도 전에 사마앙이 먼저 항복해 버려서 맨손으로 돌아오자, 항우는 "어찌 일을 그렇게 하느냐!"라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사실 부하들에게 화를 낸게 아니라 유방과 한신에게 자신이 또 당했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에게 화를 낸 것이라서 정작 부하들에겐 '에이, 썩 물러가거라!'라고 호통만 좀 치고 처벌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진평이 눈치 없이 "저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나서자, 항우는 마침 이전의 홍문연 때의 일도 생각나서 '오냐 너 잘 걸렸다'라는 심정에 꼬투리를 잡아서 진평 네놈이야말로 한신이 도주하게 한 책임이 있다며 분노하고, 이에 진평은 도망치게 된 것. 그리고 사공의 보물 이야기도 반대로 꼬았다. 진평이 비상금 용도로 황금을 챙겨뒀다가 뱃사공으로 위장한 강도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역으로 "날 살려주고 무사히 강을 건너게 해주면 황금을 주겠지만, 날 죽이려 든다면 강물에 이걸 던져 버리겠다!"라고 강짜를 부렸다. 이에 눌린 배강도들이 '일단 강은 건너게 해 주고 도망치기 직전에 죽이면 된다'라는 생각에 건너게 해 주자, 진평은 도망치기 직전에 황금을 휙 던져 버리고 강도들이 이를 허겁지겁 줍는 동안 줄행랑을 쳐서 목숨을 건진다.
나중에 고우영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문정후가 그린 '영웅 초한지'에서도 진평의 이야기가 비슷하게 묘사된다.(홍문연, 통행증 관련 건)
한나라 이야기에선 비중이 높아졌다. 진평이 과거에 유방에게 등용될때 처음에 유방과 만날때 시간이 늦어 밤이었다. 유방은 밤이 늦었으니 지금은 쉬고 내일이나 이야기해보자라고 하지만 진평은 천하를 잡는 건 1분 1초라도 바쁜 법이라며 피곤한 기색을 안보이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 말에 유방은 "어쭈? 너 마음에 드는 걸?"이라며 씨익 웃는다. 그리고 유방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걸 묘사하는데 누군가가 진평이란 놈을 등용해도 될까요? 라는 말을 유방에게 하자 "일은 잘하잖냐, 놔둬."라며 가볍게 말하면서도 믿는 걸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그러나? 그 진평이란 놈을 믿어도 될까요?라고 말하자 유방은
항우의 부하들을 매수하고 이간질시키는 비열한 짓을 하면서도 나에게 진실을 고하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인재야, 바르게 살아온 놈은 절대로 그런 짓 못하지. 진평은 그야말로 그런 일에 어울리는 인물이야!
그를 믿는다는 걸 강력하게 언급했다.나중에 유방이 죽고 여후가 여씨들을 등용하던 걸 왕릉이 결사반대할때 진평은 군말없이 따르자 왕릉이 분노하며 선황께서 자네를 그리도 믿었거늘, 위에 나온 과거들을 언급한다. 진평은 눈을 감고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선황께서 나를 그리도 믿어주셨고 나도 선황을 그만큼 존경하고 충성했지....'라고 하면서도 정작 눈을 뜨면서 왕릉에게 꼿꼿하게 대꾸한다. 자신이 나쁜 놈이고 나쁜 짓을 해왔으니 벌을 받게 될 것이며, 자기가 응보를 당하지 않더라도 후손이 대신 업을 치를 수도 있다며 3권 말미에서 순순히 자신의 비열한 면을 인정하면서 평범한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자신 같은 놈은 한명쯤 있어도 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한다.
5. 둘러보기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
46위 강양후(絳陽侯) 화무해 | ← | 47위 곡역후(曲逆侯) 진평 | → |
48위 동모후(東茅侯)
유쇠 48위 균후(菌侯) 장평 |
[1]
현재
카이펑 란카오 현(蘭考縣)
[2]
묘하게 유방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어찌보면 유방이 진평을 유독 마음에 들어했던 이유일지도. 유방도 젊어서 별 볼일없다가 부유한 여씨 집안에 장가든 것과, 형수와 사이가 안좋았던 것이 그 예이다.
[3]
이 이야기는 그냥 뻘소리가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고기는 아무렇게나 집어먹을 수 없었고 반드시 권위를 가진 사람의 손에서 재분배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식탐을 부리거나 분배자가 신분고하에 따라 고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로 치부되었다. 식지동이란 고사가 이를 잘 나타낸다. 재상의 '재' 역시 짐승을 잡아 요리하는 백정이라는 뜻을 가졌던 '宰'자를 사용한다는 점에도 유의.
[4]
유방이 삼진을 넘어서 쳐들어오자 바로 항복하고, 항우가 진평을 내세워 위협하자 바로 굴복하더니 유방이 즉시 반격하자 또 항복한 것이다.
[5]
이와 같은 유방의 사대부, 식자층에 대한 천시와 기피는 고질적인 것이어서 이후에도 진평이 같은 문제로 간언한 바 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우울해하는 유방에게 "폐하는 씀씀이는 크지만 교양이 없으셔서 절개를 가진 군자보다는 재물만 탐하는 소인배들이 유독 많이 찾아옵니다. 항우의 인자함만 본받으시면 되겠습니다."라고 과거의 앙금이 남은 듯한 따끔한 힐난이긴 했지만.
[6]
흔히 중국사의 '
마키아벨리즘'적인 인물형의 전형으로 거론된다. 이와 대동소이한 기질 및 능력을 지닌 후대의 모사
가후 역시 진평의 기이한 계책을 지닌 인물로 평가 되어온 바 있다.
[7]
유방의 진영에서 천하에 대한 일은 장량, 조직 운영에 대한 일은 소하, 군사에 대한 일은 한신, 인간에 대한 일은 진평이 각각 통달한 셈.
[8]
다만 실제 결과는 범증이 곧바로 걸해골로 유명한 사직서를 낸 뒤 사망하는 바람에 범증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항우와 이하 장수들이 화해하여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사면초가에 이르자 모두가 항우를 떠나고, 계포의 경우엔 항우 사후에 3대에 걸쳐 한 왕조를 섬기기도 했으니 멀리 보면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계획의 진가는 항우가 휘하 장수들을 못믿게 되어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항씨 일족이 아니면 따로 병사를 맡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덕에 항우는 한신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조나라 일대를 평정하고 있는데도 바라만 보고 있다가 결국 한신이 일을 거의 끝마칠 즈음에야 용저에게 병사를 떼주어 공격하게 하였다.
[9]
대략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졸오로 돌아가 들이나 산에 스스로 묻힐 땅이라도 고를 수 있게 (주공에게 혼백과 육신, 운명을 모두 바쳤지만) 오직 해골만이라도 돌려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는 말
[10]
단기적으로 항우의 진영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범증을 제거하였으나 의도치 않게 초나라 측의 내부 결속을 유도하게 되었고 분기탱천한 항우에게도 침공의 명분을 주어서 한나라에게 아직까지는 유리한 대치상태가 깨졌던는 바람에 평가절하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엄연히 범증 한 사람만을 제거한 것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과이며, 일단은 휘하 장수들과 화해를 했어도 그 범증에게까지 박하기 그지 없이 대한 항우의 본색이 밑천까지 다 공개된 이상, 가장 총애받았던 범증도 그랬을진데 하물며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어떠할지, '항우는 과연 목숨을 다해 충정을 바치기에 마땅한 인물인가'라는 의문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이후 전세가 한 번 역전되자 항우의 장수와 대신들이 유방에게로 투항하기 시작했으며
해하 전투에서는 심복 종리말과 계포 또한 패색을 읽고 탈영해버리고 만다. 그로써 진중이초라해진 항우는 최종적인 패배를 직감하며 사면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에 쓸쓸히 우미인과 함께 해하가를 읊어야만 했다. 5개국을 평정한 한신에 이어 항우의 측근을 모두 제거해버린 진평이 있었기에 한나라는 승리할 수 있었다. 만약 수족들이 온전했다면 일신의 무력이 역발산기개로 불린 항우가 다시 재기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는 진평이 뿌린 독이 모르는 사이 초나라 중신들 모두를 잠식했다는 방증이다. 이간책이 이렇게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고 또 작용과 효과가 명백하게 드러낸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11]
힘 없는 여자들에게 진평이 잔인하게 처우했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진평에게는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남자 군인은 싸워 봤자 몇 시간 못 버티고 다 죽을텐데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굶어죽을 판이고 살려달라고 애원해봤자
항우는
절대 용서해줄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살려 보려고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항우 상대로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오래 버틴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버텨줘서 유방은 형양성을 무사히 빠져나갔다.
[12]
그냥 넘어가기 쉽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흔히 초한지 같은 소설이나 각종 매체 덕분에 한나라가 압도적인 국력으로 초나라를 쉽게 쓰러트린 것처럼 아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시점에선 한나라도 단독으로는 초나라를 끝장낼 수가 없어서 연합군을 구성한 것이었고 초군의 국력 못지 않게 한군의 국력 역시 거의 아슬아슬할 정도로 한계에 도달해 있어서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비겁하게 기습 공격을 시도할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던 지경이었다. 거기다 항우도 범증이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까지의 건방진 제스처를 버리고 학살을 중지하거나 원수나 다름 없던 제나라와 손을 잡는 등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상황이었고 주변 제후들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또한 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초나라의 잔당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고 노나라처럼 마지막까지 항우에게 충성한 경우도 있으며 팽성대전 이후 제후들이 항우에게 돌아서기도 했으니 만약 그 시점에서 종전을 선언할 경우 제후들이 눈치보다 항우 쪽으로 돌아서거나 항우가 힘을 길러 재기에 성공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그리고 항우는 군주로써는 수준 미달 일지 몰라도 전술이나 전투에 있어선 여지껏 회자될 정도의 맹장이고 동시대의
한신을 제외하면 적수 자체가 없던 인물인만큼 눈꼽만큼이라도 기회를 주면 어떤식으로든 얼마든지 재기할 능력이 되는 인물이었다.게다가 유방과 항우의 나이차는 15살이나 나기 때문에 아무래도 유방이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유방이 죽을때까지 힘을 비축하며 기다렸다가 유방의 사후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다시 공격해 오면 감당이 안될 가능성도 컸다.
[13]
게다가 진평은 항우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평은 항우를 살려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항우는 애초에 항복할 마음도 없긴 했지만,
신안대학살 같은 짓을 저지른 자의 항복을 받아들이면, 그런 자는 항복이 받아들여져서 수하로 들어온들
힘이 있든 없든 간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너무 높아서 항우의 목숨을 없애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14]
이때 자신을 천거해준 위무지에게 보답하는 것도 잊지 않는 의리를 보였다.
[15]
사실 땅 크기만 따지면 3만호 이상이었는데 전란 때문에 사람들이 다 도망가서 5천호만 남았던 것. 워낙 크게 줘서 그런지 유방은 먼저 줬던 호유후는 도로 가져갔다. 돈 없어
[16]
여후의 제부였다고 한다. 번쾌 또한 여후의 제부이니 번쾌의 아랫동서 쯤 될듯.
[17]
6년쯤 뒤에 조참이 죽고 진평이 좌승상이 될때까지 여수는 끈질기게 진평의 험담을 해댔고, 이럴 때마다 진평은 오히려 보란듯이 더 한심하고 방탕한 모습을 보여서 여후에게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려고 했다. 한참이나 이런 꼴을 재밌게 구경하던 여후는 그제서야 이제 경에 대해서는 여수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안심하라고 위로했다. 물론 진평에겐 아무런 감동도 없었겠지만.(...)
[18]
여후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주창과 왕릉조차 제후로서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 공신가문이 무더기로 몰락하기 시작한 건 여씨들이 모두 숙청된 후인 문제 때부터다.
[19]
이 말을 들은 왕릉은
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드립이 아니라 사기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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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의 보답으로 육가에게 생활비로 쓰라고 500만전이나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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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한 뇌물수수 사건 때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 주발이었다. 거병부터 유방을 따른 장수 중 하나인 주발 입장에선 굴러들어온 놈이 낙하산으로 감찰직을 맡게 됐으니. 진승상세가에 의하면 이 때 진평을 제일 비난한 사람은 주발과
관영이었다고 한다. 또한 젊을 적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진평은 수없이 여색을 탐하며 형수랑도
검열삭제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런 색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그의 등용을 반대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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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발세가에서는 또 주발이 문제에게 견제당할까봐 스스로 물러났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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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팽월 정도가 한삼걸과 견줄 만한 공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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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에 세운 공으로만 따져본다면 진평과 같이 크게 공을 세운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팽월, 조참 등. 진평의 진정한 활약은 한나라 건국 이후부터 나온다. 그래도 초한쟁패기 시절에도 초나라의 브레인
범증을 리타이어 시키는 등 공로가 전혀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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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은 소하나 조참과는 달리, 대놓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서 두 사람에 비하면 세간의 평가는 낮았으나 그 능력 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뛰어난 모사였다. 부견은 이런 발언을 통해 자신이 철저하게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채용하겠다는 뜻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려 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