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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00:04:26

신종(송)


송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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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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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제6대 황제
신종 | 神宗
파일:Shenzong.jpg
출생 1048년 5월 25일
북송 동경 개봉부 복왕 사저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즉위 1067년 1월 25일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사망 1085년 4월 1일 (향년 37세)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능묘 영유릉(永裕陵)
재위기간 북송 황태자
1067년 1월 10일 ~ 1067년 1월 25일
북송 황제
1067년 1월 25일 ~ 1085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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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성씨 조(趙)
중침(仲鍼) → 욱(頊)
부모 부황 영종
모후 선인성렬황후
형제자매 4남 4녀 중 장남
배우자 흠성헌숙황후, 흠성황후, 흠자황후
자녀 14남 10녀
작호 광국공(光國公)
→ 회양군왕(淮陽郡王) → 영왕(潁王)
묘호 신종(神宗)
존호 소천헌고문무인효황제
(紹天憲古文武仁孝皇帝)
시호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
(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
연호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1]
절일 동천절(同天節)
}}}}}}}}} ||
1. 개요2. 생애
2.1. 황제 즉위 전2.2. 재위 기간
3. 대외 방면
3.1. 서하3.2. 베트남3.3. 요나라3.4. 고려
4. 평가5. 가족 관계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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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제 6대 황제.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 휘는 조욱(趙頊). 전대 황제인 송영종 선인성렬황후 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전

1048년 5월 25일(음력 4월 10일), 복안 의왕궁에서 복왕 조윤양의 13번째 아들인 조종실[2]과 인종의 계후인 자성광헌황후의 조카[3]이자 고준보의 딸인 고도도[4]의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 초명은 중침(仲针)이었다. 인종 가우(嘉佑) 8년(1063년)에 광국공(光国公)에 봉해졌고 아버지인 조종실[5]이 인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제5대 황제 영종이 되고 난 뒤, 치평(治平) 원년(1064년)에 회양군왕(淮陽郡王), 영왕(潁王)에 봉해졌다. 치평 3년(1066년) 황태자가 되었고 휘를 욱으로 바꿨다. 1년 후 아버지 영종이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2.2. 재위 기간

당시 북송은 평화로운 듯 하면서도 여러 가지 모순에 빠져 있었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서하 요나라에 바치는 막대한 세폐[6], 관료의 증가로 인해 발생한 관료제 유지 비용 증가, 황실의 비용 증가, 군사비 지출 증가[7] 등으로 인한 재정 적자였다. 이러한 재정 적자는 세금 증가를 불러왔고, 자연스레 농민들을 압박했다. 농민들은 지나친 세금을 견디지 못하거나 대지주들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기며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신종은 이러한 송나라 내부 사정과 북방 민족에 억눌리고 있는 송의 현실을 타파하고 싶어했다.[8]. 특히 그는 당태종처럼 송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군사력을 키워야 했다. 그러나 군사력을 키우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국고였다. 당시 북송의 국고 부족 현상은 사마광의 지적처럼 진종 무렵부터 시작돼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친 재정 낭비로 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종의 뜻대로 되기 위해선 재정 확보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당시 조정의 중신들이던 문언박, 한유, 사마광 등은 긴축정책과 함께 신중론을 주장하며 젊은 황제가 구상하던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했다. 이에 신종은 개혁의 적임자를 찾았고 왕안석을 추천받아 파격적으로 한림학사로 임명하고, 그를 중앙으로 불러들이게 된다.[9]

신종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원 아래 왕안석은 여혜경, 소철 등을 새로 꾸려진 개혁 기구에 배치했고, 세수 파악을 위해 유이 등을 조사단에 넣어 전국 각지로 파견했다. [10]

이후 왕안석은 부국 강병을 목표로 신법을 실시했다. 그 신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안석의 주도 아래 진행된 신법은 그의 구상대로만 된다면 당시 북송의 농민과 소상인들을 보호하고 대지주, 대상인,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를 막아 세수를 증대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그 당시 북송에 꼭 필요한 개혁안이었다.

신종은 왕안석의 개혁안을 입안받고 난 뒤, 처음에는 열렬히 지지하였다. 따라서 왕안석은 이런 신종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을 따르던 관료들과 함께 전격적이고 빠르게 개혁안을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당장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두고보지 않았던 대지주, 대상인, 고리 대금 업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여기에 더해 이들 계층에 해당되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도 신법을 반대하는 '구법파(구법당)’을 결성했다. 그 구법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광이었다.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의 학문적 식견과 개인적 능력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사마광과 왕안석이 살아있을 때에는 합리적인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사마광이 집권 후 8개월만에 병사하면서 그들의 사후 신법파와 구법파의 대결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었고 신법을 무기삼아 반대파 숙청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참고로 철종 초 재집권한 사마광이 신법의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긴하나, 그가 얼마 안가 사망해 8개월동안 진행한 것은 고작 신법을 혁파하는 정도였다. 더해서 신•구법당파의 대립은 왕안석, 여혜경, 한강, 증포, 장돈 등 강남 출신 관료들과 기존의 화북 출신 관료들간의 갈등의 모습까지 띄게 되면서 진종, 인종 연간 급격히 발전한 강남 일대와 기존의 화북 일대 사이의 대결 양상까지 띄게 되었다.

구법파와 신법파의 대립[15]이 극심해지고 있던 신종 7년(1074년), 하북에서 큰 가뭄이 들자 구법파에서는 이 가뭄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이라고 주장하며 왕안석의 퇴진 운동을 벌였다[16]. 더해서 원래부터 아들 신종의 개혁 정책을 반대해왔던 선인성렬황후까지 나서서 왕안석의 퇴진을 주장하자 결국 신종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왕안석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기에 이른다.

왕안석이 좌천되고 난 이후부터 지극히 권세와 개인적 영달을 구하기 위해 합류한 인사들이 많았던 신법당파는 구심점을 잃고 서서히 분열했다. 그러다가 왕안석이 다시 복귀했지만 이 무렵부터는 구법당 신료들의 공세뿐만 아니라 왕안석의 보복을 두려워한 여혜경 등 일부 신법당 사람들이 앞장서 왕안석을 다시 탄핵했다. 이미 2년 전, 동생 왕안국을 잃었고 얼마 전에는 과거 급제 후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아들 왕방마저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까닭에 왕안석은 믿었던 친구, 측근들의 배신까지 겹치자[17] 낙향 후 은둔생활을 선택했다. 이후 왕안석은 금릉에서 자신이 주도한 신법들이 신종 사후 선인태후와 사마광 등 구법당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쓸쓸히 사망했다.

왕안석 실각 이후에도 조정 내에서는 여혜경, 한강 등을 중심으로 여전히 신법이 추진되고 있었다. 하지만 신종은 1083년 자신있게 나섰던 영락성 전투에서 예상 외로 완패한 것에 대한 울분과 정치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하여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술에 찌든 생활을 하면서 국정 추진력이 점차 흐지부지되었고, 1085년의 어느 날 술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중풍으로 쓰러져 반불구가 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로 어린 철종이 즉위하면서 결국 신종의 모후 선인태후 고씨와 새로 재상이 된 사마광에 의해 신법은 완전 폐기조치되고 말았다.

신종은 죽은 뒤 영유릉에 안장되었고, 신종의 뒤는 불과 9세 밖에 되지 않은 장남 연안군왕 조후가 이었다. 이때 신종은 병석에 있었기에 대신들이 먼저 후계건저회의를 건의했고 신종과 선인성렬황후의 허락을 얻었다. 이후 선인성렬황후와 대신들의 회의를 거쳐 신종의 아들 연안군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뒤, 얼마안가 신종이 죽자 제위를 이었다. 철종의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맡았고 사마광이 선인성렬황후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왕안석과 사마광 모두 그 다음해(1086년) 잇달아 죽고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 사이의 당쟁은 격화되었다.

연경을 회복하는 자는 왕으로 봉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8]

신종 재위 기간 동안이던 1078년에 송나라와 고려는 84년만에 재수교했는데, 이때 고려의 국왕은 문종이었다.

3. 대외 방면

3.1. 서하

송 신종은 요와 서하가 북송을 노리는 상황을 극복하려고 했다. 당시 요나라는 강대하여 힘든 상황이었다.

경력의 화의 이후에도 북송과 서하는 소규모 분쟁이 있었는데, 먼저 1066년 의종 이량조가 북송을 공격했다. 북송의 영종이 즉위하자 서하가 오종을 파견하나 북송 측에서는 오종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량조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서하군이 진봉과 경원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맞서 북송 조정에서 서하에 대한 세폐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연주지주 육선과 한기가 이에 동조하였고 한기[19]는 더 나아가 접경 지역의 호시도 중단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에 1067년 서하가 북송에 사죄하였던 것과 두 번째로는 충악[20]이 1067년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뒤 조정의 허가도 없이 서하의 수주를 공격하여 탈취하자, 이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하여 북송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것이 그것이다. 이에 송 조정은 수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고 송 신종도 이에 동의했으나, 곽규의 반대로[21] 무산된다. 1068년에는 왕소평융책[22] 3편을 올려 여러 소국으로 분열된 티베트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왕안석과 신종은 이에 적극 찬성하였고, 왕소는 1071년부터 1073년까지 왕안석의 지지 하에 유용가가 이끄는 토번 부족을 귀순시킨 뒤 토번군을 무찌르고 하황 일대[23]로 영토를 확장했다.[24] 1071년에는 충악이 나올에서 서하를 격파해 나올성을 수축하였고, 송은 수주성과 나올성을 거점으로 횡산 일대에서 무녕성과 여러 산채를 지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서하에 의해 선제공격을 받고 순녕채, 무녕성 등지에서 전쟁을 벌이나 서하가 승리했고 북송 정권은 그것들을 서하에 빼앗겼다.[25]

이때 서하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서하 혜종 이병상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한족 출신인 양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양태후는 호전적인 성격이었고 수시로 북송의 국경을 약탈하였는데,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1076년에는 이병상의 나이가 만 15세가 되자 혜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양태후는 섭정을 거두고 막후에서 서하 혜종을 꼭두각시로 부렸다.

이후 1081년 서하의 황제 이병상이 태후 양씨와 양을매 등에게 감금되는 등 서하에 내분이 일어났다. 한족 출신의 장수 이청이 북송 간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고가 비었다고 한 뒤 서하 혜종에게 황하 이남을 돌려주고 황하를 양국 경계로 삼아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했으며, 북송과 연합해 양태후를 퇴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알아챈 양태후가 측근들과 함께 궁중 정변을 일으켜 이청을 죽인 뒤, 서하 혜종을 흥경부에서 5리 밖에 떨어진 목책 안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장수들이 반기를 들고 양태후 일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토번 수령 우장화마가 송에 군사를 일으켜 태후를 징벌하면 서하 군민들이 호응할 거라는 밀서를 보냈다.

이를 틈탄 북송 정권이 본격적으로 서하를 침공했는데, 이헌[26]과 충악[27], 고준유, 유창조, 왕중정 등을 필두로 진군하여 처음에는 제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각 장수들 간에 단합이 되지 않았고, 보급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28][29][30] 이에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대패하였다.( 오로벌하)

충악의 황산 점령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아 아들 충박을 보내 그의 계책을 상주시켰다. 송 신종은 충박(種朴)을 불러 상황을 묻고 충박을 각문지후(閣門知侯)로 승진시켰다. 조정은 황산에 가서 성을 쌓으려고 서희(徐禧)와 이순(李舜)으로 하여금 이를 지원하게 하나, 충악은 성을 쌓는 걸 은주, 유주, 그 다음에는 하주 이 세 곳으로 한 뒤 염주성을 쌓아야 서하의 소굴까지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송과 서하의 접경 지역에 연이어 3개의 성을 건설해야 하옵니다. 3개 성의 건설이 완료되면 변경 지역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다음 서하의 수도인 흥주와 영주를 공격해야 하옵니다.
그 이후에도 서하를 정벌하려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여러 개의 진로로 나누어 공격하는 대신 한 곳에서 진격하기로 하였다. 서희와 심괄을 필두로 하여 영락성을 수축하고자 했으나 충악은 이에 반대했다.[31]
영락성에서는 반드시 패한다. 패하면 죽는 것이고 명령에 거절해도 죽는다. 지금 명령에 거역하여 죽는 것이, 군대가 패망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나 서희는 이를 무시하고 그의 주도 하에 영락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하군의 공격을 받아 북송군이 패하고 서희는 난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 영락성 전투)[32][33] 송 신종은 서하가 여전히 꺾기 어렵다는 상대인 걸 깨닫고 신료들 앞에서 통곡하고 만다. 그러나 서하도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백성들의 생업이 어려워지고 경제도 파탄에 이른다. 1085년 양을매가 죽자 양태후는 양을매의 아들 양을포를 재상으로 임명한 뒤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민심 수습을 위해 혜종 이병상을 복위시켰지만 동년 10월 병으로 사망했다.

송 신종은 서하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3.2. 베트남

송 태종 시기 레 왕조를 토벌하려고 했으나 후인보가 전사한 이후, 송 진종 시기부터 송 인종 시기까지는 베트남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이후에도 소규모 분쟁이 있었다. 농씨 일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적청이 이를 토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 시기 이후 모든 것이 변하였다. 1075년, 재상 왕안석은 대월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고 이를 눈치챈 리트엉끼엣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송나라 국경으로 쳐들어가서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40일간의 교전 끝에 승리한다. 여기서 리트엉끼엣은 왕안석의 신법으로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것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는다. 송나라 측은 당시 대월(베트남)의 적수인 참파와 크메르 제국을 끌어들였고 또한 서하 전선에서 활약한 곽규가 참전한다. 이에 리트엉끼엣은 강바닥 아래에 함정을 설치하여 1000명 이상의 침공군을 몰살시켰고[34], 결국 지친 대월과 송은 화평조약으로 합의를 보면서 전쟁을 종결짓는다.( 송월희녕전쟁 참고)

3.3. 요나라

송 신종의 최대 목표는 요나라와 서하의 위협에서 송나라를 다시 개혁하는 것이었다. 특히 전연의 맹은 송나라에게 불안정한 평화를 구축했지만 평화의 대가로 요나라에게 매년 바치는 세폐는 엄청난 양이었다. 당시 요나라는 도종의 치세였으며 도종은 즉위 중반부 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온갖 불탑과 서찰을 신축하고 건설하는데 국비를 날려먹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라의 재정이 도종 치세 40년을 넘기는 동안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송나라의 경제력에서 나오는 세폐가 근간이었다.

도종 집권부터 흔들리던 요나라였으나 군사적으로는 아직 막강한 나라였고 신종의 시기에는 요나라를 송나라가 군사적으로 도모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신종은 고려와 재수교로 요나라를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고 흔들리는 서하를 먼저 공략하는 방안을 활용했으나 오로벌하 전투와 영락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신종 당대에 서하를 무너트리는데 실패했고 자연스럽게 요나라에 대한 견제책 역시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결국, 신종 시기에도 요나라에 대한 막대한 세폐는 계속 지속됐다.

3.4. 고려

송 신종의 외교적으로 가장 노력한 나라가 바로 고려다. 당시 고려와 송의 관계는 적대는 아니었으나 송태종이 고려 성종의 원군 요청을 거절한 1차 여요 전쟁 이후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된 상태였다. 송나라 초기에는 요나라와의 긴장 국면을 해소하는데 고려의 역할을 크게 보지 않았으나 이는 송나라의 최대 실책으로 돌아왔다. 1차 여요 전쟁에서 서로 처지를 확인한 후 불안정한 견제 관계에 돌입한 요나라와 고려가 2차, 3차 전쟁 끝에 고려의 승리로 끝나며 고려가 국력을 증명하자 송나라로서 고려는 요나라와 관계에 필요한 나라로 급부상했다.[35]

송 신종은 즉위 이후 서하, 요나라와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국력을 향상, 당대에 서하를 물리치고 요나라를 견제할 국력을 쌓아가고자 했는데 서하를 치기 위하여 요나라 방면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고려를 끌어들이는 연려제요[36]를 실시한다. 당시 문종의 치세에 국력이 치솟던 고려를 보며 요나라와 형식상 군신관계이나 송나라가 먼저 재수교를 제의하면 고려는 요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을 확신한 송 신종은 먼저 상인 황신을 보내 재수교의 의지를 강하게 보였고 문종이 화답하며 고려와 관계를 복원했다.[37]

비록 송 신종 사후 송나라, 요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며 고려와 관계 복원에서 원하던 요나라 공세적 견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주변국이 전부 적국이던 당시 송나라는 북송이 멸망하던 때까지 고려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수세적 견제로서 요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도종 시기부터 고려의 존재로 말미암은 후방 불안과 내부의 정치 다툼으로 요나라가 송나라에게 대군을 소집한 침공은 사라졌으니 신종의 최대 업적 중에 하나로 평가된다.

4. 평가

파일:북송 신종.jpg
왕안석은 사람됨이 고집스럽고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여 조종이 유계(幽薊)와 영무(靈武)를 삼킬 뜻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신종은 분연히 장차 여러 대에 걸친 치욕을 씻고자 했지만 마땅한 조치가 아직 없었기에 결국 편협한 견해와 왜곡된 학문이 일어나 조정을 장악했다. 청묘법(靑苗法)·보갑법(保甲法)·균수법(均輸法)·시역법(市易法)·수리법(水利法)이 이미 제정되었지만 천하는 흉흉하여 소동이 벌어지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신종은 끝내 이를 깨닫지 못했고 바야흐로 단연히 원로들을 쫓아내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물리쳤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신법을 추진했다. 끝내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은 거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바뀌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간사하게 남에게 아첨하는 이들이 날마다 승진했고 인심이 날마다 떠나갔고 화란이 날마다 일어났다. 안타깝구나!
송사의 논찬
결과적으로 신종 대의 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잘 정비된 관료제 속에서 격화된 당쟁으로 연결되었다.[38] 또 추진된 정책들이 좌초되면서 사회 모순은 심해져만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받는다. 즉, 그의 묘호인 신종에서 드러나듯 ‘개혁을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끝이 나고, 재위 기간 동안 칭송할 업적도 애매해서 뚜렷한 특징을 잡기에도 애매한 황제’ 라고 평가된다.

당장 신종 생전 희녕변법 추진 과정에서 조정은 찬반 논쟁으로 당쟁이 벌어졌고, 타협점이 사라질수록 당쟁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당쟁 속에서 신•구법당 관료들이 탄핵되고 지방으로 좌천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 본인도 지치고 동력을 상실해갔으며 설상가상 신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게 되었다.

신법 추진 후 현실에서도 문제가 여기저기 터져나왔다. 특히 인종 말부터 줄어드는 세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개혁이 모순만 심화시키고 신법 중 일부를 악용한 관리들의 등장[39]으로 이전에는 없던 탄핵과 숙청, 부정부패마저 만들어버렸다. 또 신법의 미숙함으로 재정 적자 폭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히려 세수는 점점 줄어들었고[40]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군사력은 나날이 약해져 갔다. 따라서 신종 사후 송나라는 각종 모순들이 터지고 당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약해진 군사력을 가지고, 쇠퇴하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금나라을 상대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신종이 죽은 뒤, 어린 철종을 대신해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정권을 잡은 구법당파(원우당파)는 신종이 추진했던 신법 조치들을 즉시 폐기했다[41]. 그러나 사마광이 재상이 된 지 8개월만에 죽으면서 제대로 된 후속책이 나오지도 못했고, 선인성렬황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장돈 등 과거 왕안석과 신법을 추진해 온 원칙론적인 신법당파들이 돌아오면서 당쟁은 심화되고 타협점을 찾기 힘들어졌다. 할머니 사후 친정을 하게 된 철종 역시 아버지가 추진했던 신법을 다시 펼치려 했지만 이마저도 불과 25세의 나이에 철종이 요절하면서 미완의 개혁으로 끝나버렸고, 철종의 짦은 친정기 동안 원우당인 사건, 맹황후 폐출 사건 등이 벌어지면서 신•구법당 감정의 골은 깊어지게 되었다.

이후 흠성헌숙황후 상씨와 증포, 채변 등의 결정으로 가장 황제감이 아닌 휘종이 즉위한 이후의 송나라는 철종 연간보다 당쟁이 더 심해졌다. 특히 철종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난 뒤, 제왕 교육도 받지 못한 휘종 대신 섭정을 맡은 상태후의 조치들은 말그대로 미봉책에 가까웠고, 이마저도 알맹이 없는 과거 회귀적인 성격이 강했다.[42] 더해서 수렴청정을 하던 상태후는 철종의 섭정을 했던 시어머니 고태후처럼 안목이 뛰어나거나 유능한 인물도 아니었고 휘종이 올바른 제왕이 될 시간도 벌어주지 못하며 1년여만에 사망했다. 당연히 재목도 아니었고 준비도 안 된 휘종이 친정을 하고 난 뒤, 그의 총애를 받은 채경에 의해 신법을 무기삼아 다시 원우당파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때 상태후에 의해 복권된 맹황후가 다시 폐출되고 각지에 원우당비가 설치되면서 과거의 명신들까지 당쟁에 포함시키는 등 철종 친정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당쟁의 규모는 커지게 된다. 특히 휘종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집권 이후 꾸준히 구법당, 신법당에 상관없이 자신과 그 무리를 따르지 않으면 모조리 쫓아냈다.

이렇게 채경이 중심이 된 간신들이 신법을 무기삼아 정적들을 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종은 채경이 탄핵되더라도 다시 복직시켰으며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울러 휘종을 포함한 황실의 사치,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 등이 맞물리면서 신종, 철종때 애써 줄여놓은 재정 적자는 다시 늘어났고, 채경 등은 이를 메꾸기 위해서 신법을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사용해 무리하게 수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까닭에 각지에서는 송강의 난, 방랍의 난 등의 민란이 일어났고, 각종 사회적 모순들이 더 심화되었다. 또 외교적으로 요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어설픈 전략 등을 펼치다가 이마저도 실패하면서 발생한 비극이 정강의 변이었다.
송 신종은 변법파의 후원자였다. 하지만 그는 기백이 부족하고 사상이 깊지 못했으며 성격도 강직하지 못했다.
왕재충의 평가

결국 송 신종은 젊은 패기를 가지고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였으며 백성을 잘 보살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개혁 의지를 가졌던 황제로, 결코 폭군 암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높은 의지를 받쳐줄만큼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으며 황제 자신도 이러한 처지에 지쳐서 절망하다가 무너져 버렸다. 결국 내부적으로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송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는 골든타임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후대 군주들에게 어정쩡하게 추진된 개혁의 부작용들이나 실패로 끝난 북방 오랑캐 관리에 대한 책임들만 잔뜩 안겨다주었다는 점에서[43] 성군이나 명군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군주이다.

5. 가족 관계

황후는 송나라 몰락의 진정한 원흉[44] 흠성헌숙황후[45]이다. 황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된 철종과 휘종의 생모가 각각 황후로 추존되었다. 철종의 생모 주덕비(朱德妃)는 흠성황후[46](欽成皇后 : 1052년 ~ 1102년)로 추존되었고, 휘종의 생모 진미인(陳美人)은 흠자황후(欽慈皇后 : 1054년 ~ 1085년)[47]로 추존되었다.

신종은 철종 휘종을 포함하여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철종, 휘종, 오왕 조필, 연왕 조우, 초왕 조사, 월왕 조시를 제외한 8명의 아들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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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즙 · 심기(沈畸) ,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이린 · 서승규 · 유효충 · 여승 · 나거통 · 제득일 · 이한징 · 형신류 · 허조 · 호중요 · 진긍 · 홍문무 · 역연경 · 동도명 · 곽종 · 고흔 · 주태 · 성상 · 진사도 · 방강 · 방천우 · 유빈 · 번경온 · 영서민 · 기위 · 하보지 · 이빈(李玭) · 후의 · 왕광제 · 강백 · 구승순 · 상진 · 두의(杜誼) · 요종명 · 등중화 · 모안여 · 이방(李訪) · 주수창 · 후가 · 신적중 · 학인 · 지점 · 등종고 · 심선 · 소경문 · 태형 · 앙흔 · 조백심 · 팽유 · 모순 · 양경(楊慶) · 진종 · 곽의 · 신세녕 · 구여령 · 왕주(王珠) · 안후 · 장백위 · 채정(蔡定) · 정기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척동문 · 진단 · 충방 · 만적 · 이독 · 위야 · 형돈 · 임포(林逋) · 고역 · 서복 · 공민 · 하군 · 왕초(王樵) · 장유(張愈) · 황희 · 주계명 · 대연 · 진열 · 손모 · 유역 · 강잠 · 연서 · 장찰 · 유여상 · 양효본 · 등고보 · 우문지소 · 오영(吳瑛) · 송강어옹 · 두생 · 순창선인 · 남안옹 · 장여 · 서중행 · 소운경 · 초정 · 왕충민 · 유면지 · 호헌 · 곽옹 · 유우(劉愚) · 위섬지 · 안세통 · 유정식 · 소곡 · 서적(徐積) · 증숙경 · 유영일
460권 「열녀전(列女傳)」
주아 · 학절아 · 진당전 · 여양자 · 동팔나 · 한희맹 · 모석석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조수기 · 왕처눌 · 묘훈 · 마소 · 초지란 · 한현부 · 사서 · 주극명 · 유한 · 왕회은 · 조자화 · 풍문지 · 홍온 · 소징은 · 정소미 · 조자연 · 하란서진 · 시통현 · 견서진 · 초연 · 지언 · 회병 · 허희 · 방안시 · 전을 · 지연 · 곽천신 · 위한진 · 왕노지 · 왕자석 · 임령소 · 황보탄 · 왕극명 · 사의도인 · 손수영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두심기 · 하영도 · 왕계훈 · 유지신 · 유문유 · 유미 · 곽숭인 · 양경종 · 부유충 · 시종경 · 장요좌 · 왕이영 · 이소량 · 이용화 · 이준욱 · 조일 · 고준유 · 상전범 · 장돈례 · 임택 · 맹충후 · 위연 · 전침 · 형환 · 반영사 · 오익 · 이도(李道) · 정흥예 · 양차산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두신보 · 왕인예 · 왕계은 · 이신복 · 유승규 · 염승한 · 진한 · 주회정 · 장귀숭 · 장계능 · 위소흠 · 석지옹 · 등수은 · 양수진 · 한수영 · 남계종 · 장유길 · 감소길 · 노수근 · 왕수규 · 이헌 · 장무칙 · 송용신 · 왕중정 · 이순거 · 석득일 · 양종길 · 유유간 · 이상(李祥) · 진연 · 풍세녕 · 이계화 · 고거간 · 정방 · 소이섭 · 뇌윤공 · 염문응 · 임수충 · 동관 · 양사성 · 양전(楊戩) · 소성장 · 남규 · 풍익 · 마거위 · 진원 · 감변 · 왕덕겸 · 관례 · 동송신
470권 「영행전(佞幸傳)」
미덕초 · 후막진리용 · 조찬 · 왕보 · 주면 · 왕계선 · 증적 · 장설 · 왕변 · 강특립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채확 · 형서 · 여혜경 · 장돈 · 증포 · 안돈 · 채경 · 조양사 · 장각(張覺) · 곽약사 · 황잠선 · 왕백언 · 진회 · 묵기설 · 한탁주 · 정대전 · 가사도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장방창 · 유예 · 묘부 · 두충 · 오희 · 이전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이경(李景) 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 정조 전여조 이조 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만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부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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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호에서 유래한 원풍천자(元豊天子)라는 별칭이 있다. [2] 송 인종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송 태종의 손자.뒤의 송 영종으로 즉위했으며 나중에 조서로 개휘했다. [3]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이모가 인종의 부인인 자성 광헌 황후이다. [4]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아명 [5] 인종의 양자이자 황태자가 된 후 휘를 조서로 개휘했다. [6] 사실 세폐의 양은 송나라 1년 수입 대비 적은 비율로써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애초에 송나라가 동생/신하뻘 오랑캐에게 주는 세폐를 국가 재정에 주름살이 생길 정도로 책정할 리도 없다. 문제는 세폐를 백성들에게 거두는 과정이었다.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들이 세폐를 부풀려 필요 이상으로 거둬내서 차익을 떼어먹거나, 거둔 세금은 자기들 뒷주머니로 몰래 챙기고 막상 세폐는 국고에서 빼가는 것이다. 이게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세금은 꼬박꼬박 잘 걷고 있는데 국고가 텅 비는 이상환 상황이 발생해버리는 것이다. [7] 그런데 막상 국방 예산을 늘렸는데도 군대가 빈약하고 강해지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이후에 군사력을 증강했다고 믿은 송신종의 낙관적인 생각과는 달리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8] 사실 이런 문제 인식을 위해 인종 경력연간에 범중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1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버지 영종도 이 부분 문제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부분을 조정에서 논의했다. 하지만 영종은 병약하여 이를 실행하려던 찰나에 붕어했다. [9] 신종은 왕안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자신이 당 태종같은 정치를 하길 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때 왕안석은 신종에게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라고 지적하면서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요순의 정치를 따르지 않느냐고 했다. [10] 왕안석이 직접 꾸린 조사단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그동안 개간된 땅들과 징수대상에 없던 농지들을 찾아내 실제 성과를 얻었고 이때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이전 세수보다 몇배나 많이 국고를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조세 운반 과정에서 새로이 상어방이 형성되고 중간 상인들이 성장하는 성과도 얻었다, 그러나 조사단들이 전국을 돌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리사욕을 채웠기에 정작 농민들은 이들을 파견한 왕안석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11] 사실 청묘법은 산서 등 일부 변경에서 극히 일부 시행되고 있었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왕안석은 청묘법을 처음 신종에게 입안하면서, 하북 등에서 먼저 시범 운영을 하고 이후 전국적 시행을 건의해 밀어붙였다. 그러나 청묘법 시행에 필요한 비용들을 모두 농민들에게 전가하고 자금 대출이 필요없는 농가까지 억지로 빌리게 하는 등의(삼정의 문란 시기 환곡의 문제와도 비슷하다.) 문제가 계속 터지자 하북 농민들이 당시 하북 사람들에게 공평정대한 판결로 명망높던 한기에게 “제발 청묘라는 법 좀 없애주십시오. 저 법때문에 못 살겠습니다”라고 집단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렸다. 이후 한기는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하북일대를 돌면서 진상 조사를 했는데 백성들의 아우성 이상으로 문제가 많자 상소를 올려 청묘법 폐기를 주장했다. 조정에서 한기의 상소문을 보고받고 상소를 읽은 신종은 몹시 놀라 “과연 한기는 충신입니다”라는 말을 한 뒤, 취지와 달리 백성들을 가렴주구하는 청묘법을 없애라고 했다. 이때 신종의 명을 들은 왕안석은 신종 앞에서 한기를 상홍양에 빗대 신종과 한기를 모두 비난했고, 퇴궐 후에도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12] 왕안석 주도의 신법(희녕변법) 당시부터 가장 논란이 컸던 것이 바로 청묘법이었다. 취지와 달리 소상인, 소작농 등의 삶은 더욱 더 어려워지고 이 제도를 악용해서 부정부패와 농민수탈이 더 심해져서 당시 조정에서는 ‘청묘법은 말 그대로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정책이다’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사마광은 가장 폐단이 큰 청묘법부터 즉시 폐기조치했다. 취지는 좋았지만 결함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셈 [13] 이전까지의 송나라는 용병제였다. [14] 송나라의 고질적인 약점인 기마부대 양성을 위해서 추진된 보마법의 발상은 좋았다. 하지만 엄연히 농사에 쓰이는 말과 전쟁에서 쓰이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볼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주장이 많다. [15] 신종의 아버지 영종은 인종의 조카로서 부필, 문언박, 한기라는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양자가 되어 즉위하였는데 기존 승계 원칙상 황제가 되기 힘들었으나 앞선 대신들이 영종의 즉위를 적극 주장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아버지이자 선황인 영종은 매우 고마워 하였고 영종의 아들인 송신종도 이 고마움을 늘 간직했다. 앞서 아버지를 추대한 대신들은 신종 시기에 구법파로 구분되었는데 다른 구법파와는 다르게 이들이 명예를 잃지않도록 탄핵 대신 중요 지방관으로 자리를 옮겨주어 황제가 직접 명예를 지켜주었다. 이러한 고마움을 담은 보답은 자신의 아들인 송철종도 보여주는데 후일 신법파가 정권을 잡을때 몸소 이들을 보호해준다. [16] 당시 왕안석은 구법당 사람들로부터 전한 무제 시대 균수법, 평준법, 염철법, 술의 전매제 등을 만들어 실행에 옮긴 상홍양에 비유되어 비난받고 있었다. [17] 왕안석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그가 신법당 내부에서도 공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어느 누구도 꺾지 못한 그의 외고집과 실패한 정책임에도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18] 이후 송 휘종 시기 환관 동관이 연경을 공략하나 요군에 연전연패하자, 금에 원군을 요청한다. 이후 연경을 되찾자, 동관은 요, 금에 나라 망신을 다 시켰음에도, 광양군왕으로 봉해진다. [19] 남송 권신 한탁주의 증조부이다. [20] 충세형의 아들로, 아버지의 연줄로 인해 청간성을 지키고 있었다. 충가군의 일원. 충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고 종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21] 송 신종의 조서를 은닉하기도 했다. [22]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주와 황주 이 2개의 주를 탈취해야 하고, 이 2개의 주를 점령해야 서하를 양면에서 포위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23] 오늘날 칭하이 성 일대. 황하와 황수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24]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이 폐단이 많자, 왕소도 실각하게 되고 왕소는 1081년 사망한다. [25] 충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6] 이헌은 난주를 수복했다. [27] 충악은 10일치의 군량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28] 다른 군대는 다 영주로 집결하였으나, 난주를 수복한 이헌의 군대만이 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휘관 중 하나인 이헌이 환관이었다. [29] 서하의 청야전술로 인해, 굶어죽는 북송군이 많았다. [30] 당시 유창조는 고준유의 통제를 받았는데, 유창조의 군대가 용맹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준유는 이를 시기하였고 공성병기가 부족한데도 계속 싸우라고 독촉하였으며 서하군은 이를 틈타 황하의 제방을 무너트려 북송군을 궤멸시켰다. [31] 영락성은 오직 산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데다가 수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32] 여기서 이헌의 군대는 서하의 군대에 가로막혔고, 심괄은 서하의 원군에 가로막혀 수덕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충악은 이 때 서하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영락성을 관망하였고, 얼마 뒤 병사하고 말았다. [33] 서하군이 영락성의 수원을 끊자 영락성 내 북송군은 말똥을 갈아 즙을 마실 정도로 열악해졌다. [34] 송나라의 기록에서는 홍진태자를 주살했다고 나온다. [35] 당시 요나라 초기~전성기에 툭하면 기마병 20~30만을 조직하여 송나라를 대규모로 침공하는 요나라는 송에게 큰 위협이었고 그들이 송나라로 침공하지 못하도록 후방에 불안을 조성할 나라는 서쪽의 서하와 동쪽의 고려가 유이했다. [36] 고려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견제한다. [37] 송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 문종은 황신이 고려에 온 1068년보다 10년 전인 1058년에 재수교를 하려고 했지만 요나라와 관계를 걱정하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특히 고려의 입장에서는 송나라는 이미 군사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 나라였기에 문종이 재수교 강행에 부담이 있었으나 송나라가 먼저 제의하자 고려 문종은 바로 재수교를 강행한다. [38] 송나라의 관료제는 태종과 진종 연간에 정비되었고 신종 연간에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는다. [39] 신법을 도구로 삼아 반대파를 구법당으로 몰고 권세를 쥔 대표적인 인물은 여혜경과 휘종대의 권신이자 대표적인 간신 채경이 있다. [40] 선인성렬황후 수렴청정 시기와 철종의 친정기를 합친 철종 연간에는 재정 적자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를 이은 휘종 연간이었는데, 황제와 황실의 사치, 채경, 동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잇단 실정 등이 맞물리면서 신종, 선인성렬황후, 철종이 안정화시켜 놓은 국고가 바닥이 나게 되었다. [41] 선인성렬황후와 사마광 등 노신들이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신법의 좋은 취지와 달리 제도가 악용되고 토목사업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더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법이 시행된 이후 농민들이 부역에 동원되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이 증가했다. 더해서 세금 수취 과정에서도 각종 부정부패들이 생겨나 왕안석의 생각과 달리 신법의 방향성이 왜곡되는 부작용들이 제도 여기저기에서 발생했다. 그런 까닭에 선인태후와 사마광은 신법을 급격하더라도 당장 폐기해 민생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42] 이때 상태후의 조치들을 보면 죽은 친딸 주국장공주 개칭, 폐후가 된 맹황후 복위, 원우당파 복권, 한충언과 증포의 재상 기용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 중 신•구법당간의 당쟁을 막고자 단행한 한충언, 증포 기용은 오히려 갈등 끝에 증포가 한충언을 쫓아내고 집권한 뒤 증포 중심으로 조정이 운영되다가 증포의 추천으로 복귀한 채경이 집권하는 일련의 결과를 낳았다. 또 철종이 쫓아낸 맹황후를 복권시킨 조치는 상태후 사후 다시금 원우당인 사건이 일어나는 데 또 다른 빌미가 되고 만다. 따라서 상태후의 조치들과 그녀의 짦은 수렴청정은 당쟁을 완화시키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북송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43]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신종/철종 사후에 휘종이 아닌 다른 사람이 황제로 즉위했다면 정강의 변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비평도 있다. 하지만 신종은 주변 신하들이 충고한 점진적 신중론을 무시하고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게 일을 너무 크고 급하게 벌려놨으며 제대로 정리도 하지 못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결국 그에 대한 뒷감당은 후대 임금들의 몫이다. 물론 휘종이 내치에 무책임하고 외적에 대해 잘못 대처한 것은 맞지만, 신종 치하와 같은 평화로운 시대에서는 선조들이 쌓아 올린 기반을 크게 손대지 말고 점진적인 개혁을 펼치다가 잘 물려줬어야 했는데 신종은 능력에 비해 이상이 너무 높아 급진적이고 위험한 정책을 펼쳤으며 그것이 결국 멸망의 씨앗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44] 철종이 갑자기 요절하게 되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주덕비와의 관계, 당쟁에서의 이해관계, 원래부터 단왕 조길을 유독 총애한 사심 등을 고려해서 신종의 아들 중 가장 황제라는 자리와는 자질상 거리가 먼 휘종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45] 일부 서적, 번역 게시물에서는 향씨, 향태후라고 오역되지만 向가 ‘향할 향, 성씨 상’이므로 상씨, 상태후가 맞다. 그녀의 증조부인 상민중 역시 오역되어 일부 서적 등에서 종종 향민중으로 언급되고 있다. [46] 원래는 최걸의 딸이었는데, 가난해서 주사안에게 딸을 팔았고 나중에 주사안이 궁궐에 궁녀로 입궁시켰다 [47] 신종이 죽자 신종의 묘를 지키며 곡기를 끊어 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