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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晏子)
안영 晏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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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안(晏) | |
명 | 영(嬰) | |
자 | 평중(平仲) | |
최종직위 | 상방(相邦) | |
신장 | 6척(135cm)[1] | |
아버지 | 안약(晏弱) | |
고향 | 제나라 이유(夷維)[2]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578년 ~ 기원전 5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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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제나라에서 제후장공과 제경공을 섬긴 명신. 자는 평중(平仲). 흔히 안자(晏子)로도 알려져 있다.사마천의 사기 열전 중 백이숙제열전 다음으로 자리한 관안열전의 '안'이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다.
2. 출생
키가 6척으로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 작은 키였다.[3]가족들도 그가 태어났을 때 약해서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자. 아버지 안약이 그에게 주술적 의미로 영(嬰, 어린아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본디 제나라에는 안씨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춘추시대를 다룬 역사서에서 제나라 안씨 일족이라 칭함은 모두 안영의 일족들을 뜻한다. 본래 안씨 일족은 조상 대대로 송나라의 대부였으나 송나라가 화씨 일족에 의해서 국정이 좌지우지되고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뇌물을 바쳐가며 나라가 근근히 유지되기만 하였고, 공자의 조상들마저 화씨 일족에 의해서 노나라로 망명가게 되자 안영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제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만약 화씨 일족이 없었다만 송나라에는 공자와 안영이 동시에 존재했을 것.
게다가 안영의 아들 안어가 안유자가 죽을 때, 패배한 뒤 노나라로 망명했기 때문에 제나라 역사에 나오는 안씨는 아버지 안약, 안영 본인, 아들 안어가 전부이다.
3. 제나라를 지탱하다
안영의 아버지 안약이 제환공도 정벌하지 못했던 내나라를 정벌하여 산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식읍을 받은 이후로 그도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미 이때부터 제나라에서 명망이 높았다. 얼마나 높았냐면 계찰이 찾아와 담론을 나누고 싶다고 했을 정도.[4] 아버지 안약 사후 당시에도 이미 형식적으로 것으로 치부되던 3년 거상[5]을 치러낸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생김새나 풍채는 볼품이 없었던 데다가, 검소하고 청렴한 성격으로 강직해 직언을 자주하여 미움을 받을 것 같지만 직언을 할때 적절한 비유를 통해서 비꼰 일이 많아서 군주가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자주 취해 실제 의미로는 강도높은(거의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했어도 죽을 때까지 존경을 받을지언정 탄핵을 받은 일은 없었다.
4. 촌철살인의 명재상
안영의 간언과 비유가 오늘날에도 교훈을 줄만큼 워낙 탁월해 고사성어가 많이 탄생했는데 남귤북지, 곡격견마, 양두구육 등이 있다. 의기양양, 준조절충, 이도살삼사 등도 안영에게서 나왔다. 사실 춘추시대 제나라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는 대부분 안영에게서 유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안영에게 가르침을 받는 주된 대상은 제나라의 경공. 사실 이런 일화들은 주로 <안자춘추>에 많이 전하는데 안자춘추는 후세 사람들이 편찬한 것이다.한 번은 제나라에 장마가 닥쳐 집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안영은 국고를 열어 곡식을 풀자고 간언했으나 경공은 듣지 않았다. 안영은 "궁에서 키우는 개는 배불리 먹이시면서 백성들은 굶기십니까?"하고 비판하고는 퇴임해 버렸다. 얼마 후 잘못을 깨달은 경공이 사과하기 위해 안영의 집을 찾자 안영은 이미 자기 집의 곡식과 가재도구를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뒤였다고 한다.
마부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안영의 마부는 키가 8척인 반면 안영은 키가 6척이었다. 그래서 마부는 항상 기세등등하여 자신이 주인인 양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어느날 마부의 부인이 마부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마부는 놀라 이유를 물어보았다. 부인이 말하기를, 안영 같은 분은 키가 6척이지만 한 나라의 대부인데도 겸손하게 다니는데, 키는 8척이지만 일개 마부에 불과한 당신은 왜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다니냐고 말했다. 마부는 이에 깨달음을 얻어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고 태도가 바뀐 마부를 의아하게 여긴 안영이 마부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렇게 사정을 알게 된 안영은 마부를 벼슬길에 추천했다. 이유인즉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이었다.[6]
4.1. 초영왕을 농락하다
초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초영왕[7]을 사정없이 깨버린 일화가 유명하다.초나라의 영왕은 제나라와 천하에 명성이 높은 안영의 기를 눌러주고 싶었다. 하여 신하 원계강에게 명을 내렸다. 원계강은 안영을 욕보이기 위해서 성문 옆에 개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영이 도착하자 대문을 잠가놓고는, 왕이 몹시 기다리니 우선 개구멍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이때 안영은 "내가 개의 나라에 온 것이 아니거늘 어찌 개구멍으로 사람을 들이는가!"라고 외쳤다. 개구멍으로 들여보냈다간 초나라가 정말로 개나라가 될 판이니[8] 정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문에는 유신들이 좌우로 쫙 깔려있었는데, 그중에서 투자길[9]이 와서 안영에게 인사를 하자, 안영은 곧바로 "투씨라면 이 나라의 충신이었던 투백비 장군의 후예가 아니시오?"라고 먼저 선수를 쳐서 감히 입을 못 열게 했다. 투자길을 뒤이어 여러 유신들이 안영에게 말싸움을 걸었지만, 안영의 식견과 언변에 발렸다. 그 때 오사[10]가 와서, 손님에게 무슨 무례냐며 유신들을 전부 쫓아내고 안영을 궁전으로 모셨다.
안영은 대전으로 들어오는 동안 칼을 빼든 무사들이 죽 서있는데도 기죽지 않고 "평화를 위해 온 사신을 이토록 두려워 하십니까?"라며 당당히 왕을 보았다. 초 영왕이 대뜸 그의 외모를 비하하며 "제나라에는 인재가 없는가? 왜 자네 같이 못난 사람이 왔는가?"라고 비꼬자 "제나라에 어찌 사람이 없겠습니까. 단지 우리나라가 외국에 사신을 보낼 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큰 인재는 큰 나라에 보내고, 작은 인재는 작은 나라에 보내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작고 못났기 때문에 가장 작고 못난 나라에 왔으니 대왕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받아쳐 초 영왕에게 크게 한 방 먹였다.
그 후 영왕이 귤을 가져와 대접하는데, 안영은 귤이 없던 제나라의 사람이라서 귤을 껍질째 먹고 말았다. 그러자 왕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껍질째 먹는가?"라고 비웃었는데 "본디 왕의 명 없이는 함부로 다루지 않는 법. 까고 먹으라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귤 껍질을 버리리까?"라며 초 영왕에게 또 망신을 주었다.
이후 연회에서 술을 마시는데, 관리가 한 사람을 묶어서 끌어왔다. 영왕이 누구인가 묻자 관리는 제나라 출신 도둑이라고 대답[11]했다. 영왕은 " 제나라 사람들은 순 죄인뿐이로군?"이라고 하자 안영은 "맛좋은 귤이라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열리듯, 죄를 모르는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만 들어오면 죄인이 되니 초나라야말로 죄악의 땅인 것은 아닌지요?[12]"라고 응수했다.
영왕은 안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였다.
4.2. 이도살삼사
이후 제나라로 돌아온 뒤 당시 제나라의 제후, 제경공에게는 세명의 뛰어난 무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공손접(公孫接),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였다. 이들은 서로끼리는 우애가 두터웠지만 경공을 항상 따라다니다 보니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안영은 은밀히 제경공에게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언하고, 제경공은 이 말을 승낙한다.안영은 이들에게 경공의 상을 내리겠다고 하고 궁궐로 오게 했다. 그러고는 금 쟁반에 복숭아 두 개를 놓고 이렇게 말했다. "세 분은 국가의 동량(棟梁, 기둥과 대들보)이요, 강철 같은 무사이십니다. 주군께서는 당신들을 위해 궁궐 뒷동산의 복숭아를 맛보게 하셨으나 잘 익은 것은 겨우 2개뿐이라 공로에 따라 드시면 됩니다."
안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저 공손접은 자신이 숲 속에서 멧돼지를 잡은 일과 맨손으로 맹호를 잡은 일을 거론하면서 복숭아 한 개를 가져가 버렸다. 전개강 역시 두 번이나 전쟁에 참여해 제나라의 위엄을 날리는 공을 세웠다고 하면서 가져가 버렸다. 그러자 고야자는 화가 치밀어 자신이야말로 주군의 마차가 황하로 휩쓸려갈 때 홀로 물속에 들어가 목숨을 구했다고 하면서 가져간 복숭아를 내놓으라고 소리치고는 보검을 뽑아 시위를 했다. 다른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즉시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선혈이 채 마르지 않은 두 사람의 시신을 본 고야자도 한탄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만 이 부분은 책마다 설명이 다르다. 특히 열국지같은 경우는 6개의 복숭아라고 소개하여 6개의 복숭아 중 2개는 제경공과 마침 제나라를 방문한 노소공이, 2개를 양국의 재상이었던 안영과 숙손차가 받아 먹고, 나머지 2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해 죽도록 만들었다고 나왔으나 안자춘추의 경우에는 그저 2개로만 나와있다. 어쨌거나 이는 후일 음악의 형태로 전승되는데 이를 양보음이라고 한다.
셋이 무사히 제거된 이후 제경공이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하자 안영은 "그들은 힘은 있으나 지략이 없어 큰 인재는 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한 사람을 그들에게 소개하니, 그가 바로 사마양저다.
사마양저를 추천하여 국방을 안정시키고, 그 스스로는 외교와 내정을 담당하여 제나라는 제환공 이후에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안영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나라(晉)도 양설힐 같은 인재가 있었지만 감히 쳐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초영왕은 아예 안영이 사신으로 온 이후에 바로 친선해버렸을 정도. 그럼에도 진나라가 제나라를 칠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유인즉 그가 추천한 사마양저가 진나라를 깨먹었기 때문.
4.3. 촉추의 세 가지 잘못
제나라 경공은 새 사냥을 좋아했는데 촉추라는 사람에게 자신이 잡은 새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촉추가 실수해서 그 새들이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화가 난 경공은 촉추를 죽이라고 명했는데 이를 본 안영은 "촉추에게는 세 개의 죄목이 있습니다. 제가 촉추의 죄 세 개를 지적한 다음 죽여도 늦지 않으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경공은 그렇게 하도록 말했다. 그러자 안영은 촉추에게 이렇게 말했다."너는 세 가지의 죄를 저질렀다. 첫 번째는 관리를 소홀히 하여 새들을 놓친 죄, 두 번째 죄는 우리 임금이 새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만든 것이며, 또 이 일로 다른 나라 임금들이 제나라 군주는 사람보다 새를 중히 여긴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너의 세 번째 죄이다."
이렇게 다 돌려까고 나서 안영은 촉추를 죽이라고 청했지만 부끄러워진 경공은 그냥 촉추를 풀어주었다고 한다.[13]
4.4. 시장에 살면 좋은 점
안영은 시장가의 시끄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거처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경공은 좋은 집을 주겠다고 안영에게 제의했지만 안영은 "시장 가까이에 있어서 물건을 쉽게 살 수 있으니 이익"이라며 거절했다. 경공이 "경은 시장 가까이에 산다면 어떤 물건이 비싸고 싼지도 알겠군"라고 묻자 안영은 "어찌 모르겠나이까? 쌍으로 신는 보통 신은 싸고, 용(踊)은 비싸옵니다"라고 대답했다.여기서 '용'은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인 '월형(刖刑)'을 당한 사람들이 신는 신발을 말한다. 그러니까 안영은 " 월형을 받은 신하들이 얼마나 많으면 용의 가격이 올랐겠습니까?"라며 제나라 형벌의 가혹함을 돌려서 비판한 것이다.
4.5. 화(和)와 동(同)의 차이점(和而不同)
경공이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구거라는 신하가 경공을 맞으러 달려왔다. 경공이 "오직 양구거만 내 마음과 맞는구나(與我和)"라며 기뻐하자 안영이 "그저 맞장구치는 것(同)뿐이지 어찌 마음이 맞다(和) 하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경공이 동(同)과 화(和)의 차이점을 묻자 안영은 이렇게 대답했다."화(和)를 음식에 비유하면 초, 장, 소금을 넣어 음식의 부족한 맛을 보충하고 지나친 맛은 제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요리가 되어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주가 잘 못하는 것은 말해서 고치게 하고, 잘하는 것은 북돋아서 그릇된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을 마음이 맞는 것(和)이라고 합니다. 그저 군주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다 하고, 싫어하면 싫다 하면서 맞장구나 치는 것을 동(同)이라 합니다. 이것은 물로 물의 간을 맞추는 것과 같은데 무슨 맛이 나겠습니까?"
한마디로 군주에게 영합하기만 하는 것을 군주와 마음이 맞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경공을 따끔하게 질책한 셈.
4.6. 안영의 아내
어느 날 경공이 안영의 집을 찾았는데, 마중을 나온 안영의 곁에는 한 늙고 못생긴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안영의 아내임을 알게 된 경공은 "경의 아내가 늙고 못났으니, 젊고 아름다운 내 딸을 새 아내로 주겠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안영은 이렇게 대답했다."무릇 여인이 지아비를 모시는 것은 나중에 늙고 못나게 되어도 저버리지 말고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옵니다. 지금 신의 아내가 비록 늙고 못났으나 이미 신을 믿고 스스로를 맡겼는데 어찌 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경공도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고 한다.
"경은 아내를 섬기는 데도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임금을 섬기는 데는 말해 무엇하리오!"
5. 공자와의 관계
「공자가
제齊나라에 가서 경공景公을 만나 뵙자, 경공은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이계 땅을 봉지로 내려주려고 안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안자는 이렇게 반대하였다.
"안 됩니다. 저들은 오만하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이들로서, 아랫사람을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또 백성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과 정치를 친밀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명天命만 세워놓고 일에는 게을러, 직무를 맡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장례에 너무 돈을 들여 백성과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며, 상喪을 너무 오래 끌어 슬퍼하느라 세월을 허비하니,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안으로는 스스로 실행하기 힘든 것을 감추면서, 밖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유자儒者입니다. 그래서 복장을 특이하게 하여 얼굴을 꾸미기에만 힘씁니다. 따라서 무리를 이끈다거나 백성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훌륭한 현인들이 사라지자 주나라가 쇠퇴해진 것입니다. 위의威儀만을 중시하자 백성의 행동은 천박해지기 시작하였고, 명성과 즐거움만 번드르하게 꾸미자 세상의 덕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공구孔丘(공자의 본명)는 명성과 꾸밈으로 세상을 현혹시키며, 음악과 춤을 수식하여 무리를 모으고, 사람 사이의 예가 어떠니 하고 복잡하게 하여 의표儀表의 시범을 보이며, 옷깃을 어떻게 하느니 하며 예절에 힘써 무리에게 뽐내고 있습니다. 많이 배운다고 하면서 세상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많이 생각한다고 하면서 백성을 도와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명을 두 배로 늘린다고 해도 그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다 배울 수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요구하는 예절을 다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재물을 쌓아도 그들이 말하는 즐거움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꾸미고 사술을 부리면서 세상의 임금들을 현혹시키고, 명성을 풍성히 하여 백성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는 세상에 보일 수도 없는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교화도 결코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자에게 봉읍을 주어 우리 제나라의 풍습을 바꾸게 한다니, 이는 무리를 인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도가 아닙니다."
경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좋소!"
그리고는 공자에게 그저 후한 예물만 주고 봉지 하사의 일은 유보시킨 채, 그저 공경히 만나면서 그의 치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 <안자춘추> 중
"안 됩니다. 저들은 오만하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이들로서, 아랫사람을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또 백성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과 정치를 친밀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명天命만 세워놓고 일에는 게을러, 직무를 맡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장례에 너무 돈을 들여 백성과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며, 상喪을 너무 오래 끌어 슬퍼하느라 세월을 허비하니,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안으로는 스스로 실행하기 힘든 것을 감추면서, 밖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유자儒者입니다. 그래서 복장을 특이하게 하여 얼굴을 꾸미기에만 힘씁니다. 따라서 무리를 이끈다거나 백성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훌륭한 현인들이 사라지자 주나라가 쇠퇴해진 것입니다. 위의威儀만을 중시하자 백성의 행동은 천박해지기 시작하였고, 명성과 즐거움만 번드르하게 꾸미자 세상의 덕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공구孔丘(공자의 본명)는 명성과 꾸밈으로 세상을 현혹시키며, 음악과 춤을 수식하여 무리를 모으고, 사람 사이의 예가 어떠니 하고 복잡하게 하여 의표儀表의 시범을 보이며, 옷깃을 어떻게 하느니 하며 예절에 힘써 무리에게 뽐내고 있습니다. 많이 배운다고 하면서 세상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많이 생각한다고 하면서 백성을 도와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명을 두 배로 늘린다고 해도 그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다 배울 수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요구하는 예절을 다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재물을 쌓아도 그들이 말하는 즐거움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꾸미고 사술을 부리면서 세상의 임금들을 현혹시키고, 명성을 풍성히 하여 백성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는 세상에 보일 수도 없는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교화도 결코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자에게 봉읍을 주어 우리 제나라의 풍습을 바꾸게 한다니, 이는 무리를 인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도가 아닙니다."
경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좋소!"
그리고는 공자에게 그저 후한 예물만 주고 봉지 하사의 일은 유보시킨 채, 그저 공경히 만나면서 그의 치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 <안자춘추> 중
공자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한 6인[14] 중 한 명이라는 말이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나온다. 그러나 정작 안영은 공자를 위험 인물로 여겼는데, 제나라에서 등용되고자 했던 공자는 안영이 유학을 하는 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강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제나라를 떠나야 했다.
다만 실제로 공자가 안영을 안자로 높이고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정도로 우러러봤던 만큼, 안영 역시 공자를 현인 중의 현인으로 평가했었다. 사실 위험 인물로 점찍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안영이 공자의 학식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정말 얕봤다면 위험 인물로 판단할 이유도 없다. 안영이 노와 제의 실제상황이 달라 걸맞은 정치를 할 수 없으며 "유자(儒者)들은 유세를 떠는데만 능하고 말만 그럴듯하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을지언정 자신에게 예(禮)를 가르친 현인 월석보와 공자중에서 누가 더 뛰어나냐는 제경공의 질문에는 "월석보는 현인임이 분명하고, 공중니는 현인 중에서도 현인입니다"라고 했을 정도. 이런 일화를 볼때, 안영 역시 공자의 인격 자체는 높게 평가한 듯 하다. 또한 공자는 자신을 반대한 안영을 미워하지는 않았다고 하며, 안영을 "안평중은 사람을 잘 사귀었다. 오래 되어도 공경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사실 당시의 제나라는 안영이 없다면 진(陳)의 공실 출신인 전(田)씨가 내일 공실을 뒤엎을지 모레 뒤엎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15] 안영이 말했던 '일세에 과업을 끝낼 수 없다'는 말처럼 제나라에 공자의 정치를 적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6. 평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중 한 명이다.사마천이 가장 존경하였던 인물이다. 사마천은 만일 자신이 안영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면 마부가 되어 채찍질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길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였으며[16] 관중과 나란히 평가되고 있을 만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7. 현대 매체에서의 안영
공자의 생애를 다룬 애니메이션 '공자전'에서는 어쩐지 외모부터 십상시삘 나오는 악역으로 나온다. 그것도 그냥 악역이 아니라 양호를 능가하는, 공자 일생일대의 최대의 적으로. 전항의 공자암살기도나 여미의 부저추신계[17]도 모두 안영이 꾸민 일로 묘사한다. 공자를 견제한 인물들 중 가장 거물이라서 이런 식으로 등장시킨 듯한데 안영이 본시 명재상으로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이정도로 까이는건 심한면이 있다 물론 안영은 제나라에 공자의 정치사상이 현실성이 없다고 공자의 등용은 반대하여 공자의 제자들이 비난하자 오히려 공자는 안영을 칭찬하였다 안영은 공자가 칭찬하듯이 인품과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였다. 공자전은 안영의 자세한 기록을 무시하고 권모술수가 뛰어난 공자의 정적이자 악인으로 왜곡해서 그렸다는게 문제점 . 한국판에서의 성우는 작중에서 양호와 같은 김병관. 악역 포스가 제대로 묻어난다.중화TV에서 제작한 사극 <공자>에서는 공자를 견제하고 부저추신계도 꾸미긴 하지만, 제나라를 위하는 정치인일 뿐 악역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공자에 대해선 그의 능력과 인품, 궁극적으로는 그가 주장하는 왕도정치가 옳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지금은 난세이므로 패도를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1]
키가 6척 단신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데 한나라척인 22.5cm로 계산한 키이다. 하지만 1척이 시대마다 달라서 도량형이 명확하지 않다.
[2]
현대의
산둥성
웨이팡시 가오미(高密)현
[3]
21세기 대한민국의 1척은 30cm를 넘지만 후한 시대의 1척은 22.5cm 정도니 6척이면 135cm. 다만 춘추시대의 1척은 후한의 1척과 다를 수도 있으며 더구나 진나라 통일 전 중국에서는 도량형이 나라마다 달랐기 때문에 안영의 정확한 키를 알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대체로 140-150cm 사이라고 추측한다. 반대로
공자는 너무 크다. 9척 6촌으로 전하는데 옛 기준으로도 2m가 족히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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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찰은 공자가 계자(季子)라 부르며 우러러볼 정도의 인물이었다. 오의 왕자로
합려의 막내 숙부이기도 한 사람이며 워낙 인품이 뛰어났지만 왕이 되기를 거부한 탓에, 그 아버지가 왕위계승을 부자 상속이 아닌 형제 상속으로 잇도록 유언을 남겼을 정도다. 하지만 결국 셋째 아들이 죽자 다음 차례였던 넷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계찰이 왕이 되기를 거부하여, 셋째 아들의 아들인
요가 왕위에 오르면서 첫째 아들의 아들인 합려와 반목을 하게 된다. 그 뒤로 유명한
어장검 스토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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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복상하는 것 당시, 춘추좌씨전에 장례에 따른 일화가 나오는데, 당시 제나라에서는 계급에 맞지 않는 사치스런 장례를 취하는게 유행이었는데 안영이 치른 장례는 대부 신분에 맞는 장례였다. 그걸 본 친척 어른이 신분에 맞지 않는 장례를 치른다고 나무라자 안영은 오히려 이게 대부의 상례가 아니라면 다른 경이 대부 신분에 맞는 장례를 치르겠죠라고 말했는데 이 말 뜻은 자기가 치르는 장례가 신분에 맞지 않는다면, 먼 훗날 제정신 박힌 경이 자기 신분에 맞는 장례를 치르겠다는 걸 돌려 말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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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군대의 주력은
고대 전차였기 때문에 마부는 나름 중요한 전문직이었고 실력이 확실했다면 관직 얻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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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아버지가 언릉 전투에서 패한
초공왕이며 아우가
오자서에게
굴묘편시 당하는
초평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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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초나라는 중원 국가들과 달리 민족구성이 달라서 은근히 오랑캐 나라 취급당하는 실정이었다. 아무리 중원 질서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초나라라도 사신에게 되려 모욕을 당한다면 대외적으로 좋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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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의 충신 가문인 투씨 집안으로, 그의 조상인 투백비가 제나라로 신하로 갔는데, 워낙 버르장머리가 없게 행동해 개빡친 제나라의 태대부
관이오에게 참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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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오자서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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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안영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쇼라서 실제 제나라 사람인지, 그리고 진짜로 도둑인지는 알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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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남귤북지, 귤화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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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왕의 비슷한 일화가 사기 골계열전에 전한다. 장왕이 사람보다 중히 대하던 애마를 귀하게 장사지내려 할 때
우맹이 '그럴 거면 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주변국에게도 사신을 보내 조문을 받자. 그러면 초나라 왕께선 사람보다 말을 중히 여긴다라 알려질 것이다'라 돌려깠다.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친 장왕은 보통 말이 죽었을 때처럼 고깃국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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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衛,나라의 거백옥,蘧伯玉,, 제,齊,나라의 안평중,晏平仲,,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 노,魯,나라의 맹공작,孟公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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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전씨는 실제로 원래 왕가인 강씨를 뒤엎고 제나라 왕위를 찬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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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위의 '거들먹거린 안영 마부 이야기'를 본인이 안영 열전에 써 놓고도 굳이 이 표현을 빌려온 것이다! 이는 자신을 재주 없는 마부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안영의 기지를 극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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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 왕에게 120필의 말과 함께 춤에 능한 80명의 미녀를 보내서 노나라 왕 정공이 항락에 빠져 정사를 멀리 하게 만든 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