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武侯祠삼국시대 촉한의 명재상 제갈량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의 작위였던 무향후를 줄여 그를 (제갈)무후라고 불렀던 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2. 최초의 무후사
제갈량은 207년 촉에 와서 무수한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처음에는 제갈량의 생일, 제사일, 그리고 청명절이 되면 각지에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거리, 골목, 야외에서 그를 위한 제사를 개별적으로 지내기 시작했다. 이런 제사는 중국 서남 지역의 각 민족 사이에서 빈번하게 행해졌다. 매년 이렇게 제사를 지내자 몇몇 관원들이 감동을 받아 조정에 상소하였다. 보병교위 습융, 중서랑 향충이 주도한 조정의 신하 무리들이 한꺼번에 군주에게 상소를 올려 사당에 대한 필요성과 구체적인 조치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에 263년 한중 면현 정군산에 사당을 짓는 것을 유선이 동의함으로서 첫번째 무후사가 생기게 되었다.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과 그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요(景耀) 6년(263년) 봄, 조령을 내려 제갈량을 위해
한중군 면양현에 사당(廟)을 세웠다.
제갈량이 처음 죽었을 때, 도처에서 각각 사당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예의등급과 작록품계를 따져 의논한 뒤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사시 절기에 맞춰 도로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간언하는 이 중에 어떤 이가 청을 들어주어 성도에 사당을 세우자고 했으나 후주는 따르지 않았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습융(習隆), 중서랑(中書郎) 상충(向充) 등이 함께 표를 올렸다,
"신이 듣기로 주나라 사람들은 주 소공의 덕을 기려 팥배나무을 베지 않았고, 월왕은 범려의 공을 생각해 금을 주조해 그 형상을 보존했다 합니다. 한나라가 흥한 이래 작은 선행과 덕으로도 그 형상을 그려 사당이 세워진 자가 많습니다.
하물며 제갈량의 덕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본보기가 되며 그 공훈이 말년을 덮으니,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에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봄 가을의 제사를 가문에서만 지내게 하고 묘상(廟像)을 빠뜨린 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융이(戎夷)들은 들판에서 제사지내게 하니, 이는 덕을 보존하고 공을 기리는 바가 아니며 옛 사람들이 술추(述追)하던 바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민심에 모두 따른다면 어그러져 전범에 맞지 않고, 수도에 세우면 또한 종묘에 가까우니, 이것이 임금의 마음에 꺼리는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제갈량의 묘에 가까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워 친속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를 올리게 하고, 무릇 그 신하나 옛 관원으로 제사를 올리려는 자는 모두 그 사당에서만 지내도록 한정하여 사사로운 제사를 끊는 것이 올바른 예법을 존숭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비로소 그 말에 따랐다.
제갈량이 처음 죽었을 때, 도처에서 각각 사당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예의등급과 작록품계를 따져 의논한 뒤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사시 절기에 맞춰 도로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간언하는 이 중에 어떤 이가 청을 들어주어 성도에 사당을 세우자고 했으나 후주는 따르지 않았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습융(習隆), 중서랑(中書郎) 상충(向充) 등이 함께 표를 올렸다,
"신이 듣기로 주나라 사람들은 주 소공의 덕을 기려 팥배나무을 베지 않았고, 월왕은 범려의 공을 생각해 금을 주조해 그 형상을 보존했다 합니다. 한나라가 흥한 이래 작은 선행과 덕으로도 그 형상을 그려 사당이 세워진 자가 많습니다.
하물며 제갈량의 덕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본보기가 되며 그 공훈이 말년을 덮으니,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에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봄 가을의 제사를 가문에서만 지내게 하고 묘상(廟像)을 빠뜨린 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융이(戎夷)들은 들판에서 제사지내게 하니, 이는 덕을 보존하고 공을 기리는 바가 아니며 옛 사람들이 술추(述追)하던 바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민심에 모두 따른다면 어그러져 전범에 맞지 않고, 수도에 세우면 또한 종묘에 가까우니, 이것이 임금의 마음에 꺼리는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제갈량의 묘에 가까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워 친속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를 올리게 하고, 무릇 그 신하나 옛 관원으로 제사를 올리려는 자는 모두 그 사당에서만 지내도록 한정하여 사사로운 제사를 끊는 것이 올바른 예법을 존숭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비로소 그 말에 따랐다.
3. 중국 각지의 무후사
고대 전적 문헌, 특히 각지의 지방지에서 무후사에 대한 무수히 많은 글이 존재한다. 제갈량의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운남, 사천, 귀주 삼성의 명청 지방지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가 있다.사천에는 역사적으로 30개의 무후사가 있었는데 20여개의 시, 현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 성도, 신도, 면죽, 재동, 검각, 광원, 낭중, 미산, 노주, 아안, 천안, 회리, 흥문, 공현, 청계, 의빈, 균련, 뇌파, 마변, 면년 등의 지역에 모두 무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회리현의 무후사는 현성 북가에 있었으며 명나라 융경년에 지어졌다. 노주의 무후사는 주서 보산 정상에 있으며, 삼충사로서 한나라의 제갈무후와 그의 아들 제갈첨, 손자 제갈상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운남에는 역사적으로 34개의 무후사가 존재했었고, 32개의 시와 현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통해, 곤명, 곡정, 마룡, 의량, 징강, 남화, 옥계, 숭명, 건수,초웅, 요안, 대요, 미도, 외산, 상운, 빈천, 대리, 용평, 용승, 보산, 등충, 봉경, 경동, 신평 등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숭명 무후사는 명나라 시대에 지어졌으며 청나라 강희연간에 다시 수리하였다고 한다. 초웅 무후사는 명나라 융경년에 지어졌고 강희년에 다시 지어 졌으며 후에 안상 아래 금속암으로 옮겼다고 한다.
귀주에는 과거 18개의 무후사가 있었으며, 필절, 동재, 준의, 인회, 여평, 용강, 귀양, 관령, 시병, 동인 등 16개의 시횬에분포되어 있었다. 그중 필절 무후사는 칠성관에 있으며 명나라 시대에 지어졌고 청나라 강희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운남성, 귀주성, 사천성 삼성은 삼국시기 촉한의 통치 구역이었으며 제갈량의 영향과 은덕을 비교적 깊게 받은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무후사가 비교적 많이 존재하는 편이다. 사적 및 지방 역사기록에 따르면 산동, 호북, 하남, 사천, 중경, 운남, 섬서, 감숙, 절강 등의 성, 직할시에 과거 무후사가 지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무후사는 다음과 같다.
- 융중 무후사: 호북 양양시 융중에 있다. 제갈량이 젊었을 때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문물 보호구역이다.
- 적벽 무후궁: 또는 "배풍대(拜風臺)"라고도 불린다. 호북 적벽시 남이산에 있다. 제갈량이 동풍을 빌린 땅이며 전당은 산 정상에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급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황후묘 무후사:호북 선창시 황우협의 황우묘 안에 있다. 제갈량이 촉나라에 와서 이곳에 사당을 짓고 대우와 황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무후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 시급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남양 무후사: 하남 남양시 와룡강에 위치하고 있다. 제갈량은 "신은 본래 평민의 옷을 입고 남양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의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백제성 무후사: 중경 봉절현 백제성에 위치하고 있다. 유비가 이곳에서 임종을 하며 부탁하여 지어졌다. 현재 중국의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기산 공명묘: 감숙 예현 기산보에 위치하고 있다. 북벌 중 제갈량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적이 있다.
- 면현 무후사: 섬서 면현 정군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무후의 무덤이 존재하여 무후사를 짓게 되었다. 현재 중국의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오장원 제갈묘: 섬서 기산현 오장원에 취치하고 있다. 제갈량이 이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성급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보산 무후사: 운남 보산시 보정산에 위치하고 있다. 제갈량이 이곳에서 남정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대에 무후사를 지었으며 오늘날 재건하였다. 현재 시급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숭명 무후사: 운남 숭명현 숭양진에 위치하고 있다. 제갈량과 맹획이 이곳에서 결맹을 맺었다고 한다.
- 기남 제갈량 기념관: 산동 임기( 린이)시 기남현 황탄촌에 위치하고 있다. 제갈량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원림 기시성 안에 무후사가 있고 기남 황탄촌 제갈량 기념관은 새로 지어진 것이다.
- 란계 승상 사당과 대공당 : 절강 란계시 제갈진 제갈촌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천여명의 제갈량의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중국 최대의 제갈량 후예 저주지이다. 대공당과 승상 사당이 있으며 현재 중국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 대만 공명묘: 계시 현기원이라도고 불린다. 대만 난터우현 위츠향 중명촌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청나라 광서 28년(1902년)에 지어졌으며 10m 높이의 제갈공명 선사 조각이 있다.
- 청두 무후사: 중국 각지의 현존하고 있는 무후사 중에 가장 유명하며 1961년 가장 처음으로 중국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 선포되어 현재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삼국문화의 성지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촉한의 건국자인 유비의 무덤이지만 제갈량도 이곳에 모셔져서 무후사라도 불린다.
4. 청두 무후사와 관련 유적에 대하여
청두(성도)에는 총 7개의 무후사가 있었다. 청두가 과거 촉한의 수도였던 만큼 이는 중국 단일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다. 성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후사는 서진때 지어졌으며, 원소성 내에 있다. 송대 축목의 <방어승람>에는 이웅이 서진 용안 원년(304년)에 왕이 되고 환온이 동진 용화 3년(347년)에 촉을 정벌하였던 역사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도 무후사는 성한 이웅(303~334년 재위)이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청두 소성에 있었다. 책에서는 " 이웅이 왕이 된 후 소성 안에 사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환온이 촉을 정벌하여 소성을 파괴하였지만 공명묘는 남겨 두었다."라고 적혀있다. 이 책 사당의 규모와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다.성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유비의 묘 옆에 있는 무후사이다. 이 무후사는 남북조시대(서기 5세기)에 지어졌다. 그 당시에는 유비와 제갈량의 사당이 모두 존재했으며 제갈량의 사당은 유비의 묘 옆에 있었다. 이는 이 두사람이 군신관계의 모범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비릉, 묘와 무후사는 당, 송나라 시대에 성도에서 가장 큰 명승고적이었다. 명나라 초, 촉헌왕 주춘이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합동으로 지냈다. 명나라 말, "군신일체"의 묘우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청대에 다시 세워져 오늘날의 군신합사를 지내는 무후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제갈량의 옛집에서 과거 무후사가 있었으며, 그 무후사는 당대에 지어진 것이었다. 제갈량이 성도에 21년 동안 거주하였으며, 옛 집이 남아 있으니 후세사람들이 그것을 무후사로 지은것이다. <태평환우기> 72권의 내용에 따르면 "무후택은 저택 서북 2리에 있었다. 오늘날에는 승연관이 되었는데 관 안에 사당이 있다."고 한다. 사당은 당나라 시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성도 원 초당사 옆에 무후사가 있었다. 두보 초당과 나란히 있는 명대 중엽에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유비 묘 옆 무후의 단독 사당이 유비 묘로 편입된 후 백성들은 그 곳의 소열묘를 무후사로 부르며 유비가 제갈량의 사묘 안으로 뛰어들어온 것이라고 여겼다. 이로인해 명나라 가정제 사천 순무왕 얼곡이 촉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제갈의 공덕이 크니, 단독이 아니라면 어찌 숭배할 것이며, 숭배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 말은 즉, 제갈량의 공덕은 반드시 단독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초당사 옆에 무후사 하나가 지어졌다. 이 사당은 명나라 말 전쟁으로 인해 불에 타 훼손되었다.
성도에는 제갈정이 있는대, 바로 이 우물 옆에 무후사가 있다. <화양현지>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정이 바로 사당이니 명나라 만력제 때 지은것이고, 양명이 정사기를 썼으며, 금성 동금강 거리에 있었다." 신중국 설립 초기, 우물과 사당이 모두 존재하고 있었으며, 제갈공명의 조각도 있었다. 현재 우물과 사당은 모두 페쇄되었다.
성도 구리제는 오래된 긴 둑이다. 이 둑은 제갈량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이곳에 제갈량의 사당이 있다고 한다 <성도현지>의 내용에 따르묜," 구리제의 남쪽은 제갈묘라고 불리는데, 지어진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국조 건융 9년애 다시 지어졌다." 라고 한다. 사당의 규모는 크지 않으며 오늘날 또 다시 지어졌다.
성도에는 또 하나의 승상사가 존재한다 <성도현지>의 내용에 따르면, "현북 이리 파기가에 승상사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한나라 말기에 지어졌으며 국조시기에 보수되었다." 이 사당은 오늘날 성도제6 중학교가 소재하는 곳이다. 명나라 말에 이곳에 사당이 있었으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