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 코팩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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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샌디 코팩스 | |||||||||||||||||||||||||||||||||||||||||||||||||||||||||||||||||||||||||||||||||||||||||||||||||||||||||||||||||||||||||||||||||||||||||||||||||||||||||||||||||||||||||||||||||||||||||||||||||||||||||||||||||||||||||||||||||||||||
헌액 연도 | 1972년 |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
투표 결과 | 86.87% (1회) |
샌디 코팩스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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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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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 이름 |
샌디 코팩스 Sandy Koufa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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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투수 | |||||||||||||||||||||||||||||||||
득표수 | 970,434 | }}} |
올타임 MLB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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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22년 2월 ESPN의 패널들이 선정한 역대 메이저 리거 랭킹. 금지 약물 복용자들이 버젓이 선정됐고 기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와는 다른 부분들이 있으므로 참고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베이브 루스 | 윌리 메이스 | 행크 애런 | 타이 콥 | 테드 윌리엄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루 게릭 | 미키 맨틀 | 배리 본즈 | 월터 존슨 | 스탠 뮤지얼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페드로 마르티네즈 | 호너스 와그너 | 켄 그리피 주니어 | 그렉 매덕스 | 마이크 트라웃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조 디마지오 | 로저 클레멘스 | 마이크 슈미트 | 프랭크 로빈슨 | 로저스 혼스비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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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1959 | 1963 | 1965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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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1961²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모리 윌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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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보이어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돈 드라이스데일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딘 챈스 (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
딘 챈스 (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짐 론보그[AL] ( 보스턴 레드삭스) 마이크 맥코믹[NL]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963년 월드 시리즈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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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테리 ( 뉴욕 양키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밥 깁슨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65년 월드 시리즈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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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깁슨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프랭크 로빈슨 ( 볼티모어 오리올스) |
할 뉴하우저 (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1945년)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3년)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5년)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3년)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5년)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6년)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5년)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6년) |
→ |
스티브 칼튼 (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2년) |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 ||||
돈 드라이스데일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후안 마리샬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래리 잭슨 ( 시카고 컵스) |
1965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 ||||
래리 잭슨 ( 시카고 컵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마이크 맥코믹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962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왕 | ||||
워렌 스판 ( 밀워키 브레이브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필 니크로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196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 ||||
돈 드라이스데일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돈 드라이스데일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 ||||
돈 드라이스데일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밥 빌 ( 피츠버그 파이리츠) |
1965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 ||||
밥 빌 ( 피츠버그 파이리츠)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짐 버닝 ( 필라델피아 필리스) |
196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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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벤츄리 | → | 샌디 코팩스 | → | 짐 라이언 |
브루클린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32번 | ||||
빌 안토넬로 (1953) |
→ |
샌디 코팩스 (1955~1966) |
→ |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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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A9C><colcolor=#FFFFF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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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32 | |
샌포드 "샌디" 코팩스 Sanford "Sandy" Koufa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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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5년 12월 30일 ([age(1935-12-30)]세) |
뉴욕 주 브루클린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라파엣 고등학교 - 컬럼비아 대학교 - 신시내티 대학교 |
신체 | 188cm / 95kg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좌투우타 |
프로 입단 | 195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BRO) |
소속팀 |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55~1966) |
기록 |
퍼펙트 게임 (1965.9.9.) 노히트 노런 4회 (1962.6.30., 1963.5.11., 1964.6.4., 1965.9.9.) 무결점 이닝 3회 (1962.6.30.[3], 1963.4.19.[4], 1964.4.18.[5])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전 야구 선수. 최초의 사이 영 상 다회 수상자이기도 하다.[6]통산 성적은 12시즌 397경기 2,324.1이닝 165승 87패 137완투 40완봉 ERA 2.76 ERA+ 131 2396삼진 817사사구[7] FIP 2.69 WHIP 1.106 fWAR 54.5 bWAR 53.1이다.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이 길지 못하여 누적은 그의 실력과 명성에 비해서 처참한 정도이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에 쌓아 올렸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이 가능하고 다저스의 전성기와 우승을 가져다준 에이스였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을 이뤄냈다.
이름을 주로 '쿠팩스'로 표기하는 경우가 잦으나 실제 발음은 /ˈkoʊfæks/로, '코우팩스' 내지 '코팩스'가 실제 발음에 더 가깝다. 당연히 외래어 표기법에 따를 경우 역시 '코팩스'가 된다. 이 문서 역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코팩스로 표기한다.
2. 선수 경력
샌디 코팩스의 선수 경력 | |||
통합 선수 경력 : 샌디 코팩스/선수 경력 | |||
1955년 | 1956년 | 1957년 | 1958년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1963년 | 1964년 | 1965년 | 1966년 |
3. 은퇴 후
- 은퇴 이후 코팩스는 NBC 방송국과 계약해 6년간 토요일 경기의 해설위원을 맡았다. 10년 짜리 계약이었지만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코팩스와 방송 일은 맞지 않았다.
- 1970년 1월 29일, 통신사 AP에 의해 실시된 스포츠 라이터 및 방송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야구 선수(Baseball Athlete of the Decade)로 선정됐다(2위 미키 맨틀, 3위 윌리 메이스). Koufax - Ed Gruver. 222-223p. Jet - Feb. 19, 1970 #
-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다저스의 마이너 리그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 1979년 월드 시리즈 MVP들의 모임에서 '팀을 구성할 때 누굴 가장 먼저 데려올 것인가?'란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코팩스가 전체 18표 중 8표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 #
- 1997년 36명의 BBWAA 기자들의 선정한 MLB 올타임 팀에 선정됐다. #
- 1998년 스포팅 뉴스 선정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에 26위로 포함됐다. #
- 1999년 선정된 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30명의 일원이 됐다. 놀란 라이언에 이은 투수 부문 최다 득표 2위였다.
-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거론된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은 운동 선수 20인(Our 20 Favorite Athletes Of The Century)에 포함됐다. #
- 2011년에 LA 타임스에서 진행된 인터넷 팬 투표에서 로스앤젤레스 역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선정됐다(2위 매직 존슨, 3위 빈 스컬리). #
- 2013년 1월 23일, 다저스 회장 마크 월터(Mark Walter)의 특별 고문 역할로 다저스에 합류했다.
- 2015년 메이저 리그 팬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생존 선수 4인에 포함됐다. 나머지 세 명은 윌리 메이스, 행크 애런, 쟈니 벤치였다.[8][9]
- 2016년 ESPN 패널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좌완 투수로 선정됐다. #
- 2022년 스포팅 뉴스 선정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운동 선수로 4인에 포함됐다. #
4. 명예의 전당 입성
1972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 대상자가 되자마자 그해 최고 득표율 86.87%로 헌액됐다. 당시 코팩스의 나이 36세 20일은 1939년 루 게릭의 36세 172일을 경신하는 새로운 최연소 기록이었다. 그리고 동년 6월 4일엔 그의 유니폼 번호 32번이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샌디 코팩스 | 78 | 151 | 227 | 46 |
HOF 입성자 평균 | 40 | 185 | 100 | 50 |
- JAWS - Starting Pitcher (88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샌디 코팩스 | 48.9 | 46.1 | 47.5 |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 73.9 | 50.3 | 62.1 |
5. 과대평가된 투수?
한편, 샌디 코팩스를 가장 과대평가된 좌투수로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통계 자료에 근거해 레프티 그로브를 과소평가된, 실제로는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였던 선수로 꼽으며, 코팩스를 '시대'와 '홈구장'이란 요소에 의해 과대평가된 선수라고 이야기한다.우선 시대에 대해 살펴볼 경우, 그가 처음 사이 영 상을 수상했던 1963년, MLB는 스트라이크 존을 확장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중후반까지 메이저 리그의 득점 빈도는 20세기 초의 데드볼 시대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었다.
그리고 코팩스가 황금의 5년을 시작한 1962년은 다저스의 새로운 홈 구장인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했던 때다. 그 시절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다. 구장 효과(Park Factor)에 따르면, 당시 다저스 투수들은 홈구장의 이점을 통해 실점을 10% 가량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10]
실제 코팩스는 다저스 투수들 중에서도 유독 홈에서 강했던 투수였는데, 전성기였던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월드 시리즈 등판을 포함해 코팩스가 기록한 9이닝당 실점[11]은 원정에선 2.81점, 홈에선 무려 1.67점이었다. 무려 40%가 감소한 셈인데, 구장과 관계없이 누리는 선수들의 홈 어드밴티지를 고려하더라도 이는 매우 큰 차이다.[12] 단, 오해할까 봐 첨언하자면 당연히 전성기 시절 코팩스는 원정 경기에서도 당대 최고의 투수였다.[13]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 할 수 있는 화려한 5년 동안 코팩스는 1.9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여기에 구장으로 인한 효과를 보정해 리그 평균(100)과 비교한 조정평균자책점(ERA+) 167을 기준 삼을 경우, 코팩스의 평균자책점은 리그 평균의 투수와 비교했을 때 40% 정도 더 실점을 억제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기록이긴 하지만 후대의 위대한 좌완 랜디 존슨은 자신의 첫 번째 사이 영 상을 차지한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코팩스의 두 배의 이르는 10년 동안 171이라는 조정평균자책점을 기록, 리그 평균의 투수에 비해 실점을 42% 가량 억제해냈다.[14]
하지만, 투수 분업화가 보다 철저해진 후대의 투수와 단순히 실점률을 비교하는 건 코팩스에 있어 불공평한 처사로 볼 수 있다. 그가 활동하던 196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빡빡한 일정 속에서 더 많은 이닝, 더 많은 투구수를 소화해야 했다. 특히, 에이스라는 이유로 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터무니 없이 느껴질만한 무리한 기용도 자주 행해지던 시대였다. 실제 코팩스는 자신의 전성기의 상당 부분을 치명적 팔꿈치 부상을 참으며 던져야 했고, 최고의 자리에서 이른 은퇴를 해야 했다.[15]
또한, 코팩스의 경력이 높게 평가받는 것은 월드 시리즈에서 맹활약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월드 시리즈 MVP 2회에 빛나는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설적인 우투수 밥 깁슨과 함께 큰 경기에서 가장 강했던 선발투수로 꼽힌다. 많은 선수들이 부담감과 추위에 압도돼 실력 발휘를 못 하곤 하는 포스트시즌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인 것. 코팩스는 월드 시리즈에 8차례, 선발론 7차례 나와 0.9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세 차례 우승에 기여했다.[16] 훗날 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쇼가 단조로운 3피치 투구 패턴 때문에 포스트시즌에서 매번 털린다고 평가받는데, 코팩스는 더 단조로운 2피치 투수였지만 구위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상대 타자들이 무슨 공을 던지는지 알고도 치지 못했다.
이런저런 내용을 종합해보면 결국, 코팩스가 단순한 기록 이상의 가치, 즉 '스타성'을 지닌 선수였기에 이런 상반된 평가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인내 끝에 찬란히 만개한 전성기, 화려한 수상 경력과 프랜차이즈의 영광, 노히터와 퍼펙트 게임, 월드 시리즈에서의 활약와 우승, 부상 투혼, 정상에서의 미련 없는 은퇴 등 마치 영웅의 서사시 같았던 그의 경력을 대중들은 특별한 것으로 보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이런 요소들은 통계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선 고려할 수도 없고 딱히 고려하고 싶지도 않은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포츠 자체가 감성을 파는 오락의 일종이기 때문에, 주류 청중의 평가가 항상 객관적 통계와 일치하진 않는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는 놀란 라이언이 존재한다.[17][18][19][20]
보통 샌디 코팩스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 수준의 몇 년 단위 전성기를 자랑한 투수는 현대 야구 최고의 투수들로 평가되는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투수 | 시즌 | 승리 | 승률 | ERA | 탈삼진 | 이닝 | 블랙잉크 | 수상 |
샌디 코팩스 | 1963-1966 | 97 | 0.782 | 1.86 | 1228 | 1192.2 | 66 | AS×4, CYA×3, MLB MVP×1, WSMVP×2 |
그렉 매덕스 | 1992-1995 | 75 | 0.721 | 1.98 | 733 | 946.2 | 53 | AS×4, CYA×4 |
페드로 마르티네즈 | 1997-2000 | 77 | 0.755 | 2.16 | 1153 | 905.1 | 36 | AS×4, CYA×3 |
랜디 존슨 | 1999-2002 | 81 | 0.750 | 2.48 | 1417 | 1030.0 | 55 | AS×4, CYA×4, WSMVP×1 |
투수 | 시즌 | fWAR | RA9-WAR | bWAR | WPA | cWPA[22] |
샌디 코팩스 | 1963-1966 | 34.3 | 42.4 | 36.5 | 31.1 | 1.715 |
그렉 매덕스 | 1992-1995 | 29.9 | 39.3 | 33.2 | 25.6 | 0.339 |
페드로 마르티네즈 | 1997-2000 | 35.3 | 40.1 | 37.6 | 26.1 | 0.357 |
랜디 존슨 | 1999-2002 | 37.6 | 38.5 | 38.3 | 25.2 | 0.550 |
- 참고할 점은, 매덕스의 4시즌 중에는 파업으로 인한 단축시즌이 2시즌(1994 ~ 1995) 끼어 있었고[23] 마르티네즈와 존슨의 4년은 메이저리그 전체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타고투저[24]의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에 보인 임팩트는 이들 중 누구도 쿠팩스를 따라가지 못한다.[25]
6. 플레이 스타일
샌디 코팩스의 커브볼과 패스트볼. |
"내 평생 팔에 난 털이 곤두설 정도의 경험이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봤을 때였고, 두 번째는 코팩스의 패스트볼을 봤을 때였다."
―알 캠퍼니스(Al Campanis), 다저스의 트라이아웃에서 코팩스의 투구를 타석에서 직접 본 날을 회상하면서.
―알 캠퍼니스(Al Campanis), 다저스의 트라이아웃에서 코팩스의 투구를 타석에서 직접 본 날을 회상하면서.
"코팩스에게 안타를 빼앗는다는 것은 마치 포크로 커피를 마시려는 것과 같다."
― 윌리 스타젤
하이 키킹, 긴 스트라이드, 확연한
오버핸드 스로, 긴 팔을 이용한 팔 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패스트볼과 낙차 큰
커브볼의 조합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위에 있는 흑백 움짤이 그의 구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코팩스의 커브볼은 지금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커브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였지만 선수 경력이 길어지며
체인지업과
포크볼을 가끔씩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윌리 스타젤
"제가 코팩스를 타석에서 처음 만난 건 22살 때였죠. 그때부터 57번 만나서 겨우 열 번밖에 못 쳤는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타율이 고작 0.175이죠. 엄청난 패스트볼에다가, 위에서 아래로 갑자기 뚝 떨어지는 커브볼을 던지는데... 그걸 어떻게 칩니까? 그는 제가 메이저에서 데뷔한 해부터 3년 동안 1,000번이나 삼진을 잡았죠. 1965년엔 382삼진을 잡았다고요, 382삼진! 신시내티 대학생 시절 농구선수를 했을 정도로 손가락이 엄청나게 길었는데 커브볼 그립 잡는 데 용이했죠. 그를 타석에서 만나지 않은 걸 기쁘게 생각하세요."
― 피트 로즈 #
― 피트 로즈 #
코팩스는 폼의 변화를 통해 무슨 공을 던질지 예측하기 쉬운 투수였다.[27] 이런 경향은 왼쪽 팔꿈치 통증이 심해져감에 따라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눈썰미가 있다 싶은 타자들은 대부분 코팩스가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공을 칠 수 없었다고 한다.
강한 자존심과 마초적인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에이스 타입의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례적일 정도로 유순하고 친절한 성격이었다고. 동료인 돈 드라이스데일이 헤드 헌터로 타자들에게 악명 높았던 반면 코팩스는 보복구조차 던지기 꺼렸다. 실제로 코팩스는 12년 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며 몸에 맞는 공을 던진 적이 18번밖에 없고, 이닝당 비율로 따지면 같은 시기에 1,00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들 중 세 번째로 적은 빈도다.[28]
코팩스는 키(188cm)도 컸지만 그보다도 손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두툼했다. 자신의 위업을 계승한 다저스의 193cm 좌완 투수와 손을 맞댄 사진 #을 보면 손 크기의 위압감을 느낄 수 있다. 굵고 긴 손가락으로 야구공을 골프공처럼 쉽게 던지고 남들보다 월등히 더 많은 회전을 걸 수 있었다. 코팩스의 위력적인 패스트볼과 커브볼은 오직 그의 손끝에서만 던져질 수 있는 공이었던 것이다. [인사이드MLB] 칼럼
7. 여담
- 마이너리그를 통한 선수 육성 시스템이 정착된 라이브볼 시대 이후로는 정말 드문, 커리어를 통틀어 마이너리그에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선수다. 1950년대 보너스 룰 제도로 인해 커리어의 시작을 메이저리그에서 한 선수는 60명 정도 있지만 메이저리그 의무 등록 기간(2시즌)이 끝나고도 마이너리그에 한 번도 안 가고 커리어를 마친 경우는 아주 드물다. 보너스 룰 시대에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온 선수 중 커리어 전체를 메이저 리그에서만 보낸 선수는 단 3명 이다. 그 3명은 샌디 코팩스와 알 칼라인과 에디 개델. 근데 에디 개델은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매우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지라 실질적으로는 알 칼라인과 함께 당대 야구선수 중 단 2명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
투수 출신임을 감안해도 타격 성적이 매우 부진했다. 주전으로 활동한 시기도 명성에 비해 길지 못했고, 통산 타격 bWAR이 무려 -4.2. 마찬가지로 시원찮은 타격으로 지적받지만, 선수 활동은 2배 가까이 오래 한
게일로드 페리의 -2.7보다 훨씬 낮다.
뿐만 아니라 12연타석 삼진으로 MLB 최다 연속 타석 삼진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55년 7월 6일 부터 9월 15일까지 12타석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고 다음 시즌 6월 3일이 되어서야 첫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내 기록이 끝이 났다. #
그의 고교 시절 동창 曰: 졸업반 시즌에 안타를 한 개 쳤었나? 공이 아니라 소가 지나가도 치지 못했을 거야.[29][30][31] - 1969년엔 영화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Richard Widmark)의 딸 앤 위드마크(Anne Widmark)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후 1982년에 이혼했다. 1985년에 킴벌리 프랜시스(Kimberly Francis)와 재혼했지만 1998년에 또 한번 이혼했다.
- 뉴욕 메츠의 前 구단주 프레드 윌폰과는 고등학교 시절 팀메이트였다. 둘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막역지우다.
- 프레드 윌폰의 소개로, 버나드 메이도프의 대규모 폰지 사기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던 바 있다. 하지만 코팩스가 투자했던 돈은 미국 국세청의 피해자 구제안에 의해 상당 부분 돌려받을 수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진 않았다고 한다.
- 코팩스는 최초의 5인, 밥 펠러, 재키 로빈슨,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에 이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입성한 10번째 선수이다.[32] 최초의 5인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전설들이며, 나머지 4명 또한 명전 기준으로도 뛰어났던 퍼포먼스에 더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최후의 4할 타자, HOF 모니터 역대 1위와 같은 굵직한 상징성까지 겸비한 선수들이다. 당대의 야구 기자와 팬들 대다수가 코팩스를 저런 전설적인 선수들과 동급으로 놓았다는 점을 봐도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입담 좋기로 유명한 요기 베라와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요기 베라의 양키스와 코팩스의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그해 코팩스의 성적은 25승 5패. 이를 들은 요기 베라는 "저런 허접한 놈에게 25승이나 헌납하다니, 내셔널리그 애들은 뭐 하냐?"라고 핀잔을 주었다가, 샌디 코팩스의 활약으로 다저스가 우승을 거머쥔다. 이를 지켜본 베라는 "25승을 어떻게 따냈는지 잘 알았다. 그런데 5패는 어떻게 당한 거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당시 다저스 타자 모리 윌슨은 "우리가 못 쳐서 그랬다"라고 대답했다고... 정작 요기 베라는 코팩스를 상대하지 못했는데, 이때 그는 38세라서 벤치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의 월드 시리즈 마지막 타석은 3차전 9회 초 대타로 나와 돈 드라이스데일을 상대로 기록한 우익수 뜬공이다.
-
1965년 월드 시리즈 7차전 승리 후 라커룸에서 인터뷰:
빈 스컬리: 다저스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가져다 준 친구입니다. 샌디, 5차전에서 7 대 0 완봉승을 거두었을 때 (너무 지쳐서) "100살이 된 것 같다"라고 했죠, 지금은 어떤가요?
- 미남으로 유명했다. 고령인 지금의 나이에도 미노년이라는 평가를 받는 중. 게다가 동안이다.
- 토미 라소다 감독과 함께 생존 중인 다저스의 올드 인사들 중 핵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둘다 2019 월드시리즈 직관했지만 결과는 또 준우승... 그러나 2020년 마침내 우승해서 이제 각각 90과 80을 넘은 라소다 감독과 코팩스가 죽기 전에 드디어 다저스의 우승을 봤다! 그리고 라소다 감독이 사망하며 다저스의 올드 인사들 중에서도 최고참이 되었다. 현재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현존 최고령 투수이다.
- 5툴 플레이어를 중요시하는 듯하다. 윌리 메이스와 베이브 루스를 비교할 때 윌리 메이스의 수비력과 주루 능력을 높게 사서 윌리 메이스를 더 고평가했다.[34] 사실 윌리 메이스와 샌디 코팩스는 동시대 선수로, 코팩스는 베이브 루스가 선수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은 반면 메이스의 전성기를 그대로 두 눈으로 본 것을 넘어서 직접 상대해본 선수이기에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샌디 코팩스의 발언을 보면 5툴 플레이어를 중시하는 것이 맞기는 한 듯.
- 2018년 10월 4일 다저스와 애틀랜타의 디비전 1차전에 모습을 보였다. 이날 경기는 류현진이 선발이었으며 류현진이 7이닝 4피안타 8k 무실점을 기록하고 더그아웃으로 내려갈때 류현진에게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잡혔다.
8. 자료 출처
Sandy Koufax - MLB.comSandy Koufax - Baseball Reference
Sandy Koufax - Wikipedia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962년 6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밥 퍼키 ( 신시내티 레즈) |
→ |
샌디 코팩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프랭크 하워드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AL]
[NL]
[3]
리치 애시번,
로드 카넬,
펠릭스 만티야
[4]
밥 아스프로몬테,
짐 캠벨,
터크 패럴
[5]
레오 카데나스,
자니 에드워즈,
짐 말로니
[6]
1963, 1965, 1966. 이 3번은 모두 만장일치였다.
[7]
K/9 9.27 BB/9 3.16, K/BB 2.93
[8]
해당 시점 생존해 있던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
#
[9]
이 중 행크 애런은 2021년, 윌리 메이스는 2024년에 사망했다. 애런과 윌리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은 2024년 현재 살아 있다.
[10]
반면 그 이전에 사용하던 에벳츠 필드(브루클린 시절), LA 콜리세움은 투수에게 매우 불리한 구장이었다. 때문에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의하면, 커리어 전체가 기준이라면 코팩스는 구장으로 인해 크게 득을 본 게 아니라고 한다. 2% 정도 실점을 더 억제할 수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11]
평균자책점이 아니다. 평균자책점은 말 그대로 9이닝당 자책점이며 여기는 비자책점도 포함하는 것.
[12]
다저스의 높은 마운드와 코팩스의 투구 스타일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13]
5년 연속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한 기간 동안 원정 경기에서의 평균자책점과 승률 모두 같은 기간 50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들 중 1위다.
[14]
페드로 마르티네스 역시 동 기간대에 173을 기록했다.
[15]
우승엔 실패했지만, 정규 시즌 성적만 놓고 본다면 은퇴 시즌이야말로 코팩스의 선수 시절 최고의 해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해당 시즌에 개인 최다 승(27)과 개인 최저 평균자책점(1.73)을 기록했다.
[16]
포스트시즌 등판 기록이 없는 데뷔 시즌까지 포함하여 우승 경력은 4회다.
[17]
라이언과 코팩스는 1999년 올센추리 팀 선정 팬 투표에서 투수 부문 1, 2위를 차지했다. 그 밖에도 Ranker.com 등에서 보이는 인터넷 팬 폴을 보면 둘의 대중적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18]
2016년 ESPN에선 샌디 코팩스를 역대 16위에 선정했는데, 독자들이 다시 정렬한 TOP20에선 10위 안에 들고 있다.
#
[19]
다만 흥미롭게도, 코팩스와 라이언은 약점과 강점이 서로 정반대다. 사이 영 상이 생긴 이래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드는 임팩트를 가졌으나 누적의 부족이 발목을 잡는 코팩스와는 다르게, 라이언은 누적 성적은 라이브볼 시대의 투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난히 들지만 사이 영 상이 없고 세이버메트릭스 상으로도 정점에 있던 시즌이 없었다. 라이브볼 시대에 코팩스 이상의 임팩트를 보여주고 라이언 이상의 누적을 쌓은 건
그렉 매덕스와
랜디 존슨뿐이다.
[20]
사실 성적만 놓고 보면
로저 클레멘스 또한 코팩스 이상의 임팩트와 라이언 이상의 누적을 쌓은 선수지만, 그는 약물이라는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가 있다.
[21]
깁슨은 누적 역시 코팩스를 크게 상회하나 임팩트로 유명한 시즌은 68 시즌이다.
[22]
포스트시즌 포함
[23]
하필이면 그 2시즌이 가장 찬란한 기록을 남긴 시즌이다.
[24]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등의 홈런왕으로 대표되는
약물의 시대
[25]
2001년
애리조나 우승 당시 랜디 존슨이 포스트시즌에서 큰 기여를 한 바가 있긴 하지만 해당 1년을 제외하면 존슨은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적이 별로 없다.
[26]
실제로는 잘 쳤다. 메이스는 코팩스를 상대로 122타석 .278/.426/.536으로 OPS가 무려 .962나 됐다. 25볼넷/20삼진으로 삼진보다 볼넷이 많았고 27안타 중에 14개가 장타였다. 물론 55년부터 잡건 62년부터 잡건 해당 기간 3할이 훌쩍 넘는 타율에 6할 정도의 장타율을 기록한 것치고는 상대적으로 못 친 편인 것도 맞긴 하다.
[27]
비교적 최근에는
랜디 존슨이 이와 같은 경우였다.
[28]
그렇다고 전혀 승부욕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전설적인 대도
루 브록이 신인 시절 겁 없이 기습 번트로 출루해 수차례 도루를 기록하자 등에 야구공 찜질을 놔준 적이 있었다.
[29]
Sandy Koufax - Lefty's Legacy, Jane Leavy 저
[30]
다저스의 좌-우완 에이스로 활약한 팀 동료 드라이스데일이 당대 최고의 타격 능력을 가진 투수였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 드라이스데일은 타석에서 통산 29홈런 113타점 WAR 6.3을 기록했다.
[31]
그런데 코팩스에게는 선발투수로 등판한 경기에 끝내기 안타를 쳤다는 독특한 기록도 있다. Whit Wyatt과 함께 다저스 선수로서는 둘만이 달성한 기록.
#
[32]
루 게릭을 첫 투표 입성으로 칠 경우 11번째.
[33]
Vin의 애칭.
[34]
보통 베이브 루스는 라이브볼 시대를 개막시킨 상징성과 투수 시절의 대활약을, 윌리 메이스는 엄청난 다재다능함을 고평가받아 두 명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논쟁에 끼어든다. 보통은 베이브 루스가 압도적 우세이지만, 코팩스처럼 메이스를 더 높게 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