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은퇴한 축구 선수에 대한 내용은
그라치아노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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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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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 |||||||||||||||||||||||||||||||||||||||||
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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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1963 · 19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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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1958 · 1959 ·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9 · 1973 | |||||||||||||||||||||||||||||||||||||||||
1958 FIFA 월드컵 실버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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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신인상 195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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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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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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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
펠레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1958 | 1962 | 1970 |
펠레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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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코스모스 영구결번 | ||||||||||||||||||||||||
No.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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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7월 11일 브라질의 민영 방송사 SBT가 BBC의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 100명’을 선정했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시쿠 샤비에르 | 아우베르투 산투스뒤몽 |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 | 제툴리우 바르가스 | 주셀리누 쿠비체크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일톤 세나 | 오스카 니에메예르 | 페르난두 카르도주 | 펠레 | 치라뎅치스 | |||||
11위~100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룰라 다시우바 | 두우시 자매 | 에지르 마세두 | 시쿠 아니지우 | 호나우두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데르시 곤사우베스 | 지우다 아른스 | 호베르투 카를루스 | 주제 알렝카르 | 네이마르 주니오르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에이키 바치스타 | 후이 바르보자 | 프레이 가우방 | 마누에우 자싱투 코엘류 | 오스와우두 크루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실라스 말라파이아 | 페드루 2세 | 치쿠 멘지스 | 루이스 곤자가 | 헤나투 후수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헤르베르트 지소자 | 파드리 시세루 | 지우마 호세프 | 탄크레두 네베스 | 루시아누 후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바우데미르 산치아구 | 에우데르 카마라 | 헤나투 아라강 | 호드리구 파루 | 슈샤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마샤두 지 아시스 | 루앙 산타나 | 이베치 상갈루 | 엘리스 헤지나 | 마우아의 자작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우 세이샤스 | 레오네우 브리조우라 | 치리리카 | 구구 리베라투 | 호제리우 세니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주제 지파이바 네투 | 카를루스 드루몽 지안드라지 | 줌비 | R. R. 소아리스 | 파울루 프레이리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이비 카마르구 | 몬테이루 로바투 | 호베르투 마리뉴 | 마르쿠스 | 마르셀루 로시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지쿠 | 아마시우 마자로피 | 데데 | 울리시스 기마랑이스 | 헤이나우두 지아니키니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카를루스 샤가스 | 조나스 아비비 | 카시아스 공작 | 안토니우 에르미리우 지모라이스 | 칸지두 혼동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루아 블랑쿠 | 미셰우 텔로 | 가린샤 | 람피앙 | 클라우지아 레이치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치스 | 마르쿠스 폰치스 | 페르난두 콜로르 | 주제 세하 | 소크라치스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주제 루이스 다테나 | 호나우지뉴 | 조엘마 | 치쿠 부아르키 | 샤크리냐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아마두 바치스타 | 윌리암 보나르 | 카주자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앤더슨 실바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호베르투 랑데우 지모라 | 호마리우 | 조르지 아마두 | 호나우지 골리아스 | 이타마르 프랑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호베르투 주스투스 | 아나 파울라 발라당 | 바이타우 브라질 | 조 소아리스 | 마리아 다페냐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FIFA 월드컵 역대 득점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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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수 | 선수명 (국적) |
16 | 미로슬라프 클로제 (독일) |
15 | 호나우두 (브라질) |
14 | 게르트 뮐러 (독일) |
13 |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 쥐스트 퐁텐 (프랑스) |
12 |
킬리안 음바페 (프랑스) 펠레 (브라질) |
11 |
위르겐 클린스만 (독일) 산도르 코츠시스 (헝가리) |
10 |
토마스 뮐러 (독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아르헨티나) 게리 리네커 (잉글랜드) 헬무트 란 (독일) 테오필로 쿠비야스 (페루) 그제고시 라토 (폴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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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브라질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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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 이름 |
펠레 Pel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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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3][4] Edson Arantes do Nascimento |
||||
출생 | 1940년 10월 23일[5] | ||||
브라질 합중국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이스[6] (現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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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2년 12월 29일[7] (향년 82세) | ||||
브라질 상파울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스라엘 병원 | |||||
묘소 | 브라질 상파울루 산투스 네크로폴레 에쿠멘시아 공원 (예정) | ||||
국적 |
[[브라질| ]] |
||||
신체 | 173cm[8] | ||||
주발 | 오른발 (양발)[9] | ||||
등번호 | 10번[10] | ||||
포지션 | 공격수[11], 공격형 미드필더[12] | ||||
소속 |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
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
|||
행정 | 뉴욕 코스모스 (2010~2022 / 명예 회장) | ||||
국가대표 | 92경기 77골[13] ( 브라질 / 1957~1971) | ||||
통산 득점 | 757골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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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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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colcolor=#000> 부모 |
아버지 돈지뉴[14] 어머니 셀레스치 아란치스[15] |
|||
여동생 | 마리아 루시아 나시멘투[16] | ||||
조카 | 자이르 아란치스 두나시멘투[17] | ||||
배우자 |
로즈메리 촐비(1966~1982) 아시리아 나시멘투(1994~2008) 마르시아 아오키(2016~)[18] |
||||
자녀 |
장녀 산드라 마차도(1964년~2006년)[19] 차녀 플라비아(1968년생)[20] 삼녀 켈리 크리스티나(1967년생)[21] 장남 에디뉴(1970년생)[22] 사녀 제니퍼 나시멘투(1978년생)[23] 차남 조슈아 나시멘투(1996년생)[24] 오녀 셀레스치 나시멘투(1996년생)[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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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 | ||||
후원사 | 푸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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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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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 펠레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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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역사상 FIFA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로, IOC가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했다.
'축구 황제'(The King of Football)[26]라는 칭호가 붙은 선수로 브라질 정부에서 펠레의 선수 생활 당시에 유럽 구단의 펠레 영입을 막기 위해 그를 국외 반출 불가의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펠레'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별명이다. 브라질 흑인 혈통의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도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고, 한참 후인 2010년 10월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펠레 본인이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적이라는 뜻이고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어린 시절의 펠레는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 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대기 시작했고, 펠레는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이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당시엔 유명인 혹은 위인의 이름을 자식의 이름에 넣는 경우가 있었고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해 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이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던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툰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펠레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이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이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이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브라질의 흔한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보잘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더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더로 축구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헤더 골 기록인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 팀과의 경기 도중 강한 태클로 무릎이 부서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럼에도 펠레의 아버지답게 기어코 재활에 성공했고 시청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펠레의 가족은 바우루로 이사하였고, 펠레도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이때 펠레는 담배에 손대며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직접 담배 값까지 주며 "담배를 피고 싶다면 돈도 줄테니 담배를 사서 피워라. 대신 그만큼 몸은 빨리 망가질테니 니가 원하는 축구도 그만큼 빨리 끝날 것이다." 라는 말에 담배값을 돌려드리며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으며, 파일럿을 비롯한 여러 장래희망을 갖기도 했고, 가끔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약간 소심할 뿐인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 돈지뉴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를 펠레에게 전해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다.
펠레가 10살이 되던 해에,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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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루 AC 유소년 팀 계약을 맺는 펠레 |
그리고 펠레는 바우루 AC의 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주의 떠오르는 강호, 산투스 FC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하던 팀이었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이나 무단 이탈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 펠레는 유소년 팀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페널티 킥 실축 사건 때 사부는 대뜸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 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맞다. 그런 식으로 페널티 킥 날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라고 말했고,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롤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 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내가 다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까 풀 죽을 필요 없다."라고 말하며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래주었다. 사부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많이 했을 뿐이지 매우 지혜롭고 설득도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부의 진심어린 설득 덕분에 축구 황제 펠레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펠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경력
2.2.2. 국가대표 경력
2.3. 은퇴 이후
펠레는 축구 선수 은퇴 이후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축구계와 대립했다. 이후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질 축구계를 정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시도하는 등 축구 협회와 클럽들의 회계를 투명화하려 노력했으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을 썼다. 관련 네이버캐스트 그러나 여기에 대해선 반박의 여지가 있다. 펠레가 만든 이른바 '펠레법'이 오히려 브라질 리그를 망친 원흉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2021년 12월 기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역대 최다 득점자(1283골)" 문구가 있는데 이는 기네스 등재 기록이지만 친선경기 득점 등이 포함된 비공식적 기록이다.
2.3.1. 투병
2015년에는 노환이 찾아왔고, 각종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 때문에 우울장애가 찾아왔다. # 지금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2020년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폐와 간에도 종양이 발견되어 항암 치료 중이다. 2022년 들어서 요로감염으로 입원했다.
2022년 12월 3일, 브라질 언론사 FOLHA에선 펠레는 더 이상 항암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며 고통을 줄이는 것에 집중하는 임종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해졌으나 # 후에 가족이 일반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
80세를 넘은 고령임을 고려한다면 그의 생애가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 확실시되기에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치르는 중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겐 월드컵 3회 우승의 전설을 위한 우승 동기부여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대선수와 작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슬퍼하고 있다. 킬리안 음바페 역시 트위터에 응원의 글을 남겼다. 이에 대해 본인은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에너지로 가득 찰 수 있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난 카타르 월드컵 브라질의 경기도 볼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라며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피력했다. #
카타르 월드컵 16강 한국-브라질전에서 브라질이 4:1로 압승을 거두고 펠레를 위한 현수막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결국 브라질이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연장전과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면서 펠레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지켜본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이 월드컵 8강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경기 후 인스타그램에 네이마르 주니오르를 격려하는 글을 남겼다. #
이후, 8강에서 탈락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인스타그램에서 격려하는 댓글을 남겼다.
2022년 12월 19일,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 리오넬 메시의 월드컵 우승을 축하하였다. # 이후 이는 펠레 자신이 생전에 한 마지막 인스타그램 활동이 되었다.
2022년 12월 24일, 가족들이 병원으로 급히 이동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 현지 언론들은 가족들이 펠레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족들이 공개한 영상에서 펠레는 전형적인 임종 단계 환자들의 증상을 보여주었는데, 스페인의 '마르카'는 이 영상에 대해 "지금 펠레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영상이다. 우리는 펠레가 암과 싸우는 마지막 순간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에서 펠레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복용하고 있는 약의 영향인지, 마취제의 영향인지 알 수 없다. 가족들은 펠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며 펠레가 암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에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2022년 12월 27일, 스페인 스포츠 매체 메디오 티엠포는 산투스의 홈구장에 장례식을 위한 구조물이 들어섰다고 보도했다. #
2.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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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 amor e amor, para sempre.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영원히.
펠레의 유언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영원히.
펠레의 유언
결국 2년 간의 투병 끝에 한국 시각 2022년 12월 30일 오전 3시 27분, 현지 시간으로 2022년 12월 29일 오후 3시 27분에 그가 치료받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스라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2세. # # 2023년 새해를 고작 3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펠레의 건강 상태에 관한 말들은 이미 2015년부터 나왔다. 노환과 각종 수술의 후유증으로 몸이 매우 좋지 않았고, 2020년에는 대장암 진단도 받았다. 이후 통원치료를 통해 항암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으나, 2021년 11월 심부전증과 전신부종, 정신착란 증세 등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재입원하며 치료를 받았다. 이후 건강이 다소 회복되는 듯했으나, 2022 카타르 월드컵 이후 항암치료에 반응이 없으며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펠레가 기적적으로 다시 회복되기를 바랐으나, 이전부터 쌓여온 수술 등 여러 가지 후유증과 82세라는 고령까지 겹치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또다른 세계 축구의 전설 중 하나였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사망한 지 2년 만에 펠레마저 그를 따라가면서 많은 세계 축구팬들과 선수들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펠레의 데뷔팀이자 펠레의 전성기를 함께한 산투스 FC는 공식 계정을 통해 펠레의 추모글과 영상을 올렸다. # 뉴욕 코스모스도 추모글을 올렸다. # 레알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등 빅클럽들도 펠레의 죽음을 애도했다.
펠레 사망 직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의 전설 리오넬 메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Descansa en paz (평안히 쉬십시오), Pele"란 글귀와 함께 고인을 추모했다. # 또한 준우승을 차지한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The king of football has left us but his legacy will never be forgotten. RIP KING (축구의 왕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축구의 왕에게 명복을 빕니다.)"이라는 문장과 함께 고인을 추모하였다. 그 외에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엘링 홀란드, 네이마르 레반도프스키 웨인 루니 등 많은 축구계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FIFA에서도 공식 SNS를 통해 고인의 별명 'King of Football'을 인용해 그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했다.
브라질 정부는 펠레의 타계 이후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지정하여 축구 황제의 마지막 길을 추모할 예정이며, 그가 전성기 동안 머물렀고 동시에 일생을 마무리한 곳인 상파울루는 7일의 애도 기간을 지정했다. 장지는 산토스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 형태를 띈 공원묘지 메모리얼 네크로폴레 에쿠멘시아 공원(Memorial Necrópole Ecumênica) 9층. #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동묘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이기도 한다. 19년 전 펠레는 묘지 구매 사실을 공개하며 도심 한복판에 있는 수직 묘지를 택한 이유로 "묘처럼 보이지 않았다"며 "영적인 평화와 평온을 준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고 1층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진 포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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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의 펠레 헌정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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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록
3.1. 대회 기록
- 산투스 FC (1956~1974)
- 타사 브라지우: 1961, 1962, 1963, 1964, 1965,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27]: 1968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59, 1963, 1964,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컵: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968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58, 1962, 1970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959
3.2. 개인 수상
- FIFA 발롱도르 명예상: 2013
- FIFA 월드컵 실버슈: 1958[참고][29]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58[3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 2000
- FIFA 공로장: 1984, 2014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95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959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3
- 타사 브라지우 득점왕: 1961, 1963, 196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1965
- 인터컨티넨탈컵 득점왕: 1962, 1963
- NASL 올스타팀: 1975, 1976, 1977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FWA 공로상: 2018
- 볼라 지 프라타: 197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타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31]: 1999
- 프랑스 풋볼 FIFA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선수: 1994
- 프랑스 풋볼 세기의 선수: 1999[32]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 BBC 올해의 해외 스포츠 스타: 1970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평생 공로상: 2005
- 로이터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OC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유네스코 스포츠 분야 친선직: 1994
- IFFHS 20세기의 선수: 1999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브라질 드림팀: 2021
- 아스 역대 베스트 XI: 2021[33]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3.3. 수훈
3.4. 개인 기록
- 한 해 최다 득점: 1959년 127골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 3회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득점 (1958, 17세 23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멀티골 (1958, 17세 244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해트트릭 (1958, 17세 244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우승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신인상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도움: 8도움[비공인][37][38]
- FIFA 월드컵 단일 대회 최다 도움: 6도움 (1970)
- FIFA 월드컵 단일 결승전 최다 도움: 2도움 (1970)
- FIFA 월드컵 단일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3개 (1958년: 2골 1도움, 1970년: 1골 2도움)[39]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도움: 3도움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6개 (3골 3도움)[4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토너먼트 최다 도움: 4도움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출전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득점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도움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2회 우승 (1962, 22세)
- FIFA 월드컵 통산 한 경기 득점+도움 기록한 최연소 선수 (1958년 월드컵 결승전,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프리킥 골이자 유이한 두 대회 연속 프리킥 골 (1966, 1970)[41][42]
-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통산 최연소 득점왕 (1959, 18세 6개월, 8골)
-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통산 최연소 MVP 수상 (1959, 18세 6개월)
- 인터컨티넨탈컵 통산 최다 득점: 7골 (1962, 1963)
3.5. 통산 기록
3.5.1. 클럽
펠레의 골 기록은 특정 대회를 포함시키느냐 안시키느냐에 따라 다르다.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브라질 주별 대항전[43] 등을 공식 대회로 보냐 마냐에 따라 골 기록이 달라지곤 한다.* x표는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경우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주립 리그 |
히우 상파울루 컵 [44] |
전국 대회 [45]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인터컨티넨탈컵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56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0 | 0 | x | x | x | x | x | x | x | x | 0 |
0 [46] |
1957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9 | 36[47] | 9 | 5 | x | x | x | x | x | x | 38 | 41 |
1958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38 | 58 | 8 | 8 | x | x | x | x | x | x | 46 | 66 |
1959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32 | 45 | 7 | 6 | 4 | 2 | x | x | x | x | 43 | 53 |
1960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30 | 33 | 3 | 0 | 0 | 0 | 0 |
0 [48] |
0 | 0 | 33 | 33 |
1961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6 | 47 | 7 | 8 | 5 |
9 [49] |
0 | 0 | 0 | 0 | 38 | 64 |
1962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6 | 37 | 0 | 0 | 5 |
3 [50] |
4 | 4 | 2 | 5 | 37 | 49 |
1963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 | 22 | 8 | 14 | 4 |
5 [51] |
4 | 5 | 1 | 2 | 36 | 48 |
1964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1 | 34 | 4 | 3 | 6 | 7 | 0 | 0 | 0 | 0 | 31 | 44 |
1965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30 | 49 | 7 | 5 | 4 | 2 | 7 | 8 | 0 | 0 | 48 | 64 |
1966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4 | 13 | 0 | 0 | 5 | 2 | x |
x [52] |
0 | 0 | 19 | 15 |
1967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8 | 17 | x |
x [53] |
14 |
9 [54] |
0 | 0 | 0 | 0 | 32 | 26 |
1968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1 | 17 | x | x | 18 |
12 [55] |
0 | 0 | 0 |
0 [56] |
43 | 29 |
1969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5 | 26 | x | x | 12 |
12 [57] |
x |
x [58] |
0 |
0 [59] |
40 | 40 |
1970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5 | 7 | x | x | 13 |
4 [60] |
x |
x [61] |
0 | 0 | 28 | 11 |
1971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 | 8 | x | x | 21 |
1 [62] |
0 | 0 | 0 | 0 | 40 | 9 |
1972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20 | 9 | x | x | 16 | 5 | 0 | 0 | 0 | 0 | 36 | 14 |
1973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 | 11 | x | x | 30 | 19 | 0 | 0 | 0 | 0 | 49 | 30 |
1974 |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0 | 1 | x | x | 17 | 9 | 0 | 0 | 0 | 0 | 27 | 10 |
19시즌 | 합계 | 412 | 470 | 53 | 49 |
174 [63] |
101 | 15 | 17 | 3 | 7 | 657 | 644 | |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포스트 시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75 | 뉴욕 코스모스 | 북미 축구 리그 | 9 | 5 | x | x | 9 | 5 | ||||||
1976 | 뉴욕 코스모스 | 북미 축구 리그 | 22 | 13 | 2 | 2 | 24 | 15 | ||||||
1977 | 뉴욕 코스모스 | 북미 축구 리그 | 25 | 13 | 6 | 4 | 31 | 17 | ||||||
3시즌 | 합계 | 56 | 31 | 8 | 6 | 64 |
37 [64] |
|||||||
22시즌 | 클럽 커리어 통산 | - |
721 [65] |
681 [66] |
3.5.2. 국가대표
<rowcolor=#373a3c> 소속 대표팀 | 연도 | 경기 | 득점 |
브라질 | 1957 | 2 | 2 |
1958 | 7 | 9 | |
1959 | 9 | 11 | |
1960 | 6 | 2 | |
1961 | 0 | 0 | |
1962 | 8 | 8 | |
1963 | 7 | 7 | |
1964 | 3 | 2 | |
1965 | 8 | 9 | |
1966 | 9 | 5 | |
1967 | 0 | 0 | |
1968 |
5 [67] |
4 | |
1969 | 9 | 7 | |
1970 | 15 | 8 | |
1971 | 2 | 1 | |
통산 | 91 | 77 |
4. 플레이 스타일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모든 능력이 정점에 가까운 완성형 선수다. 최근 들어 멀티 플레이어나 육각형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약점이 없다'는 표현이 남용되고 있지만, 펠레는 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인사이드 포워드의 표본이라 불릴만한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패싱 능력을 활용하여 많은 기회를 창출하고 골 결정력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해결사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중 경합 능력도 당대 최고 수준인데다 수비 가담까지 했다는 점에서 모든 부분이 완벽했던 ' 컴플리트 포워드'라 불리기에도 제격이었다.
펠레의 높은 득점 기록 때문에 그를 전형적인 골게터로 착각하기 쉽지만, 펠레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공격형 미드필더라 칭했을 정도로 미드필더적인 성향이 있는 선수였다. 1970년 월드컵 직전에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펠레를 센터포워드로 뛰게하자, 당시 언론의 인터뷰에서 거기는 당신이 좋아하는 포지션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펠레도 이에 대해 15년을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갑자기 하라고 하면 되겠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실제로 이 링크처럼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당시 펠레의 포지션은 브라질에서 Ponta de Lança(창날)이라 불렸던 포지션이다. 이 창날 포지션은 빠르고 날렵한 드리블로 라인을 부순 뒤, 창처럼 침투해서 마무리를 짓기도 했고, 때때로 3선까지 내려와 박스 사이를 휘저으며 중원 장악을 돕기도 했다. 현재의 전술 및 포지션과 완전한 1대1 대응은 어려우나, 연관짓자면 지금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펠레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던 전문가들은 발롱도르 드림팀을 선정할 때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로 분류했다. 이에 대해 축구 매니아를 제외한 많은 축구팬들은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4.1. 드리블
드리블링에 있어서 펠레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왼발과 오른발을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런 유형의 공격수를 상대하게 되면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정말 골치가 아파진다. 공격수의 반대 발 사용을 유도하는 축구 수비의 기본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펠레는 현대 축구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넛맥,[68] 헛다리 짚기, 사포, 라 크로케타, 라보나 킥 등 각종 고난도 기술들을 모두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레벨의 테크니션이었다.
공중볼을 섬세하게 컨트롤하는 것은 펠레의 전매특허였다. 펠레는 발과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 등, 무릎 등 몸의 거의 모든 부위를 사용하여 완벽한 트래핑을 할 수 있었다. 이 트래핑 자체를 하나의 드리블 기술로 흡수하여 상대 선수를 제치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머리와 어깨로만 공을 통통 띄워 골키퍼 바로 앞까지 가져가는 묘기 축구나 다름 없는 장면도 자주 만들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길거리 축구로 실력을 단련시킨 덕에 온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공을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는 개인기의 달인이 되었다.
그는 신체적으로도 드리블에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100m를 10초 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폭발적인 순간 가속력과 민첩성, 단단한 신체와 절륜한 균형 감각, 흑인 특유의 탄력과 브라질리언 특유의 리듬감까지 모두 보유한 선수였다.
상대의 성급한 수비를 역으로 이용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더미 플레이, 노 터치 트릭을 들 수 있는데, 상대 선수의 수비 타이밍을 미리 읽고 그 타이밍을 깨버리는 플레이를 했다. 또 자신의 앞을 막아선 수비수의 발에 일부러 공을 맞힌 후, 태클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수비수로부터 재빨리 공을 빼앗아오는 기묘한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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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팀 모두를 제친 골 상황에 대한 묘사[69] |
이렇게 기술적으로도 우수했던 펠레에게 한 경기에서 두세 명의 선수들을 제치는 장면 정도는 허다하게 나왔으며, 상대 팀 전체를 제치는 어마어마한 드리블 능력도 보여줬다는 사례도 전해진다. 이러한 면모 덕분에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를 뽑을 때도 항상 이름이 거론된다. 최근의 브라질 선수 중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드리블러라고 평가받은 네이마르를 현지에서는 펠레의 재림이라고 띄워주곤 한다.
그런데 영상을 눈으로만 판단했을 때, 주 비교 대상인 마라도나와 메시보다는 투박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드리블 능력을 가졌음에도 앞의 두 선수 만큼의 많은 드리블을 시도하진 않았다. 혼자서 상대 수비를 헤집은 골들도 있지만 상대 수비를 벗길 때 연계 플레이를 자주 활용하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펠레에게 역대 최고 크랙의 모습을 기대하고 그의 볼터치 영상을 봤다가 실망하거나 저평가를 내리는 팬들도 있으며, 언론들도 드리블 능력은 마라도나, 메시가 더 뛰어났다는 평가들을 내고 있다. 그 이유는 두 선수가 펠레보다 더 정교한 드리블 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펠레 입장에서는 당시 장비와 경기장 상태가 낙후되었기 때문에 기술을 구사하기 불리한 환경에 놓여있었다. 같은 영향으로 당대의 다른 선수들도 현재의 선수들에 비하면 투박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펠레 시대의 장비 수준에 대해서는 평가의 세부 사항 문단에 후술되어 있다. 대신 왼발이 주발이었던 마라도나, 메시와는 달리 펠레는 양발을 골고루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강점이다.
외국의 축덕들이 옵타의 기준으로 드리블을 세어본 결과, 1958년 월드컵 준결승 프랑스전은 5회, 결승전 스웨덴전은 5회, # 1962년 월드컵 조별리그 멕시코전은 14회, # 1966년 월드컵 조별리그 불가리아전은 10회 #를 기록했다. 이 횟수는 마라도나가 1986년 월드컵 8강 잉글랜드전에 기록한 19회, 메시가 2014년 월드컵 16강 스위스전 120분 동안 기록한 7회와 비교해도 많이 밀리지 않는 횟수이다. 반면 1970년 월드컵에서의 총 횟수가 16회, 그 중 결승전 이탈리아전은 단 1회에 그쳤는데, # 펠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가 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당한 부상이 펠레의 신체 능력이나 도전적인 마인드를 줄였을 수 있다는 추측들도 나오고 있다.
바지가 벗겨지는 장면이 많다. 거친 파울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였으니 바짓가랑이도 많이 잡힌 모양. 상대 팀이 전술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2명 이상을 밀착 마크로 붙이는 경우도 빈번했다. 당시 전술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는 있으나 스타 플레이어로서 플레이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 중 테크니션들은 신체 보호와 파울 유도를 목적으로 다이빙을 곧 잘하는 경우가 많은데, 펠레는 최고의 테크니션이었음에도 다이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악의적인 태클에 걸려 넘어지면 주심에게 항의하거나 어필하기보다, 빨리 일어나 일단 공부터 다시 따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드리블에 언제나 자신감이 차 있었고, 늘 집념 가득한 플레이를 펼쳤다. 펠레가 파울을 얻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날리는 장면은 어느 경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라이벌 마라도나와 자주 비교되는 부분인데, 마라도나는 일명 '매춘부'라 불릴 정도로 다이빙을 굉장히 많이 시도했던 반면 펠레는 다이빙을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때문에 펠레는 견제의 대상이 되었고 수비수들이 압박해 악의적인 파울을 당하는 선수가 되었다.
4.2. 득점력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코어러 중 한 명이었다. 발로 골을 결정짓는 능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뛰어났다. 기본적으로 슛 파워 자체가 매우 강력했으며, 양발잡이라서 왼발과 오른발 모두를 사용하여 파괴력 있는 슈팅을 구사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상황에 알맞는 슈팅을 시도했고, 여차하면 칩슛을 통한 득점에도 능했다. 중거리 슛 능력도 탁월해서 어느 위치에서든 각만 나오면 위협적인 슈팅으로 골키퍼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하프라인에서도 호시탐탐 골문을 노렸다.공중에서 슈팅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뛰어났다. 펠레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공을 처리했는데, 단순 헤더는 물론 양발을 모두 사용하여 바이시클 킥, 발리 슈팅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팔을 제외한 온 몸을 사용하여 마치 기계처럼 골을 집어넣었다.
펠레는 170cm대 초반의 크지 않은 키를 가졌음에도 공중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선수였다. 일단 점프 높이부터가 남달랐는데, 펠레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바우데마르 지브리투는 펠레의 타고난 신체적 탄력을 눈여겨보았고, 오른발, 왼발, 양발 점프를 이용해 어떤 상황에서든 탄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킨 결과, 펠레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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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압도적인 점프력 |
펠레는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2번의 FIFA 월드컵에서 프리킥으로 득점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70] 1966년 월드컵에서는 가린샤와 1970년 월드컵에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와 함께 브라질의 프리킥을 도맡아 찼다. 펠레의 프리킥은 같은 시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선수들처럼 비슷하게 먼 거리에서 달려와서 발등 혹은 인프런트와 아웃프런트로 강하게 때려넣는 스타일이었다. 펠레의 프리킥 스타일을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프리킥 스타일과 비교했을 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주로 쓰는 발인 오른발 뿐만 아니라 왼발로도 프리킥을 즐겨 찼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펠레가 선수 생활 동안 넣은 프리킥 골 수는 70골이나 되며, 역대 프리킥 득점 순위에서 주니뉴에 이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4.3. 패스와 기회 창출
에우제비우처럼 동시대의 선수 중 펠레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활약했던 선수들 중에서 높은 수준의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연계 능력을 갖춘 선수들도 있었지만 펠레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는데, 정말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수준이었다.
타이밍에 맞추어 공격수의 앞 공간으로 보내주는 스루패스에 매우 능했으며, 전방에 있는 선수와의 섬세한 연계 플레이로 상대 수비진의 혼을 빼놓았다. 또 공중볼을 트래핑할 때와 비슷하게 온 몸을 사용하여 단 한 번의 간결한 볼터치를 했고, 이를 통해 즉흥적으로 찬스를 만들곤 했다. 백힐 패스는 예사였고, 호나우지뉴처럼 등으로 패스하거나 노룩패스를 하기도 했다. 펠레는 단순한 패스에 노골적인 트릭을 접목하여 사용한 선수들의 원조격이었다.
월드컵 때에도 펠레의 패스 능력은 빛났다. 그 중에서도 1970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경기 조율 능력은 단연 압권인데, 스포츠 통계 사이트 옵타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 6경기에서 28회의 기회 창출 횟수를 기록했다. 이는 제대로 기록이 집계되기 시작한 1966년 대회 이후 역대 월드컵 4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펠레는 슈팅이나 드리블을 할 때에는 양발을 비슷한 빈도로 섞어서 쓰는 선수이다. 그러나 패스할 때에는 일단 공을 잡아두고 오른발을 주로 사용하여 패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70년 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자이르지뉴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 그리고 결승전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패스할 때는 왼발보다는 오른발을 더 선호한다. 아무래도 패스는 드리블이나 슈팅에 비해 더 정교함을 요하므로 펠레 입장에서도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오른발을 자주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케빈 더 브라위너, 스티븐 제라드와 같이 강한 속도로 깔아차는 패스를 구사하지는 못했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패스를 할 때 공이 다소 통통 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애초에 잔디 상태나 관리가 고르지 못한 당시 상황에 기인한 탓이다.
4.4. 수비
펠레는 승부욕이 강했으며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과거의 축구가 현재에 비해 압박이 적었고 이에 따라 수월하게 공격 작업을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 펠레지만, 정작 펠레가 수비 입장이 되면 압박을 잘 수행했다. 공의 소유권이 넘어가면 전방 압박, 드리블 치는 상대를 끝까지 쫓아가는 모습, 팀의 문전 앞까지 내려와서 탈취하는 모습 등 보여줄 수 있는 건 모두 보여줬다. 이렇게 뺏은 공을 직접 상대 문전까지 운반하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 역습의 기점이 되어 득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펠레는 스탠딩 태클 뿐만 아니라 슬라이딩 태클도 자주 시도했다. 심지어 골키퍼를 상대로 영악한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골키퍼가 골킥을 차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뒤에서 머리를 불쑥 들이밀거나, 골키퍼가 잡은 공을 의도적으로 툭 건드렸으며 고든 뱅크스와 레이 클레멘스가 이에 당황했다.펠레는 1970년 월드컵 당시 6경기에서 9개의 태클을 기록했다. 2018년의 앙투안 그리즈만이 7경기에서 11개의 태클을 기록한 것을 볼 때 현대 선수들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다.
펠레가 퇴장 또는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진 골키퍼를 대신하여 경기 도중 골키퍼 장갑을 낀 경기는 통산 7경기나 된다. 펠레는 그 7경기 동안 단 1골만을 실점했다. 골키퍼로서의 기량도 필드 플레이어 중에서는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다.
4.5. 그 외
그런데 의외로 펠레는 현역 시절 공식적으로 팀의 주장에 선임된 적이 없으며, 임시로 주장직을 수행했던 경기도 몇 안 된다. 그러나 동료들과 주변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리더십 자체는 매우 뛰어났다. 노년기의 활발한 언론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보면 빈 말은 아닌 듯하다. 또한 최고 레벨의 플레이어들이 자신만의 세계가 강고하고 외골수적인 면이 있는 것에 비해 경기 중 동료의 조언에 따라 포메이션이나 플레이 스타일을 즉석에서 바꿔 재미를 보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여줬다고 한다.
펠레는 기복이 거의 없는 선수였다. 기량에 있어서 늘 일관됨을 유지했으며, 골 기록만 살펴봐도 그가 매우 꾸준한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꾸준함은 최고의 축구 대회인 FIFA 월드컵에서도 검증되었다. 월드컵 통산 14경기에서 12골 8도움을 기록했으며,[71] 골을 몰아 넣지 않고 1~2개의 골을 골고루 득점했다. 그러나 언제든 무섭게 몰아칠 수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1964년 리그의 보타포구[72]를 상대로 8골을 넣은 것이 펠레의 단일 경기 최다 골 기록이다. 이 외에도 해트트릭 91회, 4골 31회, 5골 6회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해트트릭 횟수는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여 센 것이다. #
5. 평가
5.1.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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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펠레는
존 레논,
교황 바오로 6세,
폴 매카트니,
무하마드 알리,
폴 뉴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닐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존 웨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제치고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명명되었다.
몇 년 후, 지구상 브랜드 인기도를 조사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펠레’가 지구상에서 인지도가 두 번째로 큰 것으로 밝혀졌다. 오일 및 가스 재벌기업, 은행, 자동차 제조회사, 항공회사, 유명 이동통신 회사 등도 펠레에 못 미쳤다. 펠레를 유일하게 능가한 브랜드는 코카콜라였다.
FIFA
몇 년 후, 지구상 브랜드 인기도를 조사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펠레’가 지구상에서 인지도가 두 번째로 큰 것으로 밝혀졌다. 오일 및 가스 재벌기업, 은행, 자동차 제조회사, 항공회사, 유명 이동통신 회사 등도 펠레에 못 미쳤다. 펠레를 유일하게 능가한 브랜드는 코카콜라였다.
FIFA
1999년
로이터 스포츠부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순위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칼 루이스 (육상)
4위 마이클 조던 (농구)
5위 제시 오언스 (육상)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칼 루이스 (육상)
4위 마이클 조던 (농구)
5위 제시 오언스 (육상)
1999년 Sport-Express(Russia)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알렉산더 카렐린 (레슬링)
3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4위 레프 야신 (축구)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1위 펠레 (축구)
2위 알렉산더 카렐린 (레슬링)
3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4위 레프 야신 (축구)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2014년
BBC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순위
1위 펠레 (축구)
2위 세레나 윌리엄스 (테니스)
3위 미하엘 슈마허 (F1)
4위 나디아 코마네치 (기계체조)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1위 펠레 (축구)
2위 세레나 윌리엄스 (테니스)
3위 미하엘 슈마허 (F1)
4위 나디아 코마네치 (기계체조)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AP통신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사건
펠레와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의 지구정복
펠레와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의 지구정복
축구의 상징, 그리고 축구라는 종목을 넘어 가장 위대한 스포츠인이었던 인물로써,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와 함께 축구 역사상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선수로 평가받는다.[73] 현 피파 회장인 잔니 인판티노부터가 1970년생이고 펠레가 너무 오래전 선수라[74]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본 사람들은 고령으로 사회에서 은퇴하거나 사망한 점[75]이 마이너스 요인이지만 축구가 세계 최고 인기종목으로 올라가는데 큰 공헌을 한 선수이자 선구자라는 점, 월드컵 커리어면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압도적인 점 등으로 인해 펠레는 여전히 상징성, 업적, 실력 모두 빠지지 않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반열에 드는 대선수라고 할 수 있다.
수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레가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에 첫 손가락으로 꼽혀왔던 이유는 펠레와 실력으로 비슷한 급이라 평가받는 극소수의 선수들조차 '확실히 펠레의 실력을 뛰어넘었다'라고 대다수에게 인정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커리어의 한끗차이가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펠레는 국가대표팀과 클럽 양쪽에서 축구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사실상의 모든 것을 이룬 인물이다. 펠레를 단순히 축구 선수로 한정하지 않고 전체 운동 선수로 평가를 해도 펠레가 축구 대표로 뽑히는 만큼 그는 이미 전체 스포츠계의 상징 중 하나가 된 선수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거의 모든 축구 관계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1981년에 플라카르에서 세계 각국의 축구 전문가 70인에 의뢰하여 역대 베스트 11을 뽑았을 때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펠레를 자신의 팀에 집어 넣었다. 20세기 말 각종 세기말 조사에서 펠레가 축구 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고 엘 그라피코와 같은 아르헨티나 축구 잡지에서조차 자국 영웅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닌 펠레를 1위로 깔고 들어갈 정도였다.[76] 그도 그럴 것이 20세기 시절 펠레는 축구 선수를 넘어서 스포츠 전체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1999년에 IOC는 권투의 무하마드 알리, 농구의 마이클 조던을 두고 펠레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으로 선정했다. 특히 당시 조던은 두 번째 쓰리핏을 성공시켜 이미 업적으로 봐도 농구 1인자로 굳혀진데다 현역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에도 펠레가 뽑혔다.[77] 타임지에서 뽑은 20세기의 인물 100에도 축구계 인물로는 유일하게 들어갔고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스포츠 분야의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전문가들과 알렉스 퍼거슨 등 펠레의 플레이를 목격한 선수나 감독들의 평가와는 달리, 20세기 말까지 펠레의 활약을 접하지 못한 팬들은 마라도나가 더 위대한 선수였다는 반응이 많았고 이는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에 대한 FIFA 주관 인터넷 팬 투표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마라도나 53.6%, 펠레 18.53%) 펠레의 활동 시기가 워낙 과거의 일이라 펠레의 플레이를 담은 영상은 거의 소실된 상태인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니 펠레는 실력 논쟁이 펼쳐질 때마다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60년대 남미 리그 수준과 무관하게 유럽에서 뛰지 않았던 점도 펠레에 대한 저평가 요인 중 하나였다.[78]
그래도 2004년의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펠레 에테르노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가 과거에 비해 많이 발굴되었다.[79] 또한 적은 표본이긴 하지만 옵타 등 스포츠 통계 사이트에서 골 기록 외에도 도움 기록과 키패스 등 다른 스탯에서도 현재의 슈퍼스타들에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더욱이 옵타의 월드컵 기록은 1966년 대회부터 기록되었는데 1966년 대회는 펠레가 계속 부상에 시달리다가 주앙 모라이스의 더블 백태클로 신체적 전성기가 끝난 대회임을 감안하면 이 기록은 펠레의 진면목을 전부 보여주지 못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골 기록만 존재하고 영상 자료는 없던 과거에는 펠레가 단순히 골만 많이 삽입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란 폄하도 있었지만, 현재는 영상 자료들로 인해 축구팬들에게 인사이드 포워드적인 부분과 축구 전반에 뛰어난 컴플리트 포워드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5.2. 업적
펠레는 축구 역사상 유일한 FIFA 월드컵 3회 우승 선수이며, 이 중 두 개의 대회에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괄목할만한 점은 1958, 1970 월드컵 모두 펠레의 전성기 시기와는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펠레가 펼친 퍼포먼스의 정점은 1960년도 초중반으로 귀결되는 편이며, 클럽 레벨에선 리그, 인터컨티넨탈컵,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모두 가릴 것 없이 폭격하던 시기다. 축구를 넘어 최고의 스포츠 대회라 할 수 있는 월드컵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것이 펠레가 축구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컨티넨탈컵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각각 2회 우승했다[80]. 남미 클럽 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3번 밖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3번 중 2번을 우승했다. 브라질 챔피언의 자격으로 2번 더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당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역사가 짧아 권위가 덜하기도 했고 브라질 축구협회의 반대도 있어 불참했다.[81]커리어의 우열을 가리는데 펠레의 유럽 무대 경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은 오류다. 펠레 시대는 남미와 유럽이 축구계를 양분하던 시대였고 지금처럼 최고 클래스 선수들이 유럽에 쏠린 상황과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세부 사항에 후술되어있다. 브라질로 들어가면 국내 컵 대회에서 6회 우승과 득점왕 3회를,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10회 우승과 득점왕 11회를 달성했다. 산투스의 통산 우승 횟수가 2011년 우승까지 포함하여 19회이니 아직 통산 우승의 반 이상을 펠레 시절에 이룬 것이다. 이렇게 펠레는 국가대표팀 뿐만 아니라 클럽에서도 대부분의 대회를 호령했다. 유일하게 펠레가 우승하지 못한 대회라면 남미의 국가대항전인 코파 아메리카인데, 이 대회 역시도 브라질 축구협회의 반대로 단 한 번 출전했다. 그 유일한 출전에서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펠레는 MVP와 득점왕을 모두 수상했다.
5.3. 관련 논쟁
펠레는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수십년 전에 은퇴한 선수인 만큼 여러 의문점과 비판 또한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는 이와 관련해 펠레를 다방면에서 보고,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서술이다.5.3.1. 주요 경기 활약상
중요 경기에서의 활약도 또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각종 대회 결승전에 출전하면 스타 본능을 발휘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주인공이 되곤 했다. 펠레가 커리어 내내 국가대표팀과 클럽을 통틀어 출전한 결승전은 총 14회인데 단 2번을 제외하면 모두 소속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본인은 총 23경기 동안 29골을 넣었다. 그 안에는 FIFA 월드컵 결승전 2경기의 3골도 포함되는데, 이는 바바, 지네딘 지단, 제프 허스트와 더불어 갖고 있는 월드컵 결승전 득점 2위 기록[82]이며 도움 2개까지 포함한다면 월드컵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이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3경기 3골 2도움, 인터컨티넨탈컵 3경기 7골 2도움 등 다른 주요 결승전에서의 활약상들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대륙 레벨 이상의 결승전들을 종합하면 8경기 13골 7도움으로 경기 당 2.5공격 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도 남기게 된다. 더 나아가 월드컵 결승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3골 이상을 넣어본 선수는 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유일하다.
위 짤에 나왔듯이 펠레는 현재도 깨지지 않은 단일 월드컵 토너먼트 최다 도움(4도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58년에 기록한 토너먼트 6골은 동 대회의 쥐스트 퐁텐의 7골에 이어 단일 월드컵 토너먼트 최다 골 2위 기록[83]이며, 심지어 월드컵 결승전 통산 최다 도움 및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도 가지고 있다. 또한 두 번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공격 포인트를 2개 이상 기록한 선수도 펠레가 유일하다.
국가대표에서는 A매치 77골 중 유럽, 남미 국가가 71골로 그 비율이 무려 92%이며 그 상대국들은 대부분 유럽, 남미 중에서도 강호에 속한다. 당시 브라질은 친선 경기도 주로 남미 국가들, 유럽 상위 국가들과 잡았고 월드컵도 16개국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같은 상대적 약체 대륙들에게 티켓을 1장 이하로 배분했기 때문에 강팀들 밖에 상대할 수 없었고, 강팀 상대 득점 비율도 매우 높았다.
또한 100년에 가까운 월드컵 역사에서 통산 20개 이상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선수는펠레와 메시가 유일하다. 토너먼트로 한정해도 출전한 6경기에서 모두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으며 도합 7골 5도움으로 경기 당 평균 2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84]
5.3.2. 전술
자료 출처: 축구 그리는 광개토TV
펠레의 위상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자 낮은 평가를 내는 의견들의 대표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펠레가 뛰었던 시대와 현 시대의 단순 골 기록 비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시 유럽 주요 리그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은 197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았다. 1970년대 이전은 토탈 풋볼 붐 이전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뛰는 거리가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적었다. 지역 방어 개념이었고 압박이 비교적 적었다. 이로 인해 수비수의 개인 기량만이 수비의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아 골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70년대에 들어서고 축구판에는 토탈 풋볼의 바람이 불면서 고도의 압박 전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료 출처: 축구 그리는 광개토TV
브라질 리그 역시 그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펠레 또한 수비 전술이 발달한 축구판에서 전과 같은 득점력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60년에서 70년대로 갈수록 브라질 리그의 수비력 수준이 상향되는 것에 반비례해서 펠레의 득점이 적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질 리그 평균실점이 3.66에서 1.91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 동안 펠레의 경기 당 득점은 1.63에서 0.37까지 80%가량 심하게 떨어졌다.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의 부상은 펠레가 지녔던 신체능력을 다소 앗아간 때이기도 하다. 노쇠화와 부상으로 인한 신체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펠레가 전과 같지 않은 득점력을 보였고, 마침 수비 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가 자신의 최전성기였고 (1959~1965년), 더 많은 득점 기록을 세우는데 이득을 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위는 득점 기록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이고 이걸로 펠레의 실력 자체가 현대에서 뛰면 뒤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과거 축구에서 득점 난이도가 쉬웠다는 것과 펠레의 전술 이해력은 별개의 문제다. 당시 브라질의 1970년 월드컵 대표팀의 공격수들 펠레, 토스탕, 자이르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네 명은 다른 공격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두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선수들이었는데, 이들 중 4-2-4에서 전방 플레이메이커(10번) 역할을 맡을 선수로 펠레가 선택되었다. 이 위치는 파트너 스트라이커(토스탕)와는 다르게 단순히 공격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내려와 미드필더들을 지원하고, 수비에도 가담하는 전체적인 경기 조율의 역할을 맡는다. 공격수의 수비 가담 즉, 위에서 펠레의 기록을 비판할 때 이야기한 토탈 풋볼의 이론 일부를 먼저 구현했다는 말이 된다. 기술 뿐만 아니라 포지션의 단조로운 역할에서 벗어나 유기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축구 지능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올려진 펠레의 수비 영상이나 인터넷에 도는 펠레의 볼터치 영상들을 보면 그는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이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펠레 시대에도 축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으며, 당시 유럽 감독들이 카테나치오, 토탈 풋볼 등 전술을 발전시킨 목적이 펠레와 남미 선수들의 개인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인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득점 기록만 떨어졌을 뿐 펠레는 1971년부터 남미 올해의 선수 랭킹에 은퇴 시즌까지 아무리 못해도 6위 안에는 들어 갔었고 적어도 펠레의 은퇴 이전엔 그의 소속팀 산투스에 10위 안에 드는 선수도 없었다.
5.3.3. 분석 환경
미디어의 발달은 상대 팀, 상대 선수에 대한 분석을 강화시켰다. 해당 클럽에서 뛰는 주요 선수를 직접 상대하거나 경기장에서 직접 플레이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장점과 약점, 파훼법을 연구하기 쉽게 되었다. 그 결과 그동안 뛰어난 공격수들을 잘 막지 못했던 수비수들에게 큰 득이 되었고, 수비수들의 기량은 전반적으로 크게 상향되었다.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펠레가 선수로 활동했을때는 손쉽게 영상을 복사해서 구할 수 있던 때가 아니었다. 비디오 테이프는 비싸서 방송이나 기업용으로나 썼기 때문에 주로 필름으로 촬영된 영상을 공수해서 분석하는 식이었는데 이 당시에 필름이 비디오 테이프보다 훨씬 대중적이었어도 마냥 싼 것은 아니었으니 나름대로 비용상 수고는 들었다 할 수는 있겠다.
5.3.4. 남미 클럽들의 수준
첫 대회인 1960년부터 펠레가 남미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1974년까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남미 클럽들의 성적은 15전 8승 7패였으며, 우승 횟수도 남미가 8회, 유럽이 7회로 유럽을 상대로 근소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유럽 클럽들은 남미 클럽들을 상대로 원정 경기에서 승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반면에 남미 클럽들은 유럽 클럽들을 상대로 치른 원정 경기에서 해당 시기에 3번의 승리를 거뒀다. 당시 원정 경기가 현 시대의 원정 경기보다 피로감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남미 클럽들이 유럽 클럽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봐도 무방한 셈.당시 남미 축구 수준이 마치 펠레의 산투스 이외에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페냐롤과 에스투디안테스 등의 경우도 산투스 못지 않은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유럽 리그 못지 않은 경쟁력을 보여줬었다. 거기다 해외 이적에 보수적이고 보스만 룰이 없던 시기라 남미 최고의 선수들은 대부분 자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라질 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을 무려 3번이나 우승했으니 남미 리그 수준, 그 중에서도 특히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 당시 유럽 리그의 이하라 보긴 어려웠다.
또한 펠레는 산투스와 브라질 국대로 전세계의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실신시킨 경력의 소유자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수의 마이너 국제대회에서 우승컵을 쓸어담았으니 유럽 커리어가 없는 펠레에 대한 의문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유럽 클럽들과 130경기, 그것도 전부 원정경기에서만 144골을 넣은 기록 또한 펠레가 상대를 가리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 유럽 축구계에 펠레를 능가하는 인물도 없었다. 에우제비우, 바비 찰튼, 루이스 수아레스 등 당시 유럽에서 날린다는 선수들 대부분이 국제 대회에서 다들 펠레보다 하수 인증을 했다.
한편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유럽으로 쏠리고 있는 현재의 유럽 축구와 비교한다면 밀리는 것이 맞다. 현재의 축구계는 보스만 룰 이후 유럽 빅클럽 위주로 판이 돌아가게 되면서 스타들이 모여 있는 형세이고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실질적인 수준은 FIFA 월드컵보다도 위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수준 뿐만 아니라 상업성, 세계적 인지도 등 모든 요소들을 종합할 때 대회 위상은 월드컵이 압도한다) 결국, 펠레를 포함한 20세기의 모든 선수들은 챔피언스 리그와 리그에서 현재의 빅리그 선수들보다 인터넷도 없던 느슨한 환경에서 경쟁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리그들이 남미는 물론이고 세계의 우수한 선수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인터컨티넨탈컵 결과를 볼 때 2000년대 중반까지는 남미와 유럽의 수준이 비슷했으나 2010년대부터는 확실히 유럽 클럽들이 압도하는 수준이다.
5.3.5. 주립 리그의 수준
브라질은 영토가 워낙 넓은데다 교통 시설이 열악하다보니 특이하게 각 주마다 주립 리그들이 먼저 창설되었고 그 이후 전국 리그가 늦게 창설되어서 주 단위와 전국 단위의 리그를 서로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아예 별개의 리그로 운영하고 있다. 축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치르는 경기는 클럽 경기이고, 펠레의 득점 60% 이상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다르게 주립 리그에서 나온 기록이다보니 이 주립 리그의 수준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제2의 전성기 시절의 호나우두가 브라질 축구협회에 펠레의 골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자세히 말하면 펠레가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에는 전국 대회가 창설 초창기였고 각 주립 리그의 챔피언들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붙었던 컵 대회 규모라 현재 같은 정규 리그가 아니었고,[85] 주로 뛰어야 할 리그는 주립 리그였다.
이렇게 되면 지역에 한정된 리그의 수준은 전국 단위 수준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당시 상파울루주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펠레 시절 상파울루주의 클럽들은 18차례의 전국 대회 중 12차레를 우승하며 다른 주립 리그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역사적으로 상파울루 리그와 함께 브라질의 양대 주립 리그로 인정 받는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가 그 사이 3회 우승에 그쳤다. 또한 브라질 국가대표팀 자리의 절반을 상파울루 주 선수들이 차지한 만큼 선수들 수준도 높았다. 펠레가 참가한 4번의 월드컵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보면 1958년 월드컵은 10명, 1962년은 13명, 1966년은 10명, 1970년은 11명이었다. 심지어 펠레가 뛰던 당시에도 이미 상파울루 리그는 주 자체적으로 4부 리그까지 있었으며 강등제도 존재했다. 큰 규모의 하부 리그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은 그만큼 하위권 팀들과 주의 하부 리그 팀들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다른 주들은 현재도 2부 리그까지만 보유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국 대회 성적, 선수 수준, 리그 규모를 볼 때 당시 상파울루 리그가 다른 주립 리그들과 차별화된 평가를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현재의 리그 형식처럼 전국에서 최고의 팀들을 뽑는 게 더 퀄리티가 있었겠지만,[86] 그와 비견될 수준을 갖췄다. 그러나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나 형식은 크게 변화했고 라이트 팬들이 과거 시스템과 환경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브라질 전국 리그가 4부 리그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전국 1~4부 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팀들 중 주립 리그와 주립 컵 대회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팀들에게 4부 리그 참가 자격을 주고 있다. 상파울루의 일부 팀들도 4부에 소속되거나 아예 전국 리그 참가 자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과거 펠레 또한 4부 수준의 팀들과 경기해 쌓은 기록이라고 추측하여 주장하는 팬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1차원적인 추측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전체적인 브라질의 수준, 그 브라질 내에서 상파울루 리그의 위상도 다르고, 리그 시스템의 차이점도 알아봐야 하는 등 고려할게 많은데 지나치게 경솔한 생각이며, 그저 펠레를 깎아 내리고 싶은 악의적인 주장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주립 리그 관련 비판은 펠레가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저 추측만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라이트 팬들이 많다.
펠레의 통산 골 기록은 경기 당 1골에 근접하지만, 주립 리그가 아닌 전국 대회에서의 골 기록은 173경기 100골로 경기당 골 수가 통산 기록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원인이 따로 있다. 전국 리그는 펠레의 전성기가 끝난 1971년부터 출범했고 펠레의 전국 리그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1971년부터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4년까지의 출전 기록이 84경기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60년대까지의 전국 대회 기록은 76경기 62골, 1966년 월드컵에서의 큰 부상 이전에는 전국 대회에서도 28경기 28골로 경기당 1골의 기록을 세웠다. 반면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시즌 동안 전국 대회 기록은 97경기 38골로 펠레의 이름값에 확실히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때는 주립 리그에서의 득점율도 절반 이상이 감소했기 때문에 딱히 리그마다 차별적으로 활약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상파울루 리그를 대표하는 네 팀은 산투스와 상파울루, 파우메이라스, 코린치안스다. 이들은 전국 리그에서도 우승 횟수 1~4위를 모두 차지하여 브라질을 대표하는 팀들이기도 하다.[87] 이 네 팀은 유럽 6대 리그로 투어를 가기도 했으며 우수한 상대 전적을 거두었다.
상파울루 주 최상위 4팀 vs 유럽 6대 리그 상대 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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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당대 라이벌
역대 최고로 거론되는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시대의 정점 자리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하던 라이벌이 있었다. 1950년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 1970년대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시대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80년대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정점으로 두는 평이 현재는 많으나, 1986년 월드컵 이전에는 미셸 플라티니와 지쿠, 그 이후에는 마르코 반 바스텐과 루드 굴리트, 로타어 마테우스가 그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으며, 현재 위상에 비해서 당시 정점에 오른 기간이 짧은 편이다. 1990년대 초반은 지배자를 손꼽는 것 자체가 어려우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도 호나우두와 지네딘 지단이 선두에 있는 와중에 수많은 선수들이 두 선수를 위협하는 군웅할거 시대였다. 마지막으로 가까운 현대인 2010년대는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를 보여줬다.그러나 1960년대의 펠레는 유일하게 독보적인 위상을 가졌다.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전설들 중 에우제비우, 잔니 리베라, 산드로 마촐라, 바비 찰튼은 실제로 펠레와 맞대결을 가졌음에도 패배하면서 레벨 차이를 느껴야 했고, 산투스와 남미의 패권을 다툰 페냐롤의 에이스들인 알베르토 스펜서와 페드로 로차, 호세 산필리포 역시 펠레와 비교하면 한 수 접어야했다. 그나마 펠레에 가깝게 근접했던 2인자로 볼 수 있는 가린샤도 클럽 활약상은 펠레에게 역부족이었고, 국가대표로서는 유일하게 펠레와 비교될만 했으나, 펠레가 1970년에 3번째 월드컵을 차지하면서 그마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60년대 선수들이 기록적인 면에서 이득을 봤다고는 하지만 당시 브라질에서 펠레의 득점 페이스는 독보적이었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득점 기록에서 최정상을 다투는 수준이었다. 1964년의 데니스 로처럼 일시적으로 펠레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있었지만 펠레만큼 꾸준히 득점 페이스를 유지했던 선수는 없다. 그나마 득점이라는 기록 측면에서 근접했던 선수는 지미 그리브스, 에우제비우 정도. 그마저도 펠레나 에우제비우와 다르게 데니스 로나 지미 그리브스는 최전방 공격수였다.
그런데 현재 21세기의 선수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기량을 상승시키고 있는 반면, 과거의 선수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위 선수들 중에서도 가린샤는 알코올 의존증, 크루이프는 골초, 마라도나는 마약 중독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훈련까지 안하고 평범한 신체 능력으로 경기에 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대가 지날 수록 전체적인 인류의 신체도 진화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 관리도 부실했던 과거 선수들과 경쟁했다는 것은 펠레의 평가에 좋게 작용되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는 훈련이나 식단 조절, 의료 등이 열약했기 때문에 현대처럼 체계적인 관리를 받긴 힘들었고, 당연히 펠레 본인도 기술적인 관리를 통한 기량 상승을 바랄 수 없이 본연의 재능을 통해 업적을 이뤄야했다.
펠레의 파트너였던 가린샤는 알코올 중독 뿐만 아니라 지적 장애와 하체에 장애까지 있었다. 슬럼가에서 태어나 어릴적 소아마비를 겪는 등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으며, 오죽 장애가 심했으면 의사가 보조장치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질 수도 있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마저도 당시 외과의사가 수술을 단행해서 나아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가린샤를 장애를 극복한 선수라고 칭송하는 반응들이 있는 반면, 당대 축구 수준에 의문을 가지는 반응들도 있다.
물론 시대적으로 스포츠 과학이나 인프라 환경이 현대만큼 발달하지 못한만큼 펠레 역시 남들과 같은 환경에서 경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펠레가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는 점이다.
5.3.7. 장비
펠레 시대에는 장비들도 오늘날 장비들에 비해서 낙후된 것들이었다. 지금보면 축구의 기초적인 개인기인 드래그 백 조차도 페렌츠 푸스카스가 실제로 웸블리에서 보여주기 전에는 거의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푸스카스조차 그 드래그 백을 실전에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는데 동료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이 원인이 바로 낙후된 장비였다.푸스카스가 옛날 선수라해서 기술이 별로 뛰어나지 못한 선수라 생각할 수 있는데 호주에서의 크로스바 챌린지 일화,[88] 샤워장에서 동료 프란시스코 헨토가 던져주는 물 묻은 비누를 장난치듯 가지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컨트롤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그리고 당연히 필드라 할 수 있는 축구장도 오늘날에 비교하면 질이 매우 떨어지는데, 잔디부터가 좋지 않다. 유럽은 그나마 덜했지만 남미 축구 경기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기까지 했다. 축구공의 경우도 현재와 많이 달랐는데, 당시 축구공은 잘못하면 선수 생명에 지장이 갈만큼 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토스탕의 경우, 당시 축구공에 눈을 잘못 맞은 뒤 망막 박리라는 병이 생겨 선수 생활에서 은퇴해야했을 정도다. 따라서 과거의 선수들은 현재 선수들보다 정교한 기술을 구사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5.3.8. 축구 규정
펠레 시대에는 체계적인 퇴장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고, 오프사이드의 동일선상이 인정되지 않는 등 규칙 면에서 공격수에게 불리한 점들이 많았다.특히 체계적인 퇴장 제도가 없었던 당시에는 지금 기준으로 퇴장감인 태클들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과거에도 퇴장 제도가 존재하기는 했는데, 상대 선수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는 등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할 경우 심판이 구두로 선수를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중에 주로 일어나는 비매너 플레이들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됐다.
펠레는 1966년 월드컵에서 그의 신체능력에 하락세를 걷게 만든 심각한 더블 백태클을 받았지만 상대 선수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고, 선수 교체룰도 없었던 탓에 부상을 당한 채로 경기를 풀타임 소화했다.
레드/옐로카드 제도는 1970년 월드컵부터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며, 선수 교체 제도 역시 1970년에 월드컵이 정식 채택함으로써 다른 축구 리그 및 대회에 광범위하게 채택되기 시작할 수 있었다.
펠레의 부상이 옐로/레드카드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를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축구라는 종목 자체가 선수 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운영되었으며, 이런 열악한 운영은 선수가 개인기나 전술을 구현할 때 제약이 따를 수 있다. 1986년 월드컵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붙었던 조민국의 증언이 있다. "지금 룰이었으면 서너 명은 퇴장 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던 거지. 난 당시 수비에 서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정면에서 생생히 봤어요. 이야, 저 정도 갖다 받으면 부러졌겠다 싶었지. 그런데 태클을 피할 때 몸 중심을 살짝 띄우더라고. 그걸 어려서부터 접해왔던 선수다 보니 상대가 들어올 타이밍을 다 알고 충격을 완화하더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무슨 종아리가 우리 허벅지만 한 거야. 나도 한 허벅지 했는데. 가만 보니 정강이 보호대를 앞뒤로 했더라고. 얼마나 견제가 심했으면 저렇게까지 했나 싶었죠." 그리고 정말로 유튜브에 이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올라오자 우리나라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마라도나를 동정하거나 우리나라 선수들이 여러 명 퇴장당해야 했다는 댓글 반응이 줄을 이뤘다. 마라도나 시절도 이 정도인데 파울에 제재가 없었던 펠레 시절은 더 자주 살인태클 위험에 노출되었다. 1940년대의 브라질 레전드 축구 선수 지지뉴는 1970년대 선수들이 축구 환경이 거칠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이 숙녀분들은 우리 시대에 뛰어 봤어야 했다"는 답을 주기도 했다.
5.3.9. 팀 내 비중
당시 브라질은 세계 최강의 팀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펠레가 동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수혜자가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펠레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해보면 된다. 브라질에 훌륭한 선수가 많았다고는 하나 1958년부터 1970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펠레가 유일했다. 펠레가 월드컵에 14경기 출전해서 총 12골 8도움을 기록했는데,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한 두 경기인 1962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과 1966년 월드컵 포르투갈전만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스탯을 찍었고, 경기에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득점에 기여해줬다. 또한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들의 스탯을 보면 2위인 가린샤가 5골 5도움, 총 10개로 뒤를 잇는다. 가린샤마저 공격 기여도는 펠레의 절반에 못 그쳤고 팀 내에서도 펠레의 기록은 압도적이었다.펠레가 3번의 월드컵 우승 중 1958년, 1970년의 우승은 펠레 본인이 에이스 역할을 하며 활약했으나, 1962년 월드컵에서 펠레는 조별 리그 2경기만에 부상으로 낙마하였는데, 이후 경기들에서 가린샤가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1958년 당시보다 4년 더 늙어버린 멤버들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펠레도 "사람들은 1958, 1962, 1970년의 월드컵을 나의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1962년 월드컵은 가린샤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위의 논란을 꺼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례를 근거로 든다. 그러나 1957년 남미 챔피언십에서 펠레를 제외한 1958년 월드컵 멤버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게 연달아 패배했다. 이 팀에 펠레가 합세하고 월드컵을 우승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똑같이 펠레가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브라질은 16강 조별리그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맞이했다. 1966년의 브라질은 기존의 가린샤, 자우마 산투스, 지우마르에 떠오르는 신예들인 자이르지뉴, 토스탕, 제르송이 합세해 신구 조화를 이뤘음에도 말이다.
펠레가 은퇴하고 나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가 건재함에도 1974년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고 브라질이 다시 월드컵을 우승하기까지 24년이 걸렸다. 전체적으로 펠레의 공백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1962년 월드컵 하나의 사례만으로 이를 주장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89]
1970년 멤버들은 현재 역대 최강이라 평가 받지만 이는 결과가 따라준 뒤의 평가이고, 대회 직전까지는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주앙 살디나 감독이 도중에 마리우 자갈루 감독으로 교체된 점에,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에서 로베르토 페르푸모가 "이 브라질은 내가 본 브라질 중 가장 최약체 팀"이라 발언할 정도로 전망이 썩 좋은 팀은 아니었다.[90]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브라질에게 줄리메컵 영구 소유권을 가져다 준 선수가 펠레다.
펠레의 우승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속했던 클럽인 산투스도 당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펠레의 합류 이전의 산투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리그를 압도하던 팀이 아니었다. 1956년 펠레의 입단시점엔 이미 주립리그 10회 이상씩을 우승한 코린치안스와 파우메이라스가 리그를 양분하는 형세였고 이를 상파울루가 쫓아가는 양상이었다. 이 시점에서 산토스의 주립리그 우승은 고작 2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산투스는 펠레가 합류한지 4시즌이 되던 해부터 세계구급 강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펠레가 이끄는 산투스는 1962년 월드컵 대표팀에 7명, 1970년 팀에는 5명을 차출시키기도 했고 73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2017년 레알 마드리드가 유일하게 동률을 이뤘는데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쟁팀에 해당하는 파우메이라스에게 7:1과 5:0으로 대파당한 일이 있었으며 전자의 스코어는 펠레가 결장했을 때의 결과다. 브라질 내 절대적 강자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팀 수준만을 놓고 비판을 한다면 여기서 자유로운 선수는 몇이나 될지 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포함한 역대 상위권 선수들은 대부분 최고 수준의 클럽이나 국가에서 뛰었으며 소위 얘기하는 '팀빨'을 안 받은 선수가 오히려 찾기 더 힘들다. 특히 현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클럽들은 물론이고 국가대표팀의 전력도 능가한다. 애초에 당대 최고의 선수를 최고의 팀이 영입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는 SSC 나폴리 소속이었던 디에고 마라도나 한 명 밖에 없으며 마라도나도 세부사항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나폴리가 마냥 약체로 불리울만한 전력은 아녔다는 관점 역시 상당수 존재한다.
5.3.10. 득점 기록
펠레는 자신의 기록으로 1283골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펠레의 골 기록은 매체 별로 차이가 나는데, 흔한 매체들은 812경기 757골로 보고 있고,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는 821경기 761골, RSSSF는 841경기 775골로 기재하고 있다. 이렇게 골 수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특정 대회를 공식 대회로 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우선 1968년과 1969년에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는데, 이 대회는 1960년대 인터컨티넨탈컵 챔피언들이 모여 왕중왕을 가리기 위해 개최되었다. 여기서 펠레는 1968년 대회를 우승하고 두 번의 대회 통산 8경기 3골을 넣었다. 이 대회는 2005년 남미축구연맹에서 공식 대회로 인정한 바 있다. 실제로 두 대륙의 연맹이 주최했으니 공식으로 인정하는게 맞긴 하다. 또한 1968년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펠레의 18경기 12골 기록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대다수 매체에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이 되었다. 이렇게 기존의 812경기 757골에서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8경기 3골과 1968년 리그 1경기 1골을 추가하면 821경기 761골로 위에 언급한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와 동일한 기록이 되며, 현재를 기준으로 산정하면 이게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RSSSF의 경우에는 상대 팀도 동일한 성격일 때, 리저브 리그, 국가대표 B팀, 국가대표 군인팀, 리그 올스타, 지역대표팀, 도시대표팀 등 과거의 특수한 기록들의 일부를 공식 기록으로 수용하여 펠레의 기록이 더 높게 기재되었다.
펠레가 주장하는 1283골은 현재 기준 비공식 경기나 클럽 친선 경기들을 포함해 모든 경기를 산정했을 때 나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것도 기관마다 통계가 다르다. 펠레는 역대 최다 골을 기록한 선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데, 기네스북은 펠레의 득점 수를 1279골로 인정했다. FIFA는 펠레의 통산 득점을 1281골로, RSSSF는 비공식 기준 1301골로 인정했다. 또 일부 언론들은 펠레의 기록을 1289골로 보도하는 등 숫자가 참 다양하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자면, 이 문서에서 나열한 사항들만 봐도 과거와 현재 선수들의 시대적 환경에 매우 많은 차이가 있는데다 공식 경기의 기준도 다르니 시대가 다른 선수들의 득점 기록을 나열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긴 하다. 거기다 펠레가 주장하는 기준처럼 선수 커리어의 모든 경기를 인정할 때 정작 펠레가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아니다. 자신이 넣은 득점 중 500골 가량이 말소되는 것이 아깝기야 하겠지만 기록은 둘째치고 자신이 가장 많은 골을 넣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RSSSF가 커리어 통산 득점을 기준으로 기재한 비공식 순위에서 펠레는 8위에 그쳤다. 비공식 1위 선수는 헝가리의 러요시 티치인데, 펠레보다 600골 이상을 더 득점했다. FIFA 또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가 1329골을 넣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는 펠레보다 많은 득점 수다.
1969년 펠레가 1000번째 골을 넣는 순간 기자들이 에워싸 경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한국에서도 펠레의 1000번째 골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등 펠레의 현역시절엔 이 득점기록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인정받았다.[91] 나중에 득점기록에 대한 변화는 이후 축구 환경이 바뀌면서 생긴 시대적인 차이로 볼 수 있다.
5.3.11. 혹사
과거의 축구가 활동량이 적다고는 하는 반면, 커리어 전체 경기 수를 볼 때는 과거 선수들이 현재 선수들보다 많은 출전 수를 가지고 있다. 펠레는 1390경기, 페렌츠 푸스카스는 1270경기, 게르트 뮐러는 1228경기, 호마리우는 1209경기를 치렀다. 현재 선수들은 나이 40이 될 때까지 철강왕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1000경기 이상을 찍기 어렵다. 그만큼 과거의 선수들은 현재와는 다른 의미로 혹사를 당했는데 그 중에서도 펠레는 돈을 벌기 위해 장시간 비행기를 타며 세계를 돌아다녔다.월드 스타였던 펠레를 산투스가 가만히 둘 리는 없었고, 그는 산투스의 마케팅에 적극 활용되었다. 22일 동안 9개의 국가를 돌아다니며 15경기를 치르기도 했으며 한 해동안 무려 109경기를 소화하는 기록도 세웠다. 1965년 이후부터는 브라질 축구 협회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스리그 불참 지시와 맞물려 산투스 구단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보다 해외 친선 경기가 더욱 돈벌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본격적으로 세계 투어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산투스 구단 입장에서도 펠레를 필두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선수들의 몸값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한번 투어를 나가면 10개국 이상을 다녔고 한 국가의 안에서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복잡한 일정을 시즌 일정도 미루고 참여해야 했다.[92] 심지어 내전 중인 국가에도 들어가서 경기를 뛰기도 하거나 시즌 도중에 악명 높은 해발고도 약 4,000m의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뛴 적도 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에도 찾아와서 전반전을 소화하며 골을 넣었다.
이러한 경기들의 목적은 펠레를 통한 마케팅으로 수입을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펠레는 건강에 크게 이상이 없는한 선발, 풀타임으로 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술된 일화 중 콜롬비아에서 심판이 펠레를 퇴장시켰다고 오히려 관중들이 심판을 쫓아내는 사례도 있을 정도였으니 투어에 펠레가 빠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친선 경기라고 해도 당시는 A매치 수나 리그 교류가 적었기 때문에 펠레를 상대하는 선수들, 특히 제3세계 선수들은 자기의 기량을 시험하는 겸 펠레 한번 막아보겠다고 펠레에게 거칠게 달라붙는 경우도 많았다. 가뜩이나 파울에 대한 제재도 느슨했던 시기였던 걸 감안하면 경기 양상이 어땠는지 상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이렇게 경기 수가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 문제인 건 계속되는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 변화였다. 이 혹사는 펠레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5.4. 비판
펠레에 대한 평가절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당시 축구의 수준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도 위의 문단들이 반론을 제기하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수준 차이는 의견을 엇갈리게 하며, 실력으로 펠레보다 마라도나를 우위에 두는 전문가들도 다수 존재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물론 펠레가 타임머신타고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닌만큼, 당시 시대에서 이견의 여지없는 최고의 모습을 보인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론도 있다. 당시 수준이 낮았다치더라도 동시대 다른 선수들은 펠레만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준으로 퉁쳐서 말하지만 의료, 인프라, 훈련 등도 현대에 비해 떨어졌던만큼 현대의 선수들이 과거에서 활약했으면 펠레만큼 활약할거라 보장하기는 힘들다.하지만 펠레가 자신의 기록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고 현대 선수들을 저평가하는 경향을 보인 적이 있어서, 유독 당시 시대에 대한 논쟁이 뒤따르는 편이다.
또한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업적에 관해서도 비판이 있다. 1962년 월드컵 당시에 펠레가 출전한 경기는 조별 리그 2경기 뿐이었다. 첫번째 경기에는 확실히 1골 1어시스트[93]로 활약했지만, 두 번째 경기는 부상으로 전반전에 아웃되었다는 점이 지적을 받는다. 다만 월드컵 1회 우승을 제외하더라도, 두 번의 월드컵에서 MVP급 활약으로 팀을 우승시킨 선수가 펠레 외에는 없기에 월드컵 활약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5.5. vs 디에고 마라도나
세기의 라이벌인 펠레와 마라도나의 대결.
6.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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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가족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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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결혼식 |
1981년부터 당시 17살이었던 방송인 슈샤와 사귀기 시작했다. 상대 여성의 나이가 23살 연하에 굉장히 어렸던 지라 당시 국내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결국 로즈마리 촐비와는 다음해인 1982년에 이혼했고, 슈샤와는 결혼설까지 나왔으나 1986년에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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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쌍둥이 아들 출산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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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결혼식 |
펠레는 총 2명의 혼외자를 인정한 바 있는데 첫 번째로 아니지아 마샤도라는 하녀와의 사이에서 1964년생인 산드라 마차도를 두었다. 로즈마리 촐비와의 결혼이 1966년이니 결혼 기간 중의 외도는 아닌 셈이다. 다만, 펠레가 DNA 검사마저 거부하며 버티자 법원은 강제로 DNA 검사를 실시하여 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딸은 펠레의 성(姓)인 두나시멘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펠레는 이후에도 그 딸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고, 딸이 2006년 유방암으로 사망했지만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으며,[95] 그 딸이 낳은 두 외손주들까지 철저히 존재를 부정했고 그들에게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해 패소까지 했다. 이외에도 또다른 여성인 레니타 쿠르츠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딸 플라비아는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후 펠레는 자신의 자식이 몇 명인지 자신도 모를 정도라고 고백했다. # 펠레의 자녀는 공식적으로 7명인데 이중에서 2명이 혼외정사로 태어난 자식들이며, 그 이상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펠레가 함으로서 펠레와 혼외정사를 벌인 여성이 많았음을 시사했다. 펠레의 말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한다.
7. 인성 논란
축구 황제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기 때문인지, 자신과 비교되는 선수들에게는 좋은 소리 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펠레 자신과의 대척점에 있는 세기의 라이벌인 디에고 마라도나와는 서로 디스를 주고 받던 사이이며, 호마리우 및 호나우두 등의 브라질 출신 후배들도 잘 나갈 때는 펠레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리오넬 메시가 그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메시는 네이마르부터 넘고 오라는 소리는 메시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드립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나마 메시가 네이마르와 동료가 된 이후에는 메시에 대해 현역 최고의 선수라는 코멘트를 종종 남겼다. 메시가 바르셀로나의 브라질리언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브라질에서의 평가가 상당히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다.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두고 무조건 닥치고 개최해야 한다며 개최 거부 시위를 비난하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된 호마리우가 월드컵 개최를 놓고 엄청난 비난을 하면서 시위를 옹호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대조적이라서 더 욕을 먹었다. 이 때문인지 아르헨티나 기득권자들에 허구한 날 쓴소리하는 디에고 마라도나와 달리 기득권자들에게 아첨하고 빈민층이던 자신의 과거는 잊었다는 비난도 많다. 그러나 이 부분은 펠레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의 편집 조작이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브라질 국민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평화적 시위에 피해를 주고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말도 했으나 이 부분은 방송되지 않았던 것. 결국 시간이 지나서 '과격 시위와 국가대표팀에 대한 야유에 반대한 것이었을 뿐이며 평화롭기만 하다면 브라질 시위를 지지한다'라고 진화 성명을 냈지만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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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 You Spell Pele?
G - O - D
The Sunday Times (1970년 브라질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
FIFA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을 중계하던 영국 중계진 팻 크럴랜드( 맨유 출신 수비수)가 말콤 앨리슨이 던진 질문에 대해 남긴 대답이었다.
The Sunday Times (1970년 브라질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
FIFA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을 중계하던 영국 중계진 팻 크럴랜드( 맨유 출신 수비수)가 말콤 앨리슨이 던진 질문에 대해 남긴 대답이었다.
내가 넣은 가장 위대한 골은 셀레스트[96]와의 원-투야. 그리고 우리는 그 골을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라고 이름 지었지.
돈지뉴 (펠레의 아버지)
돈지뉴 (펠레의 아버지)
리어왕인지, 황제 존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황제처럼 보였다. 타당하게도 완벽한, 그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망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어떤 농촌에다가 데려다 놓더라도 그의 왕조의 위엄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넬슨 로드리게스 (스포츠 평론가. 1958년 2월 26일에 나온 칼럼으로, 펠레를 최초로 '황제'라고 불렀다.) #
넬슨 로드리게스 (스포츠 평론가. 1958년 2월 26일에 나온 칼럼으로, 펠레를 최초로 '황제'라고 불렀다.) #
이제 우리는 안다. 왜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왕이라고 불러 왔는지, 그가 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알려져 있는지...
Now we know... that we have a thought it before 'Why they call this man the king, Why he is known of the greatest footballer in the world'...
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준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펠레의 노 터치 트릭 직후에 한 발언
Now we know... that we have a thought it before 'Why they call this man the king, Why he is known of the greatest footballer in the world'...
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준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펠레의 노 터치 트릭 직후에 한 발언
현재, 지금껏 우리가 본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가 펠레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는가?
Who will now suggest that he is less than the greatest footballer we have ever seen?[97]
휴 맥킬바니, 잉글랜드의 축구 기자, 펠레의 1970년 월드컵 우승 직후
Who will now suggest that he is less than the greatest footballer we have ever seen?[97]
휴 맥킬바니, 잉글랜드의 축구 기자, 펠레의 1970년 월드컵 우승 직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 땅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펠레는 하늘에서 만들어졌지.
제프리 그린 (영국의 저명한 축구 기고가)
제프리 그린 (영국의 저명한 축구 기고가)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상대했던 선수 중 최고인 펠레에 대한 많은 기억이 있습니다. 나에게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며 그와 함께 경기장에서 뛴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펠레에게 감사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제프 허스트 #
제프 허스트 #
오늘밤 우리는 축구 역사상 최고 중 하나인 펠레를 전세계의 축구팬들과 함께 애도합니다.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스타였고 축구를 세계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종목으로 만드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UEFA 공식계정 #
UEFA 공식계정 #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 펠레가 왜 오리지날, 그리고 유일하게 최고의 선수인지를 입증합니다."
마이클 존슨 #
마이클 존슨 #
"운 좋게도 나는 그를 같은 시대에 라이브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완벽한 선수를 본 적이 없다."
지안 카를로 데 시스티 (1970년 월드컵 결승전 출전한 이탈리아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지안 카를로 데 시스티 (1970년 월드컵 결승전 출전한 이탈리아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펠레와 같은 선수는 여지껏 없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였다."
로베르토 보닌세냐 (1970년 월드컵 결승전 득점한 이탈리아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로베르토 보닌세냐 (1970년 월드컵 결승전 득점한 이탈리아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펠레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였다. 친애하는 펠레, 나는 대단히 슬프고 당신과 당신의 일생의 일에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조셉 블래터(전 피파회장) #
조셉 블래터(전 피파회장) #
"그는 1970년 멕시코에서 우리를 상대로 승리한 결승전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헤딩 골을 넣었습니다. 서독과의 준결승에서 우리는 경기 종료 직전까지 앞서다 동점골을 내주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나는 우리가 독일과의 준결승 이후에 무너지지 않았다면 결승전을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브라질과의 결승전은 결국 내 커리어에서 가장 큰 후회이며 만약 다시 경기를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경기를 다시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펠레는 여전히 역대 최고의 선수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잊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루이지 리바(이탈리아 통산 최다 득점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루이지 리바(이탈리아 통산 최다 득점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펠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준 선수였다.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 등 시대마다 달라서 비교가 무의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펠레의 강점은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는 월드컵을 세 번이나 우승했고 평생 기억되어야 한다."
안젤로 도멩기니(1970년 월드컵 결승전 출전한 이탈리아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안젤로 도멩기니(1970년 월드컵 결승전 출전한 이탈리아 선수. 펠레의 사망 소식에) #
"마라도나와 메시도 훌륭하지만 펠레가 가장 뛰어났다."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1978년 월드컵 아르헨티나 우승 주전, 22월드컵 직후) #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1978년 월드컵 아르헨티나 우승 주전, 22월드컵 직후) #
"펠레보다 더 나은 선수는 없다. 내게 그는 축구의 왕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의 플레이는 완벽했고 약점이 없었다. 양발, 헤딩으로 모두 골을 잘 넣는 스팩타클한 선수였다.."
한지 플릭 (펠레를 추모하며) #
한지 플릭 (펠레를 추모하며) #
"나에게 있어 펠레는 역대 최고의 선수다. TV에서 내가 일하고 처음 맡인 일 중에 하나는 VHS에 영어 음성을 넣는 것이었다. 펠레가 브라질에서 플레이 했던 모습과 그의 1,000개의 골에 관한 영상들 말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혹여 의심이 든다면, 그 비디오가 그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골을 넣는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던 사람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진 특권이었다. 그는 울퉁불퉁한 경기장의 끔찍한 환경에서도 놀라온 골을 넣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항상 기억될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나에게 그는 항상 최고의 선수이다. 축구계에서 펠레는 불멸의 존재다."
마틴 타일러 (축구해설가 펠레를 추모하며) #
마틴 타일러 (축구해설가 펠레를 추모하며) #
"나는 펠레를 존경한다. 역대 최고는 마라도나도 메시도 아니다. 바로 펠레다. 나는 그의 천재성을 눈 앞에서 봤다. 그 이전 낙후된 장비로도 지금까지 다른 훌륭한 선수들이 했던 모든 플레이를 다 해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존 앨드리지 (1958년 월드컵 때 웨일스 선수로 출전) #
존 앨드리지 (1958년 월드컵 때 웨일스 선수로 출전) #
"아름다운 게임의 창조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펠레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클리프 존스 (1958년 월드컵 때 웨일스 선수로 출전) #
클리프 존스 (1958년 월드컵 때 웨일스 선수로 출전) #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본 적은 없다. 그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했었다. 그가 해낸 것들, 월드컵 3회 우승 뿐만 아니라 골들, 그가 나타났을때 그는 새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뛸 땐 난 태어나지 않았다.사람들은 당시 경기 리듬이 완전 달랐다고 공간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 펠레는 지금 뛰더라도 리듬, 스페이스에 적응할 것이다. 너무 잘하니까, 직관적이고 스킬, 멘탈 모든 걸 잘해서 펠레는 모든세대에서 플레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펠레를 본 사람들은 그가 최고라 하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디스테파노, 마라도나, 메시라 하겠지. 어느 하나가 낫다는 말은 아니다. 난 항상 메시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라 했다. 그와 같이 일해봤으니.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선수를 고르는 것도 이해한다. 모두가 축구를 위해 믿을 수 없는 공헌을 했다. 팬들에게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감정을 그 선수들은 꽤 주기적으로, 거의 매 시즌 매경기 만들어낸다."
펩 과르디올라 #
"펠레를 본 사람들은 그가 최고라 하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디스테파노, 마라도나, 메시라 하겠지. 어느 하나가 낫다는 말은 아니다. 난 항상 메시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라 했다. 그와 같이 일해봤으니.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선수를 고르는 것도 이해한다. 모두가 축구를 위해 믿을 수 없는 공헌을 했다. 팬들에게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감정을 그 선수들은 꽤 주기적으로, 거의 매 시즌 매경기 만들어낸다."
펩 과르디올라 #
"펠레는 축구에 대한 모든 것을 아름답게 구현했으며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홍보대사였습니다.그는 수백만 명의 미소를 짓고 축구를 놀라운 수준으로 끌어올린 전설이었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CBS 스포츠 공식계정 #
CBS 스포츠 공식계정 #
"여러분들이 보는 축구선수들의 모든 것들은 펠레가 진작에 먼저 했었던 것들이다."
엘링 홀란드 #
엘링 홀란드 #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인은 1위 펠레, 2위 무하마드 알리, 3위 마이클 조던, 4위 마라도나, 5위 우사인 볼트.
데이비드 파이텔슨 (멕시코의 스포츠 평론가, 톰브래디의 은퇴날 트위터) #
데이비드 파이텔슨 (멕시코의 스포츠 평론가, 톰브래디의 은퇴날 트위터) #
펠레는 여전히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입니다. 물론 제 대답을 특히 젊은 축구팬들이 선호하지는 않겠지만요.
선데이 올리세 (전 나이지리아 국대 국장, 카타르 월드컵 종료 직후 인터뷰) #
선데이 올리세 (전 나이지리아 국대 국장, 카타르 월드컵 종료 직후 인터뷰)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펠레, 이제 편히 잠드소서.
스티븐 피에나르 (전 남아공 국가대표) #
스티븐 피에나르 (전 남아공 국가대표) #
펠레,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그의 별세는 너무나 슬프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피터 쉴튼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팀 주장) #
피터 쉴튼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팀 주장) #
Q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 직후) 이제 마라도나랑 메시 중 누가 더 뛰어나다 보십니까?
A 음.... 역대 최고는 펠레입니다..
피터 리드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 국가대표) #
A 음.... 역대 최고는 펠레입니다..
피터 리드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 국가대표) #
GOAT가 누구인지 한 명만 정해야 한다면 펠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시 열악한 의료와 훈련세선에도 불구하고 17살의 나이에 첫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불행한건 당시 발롱도르는 유럽인만 수상했기에 펠레는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메시는 마라도나, 플라티니, 크루이프처럼 훌륭한 선수지만 역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월드컵을 3번이나 들어올렸습니다.
프랑크 르뵈프 (2022년 월드컵 이후 인터뷰) #
프랑크 르뵈프 (2022년 월드컵 이후 인터뷰) #
펠레, 마라도나, 메시 중에서 최고는 펠레입니다.
오스발도 보스카치 (아르헨티나의 스포츠 평론가) #
오스발도 보스카치 (아르헨티나의 스포츠 평론가) #
펠레는 축구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는 축구를 아름다운 게임의 완벽한 본보기를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본적 없는 여유로운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잔니 인판티노 (현 FIFA 회장) #
잔니 인판티노 (현 FIFA 회장) #
펠레는 교황보다 큰 존재였다. 가는 곳마다
비틀매니아같았다. 무하마드 알리, 믹 재거, 엘튼 존.. 모두가 펠레를 경외했다
스티브 로스 (뉴욕 코스모스 단장)
스티브 로스 (뉴욕 코스모스 단장)
내가 여태 본 선수 중 최고 5명은 1위 펠레, 2위 메시, 3위 마라도나, 4위 호날두, 5위 디 스테파노.
호세 라몬 페르난데스 (1978월드컵부터 10번 이상 월드컵을 중계해온 멕시코 스포츠 기자) #
호세 라몬 페르난데스 (1978월드컵부터 10번 이상 월드컵을 중계해온 멕시코 스포츠 기자) #
펠레가 있던 시절의 브라질은
007영화에서 나오는 온갖 신기한 장치가 달린 자동차와 같았다. (중략) 하지만 펠레가 은퇴하고 난 후의 브라질은 모든 장치를 다 떼고 의자가 튀어나가는 장치만 남은 자동차가 되었다.
닉 혼비 (영국의 소설가. 자신의 저서 ' 피버피치' 중에서)
닉 혼비 (영국의 소설가. 자신의 저서 ' 피버피치' 중에서)
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은 아이의 기쁨을 보는 것이었다. 인간의 비상한 은총과 결합된 아이의 기쁨.
넬슨 만델라
넬슨 만델라
펠레는 미국 축구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높여주었습니다. 이것은 펠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미 카터
지미 카터
펠레는 22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세계의 어떤 외교관보다 더 세계 평화에 공헌했다.
J.B. 피녜이루 (주미 브라질 대사)
J.B. 피녜이루 (주미 브라질 대사)
모든 사람들이 그와 사진을 찍고 악수하기를 원했다. 펠레와 파티를 했다는 것은 가장 큰 영예였다
믹 재거
믹 재거
오늘에서야 펠레가 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하마드 알리 (펠레의 은퇴 경기에서 펠레를 향해 관중들이 손수건을 흔드는 것을 보며. 알리는 바비 무어와 함께 펠레의 은퇴 경기에 초청받았다.)
무하마드 알리 (펠레의 은퇴 경기에서 펠레를 향해 관중들이 손수건을 흔드는 것을 보며. 알리는 바비 무어와 함께 펠레의 은퇴 경기에 초청받았다.)
공이 펠레의 발에 붙는 순간 축구는 시로 변했다.
피에르 파솔리니 (이탈리아의 시인)
피에르 파솔리니 (이탈리아의 시인)
(팀닥터가 펠레의 정신연령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다며 출전을 금지시키는 것을 권유했을 때)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축구를 알지 못하며,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봤다.
비센치 페올라
비센치 페올라
눈을 깜빡일 때도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면서 깜빡여야만 했다. 두 눈을 동시에 깜빡이면 펠레는 어느새 골을 넣고 있었다.
브리투
브리투
메시와 호날두 중 누가 최고냐고요? 제 생각에 펠레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입니다. 메시와 호날두도 뛰어난 선수들이지만, 펠레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입니다.
디노 조프
디노 조프
마라도나는 현재의 메시와 호날두를 합친 선수였고, 의심할 여지 하나도 없이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다.
안드레아스 브레메
안드레아스 브레메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도 좋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입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조반니 트라파토니
펠레는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뛰어난 선수입니다. 저는 펠레와 라이브로 경기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막강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선수였고 저는 그를 상대할 때마다 힘들었습니다.
다니엘 오네가 (196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이자 단일대회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레전드)
다니엘 오네가 (196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이자 단일대회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레전드)
예전에는 펠레, 마라도나 등과 직접 경기장에서 붙어봤고, 지금은 메시를 봤습니다만, 그들 중 가장 완벽한 선수는 펠레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른 시대의 선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펠레는 선수로서 구성요소부터가 최고였습니다. 그는 환상적인 기술, 드리블을 갖춘 선수였습니다. 스피드도 매우 빠르고 어시스트도 매우 많이 했죠.
다니엘 솔소나
다니엘 솔소나
펠레는 완벽하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는 게다가 3번의 월드컵 우승과 1,283골을 넣었다. 펠레 다음으로는 마라도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크루이프와 메시이다.
노르베르토 알론소 (1978년 월드컵 우승한 아르헨티나 선수)
노르베르토 알론소 (1978년 월드컵 우승한 아르헨티나 선수)
경기에 임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피부와 뼈로 된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당시 펠레를 막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수비수)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당시 펠레를 막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수비수)
펠레를 막으려는 임무를 수행하려 했을 때 몸이 공처럼 튀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
야마구치 요시타다 (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 주역 일본 국대 주전)
야마구치 요시타다 (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 주역 일본 국대 주전)
그는 위대한 컨트롤과 시야를 갖춘 엄청난 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그는 경기를 읽고 포지션을 읽었다. 그는 거만했지만 그걸 나쁜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으니 뽐 좀 내면 또 뭐 어떤가?
난 가끔 이 축구란 스포츠가 이 마법같은 선수를 위해 발명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비 찰튼
난 가끔 이 축구란 스포츠가 이 마법같은 선수를 위해 발명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비 찰튼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지네딘 지단 같은 선수들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 그건 바로 펠레다.
펠레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는 20년간 최고로서 군림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는 그의 밑이다. 펠레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
지금 리오넬 메시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그의 선수생활 내내 그랬다. 그러나 역대 최고는 펠레다. 나는 펠레와 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뉴욕 코스모스에 있을때 같이 뛰었는데, 그에게 공을 주면 그가 너무 빨라서 다신 볼 수 없었다. 펠레는 모든 것이 본능이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였다. (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오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저의 특별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축구는 영원히 펠레 당신의 것입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
프란츠 베켄바워. 입에 침이 마르도록 펠레에 대한 헌사를 아끼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대단한 펠레의 팬이다.
펠레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는 20년간 최고로서 군림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는 그의 밑이다. 펠레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
지금 리오넬 메시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그의 선수생활 내내 그랬다. 그러나 역대 최고는 펠레다. 나는 펠레와 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뉴욕 코스모스에 있을때 같이 뛰었는데, 그에게 공을 주면 그가 너무 빨라서 다신 볼 수 없었다. 펠레는 모든 것이 본능이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였다. (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오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저의 특별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축구는 영원히 펠레 당신의 것입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
프란츠 베켄바워. 입에 침이 마르도록 펠레에 대한 헌사를 아끼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대단한 펠레의 팬이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이다. 하지만 나는 펠레는 선수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축구에 관한 한 그는 단순히 최고의 선수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페렌츠 푸스카스
페렌츠 푸스카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모두 특별한 자질들을 지닌 위대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펠레가 더 뛰어났다.
펠레는 호날두와 메시를 합친 것보다 뛰어났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는 호날두와 메시를 합친 것보다 뛰어났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는 펠레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세자르 삼파이우
세자르 삼파이우
펠레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펠레는 펠레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레벨에 있는 선수이다.
신은 펠레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머지 찌꺼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호베르투 히벨리누
신은 펠레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머지 찌꺼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호베르투 히벨리누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를 상대했던 순간이 내 커리어 최고의 순간이었다.
Q: 펠레가 현시대에서 뛰었어도 과거만큼이나 많은 골을 기록했을거라 자신합니까?
A: 물론입니다. 그것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2018년 FWA에서 진행한 인터뷰 중에서) #
경이로운 운동 선수 (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Pele was the greatest player I have seen. This guy was absolutely fantastic.
고든 뱅크스, 2013년 다큐멘터리 Bobby에서
Q: 펠레가 현시대에서 뛰었어도 과거만큼이나 많은 골을 기록했을거라 자신합니까?
A: 물론입니다. 그것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2018년 FWA에서 진행한 인터뷰 중에서) #
경이로운 운동 선수 (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Pele was the greatest player I have seen. This guy was absolutely fantastic.
고든 뱅크스, 2013년 다큐멘터리 Bobby에서
나는 이제 자식들, 가족들, 친구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 내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플레이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말이다.
대회 전부터 우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펠레가 우리가 우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펠레가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결국 월드컵을 우승할 터였다.
그의 가장 거대한 비밀은 바로 그의 즉흥성에 있다. 그가 해낸 그 모든 일들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대회 전부터 우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펠레가 우리가 우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펠레가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결국 월드컵을 우승할 터였다.
그의 가장 거대한 비밀은 바로 그의 즉흥성에 있다. 그가 해낸 그 모든 일들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어두운 방을 밝게 밝힐 수 있는 예술가.
1970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로부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게로 이어진 패스는
랭보의 시와 같았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보는 이들에게 영원함을 느끼게 한다.
에릭 칸토나
에릭 칸토나
펠레가 날 보고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줬다. 이는 내 인생 최고의 영예이다.
조지 베스트
조지 베스트
난 우상이랄게 딱히 없는 사람이지만 난 선량한 브라질 사람이고 또 그러므로 펠레를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 신과 같다. 뭐,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내 생각에 이 게임은 축구가 아니라 펠레라 불려야한다.
리오넬 메시는 최고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는 먼저 디에고 마라도나와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펠레를 뛰어넘어야겠지.
호마리우
내 생각에 이 게임은 축구가 아니라 펠레라 불려야한다.
리오넬 메시는 최고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는 먼저 디에고 마라도나와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펠레를 뛰어넘어야겠지.
호마리우
펠레는 위대한 선수가 가득했던 시기에 가장 빛났던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을뿐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젊고 훌륭하며 아직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 선수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본 선수 중 펠레에 견줄 수 있는 선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에우제비우
에우제비우
세기의 선수에 대한 논쟁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펠레.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추가될 수 있겠지.
신이 펠레를 만들 때,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집어넣었다. 슈팅하는 법, 드리블하는 법, 헤더 슈팅을 하는 법, 몸을 쓰는 법 등. 축구계에서 그가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이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마음가짐으로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펠레는 최고이다.
마라도나와 비교해서도 펠레가 더 뛰어났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말하자면 공중제비를 넘는 광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펠레는 무엇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으며, 팀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는 선수였다.
지쿠
신이 펠레를 만들 때,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집어넣었다. 슈팅하는 법, 드리블하는 법, 헤더 슈팅을 하는 법, 몸을 쓰는 법 등. 축구계에서 그가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이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마음가짐으로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펠레는 최고이다.
마라도나와 비교해서도 펠레가 더 뛰어났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말하자면 공중제비를 넘는 광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펠레는 무엇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으며, 팀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는 선수였다.
지쿠
펠레가 결승전에서 5번째 골을 넣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조차도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어.
지게 팔링 ( 1958 스웨덴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서 펠레를 상대했던 스웨덴의 미드필더)
지게 팔링 ( 1958 스웨덴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서 펠레를 상대했던 스웨덴의 미드필더)
난 위대한 선수를 막는다는 희망을 갖고 도착했으나 우리와 같은 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선수로 인한 완전한 실패에 설득되어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코스타 페레이라 (1962년 인터컨티넨탈컵 당시 SL 벤피카의 골키퍼)
코스타 페레이라 (1962년 인터컨티넨탈컵 당시 SL 벤피카의 골키퍼)
Q: 직접 본 선수 중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
A: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Q: 그 순서대로인가?
A: 그렇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펠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 중 최고였다. 펠레는 마라도나,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도 뛰어난 선수였다.
알렉스 퍼거슨
A: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Q: 그 순서대로인가?
A: 그렇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펠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 중 최고였다. 펠레는 마라도나,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도 뛰어난 선수였다.
알렉스 퍼거슨
브라질에서는 펠레가 누군지,
네이마르가 누군지 모두 안다. 우리는 오직 한 명의 펠레만 알고 있다. 어떤 누구도 펠레가 될 수 없다. (네이마르는) 아주 좋은 선수다. 때로 스펙타클한 경기력을 보인다.
바르셀로나 시절에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절대 펠레와 같을 수 없다. 누구도 그와 동등할 수 없다.
펠레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 그의 움직임은 컴퓨터 게임으로도 재현해 낼 수 없다.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펠레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 그의 움직임은 컴퓨터 게임으로도 재현해 낼 수 없다.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저는 펠레 = 축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스페셜 원, 펠레를 가지고 있죠.
주제 무리뉴
주제 무리뉴
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펠레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축구화를 벗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쥐스트 퐁텐
펠레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축구화를 벗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쥐스트 퐁텐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녔었다. 뛰어난 양발과 마술같은 공중에서의 능력, 민첩함, 강력함까지. 그는 기술로도 스피드로도 선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173cm밖에 되지 않았지만 피치 위에서 그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완벽한 균형과 비현실적인 시야도 지녔었다. 그는 피치 위에서 모든 것을 무엇이든지 보여줄 수 있었기에 가장 위대했다. 브라질 기자가 사우다냐[100]에게 스쿼드 내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고 묻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펠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느 포지션에서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바비 무어[101]
바비 무어[101]
10번이 지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의 것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난 펠레가 아니었기에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말 완전한 선수였다. 그는 위대한 양발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볼 컨트롤을 소유했고 골문 앞에서는 무자비한 선수였다.
펠레는 축구에 있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가 피치 위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에.
마리우 자갈루
펠레는 축구에 있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가 피치 위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에.
마리우 자갈루
비교하는 것은 추잡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다. 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혼합체였다.
만약 우리가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신께선 흑인 펠레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전혀 모자란 것이 없었다. 헤더, 체력, 드리블, 피니시, 영감, 천재성, 성질, 시야, 골. 모든 것을 지녔다.
메시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선수입니다. 하지만 저는 펠레와 같은 선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직후 인터뷰) #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만약 우리가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신께선 흑인 펠레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전혀 모자란 것이 없었다. 헤더, 체력, 드리블, 피니시, 영감, 천재성, 성질, 시야, 골. 모든 것을 지녔다.
메시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선수입니다. 하지만 저는 펠레와 같은 선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직후 인터뷰) #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디에고 마라도나는 위대한 공격수이자 플레이어였지. 하지만 그는 펠레가 아냐. 나는 디에고를 펠레와 비교할 수 없어.
지투 ( 1958 스웨덴 월드컵,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당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의 산투스 시절 동료이자 펠레가 초기 선수 시절 존경했던 선수)
지투 ( 1958 스웨덴 월드컵,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당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의 산투스 시절 동료이자 펠레가 초기 선수 시절 존경했던 선수)
메시가 마라도나처럼 되려면 월드컵 우승은 필수다. 그런 마라도나보다 펠레는 더 영특한 선수였다. 그는 축구를 더 잘 이해했다.
다니엘 파사레야
다니엘 파사레야
펠레가 최고였습니다. 마라도나도 잘했지만 왼발 밖에 잘 쓰지 못했죠. 지금의 메시도 뛰어나지만 메시는 바르셀로나에 있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가와 히로시 (1924년생으로 1952년부터 60년 넘게 축구기자로 활동했고 피파 회장상을 받은 일본축구 기자)
가가와 히로시 (1924년생으로 1952년부터 60년 넘게 축구기자로 활동했고 피파 회장상을 받은 일본축구 기자)
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훨씬 더 나은 선수이다. 펠레와 다른 나머지 선수들 사이에는
천 마일의 간극이 있다.
아마데오 카리소 (1950~60년대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골키퍼)
아마데오 카리소 (1950~60년대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골키퍼)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펠레를 만져보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키스를 하고싶어 했다. 심지어는 펠레가 걸었던 땅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클로도아우두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도아우두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는 선수의 피부, 헤더, 스피드, 모든 것을 지녔다. 내가 그와 경기를 했을 때 그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흑표범과 같았다. 그는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플레이하러 입장했는데 그러고도 그는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펠레는 필드 위에 공포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마라도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있어 최고의 선수는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 이 순서이다. 난 디에고를 인정하며 그는 위대한 선수이다. 그러나 다른 별에서 온 선수는 바로 펠레였지 그가 아니었다.
메시? 그보다는 펠레, 마라도나,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지단이 더 뛰어나다. 만약 펠레와 마라도나, 크루이프의 시대였다면 메시는 뛰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는 벤치에 있었어야 할 것이다. 펠레가 역사상 최고다. 당신이 축구에 대해서 논할 때, 당신은 펠레를 논외로 두고 나머지에 대해 말해야한다. 그리고 또 알프레도, 크루이프, 디에고가 있다.
펠레, 그 흑인은 퓨마였고, 무서운 존재였다. 펠레는 2단 점프를 한다. 일단 잔디에서 점프를 한 뒤엔, 공중에서 한 번 더 뛴다. 그는 마치 농구 선수 같았다. 그는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를 상대로 헤더 골을 넣기 위해 내가 일생에서 본 것 중 가장 높은 점프를 보여줬다.
펠레는 누구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메시도 이번 월드컵에서 잘했지만, 최고는 음바페였고, 그런 점에서 메시가 마라도나보다 뛰어나다 할 수는 없죠.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직후) #
우고 가티 ( 보카 주니어스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료이자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최다 출전 골키퍼 기록 보유자)
메시? 그보다는 펠레, 마라도나,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지단이 더 뛰어나다. 만약 펠레와 마라도나, 크루이프의 시대였다면 메시는 뛰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는 벤치에 있었어야 할 것이다. 펠레가 역사상 최고다. 당신이 축구에 대해서 논할 때, 당신은 펠레를 논외로 두고 나머지에 대해 말해야한다. 그리고 또 알프레도, 크루이프, 디에고가 있다.
펠레, 그 흑인은 퓨마였고, 무서운 존재였다. 펠레는 2단 점프를 한다. 일단 잔디에서 점프를 한 뒤엔, 공중에서 한 번 더 뛴다. 그는 마치 농구 선수 같았다. 그는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를 상대로 헤더 골을 넣기 위해 내가 일생에서 본 것 중 가장 높은 점프를 보여줬다.
펠레는 누구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메시도 이번 월드컵에서 잘했지만, 최고는 음바페였고, 그런 점에서 메시가 마라도나보다 뛰어나다 할 수는 없죠.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직후) #
우고 가티 ( 보카 주니어스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료이자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최다 출전 골키퍼 기록 보유자)
메시는 엄청난 선수이다. 나는 메시를 보려고 TV를 켤 때마다 그의 플레이에 놀란다. 그러나 최고는 펠레이다. 펠레는 메시보다 더 크고, 강했으며, 헤더에도 능했다. 펠레가 메시보다 더 뛰어난 선수다. 펠레는 마치 ‘외계인’ 같은 선수였다. 지금까지 나는 펠레보다 더 뛰어난 선수를 보지 못했다. 펠레는 메시의 능력과 호날두의 장점을 모두 가진 선수다. 메시는 디 스테파노와 같은 위대한 선수들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만, 펠레만은 넘을 수 없다.
페페 (주제 마시아, 1954~1969년 산투스에서 활약하던 왼쪽 윙어)
페페 (주제 마시아, 1954~1969년 산투스에서 활약하던 왼쪽 윙어)
나의 왕, 지구 최고의 선수.
다다 마라빌랴 (1970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후보 선수)
다다 마라빌랴 (1970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후보 선수)
나는 그와 필드에서 몇 번 대면해 보았는데 내 생각엔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테오필로 쿠비야스
테오필로 쿠비야스
펠레는 1970년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우승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그것이 그의 운명인 것으로 알고 있는것 같았고, 그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와 같았다.
마리우 아메리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마사지사)
마리우 아메리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마사지사)
저는 펠레가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제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운동 선수였고, 피치위의 절대적 존재였죠. 펠레는 모든 것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그라운드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쓸고 다녔고, 무브먼트들은 훌륭하였고, 마크맨들을 너무나 쉽게 따돌리곤 했죠. 폭발적 슈팅의 소유자이었지만 공중볼 처리도 수준급이었고 어떤 포즈에 있던 간에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죠. 음 통산 1283골이라는 기록만 보고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펠레는 묶어두기가 무척 힘들었고(could not be contained) 17살의 나이에 출전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단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브라질 대표로 뛰었고, 그 당시 최고로 꼽히던 팀들과 대전하면서 날아다닌 것이 반증해 주지 않을까요? 예선에서 저는 잉글랜드 대표로서 브라질과의 경기에 출장했지만 다음 경기에 펠레가 출전했었죠. 브라질과 우린 0-0으로 비기고, 골에 목이 말랐던 브라질은 한 번 펠레에게 기회를 주는 모험을 합니다. 그 뒤로 펠레는 뒤돌아 볼 틈없이 승승장구했죠. 저번 달 442에서
호마리우는 자신이 펠레 다음으로 축구사의 2번째로 위대한 선수라고 자평하더군요. 네, 호마리우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전 그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미셸 플라티니,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페렌츠 푸스카스,
존 찰스 등등을 꼽자면요.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엔 펠레 뒤로
디에고 마라도나를 No.2로 꼽을 수 있겠고, 호마리우는 아마 20위 안 쯤에 있을 것 같습니다.
바비 롭슨 (<Four Four Two> 2005년 8월호 인터뷰에서)
바비 롭슨 (<Four Four Two> 2005년 8월호 인터뷰에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조언을 해주셨다: "앞으로도 누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든, 펠레가 최고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위르겐 클롭
위르겐 클롭
하지만 나는 지금의
리오넬 메시보다도 뛰어난 선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바로 펠레야. 펠레는 피치 위에서 양발을 모두 사용했어. 그는 그의 왼발이 위험한만큼 오른발도 위협적이었지. 그는 공중에서조차 강력했어. 그리고 많은 찬스들을 창조해냈지. 게다가, 그는 정말 상상 이상의 존재야. 어느 날 난 펠레가 골키퍼로 뛰는 것까지 봤어. 글쎄, 난 그걸 보고 '펠레가 원래 골키퍼였나?' 하고 착각했다니까. 그는 그만큼 다재다능해.
내가 항상 역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내 친구 펠레가 오늘 밤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같은 감도와 같은 힘으로 두 발을 동등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축구가 없었다면 그는 분명히 축구를 발명했을 것입니다.ㅠ 우리는 훌륭한 관계를 가졌고 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그와 역대 최고의 다른 선수들 사이에서 누가 최고였는지 순위를 매기는 것은 나에게 쓸모없는 것 같습니다. 알타피니가 골도 잘 낸다고 하더군요! 소속팀인 산토스와 훈련을 시작하기 하루 전 그는 코치와 계약을 맺고 영입을 희망하는 신입 골키퍼로 위장했다. 아무도 그가 펠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페널티 지역 가장자리에서 그의 팀 동료들이 만든 모든 슛을 막아냈습니다!!!
잔니 리베라 #
내가 항상 역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내 친구 펠레가 오늘 밤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같은 감도와 같은 힘으로 두 발을 동등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축구가 없었다면 그는 분명히 축구를 발명했을 것입니다.ㅠ 우리는 훌륭한 관계를 가졌고 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그와 역대 최고의 다른 선수들 사이에서 누가 최고였는지 순위를 매기는 것은 나에게 쓸모없는 것 같습니다. 알타피니가 골도 잘 낸다고 하더군요! 소속팀인 산토스와 훈련을 시작하기 하루 전 그는 코치와 계약을 맺고 영입을 희망하는 신입 골키퍼로 위장했다. 아무도 그가 펠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페널티 지역 가장자리에서 그의 팀 동료들이 만든 모든 슛을 막아냈습니다!!!
잔니 리베라 #
펠레는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축구의 집합체다. 펠레는 메시가 가지지 못한, 피지컬 능력을 가졌다. 그는 들소였다. 그래야 한다면 그는 수비수들을 밀고 들어가서 박살냈다. 펠레는 메시가 가진 것과 동등한 테크닉, 기술, 창의력을 지녔고, 더 힘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그리고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펠레는 야수가 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메시는 좀 더 조용하다. 펠레는 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강함이 있었다. 더 어려운 경기일수록, 그는 더욱 위험해졌다. 내 생각에는 아마 이 것이 펠레가 메시보다 우월한 점일 것이다.
펠레가 가장 위대했다. 그는 간단히 말해 결점이 없었다. 피치 밖에서도 그는 항상 웃었고 긍정적이었다. 그가 화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는 펠레로 사는 걸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세상의 플레이를 하곤 했다. 그 시기(17세)가 진정으로 그가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펠레의 정점은 1970년 월드컵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은 멕시코 월드컵 비디오를 보고 실망하곤 한다. 내 아들도 그랬는데, 축구에 미친 친구들과 함께 그 경기들을 모두 보고 이렇게 말했다. "펠레는 정말 뛰어난 선수네요. 그런데 아버지가 묘사하신 만큼의 선수는 아니네요." 하지만 그건 그들이 1958년에서 1964년, 좀더 날씬했던 초기의 펠레를 보지 못했기에 할수있는 말이다. 그 이후에 펠레는 벌크업을 했고, 근육을 키워 더 강해지면서 기술 역시 보존했지만 날렵함을 일부 잃었다. 펠레의 최전성기는 1958년에서 1964년까지였다. #
토스탕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의 파트너)[102]
펠레가 가장 위대했다. 그는 간단히 말해 결점이 없었다. 피치 밖에서도 그는 항상 웃었고 긍정적이었다. 그가 화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는 펠레로 사는 걸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세상의 플레이를 하곤 했다. 그 시기(17세)가 진정으로 그가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펠레의 정점은 1970년 월드컵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은 멕시코 월드컵 비디오를 보고 실망하곤 한다. 내 아들도 그랬는데, 축구에 미친 친구들과 함께 그 경기들을 모두 보고 이렇게 말했다. "펠레는 정말 뛰어난 선수네요. 그런데 아버지가 묘사하신 만큼의 선수는 아니네요." 하지만 그건 그들이 1958년에서 1964년, 좀더 날씬했던 초기의 펠레를 보지 못했기에 할수있는 말이다. 그 이후에 펠레는 벌크업을 했고, 근육을 키워 더 강해지면서 기술 역시 보존했지만 날렵함을 일부 잃었다. 펠레의 최전성기는 1958년에서 1964년까지였다. #
토스탕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의 파트너)[102]
진지하게 묻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펠레는 세계를 3번 제패했다. 반면 메시가 이룬 건 없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메시가 월드컵을 3번 우승하면 그때 그 질문을 던져 달라.
자이르지뉴 (메시와 뎀벨레가 1970년 월드컵 때 자신과 펠레가 세레머니한 것을 재현한 후 펠레와의 비교를 묻는 질문에) #
자이르지뉴 (메시와 뎀벨레가 1970년 월드컵 때 자신과 펠레가 세레머니한 것을 재현한 후 펠레와의 비교를 묻는 질문에) #
한 번은 내가 메시가 특별하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창의성에서 특별하다고 한 것일 뿐이다. 메시는 특별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다. 펠레는 인간을 넘어섰다. 그에게 단점을 찾을 수 없다.
치치
치치
메시는 현세대 최고의 선수지만
마라도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지전증한 존재이다. 이 전에도 이후에도 마라도나에 비견할 선수는 찾을 수 없다. 마라도나보다 우위에 있는건 펠레겠지. 나는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메시 순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top 10에는 브라질 선수가 두 명 더 있는데, 그건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이다.
이번 월드컵 우승으로 메시는 디에고처럼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월드컵 우승이 그를 역대 최고로 만들지는 못했다. 메시는 펠레와 마라도나보다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메시는 크루이프와 디스테파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클라우디오 카니자 #
이번 월드컵 우승으로 메시는 디에고처럼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월드컵 우승이 그를 역대 최고로 만들지는 못했다. 메시는 펠레와 마라도나보다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메시는 크루이프와 디스테파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클라우디오 카니자 #
1위는 펠레, 2위는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는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 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감독 (유일하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모두 지도해본 감독으로 최고의 선수를 뽑으라는 질문에) #
알피오 바실레 감독 (유일하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모두 지도해본 감독으로 최고의 선수를 뽑으라는 질문에) #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메시도 이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 (1986, 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 (1986, 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
펠레, 마라도나, 메시는 거의 같은 레벨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펠레는 엄청났고 한 단계 더 위에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오마르 라로사 (1978년 월드컵 우승멤버) #
오마르 라로사 (1978년 월드컵 우승멤버) #
그는 축구 기술이 총집합되어 있는 완벽한 도서관과도 같다. 역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고, 그 다음은 마라도나와 디 스테파노이다.
로베르토 페르푸모
로베르토 페르푸모
펠레는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자친토 파케티
자친토 파케티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펠레와 다른 위대한 선수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없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미겔 앙헬 브린디시, 펠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미겔 앙헬 브린디시, 펠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의심의 여지없는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 세계 축구의 상징이다. 펠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엘리아스 피게로아
엘리아스 피게로아
나는 운이 좋게도 그가 미국 팀에서 뛰고 있을 때 펠레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텔레비전에서만 그를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경기 동안, 나는 정말 인상 깊은 두 장면을 보았고, 그가 정말 모든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비오 카펠로
파비오 카펠로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로타어 마테우스 (2014년 브라질 tv프로그램 캄페앙 쇼에서)
로타어 마테우스 (2014년 브라질 tv프로그램 캄페앙 쇼에서)
나는 펠레와 몇 년 동안 함께 플레이했는데, 그는 수비수였다. 골을 가장 많이 넣는 수비수.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다. 또 다른 펠레가 나타나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지
지지
역사상 최고. 이 이상의 수식어는 그에게 필요 없다.
아데미르 다기아
아데미르 다기아
펠레는 명백하게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그가 생각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펠레는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드리블을 시작할 것이고 당신이 한 쪽 눈을 깜빡인다면 그새 당신을 제치고 다른 선수 한 명을 추가로 제친 상태일 것이다. 나는 펠레에 근접한 선수조차 보지 못했다. 그는 놀라움 그 자체다.
디노 사니
디노 사니
펠레는 피치에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최고의 수비수들이 그를 마킹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언제나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두세 명이 달라붙어도 금세 4야드가량 마킹하는 선수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였으며, 나는 그보다 뛰어난 축구선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펠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 그는 외계인이었고 그가 드리블 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했다. 거의 공을 안빼앗겼다.나는 마라도나나 메시를 포함해 그 어떤 선수도 그처럼 공을 다루는 선수를 본적이 없다. 펠레는 축구의 기쁨, 순수한 아름다움을 상징했다." (펠레의 사망 소식에)
산드로 마촐라 #
"펠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 그는 외계인이었고 그가 드리블 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했다. 거의 공을 안빼앗겼다.나는 마라도나나 메시를 포함해 그 어떤 선수도 그처럼 공을 다루는 선수를 본적이 없다. 펠레는 축구의 기쁨, 순수한 아름다움을 상징했다." (펠레의 사망 소식에)
산드로 마촐라 #
매우 많은 선수들이 플레이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 패스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펠레의 머릿속에서라면 패스라는 것은 영화가 진행되듯이 흘러가는 일이다. 펠레는 축구를 이해한다.
니우통 산투스
니우통 산투스
펠레는 발명가였다.
비센테 델보스케
비센테 델보스케
내가 생각하기에는 펠레가 넘버원이다. 그는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이다. 그는 정말 결점이 없다. 신체적으로 완벽하며, 아주 기술적이고 헤더도 잘한다. 오른발도 잘 쓰고 왼발도 잘 쓴다. 절대 예상할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지능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펠레는 언제나 넘버원일 것이다.
네비오 스칼라
네비오 스칼라
신체적인 능력과 기술적인 면을 생각해 보면, 펠레는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파올로 로시
파올로 로시
당신이 최고의 브라질 풀백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펠레라고 답하겠다. 최고의 하프백과 윙어가 누구냐고 묻는다 해도 펠레를 답하겠다. 그는 심지어 우리 스쿼드 안에서 최고의 골키퍼이기도 할 것인데, 그 같은 선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앙 사우다냐, 위에서 바비 무어가 언급한 내용의 원문이다.
주앙 사우다냐, 위에서 바비 무어가 언급한 내용의 원문이다.
비교 대상이 되는 선수들의 세대는 각각 다르지만, 각자 이룬 것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면 펠레가 마라도나&메시보다 위대하다. 내가 플레이를 본 선수 중에는 이 세 명이 가장 뛰어났다.
파블로 포를란
파블로 포를란
펠레는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완성된 선수이다.
#
Q: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메시가 우승하면 마라도나를 능가할까요?
A: 두 선수 간의 논쟁은 많이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메시가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건 분명하나 그는 마라도나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Q: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요?
A: 저에게 펠레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입니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고 총 3번을 우승했습니다. 그는 슈팅, 헤딩, 볼컨트롤 등 미드필더와 공격수가 가져야할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
리카르도 보치니
Q: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메시가 우승하면 마라도나를 능가할까요?
A: 두 선수 간의 논쟁은 많이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메시가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건 분명하나 그는 마라도나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Q: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요?
A: 저에게 펠레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입니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고 총 3번을 우승했습니다. 그는 슈팅, 헤딩, 볼컨트롤 등 미드필더와 공격수가 가져야할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
리카르도 보치니
스피드, 가속력, 힘, 폭발력, 헤더, 협응성, 시야, 반응 속도, 경기를 읽는 능력, 왼발, 오른발. 모든 것에 능통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선수다. 역대 최고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펠레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 기술적으로 가장 재능 있는 선수였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압도적인 클래스와 부러워할 만한 신체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마르첼로 리피
마르첼로 리피
당신이 몇 살인지는 상관없는데, 감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펠레'를 논하지는 마세요.
I don't care how old you are, you don't say "Pele" without knowing who you're talking about.
그레이엄 테일러, 다큐멘터리 Bobby에서
I don't care how old you are, you don't say "Pele" without knowing who you're talking about.
그레이엄 테일러, 다큐멘터리 Bobby에서
펠레는 천재였다. 엄청난 킥 능력을 양 발에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에 용수철이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공을 잘 받았다. 망치로 치는 듯한 헤더 슈팅 능력도 가지고 있었고, 먼 거리에서도 득점했다. 필드 위의 코치였으며 전략가이자 해결사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공을 가지고 하는 일에서만큼은 마라도나가 더 뛰어났고, 그러므로 기술적인 면에서는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라고 본다.
호르헤 발다노
호르헤 발다노
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들은 모두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고 그가 코스모스와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언제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좀 더 어려운 환경에서 플레이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펠레는 나에게 있어 축구의 왕으로 언제나 남아 있으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입니다.
로저 밀러
로저 밀러
펠레와 디 스테파노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디 스테파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펠레는 모든 것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로헬리오 도밍게스
로헬리오 도밍게스
축구의 왕, 가장 위대한 펠레.
아베디 펠레
아베디 펠레
그의 축구는 모두를 앞선 것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다리오 페레이라
다리오 페레이라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 펠레,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이 순서겠지.
알시데스 기지아 (2005년 마르카와의 인터뷰에서)
알시데스 기지아 (2005년 마르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40세였던 펠레와 딱 두 경기를 함께 뛴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왜 넘버원인지 알 수 있었다.
레오베지우두 주니오르
레오베지우두 주니오르
펠레는 축구괴물이다.
히우데라우두 벨리니[105]
히우데라우두 벨리니[105]
완벽한 선수. 기술, 시야, 트릭, 신체능력을 겸비했던 유일한 선수이다.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펠레는 평범한 골을 예술작품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펠레는 닮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던 선수였고, 무엇보다도 점프 능력이 아주 탁월하여 헬리콥터처럼 보였던 선수이다. 나에게 그는 농구선수처럼 보였으며 공중에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절대 닮을 수 없는 것들이다. 펠레는 완벽한 선수였다.
실비오 마르솔리니
실비오 마르솔리니
마라도나와 펠레 중에서는 펠레가 더 뛰어난 선수였다. 펠레는 사실상 완벽한 선수였다. 양 발과 머리를 사용해서 슈팅을 때릴 수 있었다. 마라도나는 환상적인 곡예사이다. 오른쪽 다리를 거의 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왼발로 하는 플레이들은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마라도나가 양발 사용 능력이 뛰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두 선수 모두 환상적인 선수였다.
카레카
카레카
그는 가장 완벽한 10번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완벽한 선수였다.
즈보니미르 보반
즈보니미르 보반
나와 펠레의 차이?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저 지나가는 '스타'일 뿐이었고 그는 천재이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그의 눈을 보고 공포를, 아주 심각한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눈은 불타고 있었고, 맹수의 눈과 같았다.
볼프강 오베라트
볼프강 오베라트
감히 내가 펠레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왕이다.
지에구 타르델리
지에구 타르델리
펠레는 지금의 메시나 호날두보다 뛰어난 선수였다.
주니뉴 파울리스타
주니뉴 파울리스타
Q: 펠레를 정의 내린다면?
A: Perfect.
메시는 그의 시대에서는 최고이나 역사상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 입니다.
호나우지뉴
A: Perfect.
메시는 그의 시대에서는 최고이나 역사상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 입니다.
호나우지뉴
Q: 역대 최고의 선수 3명을 말해봐.
A: 펠레, 다른 한 명은 에우제비우, 포르투갈인이지. 그리고 우리의 친구 크리스티아누. 또 포르투갈 사람이네! 하하하...
Q: 펠레를 1위로 선정한 이유는 뭐지?
A: 음, 글쎄... 그는 그의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야. 에우제비우도 마찬가지고. 크리스티아누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니까 넣었어.
루이스 피구, 리오 퍼디난드와의 1:1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A: 펠레, 다른 한 명은 에우제비우, 포르투갈인이지. 그리고 우리의 친구 크리스티아누. 또 포르투갈 사람이네! 하하하...
Q: 펠레를 1위로 선정한 이유는 뭐지?
A: 음, 글쎄... 그는 그의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야. 에우제비우도 마찬가지고. 크리스티아누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니까 넣었어.
루이스 피구, 리오 퍼디난드와의 1:1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제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마라도나, 메시 등을 거론하며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입니다. 그가 훌륭한 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팀에서도 가장 빛났던 것은 펠레였습니다.
빈센트 콤파니
빈센트 콤파니
나는 낙후된 환경에서도 그런 기적을 일으킨 펠레나 가린샤 같은 1950년대의 스타들이 오늘날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상상하곤 한다. 반대로 내가 펠레가 쓰던 장비를 쓴다면, 10배는 더 적은 골을 넣었을 것 같다. 분명히.
알렉산다르 케르자코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러시아 선수)
알렉산다르 케르자코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러시아 선수)
메시는 2010년대의 펠레이다.
줄리아누 벨레티
줄리아누 벨레티
나의 롤모델은 펠레였다. 나의 아버지는 펠레의 영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고, 나는 그 영상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클로드 마켈렐레
클로드 마켈렐레
모든 브라질인에게 있어 펠레는 '세기의 선수'이다.
카푸
카푸
메시는 아직 펠레나 마라도나의 체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디디에 드록바
디디에 드록바
펠레는 축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세계에서 펠레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한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런 순위[107]를 누가 만들었는지 묻고 싶군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그 누구도 꺾지 못했습니다. 펠레는 경쟁력 있는 경기들에서 1225골을 넣었고, 그 경기들은 친선경기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펠레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절대로 그만큼 뛰어나게 될수가 없습니다. 사실, 호날두는 절대로 펠레, 마라도나, 메시만큼 잘하질 못할 겁니다. 그들은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들입니다.
호세 알타피니
호세 알타피니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있을지라도 펠레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페르난도 토레스
페르난도 토레스
펠레는 글로벌 맨이자 아이콘이자 모두의 우상이다. 역사상 최고이다.
네이마르
네이마르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선수가 펠레라는 말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메시는 정말 위대하다. 하지만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더 대단했다.
호나우두
메시는 정말 위대하다. 하지만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더 대단했다.
호나우두
펠레 같은 선수는 앞으로 1000년이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내가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길 바란다.
산도르 코츠시스
산도르 코츠시스
역대 최고 선수에 대한 논쟁에서 나를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이며,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일 뿐이다. 앞으로 메시가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메시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를 더 자주 보며, 그래서 메시를 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나와 펠레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 나와 펠레는 함께 카타르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디에고! 디에고!"하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펠레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펠레에 대한 호응은 나에 비해서 미적지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 현역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플레이만 봤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오늘날의 선수를 고평가한다. 그렇기에 시대가 다른 선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뛰는 선수와 과거의 선수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나도, 메시도 역사상 최고는 아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디에고 마라도나
8. 어록
축구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축구는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108]
나는 미드필드 라인으로 자주 내려가 미드필더들을 돕곤 했다. 그때는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난 분명히 내가 넣은 골보다도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Q: 당신이 현대에 뛴다면 1,000골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A: 아니다. 현대의 장비는 나의 현역 시절보다 훨씬 발전해 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현대에 선수생활을 한다면, 두 배 많은 2,000골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A: 아니다. 현대의 장비는 나의 현역 시절보다 훨씬 발전해 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현대에 선수생활을 한다면, 두 배 많은 2,000골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비행기에서 직접 자신의 짐을 옮기는 축구선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축구선수들이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페널티 킥은 골을 넣는 가장 비겁한 방법이다.[109]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브라질은 축구를 통해 먹고 자고 마신다. 브라질은 축구로 살아간다.
모든 것은 열정에 달렸다. 그것은 팽팽한 기타 줄과 같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며,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축구로서 얻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나에게 모든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0.5초 빨라야 한다.
축구를 하는 모든 어린이들은 펠레처럼 되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축구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줄 책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
아프리카에 갔을 때, 어딜 가든지 저를 신처럼 받들더군요. 아마도 제가 흑인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기 때문인거 같아요. 저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백인의 나라에서 흑인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저는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희미하든지 간에 말이죠.
가난에서 어린이를 구해내는 것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현재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
나이는 상관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누구라도 좋은 선수가 되려면, 무의식 속에서도 양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다. 나는 축구공을 숭배하며, 축구공을 신처럼 다룬다. 많은 선수들은 축구가 그저 공을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좀 더 공을 예쁘게 다룰 필요가 있으며 공을 찰 때 귀중한 보석을 대하듯 해야 한다.
사람들은 늘 내게 묻곤 해. "제2의 펠레는 누구죠? 언제 나타납니까?" 사견을 밝히자면 '제2의 펠레'같은 건 태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공장 문을 닫으셨거든.
축구는 한두명의 스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늘 경기 안에 어우러져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소극적으로 군다면 이길 수 없다. 이것은 팀 게임이므로 누구도 혼자 플레이할 수 없다. 11명이 1명처럼 플레이해야 승리가 찾아온다.
나는 가끔 잠을 자지 않고 그저 누워서 궁금해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펠레'가 그리 유명한 이유가 뭘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외칩시다. 러브-러브-러브!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영원히.
펠레의 마지막 유언.
펠레의 마지막 유언.
9. 펠레의 저주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명성이 자자한 펠레이지만 또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말을 하면 언제나 그것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펠레의 저주 때문이다. 이놈의 저주 때문에 평생동안 엄청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그저 이건 농담삼아 하는 얘기니 너무 진지하게 펠레를 까는 건 자제하자. 틀린 것이 부각돼서 그렇지 정확하게 예측한 것도 많기 때문.
어쨌든 펠레의 저주 희생양들에겐 흑마법사라고 왕창 까인다. 이게 펠레의 잘못이라곤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펠레가 무언가를 예측할 때마다 지목당한 선수들의 팬들은 그만좀 하라고 원성이 자자하다. 우리나라 역시도 펠레가 월드컵에서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자 펠레를 깠다. 펠레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까지 세트로 까였고.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개드립을 듣고도 기겁한 쪽은 오히려 네이마르의 팬들이었고 메시팬들은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실제로 펠레가 네이마르가 낫다는 말을 할 때마다 네이마르는 매 경기마다 부진했고, 메시는 귀신처럼 골을 넣으면서 MVP 골든상 수상까지 했다. 여담으로 펠레는 자국 월드컵 직전에 아르헨티나는 팀이 엉망이고 메시를 3류 선수라며 혹평까지 했다. 그런데 월드컵 본선에서 온갖 하드캐리하면서 자국팀을 결승전까지 올렸다. 비록 준우승 했지만 골든볼까지 수상도 받았다.
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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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있는 기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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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모두가 알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거나 퇴장을 당하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투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 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투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투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실제 경기로는 1964년 1월 19일,
산투스 FC와
그레미우의 타사 브라지우 4강 2차전에서 경기 86분에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했다. 산투스는 그 대책으로 펠레를 골키퍼로 뛰게 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이미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골키퍼로도 여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결승으로 이끌었다.
참고하면 좋은 에펨코리아 글 이런 식으로 펠레가 골키퍼로서 뛴 기록은 놀라운 수준이다. 공식 경기와 비공식 경기를 합쳐 골키퍼 대신 뛴 경기가 7경기나 되는데, 실점은 단 한 개 뿐이다.
퇴장당한 지우마르의 유니폼을 빌려 입은 펠레
펠레의 골키핑 능력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 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의 일이다. 그 날 따라 수비수들이 펠레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고 평소에 매너 좋은 펠레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러다 펠레가 파울을 당했지만 심판이 오히려 펠레에게 파울을 선언했고 펠레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심판은 이런 펠레에게 퇴장을 주었는데 펠레가 이렇게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오히려 주심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관중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펠레보러 비싼 돈 주고 표 사서 경기보러 왔는데 펠레를 퇴장시켜? 장난하니?" 결국 남은 경기는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시켜야만했다. 그리고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중징계를 받았다.
- 펠레가 아프리카로 투어를 갔을 때의 일이다. 펠레는 그 날따라 엄청난 팬들의 환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선 경기를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인데 그 이후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펠레는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각종 묘기들을 선보이며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골 폭풍을 쏟아부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환호성이 커질수록 상대팀 수비수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골키퍼는 아예 경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펠레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저 골키퍼도 가족들이 있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을텐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있는 힘껏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게다가 본인의 서브 포지션이 골키퍼였기 때문에 골을 먹었을 때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펠레는 골키퍼에게 사과하러 상대팀 라커룸에 방문했지만 골키퍼는 펠레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인터컨티넨탈컵에서 SL 벤피카를 깨박살내자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유럽의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 펠레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때 이적료로 백지수표를 준비했다는 구단도 있다고 한다.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토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월드컵에서 3번을 우승하여 월드컵의 대명사같은 선수지만 실제로 부상 또는 부상의 후유증이 없는 풀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뛰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명예 KBE훈장을 받았다. 2등급 훈장이기 때문에 작위급 훈장이다. Sir칭호가 안 붙는 명예 작위이긴 하지만 현재 축구계의 유일한 KBE 수훈자다.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 #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 #
- 펠레가 청소년일 적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었기에 그는 지금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는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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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계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만한 빛나는 발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자신의 발 모양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못생겼다고. 축구선수들의 발이 못생긴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펠레는 특히 심하다. 발마디의 굳은 살은 기본이고 발톱도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밑의 사진은 현재 일반에 유일하게 공개된 펠레의 맨발 사진이며 이것 역시 펠레 본인이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다.
펠레의 맨발 사진
- 아들 에지뉴도 축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이 아들내미가 마약이나 팔고 다니는 사고뭉치여서 펠레의 속을 꽤나 썩히고 있다. 막내아들인 1996년생 조슈아도 산투스 FC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2015년 미국의 탬파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면서 축구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를 한다. 애초에 펠레의 조국 브라질은 지금도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라 갈 수 밖에 없긴 하다.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16개국 본선 당시, 브라질은 16강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를 만났다. 당시 물이 올라와있던 펠레는 자신만만해 했으나, 브라질은 승리하긴 했지만 고작 1골을 넣는 데 그쳤다. 왜 '고작'이냐하면, 당시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6전 전승을 하고 조별리그 1차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4-1로 이겼던 강팀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경기서 잉글랜드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펠레의 골이나 다름없는 슛을 막아내는 등 역대급 선방들을 보여줬다. 경기가 끝나고 펠레는 "잉글랜드 골문은 은행(Banks) 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라는 드립을 남겼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맞아 삼성전자에서 펠레가 등장한 파브(PAVV) 텔레비전 CF를 제작했다.
펠레가 출연한 삼성전자 파브(PAVV) 텔레비전 CF |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빗나가는 예측을 자주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 펠레는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는 1981년에 개봉되었다. 여기에는 영화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막스 폰 시도우 등이 출연했으며 펠레 외에도 보비 무어등의 유명 축구 선수들이 출연했었다. 스토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장교들이 선전용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표팀과 자신들의 정예 축구팀과의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포로 대표팀 선수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데스메치로 알려져 있는 FC start 선수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1986년에는 핫샷(Hotshot)이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형편없던 실력의 한 젊은 미국 리그 축구선수가 펠레를 찾아가 수련을 받은 후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대한민국에선 SBS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013년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면서 펠레도 명예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펠레가 뛰던 당시 발롱도르는 유럽 국적의 선수들만 수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펠레는 그런 활약을 하고도 수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은 3번째 명예 발롱도르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 펠레가 선수 시절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면 7회를 수상했을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 아닌 프랑스 풋볼[110]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기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58년~1961년까지 4회, 이후 1963, 1964, 1970년 수상이다.
-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 '라 노체 델 디에스(10시의 밤)'에 펠레가 첫 초청자이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마라도나가 먼저 헤더 대결(서로에게 헤더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하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다.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마라도나에게서 한 30cm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직행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카포에라를 익힌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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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컵 축구의 최종보스인 GOD 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1~7스테이지에서는 부심으로 뛰다 8스테이지에서 선수로 돌변하여 경기장에 난입한다.
- 대한민국과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2년 선수로서 한국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 대한뉴스 친선 경기에서 펠레가 속한 산투스 팀이 3:2로 이겼다. 1998년에도 방한했다. 부산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도 참여했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팀에 대해 좋은 멘트를 많이 남겼다. 브라질에 있는 펠레가 만든 팀인 리토라우FC에서 10번을 달고 뛰던 한국 축구 선수 임규혁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피스컵 대회 고문 및 홍보대사를 맡아 방한한 적이 있다. 피스컵은 열혈 축빠이기도 했던 문선명이 처음 개최한 것이며, 당시 펠레도 취지에 공감해 여러가지 지원 및 자문을 했었다. 2012년 문선명 사망때는 펠레가 직접 조전을 보내기도 했다.
- 바비 찰튼도 언급한 바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17살때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묻는 질문에 나라고 대답했으며, 세계 최고의 윙어를 묻자 그것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선수였다면 농담이라고 웃었겠지만, 펠레는 진정으로 믿고 대답했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누구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
- 펠레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명하다. 펠레는 1958년 월드컵 개최 당시 17세의 유망주 소년일 뿐이었는데, 때문에 그가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 주축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발렌티노 마촐라를 닮은 플레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했던 조제 알타피니도 있었고 여러모로 펠레가 낄 자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통념상 10번은 다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타당해 보였는데, 당시의[111] 팀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이례적으로 3번을 달고 뛰었고( 다른 팀 다 멀쩡한 와중에 브라질만 골키퍼가 3번을 달았다.다행히도 후보 골키퍼였던 카스티유는 정상적으로 1번을 받았다.), 8번이나 10번을 받아야 했을 팀의 플레이메이커 지지는 6번을 받고(지지는 전 대회인 1954년 월드컵에서 8번을 달았었다), 라이트 윙이 아닌 레프트 윙어 마리우 자갈루가 7번을 받고 반대로 라이트 윙인 가린샤가 11번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페렌츠 푸스카스 같은 스타선수나 달 수 있었던, 중심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돌아가야 할 10번의 영광이 뜬금없게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망주 스트라이커에 불과했던 펠레에게 주어진 것이다. 펠레로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10번이었는데, 이 10번 셔츠를 입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10대 선수가 되는 바람에 이후에도 그 번호를 입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대표로 뛰었던 당시에 누구도 그의 등번호를 달 수 없었다.
- 그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축구선수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좋은 이미지가 강하다. 펠레는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시절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되어 국정에도 참여하였다.
- 2012년에 브라질의 방송사 SBT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에서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스포츠인 중에는 6위의 아일톤 세나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축구선주 중에서는 제일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 2016년에 '펠레: 버스 오브 어 레전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빈센트 도노프리오 등 유명한 배우도 출연했고, 펠레의 가족들이나 펠레 역할의 배우는 실제로 브라질인을 캐스팅하였다. 펠레의 어린 시절 삶과 1958년 월드컵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린샤가 펠레보다 키가 큰 점 등 잘못된 고증이 조금 있지만, 펠레의 유년기 삶과 브라질 축구계의 분위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볼 만한 영화이다. 펠레 본인이 직접 마지막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것도 포르투갈어가 아닌 영어로 했다.
- 코로나로 시상이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스트라이커 대신 미드필더 포지션에 이름이 올랐다는 점이 논란이 되긴 했으나, 선정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리오넬 메시,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올타임 드림팀 선정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 바로 위 상위 문단에 그가 탄생시킨 펠레의 저주 라는 한때 월드컵에서 빼놓을 수가 없던 대표적인 징크스로 인하여 한국같은 나라에서 누구의 별명이 "펠레다."라고 한다면, 그건 축구에 천재인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예측하면 무조건 실제로는 정반대로 일어나게 되는 사람을 칭하는 별명이 되버리기도 했다.
[1]
헬무트 란과 공동 득점 2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최초 증정. 비공식 수상.
[2]
최초 수상자이자 최연소 수상자.
[3]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4]
펠레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을 때 당시 유명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유행에 따라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등록하려 했을 때 실수로 i를 빼먹어서 에지송이 아닌 에드송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펠레의
출생신고는 10월 21일로 등록되었지만, 펠레는 관청 측의 실수이고 원래는 10월 23일 출생이라고 밝혔다.
[6]
Três Corações. 한국어로 번역하면 세 개의 심장이란 뜻이다.
[7]
15시 27분/브라질 상파울루 시간대(UTC-3).
[8]
Pelé: A Biography(펠레 자서전) 175 페이지에 펠레의 신장이 5'8''(5피트 8인치. cm로 환산하면 약 173cm)로 기재되어 있다.
#
[9]
원래는 오른발잡이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완벽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한다고 충고해 양발을 쓰게 되었다.
[10]
펠레가 10번을 달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당시에 브라질 축구협회가 등번호를 제출하는 것을 잊었고, 이에 FIFA의 어느 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브라질 선수들에게 등번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월드컵에서 펠레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고, 그때부터 10번은 축구에서 에이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11]
축구선수 커리어를 시작할 때에는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그러나 인사이드 포워드를 사용하는 전술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축구계에서 비주류 전술이 되어가고 있었고, 결국 1970년대를 지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브라질과 산투스는 1950년대 말부터 4-2-4 포메이션을 자신들의 주요 전술로 채택했고 펠레는 그런 변화에 적응하여 기량을 유지했으며, 1970년대에도 처진 위치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득점 기록만 보면 최전방에서 골에만 집중한 스트라이커로 착각하기 쉽지만, 주로 2선에 머무르며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했으며 덤으로 득점력까지 뛰어났던 선수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프리롤 공격수 역할의 왼쪽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 및 중앙
컴플리트 포워드 스타일의 선수이다.
[12]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포지션이다. 10번이 9번과 함께 최고의 공격수 외에도 훗날
마라도나와
메시와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상징 번호가 된 것도 펠레의 영향이다.
[13]
네이마르 주니오르와 함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남미 선수 A매치 득점 랭킹 2위이다.
[14]
본명은 주앙 하무스 두나시멘투(João Ramos do Nascimento)로 1917년에 출생하여, 1996년 사망하였다.
[15]
Celeste Arantes. 1922년 출생으로, 2023년 기준 100세시며 엄청난
장수를 하고 계신 중이지만 모친의 건강 또한 상당히 위중한 상태라고 전해지고 있다.
[16]
Maria Lúcia Nascimento
[17]
Jair Arantes do Nascimento. 남동생의 자녀. 1942년~2020년
[18]
상파울루 출신의
일본계 브라질인으로 사업가이다.
[19]
혼외자. 아니치아 마차도 소생.
[20]
혼외자. 레니타 쿠르츠 소생.
[21]
첫번째 부인인 로즈메리 촐비 소생.
[22]
본명은 에드손 촐비 두나시멘투. 로즈메리 촐비 소생. 2014년, 마약 밀매를 통해 돈세탁에 가담한 혐의로 1심에서 33년형을, 항소심에서 12년 10개월을 선고받았다.
[23]
로즈메리 촐비 소생.
[24]
두번째 부인인 아시리아 나시멘투 소생. 셀레스치와 쌍둥이이다.
[25]
아시리아 나시멘투 소생. 조슈아와 쌍둥이이다.
[26]
혹은 'King Pele', 브라질에서는 'O Rei do Futebol', 'O Rei'(발음:우 헤이). 해외에선 왕이란 의미로 쓰기에 오역으로 보일 수 있으나 영어권 국가에선 최고의 존칭으로 황제 대신 왕인 'King'을 더 자주 쓴다.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축구공
호나우두"와 같은 말실수로 구설수에 올랐던 SBS 동시 통역사가 펠레를 "축구왕"이라고 통역한 것은 해외에서의 명칭을 직역했기 때문이다. 이 왕이라는 칭호는 1958년 2월 26일 쓰인 칼럼에서 처음으로 쓰인 유서 깊은 별명이다.
기사.
[27]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브라질의 공식 전국 리그였다.
[참고]
공식적인 월드컵 골든볼은 1982년부터 시상되었으며 그 이전 골든볼 수상자들은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 피파 공홈에서 1982년 이전 수상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인상 하나 뿐이다.
# 위키피디아에서도 역대
골든볼, 실버볼, 브론즈볼과 올스타 팀 목록의 출처로 블로그 사이트를 참조하고 있었으며 잘못된 정보라고 보는게 맞다. 그럼에도 목록의 선수들의 은근히 설득력이 있어 이 목록은 전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실제로 낚인 언론들도 있다. 다만, 1998년 아르헨티나의 최대 언론인 <CLARIN>에서 역대 월드컵 MVP를 뽑는데 1982년 이전 수상자들로 알려진 선수들이 대거 여기에 뽑혔다. 1950년 옵둘리오 바렐라, 1958년 수상자가 펠레인 점만 빼면. 또한 1958년 월드컵 직후 키커지 창립자이자 WM 포메이션이란 용어를 처음 쓴 베커가 매긴 평점에선 펠레가 디디보다 월드컵에서 활약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1970년 월드컵 최고의 선수가 펠레였다는 것은 이미 자타공인이라 정말로 전문가들이 과거 골든볼 수상자들을 선정한다면 1970년은 펠레가 뽑힐 것으로 전망된다. 옵타에서도 이 대회 평점 1위로 펠레가 선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FIFA 월드컵/수상 참고.
[29]
https://www.historical-lineups.com/world-cups-1966-to-1986-best-players/european-qualifiers-and-final-tournament.html.
[30]
최초, 최연소 수상 기록.
[31]
스포츠계 인물 중에서는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32]
20세기 발롱도르 수상했던 선수들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방식
[33]
링크
[34]
영국에서 펠레와 같이 외국인이지만 2등급 훈장의 격에 맞다고 평가되는 인물은 영연방 국민이 받는 기사작위 'Knight Bachelor' 대신에 기사작위에 근접한 등급인 2등급의 훈장을 명예장(honorary) 형태로 받는 것이 관례다. 2등급으로 받는 이유는 서훈분류상 Knight Bachelor와 가장 가까운 등급으로 분류되는 훈장이 2등급 훈장이기 때문이고, 명예장 형태인 이유는 훈장 등급별 정원에 포함되지 않고 특례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
영연방의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영국 군주에게 기사로 서임되는 형식을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름 앞에 'Sir(경)' 칭호는 붙지 않는다. 표시가 필요한 경우 이름 뒤에 'KBE'만 쓰인다.
[비공인]
[37]
리오넬 메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타이 기록.
[38]
비공인 기록인 이유는 월드컵에서 공식적으로 도움 기록이 집계되기 시작한게
1966년 월드컵부터이기 때문. 이건
Opta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FIFA에서 펠레의 월드컵 통산 도움 기록이 몇개라고 발표한 적이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비공인일 수 밖에 없다.
[39]
1966년
제프 허스트, 2022년
킬리안 음바페와 타이 기록.
[40]
1958년: 2골 1도움, 1970년: 1골 2도움
[41]
1966년 불가리아전, 1970년 루마니아전
[42]
나머지 한 명은 히벨리누
[43]
정식 명칭은 Campeonato Brasileiro de Seleções Estaduais로 상파울루 주대표, 히우지자네이루 주대표 등 브라질 주들 끼리 대결하는 대회로 1922~1987년까지 열렸다. 이 대회는 펠레가 1959년에 산토스가 아닌 상파울루 주대표로 참가해 6골을 넣었다.
[44]
1966년까지 개최하고 개최 중단
[45]
1959년 개막.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지우라는 이름의 컵대회가 개최. 1967년~1968년은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타사 브라지우를 병행.
브라질 세리 A가 출범한 것은 1971년. 타사 브라지우, 브라질 세리 A 모두 우승팀&준우승 팀에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은 같음.
[46]
영문
위키피디아 등 1경기 1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많다.
[47]
1957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세리 아줄과 세리 브랑쿠로 나뉘어 열렸다. 펠레는 세리 브랑쿠에서 14경기 19골, 세리 아줄에서 15경기 17골을 득점했다.
[4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개막
[49]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
[50]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
[51]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
[52]
산투스는 1965년 타사 브라지우 챔피언이었고 원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야 했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1966년 대회에 브라질 팀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3]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중단, 이후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개최
[54]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타사 브라지우
[55]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타사 브라지우에는 불참. 대다수 위키 및 신문에 17경기 11골로 잘못 알려짐.
#
[56]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3경기 1골
[57]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58]
1968년 타사 브라지우에서 우승한 산투스는 참가 자격을 충족했다. 그러나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1970년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브라질 팀들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제한했다.
[59]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5경기 2골
[60]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61]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해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브라질 팀들을 보내주지 않았음
[62]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개막
[63]
대다수 위키 및 신문에 1968년 시즌이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됨.
18경기 12골임. 따라서 174경기 101골이 정확함.
[64]
기타 경기(공식전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어려운 경기들) 포함시 107경기 64골
[65]
불확실
[66]
불확실
[67]
2001년 1월, FIFA는 1968년 11월 6일에 열린 브라질과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CBF는 여전히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며, 펠레의 A매치 경기 수를 92경기로 집계하고 있다. 이는 펠레와 함께 FIFA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뛰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나무위키에 있는 이 선수들의 A매치 기록은 FIFA가 아닌 FA의 기록에 근거하여 작성되어 있는 것으로, 1968년의 해당 경기를 포함한 기록이다.
[68]
알까기로 통칭되는 기술. 펠레가 매우 선호하는 개인기였는데, 1968년
서독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나온 알까기가 특히 유명하다. 무려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넛맥을 성공시켜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기도 했다.
[69]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펠레의 경우는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대략 절반 이상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되고 위에서 영상이 링크된 주벤투지전에서의 리프팅 골처럼 펠레의 베스트 골은 오히려 영상에 남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이 경기에서도 녹화가 허용되지 않아서 이 골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다.
#
[70]
나머지 4명은
호베르투 히벨리누,
데이비드 베컴,
테오필로 쿠비야스, 베르나르 젱기니이다. 이들 중 펠레가 가장 먼저 성공하였다.
[71]
4번의 대회에 출전했음에도 경기수가 적은 이유는 2번의 대회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다.
[72]
가린샤 등이 소속돼 있던
보타포구 FR가 아니다.
[73]
흔히들 이들을 '펠마메'라 부른다. 메시가 막 이들과 비교되기 시작한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순서가 GOAT 순서로 평가받았으나, 현재는 평가하는 이들이 누구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워낙 오랜 기간 펠마메로 통칭하기도 했고, 이들이 활약한 시기 순서가 펠레 → 마라도나 → 메시라는 점은 불변이므로 여전히 펠마메로도 많이 불린다.
[74]
펠레는 1977년에 은퇴했는데 젊은 축구팬들에게 웬만큼 익숙한 선수들조차 아예 태어나기 전이다.
[75]
펠레가 1940년 생이므로 펠레의 최전성기인 1957~1966년을 제대로 본 세대라면 거의 1930~40년대 초반 출생일텐데 이 세대면 거의 80~90세이다. 물론 자기 세대 선수가 최고로 주장하는 일종의 각인 효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선 펠레를 안 본 세대가 평가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펠레를 본 세대, 심지어 아르헨티나 레전드들 다수조차 마라도나, 메시보다 우위로 평가하는 점을 고려하면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76]
다만 이 시기에는 마라도나 도핑 적발 파문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그가 심하게 저평가받던 상황이었다. 마라도나 본인의 자업자득이기는 하나,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고작 역대 5위권에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선정되곤 했다. 펠레 입장에서는 본인에게 그나마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이 평가절하를 받는 동안 반사이득을 약간은 본 셈이다.
[77]
어찌보면 당연하다. 영향력이나 파급력면에서 농구가 축구한테 절대 못비비는게 현실이기 때문. 단순 조던 신발이나 패션업계같은 문화적 요소 포함하면 조던일순 있겠지만 그것들 빼고 세계 스포츠계에 끼친 영향력만으로 펠레 vs 조던에서 조던이 이기는 경우는 미국내에서나 나오지 거의 대부분 펠레 압승이다.
[78]
일례로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3년 연속 수상하고 베켄바워, 펠레로부터 극찬을 받은 센터백인 피게로아도 유럽에서 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수비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기도 한다.
[79]
현존하는 펠레의 스페셜 영상 출처 대부분이 여기라고 보면 된다.
[80]
당시 인터컨티넨탈컵은 FIFA산하가 아닌 CONMEBOL과 UEFA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형식이었다.
[81]
펠레와 유럽의
UEFA 챔피언스 리그는 데뷔 동기였으며 남미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보다 오히려 먼저 등장했다.
[82]
1위는 4골을 넣은
킬리안 음바페이다.
[83]
다만 퐁텐의 토너먼트 7골은 3·4위전에서 넣은 4골이 포함된 것이다.
[84]
58년 8강 웨일스전 1골, 58년 준결승 프랑스전 3골, 58년 결승 스웨덴전 2골 1도움, 70년 8강 페루전 1도움, 70년 준결승 우루과이전 1도움, 70년 결승 이탈리아전 1골 2도움.
[85]
브라질의 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군사 정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축구로 돌리기 위해 전국 리그를 재빠르게 창설한 것이다.
[86]
이는
분데스리가 출범 전 독일 지역 리그와 분데스리가의
Elo 레이팅을 보면 간접적으로 상황이 비슷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87]
따라서 같은 주립 리그라는 이유로 카탈루냐 주립 리그로 비유하는 주장도 오류가 있다. 라리가를 대표하는 클럽들을 뽑자면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아틀레틱 빌바오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카탈루냐 리그에 있던 팀은 바르셀로나 밖에 없으며 그 외의 카탈루냐 클럽들 중 비슷한 수준의 클럽은 없었다.
[88]
데니스 로와
조지 베스트와 함께 유소년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푸스카스가 늙고 배가 나왔다고 무시했다고 한다. 갈수록 무시하는 정도가 심해지자 베스트의 제안으로 크로스바 맞추기 내기를 했고 푸스카스는 10개 중 10개를 모두 맞춰 아이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아예 공을 띄워서 어깨와 머리로 트래핑하고 발꿈치로 띄우더니 발리 슈팅으로 강하게 차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89]
가장 논란이 되는 1962년 월드컵은 펠레의 부상이라는 불행을 겪어서인지 브라질에게 엄청난 행운들이 따라 주었다. 칠레와의 준결승전에서 퇴장 당한 가린샤는 원래 결승전 출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피파가 가린샤의 출전에 문을 열었고 이것도 모자랐는지 1:1 상황에서 자우마 산투스의 핸들링으로 명백한 페널티킥을 심판이 불지 않았다. 1962 월드컵은 1958년이나 1970년 대회에 비해 브라질에게 천운이 따라준 대회라 할 수 있다.
[90]
출처: 축구철학의 역사, 조나단 윌슨 저, 2012년, 324쪽.
[91]
이 1000번째 골은 국제 친선경기 269골과 국내 친선경기 79골이 포함된 수치로 1959년 1년 동안 국제 친선경기에서만 46골을 넣었다. 아래에 혹사 문단에서 나오듯이 친선전 일정을 엄청나게 소화해야했음이 드러나는 대목.
[92]
출처: 『축구의 세계사: 공은 둘글다』 데이비드 골드블라트 저, 실천문학사,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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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FIFA에서는 이 경기에서 펠레의 어시스트를 인정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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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후술하겠지만, 이외에도 혼외자가 많을 것이라는 것은 본인도 인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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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펠레가 직접 장례식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펠레 본인이 밝히기로는 1996년에 아버지 돈지뉴가 사망하였을 때에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아마 펠레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동굴이 무너져서 친구를 잃고 친구의 시체를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비행기 사고로 죽은
파일럿의 시체를 보고
트라우마에 빠져 파일럿을 포기함은 물론 한참을 고생했었던 과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심약한 소년이어서 10대 초반까지 악몽을 꾸면 어머니 품에 안겨서 응석을 부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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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어머니다. 풀네임은 도나 셀레스트 아란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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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가 아닌 '그'라고 표현했지만, 1970년 월드컵이 끝난 시점이었고 이는 당연히 펠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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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골드컵 우승과 득점왕을 했던 멕시코 선수로 현재는 TV아즈텍에서 해설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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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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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브라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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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경기에서 펠레와 만난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축구 역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명경기 of 명경기를 펼쳤다. 흡사 창과 방패의 대결과도 같았으며, 잉글랜드의 위대한 전설 바비 찰튼경은 이 경기는 축구의 모든것을 볼 수 있는 위대한 경기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펠레,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라는 역대급 공격진 그리고 그것을 막아서는
바비 찰튼,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로 이어지는 잉글랜드의 3인방이 있었다. 브라질은 위에 4선수 중 한 명도 이기심을 표출하지 않고 팀 플레이 위주의 경기력을 펼치며 완전히 한 몸인것 처럼 경기장을 휘저었고, 무어와 뱅크스는 거의 완벽의 가까운 경기를 보여주며 저 무적의 4인방을 막아냈다.
바비 찰튼경도 브라질의 4명에 꿀릴것 없는 경기를 단신으로 보여줬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게임. 잉글랜드는 저 3명의 선수에게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브라질은 사정이 달랐다. 브라질은 저 4명 외에도 중원 사령관
제르손에다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인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등 말 그대로 초호화 선수진이었다. 비록 잉글랜드가 1-0으로 브라질에게 패하지만, 이 당시의 브라질은 예선 전승도 모자라 본선 전승. 그 마저도 본선은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모든 팀에게 3득점 이상씩 성과를 냈었던 초특급 강호였던 것이다. 이로서 그 때 당시 최강 명문이란 브라질 대표팀의 파괴력과, 그 파괴력을 그나마 1실점만으로 막아낸 잉글랜드 국가대표의 삼인방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102]
이전 경기에서는 펠레가 혼자서 다 해먹다 보니 자연스레 제재 및 반칙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인 1조로 축구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토스탕이 펠레와 같이 한 조를 짜게 된 것.
[103]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출신으로 1959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멤버이고,감독으로는 라싱의 1967 코파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끌었다. 1959년 코파 아메리카 당시 브라질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선수이기도 하다. 경기는 펠레의 동점골로 1-1로 끝났으나, 당시 조별리그 형식으로 치루어진 대회 방식에 5승 1무의 아르헨티나에게 4승 2무의 브라질은 승점 1점 부족으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즉, 펠레의 국대 커리어에 없는 딱 두 가지인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월드컵 득점왕 타이틀 중 전자를 막은 선수다.
[104]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선수이며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아버지이다.
[105]
1958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106]
1990년 로마에서 열린 '펠레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친선 경기. 펠레의 50살 생일을 맞아 특별히 개최된 친선 경기다.
[107]
호날두가 펠레의 골 기록을 뛰어넘었다는 순위.
[108]
원문:football is most beautiful sport, because it is always possible to surprise your opponent in the most creative way.
출처:펠레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109]
이 말 그대로 펠레는 국가대표팀에서나 클럽에서나 PK 전담 키커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매우 잘 찼지만 가끔씩 찼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산투스에 온 후에는 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페널티 킥을 찼다.
[110]
발롱도르가 FIFA 발롱도르로 합쳐지기 전에 수상자를 선정하던 기관이다.
[111]
앞선 7번 주석에서 브라질이 등번호 작성을 잊어서 FIFA 직원이 랜덤 배정했다는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 둘을 종합해보면 등번호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