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러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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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러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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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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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전구단 영구결번 N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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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빌 러셀 | |
헌액 연도 | 1975년 |
196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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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야스트렘스키 | → | 빌 러셀 | → | 톰 시버 |
빌 러셀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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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6번 | ||||
톰 켈리 (1948~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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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러셀 (1956~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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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N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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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펠턴 "빌" 러셀 William Felton "Bill" Russell |
|
<colbgcolor=#008348><colcolor=#fff> 출생 | 1934년 2월 12일 |
루이지애나 주 먼로 | |
사망 | 2022년 7월 31일 (향년 88세) |
워싱턴 주 머서아일랜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
신장 | 208cm (6' 10")[1] |
체중 | 100kg (220.5 Ibs) |
윙스팬 | 224cm (7' 4") |
포지션 | 센터 |
드래프트 |
1956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지명 |
소속 팀 | 보스턴 셀틱스 (1956~1969) |
지도자 |
보스턴 셀틱스 감독 (1966~1969)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 (1973~1977) 새크라멘토 킹스 감독 (1987~1988) |
등번호 | 6번 - 보스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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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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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최다 기록인 보스턴 셀틱스에서 11회 우승[2]과 NBA 8연패라는 기록을 달성한 인물이다.[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헌액되었으며, NBA를 떠난 이후에도 시민 사회에서 꾸준히 인권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는 등 모범적인 은퇴 이후 생활을 이어갔다. 이 공로로 사후 그의 등번호 6번은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처리되었다.
2. 일생
1934년 루이지애나 주 웨스트 먼로에서 아버지 찰리 L. 러셀(1912~2002)과 어머니 케이티 킹(1915~1946) 사이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적 그와 가족들은 남부 특성상 일상적으로 인종차별을 겪어왔다. 그가 8세 때 서부로의 흑인 대이동이 성행하자, 온 가족은 생계를 위해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로 이사해 공공 주택에서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고, 부친은 제지 공장 청소부, 트럭 운전사 등의 일을 하다가 12세 때 어머니를 잃어 러셀이 슬픔에 빠지자, 아버지는 아들과 가까워지고자 철강 공장에서 일했다.맥클라이몬드 고등학교 때는 농구부에서 많이 뛰지 못했지만, 조지 폴스 감독은 백인임에도 그의 잠재력을 파악하여 농구 기술을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게 격려했다. 당시만 해도 주목을 못 받다가 클러치에 뛰어난 면모를 보인 걸 감지한 샌프란시스코 대학교가 그를 스카웃했고, 이곳에서 농구와 육상부 활동을 했다. 농구부에선 필 울퍼트(1915~1987)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같은 흑인인 K.C. 존스, 할 페리와 함께 1955 및 1956년 NCAA 전국 대회 우승을 각각 차지해 1956년 CBA(현 WCC) 올해의 선수상, 헬름스 재단 올해의 선수상 2회,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 2회 등에 선정돼 언론과 농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56 멜버른 올림픽에도 대표팀으로 차출돼 금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1956년 NBA 드래프트 참가 후 1라운드 2번으로 보스턴 셀틱스에 입단한 뒤 13시즌 간 우승 반지만 11개를 차지했고, 선수 말년인 1966년부터는 레드 아워백의 뒤를 이어 3년간 감독도 겸임했다. 셀틱스를 떠난 후 1971년부터 ABC 해설위원을 맡다가 1973년부터 4년간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을 맡아 1975 및 1976년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후 CBS와 TBS 등지에서 해설위원을 하다가 1987년부터 1년여간 새크라멘토 킹스 감독도 맡았으나 별 성과를 못 봤다. 그 때 바로 그 루키 선수 한 명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농구 선수보다 방송인으로 더 유명한 케니 스미스. 덕분에 오픈 코트에서 케니에 의해 자주 언급되며 그가 팀을 향해 한 찰진 디스는 러셀이 꽤나 유쾌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케니를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왜 그러냐고 묻자, "이놈도 루저고 저놈도 루저니 뭘 보고 배우겠냐?"라는 식으로 언급한다든가, 자기 팀 연습 경기를 보면서 졸다가 "니들이 그렇게 못하지 않았으면 내가 졸지를 않았을 것이다"라고 팩폭을 가한다든가.... 새크라멘토 킹스 문서에도 나와 있는 그 말이다.
1970년 NBA 25주년 팀부터 2021년 75주년 팀까지 네 번 선정된 것은 물론, 1975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선정되었으며[4]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까지 받았다. 2013년 보스턴 시청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2.1. 사망
2022년 7월 31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예전부터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 전에는 스타 트렉에서 우후라 역을 맡았던 니셸 니콜스도 세상을 떠나면서 1960년대에 스포츠와 드라마에서 인종차별 저항의 아이콘인 두 인물이 동시기에 영면에 들었다.2.2. 사후
이후 2022년 8월 12일 NBA에서 빌 러셀의 등번호 6번을 전 구단 영구 결번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현역 선수 중 등번호 6번을 쓰고 있는 디안드레 조던, 제일린 윌리엄스는 6번을 계속 써도 되지만[5] 신규로 6번을 부여하는 것은 리그 전 구단 공통으로 불허된다. 또한 2022-23시즌 한정으로 모든 팀의 유니폼에 6번을 쓴 마킹이 붙어졌다.NBA 리그에서 전 구단 영구결번은 최초의 사례라 일부 팬들은 기존에 6번으로 이미 영구결번된 선수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혹은 이전에 6번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은 결번을 못 하게 되는 거냐는 식의 가벼운 혼란에 빠졌는데, MLB나 NHL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해당 결번은 소급 적용되는 게 아니다. 즉 러셀의 6번이 영구결번되었다고 해서 이미 기존에 6번으로 영구결번된 줄리어스 어빙, 에이버리 존슨, 월터 데이비스의 번호가 해제될 일도 없고, 2010년부터 2014년까지 6번을 달고 마이애미 히트에서 활약했던 르브론 제임스의 번호를 히트 구단에서 영구결번시키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듯 기본적으로 영구결번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각 구단에게 있으나,[6] 이번 전 구단 영구결번은 사무국의 주도 하에 모든 구단들이 동의해 이뤄진 케이스로 사무국에서 더 이상 신규로 6번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르브론이 최후의 6번 영구결번의 수혜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7]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전술된 MLB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 후 재키 로빈슨과 같은 42번으로 영구결번된 것과 동일한 케이스가 된다.[8]
빌 러셀이 전구단 영구결번이 되면서 미국 4대 리그 중의 3개의 리그에 전구단 영구결번 선수가 등장했다.[9][10]
또한 농구게임 NBA 2K 시리즈 역시 2023시즌부터는 6번을 새로 부여할수 없게 되었다.
3. NBA 시절 성적
-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시즌 || 경기수 || 시간 || 필드골 || 3점 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 || 턴오버 || 트루슈팅 ||
PER ||
1956-57 48 35.3 .427 - .492 14.7 19.6 1.8 - - - .450 20.9 1957-58 69 38.3 .442 - .519 16.6 22.7 2.9 - - - .465 22.8 1958-59 70 42.6 .457 - .598 16.7 23.0 3.2 - - - .493 20.7 1959-60 74 42.5 .467 - .612 18.2 24.0 3.7 - - - .496 20.1 1960-61 78 44.3 .426 - .550 16.9 23.9 3.4 - - - .454 18.1 1961-62 76 45.2 .457 - .595 18.9 23.6 4.5 - - - .489 19.4 1962-63 78 44.9 .432 - .555 16.8 23.6 4.5 - - - .464 18.2 1963-64 78 44.6 .433 - .550 15.0 24.7 4.7 - - - .461 19.3 1964-65 78 44.4 .438 - .573 14.1 24.1 5.3 - - - .472 19.5 1965-66 78 43.4 .415 - .551 12.9 22.8 4.8 - - - .448 17.3 1966-67 81 40.7 .454 - .610 13.3 21.0 5.8 - - - .500 18.6 1967-68 78 37.9 .425 - .537 12.5 18.6 4.6 - - - .461 17.0 1968-69 77 42.7 .433 - .526 9.9 19.3 4.9 - - - .467 15.2
-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시즌 || 경기수 || 시간 || 필드골 || 3점 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 || 턴오버 || 트루슈팅 ||
PER ||
1956-57 10 40.9 .365 - .508 13.9 24.4 3.2 - - - .398 18.9 1957-58 9 39.4 .361 - .606 15.1 24.6 2.7 - - - .420 21.6 1958-59 11 45.1 .409 - .612 15.5 27.7 3.6 - - - .454 18.8 1959-60 13 44.0 .456 - .707 18.5 25.8 2.9 - - - .504 22.1 1960-61 10 46.2 .427 - .523 19.1 29.9 4.8 - - - .457 22.0 1961-62 14 48.0 .458 - .726 22.4 26.4 5.0 - - - .519 22.8 1962-63 13 47.5 .453 - .661 20.3 25.1 5.1 - - - .508 20.5 1963-64 10 45.1 .356 - .552 13.1 27.2 4.4 - - - .406 18.9 1964-65 12 46.8 .527 - .526 16.5 25.2 6.3 - - - .540 20.9 1965-66 17 47.9 .475 - .618 19.1 25.2 5.0 - - - .514 20.2 1966-67 9 43.3 .360 - .635 10.6 22.0 5.6 - - - .436 15.3 1967-68 19 45.7 .409 - .585 14.4 22.8 5.2 - - - .458 16.7 1968-69 18 46.1 .433 - .506 10.8 20.5 5.4 - - - .448 15.3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11회 (1957, 1959-1966, 1968-1969) 정규시즌 MVP 5회 (1958, 1961-1963, 1965) 올-NBA 퍼스트 팀 3회 (1959, 1963, 1965)[11] NBA 올스타 12회 (1958-1969) NBA 올스타전 MVP (1963) 올-NBA 세컨드 팀 8회 (1958, 1960-1962, 1964, 1966-1968)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1회 (1969)[12]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4회 (1958-1959, 1964-1965) NCAA 챔피언 2회 (1955-1956) NCAA 토너먼트 MOP (1955)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75) |
5. 플레이 스타일
농구에서 센터란 무엇인가를 전략적으로 정의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현대 농구에서 센터의 팀 수비에 대한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쓴 선수라고 볼 수 있다.신체적인 부분을 봤을 때 신장은 비교적 평범한 편이지만[13] 윙스팬은 224cm에 육박했으며, 이는 현대 농구를 기준으로도 빅맨의 이상적인 신체 조건에 해당된다.[14] 또한 하필이면 체임벌린이라는 인외 괴수와 동시대의 선수라 부각이 안 되었을 뿐, 러셀 또한 NBA 역대 센터 중 최상단에 꼽힐만한 규격 외의 운동 능력을 보유한 괴물이었다. 관련 내용
즉, 체임벌린처럼 어느 시대에서나 재앙으로 통할만한 수준의 피지컬까지는 아니지만, 현역 선수들에게 대입하더라도 충분히 극강의 수비수로 군림할 수 있을만한 신체적 능력을 깔고 간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비록 환경의 변화로 블록이나 리바운드는 크게 떨어질 테고 달라진 환경과 룰에도 적응해야겠지만[15] 센터에게 높은 활동량과 기동성, 심지어 퍼리미터 수비까지 요구하는 현 트렌드에서 충분히 강한 메리트가 있는 신체인 셈이다.
특히 정확한 타이밍의 블록 슛이 트레이드 마크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것보다 무시무시한 것은 블록 슛을 팀 전략의 바탕으로 삼아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 일명 "수비의 심리학"이라고도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도저히 뚫을 수 없어 보이는 블록 슛 한 번은 상대가 골밑으로 못 들어오게 하고, 그것은 상대의 필드골 성공률을 낮추므로 승리를 불러온다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센터가 수비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기본기와 움직임은 러셀이 정립했다고 보면 된다. 더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만화 《 슬램덩크》를 펼쳐놓고 채치수의 플레이를 다시 보면 된다. 그 플레이를 1960년대부터 해왔던 것. 당연하지만 한 경기 100점의 사나이 윌트 체임벌린과 라이벌 관계였다.
하지만 그가 NBA에 데뷔한 시기가 하필이면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농구계에서도 흑인들은 수비나 리바운드 같이 눈에 띄지 않는 플레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감독인 레드 아워백이 그의 리바운드 한 개를 2점으로 생각하라는 등 인종차별에 대해서 벽이 되어주고, 그의 능력과 인성을 알고 있는 동료들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기사가 쓰여졌다고 경기를 거부할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보여줬으며, 이것은 자연히 팀워크로 이어져 우승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통산 14,552점, 21,620리바운드, 4,100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평균은 15.1점 22.5리바운드 4.3어시스트... 이건 이미 괴물 수준. 무엇보다 그의 진가인 블록 슛은 은퇴 후인 1974년이나 되어야 공식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것도 아닌 셈.
그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스턴 셀틱스에서 보냈기 때문에 보스턴에서는 그의 번호가 영구결번이 되어 있다. 미국 4대 메이저 스포츠에서 전무후무한 8연패를 하기도 했으며 NBA에서 보낸 13시즌 중 11시즌을 우승. 그중 두 번은 선수 겸 감독의 신분으로 우승했다. 또한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감독이기도 하다.
워낙 오래된 플레이어라 경기 전체를 보기는 힘들지만 기록에서 보여지는 단점은 바로 자유투 성공률. 시도 횟수에 비해 성공률은 56.1%로 상당히 저조했다. 야투 성공률은 겉으로 보기에는 낮아보이나 빌 러셀이 뛰던시기인 1950~1960년대는 리그의 전체적인 평균 야투 성공률이 저조했고, 실제로 앞선 레전드 센터인 조지 마이칸 또한 4할대 초중반에 불과했었다. 또한 빌 러셀은 선수 생활 내내 야투 성공률 시즌 TOP 10에 4번이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역대급 센터 공격수인 데이비드 로빈슨과 같고 하킴 올라주원은 2번 패트릭 유잉은 3번으로 오히려 빌 러셀보다 그 수가 적다. 물론 공격 시도 횟수에서 차이가 나지만 로빈슨, 올라주원, 유잉 등은 센터 포지션에서 최상급의 공격수임을 감안해야 한다. 즉 겉으로 보이는 수치만 보고 빌 러셀의 공격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16]
일단 본인의 득점 참여도 자체가 낮았고, 그만큼 팀 동료들을 살려주는 패스에 능했음을 고려한다면 감안할만한 부분이 많다. 그는 윌트 체임벌린, 웨스 언셀드와 더불어 센터치곤 어시스트가 상당히 높은 선수였으며[17], 리바운드를 잡자마자 본인이 직접 드리블을 치며 속공을 전개하는 플레이에도 아주 능했다. 트레일링 역시 신체 조건과 운동 능력에 걸맞게 당대 최고 수준. 즉, 러셀은 1950~60년대 기준으로 높은 야투효율, 패스와 속공 기여, 34세 은퇴 시즌에도 평균 20리바운드 언저리를 기록한 보드 장악력으로 가져오는 세컨 찬스 창출을 고려하면 공격에서도 1인분 이상을 거뜬히 해내는 선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5.1. 역대 최고의 수비수
당연하겠지만, 그의 수비력은 NBA 역사를 통틀어도 압도적인 역대 1위 수비수이다. NBA에서 수비 수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스탯은 MLB와 다르게 아직 없고 빌 러셀은 비교적 초창기 선수이기에 그 당시 디펜시브 레이팅도 존재치 않았다. 그나마 1개 있는 디펜시브 윈셰어 수치가 있는데 이 수치에서 비교적 적은 13시즌을 뛰고도[18] 정규 시즌 133.64로 압도적인 1위[19]를 보이고 있으며 플레이오프 디펜시브 윈셰어 역시 21.76이라는 엄청난 수치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20] 2차적인 수비 수치뿐만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스탯이라고 할 만한 블록, 스틸 등이 집계되지 않았음에도 디펜시브만으로 133이라는 엄청난 윈셰어를 보이고 있다.실제 경기에서의 빌 러셀의 수비는 당시 영상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고, 워낙 오래전이라 직접 경기를 직관해본 세대들이 대부분 적게 잡아봐야 2020년대 기준 나이 70대이고 80~90대 어르신 세대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식의 표준화가 어렵다. 하지만 얼마 안되는 영상물과 당시 뉴스와 신문 같은 언론 매체, 그와 함께 경기를 뛰었던 동시대 다른 레전드 선수들(주로 제리 웨스트, 존 하블리첵)의 증언 등으로 추정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맨투맨 디펜스는 지옥과 같은 수준으로 맘만 먹으면 굳이 블록이나 스틸을 노리지 않고도 찰거머리 같은 수준으로 끈질기게 마크맨을 따라붙는다. 이 또한 매우 영리해서 커리어 중후반기에는 정규 시즌의 중요치 않은 경기에서 스코어가 벌어졌을 시에는 힘을 비축해 뒀다가 플레이오프나 파이널, 중요한 경기 등에서 엄청난 수비 집중력으로 상대 공격수를 괴롭게 한다.
2. 팀 디펜스 역시 역대급인 BQ를 이용해서 전방위적인 수비를 펼치며 빠른 발과 번개 같은 손속으로 상대의 턴오버를 유발하며, 기본적으로 매우 거칠고 맨투맨 수비가 일상화된 1960~1970년대에 최초로 초창기의 팀 디펜스의 이론을 정립했다고 할만큼 블루칼라 스타일의 팀 수비를 구현했다. 블록을 워낙 전략적으로 사용해서 팀원에게 공이 가도록 유도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 실제로 러셀은 후배들의 블록을 평가하며 호쾌한 블록은 관중들을 신나게 할 수는 있지만, 승리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까기도 했다. 블록은 공격을 막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격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
3. 그의 진정한 무서움은 정규 시즌보다 포스트시즌에 있다는 것. 실제 플레이했던 상대 팀 선수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 시작부터 4쿼터 끝날 때까지 항상 집중력을 처음같이 유지했으며 클러치 상황에서의 디펜스만으로도 상대 주력 공격수들이 주눅이 들어 '보스턴 셀틱스 = 승리'라는 방정식이 항상 플레이오프 경쟁 팀의 선수들 머릿속에 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미 경기 시작부터 빌 러셀과 셀틱스는 이겨놓고 싸운다는 이야기.
이러한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신장은 평범하지만 긴 팔과 환상적인 운동 능력 및 BQ를 기반으로 디켐베 무톰보 이상의 블록 능력에 데니스 로드맨의 맨투맨 디펜스 능력, 벤 월러스급의 팀 디펜스 능력을 보여준 센터라고 본다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수비력 자체를 떠나서 굳이 비슷한 유형의 선수를 찾아본다면 알론조 모닝과 흡사하며, 빌 러셀의 증언으로도 주로 다른 포지션인 팀 던컨, 케빈 가넷 등의 이름과 함께 동포지션에서는 그나마 모닝의 이름 또한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편이다.
블록 슛이 집계된 게 1973-74 시즌부터라 그의 상식 밖의 블록 슛 수치가 숫자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쉬운 부분인데, 만약 NBA가 1960년대부터 블록 수치를 집계했다면 그가 역대 2위, 라이벌 윌트 체임벌린이 1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1] 그들을 지켜본 이들은 그들의 블록이 "평균 7~8개"라는 증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게 과장이라고 생각해 평균 5개라고 생각해도 체임벌린은 5,225개, 러셀은 4,815개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온다.
사실 "평균 7~8개"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보기도 힘든 게 한 양덕이 체임벌린과 러셀의 당시 블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신문 기사를 샅샅히 뒤져서[22] 통계를 내본 결과 체임벌린은 112개에서 평균 8.8블록, 러셀은 135경기에서 평균 8.1블록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두 선수 모두 마지막 시즌까지 포함된 수치. 체임벌린의 마지막 시즌은 표본이 21경기로 평균 7.6개, 러셀의 경우 표본이 13경기로 8.3개였다. 게다가 "블록 수치가 높은 것만 기사화됐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도 없는 게 블록 수치가 1개, 2개인 경기까지 그대로 집계되어 있다. 참고로 시즌 하이 수치는 체임벌린은 15블록, 러셀은 21블록이다.[23]
만약 NBA 초창기부터 디펜시브 팀, 올해의 수비왕(DPOY), 파이널 MVP 등이 있었다면 러셀의 수상이력은 훨씬 더 풍부했을 것이다. 실제로 러셀은 몸이 망가진 마지막 시즌인 1968-69 시즌에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올랐는데, 디펜시브팀은 빌 러셀의 은퇴 시즌에 처음으로 생겼다. 당시 센터 포지션 디펜시브팀 경쟁자들은 수비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고 시대를 지배했던 센터들인 네이트 서몬드, 폴 사일러스, 윌리스 리드, 그리고 수비형 센터로 막 전환을 끝낸 윌트 체임벌린 등이다. 커리어 마지막 해에 이런 기라성 같은 센터들을 제치고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든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위엄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DPOY가 생긴 건 그보다 15년 정도 후인데, DPOY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러셀이 역대 최다 수상자일거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는 편이다.[24]
5.2. 과대평가론과 반박
먼저 여기서 언급되는 과대평가론은 어디까지나 러셀 시대를 직접 보지 못했던 팬들 사이에서 주로 언급되는 설이며, 전문가들이나 동시대 빌 러셀을 직접 보고 공부하던 후배 선수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우선 빌 러셀은 분명 의심할 여지 없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설 중 하나이며, 당시 NBA를 지배하던 최고의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러셀은 NBA 과대평가된 선수 중 하나라는 논란을 빚고 있기도 하며, 이는 가장 꾸준한 NBA 논쟁떡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빌 러셀 외에도 동시대의 전설적 선수들에게 공통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 가장 핵심적인 논거는 당시의 NBA가 오늘날과는 너무도 달랐다는 것이다.
빌 러셀을 평가절하할 경우 주로 다음과 같은 3개의 논점이 사용된다.
1. 1950~1960년대에는 팀이 8~9개밖에 없었다.
2. 윌트 체임벌린이 개인 기량으로는 더 뛰어난 선수였다.
3. 당시 셀틱스는 모든 선수가 명예의 전당급이었던 초강팀이었다.
가장 먼저, 당시, 그러니까 1960년대 NBA에는 팀이 9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샐러리 캡도, 사치세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리그의 최정상급 선수들이 우승을 위해서 한두 팀에 몰리기 마련이고, 그런 팀들은 당연히 다른 팀들에 비해 우승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며, 결국 그 팀들이 리그를 사실상 완전히 지배하며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우승 반지를 나눠 가졌다는 것이다. 30개의 팀들이 챔피언십을 위해 트레이드와 드래프트에 목숨을 걸고, 수 시즌 째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못해 허덕이는 팀들이 허다한 오늘날의 NBA에 비하면 당시에는 양대 팀 중 하나에 소속될 수만 있다면 우승하기가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는 경기 내 규칙이라든가 코트의 규격 등에 차이가 있어서 오늘날에 비해 훨씬 볼 점유 시간과 빈도가 높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3점 슛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득점도 득점이지만, 리바운드의 스탯이 터무니없이 높다. 이는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인데, 당시의 스탯(기록)들은 분명히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부풀려진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25]
단 한 번의 우승을 위해 말년에 팀을 옮겨가며, 노구를 이끌고 피나는 특훈을 하는 눈물겨운 노력을 했음에도 결국 반지를 끼우지 못하고 통한의 은퇴를 한 슈퍼스타들이 리그에는 한 둘이 아니다. 한 마디로 전쟁터와 같은 오늘날의 리그와 비교하면 당시의 리그에서 우승하는 것은 분명 훨씬 쉬운 축에 속했을 것이다. 9개의 팀이 속한 리그에서 11회 우승하는 것과 30개의 팀이 속한 리그에서 11회 우승하는 것을 과연 동일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위의 논리는 빌 러셀 뿐 아니라 당시를 보낸 선수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대평가론을 언급하는 것이 조금 이상한 것이 빌 러셀의 11회 우승은 이미 사실상 시대보정을 적용해서 평가받고 있다. 그 증거로 마이클 조던의 우승은 총 6회로, 러셀보다 우승횟수가 절반 조금 넘는 수준인데도 모든 매체에서 당연한 듯이 러셀보다 높게 평가받고 있다.
즉, 만약 러셀의 11회 우승을 현대의 11회 우승과 동일하게 평가했었다면 그는 스탯이고 뭐고 조던은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넘버원으로 평가되어야 옳다.[26] 그런데 그의 위치는 현재 조던보다는 당연히 아래, 2회 우승인 윌트 체임벌린과 6회 우승인 카림 압둘자바와 비슷하게 묶여서 평가받고 있다. 즉, 러셀 시대의 우승이 현대의 우승과 동일선상에 놓이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사람들의 평가 기준에 충분하리만치 적용이 되어 있고, 그걸 감안하더라도 11회 우승은 어마어마한 대업적이며, 그걸 이룩한 그는 역대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는 소리이다.
결과적으로 "우승하기 쉬웠다"라는 논리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러셀이 그저 쉽게 반지를 쓸어갔다고 일차원적으로 폄하하기 보단 당시 리그의 환경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어쨌건 29팀을 상대하는 것 보단 9팀을 상대하는 게 우승 반지를 노리기에 더 수월한 것이 사실이고, 보스턴이 샐러리 캡 없는 환경 내에서 수준 높은 선수들을 비교적 쉽게 끌어모을 수 있었던 몇몇 팀 중 하나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러셀과 경쟁한 동시대 라이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러셀의 라이벌 격인 윌트 체임벌린의 팀 동료들을 보면 'NBA 위대한 올타임 50인'에 선정된 선수만으로도 폴 어리진, 할 그리어, 빌리 커닝험,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등이 있었으며[27] 특히 1969년 윌트 체임벌린-제리 웨스트-엘진 베일러로 이어지는 레이커스 라인업의 경우, 무려 MVP 레벨 세 명이 한 팀에서 뛴 어마어마한 슈퍼팀이었다.[28] 근데 러셀과 셀틱스가 레전드가 된 것은 이들이 막강한 동시대 다른 라이벌들을 제치고 매번 우승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체임벌린이 '커리어 전반적으로 봤을 때' 보스턴에게 밀리는 전력의 팀에서 뛰어온 기간이 적지 않지만, 정작 오버롤이 확연히 앞서는 초 슈퍼팀을 꾸리고도 보스턴에게 패한 전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앞서 언급된 듯이 스타급 선수들이 몰려있던 것은 레이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셀틱스에게 전패를 기록했고, 그 독보적인 업적을 기록한 셀틱스의 중심엔 러셀이 있었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보스턴 셀틱스가 당시 선수 수급에 비교적 유리했던 팀 중 하나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스타 군단, 즉 '슈퍼팀'이라고 후려치긴 어렵다는 것이다. 러셀이 커리어 내내 총 8명의 명예의 전당 멤버와 뛴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스타급 플레이어가 아니라 당시 너무나 위대한 팀인 셀틱스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경우에 속한다.[29]
그리고 보스턴의 라이벌이었던 로스앤젤레스나 필라델피아 등의 빅마켓 팀들은 보스턴과 마찬가지로 선수 수급이 수월했다. 샐캡이 없어 유리했던 건 딱히 보스턴만은 아니었다는 소리[3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마켓인 필라델피아/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에서만 뛴 체임벌린보다 더 많은 반지를 쓸어담고, 팀 차원에서 라이벌이었던 레이커스보다 월등한 실적을 낸 것은 반박할 수 없다.[32] 포인트는 러셀의 셀틱스가 1950, 1960년대 팀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어느 정도 수혜를 받은 팀 중 하나일지언정, 동시대의 강력한 라이벌 팀들을 시종일관 오버롤에서 압도하던 슈퍼팀이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애초에 셀틱스는 각자 멤버들의 역할이 잘 조화된 역사적인 강팀이었지, 여러 명의 스타 플레이어들로 빅 3~판타스틱 4 주전 라인업을 꾸리는 팀은 아니었다.[33]
또한 당시 기록들이 다수 부풀려진 것은 맞지만, 중요한 건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은 이 부풀려진 기록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기록을 냈다는 것이다. (리바운드 측면에서) 당시 기록 몇 개만 보자. 1962-63 시즌에 리바운드 1, 2, 3위는 윌트 체임벌린 24.3개, 빌 러셀 23.6개, 월트 벨라미 16.4개이다. 1, 2위가 3위의 거의 1.5배 수준이다. 현대로 따지면 1, 2위가 각각 15개, 14.5개인데 3위가 10개인 수준.그 전 시즌엔 그나마 차이가 적어서 2위 러셀이 23.6개, 벨라미가 19개이다. 1963-64 시즌엔 러셀이 24.7개로 1위, 체임벌린이 22.3개로 2위, 제리 루카스가 17.4개로 3위이다.
이처럼 당시 러셀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독보적인 리바운더였다. 기록이 부풀려진 경우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 같이 기록이 부풀려진 상태에서 러셀과 체임벌린의 리바운드 기록이 압도적이었다는 게 포인트.
또한 러셀은 애초에 스탯으로 인정받는 선수가 아니라, 너무나 압도적인 우승 기록 덕분에 높이 평가받는 선수이다. 스탯으로 따지면 그는 동시대 라이벌 체임벌린에 비교도 안 되지만, 모든 선수 평가에서 그는 체임벌린과 엎치락뒤치락한다. 애초에 스탯으로 평가받지도 않는 선수에게 스탯을 두고 과대평가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과대평가론과 별개로 빌 러셀, 래리 버드를 둘 다 코칭했던 레드 아워백같은 경우 래리 버드를 빌 러셀 위로 쳤다.
6. vs 윌트 체임벌린
자세한 내용은 윌트 체임벌린 vs 빌 러셀 문서 참고하십시오.7. 가족 관계
1956년에 대학 시절 사귀었던 로즈 캐서린 스위셔(1936~2014)와 결혼해서 슬하에 1남 1녀를 뒀으며, 특히 딸 카렌은 변호사이자 TV 논평가로 숱하게 활약해왔다. 그러나 로즈와는 성격 면에서 엇갈려 1973년에 이혼했고, 1977년에는 1968 미스 USA였던 13년차 연하의 백인 도로시 안스텟과 결혼했다가 여러 논란으로 1980년에 이혼했다.1996년에는 16년차 연하인 마릴린 러스 놀(1950~2009)과 세 번째로 결혼해 2009년 사별 시까지 함께했고, 그 뒤 33년차 연하인 지니와 또 장가를 들었다. 그 외에 형 찰스 러셀 주니어(1932~2015)는 젊은 시절 6.25 전쟁에 참전한 후 동생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대학교를 다녔고, 1969년 향수극 <Five on Black Hand Side>[34]를 내는 등 흑인 희곡계에서 명망이 자자하다.
8. 여담
-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8-09 시즌부터 NBA 파이널 MVP에게 수여하는 트로피의 명칭을 그의 이름을 붙인 빌 러셀 트로피라 명명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빌 러셀 트로피 첫 수상자가 보스턴 셀틱스의 최대 라이벌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이다.[35] 그리고 파이널 상대는 올랜도 매직. 그리고 개칭된지 15년만에 제일런 브라운이 첫 셀틱스 소속 수상자가 되었다.
- 러셀은 가까이로는 그와 함께 플레이했던 선수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후배들에게까지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는데, 인종차별의 잔재가 상당수 남아 있었던 1950~1960년대에 선수 생활을 했었고 특히나 그가 선수 생활을 보낸 보스턴은 대학 생활을 보낸 자유로운 분위기의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심지어 지금도 르브론은 보스턴에서 인종차별적인 워드를 수없이 듣는다고 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1980년대에 매직의 레이커스와 버드의 셀틱스가 붙었을 때 한 흑인이 와서 매직에게 레이커스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매직이 어이가 없어서 "당신 보스턴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그 흑인은 "나는 그 백인 팀이 이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보스턴에 흑인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리더가 백인인 버드였기에 셀틱스를 응원하지 않는다고 한 것. 이걸 보면 보스턴 흑인들이 당한 차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러셀이 은퇴하자마자 보스턴에게 해줄 거 다 해줬으니 이제 보스턴과 아무 관계도 아니다는 식으로 아예 척을 질 정도였다. 이 앙금은 20여 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실제로 1968년 보스턴 교외의 레딩으로 이사 갈 적 이웃들은 탄원서를 내거나 공동으로 러셀이 살 집을 사려고 했고, 백인우월주의자가 들어와 그의 침대 한가운데에 똥을 싸놓은 행위는 유명하다. 이외에도 인종차별에 대항해서 셀틱스 백인 동료들은 한데 뭉쳐 러셀을 옹호해서 집단 행동이나 성명을 내는 일이 잦았다. 또한 1961년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열렸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와의 친선 경기 때 그는 흑인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서 내쳐지자 출전까지 거부했으며 백인 스포츠 기자들이 동료 톰 하인슨에게 "빌 러셀은 흑인이니 MVP도 못 받을 거다"라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이러한 기자들의 태도로 인해 러셀은 언론 기자들과 사인을 위해 찾아온 팬들에게 쌀쌀맞게 대했으며, 1972년 영구결번 및 1975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오직 인품 하나로 백인 감독과 백인 위주의 팀원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은퇴 이후에도 이는 여전하다. 많은 선수들이 심지어 마이클 조던보다 빌 러셀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주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 당연하지만 이런 주장을 했던 선수들은[36] 1960~1970년대 그와 함께 했던 선수들이나 감독, 기자 등 전문가들의 비중이 높으며 조던의 우세를 주장하는 선수, 전문가들은 이보다 후인 1990~2000년대 현업에 종사했던 경우가 많다.
- 그의 후배 중에 대표적인 러셀빠로는 저메인 오닐과 알론조 모닝을 들 수 있다. 저메인은 실제로 공개편지를 통해 빌 러셀을 존경한다고까지 했었고 심심치 않게 그에 대한 존경을 언론에서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그 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지만 팀 던컨 역시 인터뷰에서 가장 같이 뛰어보고 싶은 선수로 빌 러셀을 언급하기도 했다.
- 사실 빌 러셀은 19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과소평가당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TV중계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러셀 시대"의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영상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당시를 보낸 사람들의 평가나 기록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을 본 사람들이 많은 시기, 특히 러셀 시대와 십수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 1980년에는 무리 없이 그가 그때까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37]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질 수록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한 경기 100점의 체임벌린이나 시즌 트리플 더블러 오스카 로버트슨 같은 경우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시대보정을 놓고 논란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동시대에서 압도적이었다는 건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그 위대함이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리한 입장이다.[38] 과거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빌 러셀 과대평가론"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는 선수 은퇴 후 거의 90살까지 살아가는 사이 월트 체임벌린 등 동료들이 점점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났음에도 정정한 상태로 매년 파이널을 관전하며 빌 러셀 트로피를 직접 수여해왔고, 사회활동도 활발하고 SNS까지 운영할 정도였다. 2018년 NBA 서머 리그를 관전하다 해설 중이던 빈스 카터에게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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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웃는 모습이 매우 호탕하기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유튜브에 빌 러셀의 웃음만 죄다 모아서 편집한 영상도 존재할 정도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래 영상을 보자. 주로 빌 러셀이 자지러지면서 웃는 모습이 나오는데 예외적으로 중간중간 반대의 경우로 빌 러셀이 나머지를 웃겨버리는 장면도 몇 가지 있다. 그중에 압권이라 할 만한 부분이 1:25부터 시작되는데 2017년 평생 공로 상 시상식 때 시상자 5명을 한 명 한 명 지목한 뒤 "너희들 엉덩이를 걷어차 주겠다"라는 드립을 시전한 부분. 당연히 당사자들은 죄다 뒤집어졌다. 참고로 이때 시상자로 나온 5명의 면면도 압권인 게 왼쪽부터 순서대로
카림 압둘자바,
알론조 모닝,
샤킬 오닐,
데이비드 로빈슨,
디켐베 무톰보로 모두 당대 최고의 센터를 논할 때 순위가 어떻든 절대로 빠질 수가 없는 선수들이었다.
- 상술되어 있는 열한 번의 우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프로 농구 개인 통산 최다 우승 기록이다. 북미 4대 리그인 NFL, MLB, NHL까지 모두 포함해도, 마찬가지로 선수로서 11회 우승을 거둔 NHL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앙리 리샤르와 함께 최다 우승 기록. 2위인 팀 동료 샘 존스의 10회도 거의 없는 편으로, 한 종목에서 같은 팀이 다섯 번 이상 우승하기도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참가 팀이 적은 초창기의 기록이라고 해도 대단한 업적이다. 참고로 범위를 감독까지 모두 넓힌다면 선수로 2회, 감독으로 11회 우승한 필 잭슨이 가장 우승 횟수가 많다.
- 성격도 좋아 타 팀 선수들에게서도 인기가 많았고 이는 MVP 투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에는 선수들의 투표로 MVP를 꼽았기에 스탯에서 명백하게 타 선수들에게 크게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MVP를 탄 사례들이 상당히 많다. #[39] 다만 MVP는 스탯만 좋다고 해서 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사실로 빌 러셀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당장 지금도 스탯에서 밀렸음에도 임팩트 등 여러가지 이유로 MVP를 타는 사례가 계속 나오는 상황이기에, 빌 러셀 역시 그러한 케이스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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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60년대는 체임벌린과 러셀 두 선수가 완벽하게 양분하던 시기였으며, 체임벌린이 데뷔한 1959-60 시즌부터 러셀이 은퇴하던 1968-69 시즌까지 둘이 아닌 선수가 MVP를 탄 적은 단 두 번(1963-64 시즌
오스카 로버트슨과 1968-69 시즌
웨스 언셀드)뿐이었다. 1968-69 시즌은 러셀의 은퇴 시즌이었기에 60년부터 68년까지 두 선수가 정상에 머물던 9시즌간 가장 공신력 높은 집단인 전미 언론인 투표단[40]이 뽑은 올NBA 팀 역시 매년 두 선수가 퍼스트와 세컨을 독식했다. 즉, 체임벌린과 러셀 두 선수는 각자 강점이 너무나 달랐기에 미세한 차이로 매번 수상이 갈렸고, 언론인들에게는 개인 기량이 압도적인 체임벌린이, 동료 선수들에게는 팀 승리에 공헌하는 러셀이 더 높이 평가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또한 러셀은 스탯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이 가장 큰 장점으로 평가받는 선수인데, 당시 최고 수준의 스탯을 기록하던 체임벌린, 밥 페팃, 오스카 로버트슨, 엘진 베일러 같은 선수들 중에 러셀 수준의 수비수는 없었다. 물론 저들이 공격 일변도의 선수들은 아니었지만, 수비로서 인정받는 선수를 놓고 (수비가 반영되지 않는) 스탯으로 평가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심지어 당시엔 수비 스탯도 없어 더 스탯이 낮아 보이는 효과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시 러셀은 경기당 7~8개씩의 블록을 기록하던 선수였는데, 만약 이때 블록이 기록되어 전성기 때 17~18점 23~4리바운드 4어시스트 8블록 정도를 기록했다면 30점 10어시스트 10리바운드 정도 기록하던 로버트슨보다 스탯이 무조건 밀린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러셀이 센터 포지션에서 올NBA 세컨 팀으로 밀렸음에도 MVP를 차지한 적은 체임벌린 외에 1957-58 시즌이 있는데, 이때 올NBA 퍼스트 팀인 밥 페팃은 러셀보다 2년 먼저 데뷔해 초대 MVP 수상자[41]가 된 선수였다. 이 시즌 페팃은 24.6점 17.4리바운드 2.2어시스트 야투율 41%, 러셀은 16.6점 22.7리바운드 2.9어시스트 야투율 44.2%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기록이 아니다. 블록과 스틸이 집계되었다면 오히려 러셀이 스탯상 우위였을 가능성이 높다. 엘진 베일러와 오스카 로버트슨은 센터가 아니라 역할이 달라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웠기 때문에, 당시 빅맨들 중 러셀보다 '압도적인' 스탯을 기록하던 선수는 체임벌린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선수들끼리 사교질을 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빌 러셀은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성격이었으며, 흑백 차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던 선수라 백인이 다수이던 1960년대 NBA에서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가 선수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은 항상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이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42] 러셀보다 개인 기량이 압도적으로 더 뛰어나고 스탯이 비교 불가로 앞섰던 체임벌린은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해 평가가 더 낮았을 뿐이었다. 물론 오만하고 팀 플레이어가 아니었던 체임벌린이 선수 투표에서 '어느 정도' 불이익을 받은 것은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체임벌린을 제외하면 러셀이 "평판으로" 스탯의 열세를 뒤집었다고 볼만한 케이스는 없다. 체임벌린은 선수들 사이 평판이 특출나게 안 좋은 케이스였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러셀이 투표 덕분에 수상에서 득을 본게 아니라, 체임벌린이 평판 때문에 투표에서 약간 불리했을 수는 있다. 그나마 그것도 위에 언급했듯이 둘은 판이하게 다른 장점이 있는 선수들이었고 평가는 정말 백지장 하나 차이였기 때문에, 두 선수의 MVP 횟수와 퍼스트 팀 횟수가 차이나는 것은 그만큼 둘 다 정점에 달해 있는 선수들이 투표에서 미세하게 희비가 갈린 것이 근본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43]
- 영원한 라이벌 LA 레이커스의 레전드인 매직 존슨이 빌 러셀의 별세 이후 러셀의 등번호 6번을 전 구단 영구 결번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4] 매직은 러셀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데, 역대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고민을 하다가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 러셀은 역대 최고의 승리자"란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 NBA와 NBA 선수협회(NBPA)는 12일(한국시간) 등번호 6번을 전 구단 영구 결번으로 남겨 러셀의 생애와 유산을 기린다고 밝혔다.
- 2023년 2월 8일 넷플릭스에서 빌 러셀: 레전드라는 그의 다큐멘터리 2부작이 공개되었다.
- 2024 NBA 파이널에서 보스턴이 우승하자 셀틱스 팬들이 그의 동상에 화환을 두고 가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9. 둘러보기 틀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No.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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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
11. 참고 자료
- 다음 카페 'I LOVE NBA' 자료
- 네이버 블로거 '짱후니'의 포스트
- 2018년 점프볼 칼럼
- NBA 약력 자료
- ESPN 앤드스케이프 칼럼: #1, #2 ( 번역본)
[1]
맨발 기준 208cm (6' 10") / 착화 신장 211cm (6' 11").
[2]
북미
4대
리그로 넓혀도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앙리 리샤르와 함께 공동 최다 우승 기록이다.
[3]
그의 라이벌인
윌트 체임벌린도 두 번밖에 우승을 못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은 받아들였으나 반지 수여는 2019년까지 무려 44년 동안 거부했다. 그가 트위터를 통해 밝힌 이유는 자신보다 일찍 선수로 뛴 같은 흑인 선수들이 있는데 자신이 최초의 흑인 선수로 기려지는 걸 꺼렸기 때문이었다.(
#) 러셀의 반지는 '최초의 흑인 NBA 선수' 척 쿠퍼(1926~1984)가 헌액된 2019년이 되어서야 주인의 손에 끼워질 수 있었다.
[5]
메이저리그에서
재키 로빈슨의 번호인 42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을 때, 그 시점에서 그 번호를 쓰고 있는 쓰고 있던
마리아노 리베라를 비롯한 42번을 쓰던 선수 한정으로 계속 쓸 수 있었던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리베라의 은퇴 후 42번은
뉴욕 양키스에서는 리베라의 영구 결번으로도 분류된다.
[6]
심지어 뉴욕 닉스의 경우 15번으로 영구결번된 선수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다.
[7]
드래프트나 팀 이적 등으로 새 번호를 부여받는 것은 물론, 기존에 달고 있는 번호를 변경하는 것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일이 정해진 양식을 사무국에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과거 조던의 2차 복귀 직후 플레이오프에서 사무국 승인을 거치지 않고 기존의 45번을 23번으로 임의 변경하는 바람에 매 경기마다 벌금을 물어야 했던 건 유명한 일화고, 가까이는 르브론 제임스가 2019-20 시즌을 앞두고 23번을 앤서니 데이비스에 넘기고 자신은 6번으로 바꾸고 싶다고 하다가 2021-22 시즌에 들어서야 승인되었지만, 2023-24 시즌부터 러셀의 존경심을 담아 다시 23번으로 바꾸게 되었다.
[8]
더군더나 리베라가 젊었을 때 42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후 19년 동안 현역 생활을 이어가서 42번의 완전한 영구결번화는 2013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9]
MLB - No. 42.
재키 로빈슨, NHL - No. 99.
웨인 그레츠키
[10]
현재 NFL만 유일하게 전 구단 영구결번이 없는데,
톰 브래디가 달았던 12번이 그나마 유력한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슈퍼볼 7회 우승과 200승이라는 대기록으로 팀보다 위대한 선수의 사례로 언급되기에 웨인 그레츠키와 비슷하게 순수 기록과 업적만으로 영구결번의 가능성이 점쳐지는 중이다.
[11]
MVP 수상 횟수보다 퍼스트 팀 선정 횟수가 적어서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는 당시 MVP 투표제가 선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올NBA 팀은 과거에도 기자들이 투표했다. 비슷한 경우가 1973년의 카림 압둘자바. 퍼스트 팀은 압둘자바가 받았는데 정작 MVP는 세컨드 팀 센터였던 데이브 코웬스가 받았다.
[12]
NBA All-Defensive Team 선정은 1969년부터 시작되었고 러셀은 그 첫 번째 선정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때가 러셀의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다.
[13]
저 당시 프로필에 맨발 신장을 기입했음을 고려한다면 러셀은 시대불문 센터로서 작지 않은 적당한 키이다. 정확히는 206cm와 208cm가 혼용되었으나, 만 40세만 넘어도 키가 약간 줄어들기 시작하는 인체의 특성상 고령인 러셀의 키는 현역 시절보다 줄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어지간한 6-10~6-11인 선수들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지금보다 더 컸던 젊은 시절엔 208cm는 충분히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러셀 시대에는 센터들이 거의 203(초창기)~208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당대 기준으로는 오히려 큰 편이었던 셈.
[14]
일설에 따르면 러셀과 체임벌린의 스탠딩 리치가 비슷했다고도 하며, 둘이 공중에서 리바운드 경합을 벌이는 사진을 보면 실제로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체임벌린이 러셀보다 훨씬 큰 맨발 216cm의 신장에 234cm의 윙스팬을 가졌음을 고려하면 제대로 서서 비교했을 땐 차이가 꽤나 날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해당 사진상으론 스탠딩 리치는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팔 길이만큼은 러셀이 체임벌린에게 꿇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체임벌린의 윙스팬이 더 길긴 해도 어깨너비의 차이가 있으므로, 실제 팔 길이는 둘이 비슷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15]
근데 이건 뭐 체임벌린이라고 다를 건 없다. 체임벌린이 당시 기준으로는 공격 기술이 좋은 편이었다곤 해도 현대의 기준으로는 매우 투박한 축에 들어간다. 애당초 피지컬만으로 씹어먹을 수 있는 리그가 결코 아니니.
[16]
빌 러셀이 팀 내 득점 2위를 한 것은 단 한 시즌뿐이고, 그 외 절반 정도의 시즌에서는 팀 내 득점 4위였다. 그리고 야투 시도 회수와 팀 내 공격 지분을 떠나 등록 선수가 100명 전후인 시대와 300-400명인 시대 사이의 단순 10위권 진입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이미 불공평한 기준이다.
[17]
윌트 체임벌린의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그가 활동하던 당시 어시스트 기준은 굉장히 빡빡해서 패스 → 캐치 앤 슛 으로 바로 이어져야만 인정되었다. 반면 현대 NBA에서는 패스 → 캐치 트리플 스렛 → 드리블 앤 슛으로 연결되어도 기록자 주관에 따라 어시스트로 인정될 정도. 만약 빌 러셀이 현대에 경기를 뛰었다면 어시스트 수치가 더 증가했을 것이다.
[18]
윈셰어는 비율이 아닌 누적 수치, 당연히 커리어가 긴 선수가 높게 나온다.
[19]
2위가 팀 던컨의 106.11.
[20]
역시 이 부문 2위는 팀 던컨의 17.02.
[21]
왜 수비력이 단연 더 앞섰던 러셀이 2위냐면 1. 러셀은 963경기에 불과해 1,045경기를 뛴 체임벌린보다 80경기 이상 덜 뛰었고, 2. 체임벌린은 사기적인 높이와 운동 능력으로 블록 능력에서만큼은 러셀과 최소 대등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블록 능력이 동급이라고 수비력이 동급인 것은 아니다. 러셀은 블록 슛은 전략적으로 이용하는데 능했고 속공의 시발점으로 이용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22]
기사에서 "~개 블록을 했다"라고 언급된 경우. 기록이 상충되는 경우 더 적은 기록을 선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기사에서 7개 블록, 다른 기사에서 9개 블록의 경우 7개 블록이라고 기록하는 식.
[23]
공식적으로 NBA 한 경기 최다 블록 슛은 1973년에 엘모어 스미스가 기록한 17개이고, 1990년 이후 최고는 샤킬 오닐이 1993년에 기록한 15개이다.
[24]
러셀 못지 않은 블라커였던 체임벌린조차 수비력 자체는 러셀보단 못하다는 인식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확고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커리어 내내 수비왕 독주가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체임벌린은 러셀보다 두 살 어리고 데뷔도 늦어서 노화가 늦게 찾아왔기 때문에 러셀의 마지막 시즌인 1968-69 시즌에 와서는 두 선수의 실력이 꽤나 벌어졌고, 이때 체임벌린은 이미 수비와 리바운드 위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꾼 상태였음에도 당시 디펜시브 퍼스트 팀 센터는 러셀이었다. 물론 블록이나 리바운드, 스틸같은 1차 스탯이 수비 관련 평가에서 지금보다 중하게 작용했던 당시 시대상에서 체임벌린은 러셀 이상의 블라커이자 리바운더였고, 한 명만 뽑는 상을 특정 선수가 너무 길게 독점하는 건 아무래도 경계받는 경향이 있다보니, 러셀이 수비왕을 쓸어담는 중간중간 체임벌린이 몇 번 가져가도 이상할 건 없다.
[25]
이쪽은
코비 브라이언트의 81득점이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보다 훨씬 위대한 기록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26]
농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우승이다. 이는 같은 팀 스포츠인 야구와 다른 점인데, 야구는 우승 반지가 없어도 그 선수의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표적 예로, 역대 최고의 투수라 평가받는
월터 존슨은 커리어 내내 우승이 없다가 말년에 겨우 반지 하나 땄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독립적인 타석으로 구성되는 야구와 유기적 플레이로 구성되는 농구의 차이 때문. 야구는 한 명이 팀의 우승을 만드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만, 농구는 어찌 됐건 가능하다. 그렇다 보니 MLB는 우승을 중요시하긴 해도 선수의 평가에서 포스트시즌 성적은 부가적 요소일 뿐이나, NBA에서는 정규 시즌은 연습 게임이고 포스트시즌이 진짜라는 마인드가 있다.
[27]
문서 맨 위의 틀을 보면 된다. 러셀의 동료들이 명전 선수가 8명이라면 윌트 체임벌린은 아예 명전을 넘어 NBA 올타임 50 멤버만 5명과 커리어를 보냈다. 그리고 명전급은 아니더라도 쳇 워커 같은 올스타급 조력자들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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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 제임스의 디시전 쇼와 함께 구성된 마이애미 빅 3,
스테판 커리를 필두로 하여 정규 시즌 73승을 달성한 데다
케빈 듀란트라는 또 하나의 리그 최강급 선수가 후속 합류한 골든스테이트 등 초 슈퍼팀이 나타나는 2010년대를 제외하면, 저 정도 슈퍼팀이 결성되는 건 지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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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Satch Sanders 같은 경우 명예의 전당 멤버이지만 통산 기록이 9.6점 6.3리바운드 1.1어시스트에 불과한 지극히 평범한 선수였고 올스타에도 한 번도 선정이 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감독으로 뛰어난 커리어를 보낸 K.C. 존스도 커리어 7.4점 3.5리바운드 4.3어시스트에 그쳤고 올스타 경력도 없다. 게다가 종종 언급되는 "명전 멤버 8명"은 러셀의 커리어 초반부터 후반까지 뛴 선수들 전부 포함한 수치이다. 러셀의 멤버 중 가장 뛰어났던
밥 쿠지는 63년에 은퇴해 러셀의 커리어 반밖에 함께하지 않았고, 하블리첵이 러셀과 함께 뛸 때는 "떠오르는 스타" 정도 위치였으며, 빌 샤먼은 러셀이 5년차 때 은퇴했다. 러셀과 십 년, 혹은 그 이상 같이 뛴 선수는 새치 샌더스, K.C. 존스, 짐 로스커토프 그리고 샘 존스뿐인데 이 중 단 한 번이라도 올스타에 선정된 선수는 샘 존스 한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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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보스턴은 그때나 지금이나 '빅'마켓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렇다고 작은 마켓은 결코 아니었고, 러셀 Era에서 최고의 농구 명문으로 발돋움하여 전국구적인 인지도와 명성, 기반을 쌓은 덕에 선수 수급에 불리함이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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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보스턴 셀틱스의 첫 우승이 1957년이었고, 이때 러셀은 루키임에도 주전 센터로서 13.3점 22.9리바운드에 기록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블록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레전드 밥 쿠지는 커리어 절반을 뛰면서 한 번도 우승을 못하고 있었고, "명문 보스턴 셀틱스"의 이미지는 사실상 러셀 시대에 다 만든 것이다. 보스턴은 70년 넘는 세월동안 17회 우승했는데, 그 중 11회가 러셀이 뛰던 13년 동안 이뤄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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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프로 스포츠에서 "모든 팀이 같은 조건"이란 상황은 존재할 수가 없다. 지금은 샐러리 캡이 있어 예전과 달리 스몰마켓 팀도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한 저력을 갖출 수 있지만, 현재도 로스앤젤레스 같은 빅마켓은 르브론 제임스 같은 초특급 FA를 덜컥 데려오는가 하면, 앤서니 데이비스 같은 슈퍼스타들이 아득바득 오기 위해 애쓰는 팀이다. 반면 멤피스 그리즐리스 같은 팀들은 좀 못하면 슈퍼스타들이 우수수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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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던의 불스와도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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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영화화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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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명칭 변경이 1년만 더 빨랐어도 보스턴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폴 피어스가 첫 수상자가 될 수 있었으나, 첫 수상자는 코비가 되었고, 그 다음 시즌인 2010-11 시즌은 레이커스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셀틱스를 꺾고 리핏을 성공하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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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그의 라이벌인 윌트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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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땐 카림 압둘자바의 커리어가 진행중이었다는 것과 조던의 등장 전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포인트는 적어도 체임벌린보단 확실히 위로 인정받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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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지금도 스탯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인데다가 주요 무기인 블록 슛이 아예 기록이 되지 않는 시대에 뛰었다. 실제로 러셀의 PER은 가장 높을 때조차 23 정도에 불과해 라이벌 체임벌린은 물론이고 현재의 웬만한 올스타급 수준밖에 안 된다. 러셀이 대단하다는 건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이 뛴 선수들, 그를 상대한 선수들의 증언, 그리고 그의 팀이 13년간 열한 번 우승했고, 그가 심지어 선수 겸 감독으로 2연속 우승을 이뤄냈다는 점 등 모두 "정황증거"들이다.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이것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게 말이 안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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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상은 단지 스탯만 보고 판단해서 댓글을 보면 잘못된 영상이며 빌 러셀을 과도하게 깎아 내린다는 댓글들이 많다.웨스트브룩은 어딨냐는 댓글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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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MVP와 올NBA 팀, 올디펜스 팀 모두 언론인 투표단이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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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가 MVP를 시상하기 시작한 것은 1954-55 시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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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선수들이 단순히 성격 좋은 선수에게 표를 더 줬다면 1959-60 시즌 당시 "선수들의 견제가 심해 은퇴하겠다"라고 징징을 시전했던 루키 윌트 체임벌린이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러셀과 페팃을 제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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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데이비드 로빈슨과
디켐베 무톰보이다. 각각 1965년생, 1966년생인 둘은 비슷하게 1990년대 중반에 전성기였는데, 로빈슨은 1991년, 1992년, 1995년, 1996년 디펜스 퍼스트 팀에 올랐고 무톰보는 1997년, 1998년, 1901년에 뽑혔다. 반면 올해의 수비수 상은 로빈슨이 1992년에 1회, 무톰보는 1995, 1997, 1998, 2001년에 올랐다. 즉 1995년에 무톰보는 올해의 수비수 상을 탔음에도 디펜스 퍼스트 팀에 못 올랐다. 이 원인을 두고 투표단의 차이 (수비왕은 MVP와 마찬가지로 언론인, 디펜스 팀은 감독들이 뽑는다)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둘 다 대단한 수비수들이기 때문에 그만큼 둘의 수비력이 백중세여서 갈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 둘 뿐 아니라 하킴 올라주원까지 센터 포지션에 역대급 수비수 셋이 있었기에 수비왕과 디펜스 팀 경쟁이 정말 박 터졌다. 1994년 수비왕에 오른 하킴은 2위 로빈슨을 단 1표 차이로 제치기도 했는데, 3위 무톰보와도 4표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23표, 22표, 19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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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사례는
MLB의
재키 로빈슨의 42번 영구 결번인데, 둘 다 미국의 각 스포츠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선수일 뿐만 아니라, 인종 차별이라는 미국의 거대한 장벽에 맞서 싸운 선수라는 공통점까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