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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8 13:58:31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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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레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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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Octavius Appius Suetrius Sabinus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출생 미상, 로마 제국 이탈리아 하스토니움
사망 미상
직위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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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제국 세베루스 왕조,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이며 권신이다. 전체 이름이 길어 보통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로 통칭된다.

다섯 황제의 해 동안 벌어진 내전으로 탄생된 세베루스 왕조 실세 의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남 카라칼라의 최측근 무리인 아미쿠스[1] 중 한명이며, 발비누스와 함께 카라칼라의 총애를 받은 인사로 유명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아래에서 로마 귀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 특권을 선사받은 권신이나 카라칼라 사후에는 그 권력을 잃어버린다. 그러다가 세베루스 왕조 붕괴 후,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이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외조카, 양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등극과 제위 등극에 기여한 공로 등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 집권 직후 소년황제와 공동 집정관에 올랐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남동부 도시 히스토니움 출신이다. 아버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역시 원로원 의원이라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원로원 의석을 이어 원로원 의원이 됐다. 그는 서기 193년(혹은 194년), 10인 위원회(decemvirs) 중 민사재판 판결을 담당한 Decemviri Stlitibus Judicandis로 불린 민사재판 담당 10인 위원회 위원 중 한명이 됐다. 이어 서기 201년에는 재무관에 올랐는데, 황실과 황제의 추천으로 후보가 되어 취임했고 같은 해에는 트리부누스 플레비스(호민관) 직위까지 선사받았다. 이어 2년 뒤인 203년과 3년 뒤인 206년에는 법무관에 올라 세베루스 황실의 후원을 받았다. 즉, 원로원 입성 직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부터 세습 원로원 의원 중 실세 중 실세만 누린 코스를 세베루스 황제 후원 아래 모두 누린 것이다.

이는 그가 법무관 임기를 마친 이후에도 계속됐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서기 209년부터 다음해인 210년까지 로마와 이탈리아 내 로마 가도를 관리, 보수하는 관리관(쿠라토르)이 됐고, 이 해에 푸닉 지방 중 권세가들의 자제들이 군복무를 위해 두루 거친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근무하는 장교로 파견됐다. 210년 귀국 직후에는 가족과 법률을 담당하는 고위관료에 임명되어 211년까지 활동했다.

211년 2월 4일, 카라칼라와 게타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망 직후 공동황제가 된 이후부터는 서기 213년까지 카라칼라 휘하 군단장, 야전사령관, 황제 휘하 참모 등을 맡아 카라칼라 측근으로 맹활약했다. 이 당시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카라칼라의 여러 장군 중 게르만 부족을 토벌하고 정복하는 원정대의 실질적인 야전사령관이었다고 한다. 처음 맡은 군단은 22군단 프리미게니아였고, 주 복무지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였는데 서기 213년까지 보인 활약 아래 카라칼라의 최측근으로 입지가 굳어지게 된다.

그래서 서기 213년 12월 직후, 카라칼라 황제의 '아미쿠스(친구)' 중 가장 친밀한 친구가 되어 카라칼라의 비호 아래 권세를 누렸다. 그 시작은 서기 214년 집정관 취임이었는데, 이때 그와 함께 한 인사는 공교롭게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폴리나리스였다. 이 사람은 카라칼라 손에 살해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아들로, 카라칼라의 또 다른 '아미쿠스'인 발비누스의 친척이며, 후일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와는 반대편에서 은연 중 대결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아버지다.

카라칼라는 그 잔혹함, 무자비함, 비열한 성격과 별개로 자기 측근과 친구들에게는 매우 호의적이고 자상했는데,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에게는 존경심까지 표할 정도로 그 사랑이 대단했다. 덕분에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다른 전직 집정관들과 달리, 총독으로 파견됨에도 황제의 결정을 대리 행사하는 재판권까지 하사받았고 로마와 이탈리아 식량 공급을 담당하는 중책까지 선사받았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의 위세는 서기 215년, 216년에도 계속됐는데, 그가 맡은 관직과 임무는 이탈리아와 로마 내 법 질서를 수호하고 도적들을 토벌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는 로마가 건국된 이래, 가장 이례적인 조치였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카라칼라가 세금을 징세하면서 벌어진 로마와 이탈리아 내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목적이 컸다. 따라서 그는 이런 절대적이고 무자비한 권한을 받아 토벌권, 재판권, 수사권까지 손에 쥐는데, 이런 권한에도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이탈리아 공동체와 가족 해체를 막고자 재정 문제 및 징세 불만을 슬기롭게 해결했다.

따라서 그는 카라칼라에게 더 큰 신임을 받아 216년, 217년에 연달아 황제의 명령을 하달하고 명령하는 제국 특사 자격으로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로 파견됐다. 그러다가 217년 4월 8일, 카라칼라가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마르티알리스 손에 여행 중 암살된다. 이때 그는 새황제가 된 마크리누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마크리누스는 그를 소환했다. 그러다가 엘라가발루스가 집권하고 세베루스 왕조가 부활한다.

그렇지만 세베루스 왕조 재건 뒤에도, 그는 특별한 관직을 맡지 못한다. 카라칼라가 기록말살형만 당하지 않았을 뿐 제국 전체 각 계층에 적이 많았던 상황, 그가 카라칼라의 복심과 같았던 점, 원로원 내부 경쟁과 견제 등이 주된 이유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그가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아래에서 같은 처지인 카라칼라의 옛 아미쿠스 동료 발비누스 등과 다르게, 황제와 아우구스타가 임명하는 어떤 명예, 영예도 누리지 못한 것을 보면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고 한다. 아마도,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 모두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던 점이 주된 이유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카라칼라 암살과 율리아 돔나의 죽음 직후부터 소식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서기 225 ~ 230년 사이, 전직집정관 중 원로원 내 제비뽑기 추첨으로 선출되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됐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후 수에트리우스가 예전 같은 고위직을 맡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끝으로 사실상 정계은퇴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235년 세베루스 왕조가 완전히 붕괴되는데,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한 상황에서도 그가 관직에 오르거나 영예를 선사받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238년 6월, 단독황제가 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동료집정관으로 그 이름을 올린다. 이런 까닭에 서구권 로마사 연구자들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가 정계은퇴 대신 완전히 원로원 내부, 황실과의 연줄 경쟁 등에서 밀렸다가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 아니냐고 예측 중이다. 이 예측이 맞다면 수에트리우스가 다시 권력을 누리기 위해, 고르디아누스 가문과 손잡고 어린 소년 황제를 단독황제로 올렸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로리엣과 같은 학자들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통해 원로원이 내세운 푸피에누스, 발비누스를 제거하고, 원로원을 압박해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려주고 단독황제까지 올린 설계자 내지 비호세력 중 주동자로 추측 중인데, 이는 합리적인 근거가 많아 사실로 보인다고 한다.

이렇게 고르디아누스 3세의 동료 집정관이 된 이후,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티메시테우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아직 내각에 이름을 올리거나, 권세를 쥐기 보단 갓 복귀해 기지개를 편 시점인 것을 생각하면 꽤 놀라운 일이다.

이에 대하 여러 학자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그가 고령인 까닭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말한다. 이 예상은 당시 정황, 이 인물의 경력, 기록상 사실 등에 비추어 사실로 보인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라곤, 그가 복점관을 지냈고, 죽을 때까지 황제 보좌 사제였으며, 오늘날의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다는 것 정도다. 헌데 이마저도 그가 고르디아누스 3세 동료집정관 경력 이후 사제활동,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단독황제 등극 후 집정관을 지낸 이후, 동시대 로마 원로원 내 고령 의원들처럼 은퇴 후 저택에서 은거했다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 중이다.

[1] 뜻은 '친구'.